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5절(열매는 순교다)171010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15장 5절(열매는 순교다)171010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 대목 합니다. 예 상당히 어려워요. 무지 왜 어렵냐하면은 나는 이라고 할 때는 한 사람을 나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너희라 하는 것은 다수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맞죠? 제말 틀리지 않죠? 너희는 다수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문제가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너희라고 여겼던 사람인데 그 ‘나’ 라는 예수님이 다를 경우에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겁니다. 각자 우리는 예수님만 믿는 그 가지다 라고 우기게 되는데, 그렇게 모인 그 너희가 너희 그룹과 다른 너희 그룹 사이에 제시하는 나는 포도나무가 왜 그리 다른 포도나무가 왜 그리 다르지요?
그러면 A라는 그룹과 B라는 그룹에서 제시하는 A라는 너희와 B라는 너희가 제시하는 그 포도나무가 다르다면 둘 중에 하나 맞을수도 있고 둘 다 틀릴수도 있고, 그러나 이 경우는 없어요. 둘다 맞을 경우는 없습니다. 둘다 맞을 경우는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할 때, 그 너희는 인간쪽에서 예수님을 지정할 수는 없는겁니다. 왜? 우리는 진짜 예수님 믿는다고 해봤자 저쪽에서 우리하고 생각이 다른 저쪽에서 나도 진짜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되버리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할 때, 그 너희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들면 되겠죠. 나는 I 죠. 너희는 YOU 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가지라고 우기는 그 집단이 많아지게 되면 집단이 A그룹도 있고 B그룹도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진짜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둘이 협의해야되는 겁니까? 의논해야 되는 겁니까? 그럴수 없는 거죠.
사람이 사람이 협의해가지고 하나되는 법이 없어요. 인간은 결국은 자기 독자적인 자기 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끝까지 내세우게 되어있어요. 가족도 마찬가지고. 내 생각을 관철하고 싶어해요 인간은.
인간의 특징은요, 나의 특징은 3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는 내가 있음이 제일 확실하다. 예수님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 하지만 가장 확신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것이 제일 확실해요.
그리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결국 뭘 믿느냐하면은 내가 여기 있어서 나 예수님 믿습니다 라는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더 큰 확실한 믿음은 없어요. 교인들이 믿습니다해도 그 말 나는 나를 믿습니다 라는 말로 들으시면 편해요. 나는 나만 믿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해도 속으로 ‘예수 너 언제봤다고...뭐 예수봤어? 안봤잖아. 안봤으면서 믿는다고해..?’ 우리가 아침되면 거울에 눈에 보이는게 뭡니까? 예수님이 보입니까? 내가 보입니까? 내가 보이잖아요.
그러면 아침마다 머리하면서 머리 다듬으면서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나 밖에 없는거예요. 나 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어요.
두 번째 특징이 뭐냐하면은 ‘나를 키운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설쳐. 그 설치는 설친다라는 말을 고상한 말로 행동한다 이 말입니다. 자꾸 설치거든요. 설치는 목적이 뭐냐하면은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힘을 더 키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더 키우기 위해서.
자, 1번 2번 한번 연결시켜 봅시다. 나는 있다. 나는 누구의 신자냐하면은 나의 신자예요. 내가 나한테 교주고 유일한 마지막까지 나를 믿는 신도는 나예요. 나를 유일하게 믿는 신도는 나밖에 없어요.
예수믿다가 환란오게 되면은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깔끔하게 나에게 돌아서니까. 그런데 그것이 기반이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그 나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키웁니다. 키울 때 뭐가 필요하냐 하면은 힘이 필요해요.
그래서 인간은 계속 주변에 힘있는 것을 다 모읍니다. 힘 있는 사람, 힘 있는 돈, 하여튼 남한테 힘을 발휘할수 있는 요소는 다 끌어 모아요. 내가 아는 사람중에 누가 아는사람. 교회도 작은 교회가면 힘이 안되. 장로가 되도 작은 교회 장로는 되면 힘이 없어요. 이왕이면 큰 교회 장로되야 되고 목사면 큰 목회해야되고.
그 옛날 사람들이 여자가 시집가면 뭘 당부하느냐 하면은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당부하지요.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그렇죠? 왜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합니까? 자식을 많이 낳는데 그 자식이 그냥 자식이 아니고 어떻게 아들이 좋겠어요? 딸이 좋겠어요? 예, 아들이 좋아요. 왜?
아들이 힘이 되니까. 딸은 남의 식구 되잖아요. 힘이 빼앗기는 요소이고, 아들은 여자를 데려오니까 힘을 더 모으게 되거든요.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나는 여기있다. 나는 이미 벌써 신자예요.
