광주 강의(2017. 10. 27) 1강
광주 강의(2017. 10. 27) 44-1
마가복음 10장 46절부터 봅시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야기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이 본문을 잘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주시는 분이다. 아쉬운 것 있냐? 주님 앞에 나와라.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이렇게 본문을 설교하지요.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어요. 이 말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 내 처지를 아뢰면 불쌍히 여겨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적으로 들려질 수가 있어요. 왜냐? 주님은 값없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성경 말씀과 합치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이 예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사랑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과 통합니다. 그런데 주일학교 학생들이 구약의 내용을 잘 배우지 않기 때문에 몰라요. 좋으신 하나님을 구약에서는 ‘엘’이라고 합니다. ‘엘’은 바알 신의 아버지입니다.
‘엘’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믿는 신입니다. 엘, 바알, 아세라 등의 신이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신인지 설명이 없어요. 그냥 ‘바알을 섬겼으니까 너는 저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왜 저주를 받으면서도 바알에 끌리는지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저도 옛날 복음을 몰랐던 시절에 성경을 보면서 이런 부분이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누가 설명을 좀 해주면 좋겠는데 목사도, 교사도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바알은 우상이니까 섬기지 마라.’ 이런 말만 했어요. 목사님이 저에게 이야기하듯이 그 당시 선지자들도 이런 말을 많이 했겠지요.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서면 또 바알을 섬겼어요. 이게 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하고 있는가?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도 보았으면서 왜 자꾸 바알에게 마음이 끌리는가? 그 이유는, 바알은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알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1929년에 시리아에서 우가릿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에 가나안 종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엘, 바알, 아세라가 어떤 신인지, 어떤 방법으로 신을 섬겨야 하는지, 그리고 신의 계율 등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이 내용을 보수 신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고, 진보 신학을 하는 통합, 기장, 감리교 신학교에서는 이 내용을 가르칩니다. 진보 신학자들은 이런 내용으로 학위를 많이 받아요.
이들은 성경은 믿지 않고 고고학을 믿는데, 이런 자들이 신학 교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박살내는 사람만이 신학교 교수가 될 수 있어요. 희한하지요?
우가릿 문서에서 바알을 어떻게 기록해 놓았는지 제가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엘’ 신이 등장하는데, 문지방에 발을 딛고 왕관을 씌고 앉아서 자기 왕을 향해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입니다. 미국에서 수입된 치킨 할아버지 모습, 또는 금복주 소주에 등장하는 노인을 생각하면 됩니다. 인자한 노인의 모습이죠.
그러니까 ‘엘’ 신은, 인간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가장 인자한 어른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엘’은 노인이니까 활동은 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데, 자기 대신 아들을 보내 활동하게 합니다. 이 아들이 ‘바알’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누이동생이며 아내인 ‘아세라’ 혹은 ‘아스다롯’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를 ‘하늘의 왕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구약 성경을 읽고 난 후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이유는 자신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구나.’ 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 섬기는 자를 저주한다면 우상이 문제가 아니고 우상 숭배자가 문제입니다.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상 섬기지 않으면 되겠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미리 선수를 치는 거예요. 이사야에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없어요. 그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인데 우상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질문이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있고 인간이 있어요. 그럼 우상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뻔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왔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때에 뱀의 후손은 인간들 속에 작동을 해서 인간 속에서 우상도 함께 등장합니다. 결국은 인간들이 우상을 만든 거지요.
제 말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패가 있어요. 왜냐? 분명히 조건이 인간들만 있다고 했잖아요. 그 인간에게서 우상이 나온다. 즉 신이 나온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이 우상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신을 섬기면 되니까요. 메소포타미아가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인데, 그곳에서 등장하는 신을 조사해 보니까 1,500 가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1,500 종류의 신은 가족관계입니다. 왜냐? 이 모두가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들 중에는 신을 전담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1,500 가지의 신들을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 이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이 말은, 신이 아무리 많아도 친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 다섯 가지로 분류를 하는데, 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이유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인간들이 신을 만들 때 신의 존재는 후발주자입니다. 인간 존재가 우선입니다. 존재는 있음이죠. 내가 있기에 신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 교회나 가서 설교를 들어보세요. 그 설교의 주제는 ‘신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를 후원해 줍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이 나의 존재를 확고히 하는 후원자로써의 전문직을 행사하란 말이지요. 옛날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 이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가나안 신들이 그리스 신으로 이동해요. 그러면 그리스 신화는 1,500 가지는 아니지만 여기에도 수가 만만치 않습니다. 수백 가지는 됩니다. 이들은 서로 친밀한 정도가 아니고 서로 연애하고 결혼하고 질투하고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 신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독자적이 아니고 가족을 이룬다는 겁니다. 한 곳에 모여야 뇌물 바치고 제사 드릴 대상이 고정이 되잖아요.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면 신들이 알아서 나눠 먹으란 것이지요. 처녀를 바치고, 술과 떡을 바칠 테니까 신들끼리 싸우지 말고 적당히 나눠 먹고, 폭풍이나 전쟁,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럴 때 인간들은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왜 갑니까? 정신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갑니다. 교회 안 가면 불안해요. 인간의 정신은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처음에는 ‘뇌물 드릴 때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발달하게 되면 개인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서 범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이고 철학입니다. 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할까? 이렇게 나오지요.
