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13절(친구)171107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15장 13절(친구)17110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 강조한 것은 환경입니다. 이 세상 환경에서 다 물 다 들었어요. 환경이 어떤 환경이라고 했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은 누구 중심으로? 나 살고자 하는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 살고자 하는 중심으로.
나 살고자 하는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것은 뭐를 놓치냐 하면은 처음부터 인간은 죽기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애써 부정하는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주께서 만든 이유가 뭐냐하면은 이 세상을 만드신 그 분,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죽으셔야 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모델이 우리의 모델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모델이고, 우리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피조물로서 만들어 진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하면 안되지요.
주님은 어떻게 됬던가요? 주님은 어떻게 되었던가요? 그분의 그 코스가 그분과 친구 관계 성립되어 있으면 그대로 우리는 답습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친구니까. 자, 친구와 친구사이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14절에 친구와 친구사이에는 12절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이 연결되어 있지요. 그 계명이 무슨 계명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죠. 말로만? 입으로만? 아닙니다. 죽는거예요. 서로를 위해서 죽는겁니다.
서로를 위해서 죽는 그 죽음이 그 죽음을 두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가지고 사랑이죠. 그러면 안 죽고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안죽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러면 사랑을 할려면 상대가 있어야 되거든. 상대가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죽어야할 상대가.
집에 강아지보고 죽을까요? 누구보고 죽어야 됩니까? 주님께서 지정해 줬어요. 나를 위해서 죽어야된다. 친구를 위해서 죽어야 되요. 친구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리를 해야됩니다. 세상 친구를 정리를 해야 되요.
세상 친구는 내 이익 때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친구는 정리해야되요. 그게 있으면 쓸데 없이 진짜 친구 되신 주님위해 죽는 것에 지장이 되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럼 예수님이 어디 계신데요? 예수님이 안보이는데요.
주님께서 저기 있으면 주님 저 달려갑니다 하고 달려가다가 떨어져 죽으면 주를 위해서 죽은게 되는데,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어떤 뭐 이렇게 환경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환경은 우리가 만드는게 아니고, 주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제공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바로 사도바울이 마지막에 이 세상 끝에 우리를 죽을 자로 주께서 데리고 다니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도바울의 엄살이예요. 엄살인데 엄살 맞습니다. 죽는다 해도 보면 숨쉬고 있고 분명히 우리가 말하는 숨 끊어지는 것은 아닌데, 엄살 일수가 없는 이유가 사도가 자기 주어진 환경을 성경에 의해서 하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해석을 새롭게 해석해버려요.
주변에 있는 이런 커피나 이 모든 것을 나를 죽게하는 하나의 사약으로 세상이 주었던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죽으라고 제공된 조건들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하면 내가 사는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죽는것도 아니고, 주를 위해서 죽기 위해서 교회 취직도 하게 하고 결혼도 하게 하고 죽기 위해서 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될려면 그 전에는 뭐냐?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나쁜 환경을 거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이라는 말을 하는데, 두 번째 시간에는 계명에 대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계명이 있고 그 다음 우리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줄곧 계명을 주셨어요. 율법을 주셨다 이말이죠. 말씀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단독으로 있다고 생각했지 우리 환경이 나쁜 환경이 나를 나쁘게 물들었다고 생각 추호도 못하고, 괜찮은 내가 건전한 내가 경건할 가능성이 있는 내가 하나님이 예수님이 계명을 주셨으니까 우리는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산상설교 같은 것이죠. 산상설교. 그런데 산상설교를 이렇게 보시게 되면 도저히 우리가 지킬수 있는게 아니예요. 오른 손이 범죄하거든 어떻게 하라? 찍어버리라. 손목 날라가고 요것만 남았으면 이것도 찍어 버려야해요. 다 찍어버려야해요.
너무 오래 걸리면 도마에다 다 짤라야 되요. 우리 몸을 산산조각 다 잘라야되요. 그래도 영 성에 안 차. 왜냐면 우리는 환경이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 강의에 이것 놓치면 안됩니다. 환경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물드는 거예요. 환경에 의해서. 어떻게? 내 중심으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으라고 쫓아 냈는데, 쫓아나온 뒤 우리가 토지된 땅에서 살려고 덤벼드니까 어떻게 하면 살수 있습니까? 말을 반대로 하는 거예요. 여러분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이 어디 있어요? 가인은 제사드리고 살았고, 아벨은 제사 드리고 죽었지요. 그렇잖아요.
제 삼자로 봐서는 누가 승자 같아요? 가인이 승자이지요. 가인의 자손들은 번창했고 아벨은 끝났어요. 자기 대에서 끝나버렸어요. 셋이라는 다른 사람이 있긴 있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자기의 직접 관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뭘 알아야되냐하면 이걸 알아야 되요.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의 계명이 뭐냐? 사랑의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 뭐냐하면 기존의 계명의 완성이 사랑이거든요. 그런데 기존의 계명은 뭐냐하면은 나를 살리고자 하는 계명이 기존의 계명이라면 이 사랑은 어떤 계명이냐 하면은 죽어도 상관없어요예요. 죽어도 상관없어. 죽어도 괜찮아를 유도하는 것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죽어도 괜찮아.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계속 말씀드리는 마지막 계명, 최종 계명은 오직 하나의 계명 사랑 계명은 자꾸 너희들이 형제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죽으라는 겁니다.
