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강-YouTube강의(남과 여)171010-이 근호 목사
205강-YouTube강의(남과 여)171010-이 근호 목사
205강, 제목은 ‘남과 여’입니다. 남과 여. 처음에 남자는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남자가 아니고 사람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남자라 하는 것은 언제 생기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서 갈빗대로 여자가 나오는 순간 그 아담은 남자가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하고 처음부터 남자가 없고 사람만 있다 하는 것하고 이야기가 차이점이 뭐냐, 그게 그거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에게서 갈빗대로 여자가 나오는 순간, 남자는 사람의 기능을 하면 안돼요. 무슨 기능을 해야 하느냐 하면, 남자로서만 기능을 해야 돼요. 남자로서만.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온전치 않다 이 말이에요. 온전치 않다 이 말입니다.
다시 할게요. 여자가 없이 아담이 있을 때는 아담 자체가 온전해요. 아담 자체로 온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갈빗대로 여자로 만드는 순간 이제는 여자 없이는 일이 안돼요.
여자 없이는 안 되는 남자는 사람의 기능을 하면 안 되고 남자의 기능을 해야 돼요. 남자의 기능. 여자는 뭐냐 하면 사람의 기능을 하면 안돼요. 여자의 기능을 해야 돼요.
그리고 남자의 기능과 여자의 기능이 합체될 때 비로소 사람의 기능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아담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창세기2장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굉장히 난해한 이야기에요.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이건 인간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백날 부부 결혼식 해봐야 둘은 둘이에요. 같이 이불 덮고 자봐야 아침에 깨서 꿈 이야기하면 두 가지 꿈이 나옵니다.
절대로 한 가지 꿈이 안 나오지요. 끝가지 그래요. 끝까지. 끝까지 인간은 결혼을 하던 뭘 하던 한 몸이 아니고 두 몸으로 줄곧 갑니다. 그러면 여긴 두 사람이 한 몸 됐다 했잖아요. 요거는 범죄 하기 이전이에요.
범죄하고 이후에 창세기3장에 보면 그걸 뭐냐 하면 개성이 드디어 자아의 발생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이제는 내 혼자 있어도 나는 한 몸이라고 우기는 그러한 일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나는 여자 없으면 한 몸 안 돼!” 여자는 “나는 저 남자 없으면 한 몸이 안 돼!” 라고 했던 그들이 끝났습니다. 끝나고 사탄에게 꼬임을 받아서 이제는 범죄하고 난 뒤에는 “그까짓 거 나 여자 있으면 좋겠지만, 여자 없어도 내 몸은 요걸로 족해. 나는 나 혼자 살 수 있어!” 모든 가치와 의미는 다 저 여자한테 돌아갈 게 아니고 나한테 돌아와. 또 여자는 내 남편이지만 남자에게 돌아갈 게 아니고 나는 나를 위해서 남편이 있는 거야.
모든 인간이 자식을 낳았다. 아버지 왜 있느냐? 나를 위해서 있지. 아버지에게 자식은 저 자식은 왜 있는가? 나 좋아라고 저 자식이 내 기쁨이라고 자식이 있는 거라고. 모든 게 그렇습니다. 모든 게. 성경말씀이 전설 아니지요. 신화 아니지요. 얼마나 현실을 대변해 줍니까? 실제적이에요. 실제적.
성경만큼 실제적인 게 없어요.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목사님, 나는 왜 내 욕심만 챙깁니까?” 그게 성경에 보면 창세기2장하고 3장하고 달라서 그래요. 그렇게 묻는 사람도 참 기특한 사람이지요. 어떤 사람은 그리 묻지도 않지요. 당연하지 뭐. 나 누굴 위해 사느냐고? 나를 위해 살아. 평생 어떻게 살았냐고? 내 힘으로 내가 살았다. 왜? 누가 죽으면 가슴이 아프지? 아프지. 하지만 나는 아직 안 죽었잖아.
왜 모든 말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이 모든 말이 나만 있으면 되고 나만 잘되면 되는 쪽으로 왜 그렇게 쏠리느냐 이 말이지요. 심지어 교회 가서 예수 믿어도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어도 나 잘되기 위해서 믿는 거하고 우리는 그걸 정상이라고 착각했잖아요. 이게 옳은 거라고.
하나님 믿어주자. 믿어주면 하나님이 나 기특하다고 나 천국 넣어주겠지. 누굴? 나를. 모든 것이 바로 나 중심으로 된 이것을 이게 본능인데 세상에 본능을 어떻게 고칩니까? 죽을 때까지 안 고쳐집니다. 죽을 때까지 안 고쳐져요.