이 모든 것은 가나안의 바알 종교가 이미 행한 것인데, 그 후손들이 조상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엘’은 어른이고, 모든 실행은 ‘바알’이 합니다. ‘바알’은 특히 폭풍의 신인데,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닙니다. 우가릿 문서에 보면 ‘바알’은 구름을 타고 다닙니다. 엘리야 시대에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기의 신을 불렀잖아요. 백성들은 여기에 기대를 걸었고.
이것은 평소에 이런 신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3년 6개월 비가 내리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지만, 평소에는 그들이 기도를 하면 비가 내렸어요. 그리니까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미 과학자들로 인정받았어요. 문자를 해독했고, 자연의 이치를 어느 정도 파악했고, 또 신에게 기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에게 신임을 받아야 그 종교는 오래 갑니다. 큰 교회가 계속 크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신의 효과를 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예배당을 크게 지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즉 신의 도움으로 교회가 크게 되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면 그 위에 신뢰가 쌓이고 또 쌓이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구약을 보면 알겠지만 여호와는 별로 인기가 없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부터 바알 종교가 인기를 얻었습니다. 왜냐?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잘 사니까. 이스라엘은 철기문화가 아니에요. 철 농기구를 만들려면 블레셋에 가서 그들의 기술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나라가 잘 산다는 것은 제대로 된 신을 신봉하기에 잘 산다고 여겼습니다. 바알은 폭풍의 신인데, 태양, 달, 죽음, 전쟁 이 모든 것을 주관하면서 실효성 있게 비를 내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다른 민족이 바알을 섬기는 이유가 편리하거든요. 시키는 대로 제사하면 되고, 요구하는 대로 드리면 됩니다.
일반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무엇을 하면 복 받겠습니까?’ 이것입니다. 바알 종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고 검정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종교는 우발적입니다. 여호와도 기적은 베풀었지만 이것은 선지자가 희생한 덕분에 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순간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사사들은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사사가 없는 시절에는 바알을 섬기는 겁니다. ‘기드온’이 무슨 뜻입니까? ‘바알과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기드온은 본인이 원해서 사사가 된 것이 아니라 천사가 찾아와서 그를 사사로 세웠습니다. 만약 천사가 안 찾아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알을 섬기든지 뭘 하든지 관심도 없어요.
기드온에게 천사가 찾아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을 섬긴 거예요. 여호와는 없어요. 마치 기독교 나라 영국의 런던 시장이 이슬람 신자인 것처럼. 시장이 파키스탄 출신입니다. 정치만 잘 하면 되지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해서 그가 시장으로 당선된 겁니다.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지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돈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여호와가 나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돈 20억이 내 손에 들어오면 강 같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목사에게 주님의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돈 많은 교인이 교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여, 이제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제 말은 존재한다는 것이 화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싸우는데, 엄밀히 따지면 ‘내가 살아있나, 네가 살아있나?’ 이 싸움입니다. ‘네가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냐?’ 이 다툼이 구약의 내용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음으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사는데 위기를 발생시킵니다. 사사기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안정되고 평안하게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 불안의 요소를 유발시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몰랐어요. 사람들이 힘든 것은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고 문제가 뭔지 몰라서 힘듭니다.
20대 젊은이들은 답을 찾으려고 해요. 취직은 어떻게 하고, 결혼은 누구와 할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찾을 답인 줄 압니다. 왜 취직을 해야 하며, 왜 결혼을 해야 합니까? 취직 못하고 결혼 못하면 본인이 사는데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왜 살아야 하느냐?’고 물어요.
주님은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어요.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지점이 어떤 지점입니까?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존경의 대상이 된 상태입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은 죽기 위해 오셨어요.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이 소리 듣고 사람들은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자기 존재가 우선인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합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은 내가 사는 것이 질문이고, 답은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사는가 이것이 답이다. 그 답이 궁하니까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만들어진 것이 기독교,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를 생각한 적도 없는데 지상의 교회는 이런 모습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싸우는 우상은 없는 거예요. 우상은 그냥 돌멩이고 나뭇조각일 뿐인데, 그 우상의 이미지가 생겨서 인간들이 장인들에게 어떤 형태의 우상을 주문해서 만들게 하지요. 그러면 다양한 우상들이 만들어지겠지요. 그러면 이 신들 사이에는 친밀성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어떤 신이든 존중의 대상이 됩니다. “너는 이 신 믿나, 나는 저 신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유명한 성당이 있어요. 그 성당 때문에 바르셀로나가 밥 먹고 사는데, 그 이름이 ‘성 가족’ 성당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건물입니다.
제가 이 성당의 이름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거룩한 가족’의 성당이 무슨 뜻일까? 결국은 바알 종교와 결부되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이 가족을 소용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신들도 서로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신이 친근한 신이 됩니다. 이것을 ‘아날로그’라고 합니다.
