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1절(없는 분)170919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15장 1절(없는 분)170919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 대목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대목에서 제일 중요한게 이거예요. “내가” 예요. “내가”.
왜 ‘내가’가 중요하냐 하면은 부처가 십자가 질수 도 있는 문제고 피 흘릴수 도 있는 문제이거든요. 공자가 그 시대의 권력에 대항하다가 바른 소리 하다가 순교당할수 있다 이 말이죠. 근데 부처가 십자가 지고 공자가 십자가 지고 소크라테스가 십자가 지면 메시아 입니까? 아니죠.
왜 십자가 당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고, 그냥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몰린사람도 그렇게 많고, 바르게 살다가 모함당해서 죽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닌데 왜 하필이면 나사렛 예수일까요? 그 문제에 대해서 이천년 신학자들이 머리 계속해서 해도 그걸 해명한 사람은 내가 보기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단 한사람도 없어요.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었다. 그 당시에 그 권력에 죽었다. 전부다 십자가는 희생이다.’ 온갖 성경에 있는 것을 다 동원했는데 왜 나사렛 예수만의 희생이, 왜 그분만의 희생이 왜 구원의 능력이 되느냐?
그것을 설명을 못하니까 십자가를 설명하고 신학자들이 십자가를 설명할때는 ‘억울한 죽음이였다. 세상죄를 지고 갈 때 얼마나 아팟겠는가’ 뭐 이런식으로 ‘참 의인이였지만 죄인을 위해 죽었다.’ 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걸 이야기 하는데 왜 예수님만 의인이여야 하는냐 이말이예요. 왜 예수님만.
뭐냐하면은 왜 공자 맹자 부처 이런 사람은 왜 안되냐이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할수 있는 언어적 근거가 인간의 그 정신적 근거가 인간에게는 일체 없어요. 일체 없습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존경을 표할려고 합니다. 참 훌륭하신 분, 대단한 분, 이렇게 존경을 표한 순간 왜 예수만이냐 하는 것은 이제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에게 있어서는 주님을 딱 만났을 때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당신이 누구십니까?’ 이야기 한거예요. ‘당신이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하고 묻는게 아니예요 지금.
얼마나 착하십니까? 훌륭하십니까? 그것을 묻는게 아니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거예요. 그 질문은 뭐냐하면은 자기라는 그 존재, 나라는 존재가 같이 연결 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존재가 아니예요. 존재는 존재인데 주님 나타난 계시인데 현재 우리들끼리 인간들끼리 있는 존재한 그것을 예수님한테 갔다 붙일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냐하면은 이게 나타나도 뭐가되느냐하면은 나타나도 없는 분이 되요 없는 분. 나타나도.
공자는 왜 안되는데? 맹자는 왜? 부처는 왜 안되는데? 하는데 부처, 공자, 맹자 전부 다 뭐냐하면 없는 존재가 아니고 없는 분이 아니고, 다 있는 분이잖아요. 그렇죠?! 간디고 모든게 있잖아요.
나같은 죄인을 건질 때 누굴 건지지? 오! 저 사람 괜찮네.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나를 구원할 자를 나하고 똑같이 있는 분으로서 엮어지고 연결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의롭게 희생당하고 고생해도 그 사람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우리가 찾고자 해도 없는 분이여야 되요. 없는 분이 되게 되면 없는 분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뭘 보게되게 되냐하면 ‘나 (여기) 있음’. ‘나 있음’ 이것을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것 고쳐야 되요.
나 여기 있음이 뭐로 바꿔야되냐하면, 없음으로 바뀌어야되요 없음으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있다는 것은 옛날에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예수를 모를 때 있다로 그 느낌으로 있는 거예요. 그것은 X표예요. 그것은 생각하지말고 인정하지 말아야되요.
없는 자로서 우리는 여기 있는겁니다.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죠.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는 내가 상상할수 있는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 아닙니다.
나처럼 있기 때문에,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려면 예수님이라는 그 분이 이 세상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내가 여기 있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나에 대한 새로운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그러한 나 일 경우에만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있다는 그런 식으로서는 생각 못한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여기 있다는 것은 이것은 계속 변해요. 계속 변해갑니다. 이제 머리카락도 희고 외무부장관처럼 여자가 머리 희다고 국회에 나와서 욕 얻어먹고... 모든 것 늙어가고 점점 더 기억력도 떨어지고 손가락도 안 움직이고 눈도 침침하고 자꾸 변해요.
어디서 어디까지 변할지는 우리는 장담 못하고 예측도 못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뭐냐? 이미 꽂아놨어요. 확정적입니다. 확정적이예요. 그래서 이것을 저는 오면서 생각한게 뭘 생각했냐하면은 ‘7광구 시추선’ 이라고 생각 했는데,
7광구 시추선은 뭐냐하면 저 우리나라에 저 전라도 바다에 7광구거든요. 7광구에 석유나온다고 시추하죠. 그 넓은 바다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저 갈매기만 끼룩끼룩 날라갈 뿐이지 접근불가죠.
