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3a 울산강의-레위기 13장 : 하나님의 내부
20171103a 울산강의-레위기 13장 : 하나님의 내부(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3장, 14장, 15장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피부병에 대해서 제사장이 진찰하는 일에 관한 지시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관찰이죠.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지가 중요한 데 그건 제사장이 보통 인간이 아닌 문둥병자를 관찰합니다. 그 이유가 문둥병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저절로 낫게 하시는지 살피는 거예요. 이걸 그림으로 보게 되면, 문둥병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 두는 이유가 나올 겁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제사장을 통해서 관찰하고 여기에 대해서 제사장은 문둥병자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일, 활동, 행위에 대해서 제사장이 관찰하는 겁니다. 그러면 문둥병자와 하나님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많은 성한 사람들, 정상인, 건강한 사람을 젖혀두고 문둥병자에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고 제사장이 관여하게 하신 것은, 문둥병자는 이스라엘이 텐트를 치게 되면 중앙에 성막이 있고 간격은 7.2km 쯤 돼요. 20리 가까이 되죠. 이스라엘 진 밖에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못 들어와요. 이스라엘 진을 거룩이라 하고 바깥을 세속, 거룩이 아니니까 저주 지역이죠. 하나님이 내놓은 지역이죠.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거룩의 영역에 들어오질 못해요. 들어오지 못한 자들을 내버려두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관찰하란 말은, 이 저주가 어떻게 복으로 바뀌는지 경계 선상에 등장한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하게 되는 경과, 경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실험대상이 되는 나라거든요. 이 민족이.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는데 성경이 기록된 취지가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 쪽에서 알려 줄 때 아는데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시냐에 대해서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는 레위기를 보고 있고 레위기 중에서도 13, 14, 15장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문둥병자에게 주목하란 말이죠. 문둥병자를 제사장이 우리를 대표해서 관찰하고 있는 겁니다. 문둥병자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에 있어요. 저주 받아라. 잘 됐다. 나만 저주 안 받으면 돼. 개인적인 안심과 자족에 빠질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문둥병자에게 주목하게 만들어요. 레위기 13장, 14장. 13장 의미는 그냥 14장을 받쳐주기 위함인데 13장은 그냥 피부병이에요. 14장은 문둥병입니다. 문둥병을 관찰할 때 바로 문둥병에 접근하는 게 아니고 제사장은 피부병에 주목하면서 14장에서 문둥병에 도달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피부병과 문둥병을 의도적으로 구분 짓는 거예요. 피부병자는 진 안에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러나 진 밖의 문둥병자는 못 들어와요. 못 들어온다는 게 중요해요. 쉽게 말해서 지옥이고 여기가 천국이라면 천국 갔으면 그만이지 지옥은 생각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지옥을 살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음에 자족할 게 아니라 저 지옥 간 사람과 내가 다를 바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서 천국 가게 됐는지 그 경로와 중간에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 믿는 자가 되고,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천국 가게 하기 위해서 일한 적이 없는 하나님이거든요. 그런 하나님 아니거든요. 혼자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욕심으로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는 분이라고 스스로 종교 만들어서 그에 도취되어서 지옥 가고 있으면서 천국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사적으로 천국 갔다고 자기 장래를 안심하는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지옥과 저주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죄가 전제 돼야 의가 나와요. 죄가 없는 곳에 의가 없고, 저주 없는 곳에는 축복이 없어요. 저주 속에만 축복이 있어요. 축복을 알려면 저주로 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려면 자기가 죄인이 돼야 돼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란 말이죠. 산 자로 간주하지 말고.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게 당연하다. 