예수믿는 것은 하나의 겉절이고 그냥 구색에 불과하고 내가 말한 스티커, 바람불면 휙 뜯어 지는 것.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예수 믿는 것 언제 후딱 바람불면 다 떨어져 버려요. 북한에 가서 예수믿느냐? 아니요. 다 떨어져 나가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그냥 있지 않고 뭐가 움직인다 했지요. 움직이는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지금보다 키우는 거예요. 남를 키우는거요? 아니요. 누가 키워? 나를 키우는 거예요. 내가 기업을 한다면 이 기업을 키우는 것이 곧 내가 하는 모든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이 키우는 일을 기어이 관철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목적을 나 키우는 목적에 대해서 관철한다는 말 쉽게 이야기하면 양보 없다. 나 키우는데 조금도 남한테 양보할 생각 없어요. 부모 자식간에 마찬가지입니다.
부모한테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나 잘남을 나 힘있고 대단함을 자랑질하기 위해서 자식을 계속 자식한테 베풀어 주기도 하고, 돈도 대주고, 어려운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하라 하고, 이게 뭐냐하면 부모자신의 명예와 위신을 체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우리가 또 자식한테 또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관철하는 거예요. 관철. 뚫어내는 거예요. 기어이해내는 것. 만약 관철이 안된다? 관철이 안되면, 이 3번이 안되면 1번을 없애버립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하면은 번개탄 피워놓고 하는 것 뭡니까? 자살해요.
이 자살의 이유가 먹을게 없어서 자살하는게 아니고, 관철하거나 나를 키울 희망이 없어버리면 자살해요. 나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내가 여기 있으면 되잖아 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들은 1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1번이 2번으로 가고, 2번이 3번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3번 단계에서는 누가 피해보냐 하면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에게 피해자가 되고, 나에게 이용물이 되요. 나에게 이용물이 된다고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그래서 이 세가지를 종합하게 되면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줘요. 내가 존재해서 나쁜일 해서 죄가 아니고, 내가 존재할 때는 2번 3번이 같이 발동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 아닌 인간은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는 아까 조금전에 했던 동영상, 두 번째 동영상 남과 여 할 때 그 십분짜리 한번 들어보시면 그 이유가 조금 나올겁니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대입해 봅시다. 이것을 그대로 여기 집어넣어요. 너희라는 그룹에다가. 그룹이라 하지말고 쉬운말로 교회, 또는 신앙공동체에 집어넣읍시다. 신앙 공동체. 요새 좋은 말 많이 나오거든요. 성령공동체. 하여튼 뭐 멋있어 보일라고 성경대로 하는데, 여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들어가죠. 내가 들어가게 되면 나는 1번 2번 3번 양보 없습니다. 절대로 이건 죽을 때 까지 안 놓거든요.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하여.
두 번째 나는 이대로 머무는 것은 자존심 상해서 키우고, 세 번째 그냥 키운다 상상만 하는거 아니고 실행에 옮깁니다. 관철하기 위해서. 그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뜻을 관철하다 보면 남이 울던 아파하던 그것은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예요. 첫 번째 관심사는 내가 키우는 것이 관심사고 남이 울던말던 그것은 내 관심사 아니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내드릴테니까 여러분이 해답을 해결책을 내보세요. 어떤 가정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낮잠을 자야되요. 밤에. 근데 낮잠을 잘려고 하면 비행기가 비행장옆이라 비행기가 뜹니다. 자, 그 주변에 있는 갓난아이 낮잠자기 위해서 비행기 훈련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아이 낮잠자라고 훈련하지 말까요? 비행기 그럼 썩힐까요? 아니지요?
그러면 그 주위에 있는 비행장이 실제로 있는 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예요. 우리동네 비행장 있으니까.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라에 뭘 요구하냐하면 보상을 요구한다고요. 이 보상이란말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은 피해를 봤을때나 이게 피해보상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피해봤습니까? 자기 아이가 낮잠을 못 잤으니 피해보상을 보겠죠. 그러면 피해보상을 본다면 보상이 뭐가 됩니까? 보상이 어디 뭐 빵을 줍니까? 뭘로 줍니까? 물로 줘요? 뭘로 줘요? 돈으로 주지요.
돈은 1번 2번 3번 어디에 해당됩니까? 딱 2번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족하지는 않지만 엄마로서 만족하지는 않지만, 아이 하나 낳고 내 힘 키울려고 하다가 아이가 잠이 안든다, 나라에서 보상받았다 그러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약간은 달성되었죠. 약간 달성되었죠.
그런데 보상해준다 해놓고 보상 안해준다. 그러면 이 존재자체를 부정, 자살로 한발자국 나갈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보상액 못받아가지고 숭례문 있잖아요. 불지른 70대 할아버지 있죠? 자기 땅 보상 안나왔다고 남대문을 불질렀잖아요. 지금도 살고 있어요. 20년 무기징역 받아가지고 살고 있어요.
왜 행동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은 나쁘다 그 사람은 그러면 안되지. 어떻게 나라를 그렇게 했느냐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고, 알맹이 들여다 보면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신자예요. 무슨 종교의 신자입니까?
