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순교다 171010
가락-요한복음 15장 5절(열매는 순교다)171010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 대목 합니다. 예 상당히 어려워요. 무지 왜 어렵냐하면은 나는 이라고 할 때는 한 사람을 나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너희라 하는 것은 다수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맞죠? 제말 틀리지 않죠? 너희는 다수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문제가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너희라고 여겼던 사람인데 그 ‘나’ 라는 예수님이 다를 경우에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겁니다. 각자 우리는 예수님만 믿는 그 가지다 라고 우기게 되는데, 그렇게 모인 그 너희가 너희 그룹과 다른 너희 그룹 사이에 제시하는 나는 포도나무가 왜 그리 다른 포도나무가 왜 그리 다르지요?
그러면 A라는 그룹과 B라는 그룹에서 제시하는 A라는 너희와 B라는 너희가 제시하는 그 포도나무가 다르다면 둘 중에 하나 맞을수도 있고 둘 다 틀릴수도 있고, 그러나 이 경우는 없어요. 둘다 맞을 경우는 없습니다. 둘다 맞을 경우는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할 때, 그 너희는 인간쪽에서 예수님을 지정할 수는 없는겁니다. 왜? 우리는 진짜 예수님 믿는다고 해봤자 저쪽에서 우리하고 생각이 다른 저쪽에서 나도 진짜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되버리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할 때, 그 너희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들면 되겠죠. 나는 I 죠. 너희는 YOU 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가지라고 우기는 그 집단이 많아지게 되면 집단이 A그룹도 있고 B그룹도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진짜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둘이 협의해야되는 겁니까? 의논해야 되는 겁니까? 그럴수 없는 거죠.
사람이 사람이 협의해가지고 하나되는 법이 없어요. 인간은 결국은 자기 독자적인 자기 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끝까지 내세우게 되어있어요. 가족도 마찬가지고. 내 생각을 관철하고 싶어해요 인간은.
인간의 특징은요, 나의 특징은 3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는 내가 있음이 제일 확실하다. 예수님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 하지만 가장 확신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것이 제일 확실해요.
그리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은 결국 뭘 믿느냐하면은 내가 여기 있어서 나 예수님 믿습니다 라는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더 큰 확실한 믿음은 없어요. 교인들이 믿습니다해도 그 말 나는 나를 믿습니다 라는 말로 들으시면 편해요. 나는 나만 믿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해도 속으로 ‘예수 너 언제봤다고...뭐 예수봤어? 안봤잖아. 안봤으면서 믿는다고해..?’ 우리가 아침되면 거울에 눈에 보이는게 뭡니까? 예수님이 보입니까? 내가 보입니까? 내가 보이잖아요.
그러면 아침마다 머리하면서 머리 다듬으면서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나 밖에 없는거예요. 나 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어요.
두 번째 특징이 뭐냐하면은 ‘나를 키운다’ 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꾸 설쳐. 그 설치는 설친다라는 말을 고상한 말로 행동한다 이 말입니다. 자꾸 설치거든요. 설치는 목적이 뭐냐하면은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힘을 더 키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더 키우기 위해서.
자, 1번 2번 한번 연결시켜 봅시다. 나는 있다. 나는 누구의 신자냐하면은 나의 신자예요. 내가 나한테 교주고 유일한 마지막까지 나를 믿는 신도는 나예요. 나를 유일하게 믿는 신도는 나밖에 없어요.
예수믿다가 환란오게 되면은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어쨌든 깔끔하게 나에게 돌아서니까. 그런데 그것이 기반이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그 나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키웁니다. 키울 때 뭐가 필요하냐 하면은 힘이 필요해요.
그래서 인간은 계속 주변에 힘있는 것을 다 모읍니다. 힘 있는 사람, 힘 있는 돈, 하여튼 남한테 힘을 발휘할수 있는 요소는 다 끌어 모아요. 내가 아는 사람중에 누가 아는사람. 교회도 작은 교회가면 힘이 안되. 장로가 되도 작은 교회 장로는 되면 힘이 없어요. 이왕이면 큰 교회 장로되야 되고 목사면 큰 목회해야되고.
