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171013b 디도서3장5절(잃어버린 자)-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171013b 디도서3장5절(잃어버린 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 말 좀 들어주세요. 하여튼 말도 안 들어요.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잖아요. 마귀도 안다고요. 스데반 집사는 성령을 받은 정도가 아니고 충만했죠.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안 갖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그만큼 나름대로의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뭐냐 하면 ‘잃어버리지 않기’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끝까지 지켜서, 자기가 상실한다든지, 자기에 대해서 내가 뭐지? 라는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제일 무서워합니다. 제가 그 수요설교를 하면서 에서가 왜 야곱한테 화를 냈는가 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에서가 야곱한테 화를 낸 이유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예요. 가인이 아벨에게 화를 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제사를 안 받아줘서 죽인 게 아닙니다. 자기 제사를 안 받아줬어도 가만히 있었어요. 괜찮았어요. 하나님께서 제사 안 받아줄 수도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뭐 이랬어요. 문제는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차등적인 대우를 받았고, 안 좋은 쪽으로 대우를 받았고, 그렇게 돼버리면 가인의 존재, 또는 에서의 존재가 아벨이나 야곱의 대해서 시다바리가 되는 거예요. 보조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나라 톱(TOP)배우가 있다고 하면, 뭐 어떤 배우가 있겠죠. 톱 배우가 어떤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자기는 주연 급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근데 어떤 생판 모르는 젊은 애를 뒷받침해주는 보조역할을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당히 화가 나겠죠. 분노하겠죠. 만약에 우리 인생이 내가 중심이라고 어릴 때부터 철떡 같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중심에 있지 않고 다른 분을 이렇게 보조해야 되고, 다른 분의 존재를 알리는 존재로 엮어져있다면, 쉽게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살 의욕이 없겠죠. 그래서 맨날 노래에 보면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잖아요. 누가 뭐 가져가는지, 뺏어 가는지 모르겠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정신 바짝 차리자.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잃어버려서는 안 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렸다, 또는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라고 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기분 나쁘죠. 줬다 뺏기는 기분. 처음부터 안 줬으면, 처음부터 휴대폰이 없었으면, 그렇게 애타지 않을 건데, 줬다 뺏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운전하고 오는데 길에 오만 원짜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오만 원짜리를 줍는다고 차를 급히 세우고 오만 원을 주워가지고 기분 좋게 오는데, 급정거해가지고 뒤에 차를 박아서 십만 원을 물어줬다. 기분 되게 나쁘죠. 공짜로 얻은 것은 그렇게 잃어버려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피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왜? 공짜로 준다고 하니까. 그런데 내가 공들여서, 내가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내가 더러운 짓거리를 해가면서 수십 년 찜해놓은 그 모든 성과를 잃어버렸을 때, 한 마디로 분노합니다. 데이트폭력이 거기서 일어나는 거예요.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가방사달라고 해서 가방 사줬어, 여행 경비 다 대줬어, 심지어 동생 학비 다 대줘, 그렇게 했는데 어느 날 “이러려면 헤어져.” 딱 그 한 마디 하고 다른 남자 생겼다고 가버리면, 총이 있으면 쏴 죽여 버리고 싶은 거예요. 쏴 죽이고 싶어요. 빼먹을 것 다 빼먹고,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이 뭐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이러려면 헤어지자해서 헤어져가지고 다른 오빠로 갈아타기. 그런 오빠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갈아타기 할 때에 그 남자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 데이트 한 장소가 전부 다 추억이고, 왜 아련한 추억이 되느냐 하면, ‘올 가을에는 결혼하겠지. 저 여자를 내 것 만들 수 있겠지.’ 이것 때문에 진짜 공들이고 공들인 거예요. 그걸 잃어버렸을 때에, 그리고 그 여자를 뺏어간 것이 하필이면 자기의 친구라고 할 때에, 자기 친구가 한방에 반해가지고 뺏어갈 때에 니 죽고 나 죽자죠. 죽이려고 덤벼들죠. 격분이고 분노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렇게 격분했습니까? 