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강-YouTube강의(비밀)171017-이 근호 목사
207강-YouTube강의(비밀)171017-이 근호 목사
207강 제목은 ‘비밀’입니다. 비밀.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 만큼 안다는 것이 그만큼 쌓이게 되어있어요. 살아온 만큼. 7살이면 7살만큼 아는 게 있고. 20살이면 20만큼 아는 게 있고. 40이면 40, 70이면 70 아는데.
그 안다는 게 어디에 소용되는데 아느냐 하면, 어디에 필요 하느냐 하면, 자기가 생존하고 이 땅위에서 살기위해서 필요한 아는 겁니다. 그러면 일방적인 자기중심, 자기 위주의 아는 거죠. 그럼 그 아는 것을 활용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말은 남이 패하던 말든 자기만 살면 된다는 강렬한 의지의 발로입니다.
북한이 남한 생각해서 핵 개발했어요? 아니지요. 중국이 한국 생각해서 사드 반대한 거 그거 아니지요. 일방적으로 자기중심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아는 만큼 힘이 생기고 그 힘 가지고 더 많이 알기위해서 설칩니다.
따지고 보면 안다는 것을 보통 진리라고 하는데 사실은 진리가 아니지요. 자기만을 위한 진리가 되는 거죠. “나는 많이 압니다.” 하는 것은 “나는 그만큼 욕심이 많습니다.”와 같은 겁니다. 회사에 취직할 때 “당신은 뭘 압니까?” 라는 말은 우리 회사 욕심에 기여하시겠습니까? 하고 같은 말이에요.
어떤 아가씨가 시집을 가게 되면 “우리 집에 와서 살겠느냐?” 이 말은 우리 집안의 욕심에 편승하겠느냐?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편승 안한다면 그건 시집생활이 힘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진리는 아니에요.
인간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가 잘될 때 그걸 진리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겁니다. 자기 잘 되는 것. 그런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욕심쟁이들 모아서 뭐할 건데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을 줄 때는 인간이 안다는 것이 너무나 자기주의니까 반대로 나왔어요. 비밀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안다의 반대말은 무지가 아니고 비밀이 되는 겁니다. 너희가 알고자 해도 알지 못하는 끝까지 비밀이 되는 것.
사람이 안다는 것은 꼭 그 안다는 것을 자기를 위해서 소비하기 때문에 끝까지 비밀이 되어야 될 이유는 비밀의 내용을 아는 그 순간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걸 완전히 버려야 되지요. 포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말이 맞는 거예요.
그러면 그 비밀이 어디 있느냐 그 비밀은 성경의 사도바울의 같은 경우는 골로새서보면 그 비밀은 복음의 비밀이라 되어있어요. 비밀인데 복음의 비밀이니까 복음이란 말은 우리말로 하면 기쁜 소식이거든요. 기쁜 소식에 관한 비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의 비밀은 말로만 이렇게 되지만. 말로는 형체가 없으니까.
그 복음의 비밀이 뭐냐 하면 나타난 복음이 있었으니, 그게 이제 마태, 마가, 누가복음 초반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기쁜 소식이 나타났으니.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라 하고 다른 말로 하면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이에요.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것은 그건 비밀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뭐든지 인간이 안다는 것은 아까도 말씀했지만,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예수를 믿고자 하기 때문에 그건 비밀이 아니에요. 그건 엉터리 비밀이에요. 다른 비밀이에요. 악마의 비밀이지요. 악마가 약 올리는 비밀이지요.
예수님한테 비밀이 있다. 믿어라. 이건 악마의 소리입니다. 그러면 너한테 이익이 있고 니가 구원이 있을 거다. 그건 마귀의 소리에요. 진짜 예수님께서 비밀이라 하는 것은 끝까지 비밀이었고 심지어 열 두 제자한테도 비밀이었고 결국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달성할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비밀이 비밀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후에도 비밀이 공개되었느냐, 공개되지 않았어요. 끝까지 비밀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만 알게 되지요. 그러면 이 성령이 임한 비밀에 대해서 이렇게 주어졌다면 그 비밀을 접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비밀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겠지요.