요한 일서 3장 16절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 여러분 설교 기억한 사람은 기억날거예요. 요한일서 3정 16절에 보게되면은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멘.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제가 풀이하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서 새로운 환경을 조성했으니. 왜냐? 인간은 본인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환경이 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그 환경을 조성한게 뭐냐? 죽어도 괜찮다는 환경을 조성한거예요.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그 다음에 뭡니까? 그 환경입장에서 환경에 휩싸였으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위에 나온 말로 하면 마땅하니라 되어있어요.
마땅하니라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그런 환경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이 다만 하나의 모범으로 보여줬다면 우리는 주춤주춤합니다. 주님께서 너를 위해서 죽었다 이렇게 하면 시범조로 보여줬다면 우리는 그냥 주춤주춤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너도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주님 뛰어내린것에 박수는 칠수 있는데, 그 다음에 너 차례 너 나와 하면 우리는 아무리 주님이 뛰어내려도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이니까 뛰어 내렸지 우리는 못하는데 이렇게 되지요.
그 말씀이 아니고 이미 니가 나를 알기 전부터 세상 나쁜환경이 니가 나쁜환경을 골라서 나쁜 환경이 물들었기 때문에 나빠진게 아니고, 이거는 나쁜환경이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냥 밀어부친거죠.
스폰지에 물들 때 스폰지가 강력하게 반대합니까? 스폰지를 물에 넣는 순간 스폰지 구멍구멍 사이에 다 뭐가 다 들어갑니까? 환경을 조성하는 물이 다 들어가듯이 세상이 악한 것은 그 악한것이 우리는 그냥 보자마자 다 흡수가 다 되잖아요. 흡수가.
여자분들 백화점에 가가지고 안대하고 백화점 갑니까? 안대하고 소경 지팡이 들고 이렇게 백화점 일층부터 10층 다 돌아다닙니까? 눈 부릅뜨고 다니지요 눈 부릅뜨고. 신상 나왔는가? 예? 새로운 상품 나왔는가 보잖아요. 보는 즉시 어떻게 됩니까? 쫙쫙 당기지요.
‘아휴 저거는 1년치 저거는 6개월치.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야. 내가 저 옷도 하나 못하는 팔자가 됬나.’ 괜히 옷 있는데 자기 남편 욕하고 저 옷도 못입는 신세타령하고 이렇게 하잖아요.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남자들도 어디가냐 하면은 벤츠차량 외제차 전시장에 가면 남자들 이제 눈 돌아 갑니다. 나의 애마 이러면서 아이고 새로운 만지면 안되 또. 번쩍 번쩍하는데 기념 사진 찍고, 트렁크인가 그 프로 보면 차를 고쳐가지고 경매 붙여가지고 프로가 있어요. 거기보면 대부분 남자들이예요.
남자들이 괴물같아요. 전부 다 손 들고 오천만원, 오천오백 막 손 막 들거든요. 자동차가 로망이예요 로망. 그러니까 좋은게 있으면 쫙쫙 빨려온다고요. 좋은게 있으면. 이걸 누가 말립니까? 그만큼 우리가 환경와 우리가 그만큼 한통속으로 친화적인 관계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으라고 계명을 준거예요. 이 계명을 지키라고 이 죄악된 세상에다가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집어 넣어버리면 오른손이 범죄하면 어떻게 하라? 찍어버리라. 이 말은 뭡니까?
나는 너희가 어떤 인간인지를 나는 묻지 않겠다. 내가 묻는 것은 절대로 세상죄를 묻어서는 이 천국에 오지 못한다는 그 분명한 그 사실을 나는 분명히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오른손이 범죄하면 찍어버리란 말은 이게 이미 물든거예요. 잉크 물에 손 언지면 스폰지 오듯이 우리는 온 몸을 이 죄악속에 푹 잠기고 있는겁니다. 예수님이 입수한 그 세상에. 모든게 잠겨 있기 때문에 심지어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 어기면 다 어긴거예요.
부자 청년이 그렇게 십계명 잘 지켰지만 주께서 새로운 계명하나 더 추가 해버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oh, no.’ 해가지고 다시 세상 가잖아요. 그정도로 우리는 이 세상과 나를 분리시킬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계명을 주신 이유는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세상에 물든 너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겁니다. 못 빠져 나와요.
전도사님이 교회를 이렇게 있는데 그 어떤 장로 복음은 하나도 모르는 장로가 건방진 장로가 있는데, 그 장로가 목사님 밀어내고 전도사님 당회장 하시기 바랍니다. 월급은 600만원 드리겠습니다. 차는 뭐 외제차 랜드로바 하나 바꿔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전까지 속으로 ‘이 뭐 교회도 아니고 저리가.’ 하다가 갑자기 ‘오!! 나를 알아주네. 나를 알아주네. 있어야지. 이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 이 교회 키우겠습니다.’ 뭐 이렇게 한단말이죠.