그 옛날 사람들이 여자가 시집가면 뭘 당부하느냐 하면은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당부하지요.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그렇죠? 왜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합니까? 자식을 많이 낳는데 그 자식이 그냥 자식이 아니고 어떻게 아들이 좋겠어요? 딸이 좋겠어요? 예, 아들이 좋아요. 왜?
아들이 힘이 되니까. 딸은 남의 식구 되잖아요. 힘이 빼앗기는 요소이고, 아들은 여자를 데려오니까 힘을 더 모으게 되거든요.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나는 여기있다. 나는 이미 벌써 신자예요.
예수믿는 것은 하나의 겉절이고 그냥 구색에 불과하고 내가 말한 스티커, 바람불면 휙 뜯어 지는 것. 언제 떨어질지 몰라요. 예수 믿는 것 언제 후딱 바람불면 다 떨어져 버려요. 북한에 가서 예수믿느냐? 아니요. 다 떨어져 나가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그냥 있지 않고 뭐가 움직인다 했지요. 움직이는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지금보다 키우는 거예요. 남를 키우는거요? 아니요. 누가 키워? 나를 키우는 거예요. 내가 기업을 한다면 이 기업을 키우는 것이 곧 내가 하는 모든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이 키우는 일을 기어이 관철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그 목적을 나 키우는 목적에 대해서 관철한다는 말 쉽게 이야기하면 양보 없다. 나 키우는데 조금도 남한테 양보할 생각 없어요. 부모 자식간에 마찬가지입니다.
부모한테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나 잘남을 나 힘있고 대단함을 자랑질하기 위해서 자식을 계속 자식한테 베풀어 주기도 하고, 돈도 대주고, 어려운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하라 하고, 이게 뭐냐하면 부모자신의 명예와 위신을 체면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우리가 또 자식한테 또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관철하는 거예요. 관철. 뚫어내는 거예요. 기어이해내는 것. 만약 관철이 안된다? 관철이 안되면, 이 3번이 안되면 1번을 없애버립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하면은 번개탄 피워놓고 하는 것 뭡니까? 자살해요.
이 자살의 이유가 먹을게 없어서 자살하는게 아니고, 관철하거나 나를 키울 희망이 없어버리면 자살해요. 나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내가 여기 있으면 되잖아 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들은 1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1번이 2번으로 가고, 2번이 3번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3번 단계에서는 누가 피해보냐 하면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에게 피해자가 되고, 나에게 이용물이 되요. 나에게 이용물이 된다고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그래서 이 세가지를 종합하게 되면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줘요. 내가 존재해서 나쁜일 해서 죄가 아니고, 내가 존재할 때는 2번 3번이 같이 발동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 아닌 인간은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는 아까 조금전에 했던 동영상, 두 번째 동영상 남과 여 할 때 그 십분짜리 한번 들어보시면 그 이유가 조금 나올겁니다.
따라서 이것을 그대로 대입해 봅시다. 이것을 그대로 여기 집어넣어요. 너희라는 그룹에다가. 그룹이라 하지말고 쉬운말로 교회, 또는 신앙공동체에 집어넣읍시다. 신앙 공동체. 요새 좋은 말 많이 나오거든요. 성령공동체. 하여튼 뭐 멋있어 보일라고 성경대로 하는데, 여기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내가 들어가죠. 내가 들어가게 되면 나는 1번 2번 3번 양보 없습니다. 절대로 이건 죽을 때 까지 안 놓거든요.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하여.
두 번째 나는 이대로 머무는 것은 자존심 상해서 키우고, 세 번째 그냥 키운다 상상만 하는거 아니고 실행에 옮깁니다. 관철하기 위해서. 그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뜻을 관철하다 보면 남이 울던 아파하던 그것은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니예요. 첫 번째 관심사는 내가 키우는 것이 관심사고 남이 울던말던 그것은 내 관심사 아니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내드릴테니까 여러분이 해답을 해결책을 내보세요. 어떤 가정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낮잠을 자야되요. 밤에. 근데 낮잠을 잘려고 하면 비행기가 비행장옆이라 비행기가 뜹니다. 자, 그 주변에 있는 갓난아이 낮잠자기 위해서 비행기 훈련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아이 낮잠자라고 훈련하지 말까요? 비행기 그럼 썩힐까요? 아니지요?