예수님이 뭐 나쁜 짓 안 했잖아요? 왜 죽입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과 모든 정신과 모든 순수한 마음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래요. 경건함, 거룩함, 공들였던 그 모든 정성과 그 헌신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져버렸어요. 너희들이 하는 그 모든 것이 너희들이 보는 이 소경보다도 못해. 차라리 이 소경이 구원 받아. 너희들이 그렇게 지적질 하는 그 창녀, 그리고 바람피우다 현장에서 걸린 그 창기, 바람피운 아줌마, 그들보다 너희들이 더 못해. 내가 이런 여자 일방적으로 긍휼로 용서해버린다. 자, 이것이 너희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액션, 유일한 행위다. 믿을래? 말래? 죽여 버립니다. 믿을래, 말래가 아닙니다. 그런 인간 아주 없애죠. 없앨 때 주님께서 없애줬다 이 말이죠. 뭐 지갑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에요. 휴대폰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에요. 선물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공들였던 자식이 세월호 물에 빠진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뭘 잃어버렸어요?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의 목숨과 생명을 우리가 같이 사는 세상,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이 세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대처방법은 “그래, 잃을게.” 이게 대처방법이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했습니다. 그 주님이 받은 성령하고 우리가 받은 성령하고 같은 성령일까요? 다른 성령일까요? 똑같은 성령이죠. 그 성령이 우리한테 임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뭘 확인해야 됩니까? 나는 날마다 잃어버림 된 자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해야 되죠. 자, 뭘 잃어버렸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늙어죽어 가는 이것은 가만히 있어도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고. 아까 이야기했죠. 뭘 잃어버린다? 자기 의를, 자기 공로, 자기 헌신, 자기 위신과 체면과 명예를, 자기 의의 3종 세트입니다. 그게. 위신과 명예와 체면. 이걸 개망신 당하면서 잃어버릴 때에, “주여, 옳소이다. 제가 바로 개입니다.” 오늘 제목은 “개.” “제가 개입니다.” 여러분, 12년 동안 병들었다, 하나님한테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원망하는 것이 당연해요. 남들은 다 저런데, 왜 나는 허리 꼬부라지는 병, 귀신들린 병이 들었습니까? 왜 내 턱에서는 종양이 이빨을 뚫고 나옵니까? 이런 것처럼. 왜 내 딸도 나처럼 똑같이 유전이 됐습니까? 그렇게 수로보니게 여인이 하나님 앞에 원망을 했습니까? 원망했어요? “니 개잖아?”라고 하니까, 그럴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오늘 제목입니다. 이 제목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적어놔야 해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크게 쓸게요. “옳소이다.” 고린도후서 1장 18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돼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니 왜 죄 졌어?” “주께서 니 죄인이니까 죄 지으라고 그렇게 하셨잖아요.” “니 왜 귀신들렸어?” “주께서 귀신들리게 하셨잖아요.” “니 왜 개야?” “주께서 개라는 규정을 하셨잖아요.” 옳소이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잘난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 죄인이라는 개념에 합치되는 그 개념을 그 수로보니게 여자는 그걸 자기 안에 품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세상에! 이만한 덩어리가 들어있는 믿음은 이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없다.” 세상에!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 제목은 옳소이다. 내 인생이 어떻게 꼬였든 간에 옳소이다. 잘하셨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내가 했으면 잘 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그 사건, 그 사건에 휘말리도록 창세전부터 조치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한테 그런 아이디어가 어떻게 생깁니까? 라고 또 묻고 싶죠. 그 아이디어 만들어서 뭐 할 건데요? 그 아이디어 또 써먹게요? 그런 아이디어는 주께서 주셔야 되는 것이지, 멋지고 근사하다고 우리가 그걸 내 속에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옳소이다, 라는 것은 결과성이거든요. 내가 옳소이다, 하면 구원 받겠지, 그게 아니라 주의 구원의 여파가 그렇게 된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요새 손녀랑 논다고 동요도 부르는데, 업무가 더 늘어났습니다. 숲속에 연못이 있어요. 연못이 있는데, 옥색원피스를 입은 사람, 투피스는 안 돼요. 원피스이어야 해요. 그래야 스타일이사니까. 원피스를 입은, 그야말로 여신 같이 생긴 여자가, “아! 곱다. 연못.”하면서 신발을 벗고 연못에 한쪽 발을 담갔어요. 숲속에는 아무도 없어요. 새소리만 짹짹 들릴 뿐 아주 고요한데, 발을 하나 연못에 담갔어요. 그런데 발을 담그는 순간, 뭔가 파장이, 자기 발은 작으니까 작은 파장이 있겠죠. 