아날로그란 유비인데, 유사성을 틴 비유란 뜻입니다. 아날로그는 서로 지역이 다르고 구조가 다른데 유사성이 있어서 1대 1로 대응되는 요소가 많을 때 아날로그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아날로그대로 만들었다.’ 성경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형상’을 ‘유비’로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통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통하는 것이 의, 거룩, 사랑 이런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웠지요? 공유적 속성(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은 비공유적 속성이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공유적 속성이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한탄하사”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공유적 속성,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것은 비공유적 속성. 이런 식으로 분류합니다. 신학이.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지지 않는 공통점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알셀무스는 ‘존재의 유비’라고 해서 이 주장을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천주교에서는 이런 신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낙태를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왜냐? 생명이니까.
그리고 모든 인간(불교 신자든, 이슬람 신자든)을 형제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하나님의 진노나 저주 이야기를 그의 하지 않습니다. 완악한 인간, 여러 번 기회를 줬는데 계속 완악함을 고집하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지옥을 보내지만, 처음부터 지옥 보내기 위해 태어난다는 로마서 9장의 말씀은 상상도 못하지요.
만약 처음부터 지옥 보내기로 작정이 되었다면 전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도 하나 안 하나 지옥 갈 자는 지옥 가고, 천국 갈 자는 천국 가는데 왜 전도를 하는가?’ 이렇게 나오지요. 이것은 감리교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장로교 신학도 여기에 따라갑니다. 가능하면 지옥, 저주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손님 안 온다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은 저주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지요. 인간은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나는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면 돼요. 즉 인간은 자기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입니다.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 있기에 저주 받는다.’는 말씀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 받을 짓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은 합당하고, 이 저주가 대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설교 시간에 이런 말을 하면 교인들은 그 교회에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그 이유는 우상 숭배가 원인입니다.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인간이 만든 거예요. 인간이 있기에 인간에게서 우상이 나오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했어요.
주님이 이런 조치를 취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우상 섬기는 자이고,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탐심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모든 인간은 탐심을 가지게 되어 있고, 그 탐심의 진원지는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살아야겠다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지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난 알아요.” 내가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있는 것을 계속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것도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지요. 베드로후서 1장 5-7절에 보면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나열에서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존재지요. 본문은 그것이 아닌데 말씀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이 말씀을 봅니다.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강의 초반에 제가 뭐라고 했지요? 소경 바디매오가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하니까 주님이 불쌍히 여겨 앞을 보게 했다는 식으로 나오잖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신다.’는 말은 합당치 않지요. 그리고 인간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것도 인간이 주님께 천국을 넣어달라고 요청하지 않아서 지옥을 가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지옥으로 몰아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가 주일학교 때 이런 식으로 배운 기억이 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우상 숭배자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 존재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갑니다. 우리는 살고자 하는데,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이유는 다 죄 때문입니다. 물론 본인의 죄가 아닌 우리 죄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했다는 말은, “주여, 불쌍히 여겨 살려주세요.”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았던 소경 바디매오는 수정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요약하면, 나의 있음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면 될 것 같은데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럼 우리를 있게 한 분에게 책임을 돌리면 되겠지요? 누가 우리를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죠. 우리 죄를 유발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유도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한 최종 책임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이죠. ‘내가 죄를 짓게 된 것은 하나님 책임도 있잖아요.’ 이렇게 나옵니다. 사단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래서 ‘왜 죄의 책임을 나에게만 묻고 사단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동양 철학에서는 신을 안 믿어요. 공자, 맹자는 신을 안 믿습니다. 윤리, 도덕은 인간이 책임져야 합니다. 신이 결부되면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 철학에서는 신은 없고 자연을 말합니다. 사람이 늙고 아픈 것은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반칙입니다.
자연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연이 저절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답을 몰라서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고, ‘저희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한다(롬1:21).’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하나님을 다 갖고 있어요. 하나님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를 정당화 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법을 준수하는 겁니다. 그럼 법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것은 어떻게 판별하는가? 태양, 달, 폭풍, 죽음, 전쟁을 통해서 내 생존에 유리하게 돌아가면 복을 받은 것이고, 불리하게 돌아가면 벌은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울 종교에요. 이스라엘 주변 모든 나라가 바알 종교를 가지고 있었어요.
인간은 결국 바알 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믿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몸은 바알 종교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타고났어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교제의 대상이 아니지만 바알은 서로 교제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치면 바알은 복을 내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 바알을 섬기는 식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엉터리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폭로됩니다.
‘너희들이 무수한 기름과 무수한 제물을 바쳐도 주님은 안 받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신 거예요. 육신의 할례는 칼로 양피를 잘라내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잘라내지요?
마음을 잘라내는 것은 자아를 도려내는 것인데, 자아는 신체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나무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했지요. 예전에는 아담, 하와가 한 마음이었는데, 이제 독자적인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을 스스로 지키고 변호하고 변명할 때 그 안에 이미 자아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주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디매오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본래의 사명과 관련되어 이 병을 낫게 해 준 거예요.
10분 쉽시다.
(2017. 11. 11. 17:53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