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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7. 9. 22) 2강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7. 9. 22) 43-2

복음을 위한 방법조차도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가 있고, 이 자아가 하나님의 일에 마중 나와서 자신이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있기 전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그 되돌리는 방법이 바로 주님 주시는 방법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합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은 “누가 전한다고?”라면서 되묻고, 우리는 “제가 전하지요.”라고 답합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을 베드로가 했지요. 이 때 주님은 베드로가 있는 세계와 주님이 계신 세계가 달라서 올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럼 일은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 베드로가 올 수 없는 세계에서 제공된 힘이 따로 있어야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는 무능력자가 되는 겁니다. 앉은뱅이가 구걸하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만났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앉은뱅이에 대해 무능력자입니다.

무능력자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목격자가 돼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했지요.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내가 같이 있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베드로와 앉은뱅이를 봅니다. 그럼 나는 ‘아니오’라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럼 내가 ‘아니오’라고 하면 주께서 일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을 벌이게 되면 자동적으로 ‘아니오’라는 방식으로 주를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현장에 주님이 할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요구하는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이 당신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비켜나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의 이런 태도가 마가복음 10장에 의하면 종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종이 되는 현장에서 으뜸이 된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 종이 되고 할 원인과 결과는 일이 벌어질 때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은 후에 자신들이 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주님께 인도 받는 자는, 인도받는 그 순간 소급해서 ‘내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마저 이것은 내 뜻이 아니었고 주께서 인도하는 작업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제 일어난 일도 주님께 인도를 받아서 ‘어제는 그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는 것을 소급해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완전히 땡잡은 거지요.

10년간 쉬지 않고 복권을 샀는데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는데 오늘 산 복권이 10억 당첨되었다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10년간 투자한 것으로 새롭게 의미가 부가됩니다. 미래에 확정된 것으로부터 자기의 과거가 새롭게 깔리는 겁니다. 과거를 새로 포장합니다. 어떤 포장인가? 이미 구원 받았다는 증거들의 타일로 이어집니다.

정리해 보시다. 1번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2번이 있고 난 뒤에 1번이 나옵니다. 그래야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분류가 됩니다. 1번은 이스라엘이에요. 확정된 이스라엘이죠. 더 이상 나눠지지 않아요. 그럼 우리는 1번에서 출발하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은 2번입니다.

나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하는 순간부터 2번입니다. 2번이 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가? 인간이 피폐해 집니다. 선과 악 사이에 살면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왜냐? 갈수록 점점 예민해지기 때문이죠. 선과 악의 경계선을 나중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어떤 판정을 내릴 때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이 먼저 있고 그 후에 판정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내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딸을 시집보내겠는데 개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절대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개를 싫어하기 때문에 판단 기준에서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싫다’는 것이 일방적으로 성립되지요.

인간이 ‘바르게 한다. 착하게 산다. 성실하게 산다.’ 이것이 순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기가 되기 위한 조건들입니다. 내가 개를 싫어하면 개 좋아하는 사람은 내 평가에서는 감점의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본인이 담배를 안 피우면 ‘나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싫어.’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옵니다.

자신이 담배를 안 피우니까 담배 냄새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런 자신은 깨끗하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더럽다고 규정합니다. 이유가 굉장히 많습니다. 니코틴이 몸에 들어가면 폐와 내장이 더러워지고 등등. 담배 안 피워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이 외출하고 집에 들어와서 손발을 씻지도 않고 그냥 잠자리에 듭니다. 그래도 자신은 담배를 안 피우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우깁니다.

인간은 변합니다. 예전에 자신이 좋아했던 것이 나이가 들면 별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예전에는 싫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좋아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자인지 혼돈스럽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옳고 그름을 판정합니다. 사람들이 왜 타인을 평가하는가 하면 혼란한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함입니다.

아침에 지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꼭 필요한 말만 하면 되는데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온갖 염려를 다 하면서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한다면 성경공부가 율법적으로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율법 조항이 들어올 때 지키는 기준까지 들어와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는 것이다.’

그럼 이 피폐된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할 것 없습니다. 2번이 있다는 말은 1번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했지요. 상처입고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되었지요. 제자들이 갔던 그 길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해서 주어집니다.

그럼 성도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지요. 그렇다면 이들은 상처가 없는가?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 더 착하게 살면 상처는 보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산 장부가 있는데, 죄도 짓고, 선도 행할 때가 있는데 결국 이익을 남기면 장사 잘 한 것이 됩니다. 인간들은 이런 행함의 장부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고 사단으로부터 선과 악을 저울질 하는 것을 배웠기에 늘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가? 로마서 3장 5절에 보면 ‘인간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손상시킬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불의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취소되거나 소멸될 수 있는지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물었어요. 묻는다는 말은 정답이 뻔하다는 거예요.

