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3b 울산강의-레위기 13장 : 하나님의 내부
20171103b 울산강의-레위기 13장 : 하나님의 내부(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 할 때 제사장이 있다는 것은 그 내부에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이 제사장 안에서 결합에 성공하게 돼있어요. 레위기 8장 26절에 보면, 제사장 위임식 때 수양을 잡아 하나는 피 내고, 기름은 관유로 발랐고 또 한 마리는 뒷다리를 내고 전병이라 해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기름에 튀긴 떡을 뒷다리와 결합이 돼요. 이게 하나님 제물에 포함됩니다. 평소에 먹는 인간의 양식에 여기에 합류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양식과 인간의 양식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레위기 8장 26절에 보면, “여호와 앞 무교병 광주리에서 무교병 한 개와 기름 섞은 떡 한 개와 전병 한 개를 취하여 그 기름 위에와 우편 뒷다리 위에 놓아” 그 뒷다리는 피가 묻은 뒷다리에요. 하나님의 양식과 인간의 양식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게 제사장 위임식 때 일어나는 거예요. 수양이 두 마리기 때문에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뒷다리를 사용하는 거예요. 문둥병에선 두 마리의 새를 잡습니다. 새 하나는 흐르는 물에서 잡고 또 하나는 공중으로 날려 보내요. 두 마리 새는 전과 후를 보여줍니다. 둘 다 안수하게 돼있어요. 세 번째는 레위기 16장에 보면 7월 10일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대 속죄일에 했던 제사와 문둥병을 낫게 한 제사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대 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염소를 잡아요. 한 염소는 죽이고 한 염소를 피를 발라서 광야로 떠나보냅니다. 잘 가라. 자유다. 아사셀 염소(양)라 해요. 두 마리로 왔다가 하나가 희생되어 이쪽으로 전가되어 하나가 어떤 모양으로 지금 자유를 얻었는지 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 드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내부를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자로 본인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개인 구원이 절대로 목적이 아니에요. 주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알려주는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초대받은 거예요. 개인적인 운명, 팔자를 따지면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운명이나 팔자,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없어요. 인간은 피조물이기 그래요. 피조물은 창조자를 떼놓고 피조물 단독으로 내 팔자야, 내 신세야. 이런 소리하면 안 됩니다. 네 팔자가 어때서? 네 신세가 어떤 데? 교회 와서 금요일에 철야 기도하고 수요기도 하는 걸 보면 전부 다 통합해서 보면, 아이고 내 팔자야. 팔자 좋으면 교회 안 나오죠. 팔자 더러우니까 나오는 거예요. 누구 탓하려고 나오는 겁니다. 그게 천상천하유아독존, 다시 말해서 내가 선악과 따먹고 자칭 신이 된 거예요. 신인데 신 꼬라지가 형편없으니까 물어내라는 겁니다. 빨리 원상회복하라는 거예요. 신에게 따지는 거죠. 그게 악마의 모습이지 달리 악마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래서 아까 그랬잖아요. 성령 받으면 이유도 없이 고맙고 감사한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쓰시는 자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상관없이 아무 이유 없이 고맙고 감사한 것, 이게 성령 받은 느낌입니다. 특징이에요. 그걸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기쁨.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그다지 기뻐할 게 없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으로 기뻐했다고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도 물론 예상 못하다가 기뻐할 순 있지만 돌이켜보니까 기뻐하라 것도 아니란 것을 사람이 정신 차려보면 기뻐할 게 아니란 걸 알아요. 인간이 얼마나 못 됐는지. 여러분에게 아침에 대추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주면 기분 나쁘겠습니까, 좋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세 개 주고, 네 개 주고 하면 기분 좋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아침에 네 개 주고, 오후에 세 개 주면 그걸 비교해서 기분 나빠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악마적인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견주듯이 사용하십니다. 