그 자리를 유지하란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자기 죽음의 터를 자기가 짊어지는 거잖아요. 이 말은 십자가가 나를 대표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 정도로 잘났다, 한 달 수입 이 정도라고 자랑하지 말고 내 본모습은 내가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소유가 얼마냐, 부동산이 얼마냐가 아니라 나는 죽음을 짊어지고 있는데 내가 짊어진 것보다 소중한 건 없다. 그게 십자가죠.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거예요. 십자가가 계속 유지돼야 나는 구원받았다는 소리가 안 나오고 주님이 나를 구원했다고 계속 나와요. 십자가를 계속 져야 내 힘으로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내 힘으로 예수 믿어서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종교적인 발언이 안 나와요. 종교적인 자기 행세가 안 나온다고요. 그건 취미생활이거든요. 그게 아니고 나는 실패했는데 안 되는데 안 되는 걸 되게 했다는 것이 계속 나와야 돼요. 육으로 나온 것은 계속 육이기 때문에. 육으로 나온 것은 육이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구원받은 것 아니에요. 심지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이야기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란 말이죠. 성경 전체를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란 말이죠. 성경을 외울 만큼 내가 덜 육이 된다든지 육에서 살짝 들렸다든지 그런 것 없어요.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나와야 되기 때문에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십자가를 포기해서는 안 돼요. 복음은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 피가 구원의 능력이지 구원의 능력이 부활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나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습니다. 문둥병자가 거룩의 경로를 이야기할 때 제사장이 관찰하라 합니다. 제사장은 그 당시 거룩의 표상입니다. 거룩 된 자들 중에 대표자에요. 대표자로 하여금 문둥병자를 관찰하게 함으로써 거룩의 마감, 제사장의 모습까지 문둥병자가 어떻게 합치되느냐, 운명이 일치되는지 보게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제사장 위임식하는 방식과 문둥병자가 나중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진 안에 들어올 때 1~3단계 제사의식을 거치는데 특히 3단계 의식이, 일반인이 제사장 되는 위임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문둥병자가 문둥병 걸렸다가 일반인처럼 성한 사람 되는 그 정도의 변화가 아론의 아들이 제사장 될 때 거창하게 하잖아요. 그 위임식과 같은 레벨이 됩니다. 그리고 제사장할 때 했지만 제사장이 거룩함의 대표자가 된다는 말은 여기서 어려운 과정을 겪는데 원래 거룩한 것은 제물이 거룩하거든요. 제물은 동물 아닙니까. 짐승이란 말이죠. 어떻게 짐승의 거룩이 인간의 거룩으로 바뀔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절차에 하나님의 제사법이 어떤 식으로 삽입되어서 짐승으로 표현된 거룩이 인간을 통해서 거룩이 표현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돼야 예수님이 장차 말씀을 이루실 때 거룩한 제사장 되는 것과 관련돼있어요. 물론 신약은 구약의 완성으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이야기하기 전에 구약을 통해서 문둥병자가 거룩 되는 것, 그리고 아론의 자손들이 거룩한 제사장 되는 경로와 유사하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지 알아야 됩니다. 문둥병자는 어떤 징조를 보여주는 데 죽음의 징조입니다. 문둥병자는 진 밖으로 나가서 그 병으로 인하여 죽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지만 그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을 유발하는 하나님의 과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아요. 저주받아 죽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주해서 죽었던 사람을 다시 저주가 풀리고 거룩에 참여시키는 그것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거룩의 경로를 제대로 온전하게 보여줄 수 있어요. 죽음인데 문둥병자가 죽음의 징조잖아요. 죽음의 징조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결국 죽음에서 부활된 것과 같은 겁니다. 문둥병자가 성한 사람 되면서 나는 어떻게 성한 사람 됐는지 할 때 그 속에 투입된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속죄제와 번제 제물이 투입되는 겁니다. 특히 속죄제물이 투입된다는 것은, 네가 죄 때문에 문둥병에 걸렸고 그것에서 풀려나는 것은 그 죄에 대해서 그 죄를 없애주는 절차로 성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문둥병자는 일반적으로 병들어 죽는 게 아니고 죄라는 원형을 깔끔하게 다 보여주는 겁니다. 문둥병자가 저주받는 원인은 바로 하나님 앞에 죄 지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굉장히 깊어지면서 어려워져요. 도대체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문제에요. 죄 때문에 지옥 간다고 할 때 그 죄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가장 풀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거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면서 꼭 방해되는 게 있어요. 