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13절(친구)171107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15장 13절(친구)171107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친구란 말을 누가 끄집어 냈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끄집어 냈어요.
그러면 친구라 끄집어 냈을 때 그 친구란 그것은 형식이고, 그 안에 내용이 뭐냐 하면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친구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그런 내용을 포함해서 너희들은 나의 친구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라는 말을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런 단어를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단어가 주님께서 단어를 사용할때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친구라는 단어와 대치가 배치가 되고 대치가 된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용어의 친구 개념이 아니죠.
그러면 그 친구개념을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식으로 친구개념이냐 하면은, 보통 친구라 하는 것은 우선 내가 먼저 있고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친구, 1번 내가 있고 2번 친구가 있고 순서가 그렇게 되잖아요.
내 친구라 할때는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저 사람은 내 친구라고 소개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구라 할 때는 뭐냐하면은 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친구가 먼저 있어요.
여기서 친구는 누구를 이야기 합니까? 예수님을 이야기 하죠. 예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친구라 불리우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해서 나중에 나타나면서 둘 사이에는 무슨 관계냐 하면은 친구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설명이 되요. 방금 이렇게 한 설명을 이렇게 하나의 단촐하게 문장으로 만들수가 있는데요. 친구란 비역사적 개념이고, 친구란 비장소적 개념이다 이렇게 됩니다.
방금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다 라는 이 간단한 말을 하나의 명제로 이렇게 규격화 시키면 예수님이 말한 친구란 비역사적 개념이고 비장소적 개념이다 이렇게 풀이를 할 수 있거든요.
이 말 상당히 어렵다 이말이죠. 그런데 이 어려운 말을 아주 쉽게 하게 되면 내가 너의 친구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이겁니다. 걱정말라는 거예요. ‘걱정말라.’ 왜냐하면 보통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우선입니까? 친구가 우선입니까?
자기집안이 우선이고 친구집안은 나중이잖아요. 자기집안 놔누고 친구집안 하는 것은 그건 오지랖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죠? 항상 자기 위주다 이말이죠.
항상 자기위주인데 아까 강의 뭐라고 했습니까? 나보다 뭐가 있다? 친구가 먼저 있다고 했지요. 나 너의 친구다 라는 말이 뭐냐하면은 아까 여기 나오네요.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은 너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되고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을 니가 규정하지 말아라는 거예요. 니가.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야? 나는 죽어서 어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껀데? 라고 할 때, 이미 예수님께서 이미 친구라고 딱 개입한 순간부터는 그 걱정을 멈춰라 그 걱정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 친구가 있는데 왜 니가 걱정하느냐 이말이죠. 예수님이 너보고 친구라고 했는데 친구는 폼으로 있는 거예요? 지금 세 번째 이야기 하는데 또 할께요.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우리가 있는 거예요. 친구가 먼저 있고. 세상하고 반대예요.
세상은 내가 먼저 있고 친구가 나중인데 예수님은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라면 내가 나는 이렇다 내 인생은 이렇다 나는 왜이리 불쌍하냐 라고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규정하거나 단정 짓거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친구는 폼으로 있습니까? 아마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 ‘아이고 목사님 친구는 나부터 있고 난 뒤에 나중에 친구가 있는거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세상적인 친구 개념이고, 주님께서 친구라 할때는 그 개념이 아니고 비역사적 개념이고 비장소적 개념이예요.
만약에 우리가 미국간다. ‘아이고 주님이여 미국 왔습니다.’ 할 때 ‘니가 미국온 것이 아니고 친구인 내가 너를 미국에 보낸거야.’ 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떠나서 미국간다고 해서 장소가 달라졌다고 해서 친구를 한국에 놔두고 온게 아니다 이말이죠.
왜? 친구는 나보다 먼저 미국에 자리 마련해 두고 오라했으니까. 이게 바로 비장소적 개념이예요. 또 무슨 개념이냐 하면은 비역사적 개념이죠. ‘아후 내가 10년후에 어떻게 될것인가?’ 하고 걱정하는데 ‘10년후에 내가 어떻게 되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그런 소설도 있지만 도대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지?
그때는 주께서 뒤통수를 뒤통수를 패면서 내가 친구라하는데 걱정은 왜 니가 하느냐 말이죠. 친구 있고 나의 친구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가 친구라고 관계를 성립 시키는데 너하고 나하고 친구라는 그 관계를 니가 지금 모독하면 안되지 그걸 니가 개무시 하면 안되잖아. 친구가 왜 있는데? 그런 걱정하라고 내가 친구라 했는지 알아? 그런 걱정은 일체 하지 말라고 친구가 있는 거예요.
