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6a 울산강의-레위기 12장 : 절연
20171006a 울산강의-레위기 12장 : 절연(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12장입니다. 내용이 생뚱맞은 게 있어요. 꼭 이럴 것까지 있느냐는 그런 내용들이 의아하게 등장할 건데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 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그러니까 남자를 낳았을 때는 7일+33일, 합쳐서 40일 동안 부정하다는 겁니다. 더럽다는 겁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더러운 인간을 왜 만들었느냐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깨끗하게 만들어야지. 자녀를 낳았는데 더러워서 추가 조치가 있어야 되겠다. 그러려면 추가 조치가 없도록 깨끗하게 낳으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그냥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매개체가 있어요. 아담을 통해서 인간을 낳게 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더럽다는 것은 우리 생각엔 아담이 그때 개인적으로 더럽다고 할 거예요. 우리 상식으론 그래요. “아담이 죄를 지었다. 아담은 나쁜 사람이구나. 왜 죄 지었노? 하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는 이러고 싶단 말이죠. 그런데 이건 우리의 상식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더러웠는데 그 뒤에 몇 백 년, 몇 천 년 흘러도 아담에게 나온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더럽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9장에 의하면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아담을 하나님이 상대하시고 아담에게 어떤 인간이 나오든 간에 하나님이 그 인간과 상대 안 하고 아담과만 계속 상대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담은 매개체니까, 쉬운 말로 중보자니까. 하나님께선 중보자로 상대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돼요. 그 점에 대해서 우리도 잘할 수 있는데 직접 나와 상대하시지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섭섭해 할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러운 존재가 되는 것도 우리 행함과 무관하게 아담의 자식이란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냥 결정적으로 더러운 겁니다. 그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은 섭섭하게 생각해서 나한테 글도 보낸 사람 있어요. 하나님은 사이코라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우리의 행함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는 예수 그리스도란 중보자 때문에 어떤 행함과 상관없이 깨끗함을 얻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 점은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걸 생각해보세요. 더러운 것은 아담 때문에 더럽고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그건 기존교회에서 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가 운영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어떤 행함과 관계없이, 교회 나오든 말든 관계없이, 헌금하든 말든 관계없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다. 이것이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리고 분노를 유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무슨 짓을 하든 더럽다는 전제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인간은 자꾸 개선하려고 해요. 하루를 살면 하루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나아지기를 원하고 개선되기를 원하는 것은, 나란 인간은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해서 그런 겁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개선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출생부터 그랬어요. 꼭 시편 51편 다윗의 고백을 우리가 들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죄 지은 게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서 죄 지으면 죄 지은 경우도 있고 없을 경우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나는 처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은 내가 태어난 그 자리를 평생 동안 보여주는 기능을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죄를 줄줄 흘리고 티를 내며 평생을 살도록 돼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 참석 안 하잖아요. 사실은 나쁜 마음으로 참석 안 한 게 아니고 주께서 추석 휴가를 보낸 거지요. 참석하지 말라고 참석 못하게 하신 거죠. 지금 참석하고 싶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있겠어요. 차라리 참석 못하면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런 식으로 통곡할 건데 주께서 그 심정 헤아릴 줄 믿쓉니다. 성경말씀에서 아기로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기를 태어나게 한 여인, 엄마죠. 