우리의 불의함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손상됩니까? 손상되지 않아요. 바울은 여기에서 더 나갑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 의해 절대 손상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너희들은 율법에 의해서 불의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논리를 로마서에서 펼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잖아요. 하늘에 별이 떠 있는데 지상에 있는 인간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별아 사라져라.”고 말하면 별이 소멸됩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의는 별처럼 우리에게 통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등장했어요. 로마서 1장에서는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것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나타난 것을 ‘나타났다’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마치 동방박사처럼.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지요. 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요. 박사들은 별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였어요. 이것이 1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항상 1번부터 갈 수가 없어요. 그것은 예수님 몫이니까.

인간들은 2번으로 살아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1번을 가지고 오시니까 성령 받은 성도는 1번 입장에서 2번 세계 속에서 살아가요. 그러면 우리가 불의하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불의함 중에 가장 불의한 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의 요소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나의 행함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성도에게도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사단적인 요소란 사실을. 사단으로부터 벗어나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사단이 이끄는 대로 우리를 맡기는 거예요. 제가 지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사단의 자궁 속에 들어 있고 사단이 엄마라면, 주님은 아빠입니다. 주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지금도 활동하게 해서 우리가 마음껏 불의를 체험토록 하십니다. 여기에 적당한 노래가 있어요. 윤종신이 작사했는데, 제목이 ‘팥빙수’입니다. 들어봤어요?

팥 넣고 푹 끓인다 설탕은 은근한 불 서서히 졸인다 졸인다
빙수용 위생 얼음 냉동실 안에 꽁꽁 단단히 얼린다 얼린다
프루츠 칵테일의 국물은 따라 내고 과일만 건진다 건진다
체리는 꼭지체리 체리는 꼭지체리 깨끗이 씻는다 씻는다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왔다야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주의사항 팥 조릴 때 설탕은 충분히
찰떡 젤리 크림 연유 빠지면 섭섭해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야!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나나나 나나나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야!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나나나 나나나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마귀 체험을 하는 거예요. ‘아, 사단이 모든 인간을 이렇게 피폐케 했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 걸게 만들고, 사는 것이 괴로워서 인터넷으로 모의해서 만나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하게 만드는 이것이 사단의 장난이구나.’ 인간을 힘들게 하고, 근심하고, 불안에 떨고, 죽게 만들고 이 모든 일들이 종합해보면, 주어진 자아가 감당이 안 돼요.

자아가 주어지면 자아의 위신과 체면이 덩달아 주어지니까 사소한 행동을 해도 남을 의식하게 되니까 힘들고 어려워요. 조직사회에서 상관이 지시를 내리면 눈물이 핑 돌아요. 왜냐하면 ‘내가 이런 소리까지 감수해야 되고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것 때문에 자괴감이 들지요.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대학까지 공부하고 회사에 취직을 했나?’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싶은 생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니 사표를 낼 수도 없어요. 그러면서 회사를 욕하고 상관을 욕하지요. 왜 욕을 합니까? 자꾸 나를 괴롭히니까. 내가 괴롭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1번이 아니고 2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우리가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지만 이 모든 일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내용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상도 못하고 우리 머리에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성령이 임하니 보게 됩니다. 이 말을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합니다.

그들이 성령 받았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깨달아 집니다. 우리에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마귀 체험 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45절을 봅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4절 말씀은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45절 말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증거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왜냐? 성령 받은 사도는 상석에 앉아서 ‘나를 섬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종의 고백입니다. 2번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으뜸의 자리에 앉아서 잘 난 척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그 모습이 바로 종의 모습입니다.

A집사님이 오늘 저녁 샤브샤브를 사줬어요. 집사님이 차로 식당까지 태우고 가서 B집사님과 제가 맛있게 먹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B집사님이 식당 입구에 내리면서 “오늘 A집사님이 맛있는 저녁을 사주시네. 고마워요.”라고 했어요. 그 때는 아직 A집사님이 밥값 낸다고 말하기 전인데.

B집사님의 이런 모습이 바로 섬기는 자세입니다. 사랑을 받아주는 것이 섬기는 겁니다.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은 항상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나옵니다. 사단에 사로잡힌 사람은 염려하고, 불평하고, 남을 원망합니다.