우리를 자꾸 견주게 만들고 비교하게 만들어요. 기뻐해도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보다 뛰어날 때 그 차이만큼 기뻐하겠다는 것은 본인이 예상하는 기쁨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이 예상하는 것을 비껴가거든요. 예를 들어서 금식할 때 얼굴을 찡그린다. 금식할 때 왜 찡그리고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알게 하고, 기도할 때 보란 듯이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날 결과가 자기한테 기쁨을 줄 결과라고 여기면서 예상하기 때문에 그런 짓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헌금이나 기도나 전도나 일체 안 받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의 예배도 안 받잖아요. 안 받습니다. 인간이 예상한 것에 장단을 왜 맞춥니까. 인간에게 놀아나는 하나님 아니잖아요. 인간은 내부적으로 균열을 몰라요. 끝까지 하나로 쥐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걸 쪼갭니다. 두 마리의 숫양, 두 마리의 새, 두 마리의 염소. 이것은 전부 경로, 저주받은 네가 어떻게 해서 거룩한 백성이 되었느냐? 그것은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뭔가 개입한 것이 있어요. 주님의 내부의 균열이 너의 내부의 균열로 이어져서 균열이 하나로 통합시키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계획이 있다고 해서 너는 저주받는 자 되면 안 되고 필히 천국 가야 돼, 라는 하나님의 선언적인 조치로 구원받은 겁니다. 우리가 예뻐서 구원해준 게 아니고 하나님 필요에 따라 구원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이건 내 덕 아니에요.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네요. 이건 겸손이 아니고 실제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끊임없이 저주받아 합당한 울산바닥으로 만들어요. 대구도 마찬가지고. 온 우주를 저주받아 마땅한 것으로 가동시킵니다. 그 저주의 모습이 뭐냐 하면, 손들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저주스런 모습이 계속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절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마찬가지죠. 레위기 14장 봅시다. 13장은 관찰하는 것, 문둥병이냐, 아니냐를 하기 위해선 한 것이고. 14장 4절에 문둥병이 나았으면 집 안에 들이면 되는데, 다 나았네? 들어오세요. 이러면 개인 구원됩니다. 하나님은 개인 구원하려고 그 사람 낫게 한 게 아니죠. 당신이 저주에서 풀린 게 배후에 누구 때문에 그런 것인지 누구라는 그분을 제사라는 절차를 통해서 그분의 인격체를 구약 식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4절에 보니까,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 그러면 두 마리의 새, 죽은 새와 산 새,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살았지요. 살아있는 새와 깨끗하게 된 문둥병자와 일치되는 거예요. 그럼 문둥병자가 보여줄 건 자기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다는 것, 그게 바로 진짜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자랑, 자기 믿음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만 드러낼 뿐이죠. 마태복음 8장에서 산상설교 마치고 난 뒤에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만나게 됩니다. 문둥병자가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하니까 즉시로 구원해주시고 레위기 14장 4절에서 8절에 나오는 합당한 제물로 가지고 그 당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제사장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죠. 그 문둥병자가 낫게 됐을 때 자기는 주님 덕분에 문둥병 낫다고 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그렇게만 끝난다면 천국에 못 갑니다. 왜? 천국은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아들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사람만 가야 돼요. 아들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사람은 들어가도 소용없어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미 주식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하면 별로 시답지 않게 여겨요. 잠 오고. 그런데 설교시간에 목사가 이번에 주식이 올랐답니다. 