‘그래도 내가 외국에 가면 안되잖아요.’ 외국을 가던 장소에 관계없이 20년 뒤에도 시간에 관계없이 비공간적 비시간적 친구는 묵시적으로 영원한 친구입니다. 영원한 친구예요. 그래서 제가 그래서 아까 그랬잖아요. 친구란 말은 4자로 이야기 하면 걱정말아요 그대.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이 말은 우리가 친구란 말 하기 전에 친구란 말은 예수님께서 처음 썼는데요. 그 전에는 뭐라고 썼냐하면은 나는 목자요, 나는 메시아요, 인자, 너의 메시아요 뭐 여러 가지 이야기 했는데 갑지가 여기 요한복음 15장에서 친구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아마 성경에서도 친구란 말은 여기 요한복음 15장이 유일하지 않는가 제 기억으로서는 뭐 딴데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제 기억으로서는 여기 처음이고 마지막 아닌가 그런 생각 들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왜 친구란 말을 썼을까? 그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여러분 이해되시죠? 나보다 친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친구를 친구답게 증거하라고 우리가 주님 앞에 부름 받았다 하는 것을 아시겠죠?
그러면 왜 평소에 처음부터 ‘어이 친구야, 베드로야 고기잡지말고 나랑 가자.’ 왜 처음부터 친구란 말을 사용 안했는가?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문제 던지는 것은. 그리고 이 친구란 말은 자주 나오지 않아요.
여기 처음 나오고 그 다음 부터는 모르겠어요. 저는 또 다른 대목에서 나오는 대목을 저는 본 기억이 없는데 유일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여기서 친구란 말을 사용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관계를 이렇게 성립 시킬때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말씀이 아니예요. 이것도 어렵기 때문에 쉽게 갑니다. 그냥 오늘 쉽게 쉽게 갑니다.
보통 세상 친구는 이렇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그냥 친구 먹자 하면 친구 되는 겁니다. 개인 개인이. 이쪽 A란 사람이 B란 사람과 친구할 때 ‘우리끼리 친구하면 친구 아니니까 당신 집안식구 다 들고 오너라.’ 뭐 이렇게 이런 식으로 친구 먹는거 아니지요?
그냥 뭐 뒤에 가가지고 마음 맞는다고 이야기 통한다고 친구하자면 친구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친구라 할 때는 개인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둘러싼 이 환경을 봐요. 환경이 그 사람을 예수님의 친구되게 하는 겁니다. 환경이.
그러면 친구란 말을 뒤늦게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그 동안 주님께서 친구란 말을 쓸 만큼 환경이 충족된거예요. 충족. 충분하게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 환경이. 그러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충족됬다는 평가를 누가 내립니까? 우리가 내립니까? 주님이 내리십니까?
주님이 내리시고 주님 보기에 너는 이제 친구야 라고 할 때 그 만큼 환경이 무르익은 거예요. 환경이 무르익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개인의 역량과 개인의 솜씨와 개인의 결심과 개인의 의지와 개인의 지식같은 것에 기대 한다? 안한다? 기대를 안하지요.
기대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베드로 고기잡을 때부터 어이 친구야 우리 친구먹자 일대일로 흔히 세상에서 친구 먹는 것처럼 일대일로 야 너 고기잡는 폼 보니까 나 너 맘에 든다. 하겠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냥 이름 부르면서 할 때 뭐로 불렀습니까? 친구라 부른게 아니고 뭐로 불렀습니까? 제자지요. 듣고 보니 쉽지요. 처음에 제자로 불렀잖아요 제자. ‘어이 친구야!’ 이렇게 안불렀지요. 너는 사람 낚는 내 어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친구라 했습니까? ‘어이 친구야!’ 이럽니까?
스승, 선생님, 랍비, 선생님이라고 했지요. 그 선생님에게서 자꾸 메시야 냄새가 나고 낌새가 나오지만 그런데 이 선생님에서 갑자기 맞먹을수 있는 친구가 되어 버렸지요? 왜 끝까지 선생님 아니고?