나를 신봉하는 신자예요. 신자이기 때문에 남한테 피해준다는 것은 이것은 자기의 일차적 문제입니까? 관심사 아니예요. 아니죠. 밀어내버리죠. 그런데 그 할아버지보고 다 욕했잖아요. 그런데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어때요? 만만치 않죠?
자 여기 교회 예배당 있습니다. 예배당 있는데 예배당의 주차장을 넓힙니다. 넓히는데 여기에 어떤 비리비리한 집이 하나있다. 이것 좀 밀어버려야 주차장 되는데, 근데 이 할머니는 자기 고향이라서 언제 죽은 자식 돌아온다고 안떠난다. 그러면 어떻게 돈 줘서 내보내야죠.
그것을 장로 10명이나 되는데 하필 나보고 시킨다. 그 추진사업을. 그러면 나는 이 할머니집을 헐어서 내보내야되요? 안 내보내야되요? 당신을 고향을 존중합니다. 이래가지고 그냥 놔둘까요? 내버려야되겠죠?
그것을 누가 시키는가? 교회 당회장이 시킵니다. 교회 당회장이. 당회장이 시키는데 왜 그말에는 나는 안합니다 라는 말을 왜 못할까요? 그 교회가 자기가 포함된 순간 그 교회가 누구 교회됩니까? 바로 내 교회되는 겁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 2번을 충족시켜줘요. 나를 키운다. 그러면 그 장로가 그 주차장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게 되면 그 장로는 그 교회에서 뭘 발휘하느냐 하면은 말빨이 서요. ‘니들은 놀았잖아. 이 주차장 이거 누가 했는데? 이거 내가 했어.’
자기가 말빨이 세워지면 그 장로의 아들이 그 교회 집사라면 대를 이어서 장차 10년후에 그 아들이 이후에 이 주차장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다 해놨어! 그 교회에서 또 발언권 쎄게 나오고 발언권이 쎄게 나온다는 말은 다음 목사 뽑을 때 그 장로 입김이 쎌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누구 교회입니까? 대대로 장로교회.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장로교회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변화가 이 세가지 공식으로 다 풀리게 되어있어요. 잘 풀렸지요.
이것 세가지로 다 풀리게 되있고, 덧붙여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느 인간도 이 세가지 공식에서 벗어날 위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너희는 가지니 에서 그 너희에서 우리 자신을 빼주세요. 우리 자신을.
나는 포도나무요 그것으로 족한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 스스로 족한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원칙을 자기 본인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만 영광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아들에게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어디 나오죠?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 영광받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라는 이야기는 누구에게 붙일수 있다고? ‘나’라는 이야기는 오직 예수님만 붙일수 있고 성도한테는 ‘나’라는 것을 붙이면 안되고, 뭐라고 붙이냐하면 너희라고 붙여야되요. 너희라고.
나는 내가 있음에 나라고 하게되지만, 너희라고 할때는 그냥 우리 단독적으로 너희라는 말을 붙이면 안되고 누구를 의식하고 나는 그분이 있다에서 너희에 해당된다, 또는 다른말로 하면은 우리에 해당된다 이렇게 봐야되요.
여러분 주기도문 아시죠?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우리 아버지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우리는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우리 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되어있지요.
그 사람의 존재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기능을 하기위해서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너희라고 지칭하는 너희의 기능을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너희의 기능을 할려면 너희가 너희를 생각하면 안되고 나를 생각해야되요. 나라고 붙인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본문에서 나는? 나라고 할때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전제, 우선이고 예수님이 있기에 그 다음에 우리가 있는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에다가 포도나무에다가 괄호를 쳐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기에 괄호를 치는 거예요.
나는 포도나무요. 그 다음에 나는 생명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길이요, 나는 떡이요. 많지요? 나는 하나님이요, 나는 그리스도요 많지요. 많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할 것은 뭐냐하면은 이 괄호안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는 그 앞에서는 우리는 가지요. 가지라 하면 되요 가지로. 가지는 나는 가지라고 이야기 해서 가지가 있는게 아니고, 예수님만이 포도나무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한 단일체 포도나무라고 인정하는 사람만 결과적으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두 번째 봅시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지요. 나는 뭐다? 나는 죽음이요 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는 의인이요 하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죄인이요 하면 되는 거예요. 죄인을 통해서 주님이 의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합쳐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를 붙이니까. 나는 나를 붙일수가 없는데 만약에 붙인다면 나는 죄인이요라고 붙여야된다 이말입니다. 이해가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보기에 너희라는 무리에 있어야지, 독단적으로 나는 나다가 되어버리면 어디로 갑니까? 이렇게 가버려요 이렇게. 지금 이렇게 가있는 인간을 주님만 ‘나’ 라는 그 세계 그 천국으로 이끌어냈으면 이제는 나는 기껏 이것밖에 안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말을 이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이것 못버려요 이건 죽을 때 까지 못버려요. 나이 70, 80될때까지 못버려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이것은 육이니까 육이 있는 한 못버리는데, 못버리면 안버리면 되잖아요.