제가 얼마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느 부산에 있는 초량에 있는 어느 교회인데 목사가 와가지고 구호를 외치는 거예요. 뭐냐하면 ‘목사는 위대한 종이다. 목사는 찬양하라.’ 뭐 이렇게. 그거하고 ‘모든 성도는 십일조를 하자.’ 예배시간마다 그걸 선창하고 그걸 따라하게 하는 겁니다. repeat after me 해가지고
목사를 섬기자. 목사를 섬기자. 십일조를 하자. 십일조를 하자. 세 번째가 뭐냐? 700명을 채우자. 700명을 채우자. 그거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를 초빙할 때 투표를 누가 했겠어요? 그 교인들이 한거예요. 그 교인들이 한거예요.
그런데 그런 목사에 대해서 만약에 지금 반대하는 교인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반대투표 하게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쫓겨나겠어요? 안 쫓겨나겠어요? 안 쫓겨나가죠. 왜? ‘목사를 건드리는 것은 주께서 하나님이 직접 건드려야지 우리 미천한 교인이 건드리면 안되잖아.’ 라는 것을 그것을 전임자부터 이미 쫙쫙 빨려들어서 한거예요.
그러면 그게 진리라서 그 말을 믿습니까? 아니면 내것 다치면 안된다고 해서 건들지 않는거예요? 목사가 됬든 교인이 됬든 제일 중요한 것은 뭡니까? 자기 자신이 살고자 하는것에 지장이 되기 때문에 ‘아이고 내가 뭘하노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목사 개판되든 벌써 돈다 써먹고 있어요. 모아논 헌금 다 날리고 있어요. 그 교회를 욕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제가 지난 낮설교에 했잖아요. 그 복음 모르는 교회가 복음에 반대편에 있는게 아니고, 복음 아는 내가 복음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되요.
내가 복음에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내가. 어느 교회있고 뭐 저 우리교회 뭐 그런 소리 하지말고 현재 복음 안다는 내가 매일같이 주님의 복음에 반대편에 있는거예요. 왜? 복음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으로 살겠다는 것은 이제부터 슬슬 어렵게 되는데 걱정입니다만은 해봅시다. 주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내가 어떻다가 아닙니다. 내가 속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를 드러내요. 내가 속한 이 세상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기존의 내가 속한 그 당시에 속한 바리새인 세계아닙니까? 바리새인 사두개인 세계아닙니까? 그 세계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합체 된다면 예수님은 죽었게요? 안 죽었게요? 안죽었지요.
그러면 예수님 죽었던 이유는 뭡니까? 지금 그 당시에 제자들에 속해있고 바리새인에 속해있던 이 계명과 이 생각하는 율법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모세율법이 이게 같아요? 달라요? 완전히 다르겠지요. 완전히 다르겠지요. 잘들으세요. 다르지요.
다르니까 바리새인이 주동되어가지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였지요. 제말 거짓말 아니죠?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인 이것이 뭐가 되냐하면 이것이 새계명이 되는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코스를 밟아야되요. 이 코스를.
코스를 밟는 방법이 뭐냐하면은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뭐냐? 예수님을 사랑해야되요? 미워해야되요? 미워해야되요. 미워해야되요. 미워! 미워! 미워! 그런데 미워할 때 주께서 그냥 미워하라는 법은 없어요. 왜? 우리는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 주님을 늘 사랑해요. 절대로 안 미워해요.
그런데 내 뜻대로 세상이 안되게 만들어요. 내 뜻대로 나 하는 일 뜻대로 안되게 되있어요. 내 아내가 예수 복음 받아 들이는데 미워해요. 내 성질. 내가 성질나. 세상 모든일이 어쩌면 그렇게 내 뜻대로 안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이야기 했거든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화요일날 대구 공부하면서 내 뜻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주체가 아니고 자아라고 했죠. 자아에서 뭐로 바뀐다? 주체로 바뀌고 자아는 존재고 주체는 사건이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지요. 바빠서 살기 바빠서 안들었겠지만.
지금 우리를 구원하는게 내가 나를 구원하는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나에게 미운털 박힌거예요. 왜 내가 하고자 하는 내 구원을 주님이 왜 방해하냐 이 말이죠.
나는 이제 구원되고자 애쓰는데 주께서는 도와 주기는커녕 왜 그걸 막느냐? 이유가 뭐냐하면은 이 예수님 가는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에 접어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래가지고는 잘 이해안되지요. 그러면 더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결정적 예인데, 집에서 남자들은 보통 늘 하던 빨래나 밥은 부인이 하지만, 남자들이 해야될 일이 있어요. 형광등 가는 것, 그리고 특별히 또 뭐 만지는 것, 여자들은 기계 기술이 없어서 그 중에 하나가 창틀 문이나 창문 틀이나 베란다있으면 큰 긴 문 있잖아요. 문짝을 청소한다고 바꾸고 뺄 때, 그 빼는 일 그 때는 힘쎈 남자가 해야되요.