그러면 그 주위에 있는 비행장이 실제로 있는 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예요. 우리동네 비행장 있으니까. 그러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라에 뭘 요구하냐하면 보상을 요구한다고요. 이 보상이란말은 어떤 경우인가 하면은 피해를 봤을때나 이게 피해보상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피해봤습니까? 자기 아이가 낮잠을 못 잤으니 피해보상을 보겠죠. 그러면 피해보상을 본다면 보상이 뭐가 됩니까? 보상이 어디 뭐 빵을 줍니까? 뭘로 줍니까? 물로 줘요? 뭘로 줘요? 돈으로 주지요.
돈은 1번 2번 3번 어디에 해당됩니까? 딱 2번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족하지는 않지만 엄마로서 만족하지는 않지만, 아이 하나 낳고 내 힘 키울려고 하다가 아이가 잠이 안든다, 나라에서 보상받았다 그러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약간은 달성되었죠. 약간 달성되었죠.
그런데 보상해준다 해놓고 보상 안해준다. 그러면 이 존재자체를 부정, 자살로 한발자국 나갈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보상액 못받아가지고 숭례문 있잖아요. 불지른 70대 할아버지 있죠? 자기 땅 보상 안나왔다고 남대문을 불질렀잖아요. 지금도 살고 있어요. 20년 무기징역 받아가지고 살고 있어요.
왜 행동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은 나쁘다 그 사람은 그러면 안되지. 어떻게 나라를 그렇게 했느냐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고, 알맹이 들여다 보면 그 할아버지는 자기가 신자예요. 무슨 종교의 신자입니까?
나를 신봉하는 신자예요. 신자이기 때문에 남한테 피해준다는 것은 이것은 자기의 일차적 문제입니까? 관심사 아니예요. 아니죠. 밀어내버리죠. 그런데 그 할아버지보고 다 욕했잖아요. 그런데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어때요? 만만치 않죠?
자 여기 교회 예배당 있습니다. 예배당 있는데 예배당의 주차장을 넓힙니다. 넓히는데 여기에 어떤 비리비리한 집이 하나있다. 이것 좀 밀어버려야 주차장 되는데, 근데 이 할머니는 자기 고향이라서 언제 죽은 자식 돌아온다고 안떠난다. 그러면 어떻게 돈 줘서 내보내야죠.
그것을 장로 10명이나 되는데 하필 나보고 시킨다. 그 추진사업을. 그러면 나는 이 할머니집을 헐어서 내보내야되요? 안 내보내야되요? 당신을 고향을 존중합니다. 이래가지고 그냥 놔둘까요? 내버려야되겠죠?
그것을 누가 시키는가? 교회 당회장이 시킵니다. 교회 당회장이. 당회장이 시키는데 왜 그말에는 나는 안합니다 라는 말을 왜 못할까요? 그 교회가 자기가 포함된 순간 그 교회가 누구 교회됩니까? 바로 내 교회되는 겁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 2번을 충족시켜줘요. 나를 키운다. 그러면 그 장로가 그 주차장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게 되면 그 장로는 그 교회에서 뭘 발휘하느냐 하면은 말빨이 서요. ‘니들은 놀았잖아. 이 주차장 이거 누가 했는데? 이거 내가 했어.’
자기가 말빨이 세워지면 그 장로의 아들이 그 교회 집사라면 대를 이어서 장차 10년후에 그 아들이 이후에 이 주차장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다 해놨어! 그 교회에서 또 발언권 쎄게 나오고 발언권이 쎄게 나온다는 말은 다음 목사 뽑을 때 그 장로 입김이 쎌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누구 교회입니까? 대대로 장로교회.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장로교회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변화가 이 세가지 공식으로 다 풀리게 되어있어요. 잘 풀렸지요.