안버리는 상태에서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음을 알고 이 나는 주께서 너희의 속한 나, 다시 말해서 죄인들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시는 그 죄인의 그룹속에 있는 나, 그리고 유일하신 의인 나, 예수님 나, 이런 관계가 바로 나와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님의 새로운 너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까지 강의의 핵심은 뭐냐하면 너희는 우리가 만드는게 아니고 ‘나’가 너희를 만들어 낸다 지금 그 이야기 한것입니다. ‘나’ 가 너희를 만들어 낸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버리라고 했어요?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절대로 버리지 마세요. 버리지 마시라는 말이 잘못됬다. 이것은 못버립니다. 유치원에 달리기 하다가 남의 자식 이기면 좋습니까? ‘잘한다~~남의자식~’ 이럽니까? 누구자식? ‘아이고~~내새끼 최고다~’ 하잖아요. 갑자기 내가 응원하는 자체가 나를 키우는 거예요.
그런데 기어이 그 아이가 내 아들이 일등을 제치고 일등하면 나의 무슨 속성에 합당합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기어이 관철한다. 관철한다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양보없다. 부모자식간에 양보 없어요.
말레이시아 가도 부모 자식간에 다툼 이것은 계속됩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연예할때에 남녀가 서로 좋다고 연예하잖아요. 같이 한번 살아보세요. 경쟁 없습니까? 본격적으로 이제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경쟁 시작합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시집왔다.’ ‘아니야 너는 나를 위해서 장가왔다.’ 너 집안 어떻고 내 집안 어떻고 난리나는 거예요. 너 올 때 혼수 얼마해왔느냐? 아직도 혼수 타령이냐 너는 나하고 뭐 해줬는데? 뭐 이렇게 계속 죽을 때 까지, 계속 누가 위에 서는지를 하는데 그게 모든 부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부부 다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혼한다는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이혼하기전에도 뭐 이혼된 상태인데 뭘 또. 같이 살아도 이혼인데 뭐 같이 살아도 서로 이용할려고 아까 이야기 했죠 서로 양보없이 이용할려고 하는데 뭐 헤어진다고 아쉬울 것도 없고 다만 헤어지면 이용하는데 지장있겠다.
그래서 이혼하고 난 뒤에 제일 기분나쁜 것이 뭐냐하면은, 내가 보낸 여자를 다른 남자가 낚아챌 때 기분 나빠요. 이혼하더라도 여자가 혼자 살면 기분 덜 나쁜데, 이혼해 놓고 남편행색할려 하니까 갑자기 다른 남자가 채 가버리면 그것은 끊어졌잖아요. 이용가치가 완전히 끝났으니까 미쳐버립니다. 불질러 버리고 뭐 행패부리고 자식가지고 장난치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것 때문에 천년의 신학이, 신학이 천년동안 발달했습니다. 이 본문가지고. 신학의 발전이 이런거예요. 희한하죠? 내가 말해야 희한하지. 이제 말할께요.
자 천년동안 그걸 중세찰학이라고 하는데요. 476년부터 1453년까지 서유럽이 망하고 난뒤에 동유럽이 망할 때 까지 천년 걸렸습니다. 대략 천년걸렸는데, 그 대략 천년동안 발달한 그 신학이 있어요. 물론 그걸 중세철학 중세신학, 또는 중세철학이라고 하는데 중세철학이 어떤식으로 논쟁을 했는지를 제가 잠시 소개를 해드릴께요. 중세신학이.
가지를 어떤 식으로 규정해서 주님한테 인정받는가? 그 논쟁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했잖아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포도나무는 눈에 안보이지요? 그런데 가지는 눈에 보이겠죠. 포도나무는 주님이니까 주님은 지금 영광중에 계시니까 안보이잖아요. 우리같이 이렇게 육으로 된 사람은 예수님이 안보인다 이 말이죠.
물론 저 사도요한이나 밧모섬에서 봤지만 우리한테는 안나타나거든요. 나타날수도 있지만 흔하게 나타나지는 않잖아요. 따라서 지금 나타난게 뭡니까? 바로 예수 믿는다는 그 집단, 예수믿는다는 사람들은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있느냐를 이렇게 알려줄 때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우리 가운데 있다 라고 선전을 해대고 PR을 해대면 ‘야~저 교회 예수 믿는 모양이다. 그러면 우리는 천당간다. 그 교회 등록하자.’ 이렇게 나올수 있는 아이디어가 생기겠죠.
그래서 교회들 마다 진짜 우리가 주님이 말하는 그 가지 집단입니다 라고 선전을 해대면서 그걸 받쳐주는 신학들을 발전시킨거예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죠? 똑같아요. 우리교회와야 구원받습니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분명히 성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기존의 교회는 사람들 구원욕구에 작용해서 구원 천당 보내줄테니까 우리교회나오세요 라는식으로 구원론 가지고 구원론을 하나의 표상으로 상품으로 걸은거예요.