죄도 모르면서 죄 안다고 우기는 우리 자신의 죄 관 때문엔 진실로 저주 내려야 될 하나님의 죄 관이 감춰지는 거예요. 나쁜 짓하면 죄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욕하면 죄고, 거짓말하면 죄고, 큰소리치면 죄고. 우리가 아는 일반사회에서 남한테 해코지하면 죄라고 여기거든요. 그런데 사람한테 가장 해코지하는 분이 하나님이죠. 못 살게 굴잖아요. 나이 45에 결혼도 안했는데 좀 살려주지 인물도 되고 연기되고 성격 되는데 왜 대낮에 차사고로. 진짜 박정희 죽은 것보다 온 국민이 다 애도하고. 박근혜 죽어도 그렇게 애도 안 해요. 김대중 죽어도 그렇게 애도 안 합니다. 세월호 얘들 누가 죽였습니까? 김주혁 영화배우 누가 죽였습니까? 주님이 죽였잖아요. 왜 웁니까? 이건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과 하나님의 세계관이 왜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김주혁이란 영화배우가 살아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죽여 버렸잖아요. 하나님의 세계관과 내 세계관이 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강의를 잘한다, 설교를 잘한다 할 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원리와 우주가 운행되는 원리가 일치 될 때 가장 설교를 잘한 거예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돼요. 만약에 설교를 했는데 그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지옥에서 통곡할 그런 내용을 설교해야 돼요. 나는 왜 진즉 그걸 몰랐을까? 그런 것.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고 레위기 13장, 14장, 15장, 16장 이야기했는데 나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금요일에 참석도 못하고 그걸 왜 몰랐는가? 세상이, 울산이, 한국이 이렇게 돌아가는 데 그게 레위기 13장에서 뽑혀져 나와야 돼요. 지식 하나, 정보가 아닙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자를 대표하잖아요. 대표한다고 좋아하지 말고 문둥병자가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고 생각해야 돼요. 죄로 인하여 곱게 저주받아 마땅한 그 문둥병자가 우리 인류를 대표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류가 가운데 거룩한 제사장은 한 명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거룩한 제사장이에요. 단회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제사장으로 오신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대표하는 제사장과 온 인류를 대표하는 문둥병자로 세상 우주를 운영해요. 한 조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앞에 모든 죄인을 합해서 조를 이뤄서 운영한단 말이죠. 예수님 같은 경우에 예를 들면, 예수님과 양쪽에 있는 강도 둘, 예수님이 계신다면 뒤에 코러스 여자 둘 있는 것과 똑같은 거죠.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예수님은 당연히 구주고 둘은 당연히 지옥인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한쪽은 천국, 한쪽은 그냥 이 세상에 살던 대로 살면 그 자체가 울산바닥에 살면 지옥으로 하수구가 연결돼있어요. 대구와 지옥이 연결돼있단 말이죠. 살던 대로 그냥 살면 돼요. 지옥 가서 살면 돼요. 희망 없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하수구에 빠져 지옥 가야 되는데 그 힘보다 더 센 힘, 부활의 힘이죠. 갑자기 주님의 나라에 간택 되어 뽑혀서 가버린 겁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죄인, 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 내부에서 나왔어요. 하나님을 우리가 숫자 1로 친다면 문둥병자, 제사장은 갈라졌으니까 2가 되죠. 하나님께서 2가 되면서 자기 내부를 우주라는 현실로 만들어내신 겁니다. 하나님의 내부가 펼쳐진 것이 우주의 원리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내부가 펼쳐진 게 이 세상이에요. 한쪽은 죄인이고 한쪽은 예수님입니다. 그러한 무대가 되지요. 하나님이 활동하는 무대가. 그런데 인간들은 상상하기를 우주에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우리 상식이고 성경에선 하나님은 중앙에 있는 게 아니고 오른편에 있어요.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가면서 비로소 진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분이에요.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가는 과정이 언약입니다. 아론의 자식이 제사장 되면서 위임식을 행하거든요. 위임식이 레위기 8장에 나옵니다. 위임식 행할 때 처음에 속죄제에 대해서 수송아지 한 마리 잡지만 숫양은 두 마리 잡아요. 속죄제는 한 마리, 번제는 두 마리 잡습니다. 1이 2로 발전해요. 이러면 구라치는 것 같은데 구라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사는 하나님의 내부를 보여줍니다. 그 내부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무대가 되기 위해서 저주받아야 될 이 세상, 이렇게 한 조가 되어 움직이지는 거예요. 이 세상이 저주받는 이유는 선악과를 통해서 생명나무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의도적으로 따먹게 함으로 선악과를 통해서 생명나무로 가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가? 