문틀이 이렇게 있으면 문틀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문틀 앞에 서 있으면 문틀아 빠져라 빠져라 하면 안 빠져요. 참깨야 열려라 하면 안 열리듯이. 문틀아 빠져라 하면 안빠지거든요.
왜그러냐하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하면은 여기에 홈이 파져있고 홈이 하나의 궤도처럼 되어 있어가지고 문틀을 뺄 때나 넣을때는 반드시 이 궤도 밖을 튀어 나와야 문이 빠지고 문틀을 넣을때도 궤도에 맞춰야 이게 앞뒤로 자유롭게 되잖아요.
지금 우리는 뭐냐하면 제3의 영역, 제3의 위치에 서 가지고 구원받을려고 있는거예요. 주께서 만든 궤도에 들어갈 생각은 안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께서 만든 궤도가 뭐냐하면은 나는 세상으로부터 밉상 받아서 죽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바로 뭐냐하면 친구를 위해서 죽는 죽음이였다 라고 궤도를 만들어 놨어요.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제3의 지역에서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렇게 하는것은요 창틀아 열려라와 똑같은 거예요. 참깨야 열려라.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주께서는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유대인이 갖고 있던 환경이나 지금 우리 이 세상이나 다 유황불 맞아야 마땅한 똑같은 어두운 세계이기 때문에 똑같은 사고 방식이 뭐냐하면은 세상의 하늘과 별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의? 나 잘되기 나 살기 위한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거 없었으면 이거 아니면 변검사 창문밖으로 뛰어내릴 이유가 없잖아요. 그 사람이 혹시 교회다녔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교회 안다녔겠지 교회다녀도 마찬가지겠지만. 교회 다니는 장로도 관악산에서 나무에 비자금 때문에 자살, 장로도 자살해요.
장로라고 믿음이 장로라고 믿음이 있으면 애초부터 장로가 안되겠지요. 교회에서 장로를 안시켜주지요. 믿음있는데 왜 시켜줍니까. 돈을 빼내는 돈은 안주고 난 예수만 믿겠다하는데 장로를 시킬수가 있겠어요? 안되지.
우리는 자꾸 나 구원받겠다. 죽어서 천당 가겠다하니까 이 궤도 속에 생각 안하고 이 궤도가 뭐냐 예수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입수해가지고 어떠한 수모를 당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주고 받고 하는 가운데서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배후에 악마가 있으며 그 악마에게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다 노출되잖아요.
일부러 노출시키라고 예수님께서 멘트를 그렇게 날린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말을 왜 그런 멘트를 날립니까? 결국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다 가라 이말이죠. 진짜 다 갔잖아요.
가고 난 뒤에 보니까 12제자 남아 있거든요. ‘너는 왜 안가냐?’ 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뒤에 무슨 말이 있죠? 없다죠 없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선교나 전도는 애초에 성립될수 없다가 되는거예요.
인간이 되어서 죽어서 천국가고싶은 사람 모든 인간은 다 그런 소망을 갖고 있는데, 그런 소망자체가 어디서 온 겁니까? 사단에서 온거예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부터 그건 하나님께서 큰 실수 했다는 겁니다.
인간을 추방시키지 말아야했지. 그 선악과 하나 심으면 되지 그거 하나 따먹었다고 그렇게 닦달내는가 이렇게 되는거예요.
개인적 구원에서 봐서는 선악과 따먹었다고 그게 뭐가 대수냐 하겠지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피조물들은 피조물들이 해야될 일은 개인이 어떻게 행복하냐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앞에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조가 됬느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겁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강의 시간에 벌써 두 번이나 이야기 했는데 세 번째 이야기 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천사가 날개 6개있지요. 2개는 발을 가리고 2개는 몸을 가렸다 이말이죠. 이것을 뭐라고 설명했던가요?
모든 피조물들은 자기 수치됨을 자기 존재됨을 가리지 않으면 세 번째 날개가지고 뭡니까? 영광을 돌리죠. 자기를 가려야 영광이 되고 자기를 안가리면 영광이 안되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뭐 가릴게 있어야지요. 파닥거릴게 없는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다.’ 완전히 그대로 벌거벗게 노출된거예요. 자기만 그런게 아니고 이 백성 전부가 다 망한겁니다. 주님께서는 딴 것은 안 입혀주고 입술만 거기에다가 추가적으로 이미 죄 용서 했다는 제단에서 나온 숯불 가지고 찍어서 입만 살아서 이사야가 할 것은 이제 입만 살은거예요.
아랫도리 잡아죽이던 창에 찔려죽이든 관계없어요. 입만 죽을 때 까지 입만 살은 거예요. 입만 살았어요. ‘제가 가겠나이다.’ 이사야 죽으면 물에 입만 둥둥 뜨는거예요. 이 악한 세계에서 이사야는 계속 말씀만 하나님 언약만 외치는 겁니다.