근데 뭔가 큰 파장이 이미 자기한테 도달된 것을 물에 들어가니까 눈으로 보게 되었어요.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물속에 큰 파장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뭐냐,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고, 중심에서 파급된 파장을 자기가 연못에 발을 넣는 순간 그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발을 담근 그 연못의 작은 파장을 보고 옳소이다, 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주님이 유발한 그 파장을 보고 옳소이다, 라고 하겠어요? 주님이 유발한 파장을 보고 아, 이 세상은 주님이 먼저 접수하고 점령했구나! 나는 뭘 보려고 했는데요? 내가 원피스 입고 발을 담근 것은 내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내가 감상하고 즐기기 위해서 한 거거든요. 근데 그 모습이 뭐냐, 나도 모르게 마귀가 유포해놓은, 내 인생이 즐겁다는 것은 내 하는 행동여하에 따라서 즐거움으로 나한테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 사고방식으로 꽉 차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이미 주님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여파를 일으켰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세상만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 벌이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아까 말한 “옳소이다.”에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병든 사람 많고 장애자들이 많아요. 그래서 많이 도와주고, 자기는 도와준 것으로 외제차 타고 돌아다니고 했다 이 말이죠. 제가 사전에 도와주지 말라고 설교시간에 많이 했죠. 도와주지 마세요. 미안해하지도 말고. 인간은 도와준 만큼 마치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되어 있어요. 그럼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느냐, 뺏겨버리세요. 뺏기면 돼요. 산상설교에서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한 이게 뺏기는 것이지 그냥 주는 겁니까?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고 한 이게 협박당한 것이지 이게 가는 거겠어요? 이 세상에서는 힘 있는 자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어두운 세상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덩달아서 거기에 나도 작으나마 내 힘 가지고 버티려고 하지 마시고,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힘없어.” 그냥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거예요. 이게 주일 낮 설교에 그게 나와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주여 이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기도할 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됐네. 이 사람아!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지금 사도야! 니가 니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니가 지금 건의할 입장이 아니야.” 다시 말해서 연못에 발을 넣을 때, 지금 원피스 젖지 않게 해달라고 신경 쓰면 안 돼요. 이미 연못은 누가 점령했어요? 예수님이 점령했는데, 자기는 거기에 지금 합류된 것뿐입니다. 이걸 연합이라고 하고, 이걸 세례라 하고, 그 관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행함을 믿지 않는 겁니다. 주께서 벌여놓은 일 속에 내가 일부라는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이래 제가 설명하니까, 그럼 목사님 이렇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데, 찾지 마세요. 만약에 이 세상에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있지만, 그 사람 붙들고 믿음이 좋다고 하면 그 말이 하나의 유혹이 되어서 자기 잘난 체하고 다녀요. 내가 또 사람에게 연자맷돌을 목에 매어서, 칭찬을 해가지고 그 사람을 물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그런 소리를 제가 많이 들어요. 십자가마을에서 제가 믿음을 칭찬하잖아요. 그럼 벌써 광주에서 전화 옵니다. “목사님, 누구하나 또 칭찬해서 연자맷돌을 목에 매어 물에 빠트리는군요.” 서울에 누구누구 글도 잘 쓰고 하면, 띠리리릭 전화 와가지고, “그러지 마세요. 안 그래도 지금 글 잘 쓴 것 자랑하고 있는데 자꾸 목사님까지 부추기면 시험 듭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은 안 하겠어요.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만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주께서 하신 일만. 근데 처음부터 그렇게 안 돼요. 우리는 꼭 옥색원피스 입고 발을 담그고 싶어요. 그래서 나의 아름다운 발을 내가 감상하고 싶어요. 내 인생에 내가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참 나는 예쁘게 살고 착하게 살았다는 그런 보람을 주여 허락하옵소서. 내가 나에 대해 감상에 빠져서 행복해하는 이런 보람정도는 주께서 좀 누리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게, 참 우리의 연약함이죠. 