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9절(자존적과 의존적)171017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15장 9절(자존적과 의존적)171017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끝에 첫째 시간 끝에 무슨 이야기할려고 했냐 하면은 자존적인 인간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대자연에 대항해 가지고 신의 이름으로 어떤 업적들을 문명이죠, 어떤 문명 창세기 4장 가인을 생각하세요.
어떤 문명과 문화를 일으켜서 자기만의 자존을 자존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개발해놨었는가.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피조물들이 주께 영광돌리는데 오직 썩어질 이 인간들만 오죽했으면 시편에서 버리지같은 야곱이라고 했겠습니까. 차라리 그 짐승보다 못해요 인간이. 짐승이야 주님께 순종하지요.
짐승같은 인간이 누구하고 결탁이 되어서? 악마하고 결탁, 한패가 되어가지고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모독과 못된짓은 다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가인의 후손들이 모든 인간들이 자기 아담의 본성가지고 해 낸 업적들이 뭐냐말입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아까 언급했지요. 신을 만드는데 그 신과 인간 사이에는 연속적이였다 했습니까? 불연속적이라고 했습니까? 연결됬다고 했어요? 끊어졌다고 했어요?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야 거기 갈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기 위해서 만든 탑이 있는데 그 탑 이름이 바벨탑. 그 바벨탑에는 인간의 속성, 현재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의 속성의 응축이 되어 있어요. 그 안에 바벨탑안에. 응축되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주께서는 부수는 것이 아니고 흩어지게 했다 했죠. 그러면 그 속성이 흩어져 봤자 그 속성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온 지구상에 다 확대가 되는 겁니다. 그게 노아 홍수 이후입니다. 백날 은혜받아봐야 소용없어요.
인간이 흩어질때에 흩어지나 집대성되나 그 바벨탑 정신이죠. 결국은 요한계시록 보면 그 흩어진 인간들이 인간들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도성으로 도성의 이름을 이야기 합니다. 바로 큰 성 바벨론, 또는 음녀. 흩어져봤자 그 성질 어디갑니까? 결국은 안 흩어진거예요.
이제는 바벨이라는 장소에서 하나님앞에 대들던 그 인간들이 온 천지에 흩어져서 온 지구상 전체가 하나님앞에 대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벨탑을 쌓는 취지가 뭐냐하면은 흩어짐을 면하자예요. 흩어짐을 면하자. 흩어짐을 면하자.
자,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언어가 하나였다 이말이죠. 언어가 하나였고 흩어짐을 면하자. 그 생각들이 일괄적으로 똑같은 생각들을 했다.
그러면 이 인류의 그 다수성, 그 시대의 공간적으로 지구의 넓어도 아무리 다수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 공간처럼 그들은 여기고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달라져도 그 시대는 오직 한 시점에 확대 또는 확산에 불과한 겁니다.
인간은 달라진 적이 있다 없다? 인간은 절대로 달라진 적이 없어요. 인간은. 항상 하나님 앞에 1대 1 대응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면서 신은 어떤 신이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납득이 되는 신.
아브라함에게 또는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 나라 오기전까지는 그들은 그것을 신이라고 철떡같이 우겼지요. 그런데 그 인간들이 전부 다 납득이 되는 신과 납득이 되지 않는 인간이 낯선 신이 등장합니다. 누구한테? 아브라함에게 등장해버리죠.
아브라함에게 등장하면서 낯선 신에게 새로 등장한 신의 자녀 아브라함과 그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의 신과는 차이가 나겠어요? 안나겠어요? 차이가 분명히 차이가 나는 겁니다. 분명히 차이가 나요.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기서 이제 두 번째 시간에 해야될 것은 뭐냐하면은 그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등장하게되는 이방민족들이 그들이 어떤 신을 믿었기에 그들은 그따위식의 문명과 문화에 성질을 본질을 갖느냐. 지금 이걸 두 번째 주제로 삼는겁니다.
그들의 신의 부합되는 문화와 문명을 그들은 계속 건설해왔거든요. 그리거 거기에 반해서 달리 아브라함은 독특한 아브라함의 문화가 또 따로 있는거예요. 그 아브라함의 문화가 뭐냐하면은 출애굽기에 보면 그게 뭐냐하면 제사장 나라예요.
제사장 나라고 하나님의 언약중심의 나라인 반면에 세상나라는 제사장 언약중심이 아닙니다. 뭐냐하면 국가중심이거든요. 현재있는 그게 뭐냐 혈육중심이예요. 혈육중심이고 이것은 언약중심이고. 이스라엘에서는 언약에 위반되면 혈육이라도 죽여버려요.
광야에 가면서 40년동안 광야 40년 소모한 이유가 뭡니까? 홍해에서 건너 온 사람 다 죽여버렸어요. 두 사람 빼놓고. 이게 뭐냐하면은 사람의 혈육이라도 무엇과 안 맞으면? 진짜 하나님의 약속과 안 맞으면 나는 천국사람 아니다를 분명히 보여준 반면에 기존의 이방민족은 혈육을 중시합니다.
조상 대대로 혈육을 중시한 민족. 구체적인 것이 바로 국가거든요. 그러면 그것이 제 이론에 논리에 의하면 오늘날 현대 국가는 이런 구약에 신구약에 나오는 이런 이방민족과 성질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똑같아요.