그 이사야의 모습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그 예수님의 모습이 여기에 하나의 창틀에 홈을 파서 궤도를 구성해요. 그럼 주님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제3의 자리에서 ‘하나님 저 예수 사랑할께요! 저 예수 믿습니다!’ ‘이리와!’ 해가지고 아예 궤도 속에 집어넣어버리면 그 바리새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내가 바리새인인고 서기관이고 사두개인이란 사실을 그걸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느끼게 만들어요. 인간이 살기 위해서 무슨 짓도 다 합니다. 주께서 계명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결산 장부가 있어요.
장부가 마음속에 장부가 있어가지고 ‘오늘은 착한 것 7개, 나쁜거 한거 3개, 어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자기가 자기한데 막 잘했어. ‘오늘 어떤 유혹이 와도 이겼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그런 짓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잘했다고 하면 좀 미친사람되겠지만 교회가니까 목사가 잘했다고 하네. 온 교인들이 전부 다 서로서로 칭찬하기 바빠요.
칭찬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그런 뜻이라고 막 우겨가면서 서로 칭찬해주고 뭐 로마서 갖다 대면서 서로 위하라고 하니까 여기가 친목단체인지 교회인지 구분을 못해요. 전부 다 서로 사랑한다고 바빠. 서로 사랑하기.
주님은 사랑 하나도 안하고 서로 사랑하기 바쁜데 그 짓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들이 원수였으나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는 그들이 뭐가 됬습니까? 친구! 친구아닙니까. ‘우리 친구아이가.’ 이렇게 되버리는 자기들끼리 친구가 되버리는거예요. 12제자들은 도망 다 가버리고.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은 사탄의 생각이고, 그리고 그 사탄의 생각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수가 없고, 이것은 주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궤도위에 올려놓는 작업이 필요한거예요.
그러면 궤도에 올려놓을려면 궤도가 완성되야되요? 미완성되야되요? 완성이 되어야 올려놔요. 실컷 완성됬다하니까 공사중 그러면 안되잖아요. 그 인디아나존스 영화보면 나오잖아요. 그 탄광촌에 궤도가 있는데 신나게 이제 인디아나존스 그 주인공이 달립니다.
달리다 보니까 끊어졌어. 관객들은 이제 탈출 성공했다 했는데 탈출 성공 못했어요. 중간에 막 끊어져가지고 나중에 튀어나오는데 절벽으로 튀어나와가지고 아 그때 볼 때 아슬아슬 했어요.
교회가서 목사 시키는데로 했는데 궤도에서 끊어져 버렸어요. 제자 훈련 10단계 다 했는데 그 다음부터 지옥이다. 기가 막히지. 이 궤도가 뭐냐하면은 너 잘났다 궤도가 아니라 예수를 죽인자가 누구다? 내가 예수를 죽인자와 한통속이다라는 것을 갈수록 느끼는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고 느낄 때 그 궤도에 뭐가 있느냐 바로 십자가 있는거예요. 십자가.
다시 말해서 우리보고 주께서 이루신 그 계명, 주께서 홀로 이룬 계명에 합류케 해서 모든 계명을 다 이룬 뭐로 간주해줬어요?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은 누가 이루게 하십니까? 누가 합니까? 우리가 이루게 하십니까? 누가 이루게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궤도로 완성되게 누가 찾아오신 분이 있어요. 완성되었다 해서 프랜카드 ‘축! 구원 완성’ 프랜카드 들고 성령님이 찾아옵니다. 성령이 찾아와가지고 구원완성의 그 도장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다가 도장을 팍! 찍는데 성경은 그 도장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도장을 도장이라고 해요.
‘인’ 성령의 도장을 팍 찍어버리면 그것은 수시합격이 되는 겁니다. 수시합격. 수시합격의 뜻이 뭐냐하면 시험안치고 실습으로 합격되는거예요. 실습 실기로. 하여튼 공부 못하는 것들은 수시 되야되요. 시험치면 안되요. 불리해. 실기로서 합격시키는 것.
도장을 찍어 놓으니까 이 도장 찍은 동시에 뭐가 완성되었습니까?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친 사랑이 완료가 되어 버렸어요. 완성이 되었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 완성이 되었으니까 이 궤도 틀에 홈틀에 이제 올라왔습니다.
서서히 이 문틀을 주께서 밀겠지요. 밀면 전에는 멀리 보이던 그 십자가가 점점 문틀 가까이 가게 되면 뭐가 크게 보입니까? 십자가가 크게 보이겠죠.