이것 세가지로 다 풀리게 되있고, 덧붙여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느 인간도 이 세가지 공식에서 벗어날 위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너희는 가지니 에서 그 너희에서 우리 자신을 빼주세요. 우리 자신을.
나는 포도나무요 그것으로 족한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예수님 스스로 족한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원칙을 자기 본인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만 영광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아들에게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어디 나오죠?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 영광받기 위해서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라는 이야기는 누구에게 붙일수 있다고? ‘나’라는 이야기는 오직 예수님만 붙일수 있고 성도한테는 ‘나’라는 것을 붙이면 안되고, 뭐라고 붙이냐하면 너희라고 붙여야되요. 너희라고.
나는 내가 있음에 나라고 하게되지만, 너희라고 할때는 그냥 우리 단독적으로 너희라는 말을 붙이면 안되고 누구를 의식하고 나는 그분이 있다에서 너희에 해당된다, 또는 다른말로 하면은 우리에 해당된다 이렇게 봐야되요.
여러분 주기도문 아시죠?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우리 아버지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우리는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우리 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되어있지요.
그 사람의 존재이유는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기능을 하기위해서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너희라고 지칭하는 너희의 기능을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너희의 기능을 할려면 너희가 너희를 생각하면 안되고 나를 생각해야되요. 나라고 붙인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본문에서 나는? 나라고 할때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전제, 우선이고 예수님이 있기에 그 다음에 우리가 있는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에다가 포도나무에다가 괄호를 쳐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기에 괄호를 치는 거예요.
나는 포도나무요. 그 다음에 나는 생명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길이요, 나는 떡이요. 많지요? 나는 하나님이요, 나는 그리스도요 많지요. 많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할 것은 뭐냐하면은 이 괄호안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는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할 때는 그 앞에서는 우리는 가지요. 가지라 하면 되요 가지로. 가지는 나는 가지라고 이야기 해서 가지가 있는게 아니고, 예수님만이 포도나무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한 단일체 포도나무라고 인정하는 사람만 결과적으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두 번째 봅시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지요. 나는 뭐다? 나는 죽음이요 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는 의인이요 하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죄인이요 하면 되는 거예요. 죄인을 통해서 주님이 의인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합쳐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를 붙이니까. 나는 나를 붙일수가 없는데 만약에 붙인다면 나는 죄인이요라고 붙여야된다 이말입니다. 이해가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보기에 너희라는 무리에 있어야지, 독단적으로 나는 나다가 되어버리면 어디로 갑니까? 이렇게 가버려요 이렇게. 지금 이렇게 가있는 인간을 주님만 ‘나’ 라는 그 세계 그 천국으로 이끌어냈으면 이제는 나는 기껏 이것밖에 안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말을 이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이것 못버려요 이건 죽을 때 까지 못버려요. 나이 70, 80될때까지 못버려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이것은 육이니까 육이 있는 한 못버리는데, 못버리면 안버리면 되잖아요.
안버리는 상태에서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음을 알고 이 나는 주께서 너희의 속한 나, 다시 말해서 죄인들을 불러서 의인되게 하시는 그 죄인의 그룹속에 있는 나, 그리고 유일하신 의인 나, 예수님 나, 이런 관계가 바로 나와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님의 새로운 너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까지 강의의 핵심은 뭐냐하면 너희는 우리가 만드는게 아니고 ‘나’가 너희를 만들어 낸다 지금 그 이야기 한것입니다. ‘나’ 가 너희를 만들어 낸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버리라고 했어요?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절대로 버리지 마세요. 버리지 마시라는 말이 잘못됬다. 이것은 못버립니다. 유치원에 달리기 하다가 남의 자식 이기면 좋습니까? ‘잘한다~~남의자식~’ 이럽니까? 누구자식? ‘아이고~~내새끼 최고다~’ 하잖아요. 갑자기 내가 응원하는 자체가 나를 키우는 거예요.