그렇다면 이 뭐냐하면은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결정적인 것은 뭐냐하면은 친구라는 호징은 절대로 제자들 머리에서는 나올래야 나올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선생님하고 이렇게 3년동안 동거동락 했으면 제자들끼리 모여서 ‘선생님 잠깐만 빠져 주세요. 우리끼리 지금 회의 해야됩니다.’
‘야 우리 이제 선생이라 하지말고 친하게 이제부터 예수님을 친구라 해가지고 맞먹자.’ ‘그래! 그러세.’ 이래가지고 ‘우리 12제자가 의견 통일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친구라 하겠습니다.’ 뭐 이렇게 된거예요? 아니죠.
결국 친구란 용어 자체가 나타난 것은 뭐냐하면은 절대로 제자들에게는 이 친구라는 개념의 접근할 수 가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 친구란 단어 자체가. 주님께서 친구라 불러준 것은 맞지만 제자들이 예수님보고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입장이예요.
성경에서 예수님 친구 말고 다른데 친구란 말이 나와요. 어디냐하면 아브라함과 천사가 친구처럼 이렇게 했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나오지요?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어이 친구 하나님 잠깐 보자.’ 이런식으로 나올수가 없는 거예요. 죽었던 우리나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천주교 다니거든요. 그 사람이 성경을 봤던 모양이예요. 요한복음 15장을 본 모양이예요. 15장을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하고 나하고 친구니까 이제부터 내가 소개한 사람은 예수님이 구원할걸. 이렇게 나온거예요. 세상친구하고 맞먹는 것처럼 그렇게 한겁니다. 이 사고 방식이 김대중 대통령은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 솔직하다는 말은 순수하다는 말이지만 그게 진리는 아니잖아요.
진정성 있게는 이야기 했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지요.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고 진리입니까? 까놓고 이야기 한다고 그게 진리되는거예요? 진리는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리는 누구십니까 라고 물어야되요. 그래야 나는 진리 아닙니다 전제로 하고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일단 진리가 나올 리가 없고, 나는 일단 진리가 아니고 그럼 진리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야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뭐라고 합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친구라하는 그 단어 자체가 우리를 일대일로 상대한다는 뜻이 아니예요. 다만 베드로 이 12제자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 보시기에 친구라고 대할 만한 그러한 환경이 무르익은 걸로 주께서 아셨기 때문에 친구라는 말을 붙인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계속 주님의 친구가 될려면 제자들이 잘하고 똑똑해서 아니라 뭐가 되야되요? 이 환경이 제자들을 둘러싼 이 환경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는 겁니다. 자꾸 환경 이야기 하니까 여러분들이 이해를 안하시는 눈치인데 여러분 인생을 이렇게 여러분 나름대로 살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인생을 누가 놨습니까?
만약 여러분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가만 있었으면 여러분 인간성 어떻겠어요? 그냥 인큐베이터에 30년 살면 말도 못배우고 하는 것은 응애응애만 배웠을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만약에 인큐베이터에서 금방 튀어나와가지고 이 세상에서 30년 살게 되면은 그 사람의 안에 마음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은 어디서 온겁니까? 다 어디서 온거예요?
이 세상에서부터 온거죠?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이 세대로부터 온 것, 이 썩어질 이 세대로부터 온겁니다. 그래서 저도 이것을 생각하면서 친구라 생각하면서 어떻게 생각했는데 마침 어제 뉴스에 적절한게 있어요. 변 검사. 변을 검사한다는 뜻이 아니고 투신 자살한 검사 이름이 변씨예요.
그 변검사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화장실 간다고 하고 자기 아내도 있고 변호사 있는데 뛰어 내렸지요. 댓글 수사를 방해했다는 것 때문에 소환받은 검사가 뛰어내렸습니다. 자, 그 검사의 사고방식을 한번 분석을 해봅시다.
이 검사가 뛰어내릴만한 그 만한 마음이 위축되어 있는 그 위축된 마음은 검사 시험칠 때 그 시험 문제 때문에 그렇게 신경쓴거예요? 그 검사가 그렇게 뛰어내릴 만하도록 누가 거기서 그 사람 마음속에 그런 위축된 마음을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누가 준거예요?
자기가 취직해서 검사로 일하면서 듣고 배운 것이 자기를 자살하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오늘 이 친구의 예로 얼마나 적절해요. 지금 우리가 혼자 공부했고 혼자 똑똑해서 이 맘 가진게 아니예요.