엄마 자체가 얼마나 더러운가 하면, 네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하나님 보기에 더럽다. 네가 자식을 낳기 전에는 맨날 화장하고 잘 때 피부 관리해서 깨끗한 줄 알지 자식 낳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들 낳으면 40일, 딸 낳으면 80일 동안 더럽다고 규정했다는 말은, 그 엄마 자체가 이미 더러운 데 죄 가운데 있었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죄 가운데 자식이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엄마가 깨끗하다고 우긴다면, 자식이 엄마를 죽이는 셈이 됩니다. 거기서 나온 이름이 있어요. 엄마를 죽인 자식이 있습니다. 패륜아는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었지요. 베냐민은 자기는 태어났고 엄마를 죽였습니다. 그렇게 죽일 때 자기 기능을 한 거예요. 오른손의 아들이에요. 오른손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전쟁을 거는, 싸움을 거는 주체 측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을 시도하는 자리, 결국 전쟁에는 상대가 있는데 그 상대가 적, 다른 말로 원수가 되는 겁니다. 베냐민의 엄마가 언니 레아가 아니고 동생 라헬인데요, 야곱이 정말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입니다. 사랑했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사랑의 아들이 나왔지요. 엄마 죽고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엄마의 본질이 아들 베냐민 안에 합류돼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베냐민이 하는 기능은 전쟁을 시도하고 추진하는 주체 측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베냐민은 적을 생산하는 겁니다. 계속 이 땅에서 적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누구 적이냐 하면, 하나님의 적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오른손의 아들의 오른쪽은 전쟁을 벌이는 분이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에요. 독생자를 지상에서 누구냐고 물으면 안 돼요. 어떤 기능을 펼치느냐고 물어야 됩니다. 이런 게 어려운데,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누구냐고 존재를 물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존재를 묻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직 아담에게만 해당되고 다른 사람은 해당 안 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만 나라고 할 수 있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나는 생명의 떡이요, 나는 진리요.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두 기둥 사이에 빨랫줄이 걸었는데 많은 빨래가 있으면 마지막 기둥이 예수 그리스도고 처음 기둥이 아담이에요. 이 사이에 모든 인간은 빨래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란 철학자는 인간을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다고 해서 존재자라 하는데, 어쨌든 간에 사실은 그 존재자들은 영원하지 않아요. 그냥 잠시 왔다고 소모되는 용도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저기 사진 예쁘게 찍어놨지만 몇 년 안 가서 소모될 거예요. 빈자리, 백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순서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들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5절에 여자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한 것이 아니고 무려 14일 동안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도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묻기 전에 왜 인간이 하나님한테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는지 기분 나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레위기 12장을 보고 있는데 우리가 기분 틀어지면 성경 덮어버리면 그만이지요.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안 본 걸로 하겠습니다. 직장에서 업무에 관한 책들 볼 것도 많은데 성경 레위기 12장까지 신경 써야 되겠습니까? 안 보면 그만이잖아요. 우리가 책을 볼 때는 자기한테 도움 될 것을 기대하고 보는데 레위기 12장은 도움 되기는커녕 우리를 지적질하는 이야기인데 넌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인간이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너 때문에 엄마가 더러워졌다. 뭐 어쩌란 말입니까? 책임지란 말입니까? 그런데 우린 엄마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엄마가 보고플 땐~~~ 가수들 어머니 노래, 아버지 노래하면 평소에 효도도 안 하던 것들이 눈물 막 흘리고 노래 부르고 점수 막 따고, 군에 가서 아버지, 엄마 노래 부르면 다 울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나를 낳은 분을 계기로 해서 엄마가 더럽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설까요, 엄마 편에 서서 엄마를 두둔할까요? 우리 엄마가 시장통 바람 부는 복판에 바지장사하면서 나를 교육시켰는데 그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 됐다고 더럽다고 하느냐 말이죠. 