그런데 기어이 그 아이가 내 아들이 일등을 제치고 일등하면 나의 무슨 속성에 합당합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기어이 관철한다. 관철한다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양보없다. 부모자식간에 양보 없어요.
말레이시아 가도 부모 자식간에 다툼 이것은 계속됩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연예할때에 남녀가 서로 좋다고 연예하잖아요. 같이 한번 살아보세요. 경쟁 없습니까? 본격적으로 이제 시작합니다. 본격적으로 경쟁 시작합니다.
‘너는 나를 위해서 시집왔다.’ ‘아니야 너는 나를 위해서 장가왔다.’ 너 집안 어떻고 내 집안 어떻고 난리나는 거예요. 너 올 때 혼수 얼마해왔느냐? 아직도 혼수 타령이냐 너는 나하고 뭐 해줬는데? 뭐 이렇게 계속 죽을 때 까지, 계속 누가 위에 서는지를 하는데 그게 모든 부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부부 다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혼한다는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이혼하기전에도 뭐 이혼된 상태인데 뭘 또. 같이 살아도 이혼인데 뭐 같이 살아도 서로 이용할려고 아까 이야기 했죠 서로 양보없이 이용할려고 하는데 뭐 헤어진다고 아쉬울 것도 없고 다만 헤어지면 이용하는데 지장있겠다.
그래서 이혼하고 난 뒤에 제일 기분나쁜 것이 뭐냐하면은, 내가 보낸 여자를 다른 남자가 낚아챌 때 기분 나빠요. 이혼하더라도 여자가 혼자 살면 기분 덜 나쁜데, 이혼해 놓고 남편행색할려 하니까 갑자기 다른 남자가 채 가버리면 그것은 끊어졌잖아요. 이용가치가 완전히 끝났으니까 미쳐버립니다. 불질러 버리고 뭐 행패부리고 자식가지고 장난치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것 때문에 천년의 신학이, 신학이 천년동안 발달했습니다. 이 본문가지고. 신학의 발전이 이런거예요. 희한하죠? 내가 말해야 희한하지. 이제 말할께요.
자 천년동안 그걸 중세찰학이라고 하는데요. 476년부터 1453년까지 서유럽이 망하고 난뒤에 동유럽이 망할 때 까지 천년 걸렸습니다. 대략 천년걸렸는데, 그 대략 천년동안 발달한 그 신학이 있어요. 물론 그걸 중세철학 중세신학, 또는 중세철학이라고 하는데 중세철학이 어떤식으로 논쟁을 했는지를 제가 잠시 소개를 해드릴께요. 중세신학이.
가지를 어떤 식으로 규정해서 주님한테 인정받는가? 그 논쟁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했잖아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포도나무는 눈에 안보이지요? 그런데 가지는 눈에 보이겠죠. 포도나무는 주님이니까 주님은 지금 영광중에 계시니까 안보이잖아요. 우리같이 이렇게 육으로 된 사람은 예수님이 안보인다 이 말이죠.
물론 저 사도요한이나 밧모섬에서 봤지만 우리한테는 안나타나거든요. 나타날수도 있지만 흔하게 나타나지는 않잖아요. 따라서 지금 나타난게 뭡니까? 바로 예수 믿는다는 그 집단, 예수믿는다는 사람들은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있느냐를 이렇게 알려줄 때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우리 가운데 있다 라고 선전을 해대고 PR을 해대면 ‘야~저 교회 예수 믿는 모양이다. 그러면 우리는 천당간다. 그 교회 등록하자.’ 이렇게 나올수 있는 아이디어가 생기겠죠.
그래서 교회들 마다 진짜 우리가 주님이 말하는 그 가지 집단입니다 라고 선전을 해대면서 그걸 받쳐주는 신학들을 발전시킨거예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죠? 똑같아요. 우리교회와야 구원받습니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분명히 성경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기존의 교회는 사람들 구원욕구에 작용해서 구원 천당 보내줄테니까 우리교회나오세요 라는식으로 구원론 가지고 구원론을 하나의 표상으로 상품으로 걸은거예요.
