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0 - 죽음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20 - 죽음
07,10,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죽음이라는 블랙홀, 이 블랙홀은 생각과 세상원리의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죽음에 갇혀있는 인간 !!
여기에 '죽음'이 나오는데, '죽음의 블랙홀' 이라고 말이죠. 오늘은 이 죽음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인간은 가봤자 마지막에는 죽음인데, 자기가 미국에 살던 브라질에 살던, 꼴 보기가 싫은 사람이 있어서 도망을 쳐서 살던, 남극이나 북극에 살던, 그 어디에 살던 마찬가지라는 말이죠.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데, 그러니 인간의 가는 길을 정해져있다는 겁니다. 정해져있다는 것은 갇혀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인간은 죽음에 갇혀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죽음이 그렇게 포위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다' 라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살고자 하는 의지와 죽이려고 하는 힘이 늘 투쟁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바로 이 죽음의 힘을 의식해서, "이 죽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을까?" 라고 해서, 여기서 종교가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죠.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불교가 있었는데, 이 불교가 인도의 힌두교의 영향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힌두교와는 상관이 없고, 우리나라의 샤먼, 즉 무당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종교는 처음에 생길 때의 교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 나라의 민중들이 받아드릴 당시의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일단 그렇게 해서 받아들이면 그게 그 나라의 종교가 된다는 겁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
히브리서 2장의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해서 종교를 받아들였다고 보면 되는데 말이죠. 여기서 "죽기를 무서워했다" 라는 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면, 불행이 무섭다는 것인데, 어떤 일을 했을 때도 그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무섭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라고 한다는 것은, 그 앞에 있는 죽음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렇게 무엇인가가 무섭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관한 문제이고, 이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죄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섭다는 겁니다.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벌벌 떠는데, 그때는 경찰이 지나가기만 해도 괜히 겁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죄의식은 무엇과 연결이 되는고 하니, 처벌의식과 관련이 있는데, 즉 자기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처벌이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처벌이 없어도 죄의식 자체가 처벌이 된다는 말이죠. 무섭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처벌로 간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처벌의 끝이 어디인고 하니, 결국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데, 이것을 불행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데 그것을 불행한 사태로 보는데, 그것은 평소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죽음에 시달리고 있는지, 즉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나 강렬하다는 겁니다.
종교는, 처벌에 대한 해결책 !!
그래서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기반에 있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끄집어내어서 해결하려는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종교는 어디에 관심을 가지는고 하니, 이 처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처벌에 대해서 "내가 나를 처벌한다" 라고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불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신이 나를 처벌한다" 라고 하는데, 물론 불교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을 믿는데, '나' 라는 것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니 말이죠. 그렇게 신이 처벌을 하기 때문에, 무서움을 해결하려고 하면, 신에게 "나를 처벌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아부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는데, 우리나라의 단군을 비롯한 모든 제천의식은 신에게 아부를 하는 것인데, 단군 자체도 무당이고 말이죠. 춤을 추든지, 재롱을 피우든지, 돈을 바치든지, 정성을 바치든지, 자기의 각오를 바치든지, "앞으로 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아부를 해서 신의 처벌을 모면하도록 해야한다는 겁니다.
아부법과 처벌법 !!
그렇게 하려면 신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하는 '아부법'이 있을 것이고, 물론 이것은 제가 방금 지어낸 용어인데 말이죠(ㅋㅋ). 그리고 처벌법이 있는데, 그렇다면 아부법과 처벌법을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요? 법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든 무엇이든 전부가 다 법으로 되어있는데, 즉 계명인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계율' 이라고 하고 말이죠.
그래서 불교에 '팔정도(八正道)'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율법적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바른 생각 바른 행동, 그렇게 해서 죽 나열이 되는데, 그러면 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르지 않은 행동과의 경계선이 처지게 된다는 말이죠. 즉 이 선을 넘으면 바르지 않는 행동, 이 선을 넘지 않으면 바른 행동,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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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정도(八正道) - 열반에 이를 수 있는 8가지의 바른길(正道)을 말한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뗏목에 비유하여 팔도선(八道船), 또는 팔벌(八筏)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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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불교에서는 바른 행동과 바르지 않은 행동을 구별짓기 위해서 계율을 만들고, 그 계율에 의해서 한국불교가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불교신자들이 고스란히 지금 어디로 갔는고 하니, 통일교, 안산홍, 신천지, 구원파 등등, 그렇게 기독교 계통으로 다 갔다는 겁니다. 물론 지금의 정통 장로교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9장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라고 하는데, 즉 이미 그렇게 결정을 다 해놓았다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말이죠. 그러니까 그동안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쳤던 종교가, 성경말씀에 비추어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겁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인간은 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 무서움, 처벌,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종교라는 영역에 스스로 가담해서, 계율과 계명을 통해서 신에게 아부할 것은 아부하고, 드릴 것은 드리고, 순종할 것은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해서 바른 존재가 되고자 했다는 말이죠.
아, 회심곡(回心曲) !!
추석이나 설에 TV를 보면, 유명한 국악인이 나와서 판소리를 하는데, 그 중에서 저와 나이가 똑같은 이상해의 부인인 김영임이 나와서 부르는 '회심곡' 이라는 것이 있는데, 모두들 알지요? 거기에 보면 천국과 지옥에 나온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어릴 때부터 그것을 들었는데, 물론 그때는 다른 사람이 불렀지만 말이죠.