지금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뻑뻑하게 팥죽처럼 동지 팥죽처럼 뻑뻑하잖아요. 뻑뻑할때 그 동글동글 한걸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 하얀 새알. 그 새알있죠. 새알처럼 그 새알이 팥죽에 들어가면 그걸 누가 포위합니까? 누가 둘러싸가지고 그 하얀걸 팥죽이 시커먼 걸로 매꿈니까?
세상이 그렇게 하지요. 가만 놔두지 않잖아요. 검사가 죽었다. 자기가 그 사법고시 합격할 때 좋다고 뛰어내렸습니까? ‘난 합격했다 죽어도 좋다.’ 그래서 뛰어내렸습니까? 아닙니다. 뭔가 묻을대로 묻었지요. 온갖 세상 다 묻어가지고 그 묻은 것이 자기를 화장실에서 뛰어나가게 만든 거예요.
정치권에서 로비활동해서 잡혔던 사람 관악산에 목대달아 죽은 사람 있잖아요. 김성수 목사가 자살했잖아요. 누가 그 사람을 그렇게 자살하게 만들었습니까? 자기가 몸 담았던 그 환경과 그 교회가 그 사람을 자살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12제자 다 자살할까요? 자, 문제는 변검사 자살한 그 검사 있는데 제가 답답한 것은 그 검사가 얼마나 머리가 똑똑합니까. 책 서른권을 다 외워야 되니까. 그 만큼 공부 많이하고 그 만큼 한사람이 어디 하루 세끼를 못 먹어서 뛰어 내렸어요? 아니죠.
그 뛰어내린 이유가 있을거 아닙니까. 이유가. 갑자기 귀신이 밀어서 그런것도 아니고, 이유가 있을거 아닙니까. 너무 괴로워서 뛰어내렸잖아요. 누가 그를 괴롭게 했냐? 누가? 죽을만큼 죽을만큼 누가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냐? 죽을만큼. 누가 그렇게 죽게 했냐 이말입니다 뭐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이런 관계가 아니예요.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런 관계가 아니고 아까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떤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 맺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다 했지요? 환경이 있다 했지요.
그러면 그 죽은 변검사는 어떤 환경이냐? 이런 환경입니다. 자기 여기 있고 그 사람 주변에 있잖아요. 주변에 있는 사람 전부 다 인간 대 인간, 개인 대 개인, 일대 일 관계, 이걸 변검사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기대하는 가족들, 자기한테 희망거는 그 부모님들, 그리고 나에게 그 범죄를 찾아내려는 수사팀 동료 검사들, 그리고 욕할려고 준비되어있는 모든 국민 많은 국민들, 그런것에 압박감을 느껴서 뛰어내린거예요. 이사람은 분명히.
그러니까 이 사람은 본인의 환경이 무슨 환경밖에 없어요? 자기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이 환경이 본인의 전부인겁니다. 이 압박감에서 본인이 도피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사라지는 방법. 자기가 죽는 방법외에는 다른 것이 없어요. 이 방법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그림하고 뭡니까. 아까 그림에는 누가 있었어요? 친구라고 부르시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지요. 변검사는 누구밖에 없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누구 밖에 없어요? 자기 밖에 없지요.
둘 중에 어느것이 현실을 아는 사람이예요? 지금 이 변검사는 세상 하늘에 별이 떠있는 이유를 압니까? 지금 별 떠있는 이유를 몰라 자살했습니까? 예? 달이 지는 이유를 몰라서 자살했습니까?
이유는 딱 한가지예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는냐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럴거 같으면 달은 니 뜻이 아닌데 달은 왜 뜨는데? 다시 말해서 이것은 뭐냐하면은 한마디로 뭐냐하면은 바보예요. 바보. 바보라니까요.
자기에게 필요한 자기 생존에 필요한 것만 골라놓고 그 골라놓은 것이 자기를 환경으로 딱 굳어 놓고 그 환경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너무 괴로워서 화장실 7층인가 거기서 뛰어내려 죽은거예요.
만일 어떤 미국에 NASA, 우주항공 NASA 어떤 직원이 자기 위에서 상부에서 맡겨진 그 프로젝트 과제를 푸는데, 수학공식이 잘 안풀린다 무슨 수학 공식이냐. 뭐 화성에 갔을 때 지구에서 화성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기에 필요한 로켓의 무게를 계산하라 했는데 그것을 만약 계산 못해가지고 이제 직장에서 쫓겨날 판이다.