십자가가 크게 보이면 동시에 크게 보인다는 말은 나는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는 것이 크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십자가가 크게 느껴지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해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아 사랑이라는 것이 이게 바로 사랑이군요. 천하 죄인을 죄인을 이렇게 아무 댓가 없이 예수님의 자기 피로서 생명으로서 이렇게 건져주신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에베소서 3장 한번 봅시다. 사도바울이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한번 보세요. 3장 17절 사도바울이 기도한 것을 우리가 약간 컨닝합시다. 사도바울 지는 무슨 기도 잘한다고 할 때 에베소서 3장 사도바울의 기도라 합니다. 꿇어 내가 무릎을 꿇고 비노니, 무릎꿇고 비는 기도 내용 누가 다른분이 한번 크게 읽어보시렵니까.
3정 17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 이것을 간단하게 하면 ‘주여 저들이 풍선이 되게 하옵소서.’ 빈 풍선이 되게 하옵시고 그 풍선속에 누가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들어가게 해가지고 그 다음에는 뭡니까? 그 풍선에 들어간 바람을 휘이~휘~ 계속 불으시는 거예요.
불면 뭐가 커지겠습니까? 넓이가 넓어지고 길이가 길어지고 높이가 높아지고 깊이가 깊어지겠죠. 그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존재 어떤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더욱더 알아지겠죠.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성령의 죽으심과 우리 앞에 등장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복음이거든요. 왜 죽었는 지를. 전에는 희미한데 아 죽지아니하면 살과 피가 없었으면 나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늘 이렇게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작업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하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환경, 그 환경을 누구 손에 이미 넘어갔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환경으로 이미 넘어간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어떤 면을 드러냅니까?
우리가 죄 됨을 드러내겠죠. 그러면 우리의 죄가 뭐냐하면 내 힘으로 내가 나한테 내가 관리해서 내 힘으로 바르게 살아서 경건하게 살아서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비축해놓으 나의 잘남과 의로움과 이것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는 예수님을 죽였던 그 바리새인의 환경있잖아요. 그 환경을 우리는 답습하고 답습하겠지요.
왜?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는 같은 육이니까. 제가 지난 그 낮에 낮 설교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마귀가 결정타를 먹이는 마지막 우리의 발목을 잡는 마귀의 결정적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이 땅에 살면서 절대로 남한테 수치스럽게 살아선 안된다.’ 그게 우리의 빠져나갈려고 하면 기어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그 무기예요. ‘너 그러다 우사당한다. 웃음거리 되는거야.’ 그래서 제가 그런말을 했잖아요.
여러분 평소에 어떻게 뭐 때문에 살아갑니까? 어떤 뭐 때문에 행동하십니까? 그 행동하는 것 연관해보니까 다 무엇과 연관되어 있어요? ‘나는 절대로 남들 평가에 수치스럽지 않도록 해야지.’ 이게 모든 매사에 우리 생각과 행동과 의지와 결심에 속속들이 다 들어 있어요.
‘이정도하면 나도 뭔가 세상에 나갈만하지.’ 그걸 계속 견제하는 거예요. ‘이러면 남한테 웃음거리 안되지.’ 그걸 견제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굴 구원합니까? 세리와 창기,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서 더 이상 웃음거리 될 것도 없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 살인 강도 그런 사람들을 저주 받아서 피 흘리고 있는 혈루병 여인들, 그런 사람들 또 기생 라합 그런 사람들을 굴비 꿰듯이 보란 듯이 굴비 꿰가지고 쫙 보이잖아요.
‘봐라! 이들이 구원받았다.’ 그럼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우우~~~~~놀리겠죠. 문둥병자, 소경된자, 날 때부터 소경된자. 누구 때문에 저주 받았습니까?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 굴비 꿰듯이 딱 올려버리면 심지어 간음하다 현장 잡힌 여인들. 올려버리면 다른 사람들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은 오늘 제목 이걸로 할까요? 우~~~우~~우~~ 막 놀리는 거예요. 상대방 타자가 칠려고 하면 이쪽에서 우우~~ 상대방이 자유투 넣을라고 하면은 우우~~~막 놀리듯이 우~~~놀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놀리는 그 놀림속에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그런 나를 비웃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못되처먹은 거예요. 우리자신이. 그 정도로 우리 자신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항상 잊어버리고 남들 평가에 신경 더 쓰고 ‘적어도 목사 내가 이 정도는 되야되.’ 자꾸 이 정도는 되야되 이것을 놓을 생각을 안해요. 참 못되처먹었어요.
이 말은 뭐냐. 옛날에 유대인들이 이방인 무시했잖아요. 그런데 백부장 구원하잖아요. 이방인 무시하니까 백부장 구원하지요. 이방인 무시하니까 사마리아여인 구원하지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얼마나 우리가 그동안 속아왔다.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내가 남보다 더 못되서 아니라 한 통속으로 통이 돌아가면 그 오크통 술통 돌아가면 같이 돌아가잖아요. 우리는 이미 이 세상과 더불어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이고 검사님 영감님 영감님 얼마나 나이 어린게 영감 소리 들으면서 살았겠습니까? 검사될려면요 공부 잘해야되요. 요새는 점점 비율이 8%인가 10%아니면 검사 판사 끼지도 못해요. 사법연수에서. 그야말로 천재중에 천재입니다. 우병우처럼 소년천재.