성도들끼리는 체면, 위신, 자존심 이런 것은 버려야 합니다. 2번은 지옥 갑니다. 그런데 1번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2번 된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십자가 마을에도 많아요. 이런 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막 살아라.’고 하니까 ‘영혼이 피폐해 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주신 이유가 내가 지키라고 준 말씀이니까 지켜야지.’ 옳은 말입니다. 성경은 지키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 앞에서 내가 얼마나 마귀 짓을 하고 있는지, 이미 구원 받은 입장에서 소급해서 육적인 내 모습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늘 하게 됩니다. 왜냐? 성경 말씀은 누구도 순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모든 행동에서 ‘나’가 나오게 되어 있고, 내가 말씀을 지키면 내가 기준이 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만약 길에서 돈을 100만원 주워 파출소에 갖다 줘서 주인을 찾아줬다면, 돈을 잃게 한 분이 주님이고, 돈을 습득하게 한 분도 주님입니다. 파출소에 갖다 주게 한 분도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실 때 나는 기능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선한 시민이라고 상을 받았어요. 그러면 갑자기 기능이 존재가 됩니다. 존재가 되면 여기서 기준이 나옵니다. ‘나처럼 돈 습득하고 파출소에 갖다 주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처럼 기능이 수시로 존재로 바뀝니다.

존재를 다시 주님의 기능으로 바꾸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꾸는 것은 존재를 분해하는 것입니다. 사모님도 이런 경험 많이 하셨지요? ‘이 아이들은 내가 키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키웠잖아요. 주님께 다 맡깁니다.’ 흔히 믿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믿음 있는 척 포장을 해서 주님께 다 미뤄요.

딸은 어려운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염려했던 아들도 무사히 대학 졸업하고 군 복무도 좋은 곳에 배치되어 잘 하고 있고, 온 집안이 평안하니까 갑자기 ‘저 예쁜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렇게 돼요. 내 위신과 체면을 세워줄 소품으로 자식들이 편입되고 말았어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계속 가겠는데 성령이 임한 사람은 이런 내가 해체됩니다.

나의 체면을 세워주던 딸이 결혼하겠다고 남자를 데려왔는데 몸에 담배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저 아이가 또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자식이 실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은 거예요. 기능으로. 잠시 착각에 빠졌다가(존재로 머물려고 하다가) 원래의 모습(기능)으로 돌아오니까 어지럽고 혼란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해놓고는 존재로 굳히다가 다시 실망스런 일이 생기니까 이 때 존재의 상처와 실패를 맛봅니다. ‘이런 인생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닌데 왜 일어났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그 절개지를 살펴보면 ‘내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되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일관성 있는 법칙이 있어요. 막 사는 겁니다. 왜냐?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일관성을 가지면 나는 기능에서 존재로 바뀝니다. 나는 길에서 돈을 주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이 기준이 되면 내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은 내가 심판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나처럼 되지 않으면 지옥 가!’ 이렇게 된다니까요.

천국과 지옥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자는 구원 받아요. 로마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할 때에 이방인과 성도를 자신이 구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는 성도이고 아니면 이방인입니다.

바울이 성도와 성도 아닌 자를 자기가 구분하지 않아요. 구분하면 존재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은 옛날에 십자가 마을에서 봉사를 했습니다.’라고 하면, ‘구원 받은 사람이네요.’라고 하지 않지요. 옛날에 봉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냐가 아닙니다. 지금 어떤 기능을 발산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지금도 막 살고 있습니다.” 이게 왜 받아들이기 힘든 말입니까? 대전에서 강의 듣는 어떤 성도님은 제 강의 중에서 ‘막 살아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든답니다. 이분은 고신측 계열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쪽 주장은 ‘성령 받았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말씀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혼이 피폐해졌겠어요. 자기의 건사함을 자신이 관리하기 위해서 돋보기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남을 들어다보겠지요. 그런데 이 성도는 ‘막 살아라.’는 말을 듣고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이 ‘막 살아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면 영혼이 피폐해진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가 막 살면 점점 자신이 깨져버려요.

‘막 살아라.’는 말을 듣고 화를 낸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지금 2번에 속해 있음을 자인함 셈이 됩니다. 그런데 1번에 속한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제가 지난주일 그런 설교를 했어요. 상사가 부하 직원에서 “해 주세요.”라고 하니까 “아니요.”라고 했어요. 지시가 오면 “예” 또는 “아니요.”를 해야 하잖아요. “아니요.”라고 하는 순간 없어야 될 내가 “아니요.”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예”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를 했으니까 보상해 주세요.”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보내주신 것을 감사해야 돼요. 마귀를 보내주셨기에 우리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님이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그리스도에게 합세한 거예요.