불가능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지요. 선악과에서 생명나무로 간다면 선악과의 원리가 있을 거예요. 어떤 원리라도 생명나무 본질에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추방했으니까. 불가능한 원리를 주님께서 오셔서 선악과 속에 생명나무 원리를 심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선악과 내부를 쪼개게 해요. 이걸 저는 균열이라 합니다. 쪼개기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아들을 버리죠. 하나님 내부의 쪼개짐을 지상의 쪼개짐으로 반영시켜요. 하늘의 쪼개짐과 지상의 쪼개짐이 상응해서 같이 이뤄지는 겁니다. 숫자로 하면 1에서 2로 바뀌어야 됩니다. 레위기 8장에 제사장 위임식 나와요. 속죄제 할 때 수송아지 1마리 잡아요. 그 다음에 번제에서 수양 2마리를 잡아요. 한꺼번에 잡지는 않아요. 첫째 수양을 먼저 잡아요. 잡게 되면 피가 나오는데 피 나오기 전에 8장 12절에 보면, 관유로 아론과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요. 기름 바르고 피를 그 위에 얹어버립니다. 제사장 쪽에서는 그래요. 그런데 문둥병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성하게 되고 난 뒤에는. 진 밖에 문둥병자가 진 안으로 들어올 때는 무슨 경로라 했습니까? 더러움이 거룩하게 되는 경로, 절차를 보여준다 했지요. 방향이 이쪽으로 되거든요. 제사장 위임식 할 때는 ‘기름+피’지만 문둥병이 깨끗하게 되는 정결예식은 ‘피+기름’으로 순서가 바뀌어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제사장이 품고 있는 혜택이 문둥병으로 하여금 그 죄를 사해줬다. 신약에선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했지요. 제사장이 문둥병의 죄를 사해줌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름과 피를 더해놓고 피를 바를 때 장소가 어디냐 하면, 오른쪽에 발라요. 이 말은 보통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신은 한 분이기 때문에 둘로 쪼개질 리가 없어요. 오직 하나의 하나님이에요.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신은 최종적으로 결합된 모습이기 때문에 가장 유일한 최고의 정점을 차지하는 분이기 때문에 신이 둘되면 또 하나가 될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건 준 신이지 신의 최종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인간이에요. 악마가 심어준 선악과가 심어준 사고방식은 신은 최고의 선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건 인간들 생각이고 정작 하나님 생각은 1이 아니고 2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2에서 하나 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식으로 1로 통일되기 때문에 인간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1이 아니고 2로 유지해줘야 돼요. 심지어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요한계시록에 보좌가 두 개 나옵니다. 계속 두 개에요. 줄곧 두 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와 또 하나는 어린양의 보좌. 물론 생명수가 나오는 줄기는 같지만 보좌가 따로 있어요. 뿌리는 같은데 보좌가 따로 있다고. 그건 천국이란 하나님께서 통합된 게 천국이 아니라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 그 분을 주라 합니다. 그 주를 주 되게 하는 기념하기 위한 세상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천국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그냥 천사가 사는 동네지 하나님께서 계획한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아들의 나라가 돼야 돼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한 종교성을 품고 최종적인 신의 나라는 아닌 겁니다. 예를 들면 모든 이천 년 교회신학은 쓰레기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을 달래서 그들로 하여금 교인 만드는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체계가 이천 년 동안 교회신학을 유지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신은 최고니까 절대자니까 우리는 그 신을 섬기면 된다고요? 주님은 그것 때문에 죽었어요. 그게 바로 선악체제에서 나온 최고성, 최고의 진리, 최고의 가치, 그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심어준 아담의 자손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신개념입니다. 그걸 철학에선 존재의 사슬이라 해요. 존재와 존재, 최고의 존재는 신이다. 안셀무스가 이야기한 겁니다. 안셀무스도 이야기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야기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오늘날 천주교신학이에요. 개신교도 마찬가지고 루터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은 오른쪽에서 와요. 예수님의 주되심을 높이기 위해서 성령이 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성령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건 성령 안 받아도 오히려 성령 안 받아야 아는 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건 타고난 인간의 양식이고 이성이고 상식입니다. 