면죄부가 따로 있는게 아니고 오늘날 십일조가 면죄부가 되었어요. 십일조 낸 사람은 확실하게 하늘나라 상급 많습니다. 이게 면죄부라는 것이 중세 욕할게 아니고 오늘날도 돈주고 천국하고 영생하고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공공연히 이야기 해요. 아무리 믿음 좋아도 십일조 안하면 나는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습니다. 노골적으로 강단에서 이야기 하거든요. 십일조 안하면 집사에서 장로도 안되고 서리집사 장로 안시켜줍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말입니다. 왜 얌체같이 돈도 안내고 왜 천당갈려고 합니까?
그런데 목사들은 그렇게 하죠. 돈내고 천국가는게 아니고 돈 내고 천당간다는 뜻은 아니고 천국을 갔으면 지가 받은게 있으면 내놔야지 하는 식이란말이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말이나 이말이나 같은 말이예요.
내 놓으면 아 천국갔구나가 확정이 되고, 안 내 놓으면 말로만 천국갔다 하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서 2장에서 무슨믿음이라고 했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든요. 그럼 행함으로 뭘 보여줄거예요? 예?
돈내놓고 시간 바치고 그것 두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야기가 거꾸로 해도 같은 이야기예요. 돈 내 놓으면 천국 보내주신다 하는 그 말과 천국갔으니까 돈 내 놓으세요 라는 말과 다 같은 말이예요. 같은 말.
눈 오니까 겨울이다. 겨울이니까 눈이 온다 같은 말이잖아요. 결국 그 당시 중세 때 눈에 보이는게 교회이니까 이 교회를 남에게 납득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서 나온 그 연결된 가지집단이라는 것을 그것을 남한테 설득력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학을 발전시킨거예요.
신학은 그렇게 발전된것입니다. 교회 돈 모으기 위해서. 교회 돈 모으기 위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재간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바꾼게 뭐냐하면 성만찬이예요.
물 뿌려주고 ‘이것은 주님의 떡이다. 이것은 주님의 살이다. 피다. 마셔라.’ 마셨을 때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은 아까 했죠. 내가 여기 있음, 나는 죽어서 천국가야됨. 그 천국 간다는 것은 힘을 키워야되잖아요. 힘을 키우기 위해서.
그 다음에 세 번째 뭡니까? 기어이 행동으로 관철한다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뭐냐하면은 교회에서는 살과 피를 마련해놓으면 나는 나 천국가기위해서 기어이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는 영원히 영원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 당시에 황제나 그 당시에 왕들을 누를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너 만약에 교황 말 안들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못 먹게 만들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못먹게 만들면 요새 같은면 자기 집에서 카스테라하고 포도주스만 먹으면 될것같지요? 되지요?
옛날에는 법을 어떻게 만들었냐하면 교인들에게 성만찬을 주관하시는 분이 교회의 교황에 의해서 등록된 교황에 의해서 인정받은 신부가 아니면 그 살과 피는 무효가 된다 이렇게 한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재벌이고 아무리 권세잡은자라 할지라도 일단 교회와서는 누구 말 들어야됩니까? 아버지는 신부라 하지요. 신부말을 들어야되요. 무엇을 쥐고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쥐고 오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또 생각하기로 ‘그 살과 피 그 카스테라 빵하고 비스켓하고 뭐 안그러면 그 포도주잖아.’ 하는데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할까봐 교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리가 최초에 생긴게 아니고 중세 때 생겼어요. 중세 때.
늦게 생겼다고요. 성만찬 교리가. 뭐라고하냐하면 그냥 이 포도주와 그냥 이 빵이 신부가 축복을 할 경우만 이 빵이 예수님의 살이 되고 이 잔이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된다고 그렇게 가르친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 바보들 아닙니까? 그 말을 믿는 그 바보들 아닙니까? 하지만 그 바보가 오늘날 한국 이천만 성도가 바보인데. 거기 대학교 똑똑한 사람들 다 있는데. 누구도 거기서 따질 생각을 안해요.
그래서 소위 정통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것은 피가 된다는 것은 맞지만 피는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요. 목사님 잘 배웠죠? 많이 배웠죠? 지금 문제가 그런 문제가 아니고 성경에서 오늘 본문에서 그런 문제가 아니예요.
뭐냐하면은 사람들이 피와 살을 먹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 너만 나인가? 나도 영혼이 나이고 싶다 이런 욕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주님이 좋은 것을 주게 되면 나를 부인할 필요가 없어요.
그 살과 피만 먹으면 나는 계속해서 나로서 천국가서도 나라고 행세를 해댈텐데 그 기회를 잡는거예요. 끝까지 나이고 싶어서, 끝까지 아담의 악마의 속성을 버릴수가 없어가지고 그 짓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제자들로 하여금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거예요. 제자들에게는 나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우리예요 우리. 나에서 우리로 변한단말이죠. 그냥은 못 변해요.