1번은 일관된 원칙이 있어요. 매일 성경 3장 읽고, 기도 30분 하고 이런 것이 있어요. 각자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요. 그리고 규칙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자로 불신자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신자에게는 신자들이 얌체입니다.

공무원 및 각종 시험 준비를 위해 노량진에 상주하는 사람이 5만, 다른 곳에서 노량진 학원으로 오가는 사람이 50만 정도 된답니다. 강의실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강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데 이 사람은 지난 7급 공무원 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얌체겠지요. 이미 시험에 합격했는데 왜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이런 얌체 짓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아 넘어간 거예요. 예수님도 자신들처럼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자 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속이고.

그 속임에 속아 넘어가야 구원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평소에 늘 나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발각당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언약의 효과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일관된 원칙은 없습니다. 법칙 세우지 마세요. 법칙을 세우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45절을 봅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질문합니다. ‘일부 지역의 특성이 구원을 방해합니까?’ 대구에 살았기 때문에 구원 받고, 북한에 살았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일이 일어날까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실 때는 모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택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둘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시적으로 ‘이런 사람은 구원 받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필요는 없어요. 공무원 학원에서 ‘이번에 우리 학원 출신이 수석 합격했습니다.’라고 해서 그 학원 출신은 모두 수석 합격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시를 한 거예요. 예수님은 누구를 예시했습니까? 본인만 예시했어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예시한 거예요.

‘나처럼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를 예시했기 때문에 그 예시 앞에서 어느 누구도 구원 받으려 하는 손을 내려야지요. 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구원 받을 자가 ‘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능이 와 닿으면 마가복음 10장 45절의 기능이 들어 있지요.

그러면 구원 문제가 나의 문제입니까, 주님의 숙제입니까? 주님의 숙제지요. 그렇다면 내 구원에 대해 내가 걱정해야 됩니까? 아니죠. 주님의 문제이기에 우리와 의논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 혼자 모든 것을 다 하십니다. 출장 뷔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조리기구, 음식 재료, 그릇 전부 알아서 다 해줍니다.

음식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간섭할 필요 없습니다. 출장 뷔페에서 다 알아서 합니다. 그것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주님의 작업자가 됩니다. 이게 1번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작업자가 되면 2번으로 가지 말고 곧바로 1번으로 가고 싶지요? 아닙니다. 2번을 거쳐 1번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대속물이 의미를 갖게 돼요.

대속물은 구제불능의 인간을 위해서 대속물이 있는 겁니다. 대속물이 되려면 형편없는 인간의 역할을 해줘야 됩니다. 그 기능은 성도가 오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형편없는 짓들을 해줘야 합니다. ‘바르게 살자. 정결하자 살자.’ 이러면 안 돼요. 대속물이 대속물답게 되려면 더러운 존재인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것이 대속물다운 더러운 짓인가? 더러운 짓은 제자들이 했던 짓입니다.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서 사는 것. 우리는 이런 더러운 짓을 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더러운 짓의 수준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주님을 위해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직업을 버리는 일. 이게 바로 더러운 짓입니다. 도마의 더러운 짓은 ‘내가 보지 않고는 못 믿겠습니다.’ 이런 것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정도까지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분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 이것은 말로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눈만 떴다하면 이런 짓을 합니다.

아들이 성적표를 가져왔습니다. “엄마, 나는 열심히 공부했어요.” 말은 필요 없어요. 성적표를 보지 않고는 아들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성적표가 엉망이면 공부 안 한 것입니다. “다음 성적표에서는 평균 85점으로 올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못 믿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짓거리는 보는 순간 감정이 흔들립니다. 내 기분을 흔들어놔요.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왜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염려하고 혼란이 오고 이런 겁니까? 죽음을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의 결과인 죽음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 집사님이 제게 한 말이 “나는 이제 터널을 빠져나왔습니다.”라고 했어요. 지금껏 어두운 터널을 걸어왔는데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박하사탕입니다.”라고 했어요. 영화 보셨지요. 설경구가 마지막에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죽음의 터널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웃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 가려고 시험을 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합격 통지서를 받았기에, 남들 천국 가려고 안간힘을 써는 장면을 보면서 “그건 시험에 안 나온다.”라고 약 올리면서 여유를 즐기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했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앞에 기죽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살았습니까.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얼마나 헛짓을 했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하면 주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란 생각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열심히 했습니다. 다 헛된 짓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끌림을 받으며 자유를 누리는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10. 17. 08: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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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9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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