천재니까 그 고향 사람들 일가친척들 얼마나 가문의 영광이겠습니까? 뭐 나라살리기 위해서 뛰어내리는게 아니고 그것도 화장실에서 떨어져가지고 완전히 그 시체가 얼마나 몰골이 끔찍했겠어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본인이 그렇게 성질드러워서? 아닙니다. 누가 만들었어요? 뭐 JTBC가? 예? 그놈의 조선케이블이 그렇게 만든거예요? YTN이 만들었어요? MBC가 만들었어요? 세상이 그렇다 해도 왜 그런 세상을 왜 의식합니까?
제가 끝으로 묻고 싶은거예요. 세상이 그렇다 해도 좋은데 왜 우리는 그 세상의 평가를 왜 들어야하느냐.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도 했고 지난 수요일에도 이야기 했잖아요. 믿음이 있다는 말은 뭘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평가를 개무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있는게 아니예요. 수요일날 야곱이 뭘 봤습니까? 사다리를 봤다고 했지요. 그 순간 야곱은 세상의 모든 잘났다 하는 것은 완전히 이건 인간도 아니다. 시끄럽다 나는 본게 있다는 거예요. 사다리를.
주님의 그 하신 것을 이렇게 정말 은혜를 받아버리면 이제는 그동안 내가 살았던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이건 문젯거리가 안되고 주님이 나한테 뭘 해주었는가를 생각해야되요. 이게 뭐냐하면 문틀에 있는 이 궤도예요. 궤도. 홈파인 궤도 있죠?
여기 올라가서 이렇게 주께서 십자가 보이는 쪽으로 밉니다. 밀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점점 더더 많아지겠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든지 부활에 참여하기위해서 어디로 달려간다? 부활에 참여하기위해서 어디로 달려간다?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자, 십자가 얘기 다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어디서 버림받고 어디서 버림받았다고요? 세상에서 버림받고 또 누구한테 버림받고?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버림받고 버림받고. 왜냐하면 예수님도 이 세상에 입수했기 때문에. 오늘 제목입니다. 입수. 죄의 입수.
예수님이 죄에 입수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수님은 이미 죄인의 한 사람이예요. 죄된 육신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게 주의 뜻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버림을 안 받을려고 해요. 세끼 다 챙겨야되고 뭐 먹을래? 짬뽕 나는 짜장면. 탕수육 대자하나 시켜서 우리가 뭐 잘났다고 더 살아야되고 월급 올려 달라고 촛불하고 대모하고 비정규직 되면 어떻고 정규직 되면 어떻습니까?
내가 대통령되면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다 만들어 버릴텐데. 어떤 사람은 정규직 되고 어떤 사람은 비정규직 되니까 이게 불편한데 아예 처음부터 다 비정규직 만들어가지고 각자를 전부 다 개인의 경영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다 경영자, 경영자들만 만들어요. 경영자들. 내 노동력 제시하는 나의 경영자. 집사님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괜찮지요? 계약직으로 만들어야지요. 정규직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 정규직은 일본식 경영방법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정리해 봅시다. 현재 우리의 입장이 뭐냐하면 이미 마귀 이후예요. 이미 마귀가 우리의 육신을 잡고 있는 이상은 우리 자신을 알아야됩니다. 나는 어떻다? 나는 무조건 내 중심으로 내가 사는게 최고다! 그걸 분명히 수긍해야되고 동의 해야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삶이 최고 아닙니까? 예? 남 사는게 최고입니까? 내 사는게 최고이고 그리고 세상의 해와 달 별 심지어 놀러갈 때 비오면 안되요. 왜? 내가 놀러가는데 내가 골프 치러가는데 왜 비와! 무조건 비 멈춰야 되요.
내가 천자야. 내가 천자. 내가 황제예요 황제. 요즘 우리집에 황제가 등장했습니다. 뭐 할아버지 이제 공부도 못해. 컴퓨터로 공부할려면은 손주가 와가지고 이 자리 자리도 지정해줘요. 이 자리 앉아야되고, 밥 먹을려고 하면 숟가락 뺏어가지고 밥을 자기가 먹여주겠데. 다 쏟아버리고.
진짜 설교 말씀처럼 예수그리스도 중심이 됬다가 완전히 외손주 중심, 우리 가족이 외손주 중심으로 다 돌아가요.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예요. 자기 마음대로. 아마 그 모습을 보고 우리도 옛날에 그랬다가 아니라 지금 우리도 그렇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외손주나 여전히 우리도 그것의 연장, 존재의 증대, 그대로 연장되어가지고 우리도 역시 말은 안하지만 굽신굽신 거리지만 복종은 안해요. 돈 때문에 굽신거리지만 역시 내 중심, 모든 것이 내 중심밖에 모르는 여기서 우리는 탈피한적도 없고 내가 탈피하기 싫어. 주님 위해서 살기 싫어요 우리는.