실력이 그것밖에 안되서 실력이 그만큼 안된다 할 때, 그 사람이 만약에 NASA 본부에서 뛰어 내려 자살했다면 그 자기 죽은거하고 화성이 거기 있는거 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목성이 거기 있는거 하고 결국 목성이 없었으면 자기 죽었어요? 안죽었어요? 목성 화성 없었으면 안죽었지요.
목성이 ‘너 죽어라!’ 이랬습니까? 아니 이 세상이 이 세상이 나를 죽입니까? 내가 나를 죽입니까? 어느 쪽이예요? 세상은 가만있는데 누가 죽어요? 본인이 본인의 성질 못 이겨 죽잖아요. 이게 바로 foolish 바보 아닙니까? 바보라고요. 바보등신, 바보등신.
자, 이 문제를 그러면 이 바보등신 12제자도 바보등신인데 그걸 하기전에 먼저 이 논리부터 하겠습니다. 창세기를 보세요.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먼저 입니까? 짐승이 먼저 입니까? 물어보겠어요. 이 땅에 인간이 먼저 있었어요? 짐승이 먼저있었어요? 짐승이 먼저 있었죠.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없을때도 있었지요. 틀리면 틀렸다고 하세요. 인간이 이 세상에 없었을 때도 있었지요? 인간은 빠지고 해, 달, 별, 그리고 바퀴벌레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면 인간 없는데 이 세상 왜 있습니까? 인간이 없는데 이 세상 왜 있는 거예요?
현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해서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깁니까? 고집합니까?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지요. 그런데 막상 창세기에 보면 진화론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500년전에 진화론에 의하면 500년 전에 있고 지구는 57억년전에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없을때가 더 많지요? 그러면 그 인간이 없을 때 그 암모나이트라든지 그런 옛날 고대 진화론에 의하면 그런 것들 원숭이. 원숭이는 왜 있는 겁니까?
진화론에 의하면 진화론아니고 성경도 마찬가지이지만 원숭이가 먼저 있고 인간이 있잖아요. 그렇죠? 맞지요? 원숭이가 먼저 있고 인간이 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과학은 어떠냐하면은 인간해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원숭이 해부학이 있어요. 생물학에서. 제 말 맞죠? 제 말 맞잖아요.
인간이 해부를 해보니까 이제는 슬슬 원숭이나 해부 해보자 이렇게 나온겁니다. 인간이 원숭이 해부 왜 합니까? 혹시 원숭이 해부 해가지고 간이나 쓸개 가운데서 누구한테 몸에 좋으라고? 인간 스스로에게 혹시 귀한 약재라도 있을수가 있고, 있을수 있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어진 그 현실 환경이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만들었어요? 모든 해와 달 모든 것을 누굴 위해 존재해야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까? 예? 인간들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우기지요. 그게 현실이라 이말입니다. 그게 현실 맞습니까?
그것 때문에 인간들 마음 맞춰주라고 돌아가는 겁니까? 답변해보세요. 그런거예요? 자 인간보다 원숭이 먼저 있었습니다. 원숭이 보다 물고기 먼저 있었죠? 물고기보다 공중에 독수리가 먼저 있죠? 독수리 보다 해와 달 먼저 있었죠?
그보다 먼저 있었던게 뭡니까? 성경에 의하면 우리 주님이 있잖아요. 우리 주님이 계시지요. ‘너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게 바보 아닌거예요. 그 나라 의, 그 나라의 의되시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너의 뭐라고 합니까? 너의 친구라고 한거예요. 너의 친구다.
나는 너의 친구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우리보다 먼저 계신분이 친구라고 한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 우리는 뭘 포기해야 되냐하면 내가 나만 잘되기 위해서 구성한 현실을 대충 꾸려서 구성한 이 세계안에서의 내가 아는 친구를 우리는 포기해야 되겠어요? 포기 안해야되겠어요?
마땅히 포기해야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한 친구는 누구 좋아라고? 친구 좋아라고가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그러니까 오늘 이 친구란 이 말씀은 조건이 있어요. 친구란 조건은 뭐냐? 친구를 위해서 죽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너를 친구라 부른 즉시 너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서 죽어야 될 그런 상태 죽어야 될 존재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보다 먼저 있었던 원숭이가 그런 소리해도 들어야 되요. 그런데 원숭이 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이 우리보고 그런 이야기 했어요.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왜 뒤늦게 와서 뒤늦게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뜻은 뭐냐? ‘너 나를 위해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런 뜻이예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생각했냐면 반대로 생각한거예요. 나 좋아라고 예수님 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친구를 위해서 희생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 만큼 좋은 친구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김대중 대통령은 여전히 자기가 끌어모은 것 가지고 자기 위해서 있는 그 환경이 주님이 거기에 대해서 인정해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겁니다. 나를 위해서 만든 삶의 환경을 하나님도 아이고 수고했다 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거예요.