그러면 잠자다가도 벌떡 깹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 몸을 담은 게 아니고 주식시장에 몸을 담은 거예요. 예수님 복음 이야기하면 교인들 자는데 이번에 고3 됐는데 수시, 라고 하면 고3 있는 부모는 다 깹니다. 관심사가 어디 있어요? 대학 들어가는데 수시 합격하는데 관심 있어요. 그런데 몸을 두면 그 사람이 고맙고 감사할 요소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우리 애만 대학 들어가면 고마워할 겁니다. 고마울 조건을 본인이 달아요. 그런데 그 조건이 예수님 십자가 조건으로 바뀌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나라, 주님의 나라기 때문에. 주님의 피에 몸이 담겨져 있어야 돼요. 그리고 애가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합격하던 못하던 그것은 내 애가 서울대 수석 합격한 것과 그리고 합격했다고 좋다고 하는 죄, 문둥병 당해야 될 이 죄, 좋은 건 좋은 거니까. 김주혁 죽었다고 그 앞에 헤헤거리면 돌 맞습니다. 슬픈 건 슬프지만 반드시 이렇게 슬퍼한다는 것은 내 관심사가 이 세상뿐인 것을 자각하는 계기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아할 일과 슬퍼할 일을 허락하신 거예요. 저는 우리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성도는 ▭다. 그 네모가 ‘도마’다. 성도는 도마고 그 위에 고등어, 갈치 놓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도마 위에서 요리하는데 피 비린내로 가득하지요. 그러면 행복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도마 위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그것은 주께서 원하는 데로 주의 뜻대로 하시는 대로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역시 숫양 두 마리 잡거든요. 이건 제사장 위임식과 똑같아요. 한쪽 관유로 기름 바른 오른쪽 자리에 피 바르지만 여기선 피부터 바르고 기름을 나중에 바르게 돼있어요. 제사가 3단계일거예요. 2단계가 새 잡는 것이고. 그 이야기가 14장에 계속 나옵니다. 여러분이 레위기 13장, 14장을 정기적으로 성경 읽을 때 몸이 비틀립니다. 재미 하나도 없어서 이곳을 빨리 지나가고 싶지요. 특히 개역성경은 번역 이상해서 쉬운 성경 보고 지나가고. 그런 식으로 넘어갑시다. 15장 봅시다. 유출병이 있는데 장기 유출과 단기 유출이 있습니다. 장기 유출은 병입니다. 그냥 몸에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거죠. 백혈병이 될 수 있고, 신약에 혈루증이 될 수 있고. 그런데 단기 유출은 여성의 월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성이 한 달마다 몸에서 피가 나올 때 세상에선 이렇게 봅니다. 여성이니까 보호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거든요. 여성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몸 안의 피가 몸 밖으로 나오게 되면 더러움이 되거든요. 원래 몸 안에 있을 피가 몸 때문에 피가 더럽다는 말이에요. 피는 생명인데 몸 때문에 더럽게 된 거예요. 인간은 더러운 목숨을 아껴가면서 안 빼앗기려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더러움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주어지는데 이 저주는 생각 안 하고 그저 내 몸이니까 자기 몸 지키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보약 먹고, 운동하고, 다이어트 하고, 수술하고, 온 천지 병원 간데 또 가고. 이것 고장 나면 저것 고장 나고. 그냥 몸 하나 챙기려고. 그런데 여기서 바깥으로 피가 나오니까 이건 자연의 이치다.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사람들이 자길 정당화하는데 그걸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하잖아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봐주는 것 없어요. 이게 바로 죄다. 이걸 합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이란 뜻이에요. 그러면 왜 그 피를 땅에 흘리면 안 되느냐? 땅을 거룩하게 하는 피가 따로 있어요. 희생제물의 피만이 이스라엘이 사는 약속의 땅을 거룩하게 할 수 있어요.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피만이 천국을 천국답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하는 그 대목 생각나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올라가보니까 천사가 날개 여섯으로 자기 발을 가리고 몸체를 가리고 영광을 돌리죠. 기억나시죠. 그걸 보고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이사야는 천사처럼 더러운 것을 가릴 날개가 없습니다. 인간은 날개가 없어요. 자기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걸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천사처럼 뭔가 겸손할 수 있는 부속품이 없어요. 인간은 그대로 쏟아놓습니다. 