소박하나마 그거마저 허락이 안 됩니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너는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자가 돼버린다. 주님은 잃어버린 자의 길로 가는데 너는 유지하는 길로 가려고 한다면 주님이 가는 그 노선이 아니라 전라선호남선경부선, 지금 엉뚱하게 버스 잘못 탄 거예요. 운전사가 주님인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뒤돌아봤는데 이건 완전히 뭐 애나벨인지 인형이 히히히~ 하고 있어요. 악마가 “차 잘못 탔다. 가자 우리 집으로!” “어! 안 되는데??” “허허허~” 자기 의를 왜 갖고 있어요? 왜 그래요? 자기 의를 자꾸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 ‘내가 나쁜 짓 안 해야지. 착한 인간을 유지해야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예수님의 피를 모독해도 그렇게 크게 모독한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나쁜 짓해도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은 없습니다. 제가 마음먹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마음 다지고 아예 단언하듯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장 나쁜 사람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악마와 가장 근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보고 니그(너희의 전남방언) 애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간음했습니까? 살인했어요? 안 했죠. 모범보인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모범보인다고. 스스로 자기들은 채찍질하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모델 삼았어요. 나도 언제 말씀연구해서 저렇게 경건하게 사느냐? 자기 아들 죽인 자를 용서해서 양자로 삼고. 아이고, 나도 언제 저렇게... 참, 아예 마귀를 닮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마귀추종자가 되세요. 아이고, 어떻게 문둥병자가 씻은 물을 마실 수가 있느냐? 세상에! 낮아져도 저렇게 낮아질 수가 있는가?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고... 뭐 몽골에 가서 낮추고 한국에 가서 낮추고 난리도 아니에요. 세월호로 애들 죽고 나서 보상 나온 것을 교회에다가 감사헌금내고...언제 저런 믿음을 본받나? 아예 놀고 있어요. 놀고. 나라에서 준 돈 가지고 맛있는 거 사먹지, 그거 왜 내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의를 못 키워서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한 거예요. 그렇게 환장하면 소는 누가 키워요? 도대체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누군지를. 어느 정도 개판인지를 몰라요. 존재자체가 십자가 피를 가립니다. 존재자체가. 태어난 어린 외손녀부터 시작해서 태어나서부터 모든 집안중심은 자기중심으로 다 돌아가 버려요. 제가 설교준비하고 있으면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겨요. 자기 놀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는 거예요. 온 식구들 다 앉힙니다. 식구라고 해봤자 네 식구 밖에는 안 되지만. 내가 노는 것을 보라 이 말입니다. 이기주의. 못난 놈. 왜 내가 유명해야 됩니까? 근거 있어요? 세상에! 이 쓰레기까지 유명해지려고 하는 겁니까? 내가 잃어버리지 않고 자꾸 있음을 상정하고, 이런 장치를 자꾸 설정하니까 이왕 있는 것 유명해지고, 이왕 있는 것 재벌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여튼 상견례 보면 가관이라 가관. 상견례 마치고 나면 우황청심환 하나씩 먹어야 돼요. 아이고, 경우도 왜 그렇게 경우가 바른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족속으로서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조금이라도 악마의 일이 궁금하거든 자기가 스스로 설정해놓은 금지의 법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한번 보세요. 제가 설교할 때 살인죄에 대해서 예를 들었죠. 사람을 내가 미워는 하지만 욕은 안 했다. 욱해서 욕을 했지만 죽이지는 안 했다. 때리지는 안 했다. 때리기는 했지만 내가 얼마나 착한지 죽이기까지는 목을 안 졸랐다. 목을 졸랐는데 두 손으로는 안 조르고 한 손으로 졸랐다. 계속해서 끝까지 그 선은 안 넘었으니까 나는 아직도 양심이 살아있는, 일말의 의로운, 막 가는 인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여, 저는 죽이면 안 됩니다. 저를 죄인이라고 너무 내치시면 안 됩니다. 몇 주 전에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경계선, 라인ilne싸움이 벌어진다고 했죠. 악마는 선과 악 사이에 라인을 그었어요. 선/악 주님은 선악과와 없음 사이에 줄을 그어버려요. 선악과/없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 잘난 체를 하죠. 그래도 이왕 아는 선, 악은 버리고 선은 행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래 나와요. 모든 율법과 성경을 악마가 세운 그 기준에 준해서 지키니까, 그 지키라고 부추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누구의 앞잡이에요? 누구의 아들입니까? 악마의 아들이잖아요. 악마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는데, 악마의 아들들은 이건 뭐 많다 정도가 아니죠. 다죠. 다. 거의 다죠. 교회가 전부 다 악마의 아들들이에요. 자기 깨지려고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를 밟아주세요.” 이것 때문에 교회 가는 것이 아니죠. “내 죄를 노출시켜주세요.” 