이렇게 대들고 싶은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 성경 보고 너무 감격스럽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왜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고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느냐 말이죠. 에이, 하고 덮어버릴 수 있는데 이걸 생각해보세요. 성경이란 그다지 필요치 않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성경 몰라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성경 앞에서 내가 없어져도 되는 겁니까? 우리는 풀 같이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하잖아요.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운영돼요. 이 말은 내 뜻대로 운영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안 보는 이유는, 자기 뜻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말씀에 대해서 가로막습니다. 가로막는 취지가 뭐냐 하면, 성경말씀이 현실이냐, 내가 하고자 하는 게 현실이냐? 그 투쟁을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상상하고, 내가 기획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마음먹는 게 현실이냐, 아니면 성경말씀이 현실이냐 말이죠. 추석에 내가 고모 집에 간다. 이게 현실이냐? 아니면 추석 때 성경공부에 나온다. 어느 게 현실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많으냐 말이죠. 세상은 성경말씀이 펼쳐진다는 정도가 아니고요, 성경말씀대로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계획은 무산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점을 안 믿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원대로 마음대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이 허황되고 하나님 계신 것 맞긴 맞아? 하나님 계시면 내 뜻대로 할 테니까 한 번 막아보시오. 못 막잖아. 못 막으니까 신은 있다고 믿기는 믿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있진 않고 역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깔아두고 살아요. 믿는다고요? 개코나 믿어요. 얼마나 안 믿었으면 믿는다고 새삼스럽게 다짐을 해야 될 정도로 안 믿어집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경대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확실하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여러 군데에서 신명기도 그렇게 레위기 그렇고 망한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반드시 망한다고 돼있거든요. 끝에도 그렇고.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망했고, 말씀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오독해서 알았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쫓겨나서 이를 갈며 후회막심하게 살았습니다. 야고보 2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가난한 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하더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빨리 벗어나서 부자 되고 싶은 충동과 희망으로 살아가죠. 가난이 가난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가난이 상대적이거든요. 상대적으로 전부 다 하루 세끼만 먹는 나라가 있다고 합시다. 부자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 빼놓고 다 부자라면 하루 세끼 먹는 사람은 자기 혼자밖에 없어요. 그래도 가난이 되겠습니까? 남들처럼 못 될 때 패배의식을 느끼겠지요. 자괴감을 느낄 것이고. 내가 이러려고 이 땅에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축복이라 하지 않고 내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항상 더 많은 돈을 원할 건데 돈을 원하지 않고 믿음에 부요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현찰 750억에 부동산 2600억 갖고 있어도 되게 가난한 자에요. 이까짓 것 돈 750억 한방에 날아가도 괜찮아. 나는 그걸 보고 세상 살지 않아. 믿음에 부요한 것, 이렇게 해준 것, 그게 사는 재미지, 한 달 수입이 26억 들어오고. 이젠 돈 지긋지긋하다. 정말 그런 사람 있다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상대적이니까. 자기가 갖고 있는 믿음에 비해서 돈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나는 부자 맞는데 믿음에 부자다. 믿음에 부자란 것은 돈 자랑하지 말고 믿음을 자랑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걸 어디에 쓸 건데? 할 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겠느냐” 약속의 나라거든요.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돼있습니다. 약속이란 하나님이 선물로 준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결정적으로 준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모세 당시에, 레위기 당시에. 본문에도 나오잖아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쉽게 말해서 추석인데 남들은 택배도 오고 선물도 오는데 나한테는 무슨 선물 없습니까? 하는데 택배가 왔어요. la갈비인가 하고 보니까 레위기 12장이에요. 