제가 아까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주께서 우리보고 친구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친구있잖아요. 나 좋아라고 너 내 친구 되야되 라는 그 사고방식을 이제는 완전히 박살 내야되고 파괴되야 되겠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친구라 할 때는 그냥 ‘예, 친구 먹읍시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는 나를 위해서 모집했던거 나를 위해서 끌어모았던 모든 것은 주님의 친구란 이 원리에서 자근자근 다 떨어져 나오고 부서져 나갑니다. 심지어 가족까지.
이제부터 중요한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친구라고 하면서 조건을 걸었다 했습니다. 그 조건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조건이 뭐라고요? 친구를 위해서 뭐한다고요? 목숨을 버리라했죠.
자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목숨 누가 줬습니까? 주님이 줬지요. 주님 줬는데 이건 내거 하라고 준게 아니란 뜻이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이 끝까지 내것 하라고 쥐고 있으란 뜻이 아니고 친구라고 하는 관계, 그 관계에 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라는 관계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도 목숨 받칠테니까 너도 너의 목숨을 바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가 친구란 말을 그렇게 쓰는 이유가 여기 앞에 12절에 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기 사랑이 나오죠.
첫째 시간에 여기에 대해 설명하게 되면 첫째시간 마칠 듯 싶은데, 창세기 1장에 창조가 나옵니다. 7일동안 천지를 창조했지요. 7일동안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7일동안 창조했다가 아니라 아까 강의할 때 이야기 했는데 이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제가 분명히 여러분 질문할때는 뭐가 누가 창조 그게 아니고 누구십니까로 했지요?
사도바울이 성령받고 난 뒤에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이 창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모든 피조물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누굴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다 했지요.
그게 창세기 1장에 대한 신약적인 최종적인 답안입니다. 뭐가 만들어졌냐? 첫째는 무슨날? 둘째는 뭐가 만들어 졌다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만들어 졌는가? 누굴 위해서 만들어 졌는가가 드러나지 아니하면 창세기 1장 천독 만독을 해도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 했고 그 이야기 들은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고 난뒤에는 참으로 그 말이 맞구나 모든 것은 예수님 위해서 만들어 졌다 이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면, 그러면 그 모든 것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렇다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이 되요? 안되요? 그런 소리 하면 안되지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게 아니고 이게 반대가 되야되죠. 누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구원하심 주님의 구원되심을 주님도 구원받습니까? 하는데, 주님도 이 땅에 들어왔잖아요.
여러분 박태환이가 처음에 수영장 풀장에 박태환이 뛰어내릴 때 어디에 뛰어내립니까? 1,2,3,4,5번 8개인가 있잖아요. 그때 선수들이 수영복입고 뛰어 내리잖아요. 처음에 그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입수라 하지요.
예수님 요단강 세례받을 때 뭐했습니까? 물속에 입수 하듯이 예수님은 물이 아니고 뭐냐하면 이 세상의 죄속에 입수한거예요. 박태환은요, 물속에 들어가가지고 헤엄도 안쳐요. 그냥 발만 이렇게 해가지고 50m를 간답니다. 그러니까 마린보이죠.
주님은 부활될때까지 박태환보다 더 심해요. 죄 속을 계속 가다가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로 나온거예요. 부활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은 여기 있다 그런거 의미 없어요. 왜 있는냐? 누굴 위해 있느냐? 가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이 만들어 졌잖아요. 원숭이든 귀뚜라미든 해바라기든 해와 달, 그런데 그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어요? 우리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러면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죽었다 하면 안되죠.
주님의 구원. 주님의 구원이 뭡니까? 죄로 들어가서 죄의 노예로 들어와서 의의 노예로 나오는 거예요. 죄의 지배하에 있다가 이제는 의의세계로 나올 때 그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다 이말이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뭐냐하면 바로 예수님과 우리 관계가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땅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은 죄 짓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죄 짓는 역할.