이것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죠.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그게 내가 유명할까봐 두려운 게 아닙니다. 내가 안 유명하고 사람들한테 욕 얻어먹을까봐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외제차 타고 다니는 거예요. 외제차. 뭐 있어보일라고. 그래서 추석 지나고 백화점에는 아줌마들로 인해서 호황입니다. 고생한 자기에 대한 자기보상. ‘에이, 성질나서 오늘 옷 하나 확 사 입어버린다. 겨울 외투 확 사 입어버릴 거야.’ 자기에 대한 자기보상. 고생한 나여! 떠나라! 바닷가로. 제주도 푸른 밤. 이제는 떠나요~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으로 가죠. 가가지고 효리네 민박집에 민폐나 끼치고. 하여튼... 인간 돌아가는 모든 배선들이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키우기 위해서, 광내고 빛내기 위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모양새를 모델로 삼아서 이것 베끼고 저것 베끼고, 4차 산업이고 뭐고 관계없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데 일가견이 있어요. 아예 타고 났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데에 있어서. 주님은 이 땅에서 “나는 잃어버렸다. 콜!” 이러시는데, 우리는 “으응~ 혼자 잃어버리세요. 나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나는 살리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살리니까 콩고물에 달라붙듯이 일곱 마귀가, 귀신이, 아니 칠십 귀신이, 모든 귀신이 다 달려듭니다. “겁나지? 무섭지? 이런 짓 했으니까?” “아니야. 나는 복음 안다.”라고 해도,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다고 마귀가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주께서 하라고 했잖아요. 이런 짓 한 게 주의 사랑이잖아요. 주께서 사랑한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그 말을 할 때 자기를 봅니까? 주님을 봅니까? 주님을 보죠. 왜? 자기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할 때, 본인이 보기에도 자기는 인간도 아니고 버려졌으니까. 가룟 유다가 자살했습니다. 왜 자살했습니까?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살이라는 장렬한 방식으로 인생을 끝내버렸어요. 더러운 소리 들어가면서, 배신자라는 소리 들어가면서, 나는 더는 살 용기가 없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본인 입장에서 구원받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에 절망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구원에 절망해서 자살하면 구원해줍니까? 그런 것 없죠. 근데 우리가 그 절망까지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한테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였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느 선에서 다시 출발해야 돼요? 가룟 유다의 절망에서 다시 봐야 해요.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욕하겠습니까? 욕 안 하겠습니까? 자기도 만만치 않거든요. 팔아먹은 인간이나 나는 모른다고 면전에서 깐 인간이나 똑같거든요. 베드로나 열 두 제자는 자기가 놓인 자리가 예수님에게 근접했던 그 자리가 아니고, 배신했던 그 자리가 처음부터 주께서 택한 본래의 자리라는 것을, 배신했을 때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때. 자,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중간지점에서 인도하겠어요? 처음자리에서 인도하겠어요? 처음자리에서 인도하겠죠. 예수님께서도 성령께서 임할 때에 처음자리가 어디냐 하면 요단강에서 세례 주는 것을 구경한 자리가 아닙니다. 아예 요단강 물속에 들어간 자리에요. 요단강 물속은 땟물이 흐른 자리, 인간의 죄가 흐르는 자리에요. 죄의 자리입니다. 세례요한이 말렸잖아요. “아니, 왜 이러십니까? 오히려 제가 세례 받아야죠. 주님이 왜 세례를 받습니까?” “아니야. 이로써 우리가 아버지의 의를 이루어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에 합류했어요. 죄인에 합류했죠. 그 결과가 뭡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그 위에 하나님이라도 죄인의 자리에 합류해버리면, 우리에게 주어진 합당한 조치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잘나서 저주 안 받으려고 합니까? 뭐가 잘나서 안 잃어버리려고 합니까? 안 잃어버려야 된다는 근거가 있어요? 뭐, 생전에 조심했다고요? 살인 안 하기 위해서, 간음 안 하기 위해서요? 욕 안 하기 위해서요? 음란 안 하기 위해서요? 돈 욕심 안 내기 위해서요? 뭐 조심했다고요? 뭐 조심~? 참, 교회에서 사기 치는 사기 중에서 제일 나쁜 사기는 영혼가지고 장난치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고 조심히 살라고요? 참 이게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자기가 예수가 누군지 몰라요. 지금 인간의 윤리적인 그거 작업하고 있습니다. 가락강의에서 유튜브 동영상에서 했는데 다시 한 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1장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지금 사도바울이 죽으려고 환장한 거예요. 사람에게 설득력 있는 기발한 상품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뭡니까? 