착한 일 해봐야 내가 했다. 라고 남한테 떠벌일 마음준비가 되어있어요. 내가 했다고. 만약에 교회에 피아노를 누가 하나 기증했습니다. 어떤 자가 지나가다가 몰라가지고 누가 피아노를 기증했지? 하면 입이 근질근질해요. 속으로 ‘이 바보야. 내가 했어. 내가.’ 따라서 다른 애가 피아노를 어지르면 가만히 있는데 기증자가 그걸 보면 “아이고, 가까이 하지 마!” 말리지요.
사람은 자기 한 것에 대해서 기억을 하고 자기 한 것에 대해서 끝까지 애착하는 겁니다. 그래서 헌금은 없습니다. 투자한 거예요.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요? 천만에요. 자기 마음한테 헌금한 거예요. 내 마음에 헌금한 것이 장부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죽을 때 그 장부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섭니다. “주님, 2017년도 7월 6일날 제가 이거했잖아요. 이 착한 일했으니까 상급주세요.” 이거 정상 아닙니다. 마귀 들린 거예요. 그런데 다 같이 마귀 들리다 보니까 서로가 정상이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정상인 분은 누구 밖에 없느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라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그 자체가 아담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마지막 남자라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아담. 마지막 하와가 아니에요. 마지막 아담이에요.
마지막 아담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하나가 되어있어요. 그 자체가. 그래서 예수님 몸에 지체가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남자로도 괜찮고 여자로도 괜찮고 부부해도 괜찮고 홀로 해도 괜찮아요.
그리스도와 영원한 한 몸이 되고 마는 겁니다. 창세기 2장의 완성이 되고 말아요. 창세기2장에. 그래서 성경의 완성은 인간이 못해요. 주님이 완성된 채로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연세 많은 분은 알지요. 여름에 등목 하는 거 알지요. 상위 옷을 벗고 더울 때 옛날에 마당 있는 집에서는 하거든요. 큰놈부터 한 바가지 붓고 시원하지요. 주께서 자기의 한 몸 됨을 우리에게 뒤집어 씌워버려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라 합니다.
왕 노릇이란 말이 쉽게 말하면 어~푸 에요. 어~푸! 내 몸통은 이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내 몸통보다 차고 넘쳐. 줘도 너무 줬어 은혜를. 의를. 죄를 씻을 만큼만 의를 준 게 아니고 죄를 씻을 만큼만 용서한 게 아니고, 이건 앞으로 무슨 죄를 지어도 그 의에 가려가지고 티도 안 나. 죄 진 게 티가 안 날 정도로 어~푸 어~푸! 하는 식으로 완전히 파묻히도록 폭설 내리듯이 의를 줘버렸어요.
왜냐하면 또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여 은혜 받았습니다. 또 돌아서가지고 또 음란 간음에다가 살인, 마음속에 간음하고 이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예 일괄적으로 죽을 때까지 아무리 죄 지어도 그 의에서 못 빠져나오도록 주께서 일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줘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공로가 그 정도로 수준이에요.
그저 깔짝 깔짝 그냥 죄 지은 거 용서하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고 어떤 죄를 지어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 기억치 아니하리라. 했잖아요. 니 기억하나? 나 기억 안 했는데. 기억치 아니할 정도로 퍼부어 버립니다.
남자, 여자는 뭐냐, 남자는 남자하면서, 남자하면서는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지으면서 이 죄와 한 몸 되신 완성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교해보라고 남자는 남자로 살고, 여자는 여자로 살면서 두 죄인이 만나서 부부되게 한 겁니다. 실컷 싸우라고. 원 없이 한 번 싸워보라고. 얼마나 이기주의자인 것을 티 팍 나. 티를 마음껏 내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보고 이기주의래요. 둘 다 이기주의면서. “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리 나오느냐?” “니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평생 70넘고 80넘어 죽을 때까지 하나 없어질 때까지 싸워버려요. 심지어 하나 없어지면 초상화 걸어놓고 싸워요. 죽은 마누라 사진 걸어놓고 싸우잖아요. 왜? 싸워야 지 자아의식이 생기니까. 옛날 하던 버릇대로.
그 정도로 우리는 싸움의 대상으로 죄지은 대상으로 부부 만들 게 해주신 겁니다. 왜? 그리스도 바라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