예수님이 새알이라면 팥죽의 새알이라면 우리는 무슨 역할이냐면 벌건 팥죽 역할 되는 겁니다. 새알이 팥죽에 입수했다가 새알로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영광됨을 포기하고 오셨다가 나중에 주로써 영광받아 튀어 나올 때 우리는 거기서 무슨 역할 합니까?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함께 주님의 주 되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그 죄아래 있는 죄의 노예가 된 역할을 충실히 한거예요. 그래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이 감히 저를 구원해주세요 하면 안되요.
주님만 우리를 통해서 구원된다면 우리는 제 역할 다한겁니다 라고 고백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 아닙니까? 10년동안 귀신 들렸지요. 이건 자기 역할 다 한거예요.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된자, 날 때부터 소경된자가 왜 소경됬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소경됬잖아요. 자기 역할 다 한거예요. 아까도 자살했던 변검사 아니죠. 자꾸 변검사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그 변검사가 그렇게 자살할 누가 그렇게 그 사람 마음속에 그러한 사고방식을 집어 넣었느냐 이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살아온 이 세상이죠 이세상. 그런데 그 세상에 지금 누가 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변검사가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하고 우리 사고방식하고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우리 입에서 ‘똑같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고백을 할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죠. 변검사는 죽을 때 누구한테 물어보고 죽었습니까? 자기자 자기한테 물어보고 죽었지요. 자기 안에 마귀들었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 행동할때는 우리 자신 마귀보고 하겠지만 성령께서 가만두지 않고 다시 소급해서 뒤돌아서 생각해보니까 그것 조차도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리기 위해서 우리한테 그런 죄 짓는 일이 발생되도록 했다는 이러한 고백을 쏟아내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12제자가 예수님 버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한테 감사와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제자라 할지라고 결국은 버렸잖아요. 우리가 예수님 버리나 그들이 버리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와서 그들을 데려가잖아요.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성령이 오셔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죄에 입수해가지고 나올 때 까지 확인된 바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본자가 없어요. 다만 주님의 예시된 사람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예시를 일으킨 사람있죠.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백부장 같은 사람들있죠. 지금 그 이야기를 환경이야기를 제가 자주하는 이유가 아까 던진 질문에 답변하는겁니다.
인간이 없을때가 있다 했죠. 인간이 없을때가 있다 했죠. 그러면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제일 마지막 막내인데 그 막내이면 꼴찌인데, 꼴찌면 계급이 제일 낮은게 아닌가 이런 생각할거예요. 하지만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이 해야될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되요. 만약에 따르지 아니하면 로마서 8장에 의해서 인간이 범죄하게 되면은 덩달아서 모든 자연세계가 다 신음하게 되고 고통받게 되는 거예요.
그 선악과 나무를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다고요. 천지창조 일어나고 첫째날 둘째날 계속 만들고 마지막 여섯째날 인간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은 이 앞에 인간이 없을 때 모든 것의 운명이 이 형상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는 거예요.
만약에 형상이 형상을 유지되게 되면 이것은 복을 받지만 형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여기서 고통과 괴로움과 온 우주가 다 탄식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러면 이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형상됨이란 형상되었다 하는 말은 말했지만 실제로 형상되었다는 그 구체적인 모습은 뭐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마라.
그러면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따먹으면 뭐한다 했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그 죽으리라는 뜻이 이 아담이 안 죽어봐서 죽는다는 뜻을 몰랐어요. 보니까 3장에 보면 죽는다는 뜻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버림받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이.
내침을 당하는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두가지의 버림을 당했어요.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 받았어요. 예수님의 생애가. 따라서 성도의 세계라하는 것은 이 길을 그대로 밟아야되요.
성도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야되요. 그런데 아버지 한테 버림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하면은 이 원칙 하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앞에서는 반드시 절차가 뭐냐하면은 따먹지 마라는 지시가 있지요. 그렇죠? 따먹지 마라는 지시가 있잖아요.
하나님이 따먹지 마라는 지시처럼 따먹지 마라는 지시의 벌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리라 되있잖아요. 그러면 죽음이라는 결과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조항이나 법칙이 하나님께서 하니님의 자기 백성이든 누구든 간에 인간에게 계속 제공되는 겁니다. 왜?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을 야기 할 수밖에 야기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형상이라는 이유 때문에 계속 중간에 집어 넣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됨의 완성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다시 오늘 요한복음 15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의 계명이 뭐라고요?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 좋은 말이죠. 사랑하죠. 그런데 그 사랑의 구체적인 내용이 요한복음 15장 오늘 본문 14절에 보니까 사랑의 내용이 뭡니까? 죽어야 되는거예요.