나에서 우리로 변하는 방법 제가 알려드릴께요. 나가 여러명 모인다고 우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그 나가 전부다 죽어야 됩니다. 십자가에서 나가 죽으면 여기 나는 없어져요. 십자가에서 나 죽으면 없어져요.
베드로 나 없어지고 바울 나 없어집니다. 없어지고 여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만든 피조물에게 바울에게는 바울이라는 그 썩어갈 몸에다가 예수님의 성령을 줘버리면 이것은 바울 역할을 해요. 바울 역할은 이방인 사도가 되야되고, 베드로는 유대인 사도로서 역할을 해야되요.
그래서 성령이 임해야 그들이 제자가 아니고 이제는 사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 나가 아니고 뭐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지체가 되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라는 거예요. 한 성령 1일죠 숫자 1.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너, 나 모이면 복수 개념으로 우리라고 하잖아요. 그것이 아니고.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여기에다가 시험을 해보자 이말이죠.
한목사님하고 저하고 우리가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같은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니고. 한목사님이 뭔가 최종적으로 내놓는 것, 증거하는게 있어야되요. 그러면 나도 증거하는 것이 있어야되요.
한목사님이 뭘 증거하느냐 하면은 나는 예수믿는다를 증거한다면 우리가 아니예요. 뭐냐하면 예수님을 증거해야되요. 예수님이라는 나가 나와야된다고요. 그럼 나에게도 예수님이 나가 되고 예수님께 소속이 되어버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됨이 확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됨이 확인이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상당히 복잡하지만 그렇게 난해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것이 실제로 성령이 와서 체험을 한 사람한테는 이것보다 더 쉬운 이야기가 없어요. 나는 나 속성대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이것이 어떤 속성이다? 죄인이라는 이름의 속성이다.
그래서 한목사님이 예수님 증거하면서 목사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면 나도 죄인이예요. 나로 모인 것은 죄인으로 모이고,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용서받은 그리스도가 용서하셨다는 그 기능만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면 우리가 되는 겁니다.
누가 내 자식이며 누가 내 가족이 되겠는가? 바로 주님의 뜻에 완성된 자가 바로 내 가족이고 새로운 가족이죠. 천국가는 새로운 그룹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그룹에서 뭐만 증거하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겠죠. 그것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피로 세운 교회 하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고, 교회 앞에 뭐가 붙어요.
기능이 그 본질과 기능을 먼저 앞장세우죠. 하나님의 피만 증거하는 교회, 그러면 인간의 행함은 1번 2번 3번 자체가 통합해서 피가 있다면 즉 용서하는 피라면 아까 동영상 찍을 때, 피가 용서한다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를 갖고 있는 용서받을 죄인으로서 이 육이 있는 한 계속 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방금 이것은 일단 여러분 어렵지 않기 위해서 먼저 해답을 먼저 제시한것이고요. 그러면 이게 아니고 천년동안 이 교회가 교회로 장사를 영업하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이론을 내세웠는지 목사님 해답 알았는데 꼭 알필요 있습니까? 뭐 이렇게 하는데 이것을 아셔야되요.
아셔야 아직도 우리는 육적인 내가 있잖아요. 나에서 끄집어낸 아이디어가 어떤 교회 아이디어냐를 우리가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확인할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단들이라고 하지만 다 필요해요.
그리고 신학이라는 것도 나쁘기는 하지만 필요한겁니다. 왜냐면 나라는 인간이 나를 신봉하면서 나온 아이디어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 펼쳐놓았거든요. 모든 신학이 그래요. 모든 신학은 교회 잘되고 나 잘되기 위해서 만든겁니다.
나 천당가기위해 나 구원받기 위해 만들어놨기 때문에 전부다 죄악된 거예요. 마귀적이예요. 구원은 신학을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공로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그러면 신학자여 내가 할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무슨 할말이 있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구원받았으면 은혜에 보답해야지요. 이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제 줄이고 본격적으로 시작해봅시다.
신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가? 우리를 만듭니다. 철수, 영희, 그 다음에 뭐 민수. 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세 사람을 가지고 이것을 대표, 보통명사로 뭐라고하냐 하면은 보통명사로서 인간이라고 해요. 보통명사로서 인간. 맞지요? 인간 인간 인간, 인간이지요. 인간one, 인간two, 인간three 잖아요.
세 가지의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신학에서. 인간이 철수안에 들어있다. 인간이라는 것이 철수 안에 들어있다. 이걸 가지고 개별실제론 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듣기 싫은 용어들 나오죠. 인간은 실제로 있는데 어디있느냐? 개별실제론, 개별자 속에 하나 속에 인간이 다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해되시겠습니까? 자 이해되지요?! 집사님 어려운 이야기 입니까? 아니죠. 개별 이건 모른다 치고. 모든 인간속에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 있죠? 자 그러면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잖아요. 인간 누구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있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들이 모여버리면 그것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형상들의 집합체 이기 때문에 뭐가 되느냐?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제 신학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강의 다시 해볼까요? 자,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다? 못 만들어낸다? 못 만들어내지요. 성경은 누가 만들어낸다? 하나! 오직 예수님 나가 확장하기 위해서 확장. 예수님의 ‘나’ 가 몸으로 확장되는 거예요. 나는 포도나무요 그 다음에 나는 없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끝까지 나예요.