그래서 구약은 이게 안 볼 책이 아니고 봐야될 책이예요. 오늘날 현대국가를 설명하는데 구약을 꼭 봐야되요. 꼭 그렇게 되거든요. 자, 그럼 그걸 오늘날 현대국가가 구약과 어떻게 동일한가.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여기 있다면 인간은 이 자연세계를 자기 유리한데로 끌어 당기기 위해서 인간은 신을 섬기면서 처음에는 신에게 뇌물을 받쳤어요. 뇌물을 받친 창세기 4장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사 드린 사람이 누구죠? 가인이죠.
자,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은 이유는 그 가인 배후에 아벨의 제사를 받아서 차이나게 하기 위해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어요. 만약에 가인의 제사를 제물을 받아버리면 기존의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이 그 신이 되어버려요. 가인이 알고 있는 신이 그 신이 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쪽에서 차단시킨다는 것은 가인식의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내가 원래 내 모습이 내 취지가 아니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니라고 말을 할때는 반드시 아닌 것은 아니지만 진짜는 뭐냐가 나와야되겠지요?
아닌것부터 먼저 제시되고 그 다음 누가 나옵니까?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서 니가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의 현실속에서의 모습은 아벨의 운명을 통해서 내 진짜 모습을 거기에다가 담고 내가 그걸 거기다 구체화 시켜줄게. 라고 그런식으로 이야기했죠.
그러면 아벨의 제사를 받는 순간 아벨의 목슴은 끽 하고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장차 오실 하나님은 이 땅에 왔을 때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음과 더불어 죽는 하나님이죠.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연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 끊어짐, 끊어진 하나님. 그래서 인간쪽에서 건너가고자 해도 절대로 갈수 없는 죽어도 못가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어떤 그 저 제 딸이 그런 질문을 제 딸인가? 아니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전화해서 그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자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일찍 60도 안되서 죽었는데 사람들이 애도하고 찬송가 작곡도 많이 했는데 간암으로 죽었답니다.
자기가 친군데 친구가 죽고 나니까 자기가 죽음을 다시한번 생각해보니 ‘목사님 죽음이 뭡니까?’ 라고 할 때 제가 답변을 이렇게 전화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살아있는 인간은 절대로 죽음을 모르게 되어있어요.
죽음을 상상하게 되어있지 모르게 되는 이유가 모르는 이유가 살아있는 것으로서 죽음을 해버리면 뭐가되냐하면 있다와 없다 밖에 안되요. 나 지금 여기 있다 그런데 죽으면 여기 없다가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지금 있다가 맞는 이야기이냐를 증명할수 있는 길이 없어요. 지금 내가 있다라는 것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다를 start 출발점으로. 이것을 하나의 개시점으로 시작점으로 현재있는데 죽으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냐하면은 저주받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언약과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렇게 되버리면 지금 그들 인간은 살아있어도 뭐가 되느냐 이게 죽은 것이 되요.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 되요.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인간이 죽게되면 자기가 저주 받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됩니다. 살아있을때도 저주였고 죽어서도 저주였다. 그게 누가복음 16장에는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그걸 느낍니다. 부자가 죽어서 어디갔습니까? 지옥갔지요.
지옥불에 가가지고 거기서는 뭐가 귀합니까? 몽블랑 뭐 에비앙 생수가 귀한가요? 물 한방울이 귀한거예요. 그러면 물이 귀한곳이 지옥이 아니고 물이 귀한 곳에 본인이 여기 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본인 빼고 지옥이 아니고 본인을 포함해서 지옥인거거든요.
그 본인이 살아있을 때 어디 갔습니까? 부잣집 자기 집에 있었죠. 그러면 살아있을때도 그는 저주아래 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살아있을 때 나는 살아있다고만 생각했지 지금 저주 받은 상태로 살아있다라고 생각을 안했잖아요. 이게 죽어도 죽은 줄을 모르는거예요.
죽은 놈이 죽는 것은 별 의미 없어요. 거기서 뭐 아쉬워 할 거 없어요. 살아있을 때 주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지 죽어서 ‘아이고 아이고 봉투 얼마 넣어왔나? 아이고 너 아버지 죽을 때 가봤는데 너는 얼마냈니?’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인간입니다.
박근혜를 1년 더 구속하라. 더 구속을 연장 했잖아요. 박근혜는 그 인간도 죽은 인간이고, 박근혜도 죽은 인간이고, 그 박근혜를 왜 정치적으로 압박하느냐 그것도 죽은 인간이고, 박근혜는 합당하다하는 그 다른 민주당 죽은인간이고, 죽은 놈끼리 지금 지옥에서 재판걸고 지옥에서 재판받고 있는 거예요.
정말 박근혜 그 사람이 진짜 성령을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아까 이야기한 의존적이다. 자존적이 아니라 의존적이라면 ‘주여 죽으면 죽으리라. 주여 감사합니다.’ 왜? 왜 그럴까요? 그걸 통해서 세상이 나를 아까 했죠. 소외시키잖아요.