신을 믿자, 신의 영광을 위해서. 악마의 상식이에요. 그렇게 범죄 한 깡패도, 중도 넘어지면, “아이고, 하느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건 모든 인간에 거부반응이 없어요. 왜? 그들이 하나님을 아니까. 아담의 몸에서 나온 하나님이거든요. 아담의 몸이 사탄의 지배하에, 선악과의 지배하에 있어요. 그게 바로 레위기 13장에 나오는 문둥병자입니다. 자기는 신을 아니까 멀쩡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적인 제사나 계시에 의해서 그게 바로 저주받은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걸 알 리가 있습니까? 모르지요. 그러니까 멸망한 겁니다. 오른쪽 귓불, 오른쪽 발가락, 온 전신이 오른손이 하신 일로 뒤집어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문둥병자와 제사장은 동기생이 되는 겁니다. 둘 다 오른쪽에 한쪽은 피와 기름으로, 이쪽은 기름과 피로. 이쪽은 제사장 기능으로 피를 생산했고 문둥병자는 우선 피부터 용서받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피가 제사장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둘 다 실험대상자입니다. 그걸 마루타라 합니다. 737부대, 만주에서 생체 실험한 것처럼. 마루타라 하니까 기분 나쁩니까, 역겹습니까? 마루타는 자기감정 없지요. 성도도 감정 없어야 돼요. 내 감정에 내가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울고불고 회개하고. 본인도 믿지 말아야 돼요. 울고불고 내가 죄인입니다, 해놓고 돌아서서 헤헤 거리고 있는데. 기도원에서 울고불고, 내려와서 불 한 잔 먹고. 인간의 감정이란 것은 자기가 어느 정도 얼추 죄를 제거했다고 생각하는데 죄는 인간이 지어서 죄 진 게 아니고 죄가 가득 들어있는 데 그걸 다 못 다 써먹어서 죄에요. 지금 나이 90됐습니까? 80보다 죄를 더 써먹었어요. 아직 남아 있는 쿠폰 많습니다. 중국집 이사 가기 전에 쿠폰 써야 되는데. 아담의 몸이 갖고 있는 죄는 성경 율법 전체로 커버되지 내가 기억하는 죄로는 커버가 안 돼요.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저지를 수가 있을까? 그래, 네가 더 살려줄 테니까 살아가면서 몸소 체험하라고 나옵니다. 따라서 몸이 성하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고 있는 거예요. 정말 턱뼈에 종양 한 번 올라봐야 정신 차리지요. 우리 몸이 망가진다 할지라도 백골난망이라니까. 아무리 이야기해도 우리가 건강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잘난 게 없기 때문에. 럭비공 같아서. 몸이 아파서 성경이 안 보여요. 눈이 침침해서. 눈 뜨면 성경 보겠습니다. 몸이 나면 기도하겠습니다. 말이나 안 하면 천만 다행이죠. 말까지 하거든요. 건강하고 나중에 몸 돌아와 보세요. 일본여행에, 다방에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으면 못 노나니. 자기 쾌락 즐기기 바쁘지 언제 기도, 이런 것 안 해요. 지가 잘나서 건강한 줄 안다니까. 새벽에 운동해서 건강하고, 다이어트 해서 체중 유지한 줄 안다니까. 문둥병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우리 내부에 문둥병 백 번 걸려도 당연한 요소가 동일하게 공통적으로 담겨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문둥병은 마루타 같아서 실험대상자에요. 문둥병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제사장 따라서 문둥병을 주목하세요. 그리고 진 안에 있는 사람들 자기가 잘나서 문둥병 아니라고 여기고 자기는 훌륭하기 때문에 복 받았다고 여기는 인간들, 하나님의 구원의 경로가 여러분한테는 나오지 않는 것을 감안해야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고 십자가 은혜가 나오기 위해서는 특별하기 하나님께서 문둥병 되게 하시고, 날 때부터 소경되게 하시고, 날 때부터 12년 동안 귀신 들리게 하시고, 앉은뱅이 되게 하시고, 삼남매가 그렇게 잘 살다가 졸지에 병들어 죽어버리고. 죽은 지 사흘 되도록 주님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뒤늦게 나흘 째 장례식 다 끝났는데 그제야 와서 죽었는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예수님께 맛있는 잡채 드리고 온갖 정성으로 섬겼던 마르다 마리아 가정에 기둥 같은 오빠가 젊은 나이에 죽게 해서 다 떨어지게 만들고. 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내부를 특별히 그 가정에 쏟아 부은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 우주의 청사진을 특별히 그 가정에 담은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걸 완전히 실험으로 보여줘요. 죽은 지 나흘 된 오빠가 살잖아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면 나는 이제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되도 않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생명주셨으니 이젠 바르게 살아야지.” 그런 식으로 고백 나오면 안 돼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주여, 늘 죽이고 늘 아파다 할지라도 제가 그게 감사하나이다.” 반드시 성령을 받으면 특징이 있어요. 고맙고 감사해요. 아침밥을 쿠쿠에 했는데 갑자기 김이 올라오는 밥을 보고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근거가 반드시 문둥병부터 시작해요. 왜냐하면 내게 이 밥 안 줘도 되고 죽어 마땅한 데 하나님께서 살라고 밥을 주셨구나. 밥을 짓는다는 자체가 죄라고 느낄 때만 밥상 앞에서 고맙고 감사함을 느낍니다. 