더러운 것을 계속 쏟아놓으면, 월경이 나왔다는 말은 여자만이 더러운 자식, 죄의 새끼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퍼뜨리고, 퍼뜨리고, 퍼뜨립니다. 다행인지 한국은 출산율이 낮아요. 더러워지는 속도가 늦춰지지만 인도, 아프리카, 이슬람 계통은 있는 데로 다 낳으니까 그것도 여자 넷이나 데리고 있는 데로 낳으니까 왕자가 30명인가, 50명 되듯이. 세종대왕도 왕자가 스물 몇이나 될 거예요. 세종대왕은 천국 갑니까? 얘들이 그런 질문하잖아요. 뭘 잘했다고 천국 가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으면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몸, 독 안에 든 쥐새끼 번식하듯이 저주 아래서 죄 아래서 그저 퍼진 것뿐이에요. 자식 낳고 22개월까지는 예뻐요. 23개월 넘어가면 지가 왕 질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인 세계에 아기 하나 낳으면 걔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요. 기도도 못해요. 기도하면 지 재롱부리는 것 구경하라 하고. 밥 먹는 숟가락까지 뺏고. 제가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외손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가정이. 그래도 비실비실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악과적인 체계에 의하면 가난하고 아픈 것보다는 까불고 밥 잘 먹고 뛰어노는 게 감사 요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도 덩달아. 어쨌든 간에 여성이 월경한다는 것은 여성이 대표해서 인간이 아기 낳는 것도 죄라는 통로를 통해서 산도, 통로 자체가 더러움으로 가득 찬 것으로 통해서 더러운 자식이 더러운 세상에 나와서 더 더럽게 만들죠. 12장 4절에,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이건 아들 낳았을 때고 딸 낳았을 때는 66일 동안 더럽다. 이걸 통해서 남자와 여자를 이 땅에서 차별 두는 거죠. 창세기 2장, 3장의 사건을 주님께선 잊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여자가 먼저 유혹당해서 범죄가 이뤄졌고 남자가 동조해서 완전히 개판됐다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걸 뒤끝 있다고 이야기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라 하는 것은, 나이 40에 죄라 하는 것은 40 동안에 자기가 선과 악을 구별해서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라 하지만 정작 주님이 보시는 죄는 우리가 경험하지도 않은 우리 선조가 경험한 것까지 모든 죄를 아는 상태에서 죄인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유도 모르는 채 죄인의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 안 따먹었는데 하나님 쪽에서 선악과 따먹었다고 닦달한다고 나와요. 그게 개인 구원의 사고방식에 젖어서 그런 거예요. 주님께선 개인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소속된 그 자리, 다른 공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겨지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옮겨질 때는 주님의 내부의 균열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대신 치르는 속죄제, 번제를 우리한테 적용시키고 그 제사의 제물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의인 된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죄에서 의로 가신 분은 오직 한분밖에 없다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레위기를 홀로 다 이뤘어요. 십자가에서. 죄를 의로 이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말씀 하나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 다 지킨 상태가 돼버립니다. 남편이 철없는 여자가 있는데 남편이 이제부터 신부하라는 순간 이 가정은 남편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남편이 이룬 모든 성과에 아내는 그냥 숟가락만 얹질 뿐이에요. 숟가락도 필요 없어요. 그냥 맨손으로 와도 괜찮아요. 그냥 죄악 된 철없는 몸으로 들어오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들어오면 되는 겁니다. 문제는 들어와도 철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철이 없다고 할 때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잖아요. 예수 안에서 철이 없다는 말은, 철이 없는 데서 철이 나는 게 아니고 과연 내가 철이 없다는 것을 깊이 있게 반복해서 아는 겁니다. 철 좀 나자가 아니라 이토록 철이 없었나, 하고 깊이 알면 알수록 남편 되는 사랑은 더욱 더 많이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에서 의로 옮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에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죄에서 의로 변경되면서 나오는 완성됨 속에 레위기가 들어있다고 했지요. 