그 다음에는 모든 성도는 나가 아니고 너희가 되요. 이 말은 나가 없는 너희는 없으니까 항상 성도는 누구만 쳐다본다? 나만 쳐다보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의 뜻이예요.
그런데 그런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자기들 내가 너희에 속한다고 우길려면 이런 이야기까지 인간속에 들어있다고 이야기 해요. 들어있다. 인간속에 들어있다. 뭐 성령이 들어있다. 들어있다 해버리면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까지 모인 이것을 교회라고 하자 그래서 이름을 실제로 계시는데 실제로 예수님 계시는데 개별자 속에 다 들어있다 이것을 개별실제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두 번째가 뭐냐하면 두 번째가 이름도 참 어려워요. 유명론, 명목론 이라고 하는데 이 유명이라고 하는 것은 famous 유명하다는 그 뜻이 아니고 이름 뿐이라는 이름 뿐이다 라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무슨이야기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개체 뒤에 나온다. 인간이라는 것은 개체 뒤에 나온다 이렇게 되는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철수, 영희, 민수 있고 난 뒤에 이것들을 뭐라고 부를까 생각해보니까 인간이라고 부른게 통합해서 낫겠다 해서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는 이런한 개체, 개별자 뒤에 정해진다 이게 바로 명목 또는 이름뿐이다 유명론 또는 명목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왜 이런 주장을 했느냐 하면은 일단은 누가 누군지를 일단은 성도인지 모르니까 일단 그물 가지고 확 훑어 봉투에 돌 넣듯이 다 불러모으는 거예요. 불러놓고 뭐 나쁜고기 좋은고기는 알아서 주께서 하실거니까 일단 하나님 형상 입었다는 인간들 전부 다 모아놓는거예요.
모아놓고 그 하나님의 성도라 하는 것은 일단 나중에, 나중에 붙여주자. 오래 머물면 성도고 오래 안 머물면 성도라 하지말고 그때가서 정하면 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명목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스켈리누스라는 사람이 주장한것이고요.
세 번째가 마지막이 뭐냐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머릿속에 있다. 창조속에 창세전에 머릿속에 있다. 머릿속에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전인류에게 적용을 시켰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하면 유명론하고 반대예요. 인간이라는 보통명사는 개별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개별전에 있다. 이것을 가지고 개념론이라고 하는데 아벨라드라는 신학자가 주장했어요. 개념론이라고 하는 거예요. 개념론.
개념론을 이해하게 되면 교회 아무나 받아주지 않고 예수믿는다고 선언한 사람, 예정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만 따로 교회 모으자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가지 다 무지무지하게 일리가 있지요.
일리가 있는데 결국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 했잖아요. 다 일리가 있는데 처음에는 개별실제론이고 속에 있다 이것은 후에 있다 명목론 세 번째는 하나님 머릿속에 모든 인간은 다 들어있다. 이것이 개념론인데 결국은 이들이 이렇게 논리를 하는 이유는 어쨋거나 저쨋거나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는 진짜 교회라는 것에 관심이 있지요.
왜냐하면요 로마가 멸망하고 난 뒤에 게르만 민족이 로마의 기독교를 접수했거든요. 원래 그 기독교는 게르만 민족의 종교가 아니고 그 로마 그리스 남쪽 계통이예요. 그런데 북쪽에 있는 프랑크족이 게르만 족에 와서 자기 기독교라고 만들었거든요. 기독교로.
만들다 보니까 각 종족 민족보다 전부 다 기독교를 전부 다 빼가지고 자기 민족에 맞는 걸 다 한다 이말이죠. 그러면 신학자 입장에서는 이 흩어져 있는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시켜보자는 겁니다. 왜? 어쨌든 눈에 보이니까.
남쪽에 있는 기독교 아니고 우리가 기독교라 하면 기독교가 둘로 분리되면 기독교가 힘이 약화되잖아요. 그래서 교황이라는 교황이 신학자들에게 신학자들을 불러다가 시키기도 하지만 신학자들이 알아서 전체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할수 있는 아이디어를 계속 내는 겁니다.
계속낸다는 말은 뭐냐? 결국 교회라는 것은 이 셋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여기고 계속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셋다 다 거부해야되요. 교회는 역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역사속에 출몰하죠.
어두운 뒷 창고에 귀신이 거기에 출몰합니까? 아니면 그 귀신이 거기서 살고 있습니까? 살고 있으면 밥이나 주고 그럴텐데 낮에가면 없고 밤에 가면 나타난다 보통 괴기 영화에. 꼭 낮에는 없는데 밤에 나타난다 이말이죠. 이것이 출몰이죠.