그 곡을 전부 다 들으려고 하면 30분은 족히 걸리지 싶은데, 엄청나게 길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염라대왕에게 가서 자기가 신에게 얼마나 아부를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아부의 정도에 따라서 지옥에도 등급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한 사람은 극락에 가있고 말이죠.
그러니 그 회심곡의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죽고 난 뒤의 정보를 미리 알았으니 살아생전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서 복을 받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그냥 가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인데, 조선의 민중들 심성 속에 그것이 빈틈이 없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그 마음 그대로, 교회로 !!
그래서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교회에 나오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상급만 이야기하면 전부가 아멘을 연발한다는 말이죠. 상급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예수님만을 믿었지, 지금까지 교회에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구원을 받더라도, 팬티바람의 부끄러운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과거에 당신이 하늘나라의 확장에 충성을 다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교회에 충성하고 목사를 섬기면, 거기에 대한 상급의 마일리지가 쌓인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늘나라에서 이왕이면 더 좋은 자리에, 동서보다도, 시어머니보다 더 좋고 놓은 자리에 가고 싶다는 겁니다.
교회가 그러한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해주는데, 그러니 그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도시고 시골이고 간에, 그리고 교수든 백수든 간에 팍팍 꽂히는데,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무엇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그것을 왜 마다하겠느냐는 것이죠.
자기도 모르는 자기에게 숨어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해주는데, "하면 된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자기도 천국에 갈 수 있고, 그리고 거기서도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왜 거부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막 적금을 탄 것을 덜렁 교회의 주차장을 넓히는데 내놓는다는 것이죠. 아내와 의논도 하지 않고 말이죠.
제 주위에도 그렇게 해서 1억을 바친 사람이 있는데, 이단에서 속아서 그런 짓을 하니 얼마나 기가 찬지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그 사람은 이단인 줄을 전혀 모르는데, 아무튼 자기의 가능성을 인정해준다고 하면, 돈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그 귀한 돈이 말이죠.
자아와 주체 !!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담의 자손, 즉 범죄한 자손인데, 이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비정상' 이라고 했는데, 그런 비정상적인 아담에게서 나온 자아가 생각하는 '나' 라는 것과,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즉 창세 전에 예수님이 익히 아는 '나' 라는 것, 그것을 지난 수요일 설교시간에 '주체' 라고 했는데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니 앞의 것은 '자아' 라고 할 수 있고, 뒤의 것은 '주체'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자아가 있는 줄을 몰랐는데, 왜냐하면 아담의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자아, 즉 '나' 라는 것은 육신의 범위 안에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담 안에, 즉 "육신의 범위 안에 있다" 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의 두려움 안에 있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리고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 안에 있다는 것은, "무조건 나는 살고 보자" 라는, 그런 식의 정신상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 전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체는 무엇인고 하니, 그 '나'는 아담에게서 나온 '나'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생뚱맞은데, 그런데 첫 번째 '나'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품고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의 예정된 자를 위해서, 즉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 자들,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의 '소속'을 알려줘 !!
그렇다면 아담은 살고 싶어서 환장을 했고, 반면에 주님은 죽어도 괜찮다고 하셨고, 그러니 거기에는 다리가 끊어져있는데, 완전히 단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연결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령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어떤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속을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자리를 말이죠. 성령께서 찾아오지 않으면 살고자 하는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나 인데, 그러니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외에는 머리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라는 겁니다.
요즘 20대와 30대의 젊은이들이 취직이 되지 않아서 그야말로 난리인데,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서 채 한 평도 되지 않은 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생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것도 비싼 곳은 월세가 50만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미 학교는 다 졸업을 했고,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취직은 되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하루종일 알바를 하다가 밤늦게 그 좁은 고시원에 오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과연 예수님이 생각이 날까요? 여러분도 다 그런 생활을 경험했지 싶은데 말이죠. 그 넓은 서울시내를 돌아다녀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된 집이 있습니까? 아무리 집이 많더라도, 그런 집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내 집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지, 예수님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가용을 타고 친정에 가네 ♬
그러니 "일단은 살고 보자" 라는 것인데, 다른 생각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빨리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서 결혼도 하고, 그렇게 해서 예쁜 마누라와 함께 고향이 가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가용을 타고 친정에 가네 ♬" 라는 노래도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 듣는 척을 하는데, 모두들 알지요? (ㅋㅋ) 물론 요즘은 백수도 다 자가용이 있지만 말이죠.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지리시간에 통계를 보니까, 그때 미국에는 3명당 자동차가 한 대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는데 말이죠. 그때 우리 반에는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집이 단 한 군데도 없었는데, 그런데 미국에는 한 집에 차가 몇 대씩이나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때부터 저는 미군부대의 미국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그야말로 하늘나라에 사는 천사들처럼 보였는데, 그들이 먹는 초코렛, 씹는 껌조차도 그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아무튼 우리 인간은 사고방식은 "내 힘으로 내가 살고 보자" 라는 것인데,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살리려고 하는 그 '나'는 아담 안의 '나', 즉 '자아' 라는 말이죠.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다 허구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게 전도서라는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인데, 그 안에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전도서 1장 14절에서 18절을 보겠습니다.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 1: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