그 레위기를 우리가 도마니까 우리가 아바타니까 우리 몸에 퍼붓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상태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증거하는 용도로서 주께서 활용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구원이란 소유가 아니고 관계라는 말을 이해하셔야 돼요. 현대인들에게 관계라는 게 점점 없어요. 처음부터 인간은 1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아무리 친구가 100명이라도 결국 나 하나에 시선 모으게 만드는 전략으로 친구를 사귀기 때문에 100명이라도 소용없고 하나로 귀환됩니다.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쪼갭니다. 쪼개면 ½이 되는 게 아니고 온전한 우리와 쪼개며 들어오신 새로 오신 한분이 있어요. 1이 아니고 2가 되죠. 하나님의 내부가 생각나죠. 하나님의 내부 때문에 중앙에 계신 게 아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긴다 했지요. 언약적으로 완성이 돼야 오른쪽으로 주의 자리에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삐딱하게 앉았어요. 하나님을 섬기면 안 되고 삐딱한 분, 주를 섬겨야 돼요. 주가 우리의 하나님이에요. 주의 자리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어요. 중앙에 있는 게 아니고. 오른쪽에 있다, 한쪽에 빠딱하게 쏠려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야기할 때는 나는 이런 인간이었다고 결부해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옳다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를 천국 넣어주는 건 천국이 아니고 죄인을 천국 넣어주는 거예요. 천국 가서도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 죄 묻지 마세요, 라고 하지 말고 면류관을 반납해야 되죠. 주님과 우리 관계가 영원하려면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이 계속 같이 영원히 가야 돼요. 친구라고 해서 맞먹고 천국 왔다고 행패부리고 옛날 행세 나오고, 나도 천국 왔다, 선악과도 없겠다 마음대로 살래, 이런 개별 행동은 안 됩니다. 이미 주님께서 사전에 죽기 전에 우리를 주님 안에 옮김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집단적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가 하나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집단적이에요. 집단적 주체가 되어서 1과 2가 돼요. 이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 관계를 사랑이라 하고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1이 있으면 1은 법을 보여주게 돼있어요. 내가 잘했나, 못했나? 그런데 2가 되면 관계, 사이를 보여주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사랑을 지금 생각하느냐, 안 하냐? 이렇게 돼요. 내가 행동이 얼마나 바른지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서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우리가 체크할 수 없는 많은 변수들의 여기에 복합적으로 관여하게 돼있어요. 고속도로에서 차를 운전할 때 무사히 부산에서 울산까지 왔다고 치 그 중에 어떤 변수가 있었느냐 하면, 터널 지나갈 때 70개의 휘발유통을 과적하지 않은 화물차야 되고 운전자가 76세 할아버지여선 않은 조건 하에 무사히 울산에 도착한 겁니다. 타이어 펑크 나서 덮어버리면 차 전소되어 창원터널 사건처럼 다 없애버리죠. 우린 생각하기를 내가 운전자만 보니까 오늘도 손 떨림 없이 잘했구나. 지가 운전한 지한테 격려하고 칭찬하지만 수많은 변수들이 있어요. 또 울산 왔는데 졸음 운전하는 사람이 그 공간에 아무도 없어야 돼. 그러니까 사람이 한평생 이만큼 산다는 것은 그동안 보이지 않는 요정들, 작은 천사들이 얼마나 커버해줬는지 몰라요. 보통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그동안 살면서 죽을 뻔 한 적이 일곱 번 거쳤다. 맞아요. 일곱 번 더 될 걸. 아마 수십 만 번일 거예요. 남자애들 치고 옛날 골목에서 차 다녀도 겁 없이 앞도 안 보고 건넙니다. 여자애들은 집에서 소꿉놀이 하느라 모르지만 저 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몇 번이나 차 사고로 죽을 뻔 한 적 많아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란 말. 그리고 여러분, 죄 졌는데 안 들킨 경우가 많았잖아요. 이제야 말한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컨닝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열 번 하면 한 번 걸렸잖아요. 컨닝 기술은 갈수록 발달해요. 고3 되면 도사 다 되지요. 대학 가면 더 하고, 신학교 가면 더 하고. 