성도이기 때문에 제발 나 같은 인간 빨리 죽어가지고 최순실하고 지옥가라 막 이런식으로 해서 밀어내는 그것을 주의 은혜인줄 알고 받아들이면 그 재판장에서 그렇게 쭈그려 있을게 아니고 할렐루야~~ 그게 막 카메라 찍히고 뭐 특히 JTBC에서 그걸 찍어줘야되요. JTBC에서. 테블릿 PC 때문에 사건 났기 때문에.
그런데 머리 숙이고 있다말이죠. 정치적 보복이다하고 말이죠. 티가 확 났지요. 죽은 인간이라는 티가 났잖아요. 그럼 우리 성도가 뉴스 볼 때는 어떻게 보면 됩니까? 왜 죽은 놈이 죽은 짓 하느냐 그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뭐 그것 보기가 너무 지루하면 다른 것 드라마 보던지, 언니는 살아있다 그거 보던지 다솜이 어떻게 됬는지 뭐 그거 보던지 골라잡아 보시고 아무것도 안보면 도끼 나와 랩하는 것 그거 보시던지 도끼 알아요?
하여튼 도끼든 뭐든 전부 다 모든 인간이 다 죽은자예요. 집사님 죽은 자하고 상대하고 있는거예요. 모두가 죽은자입니다. 죽은자에서 참 승진할려고 애 많이 쓰시고.
죽은 자들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죽은 자가 뭐가 겁나느냐 하면은 내가 있는 것이 없다 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죽음의 의미라면 그러면 이 자존적 의존적이 아니고 마귀적이죠. 이 자존적 인간들이 어떻게 문명을 이어갔는가.
그것은 18세기에 존 로크라는 사람이 17세기 인가? 참 잘 이야기를 잘 해줬어요. 17세기 존 로크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냐하면은 옛날에는 왕을 왕권신수설이라고 합니다. 왕권신수설. 인문학 이야기이기 때문에 또 슬슬...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왕이라 하는 것은 신이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봤어요. 이 말은 뭐냐? 왕 자리는 신이 손 댄 자리이기 때문에 계급이 서열화 되기 때문에 신분이 서열화 되기 때문에 감히 평민이라든지 기사계열이라든지 귀족계열이 왕을 넘 보면 안된다.
왜? 신으로부터 배정받은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중세시대에 이랬습니다. 서양의 중세시대.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가지고 왕권신수설이 무너지고 이제는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나라를 만들자해서 나온게 뭐냐하면 사회계약설이예요.
이 사회계약설에서 존 로크가 지대한 영향을 입었는데요. 1688년인가 존 로크의 사상에 의해서 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요. 그 혁명이 뭐냐하면 명예혁명이 일어납니다. 명예혁명의 내용이 뭐냐하면 임금도 의회의 인준없이는 허락없이는 법령을 적용하거나 만들 수 없다 이겁니다. 임금도.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각자 각자가 주인이죠. 인민들이 다수에 있어서 계약을 만들어 놓고 하는데 계약을 할 때 인간은 뭐냐? 인간은 자연법대로 움직인다. 자연법대로 움직인다. 중요한겁니다.
자, 있음을 지금 있는 사회를 처음에 없는 사회를 여기에 우리 있다 부터 시작해서 없는 사회를 상상하는 거예요. 현재 인간들이 있잖아요. 존 로크 시대 있잖아요. 프랑스라는 나라가 있잖아요. 이 프랑스 나라 있음을 진짜 나는 어떠해야 되는 가를 옛날에는 성경이나 교회한테 물었잖아요. 안물어요 이제는 시대가.
하도 교회가 전부 다 타락해 안 묻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물어보게되면 현재 우리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없을 때가 있지요. 그걸 자연상태 원래 자연상태로 봅니다. 자연상태로부터 새로 시작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회가 있으니까 없는 때부터 시작할 때 사회가 없을 때 사회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자연법, 자연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동등하게 다 받았다.
그래서 평등과 자유 그리고 문제는 인권 이런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칭했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 서로 인간들이 협조 돌보아 주자 이것이 여러분들은 성경적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성경을 거부한 쪽이예요? 성경을 거부한거예요.
왜냐하면 출발점이 나 여기 있음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자존적인 것을 더욱더 확대시켜서 자존적으로 구성된 그런 자립적인 국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불과 16세기인가 17세기인가 불과 400년전입니다.
여기에 의해서 그 존 로크 사상에 의해서 명예혁명이 일어났지요. 그 다음에 나온 전쟁이 뭐냐. 미국에 독립전쟁. 1775년 독립운동있잖아요. 독립전쟁 영향을 받아 1787년 프랑스에 프랑스가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 여파로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나폴레옹에 의해서 모든 유럽이 서구화 민주화 되고 그 민주화가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서 동양까지 합쳐가지고 중국도 개방되지요 일본도 일찌감치 그 명치유신 해가지고 뒤늦게 여기에 독립투사들 등장해가지고 독립운동 했잖아요.
이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퍼진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뿌리에 뭐가 있습니까? 자존적 심성이 들어있는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더 나가 봅시다. 이 자존적 심성에서 국가가 됬잖아요. 국가는 뭐냐하면 인권입니다.
누구도 인간 위에 없고 누구도 인간 밑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법률로 만들었고 법률이 하나로 독점하니까 다시 왕처럼 되니까 법률을 나누자. 나누자 몽테스키외. 나누자 하는 것이 삼권분리예요.