출몰이라는 말은 우리가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고 저쪽에서 알아서 내가 나올게 하고 그냥 나오는거예요. 바람같아요 바람. 바람같애. 성령같애. 교회라하는 것은 머리가 주님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 교회를 쥐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인간이 교회를 쥡니까? 못쥡니까?
못쥐는 거예요. 못쥐게 되면 교회가 권력을 인간이 못쥐고 되잖아요. 그래서 한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 해가지고 이런식으로 이런 신학을 동원해가지고 우리 교회만큼은 아니 우리 교회만큼은 아니 우리 교회만큼은 진짜 교회라고 해줘야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나 진짜 교회 다닐래. 나 이런 신학있는 곳, 아니 이런 신학 이 신학이 더 맘에 들어.’ 각자의 취향대로 개성 따라서 교회가 나누어 지는 겁니다.
천주교, 개신교, 그 동방교회 여러분 보기에는 세 개로 나눠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세 개가 아닙니다. 수천개예요 수천개. 동방교회도 수백개, 대한예수교장로회도 230개 장로회가 있잖아요. 그 왜 갈라지는가? 전부 다 교회가 달라서 이렇게 나오거든요. 교회가 뭐 다른가? 뭐 아무것도 아니예요. 왜 신자 선별을 했느냐? 그것때문에 갈라진다고요.
그러면 그 교단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해야됩니까? 아니면 교단에게 아부하는 신학을 해야되겠습니까? 그 교단에 아부하는 신학을 해줘야 그 신학교에 교수짓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1번 2번 3번에서 못 벗어납니다.
주를 위해서 신학교수하는게 아니예요. 내가 밥 빌어 먹고 살기 위해서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신학교수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학자 교수치고 신자있으면 이건 드문 경우입니다. 드문케이스예요. 왜냐하면 신자 같으면 신학교수를 못해요. 그 신학교에 충성안할거니까. 주님께만 충성할테니까.
주님께 충성한다는 말은 주님이 하나고 나는 주님께 속한 너희가 되어버리면 신학교는 그것을 요구하는게 아니예요. 신학교 이사장이 하나고 너는 나한테 월급받는 너희가 되는 거예요. 둘중에 어느 것 할래? 이말입니다.
군에 있어봐서 알겠지만 군종들 있잖아요. 군종들은 월급 어디서 나옵니까? 국방부에서 나라에서 국방부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면 군종이 설교할때나 이렇게 뭔가 참가할때에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해요?
이 군인이 북한군이 왔을 때 어떻게 믿음으로 싸움을 목숨을 버려가면서 나라 지킬수 있는 그러한 국가관이 투철한 그 인간 만들기 위해서 나라에서 월급줘서 누구 붙여줍니까? 군종을 붙여주잖아요. 제가 너무 심한 말 아니지요? 그말 맞지요?
예수그리스도 충성하라고 붙여준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라 지키라고 한거예요. 나라 지키라고 하잖아요. 그래야 군종이 기독교만 있는게 아니고 천주교 불교도 있잖아요. 불교 중이 군종으로 있을 때 뭐합니까? 부처 위하라고 하는게 아니예요. 부처님을 의지하는 힘으로 다시말해서 부처한테 힘 받아가지고 나라 지킬 때 용감하게 싸워라 그런 제 말이 틀린가요? 안틀린거 같은데.
예수 믿는 군종 없습니다. 예수 믿는 군종 없어요. 왜냐하면 다니엘서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에 보면 만약 그 군종이 다니엘을 믿는다면 다니엘은 뭐와 뭐의 싸움이냐하면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태산같은 인자의 나라와 그리고 기존에 있는 모든 나라와의 싸움입니다.
기존의 모든나라는 짐승이 되는 거예요. 그 틈바구니에서 다니엘과 세친구는 순교하지요. 순교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열매가 뭐냐하는 건데. 나라위한 신앙인은 없어요. 나라위한 신앙인은 없습니다.
뭐 맥아더가 기도로서 어떻게 했다 뭐 하는데, 그것 따지면 우리 회사 직원은 기도해가지고 우리회사 이뤘다 이렇게 되요. 우리회사 학교는 우리 교목이 기도해서 잘됬다 서울대학 많이 간다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무슨 예수님이 서울대학 보내는 예수가 어디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십자가 안졌거든. 서울대 보낼려고 십자가 안졌다 이말이죠. 나라 잘되라고 십자가 진적 없거든요. 만약 두 개의 기독교 나라가 축구한다 그러면 누구 편 들거예요? 그럼 신자 비율 많은 쪽에 주께서 골 이기게 만듭니까? 월드컵 나가게 만들어요? 아니죠.
네덜란드 월드컵 그렇게 우승했던 네덜란드가 못들어가고 까딱까딱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자가 적어서 예선도 통과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있는 겁니까? 그런 것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시간에 한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 그 가지는 인간이 조성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주님 살아계시니까 알아서 자기 가지를 내 놓는데 그 가지의 공통점이 뭐냐? 우리는 죄인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