그럼 아무나 보고 죽을까요? 마귀보고 죽을까요? 누구보고 죽으라고 합니까? 누굴 위해 죽으라고 합니까? 친구. 친구니까. 친구를 위해서 죽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될려면 친구가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친구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친구로 등장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이잖아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거예요. 이래나 저래나 살아야 되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으라고 만드신거예요. 처음부터. 죽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오묘한 것이 무엇이냐를 설명했잖아요. 오묘한 것. 오묘한 것이 뭐냐하면 바로 낙엽이 떨어지듯이 모든 인간은 우수수 다 낙엽처럼 언젠가는 다 떨어지게 되있다는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오묘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낙엽은 떨어져야 낙엽이잖아요. 그렇죠? 안떨어지면 고집센거지 낙엽이 아니잖아요. 떨어지는 것이 낙엽의 자연이치인 것처럼 인간은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죽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 진거예요. 죽기위해서.
그런데 아까 변검사는 진짜 죽기위해서 죽은게 아니고 자기 성질 못 이겨 죽은거예요. 자기가 죽은거예요. 자기 성질 못 이겨서. 예수님께서 친구라 하는 것은 내가 이 코스 밟아서 죽는것처럼 너희들도 나 따라서 니가 내 친구이니 나 따라서 그 코스 밟게 되어 있어 이 인간아 이런 뜻이예요.
맞먹자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 맞먹자 그런 개념이 아니고 전에는 너 밖에 없었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내가 누구한테 죽어야되? 했는데 이제는 죽어야 될 이유가 생겼다는 거예요. 왜? 내가 니 친구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주를 위해서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도록 내가 그렇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자기 명대로 못산다는 뜻일까요? 어떤 뜻일까요? 아까 그래서 제가 아까 친구란 개념이 뭐라고 했습니까? 비역사적이고 비장소적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뭐냐하면은 그냥 시도때도 없이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겁니다. 매일같이.
그런데 매일 같이 죽이는데 선악과 이야기 다시해봅시다. 선악과 할 때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뻔 했는데 죽었습니까? 따 먹었을 때 죽었습니까? 하와가 따 먹을 뻔 했을 때 죽었습니까? 따 먹어서 죽었습니까?
이미 아담이나 하와가 따 먹고 난 뒤에 죽었지요.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과 하와보기에는 내가 선악과 따먹은 걸로 되어 있지만, 내 속에 선악과 과실이 들어왔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담과 하와의 죽음이라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환경으로 조성된거예요. 환경으로.
따먹는 순간 죽음이 너를 새로운 너를 죽게하는 너를 저주받게 하는 새로운 환경 너를 하나님께 버림받게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새로운 환경이 그 선악과 속에서 쏟아져 들어온 겁니다.
자, 이럴 때 아까 창세기 1장을 설명한 이유를 알겠지요. 자 창세기 1장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시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 했지요. 인간을 제일 마지막에 했지요. 그럼 이 앞에 있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생겨나는 환경이라고 했지요. 환경.
인간이 하나님과 결부해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을 귀뚜라미보고 이야기 한게 아니예요. 귀뚜라미보고 이야기 한게 아니고 인간보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왜 있느냐? 인간에 따라서 환경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거든요. 이게 환경이예요.
다시 말해서 창세기 1장은 있음 자체가 있음이 아니고, 거기에다 뭐가 심어졌나? 선악과 따먹지 마라는 계명이 심어졌을 때 이 환경은 누구누구를 위한 환경이 되요. 이것은 누구를 위한 환경일까요? 신약에 의하면 천지창조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환경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그리스도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천지창조가 만들어 졌고 그 중에 부분으로서 누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만들어 지는거예요. 그래서 친구니까 너는 나를 위해 죽어야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한 윤리도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싫든 좋든 너는 그래야만 되고 내가 그렇게 하도록 기어이 만들겠다는 겁니다.
나는 죽기 싫어요 한다고 안죽는게 아니고 니가 뒤돌아보게 되면 ‘아 이 발자국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경유를 그 경과를 주께서 이끌어 가고 있구나.’ 라고 해서 오직 친구되신 주님에게만 친구란 관계를 새롭게 형성해주시는 마무리 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라고 이 말씀 주시는 거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