만약에 밥이 찰 지게 잘 돼서 고맙고 감사하게 되면 그 다음에 밥이 죽 되면 고맙고 감사함이 안 나오잖아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오늘도 죽밥 먹으란 말입니까, 불평이 나오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는 특징은 모든 일에 고맙고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도 마음만 낮추면 문제 될 것 없어요. 서로 칭찬해주면 안 되나, 하는데 칭찬해줘도 문제가 큽니다. 자기가 잘나서 칭찬받음이 마땅한 줄 알고 착각한다고. 아내가 남편한테 너무 잘해주면 하루 밥 세끼 해준다는 말이죠. 밥 세끼는 당연한 거고 중간부터 간식은 따로 챙겨줘야 되고 식혜 해줘야 되고, 따진다고요. 한 사흘 간 굶어봐야 진짜 마트에 가서 호빵만 먹어봐야 당연한 게 아닌 사실을 알지요. 우리는 울산바닥에 당연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우주의 원리는 우주가 존재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에요. 우리 좋으라고 해 뜨는 게 아닙니다. 우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해서 울산 바닥은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울산화학단지에서 이상한 미세먼지 내뿜는지 모르지만 그것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내뿜고 있는 거예요. 제가 우리교회에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벌을 받는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사이냐?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사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겁니다. 예를 들면 24시간 중에 몇 시간이나 생각해야 되느냐고 하는데 우리는 단 한 시간, 단 일분도 주님을 생각 안 하고 있어요. 아니 못해요. 그것도 급할 때 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에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올 때는 감사할 일이 있어서 와버리면, 내가 선악적 상식으로 이런 일이, 공부를 잘했다니, 취직이 잘됐으니 이런 감사할 일이, 감사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그러니까 내가 감사라는 기준, 고맙다는 기준이 따로 설정되어 감사하는 것은 선악적인 거예요. 지금 레위기는 선악적 구조에서 그런 것 없이 무조건 감사하는 체계로 빼내고자 문둥병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건 어떤 경우냐? 나를 아바타로 제시하면 돼요. 나를 실험대상으로 바쳐지면 되는 겁니다. 나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의 만족으로 살고 있다는 걸 소급해서 알면 돼요. 내가 차를 운전하다가 뒤에서 빵빵거리면 성질나잖아요. 그렇게 성질낼 때 주님은 그게 그렇게 예쁜 거예요. 여러분 잘 이해하셔야 돼요. 귀여워 죽겠어. 바쳤으니까 욕이 나왔잖아요. 선악적인 체계에선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얻어놓고도 주님 가신 길을 생각해볼 때 자신을 낮추고 양보해야 되는데 빵빵거렸다고 욕을 했구나. 주여, 회개하나이다. 얼른 보면 굉장히 복음적이고 믿음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지금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챙기고 있는 거예요. 그건 바친 게 아니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수작입니다. 그런 마귀 적용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이유 없이 감사해야 되고 내가 죄 지었는데 감사하다. 이게 인력으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봐도 죄인데 주여, 죄 짓도록 주께서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절차는 죄 짓는 코스군요. 감사합니다. 이게 인간의 힘으로 될까요? “이번 코스는 아이를 패는 거군요. 주여, 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되겠어요? 선악과가 있는 이상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내가 생각한 죄, 잘못이란 것에 걸려도 깨끗한 몸이 마귀의 시험받아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못해서 이런 오점과 흠집을 남긴 것에 대해서 몇 날 며칠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짓을 안 하는 건데. 김유신 장군이 너무 피곤한 채로 말 타고 가는데 말이 기생집으로 간 거예요. 김유신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게 과연 내 심정도 모르고. 다시는 기생집에 안 가리라, 하고 칼로 말을 죽였잖아요. 김유신의 사탄적인 잘남 때문에 애매하게 주님의 피조물만 날아가 버렸잖아요. 우리가 매일같이 그런 짓하고 있는 것 아니에요? 적어도 내가 장로인데 내가 목사인데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다니. 이건 나답지 않아. 너다운 게 뭔데? 우리는 문둥병이 적당해요. 우리는 강도가 적당해요. 주께서, “네가 너를 알아? 니가 니를 아냐고?” 우리는 과거 기억 속에 잘난 것만 비축해서 그걸 나라고 자꾸 우기고 있습니다. 멋진 것만. 멋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요구대로 들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한테 압력을 넣는 거예요. 그러나 문둥병 앞에서는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덕지덕지 주님의 피와 기름과 제사장의 관찰과 하나님 내부의 균열됨이 우리 몸의 균열로 그대로 들이닥치게 해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