반대로 가죠. 사람에게 난 것이라야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어요. 사람이 예상한 것을 줘야 사람에게 먹힐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근데 사도바울은 뭐예요? 사도바울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설교한다고 합시다. 그럼 뭘 생각하겠습니까? 저 인간들이 뭘 원하고, 뭘 기대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걸 제공하겠어요? 제공 안 하겠어요? 제공 안 하죠. 근데 인간이 뭘 원한다는 것은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복습 들어가 봅시다. 인간이 뭘 원하고 있습니까? 자기 의죠. 그럼 자기 의가 왜 필요하죠? 그래야 자기가 살만한 구실이 있으니까. 아직 죽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잘 났는데 왜 죽어야 돼? 안 되죠. 잘났으니까 더 살아야 되잖아요. 그 잘산다는 것은 자기 의가 그만큼 자기가 보기에 건전하죠.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목사가 교회 키우려고 하면 무슨 설교를 합니까? 그 의에 대해서 장려를 하는 설교를 하면 되겠죠. 성경말씀을 동원해서. 근데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사람을 기뻐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여러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나라가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 시청 앞 광장에 모입시다.”라고 새문안 교회 목사가 그런 소리 했다고 합시다. 했다 칩시다. 제가 많이 봐주는 거예요. “성도가 선지자 역할을 해야 됩니다. 이 어두운 세대에 우리가 앞장서서 예수님이 가신 희생적인 길로 가서 우리가 민주화를 외칩시다.” 이거 사람들이 기대한 거예요? 기대 안 한 거예요? 기대했죠. 만약에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건 마귀의 교회입니다. 쓸데없는 데 돈 많이 냈어. 돈 내지도 않겠지만. 제가 만약에 자칭 유명하다는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이 설교합니다. 이 설교해요. 안 불러줘서 문제지. 컴퓨터 조사해서 이단이라는 소리 듣고 있는 목산데 누가 불러줘요. 초청도 취소될 걸요. 복음 전파의 책임자는 제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책임지라는 말을 할 잽도 못 되는 게, 날마다 죄만 짓고 있어요. 제가 죄인보고 책임지라는 소리를 안 합니다. 니나 똑바로 해! 이렇게 해요. 그래서 구원될 자가 구원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기여할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그냥 사세요. 주의 일은 실패하거나 하자나는 법이 없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자, 아까 한 것을 다시 들어가 봅시다. 주께서 살아있다. 그 다음 질문이 뭐였습니까? “주님은 살아있다.” “믿습니다.” 이러면 안 되죠. 그 다음에 뭐라고 질문했던가요? “살아있는데 어떻게 활동하며 살아 있느냐?” 이 문제를 딱 물으면 사람들이 답변을 못해요. “저는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심을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면서요?” “글쎄요?” “살아있다며?” 왜 글쎄요,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주님께서는 살아있다고 하늘로 올려 보내고, 평소의 모든 행함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본인이 살아있는, 본인의 일을 하다보니까 지금 주의 일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조차 없어요. 자기 일에 바빠 가지고. 그럼 주의 일을 어떻게 하는가를, 히브리서 10장 28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에 성령이 나와요.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절,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모세의 법, 십계명 잘 알잖아요. 모세의 법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물어봅니다. 모세의 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위해서 준 겁니까? 죄를 더 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준 겁니까? 죄를 더욱 죄 되게 해서, 인간 중에서 몇 명 저주받게 하는 겁니까? 모든 인간을 다 저주아래 있게 하는 겁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저주아래 있게 하죠. 저주아래 있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어요. 저주에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예수님께 저주했는데, 아버지로 인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살아나게 했잖아요. 일단은 어디로 간다? 아버지께 저주받은 자리가 우리의 자리에요. 잃어버려야 합니다. 스마트 폰 그 잃어버린 것 한탄하지 말고, 내가 쥐고 있는 스마트 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그 스마트 폰을 쥐고 있는 나 자체의 목숨을 강도한테 잃어버려도 우리는 한탄할 그런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어요. 졸음운전해서 차 박아서 멀쩡한 내 아내가 죽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잃어버릴 자가 아내였어요. 제 이야기가 참 비정하죠. 