주저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를 완전히 거기다가 던져버린다는 뜻입니다. 자, 절벽이 이리 되어있는데 절벽 끝에 가면 비밀이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절벽 끝에 서봤어요. 중력에 의해서 절벽에 떨어집니다. 죽습니다. 그런데 절벽에서 보니까 저 밑에 십자가 복음이 있어요.
자, 떨어질 겁니까? 아니면 주춤할 겁니까? 우리가 한다면 아무리 복음이 저기 있더라도 우리는 평소의 삶의 모든 형태가 내 살기 위해서 안 죽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아무리 복음이 저기 있더라도 우리는 주춤하고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 땅 밑에 있는 그 십자가라는 복음에서 어떤 힘이 나와 가지고 절벽 끝에서 주저하고 있는 우리의 멱살을 쥐고 잡아당긴다면 남들 보기에는 용기 있다 하지만, 용기 있는 게 아니에요. 밑에서 잡아당겼으니까. 그걸 성령의 힘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니 목숨도 니게 아니니까 니가 걱정할 필요 없다. 하고 잡아당겨버립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같은 절벽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떨어지면 안 된다. 하고 주저하는 사람한테는 마치 그 사람이 자살로 보이겠지요.
사도바울은 바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들 보기에는 죽은 자 같으나 실은 산자로다. 너희들 보기에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자다. 또는 너희들 보기에는 내가 미친놈 같으나 사실은 온전하다. 너희들이 마귀한테 미친 것이다.
비밀이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에요. 네가 지금 어디에 끌려가고 밀려가고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그 비밀이 좋아가지고 올인 하는 거예요. 그 비밀이 너무 귀해가지고. 그래서 찬송가에 나오지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전혀 예수님한테서 저를 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서 주님 앞에 섰습니다. 하는 겁니다. “주여, 저 안 귀합니다.” 마음대로 부리시고, 마음대로 사용하시고, 주의 뜻대로 흔들던, 죽이든, 볶아 먹던, 삶아먹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이 비밀을 지식으로 파악하고 십자가는 어떻게 대신 죽음이 어떻고...성경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고 100번 보면 지식이 얼마나 쌓이겠습니까? 그 백날 지식 쌓여도 그건 나를 위한 거예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지금껏 해왔던 습관의 되풀이입니다. 습관의 연속이에요. 온갖 지식은 다 알고 신학은 다했는데 비밀은 몰라요. 비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뭔가 내가 죽으면 나만 손해 아니냐, 주저하고 있습니다. 망설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 놓고 그것이 겁나니까 스스로 자기한테 뭐라고 반복해서 자기를 다구치느냐 하면 나는 신자다! 나는 신자다! 십자가를 아니까 나는 신자다! 언약을 아는 나는 신자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니 나는 복음을 아는 목사다! 나 복음대로 교회를 운영하려 하니까 진짜 목사다!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를 세뇌를 하는데 사도행전19장15절에 악마가 뭐라고 했던가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했지요. 악마의 말을 세자로 하면 사이다. 악마의 말은 사이다에요. 사이다. 모든 인간이 다 속아 넘어가지요. 복음 전하고 복음으로 목회하니까. 진짜 신자인 줄 알고 있어요. 맨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고 외치니까 세상에 오늘날 이런 목사가 없다고 다 속아 넘어가지요.
목사 본인은 자기가 신자 아닌 걸 알고 악을 쓰고 있어요. 오늘도 복음만 전해야지. 그래서 신자 아님을 자꾸 자기가 스스로 신자라고 바꾸어보려고 악발이처럼 설칩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누구를 살리기 위한, 그 행위 자체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고 살리기 위한 그러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알까요? 그런 짓거리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복음만 전한다고 아는데, 아~ 참! 마귀마저 아니까 저는 마귀한테 박수를 보냅니다. 이 가짜인 줄 알아주는 쪽이 있으니 참 얼마나 마음 편한지요. 마귀도 알고 마귀 아니까 주님 아실 거 아닙니까?
복음에 끌리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