어른 돼서 하니까 얼마나 노련하게 하겠어요. 저는 신학교에서 종치기 전에 시험지 내는 이유가 컨닝하는 것 보기 싫어서.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점수 안 나와도 그냥 내고 나왔어요. 선지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어떤 실망감, 그런 것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내고 나온 겁니다. 인간은 반드시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따지게 돼있어요. 이번 행동은 선했을까, 악했을까? 이런 것이 계속해서 있는 한 반드시 튀어나옵니다. 마귀가 너는 신이라고 우리한테 격려하는 거예요. 마귀는 배후에서 모든 걸 결정해놓고 그 결정한 것을 우리한테 일임해놨어요. 그 결정 받을래, 안 받을래? 일은 마귀가 꾸미고 책임은 우리가 다 미루는 거예요. 인생이 힘든 이유가, 자기가 결정하지도 않은 일에 본인이 수습한다고 그렇게 힘들어해요. “아이고, 쟤가 공부 못하는 것은 다 내 머리 탓이다. 엄마가 공부를 못하니 저리 됐다.” 천주교처럼 내 탓이요 가슴 친다고 공부 잘할 줄 압니까?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네 몸은 마귀를 거쳐서 왔기 때문에 이미 네 자체가 인간도 아니고 짐승보다 더 못한 거예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을 천국으로 보내는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거예요.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의 원형 되신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속에 1이 아니고 2가 발생되는 거예요. 두 인격체가 있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돼요. 그 둘 사이에는 따지는 법적인 차원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가 희생했느냐고 물어요. 밥이 맛있게 된 것이, 쿠쿠 덕분이냐, 십자가 덕분이냐고 묻는 겁니다. 역시 밥솥 하나는 잘 골랐어. 그것도 하이마트에서 세일할 때 잘 샀어. 자꾸 밥하는 것도 돌이켜서 원인과 결과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가져가는 겁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쨌든 자기를 선한 쪽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가 희생했는지 우리한테 묻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누가 죄인인가? 그 죄인을 위해서 누가 희생했는지 묻습니다. 그 희생을 마태복음 7장에 열매라고 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열매가 돼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그것이 열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하지 않았나이까, 할 때 주님께서 자기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실적 위주기 때문에. 실적이 아니고 희생이라니까요. 실적만 챙기는 나 같은 인간을 누가 희생했는지 최종적으로 열매로 등장해야지 내가 선교사 해서 파키스탄사람 이백 명 모았습니다. 내가 아프리카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내가 울산에서 개척교회 열군데 했습니다. 강의를 여러 곳 합니다. 이런 것은 실적이지 열매가 아니에요.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는 이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희생했다는 게 열매가 돼야 된다고. 한국교회에서 제일 주의할 게 있어요. 기존의 교회를 자꾸 교회라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어느 교회 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기존의 교회를 교회로 보지 말고 절간으로 보세요. 그러면 어느 교회를 선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준으로 어느 교회 간다고요. 가서 교회가 아니고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 다녀도 그 교회가 우상이 안 되기 때문에 교회 없이 복음과의 관계,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관계로 연결된 성도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합기도 도장에서 교회하는 게 나쁜 게 아니고 교회를 하던 뭘 하던 상관없는데 실적을 뜯어먹을 생각을 하지 말란 말이죠. 이 피아노는 누가 갖다 바쳤고, 봉사는 누가 했고, 유튜브는 누가 찍고 자꾸 실적을 내세울 게 아니고 피아노를 내세요.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 마음 두게 돼있어요. 인간은. 피아노를 내면서 피아노 헌물하는 죄를 지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캐나다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헌금하는데 봉투에 이런 멘트를 날렸어요. “재정집사님, 또 죄를 짓습니다.” 