자기는 자기 아내가 안 죽어봐서 그렇다고 하는데, 안 죽어 보고 죽어보고 간에 그 문제가 아니고, 어떤 표준적 사건은 내가 한 어떤 경험이 표준적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든”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모든 행함의 모델은 뭐냐, 십자가에 죽으심,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 하는 그게 모델이 아니에요. 어떻게 시험을 이기고, 어떻게 유혹을 이기고 하는 그것은 모델이 아니라니까요. 십자가에요. 십자가. 성도는 그 십자가 증거 하라고 모든 일들을 주께서는 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게 하셨다는 것이 의로운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하시게 하는 행동을 하게 하신 거예요. 그게 모세법이에요. 근데 그게 모세법인데, 모세법의 완성이 있어야 하겠죠. 율법의 완성이 있어야 하겠죠. 그 율법의 완성은 저주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 저주가 그냥 말로만 저주가 아니고, 이게 역사 속에 실제로 사건화 되었어요. 모세법의 저주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어딥니까? 바로 십자가의 저주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나오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오해했는데, 신약에 보니까 그게 인간보고 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향하여 그 모든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인간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이 세상 모든 죄 때문에 죽으신 거잖아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뭘 끄집어내야 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살아도 몽땅 다 저주받은 자 맞다는 이 사실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지가 어떻게 살든, 어떻게 시험과 유혹을 이기든 관계없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모든 사람은 저주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모든 인간은 늙어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근심걱정이 늘 수시로 들죠. 그 근심걱정을 해결할 때 어떤 걸 사용하십니까? 내가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된다, 무슨 일 하나 사고를 쳤는데 들키면 나는 경찰서에 간다, 이럴 때 두려움이죠. 걱정근심이죠. 이럴 때 보통 이럽니다. ‘아니야.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거다. 하나님께서 무마시켜주실 거다.’ 이런 식으로. 그러면 뭐 한결 기분이 나아지십니까? 방법을 알려드려요? 벌써 열 번이나 했는데 또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뭐냐 하면 그 일을 누가 하게 했느냐? 누가? 내가 하게 했습니까? 누가 하게 했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죠. 사람이 발로 걷는데도 수 십 가지의 근육이 동원되듯이 어떤 일을 하는데도 주의 뜻이 다 동원됩니다. 이 땅은 숲속의 연못이에요. 내가 무슨 파장을 일으켜도, 무슨 말썽을 일으켜도 이미 그 파장에 더 큰 파도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부터 나와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뭐였다? 이 세상은 저주받아도 합당하다는 그 물결이 나한테 덮친 거예요. 저주받을 자가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 왜 마치 저주 안 받아야 되는 것처럼, 자기 분수도 모르고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을 하느냐 말이죠. ‘나같이 깨끗한 사람이 죄졌구나.’ 왜 자기를 깨끗하게 생각을 합니까? ‘이런 일만 없으면 나는 훌륭한데...’ 이런 일만 없었으면 훌륭하다는 것을 전제로 왜 깔아요? 그것 깔아놓고 복음 전하면 그거 사기꾼이에요. 사람들이 복음 전하면 좋은 것 골라가지고 지금보다 더 괜찮은, 향상된 자아로 바꾸려고 하는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시간 좀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뭐한다고 했습니까? 파괴죠. 파괴하시는 성령. 반응을 보니까 제목을 바꿔야겠어요. 우리를 파괴하시는 겁니다. 파괴하시면 걱정근심도 파괴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파괴되죠. 그 파괴된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옳소이다. 제목 또 바꿔야 되겠어요. 아예 12년 동안 병들었는데 “옳소이다.” 하는 거예요. 남들은 멀쩡하고 자기 혼자 귀신들렸는데 잘했다는 거예요. “니 개 아니가?” “옳소이다. 개입니다.” 우리는 언제 그렇게 시인할까요? 그 12년 동안 병든 그 여인이 근심이 있겠어요? 걱정이 있겠어요? 망가져도 더 이상 망가질 것이 없는데?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낮아지기까지 낮아졌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죽했으면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았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인간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길을 가도 성공 못한다는 두 가지 사실이 그 말씀 속에 담겨있습니다. 모든 인간도 “주여! 봐주세요.”