왜?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왜 주님을 위해서 삽니까? 따라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는 점점 더 나는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계명은 우리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대로 주께서 본문대로 친구로 주께서 간주해 주셨기 때문에 그 간주한 후 절차에 의해서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와서 그 십자가의 작용으로 십자가만 드러내고 우리는 철천지 십자가의 원수였음을 세리처럼 보게하는거예요.
‘주여.’ 고개도 못들고 ‘죄인은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 우리는 수시합격이라는 도장을 이만한 도장 가지고 우리를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존재하시는 계시다는 티를 내는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님 십자가에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한번 보세요. 말이 ‘이것 알아라.’가 아닙니다. 이거 뭡니까? 이거 외에는! 얼마나 강조해요.
이것 외에는 그 다음에 No, 단호하게 No예요. 이것외에는. 니가 귀신을 쫓아내고 선교를 하고 헌금을 하고 십일조 하고 그딴거 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 딴거 말고 이거 이거! 이거! 달랑 이거 외에는 다 버려라.
이게 뭐냐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예요. 그걸 줄이면 뭡니까? 죽음이예요. 특이한 죽음이예요. 우리의 죽음은 죄 때문에 죽는데 주님의 죽음은 뭡니까? 죄 때문에 죽는게 아니고 우리의 환경을 새롭게 조성하기 위해서 전에는 무슨 환경? 죄의 노예가 되는 환경인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무슨 환경으로 바뀌었습니까? 의의 노예예요.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노예라니까요. 노예란 말은 이 환경에 대해서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입댈거 없고 말걸거 없어요. 주어진 환경이 나를 의인되게 만드는 환경으로 조성한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우리로 하여금 뭐되게?
죄인되게 하고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시는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참 좋은 친구죠. 친구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분명히 죄인데 주님의 계명에 입각해서는 그게 의가 되는거예요.
멋진 의의 인큐베이터가 되는겁니다. 의를 만들어내는 생산하는 사랑을 생산해내는 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죄 짓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어찌 이 죄를 안 지을 수 있으랴.
다른 교회 들으면 기절합니다. 결국 저 양반은 성경에서 나가지 말라했더니 밖으로 더 튀어나갔구나. 제가 성경 밖에 나간게 아니고 성경 속으로 더 들어간거죠. 왜? 뭐 외에는? 뭐 외에는 이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했다 라고 했기 때문에 십자가 말고 다른 이야기 많잖아요. 성령의 열매 뭐 부활 있잖아요.
그걸 지금 다 구겨서 다 어디가 집어 넣었습니까? 전부 다. 구약 여리고성 함락, 천지창조, 선악과 그 모든 것을 그냥 나둬버리면 이것도 알아야되고 저것도 알아야되고 알아야 될것이 두가지 세가지 네가지 계속 생기잖아요.
그래서 그것은 사도바울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다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다 구겨 넣어가지고 잘 구겨가지고 어디다가 집어넣어요? 십자가에다가 확 집어 넣어버리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죠.
나는 뭐만 자랑한다고요? 나는 오직 십지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랑한다. 내게는 십자가 외에는 아! 그것도 외에는 이네.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것이 없노라. 이제 사도바울의 성령받은 사도바울의 귀신도 아는 사도바울의 그 취지를 아시겠지요?
그렇게 많은 말을 편지를 그렇게 해 놓고는 뭐로 다 규격합니까? 오직 십자가로 딱 해버리는 거예요. 어떤 목사는 뭐 피만 증거한자는 이단이라고 나를 겨냥해서 그런 소리 했겠죠. 피만 증거하는 것은 이단이다.
그 사람이 그 주장하는 이유가 뭡니까? 성경에는 피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다른것도 있잖아 이거거든요. 그 말 맞아요? 계명은 몇 개인가? 한 계명밖에 없지요?! 피 사랑 그것 밖에 없지요.
왜 그렇게 계명들을 많이 늘어놓느냐 하면은 자기가 제3의 관찰의 자리에 서 가지고 문틀보고 참깨야 열려라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성령께서 집어다가 그 문틀 궤도에 안집어 넣으니까 자기는 바리새인하고 똑같애 바깥에 서 가지고 ‘보자 어느 계명이 필요하나?’
십자가도 필요하고 십자가 믿습니다. 어 부활도 있네. 부활도 믿습니다. 십자가 믿고 부활도 믿고. 어 재림도 있네. 재림 놓치면 666박아서 안되지. 재림도 하고, 주워 모아서 마트에서 물건 이 만큼 사듯이 이 만큼 사가지고 감당을 못해.
성부도 섬겨야되지, 성자도 섬겨야되지, 성령 섬겨야되지, 삼위일체 다 섬겨야 되니까 시어머니가 세분이다. 제3의 중립지역은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가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 완전히 궤도에 올려가지고 우리 가는 길이 예수님이 가는 길로 만들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만 친구 아니라 친구 가신 그 길을 친구 답게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칠 수 있도록 십자가만을 기뻐할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이 계명이 성령을 통해서 완성되었음을 계속 돌아보면서 추후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