레위기 12장에 뭐 좋은 게 있는가 보니까, 아들 태어났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그 다음에 33일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어쩌라고? 이걸로 찜해 먹을 수도 없고 어디에 써먹을 거예요?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이 왜 있는 겁니까? 절연,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관계가 끊어졌다는 걸 언급하는 겁니다. 축복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끊어졌다는 걸 눈치 채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소풍 가는데, 저 어릴 때는 고구마 두 개, 삶은 달걀, 김밥, 말표 사이다 갖고 갑니다. 사는 집 아이는 소지지 넣고 하는데, 옛날에는 할머니가 따라 가잖아요. 엄마는 맞벌이한다고 못 오고. “너, 여기 맛있는 것 있으니까 먹고, 엄마는 집에 간다.” 그럼 얘가 기분 좋아합니까? 울지요. 왜 웁니까? 절연, 관계가 끊어졌지요. 오늘날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 안 합니다. 스스로 독자적으로 살면 그게 축복인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잔소리해서 귀찮아. 자기 혼자 얼마나 잘 살아냈는지 그걸 자랑스러워합니다. 혼자서도 잘 해요. 그걸 보람으로 삼아요. 관계 맺는 것 본인이 결정합니다. 저 사람 좋으면 친구하자. 저 사람 좋으면 내 애인하자. 본인이 결정해요. 하나님이 맺어준 관계없습니다. 부부라도 싫으면 갈라서 버리죠. 지가 결정했기에 지가 갈라서는 거죠.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은 조금도 고려의 대상도 안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그게 보통 이방민족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아담의 자손은 다 그래요. 제가 요즘 설교에 늘 그런 이야기하는데 모든 인간은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악마의 직원으로써, 악마의 앞잡이로 살아간다고 할 때 교인들이 전혀 안 믿는 눈치를 보내요. 물론 성경에 나와 있는 건 맞지만 실제로 실감이 안 난단 말이죠. 배후에 누가 있는데? 마귀 없어. 내 뒤에 목 돌아간 이상한 귀신 인형 없거든요. 성경에 있으니까 인정은 하겠지만 본인이 그걸 실감을 못해요. 악마가 목에 줄을 맨 세파트처럼 가지고 논다는 그러한 악마의 모습에 대해서 가슴에 와 닿질 않고 마음에 와 닿질 않아요. 여기 만약에 대학교수가 앉아 있는데 여러분 배후에 악마 있다고 하면, 누가 동의하겠습니까?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 없어요. 전부 다 수학교수, 물리학교수, 철학박사인데 지 잘난 체하는데 뒤에 악마, 귀신 하나 달렸다 하면 누가 믿겠어요. 신학교수가 앉아있는데 뒤에 악마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 점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왜 인간이 실감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어요. 원인과 결과 관계를 수정해서 그 구조 속에 자기 자신을 놓이게 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결과가 나온다. 그건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양육을 받아왔거든요. 착하면(원인) 복 받아 천국 가고, 악하면 벌 받아서 지옥 가요. 그럼 착하다, 악하다는 시작을 누가합니까? 캐치를 내가 하죠.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한 일에 내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자식이 삐딱하게 나가면, 내가 잘못 키웠다고 하죠. 자식은 좋아하지요. 여차하면 엄마 책임, 아빠 책임으로 돌리면 되니까. 본인들이 자백을 했으니 엄마, 아빠가 책임지고 돈 달라하면 되니까. 원인, 결과의 극단적인 것이 물리학, 수학, 과학이에요. 도덕, 윤리, 신학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아직 선이나 악이나 행하기 전이라 했거든요. 원인과 결과가 우리 쪽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아니고, 제가 책을 볼 건데, 올해 노벨문학상 받은 책이 인간의 마음속에 어두운 심연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게 아니고 뭔가 어두운 심연에서 행동이 나온단 말이죠. 어두운 심연, 깊은 구덩이는 인간이 제공한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뭘 감 잡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행동해서 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마는 게 아니고 하도록 부추김을 당하는 다른 어떤 힘, 인간을 힘들게 하는 다른 힘이 인간보다 먼저 전제돼있다는 것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감추고 있었던 거예요. 그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낸 책이라는데, 사실 프로이트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원인과 결과가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죄 속에서 태어났잖아요. 인간이 책임질 수 없고 다룰 수도 없는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그러한 본질과 성격의 일부를 우리가 할당받은 겁니다. 개성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초법적인 힘이 등장하면 그 개성들 죽어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히틀러 같은 경우에 그 독일의 똑똑한 사람들도 히틀러가 몇 마디 하니까 다 따라 갔잖아요. 다 따라가서 전부 다 미친 사람 돼서 유대인들 학살하고 그래도 양심의 가책 없었어요.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다 따라가는 거예요. 이건 구약성경에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도 듣지도 않아요. 