입법, 사법, 행정, 삼권분리로 나누고 명목적인 상징적인 이름은 대통령이 하던지 왕이 하던지 하고 실제적인 모든 권한은 입헌군주제 국회에서 하자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래 현재 모양새 예요. 원래. 국회에 모든 권한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후진개발국에서는 국회에 주니까 싸워서 짜증난다고 독재자가 쥐죠. 독재자가 쥐어서 다 해버리고 위회 뽑아서 또 하고 촛불집회 또 하고 이래가지고 그 재미로 특히 60넘어서 할 일 없는 사람 케이블 티비 보면서 그걸로 시간 다 때우는 그게 되버렸는데.
이걸 가지고 자연법 사상이라해요. 자연법 사상. 자연법 사상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자연법 사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이성에 의해서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고 박애와 평등과 자유를 하게 되면 이게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나라이다. 이게 자연법 사상이예요.
문제는 이 자존적 성격에서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라고 이의를 거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무도 없어요. 왜? 아무리 인간이 생각해봐도 이게 최고거든요. 그런데 의존적 천국가야될 성도는 이 자존적 세계가 눈치 채가지고 밀어냅니다. 밀어내요. 너 왜 국가에 충성안해?
이번에 가즈오 이시구로 라고 노벨문학상 받은 일본계 영국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 지은 남아있는 나라 라는 그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그 집사가 여행하면서 자기 아버지도 집사고 자기도 집사고 주인님 모시고 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 내용을 개인적으로 집사생활 잘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내용으로 출발해가지고 결국은 뭐까지 퍼졌냐하면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그걸 들추는 책이예요.
자기 아버지도 집사인데 그 집사가 충실하게 모셨던 그 주인이 어떤 주인이냐 하면은, 그 주인이 파티를 열었는데 그 파티에 귀중한 손님으로 온 사람이 그 남아프리카에서 선박수조와 관련된 큰 사업체를 하는 사람이 왔는데 모셨다는 거예요.
지금 이것과 자연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국가에서의 나온 열매가 뭐냐 지금 열매를 이야기 하니까 열매를 따져보는 겁니다. 저택이 있고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있는데 이 주인공 집사는 그 아들이니까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집사였는데 집사가 파티를 여는데 그 파티에 남아공 남아프리카에서 온 유명한 사업가가 있다면 그 사업가가 사업하기 전에 군장성이였어요.
군장성인데 그 사람이 어디 전쟁을 참여했냐하면은 여기 배경은 1954년이니까 어디 했냐하면은 1890년인가 하여튼 모르겠다. 보어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보어전쟁. BOER WAR. 보어전쟁이라는게 있는데요. 보어전쟁이 뭐냐하면 아프리카 제일 남단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에 식민지 1899년입니다.
그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에 그쪽에 아프리카에 제일 먼저 그들을 식민지 잡아가지고 개발했어요. 남아공 아프리카 제일 남쪽에. 그래서 금광하고 다이아몬드 광을 발견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영국이 전쟁을 하는데 돈이 없으니까 네덜란드 사람들 원주민이 있는 그 곳을 영국이 지분을 해가지고 이것을 강제로 뺏은 전쟁이 바로 보어전쟁 이예요. 보어전쟁 이라고요.
그런데 그 전쟁하면서 이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예요. 그냥 일반 네덜란드 원주민 네덜란드 후손들이예요 그냥. 그저 광산하고 이런 사람인데 영국에서 군대를 동원해가지고 다 죽여버렸어요. 하여튼 전쟁의 기본도 없고 예의도 없고 그냥 학살해버렸어요.
그 학살한 주인공이 누구냐하면 바로 여기 장성급, 그래서 영국에서도 말이 많아가지고 그 장성 군법에 넣어라하는데 군대에서 반대해가지고 무사히 장성으로 제대해가지고 뭘했냐하면은 그 남해 해안에 선박을 수조하는 사업체 사장이 되가지고 왔다 이말이죠.
왔는데 이 집사가 얼마나 품위있는 집사인지 자기 아들을 자기 아들을 죽였어요. 이 전쟁에서 자기 첫째 아들이 죽였어요. 이 장성이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서 죽었거든요. 원수예요 자기 아들의 원수.
자기의 원수인데 이 집사의 형이되죠. 큰 아들이니까.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야기 합니다. ‘자, 저 사업체 사장님이 마침 시종을 안데리고 왔는데 누가 5일동안 시종하겠습니까?’ 라고 할 때, 자기 아들 죽인 원수에게 집사가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하면서 온갖 수모와 굴욕을,
모르죠 이 장성은 이 자기 때문에 죽은 아들의 아버지인지 모르면서 모든 수모를 다 줍니다. 그런데 5일돌안 꾸준히 참으면서 하는 말이 ‘휴 나는 집사로서 품위를 지켰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말이죠. 이게 뭐냐하면은 이게 열매예요.
이 현재에 있는 국가체제를 충분하게 내가 동의합니다 라고 보여주는 열매예요. 이 열매라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그 시대에 의존적이예요. 그 시대에. 하나님 앞에 의존적이 아니고 주님한테 의존적이 아니고 그 시대에 의존적이예요.
