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8: 8-12 (교만과 겸손)
교만과 겸손
2004년 10월 31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8:8-12
18:8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18:9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18:10 가로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밑에서 건지셨도다18: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18:12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신앙이란 참 특이한 현상입니다. 너무나도 특이해서 인위적으로 조작해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특이한 것을 원치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도 자꾸만 평범 속으로 집어넣어 유야무야하고자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대화는 단지 모세와 이드로의 대화로만 남을 뿐이지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적인 대화로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일상 대화 속에 섞여 사용한다면, 안믿는 사람들이 "둘다 돌았다"고 놀려 댈 것이 뻔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눅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왜 안될까요?
그것은 그들과 같이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각자각자 다루기 때문에 사람마다 모습이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낮아짐 현상'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면 참으로 이상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공손해지고 마음이 낮아지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신앙이 없는 자라면 절대로 신 앞에서도 보란듯이 당당하고 대들고 싶어하지 결코 고개 숙일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한 번 교만은 영원한 교만입니다. 교만 일변도로 나갑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것은, 불신자들이 의도적으로 신에게 달려들려고 노력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도 얼마든지 마음씨 곱고, 친절하고, 싹싹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 사람을 건져내려는 희생 정신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하나님 은혜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고 대들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신앙인은 아무리 자기가 잘한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살아갈 수가 없는 죄인됨을 압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요?
흔히 쉽게 생각하면 소위 신앙 좋다는 사람의 행동을 곁눈질해서 얻어낸 것이라고 간주하겠지만 컨닝하는 신앙은 대번에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앙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신앙이 있는 척을 하게 되면 목사로부터 교회에서 주로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함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겁니다.
하지만 진짜로 하나님 보시기에 겸손한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신앙이 주어졌기에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을 특이한 사람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특이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불도가 아주 심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교회 다니면서 가족들로부터 아주 괴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신앙인이기에 때믄에 이러한 시련을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일어나야 할 특이성으로 받아드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진정으로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께 찬송하고 싶어하고 감사하고 싶어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자진해서 드리고 싶어합니다. 조금도 구김살 없이 말입니다. 그야말로 환란 가운데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고마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과 반대로, 신앙 흉내만 내면서 교회 다닌 사람은, 교회에 다니고 난 뒤에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어려움이 오니, 이것으로 인해 세상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까봐 겁을 집어먹고 세상 사람들과 차별나지 않기 위해 타협조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자기에게 불상사가 덮쳤다는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간사한 것이고 교만이요, 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행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참 이스라엘인 사람에게는 누구로 인하여 이런 현상이 생겨나는 겁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 1:47-49에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잘 나오지 않는 대화가 오고가고 있습니다. 분명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밑에서 기도할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미 예수님이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알아야만 합니까? 그것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을 관리하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자기 백성을 친히 관리하시고 인도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결코 나다나엘의 능력으로만 나다나엘이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인도자가 따로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이 점을 알고 무화과 나무 밑에서 순전히 자신을 그분께 의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임금님이 실제로 나다나엘 앞으로 등장하시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나다나엘 너는 참으로 간사하는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 놓여 있을 때가 '겸손'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도저히 이런 관계와 그런 고백과 모습으로 드러낼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불신자들이 교만하다고해서 세상적인 윤리 기준으로 교만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 모두가 교만한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평상시에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한 일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의 마음씨가 곱다고해서, 만약 어떤 신앙인이 고백하기를, "나는 오로지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라고 한다면 단번에 반박할 것입니다. "당신의 그와같은 주장은 당신의 종교 교리에 준해서 당신이 혼자서 일방적으로 우기는 짓거리에 해당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예를 든다면, 이스라엘이 애굽 사회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은 애굽 나라가 정책상 이스라엘 민족을 따로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 보내준 것을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억지로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우긴다는 겁니다.
즉 애굽 왕과 그 백성들이 마음이 착한 것을 가지고 마치 이스라엘 하나님이 애굽 나라를 공격해서 얻어낸 백성인양 여기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자기 집착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겁니다. 지금도 세상은 이런 식으로 오늘 본문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저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강제로 막아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옛날은 옛날 사람들의 구원 사역이 있고 오늘날에는 우리들의 구원 사역 따로 있습니다. 여전히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이란 신앙이 없는 세계로부터 분리됨이라는 현상은 어제나 오늘날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먼저 이 점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겁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대화는 계속 성경 속에 그냥 박혀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성경 속의 대화는 성경 안에서만 통하는 대화이어야 하지 절대로 성경 밖으로 튀어나와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진다면 난처하다는 겁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특이성이 생겨야만 신앙입니다. 신앙다운 특이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같든지 아니면 남의 신앙절차를 컨닝한 것이 해당됩니다. 자꾸만 사람을 의식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들 끼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세요. 모세와 이드로의 대화에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증거입니다.
만약에 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빈정대거나 놀리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에 대해 교만히 행한 애굽'과 같은 사람에 해당됩니다. 신앙이란 결코 세상과 섞여버릴 속성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특이함을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이 보이거든 이드로처럼 마음껏 하나님에게 감사하시고 고마워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신앙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받고 있음을 마음껏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