권력의 힘, 정치적인 힘 앞에 전부 다 아무 소리 못하고 우르르 다 따라가는 겁니다. 다수가 진리가 되는 시대를 민주주의라 해요. 민주주의는 결정을 투표로 하는데 다수결로 정합니다. 가정에 식구가 다섯이라 하면, 가정에 문제 있으면 얘들이 뭐라고 합니까? “엄마, 우리 민주주의로 하자.” 표 대결하자는 것 아닙니까. 세 표, 두 표 나오면 세 표로 결정하지만 이미 가정은 두 패로 나눠졌어요. 반대표가 두 표 나왔으니까. 여름방학인데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 이것 때문에 세 표, 두 표로 나눠진다고요. 외식하는데 중국집에 가자, 회 먹으러 가자. 이것 때문에 갈라진다고요. 아이 학원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부부 사이가 또 갈라지요. 근원적인 문제에요. 왜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부 의견이 같아요. 우리 애를 공부를 잘해야 돼. 그 점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공부를 잘해야 됩니까? 그게 레위기 13장에 나옵니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의 자식들이잖아요. 죄의 종들이란 말이죠. 공부 잘한다는 게 그 앞에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것은 아담의 죄 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시작을 자기부터 시작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남보다 우리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하게 되면 독자적으로 우리는 남보다 더 우수한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이 죄라는 결과는 완전히 무시되고 우리 얘는 공부 잘해요, 그 원인으로부터 새로운 결과가 주어질 때 이 가정은 악마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염두에 안 두지요. 내가 공부 시켰으니까. 내가 직장 다녀서 학원 보내고 이만큼 성공시켰으니까. 그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잘해서 잘된 것만 기억이 돼요. 거기에다 여러분 배후에 악마 있다고 하니까 저게 틀린 말은 아닌데 현실로 와 닿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공부한 아이가 학원가다 차사고로 죽어버렸다. 학원 다녀서 전교 1등 계속하고 있는데 수능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럼 그 원인을 따져봅시다. 학원가다 죽었잖아요. 학원 누가 보냈습니까? 엄마가 보냈지요. 그럼 엄마가 책임져야 됩니까? 내가 바보 같이 학원을 보내서 어미가 널 죽였다고 하잖아요. 그게 자기 죄를 회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까? 따지는 거잖아요. 회개하려면 이렇게 해야 돼요. “학원 보낸 자체가 레위기 12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울면서 기도하는 엄마 봤습니까? 레위기 12장이 어디 박혔는지도 몰라요. 레위기 12장이 우리에게 낯설게 등장하는 이유가, 레위기 12장은 여호와께서 모세로 해서 이미 원인과 시작을 여호와로 출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는 자세가 항상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습관화돼있어요. 그래야 내가 노리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그냥 하나님은 내가 시작한 일에 후원해주고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위기 12장에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도저히 마음 편하게 이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겁니다. 예를 이런 게 있어요. 네가 원하는 것 다 들어줄게. 그런 성경이 있다면 들을만해요. 시작을 나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내 소원을 들어주신데.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 기다려보세요. 뜻대로 되면 나 혼자 다 먹는 게 아니고 10프로는 드리겠습니다. 우린 동업자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시작하는 것부터 개 무시하고 들어가면 이 성경이 감사히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오지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주께서 아이를 데려갈 정도로 나한테 문제 있음을 깨우치게 하셨구나. 아이를 내 자식으로 키웠는데 그게 내 자식이 아니고 다 같은 아담의 자손에 불과하구나. 내가 주님부터 생각하지 않고 내 영광부터 생각한 것을 성령이 임하면 깨닫게 되겠지요. 그리고 깨닫고 난 뒤에 우연히 바람 불어서 레위기 12장을 본다면 우리는 날 때부터 절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영생과 무관한 관계, 천국과 무관한 관계, 지옥과 친한 관계, 저주받아도 할 말 없는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럽다고 해도 너무나 합당한 평가라는 사실을 순하게 받아들이겠지요. 너는 더럽다, 할 때 옳소이다. 제가 더럽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에요.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누구냐?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더러운 짓임을 아는 사람, 주께서 그런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왜 사람들은 자기가 더럽다고 여기지 않느냐 하면, 시작을 자기부터 개시하게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주님부터 시작했다면, 그냥 주님부터 시작했다고 모호하게 하지 말고 말씀으로 시작했다고 보시면 돼요. 아담과 예수님 사이 빨랫줄에 걸린 모든 것은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이어진 모든 말씀의 증거들이에요. 