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19:23-26 (부자와 천국)
Re..마 19:23-26 (부자와 천국)
이름 : 이근호(IP:)
부자와 천국
2004년 10월 31일본문 말씀: 마태복음 19:23-26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특별히 부자에 대해서 언급하신 이유는, 부자되고 싶은 여망은 그 누구도 다 품고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와 천국을 예수님은 일부러 맞닥뜨리게 합니다.
그렇게해놓고서 하시는 말씀이 부자는 천국 가기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 부자라는 위치 자체에 대해서 예수님이 왜 그리 주목을 하십니까? 그것은 천국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부자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서 도저히 허용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부자란,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사람의 최후의 희망입니다. 인간들은 날마다 쫓기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에 쫓깁니까? 무작정 살아남아야 겠다는 겁니다. 이런 인식이 왜 부자를 희망을 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하면, 부자가 되면 원없이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쓰고 싶은대로 원없이 쓰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날이 찾아오면 자신의 욕망이 강제로 중지 당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남고 자신의 육체는 그 욕망의 요구에 부합되지 못하니 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통 터지는 일입니까.
그래서 이 세상 살면서 한 번 부자가 되어 원없이 쓰고 싶은 것 다 써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희열의 순간과 접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하나님 앞에서 한낱 가리개에 불과합니다. 그 가리개만 들추어내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그대로 드러납니다.
결국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은 자신의 실상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를 천국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버린다는 것은 사실,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언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부자를 제일 앞으로 해서 한 줄로 쭉 서있습니다. "너는 나보다 더 부자, 나는 너보다 덜 부자"라는 식으로 서열을 매겨 놓고 삽니다. 그런데 그 줄을 선 맨 앞의 부자가 천국에 못들어간다는 것은 그 나머지 사람도 당연히 천국에 못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고"고 했을 때,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아, 다행이다. 우리만큼은 가난하기에 당당하게 가난하다는 자격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구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시켜, 부자는 지옥가지만 가난한 자는 천국간다는 식으로 소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천국에서는 부자행세 하고 싶어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은 절대로 용납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해 주시는 겁니다.
"천국 갈래 아니면 부자될래?"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까? 그것은 원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의 모습을 성경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예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태복음 6:26-30절의 말씀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부자 참새'라고 부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새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고 단지 세상 것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들에 핀 들풀을 보고서도 '부자 꽃'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것입니다. 꽃은 무엇을 소지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꽃다운 본질을 유감없이 발산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들 참새와 들풀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친히 그들을 기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살려내 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인간은끊임없이 죽음이라는 세력에 쫓겨다니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마구 쫓김을 받아 도망자 신세입니다.
인간은 본심은 오직 하나만 남습니다. "아, 살고 싶다"입니다. "살아남고 싶다" 이것 외에 다른 본심은 본심도 아닙니다. 왜 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그저 죽음에 쫓겨다니면서 조성된 심성이 이것 뿐입니다. 죽어도 그것이 영생이 된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는채 지내오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참새와 들풀과는 대조가 됩니다. 있는 자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임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부유하면 부유한 그대로 하나님께 영광인 것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문을 닫는 버릇이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올 때나 방 안으로 들어올 때도 반드시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렇게 그 공간은 자기만의 밀폐되고 폐쇄된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자신의 허락없이 아무도 자기에게 도움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 책임 하에 사태가 해결되는 것이 살길이라고 인간들은 믿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 이런 식으로해서 구원이 될까요? 요한복음 20:19에 보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꽁꽁 얼어붙어 자기네들 끼리 뭉쳐 몰래 다니고 있습니다. 이 폐쇄된 공간과 집단을 죽음에서 건져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은 닫혔습니다. 아무도 인간들의 허락없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허락도 없이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한 가운데 등장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잘 있었느냐?"하고 평안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부활이 되시는 분인 자기 사람을 찾아와야 비로소 그 사람들은 구원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자력으로 구원된 법은 없습니다.
인간들은 죽음에 쫓기에 살면서 최종 도달하는 담벼락이 곧 부자되기입니다. 이왕 죽을 세상 원없이 쓰고 살고 싶기에 이 부자됨을 희망합니다. 인간은 그 담벼락을 건너 뛰어 넘을 능력이 없습니다. 즉 인간들이 부자되고자 하는 희망을 스스로 포기하고 구원될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담벼락을 도리어 저쪽 천국 세상에서 이쪽 인간 세상으로 건너 넘어오신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이쪽 인간 세계에 오셔서 하나님이 보시는 이 세상의 형편을 말해주십니다.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재앙'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돈이 최종 희망이 된 이상, 천국은 물건너 간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뀌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그 사고 방식이란 바로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처하는 태도는 역시 폐쇄적인 것이고 자기 일은 본인의 허락 하에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안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지 못하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다'입니다. 일부만 하나님 하시고 일부는 구원받은 그 당사자가 일해야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관한 모두를 홀로 하나님이 하셔서 그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점을 믿고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 어떤 구김살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공중 나는 참새나 들에 핀 들풀의 자태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기르심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들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지어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가난하게 된 것은 제 3자가 나서서 '저주받아 가난하게 되었다'고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에 의해서 부자된 사람이 있던가요?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부자되어야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부자되게 하신 것과 구분지어야 합니다. 제가 두 사람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욥입니다. 욥 같은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자된 사람입니다.
과연 하나님에 의해서 부자되었음을 보여주는 사태가 바로 그 많은 재산과 자식을 하루 아침에 다 날려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입니다.
욥은 누군가 자기를 스쳐 지나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신을 기르시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유함이라든지, 오래 살겠다든지, 자신의 원수가 망하는 것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인간의 담벼락 그 건너 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 그 지혜를 제대로 하나님이 자녀에게 알리고 가르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상상도 못할 부도 같이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생명이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15에 보면,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이 주시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참새처럼, 들풀처럼 마음껏 자유로워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벌써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지금도 우리를 친히 기르시고 계신 주님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