면죄부가 따로 있는게 아니고 오늘날 십일조가 면죄부가 되었어요. 십일조 낸 사람은 확실하게 하늘나라 상급 많습니다. 이게 면죄부라는 것이 중세 욕할게 아니고 오늘날도 돈주고 천국하고 영생하고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공공연히 이야기 해요. 아무리 믿음 좋아도 십일조 안하면 나는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겠습니다. 노골적으로 강단에서 이야기 하거든요. 십일조 안하면 집사에서 장로도 안되고 서리집사 장로 안시켜줍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말입니다. 왜 얌체같이 돈도 안내고 왜 천당갈려고 합니까?
그런데 목사들은 그렇게 하죠. 돈내고 천국가는게 아니고 돈 내고 천당간다는 뜻은 아니고 천국을 갔으면 지가 받은게 있으면 내놔야지 하는 식이란말이예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말이나 이말이나 같은 말이예요.
내 놓으면 아 천국갔구나가 확정이 되고, 안 내 놓으면 말로만 천국갔다 하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서 2장에서 무슨믿음이라고 했어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든요. 그럼 행함으로 뭘 보여줄거예요? 예?
돈내놓고 시간 바치고 그것 두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야기가 거꾸로 해도 같은 이야기예요. 돈 내 놓으면 천국 보내주신다 하는 그 말과 천국갔으니까 돈 내 놓으세요 라는 말과 다 같은 말이예요. 같은 말.
눈 오니까 겨울이다. 겨울이니까 눈이 온다 같은 말이잖아요. 결국 그 당시 중세 때 눈에 보이는게 교회이니까 이 교회를 남에게 납득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서 나온 그 연결된 가지집단이라는 것을 그것을 남한테 설득력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학을 발전시킨거예요.
신학은 그렇게 발전된것입니다. 교회 돈 모으기 위해서. 교회 돈 모으기 위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은 재간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바꾼게 뭐냐하면 성만찬이예요.
물 뿌려주고 ‘이것은 주님의 떡이다. 이것은 주님의 살이다. 피다. 마셔라.’ 마셨을 때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은 아까 했죠. 내가 여기 있음, 나는 죽어서 천국가야됨. 그 천국 간다는 것은 힘을 키워야되잖아요. 힘을 키우기 위해서.
그 다음에 세 번째 뭡니까? 기어이 행동으로 관철한다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뭐냐하면은 교회에서는 살과 피를 마련해놓으면 나는 나 천국가기위해서 기어이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는 영원히 영원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 당시에 황제나 그 당시에 왕들을 누를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은 ‘너 만약에 교황 말 안들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못 먹게 만들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못먹게 만들면 요새 같은면 자기 집에서 카스테라하고 포도주스만 먹으면 될것같지요? 되지요?
옛날에는 법을 어떻게 만들었냐하면 교인들에게 성만찬을 주관하시는 분이 교회의 교황에 의해서 등록된 교황에 의해서 인정받은 신부가 아니면 그 살과 피는 무효가 된다 이렇게 한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재벌이고 아무리 권세잡은자라 할지라도 일단 교회와서는 누구 말 들어야됩니까? 아버지는 신부라 하지요. 신부말을 들어야되요. 무엇을 쥐고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쥐고 오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또 생각하기로 ‘그 살과 피 그 카스테라 빵하고 비스켓하고 뭐 안그러면 그 포도주잖아.’ 하는데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할까봐 교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 교리가 최초에 생긴게 아니고 중세 때 생겼어요. 중세 때.
늦게 생겼다고요. 성만찬 교리가. 뭐라고하냐하면 그냥 이 포도주와 그냥 이 빵이 신부가 축복을 할 경우만 이 빵이 예수님의 살이 되고 이 잔이 이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가 된다고 그렇게 가르친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 바보들 아닙니까? 그 말을 믿는 그 바보들 아닙니까? 하지만 그 바보가 오늘날 한국 이천만 성도가 바보인데. 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