전도사가 교회에 복무한다. 그러면 전도사는 누구 앞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주님의 복음을 알고 주께 순종하겠습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교회가게되면 주님께 의존적입니까? 교회에 의존적이여야 되요? 교회가 그 전도사를 뽑을때는요 주님께 의존적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교회에 의존적이고 교회에 시키는 건 다 하기를 원하는 거예요. 교회 방침에 전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합니다. 그게 철저하게 된 것이 천주교의 수도원, 수녀원 우리나라 같으면 복음학교, 복음학교 김용의 목사.
그것은 주님 의존적이 아니고 복음학교 의존적이예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 절대로 그 복음학교는 이단적이라는 말을 김용의 목사가 이야기 합니까? 안하지요. 안하지요. 어느 목사가 우리교회 이단이라는 말 합니까 안합니까? 안하지요.
십자가 뭐 그런 소리만 하지 안하지요. 신천지가 합니까? 어디서 그런 소리 해요? 안하지요. 그게 바로 자연법이예요. 자연법이라고 하는 것은 있음을 기초로 있음. 나 여기 있음을 가지고 뭉치는 겁니다. 있음이 뭉침은 힘의 뭉침이예요. 너 있고 나 있고 저 사람은 10명있고 우리 5명 있고 저쪽이 더 힘이쎄요. 계속 키우는 겁니다. 조직을 키우고 사업체를 키우는 겁니다.
그걸 그들은 열매라고 보는 겁니다 열매. 교회도 사업인데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은 죽을 줄 모르고 인간은 자기가 있다고 살아있다고 보죠. 그러면 인간에게 신 관은 아까 복습해봅시다. 인간의 신은 단절되있다? 연속되있다? 연속되있지요. 연속되더라도 내가 여기있는 내가 납득이 될 때 연속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냥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사업을 원하는데 그 사업이 뭐냐? 복음전파를 하늘나라 확장되기를 원한다. 그러면 하늘나라 확장된다는 말은 뭡니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말하죠? ‘보자 어느 교회가 가장 큰 교회냐. 어! 저 교회가 크네.’
교회가 크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적을 작은 교회보다 더 듬뿍 받은게 되지요. 납득이 되잖아요. 납득이. 납득이 되지요. 성경말씀에 두세사람과 나와 함께 그 말은 들리지도 않아도 그 성경귀절이 있는지도 몰라요.
하나님의 진리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키웠다는 겁니다. 그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고 남들도 그렇게 수긍을 해요. 연속되니까. 단절 없어요. 그렇게 수긍할 때 얻어지는게 뭡니까? 그렇게 수긍하는 나는 죽은자가 아니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교회 이렇게 어려워서 교육관 못짓는다 할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와서 돈 2억을 내서 지었다 그러면 그 기적이 그 교회의 전통에 보탬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교회는 있음이 되겠지요. 교회가 있으면 그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작은 교회 등록하는 것보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을까요? 낮을까요? 높아지잖아요.
높다고 누가 생각합니까? 오는 교인들이 생각하지요? 오는 교인들이 생각한다는 말은 그 오는 교인들의 생각을 목사는 그냥 이용만 하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대로 우리 교회는 주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보다 우리교회 등록하시면 천국 갈 확률 많습니다. 됐습니까? OK?’ ‘OK.’ 문제 없지요.
그러면 그 교회가 얼마냐 교인수가 5600명이다. 그런데 그 옆에 보니까 교인수 보이까 2만명이다. 자 어떻게 될까요? ‘목사님 나 저 교회 갈래요.’ 왜? 이 쪽의 논리에 의하면 큰 교회가 주님의 기적이잖아요. 그런데 이 5600보다 2만명이 더 크니까 주께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전능하신 주님께서 저 교회가 진짜라는 표시로 2만명되게 한거예요.
이쪽 오천명 교회에서 아무리 무슨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어떻게 뭐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삼위일체로 교회 오는거 아니잖아요. 어느 곳에 숫자가 많은냐 온겁니다. 왜? 다수가 진리이기 때문에.
자, 여기 자연법에 자 다시한번 봅시다. 굉장히 중요한데요. 자 처음부터 다시해볼께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죠. 이 포도나무는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다가 갔습니까? 십자가 죽었지요. 십자가 죽었지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절이다? 연속성이다? 단절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주님따라 못갔어요. 심지어 12제자 베드로도 못갔지요. 분명히 해야됩니다. 분명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뭘 끄집어 냅니까? 여기에서 열매를 끄집어 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열매는 죽은 예수님과 어떻게 되요? 연속적이죠. 그리고 천국은 누가 간다? 예수님에게만 철저히 의존족, 의존적이라는 말은 의지하자는게 아니예요. 아까 강의를 할 때 단어를 쓴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내가 주님 의지해야지 이러면 천국 못가요. 믿어야지. 믿어도 못가는 거예요.
주일 낮에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뭐로간다? 믿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불신앙으로 가는 거예요. 불신앙으로 가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주일 낮 설교 들으면 알아요.
의존적이라고 하는 것은 보험에서 무슨 상품있다고 했습니까? 파생상품이예요. 파생상품. 본래 따로있고 쭉쭉 나오는 것이 파생상품이란 말이죠. 주님으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에 파생되서 이게 연결되어 있어요.