그래서 말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게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아들 낳고, 딸 낳게 한 겁니다. 이제 본문이 이해되십니까? 지금 본문이 주객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아들 낳고, 어떤 때는 딸 낳는 거예요. 딸 낳고, 너는 14일 더럽고 66일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는구나. 그 다음에 아들 낳고, 7일 더럽고. 정말 복음으로 사는 산부인과 같으면 복숭아, 고추 그리지 말고 레위기 12장을 걸어놔야 돼요. 여러분이 더러운 걸 몰랐지요. 자식을 낳고 보니까 그 자식이 바로 당신, 엄마 뱃속에서 나왔잖아요. 자식이 더럽다는 말은, 엄마가 더러운 거예요. 인간은 더러운 거예요. 더럽다는 것을 다른 민족에겐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민족이기 때문에 알려주는 거예요. 더럽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님 오실 때 멀쩡하게 오지 않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로마서 8장 3절에.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메시아를 보면서 왜 저렇게 초라하냐고 하지만 메시아가 초라한 이유가, 우리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 사람은 십자가에 피 흐려 왜 돌아갔지? ㅉㅉㅉ 그럴 필요 없어요. 그분이 십자가에 왜 돌아갔습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잖아요. 인간들치고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자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자꾸 독자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라고 계속해서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항상 원인과 결과 식으로,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는 낳는다는 식으로 악마가 선악적인 요소로 우리에게 헛된 망상, 바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도 마찬가지고. 교인들에게 바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부~웅 떠서. 어떤 바람이 드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 뭔가 열심히 해서 월급 받고 사니 그다지 레위기 12장이 아쉽지 않아요. 봐도 그만이고 보면 잠 오고 안 봐도 그만이고.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살지 말씀으로 안 살거든요. 이걸 적으로 삼아 주님께서 싸우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란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더럽구나. 더러우면 어떻게 할까? 나중에 66일 지나서 속죄제물 드리고 번제 드리면 되지.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아들 낳고 딸 낳고 하나님 앞에 번제 드리고 할 도리 다했다고 해서 죽은 겁니다. 그래서 멸망당한 거예요. 왜? 제사를 지내고 번제를 바친다는 것은 그 행위 개시를 자기로부터 시작하잖아요. 누구를 위한 제사에요, 누구를 위한 속죄제고 번제입니까?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시작한 거예요. 말씀이 말씀 되게 드린 게 아니고 내가 이런 속죄제나 번제 드리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단 소릴 들으면 내가 시작한 일이 나를 구원하는 일로 결과를 맺는다는 그러한 희망 때문에 말씀을 이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줘도 정작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공 된 거예요. 자기가 존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거예요. 존재한 자가 존재를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아까 빨랫줄 이야기했지요. 자기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담에서 흘러온 죄라는 걸 알아야 돼요. 레위기 12장을 간단한 도식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시간+제사=거룩. 66일, 33일, 80일,40일 그거에요. 시간 지나서 제사 드리면 거룩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시간과 제사가 인간의 힘으로 만날 수 없다는 것, 결합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말씀을 준 것은 인간은 이미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끊어졌는데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께서 잇게 했지요.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라고.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율법을 주셔서 이어줬단 말이죠. 그러면 이어진 내용이 시간+제사잖아요. 인간이 시간+제사를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 안에 시간과 제사를 완성시킬 분이 하늘에서 따로 투입, 파견, 오시는 거예요. 끊어진 상태에서 시간 지키고 제사 한다고 거룩해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확고하게 끊어졌다 것을 분명하게 만드는 말씀을 실현시키고 완성시킬 분이 하나님께서 ‘시간+제사=거룩’이란 공식에 따라서 장차 이 땅을 방문하시는 겁니다. 그분이 다 이루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이걸 어떻게 주님이 투입하는가는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