라고 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걸 한다고 해도 그걸 이겨낼 사람은 예수님 본인 말고는 없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인간 중에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하루에 몇 번 외우십니까? 외우고 뭐고 간에, “목사님 그 말씀 오랜만에 듣네요. 아, 그런 구절이 있었구나.”라고 하겠죠. 평소에 뭐냐, 근심걱정뿐이에요. 주여, 봐주세요. 그저 봐주세요. 옛날에 헌금 많이 했잖아요. 봐주세요. 옛날에 봉사 많이 했잖아요. 봐주세요. 걱정근심 훅 지나가게 하옵소서. 저 더 살아야 돼요. 제 위신이 깎이기만 하면 저 자살할거예요. 한강에 예약해놨습니다. 이번 일만 들통 나면 저 물에 뛰어내릴 거예요. 이거 뭐 무슨 객기도 이런 객기가 다 있습니까? 그게 누구라고요? 가룟 유다에요. 그게 바로 자살한 김성수 목사에요. 복음입니까? 복음이에요? 그 사람이 전한 게 복음 맞아요? 반박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보이죠.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을 이용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구원욕구가 있었던 거예요. 주님처럼 우리가 잃어버린다는 자기 입장을 사람들은 강력하게 거부하게 돼요. 아예 안 되거든 가슴에 쓰세요. 잃어버린 자. 잃어버린 사람. 세 글자로 나 상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에요. 나 상실. 한예슬이 나오는 환상의 커플이라는. MBC에서 머리에 꽃 꽂고 나오는 거 있어요. 나 상실. 등신이다 이 말이에요. 12년도 아니고 50년, 60년 동안 귀신들렸다 이 말입니다. 귀신들렸는데, 근데 주님의 조치가 어떻다? “옳소이다!”에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어요. 이런 기적이. “나 등신인데 등신 잘 만들어놨습니다.” 이 말입니다. 옳소이다! 여기 히브리서 10장에서 모세의 법의 완성이 피에요. 언약의 피. 옛날에는 성경보고 죄인인줄 알지만 지금은 뭘 봐요? 그거 가지고는 안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없어요. 죄인 그 자체입니다. 근데 그 피가 무슨 피냐, 우리를 저주되게 하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걸 인식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을, 저주받는 것이 나한테 옳은 조치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언약이,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언약이 그 사람 속에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언약에 의해서 구원된 거예요. 언약을 믿어주면, 십자가 믿어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김성수 그쪽에서 그런 이야기하고. 그게 아니고 언약이 그냥 흘러들어온 거예요. 언약이 흘러 들어온 거예요. 모르겠어요. 주께서 시켜서 자살했으면 저는 가룟 유다라고 봐요. 가룟 유다가 사탄에 의해서 했잖아요. 사탄은 누가 보냈습니까? 가룟 유다보고 니 할 일 하라고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벌써 모든 숲속의 무브move는,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마귀조차도 누구 명령 듣는다? 예수님 말씀 듣는다고요. 근데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했잖아요.”라고 하고, 예수의 피를 거부한 마귀들은 “마귀야 물러가라!” 이러고 있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교회에 와서 “사탄아 물러가라!” 무슨 뜻입니까? “니가 바로 사탄이다.” “예수님의 피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는데, 사탄아 물러가라고 한다면 뭘 얻겠다는 것입니까? 옛날 전에처럼 빨리 회복해달라는 이 말 아닙니까? 괴기영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 찍으면 괴기영화가 돼요. “주여, 왜 저에게 이런 일을? 하필이면 나에게?” 뭐 이래 나와요. 피 입니다. 성령은 오직 피 이야기만 해요. 왜?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피만 이야기하겠다는 말은 피 앞에서 우리는 옳소이다, 라는 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아까 사도바울처럼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가 안 된다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는 잃어버린 자의 리스트에 올라가 있어요. 행함 책에서 명단이 빠져있다면, 축하합니다! 행함 책에서 명단이 빠져있다는 것은 니가 어떤 일을 행해도 니 운명과 상관이 없다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어떤 일을 행해도 니 이름은 생명책에 있다. 그럴 경우에 확실한 증거가 뭡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 주님의 언약의 피. 그럴 경우에 우리는 뭐냐 하면 “언약의 피를 인하여, 피를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주의 성령께서 십자가를 알게 했습니다.”라는 고백. 그게 전부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것을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나의 잣대로 이것은 감사하지 않을 일, 이것은 감사할 일이라고 구분하지 않게 하옵시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일으킨 일인 것을, 어떤 수모를 당해도 그것이 합당한 것인 것을, 합당한 조치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이기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