연결되면서 이것이 절대로 자존적이 아니고 무슨적이다? 철저히 의존적이예요. 그런데 인간은 이미 자체가 이미 아담부터 자체가 이게 뭐냐. 의존적이 아니고 이미 스스로 자존적이다. 스스로 있어요. 스스로 있으니까 이것을 있음으로 본겁니다.
있음으로 봤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뭐냐? 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으로 본거예요. 자 예수님께서 죽었지요. 예수님께서 죽어서 이렇게 넘어가버리면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살아있는 세계입니까? 죽은세계입니까?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죽은 세계예요.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이 세상은 무조건 살아있는 세계예요. 의견다르지요? 그러니까 단절 된거예요. 예수님 생각에는 성경 아무리 천독을 해도 소용 없어요.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면 무조건 성경은 해석이 안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이 사도바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지요. 죽은 자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썼던 거예요. 그러면 이 해석을 할려면 같이 사도바울같이 성령안에 예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사도바울의 해석이 되요.
그 해석의 끝은 뭡니까? 예수님만 살아있고 우리는 그 파생된 파생상품, 파생된 열매라는 겁니다. 열매는 독자적인 열매가 아니예요. 독자적인 열매라는것은 없어요. 그냥 가지에 몸통에 의존적이예요. 주님을 위해서 열매지 열매를 위한 열매는 없어요.
개인구원은 없고 통구원 통구원, 통감자 알죠? 통감자. 고속버스 휴게소에 나온 통감자. 요만한거 4000원. 통구원이지요. 개별구원 없습니다. 개별구원 아이디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주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있음에서 나왔어요.
살아서 고생많이하고 죽어서도 고생많이 하면 안되니까 좋은데 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공이 누구예요. 내가 주인공 이예요.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 다 누구에 의해서? 나 좋아라고 있는거예요. 나 좋아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되어있어요 연결. 심지어 십자가도 내가 믿을수 있는 십자가가 되어버려요. 믿을수 없는 십자가가 아니고 믿을수 있는 십자가니까 이 십자가 믿는것도 행함이 되지 절대로 이게 은혜가 아니예요.
말은 은혜라고 하지만 은혜가 아니고, 내가 예수 믿는 결단력을 내려서 예수믿게 된거예요. 그러면 그 결단력의 원천이 뭐냐? 나의 결심이예요. 결국 내 결심을 믿으면서 자기는 예수 믿는다고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겁니다. 내 결심을 믿으면서.
그러니까 진짜 믿는 사람은 뭐냐하면은 ‘주님 저 안간다 했잖아요. 천국. 왜 이렇게 천국 보내주십니까? 안갈래요. 그런데 왜 자꾸 천국에서 당기고 그리고 세상은 왜 자꾸 나를 밀어냅니까?’
같이 놀아줘~~이렇게 할텐데 ‘나가!! 너는 우리하고 달라. 다른 인간이야.’ 왜 악귀도 알고 왜 악마가 알아서 왜 나를 자꾸 밀어내냐 이말이죠. 같이 놀려고 하는데, 동창생 다 떨어지고 심지어 부부사이 다 떨어지고 심지어 딸도 미워하고 아들도 미워하고 전부 다 끊어져 다 끊어져. 외로워서 못살겠어.
주님도 외로웠거든요. 외로움에 외롭다해가지고 돈 들여 사귀어 보니까 나중에 돈만 띄어 먹고 도망가고. 자꾸 세상은 나를 밀어내네. 위는 당기고.
나는 그것을 환란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돌아서서 환란인데 따지고 보면 은혜고, 어렵다고 눈물 찔찔 짜고 보니까 히히 웃어야 될 일이고, 주의 조치 아니였으면 지금쯤 나는 주님 생각 없고 십자가 생각도 없어버리고 나 예수믿고 잘 됬다고 자기 자랑 하면서 돌아다니고 과장하면서 돌아다닐 그런 자기 모습을 생각할 때 이게 끔찍한거예요.
그것도 큰 교회, 차비 많이 주거든. 그런 교회에서 노는 그것을 어떤 신앙의 목표처럼. 신앙인이면 저 정도 유명인사되야해. 그정도 유명인 되야 진짜 주의 종인줄 알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자 다시 이야기 합시다.
아까 영웅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들이 영웅을 치켜세우는데 영웅은 뭐냐하면 내가 영웅이 못된다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열심히 하게되면 따라서 할 수 있는겁니다. 내가 믿는 예수는 내가 이처럼 될수 있는 예수예요. 모든 인간들은.
그러나 진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잡으면 예수님이 커지는게 아니고 지금 근접 따라잡고 있는 나 자신이 그렇게 대견하고 나 자신을 보고 자기가 반해버려요.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데 물속에 있는 자기 보고 빠져죽는.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본인이 감격해 가지고 자기가 자기한테 홀딱 반해버리는 거예요. ‘너 나한테 반했나?’ 거울보고. 술 끊은 나 보고 반하고 담배 끊은 나 보고 반하고 자기가 자신한테 반하는 그 보람으로 살아가요. 그것이 신앙생활에 즐거움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속에 뭐가 들어왔어요? 세상에 만약에 사도바울이 삼층천만 봤다면 얼마나 자만 하겠습니까? 자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뭘 주었습니까? 육체의 가시를 줬지요.