헌금하는 게 죄라고 제가 설교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집사님 보고 캐나다 계신 분에게 연락하라고 했어요. 죄 자꾸 지라고. 피아노를 바치는 게 죄 짓는 것이기 때문에 피아노 광내는 누가 죄 짓는 짓을 하세요. 모든 하는 게 왜냐하면 1이 아니고 2, 사랑관계기 때문에 그래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님은 그 원칙을 변경할 의사 없습니다. 주님은 뒤끝 있어요. 절대로 자기 원칙. 성경이 그렇게 복잡하지만 따져보면 간단한 명제 같은 게 있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네가 얼마나 착한지는 의미 없어요. 그건 실적으로 나타나니까. 그건 사탄이 사랑을, 희생을 가리기 위한 짓거리에요. 유출병이 있으면, 14장에 보면, 산비둘기 둘, 집비둘기 둘이죠.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이 1이 아니고 2가 된다니까. 2가 돼야 둘 사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내부 정보, 아버지가 아들을 버림으로써 아들과 함께 있는 자는 아버지가 다시 건진다는 그 복음이 지상에 율법을 통해서 펼쳐지는 겁니다. 그리고 장기 유출은 그렇고, 단기 유출은 월경인데 모든 것을 다 씻어버려라. 그러니까 사람 자체가 부정하다는 거예요. 천국에 못 온다는 겁니다. 그럼 천국은 누가 가느냐? 아들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만 가요. 아들에 의해서 이미 중심에 예수님이 자리 잡은 사람만 천국 가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눈에 보이는 사회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언약은 말씀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에요. 어떤 법칙, 원리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지시를 통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제3의 언약의 요소를 만들어내야 돼요.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데 13, 14, 15장이 끝났으니까 이야기합니다만 전에 언약이 없을 때 여자들이 월경을 했습니까? 했지요. 제3의 것이 아니에요. 그전부터 여자들은 피를 흘렸고, 유출병 있었고, 남자들은 설정이라 해서 정액을 땅에 쏟아냈단 말이죠. 동침한 자도 다 더러운 거예요. 하여튼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다 더러운 거예요. 몸 자체가 더럽단 말이죠. 이런 것들이 옛날에도 있었어요. 언약이 오니까 새로운 게 없어요. 추가된 게 없어요. 없는데 누가 규정합니까? 언약적으로 더럽다, 불결하다고 규정해버리죠. 그러니까 이 규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속에 뭐가 들어왔단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언약이 그 사람 마음 중앙에 이미 들어온 게 돼요. 이게 사랑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람은 그 사랑에 예속이 되고 을이 되는 겁니다. 복속이 돼요.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삶이란 것은 옛날에는 본인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새 언약,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그 생활에 남들 보기에 새로운 건 없어요. 옛날과 똑같은데 거기다 의미와 취지나 가치가 완전히 새롭게 부여하면서 보이지 않는 분을 자꾸 언급해요. 주님이 하셨다.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다. 주님 어디 있는데? 네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나는 알아. 자꾸 이렇게 중앙에 계신 분을 중심으로 해서 자기는 거기에 종속돼있다고 바깥으로 드러낼 때 이것이 바로 주의 증인이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 되는 것. 성도의 삶은 새로운 실적은 없어요. 하루 세 끼 먹고 어떤 사람은 두 끼 먹고 아침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학원이 안 되다 얘들 몰려서 잘 되고, 이런 것 없어요. 바쁠 때도 있고 안 나올 때고 있고. 스케줄은 국가 스케줄로, 국방부 스케줄로 예수 믿는다고 군대 빼주고 그런 것 없거든요. 그건 여호와증인이 지가 알아서 빼려 하고. 똑같은 데 의미가 다르다고. 몸 아플 것 아프고, 독감예방주사 맞을 건 맞고, 감기 걸리고, 날씨 추우면 으스스하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어요. 타이어 공기압 없으면 펑크 나고 똑같은 데 범사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게 벌써 시작한 천국생활이에요. 기도합시다.하나님 아버지, 이미 성령이 임하면 하늘나라가 바로 성령 안의 세계라는 것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했는가가 아니라 나를 누가 사랑했고 희생했는지 자랑하고 증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