처음에 본인이 착각했어요. 이거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데? 라고 해가지고 무려 한번 빼달라고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어요. 두 번 빼달라고 기도하고 세 번째 빼달라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날라왔는데 응답이 뭡니까? 니 은혜가 너한테 합당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너 구원을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야. 내가 필요해서 니가 있는 거야. 너 자꾸 하지마. 가시를 넣었던 장미를 넣었던 뭘 넣었던지간에 그건 나 때문에 있는거지 너 편할라고 있는게 아니다 이말이죠.
너는 왜 자존적이냐 이말입니다. 니가 왜 끝까지 의존적이여야지 왜 자존적이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 아픈데서 비로서 내가 은혜가 넘치나이다 이게 바로 해결책이예요. 아픈게 해결책 이예요. 아픈데서 낫는게 해결책이 아니고 아픈 그 자체가 해결책이예요.
얼마나 의존적입니까?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거예요. 죽으면 죽으리라 까라면 까겠습니다. 옳소이다! 10년동안 귀신들린거 참 잘했습니다. 13년째 악성 감사합니다. 12년만에 귀신 나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이렇게 할텐데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옳소이다 하지요. ‘옳소이다.’ 이 말이 함부로 나올 말이 아니예요. 옳소이다. 개 맞습니다. 개는 주인이 짖으라고 하면 월월! 짖기만 하면 되요. 왜? 그 관계 그 의존성 그대로 천국을 이루기 때문에. 그 의존성 그대로.
천국 별거 입니까? 주님 대장이고 나는 개이고 짖으면 되고. 집사님은 천국 심심해서 못가겠다는데 거기 골프장 없어요. 거기서 자존적 거기서도 만들라고 시키면 만들면 되요. 그런데 항상 시켜야되요. 골프장 만드는 것도 월월! 개 짖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시키는데로 하는 것이 뭐냐 새로운 주님의 선 입니다. 주께서 시켰으면 그게 사건이 되고 그 사건속에서 주님이 영광을 받아요. 내가 했습니다 아니라 시켰잖아요. 그냥 옳소이다 시켰잖아요.
다리 부러져서 주께서 다리 부러지도록 시켰잖아요. 부산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사람을 죽여놓고 주께서 시켰잖아요.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뻔뻔스러움의 극치, 그게 바로 의존적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 혹시 보신적 있으십니까? 밀양? 아이 유괴해서 죽여놓고 살인자는 교도소 가 있어요. 전도연이가 너무 괴로워서 교회를 갔는데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소위 전도의 갑질이거든요. 거기서 전도의 갑질.
‘너 모르지? 난 알아.’ 이거 갑질이거든요. 갑질할라고 교도소를 갔는데 세상에 자기 아들 죽인 그 면회가서 죄수하는 말이 ‘나는 아줌마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나 구원받았어요.’ 그 소리 듣고 갑질을 못하게 되가지고 화가 나가지고 거짓말이야~~ 김추자 노래 틀어놓고 예수 안 믿잖아요. 하나님 안 믿는다고 하나님은 다 거짓말이라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존성을 나 있음을 나 자존성을 뒷받침 해주는 연속적인 하나님을 전도연은 그게 하나님인줄 알았어요. 내가 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예수 믿으니 나보고 이쁘다 해줘. 이 괴로운 가운데서 예수 믿었으니까 나보고 착하다 해줘. For Me.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있음이 연속성이예요.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이 타고 난겁니다. 이게 죽은 인간들의 특징이예요. 지옥갈 인간들의 특징인데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너 나 사랑하느냐? 자존감 문제. 너 자존적이잖아. 너 나 사랑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말을 바꾸어서 자존성에서 뭘로 바꾸었습니까? 의존성으로 바꾸지요.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사랑을 줬기 때문에 주님의 소스, 사랑의 소스를 주께서 주셨잖아요. 그러면 내것이 나올게 어디있습니까? 그냥 꿀단지 같은 사랑을 뒤집어 쓰고 이것만 전할뿐이죠. 세 번씩이나 물었어요.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뭘해도 주께서 시켰다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되면 그것은 주님의 열매입니다. 합당한 열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예요. 그러나 아무리 착해도 여기 자존성이 살아있으면 이것은 이미 마귀고 죽은거예요.
좀 더 나가봅시다. 자, 세상적인 열매란 두가지가 있죠. 하나는 의존적 열매가 있고 하나는 자존적 열매가 있는데 결국 우리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음을 시작해서 자존적 열매가 되거든요. 이 열매는 누구 열매냐하면은 나의 열매가 되요 나의 열매가. 나를 빛내는 열매.
그러니까 이게 몸통이 누구냐하면 내가 있음으로서 이 열매가 나오니까 이 열매는 누구를 순산합니까? 이 열매를 봐서 나를 순산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따르고 십자가 죽으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 성경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7장 봅시다. 이거 설명하면 시간이 마칠거 같은데. 마태복음 7장. 제목 후보까지 너무 많다. 7장 15절부터 19절 한번 같이 읽어보세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예수님이 심판주입니다. 심판주가 뭐라고 판정을 내리냐 하면은 나쁜 열매를 찍어버린다 했죠. 그러면 이 이야기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따르려고 하겠지요. 그 뒤에 말이 뭐냐 내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열매입니까? 아니면 거짓선지자 입니까? 거짓선지자이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아까 우리 첫째 시간에 한 것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되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말씀의 연결성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포도나무 몸통과 우리 열매를 이어주는거예요 말씀이. 그 말씀이 이어진다는 말은 그 말씀이 지향적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가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 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하면 바로 그 우리의 말씀을 십자가로 데려가는 거예요. 장렬하게, 장렬하게 죽는겁니다. 장렬하게 죽는다해서 사자 굴에 들어가고 뭐 이렇게 매 맞고 예수는 안 믿겠는냐! 예수의 얼굴을 밟아라! 이런거 생각하지 마시고 골프치는 것도 장렬한 죽음입니다.
싸움하다가 세금 조작하다 걸려가지고 장렬한 죽음입니다. 장부조작. 모든 주께서 시킨데로 하는 것. 주께서 시켰더니만 한 100억 재산, 시켰더니 집 한 7채정도, 요즘 7채는 많은 것도 아니예요. 국회의원 비하면. 그것도 장렬한 죽음입니다.
왜? 어떻게 해서 돈 벌었습니까? 주께서 시켜서 돈 벌었습니다. ‘아이고 뻔뻔스럽게도 당신 뇌물받은거 다 아는데.’ ‘그 뇌물받은거 주께서 시켜서 했습니다.’ 이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쫓아 내겠어요 안쫓아 내겠어요? 밀어내겠지요. 그게 소외입니다.
도대체 대화가 안통해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결정해서 하는데 저들은 뇌물받아 쳐 먹어도 주께서 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교도소가야해. 교도소 갈 때 억울하지 않느냐?’ 주께서 가라고 해서 교도소 가는 데 뭐... ‘아니 뭐 이런 자유가 다 있나? 당신 사형이다. 판사가 당신 사형 때렸어.’
주께서 그 판사를 시켜가지고 나보고 사형을 시켰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옳소이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죠. 거의 미친개 수준이죠. 거의 미친개 수준이죠.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죠. 다윗의 아들이 죽었잖아요. 다윗 아들 죽었다고요. 뭐 울고불고 난리났잖아요. 싹 입을 닦아요. 이게뭐냐하면 아들과 내가 합해서 다윗언약을 이루어요. 나는 아들앞에서 죄인이고 아들은 나 때문에 죽은 희생물이고 희생물되게 하고 나는 죄인되게 해서 그래서 옳소이다.
그렇게해서 다윗언약이라는 박스를 이뤘고 이 이룬대로 예수님께서 장차 메시아로 오실거예요.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이 주께서 시킨 사람은 어떤일을 해도 의존적이라니까 의존적. 제목 의존적.
모든게 의지하는게 아닙니다. 의지하자는 말이 아니고 이미 빼도박도 못하게 파생된거예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너 어떻게 구원받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하지 마세요.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뭐라고 하느냐하면 주의 은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말 밖에 할 수 가 없어요.
그런데 어디서 은혜가 왔는가? 십자가 피 흘린 곳에서 댓가로 해서 은혜가 왔습니다. 또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예요. 교회 200명이니까 사기 많이 쳤겠네. 주께서 그렇게 했다. 그러면 하루아침에 200명 다 나가도? 그것도 주께서 하신거지 뭐. 아이고 섭섭해라 그런거 아니잖아요.
오게 하신것도 주님이고 가게 하신것도 주님이고, 자식 10명인데 하루아침에 다 죽었다. 욥이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참 비정한 아버지. 뭐라고 합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게 흉내낼 문제가 아니예요. 흉내낼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올테면 따라오라. 너 천하에 욥 만큼 믿음 있는자 있는지 보라고 했거든요. 따라갈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그건 욥에대한 그 사람의 역할이고 나는 골프치는 역할 하면 되는 거예요.
골프 쳤는데 홀인원됬다. 15년만에. 와 실력좋은데~ 주께서 그렇게 굴러가게 하셨습니다. 돈 내세요. 내기 5만원. 왜 그런 자유를 우리가 만끽하지 못합니까? 뭐가 발목 잡았습니까? 마지막으로 그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딱 이유 하나, 우리가 뭘 이해 못했기 때문에. 사랑. 사랑을 전혀 이해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이해 못했어요. 이미 우리는 산자가 아니고 죽었지요. 단절되었지요. 이 단절과 연속을 이을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 중간에 홀로 행하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천국에 다른사람으로 바꾸어 준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뭐만 자랑합니까? 주님이 행하신 그 사랑만 증거하지요.
그리고 그걸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더는 계명 있다 없다? 추가 될 계명 있다 없다? 없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이 있을지라도 로마서 13장. 있을지라도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 다 덮느니라. 또 다 이루느니라.
그 사랑은 내가 했습니까? 아니죠. 사랑은 주님이 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올때는 우리는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노래 있잖아요. 김세환이 노래한거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진리와 더불어 기뻐하고.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게임벌렸습니까? 주님 상대로 거래했습니까? 주님 상대로 재롱을 부렸습니까? 다 나 잘되라고 부린 마귀적 수작 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여 그런 마귀적 수작까지라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 라는 그 고백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