그런데 그 시추선을 어디다 꽂았놨습니까? 석유있는데다 막 꽂아 버렸죠. 석유 있는데다 꽂아 버렸죠. 그 국민당이라고 들어본적 있습니까? 국민당. 중국의 국민당. 장개석 그 사람이 세운 국민당 있거든요.
국민당이 그 일본하고 싸우고 할 때는 잘나갔는데 내란이 일어났어요. 마오쩌둥의 모택동의 공산당에 밀려가지고 어디로 도망갔냐하면은 대만으로 도망을 왔어요. 도망을 오니까 그때 대만은 뭐냐하면 일본이 통치하다가 물러났을 때에요. 일본이 통치하다가.
그러니까 선진문화를 받았잖아요. 중국 국민당이 와가지고 대화했던거 보니까 수도꼭지를 트니까 물이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럴수가! 트니까 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대만에 피신했던 국민당 대장이 전체 전부 다 자기 가족, 국민당에게 시장가서 수도꼭지 다 사오라했어요.
수도꼭지 다 사와서 이거 실화입니다. 다 사와서 자기들 집에 다 박아놔라. 다 박아놨거든요. 그런데 수도꼭지 트니까 물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이게 뭐냐하면 보는 것이 문제가 되요. 눈에 보이니까 이게 사단나는 거예요. 눈에 보이니까.
수도꼭지가 눈에 보였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니까 이렇게 틀면 나오니까 그대로 시장가서 사오면 되는 줄 알고, 그러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 보이지 않는 그 배수관을 생각해야 되잖아요.
수원지 물이 있는 저수지부터 해가지고 수도꼭지와 연결되는 그 배수관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하거든요. 이거 트는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있냐하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라고 되어있죠.
이것은 우주 한복판에다가 시추선을 꽂아버린겁니다. 일종의 수도꼭지를 꽂아버린거예요. 이것은 흔들림이 없어요. 세월이 얼마나 지나던 숱한 사람이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태풍이 불던 뭐던간에 이미 확정적입니다. 확정적이란 말은 시간과 공간에 접촉받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에 일체 접촉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되어있지요. 나는 포도나무라 했어요. 포도나무인데 이것은 기능이죠 기능. 어떤기능이냐하면 방금 이야기한 확정된 기능, 확정된 기능이니까 어떤 인간이라든지 어떤 권세라도 이건 흔들릴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거예요. 확정된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런 말씀나와요.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 아버지 뜻은 뭐냐하면은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이것이죠. 분명히 그렇게 되어있죠? 요한복음에.
그러면 개척교회나 목회자들이 목회할 때, 교인들이 좀 빠져나간다 또 교인 좀 몰려온다. 그것 신경 쓸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경쓰면 안되잖아요. 왜냐하면 이미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면 그 말씀을 믿어줘야 되잖아요. 적어도 성도라면, 목사나 성도라면 그것을 믿어줘야되겠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면 믿어줘야되는데, 몇 명나오고 몇 명 들어온다고 또 좋다고 하다가 또 왔는데 두번 나오다가 나가버리면 또 슬프지요. 희비 뭐 웃다가 웃었다가 울다가 이런일이 벌어진다 이말이죠.
그러면 그 목회자는 믿는 사람이예요? 안 믿는 사람이예요? 전혀 지금 믿지를 못하죠. 근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냐하면은 보이니까 이게 사단나는거예요. 보이니까. 뭔가 보이니까. 보이니까 측정할려고 하고 보이니까 누가 보니까? 내가 보니까 가슴 덜컥 내려앉았다가 좋아서 어쩔줄 모르고 이런거예요.
그렇다면 목회자 나는 결국은 뭐가 문제냐하면 나는 포도나무요 이렇게 되어있으면 그 ‘나’에다가 자기 목회자 나를 여기다가 포기를 해야되요. 이것은 없애버려야 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 말은 그 말은 결국 목회자로 하여금 뭐냐하면 날마다 이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씀이예요. 모든 성경말씀이. 창세기고 뭐 창세기 3장 4장 모든 요한복음.
성경을 보고 있는 나를 사람 취급도 안한거예요. 사실 실제로 말하자면. 인간으로 생각지도 않는 거예요. ‘진작 죽을 인간이 아직도 살았네.’ 이런식으로 한다이말이죠. 그래서 이 모든 성경말씀은 주일날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은 사도바울이 그 다른 사도하고 싸울 때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사도들은 내세우는게 사람을 뭐한다고 했어요?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사도바울의 모든 말은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을 모독한다고 했지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거든요. 진짜 사도와 가짜 사도의 특징이 뭐냐하면은 진짜 사도는 인간을 모욕하는 겁니다. ‘너 아직도 너한테 기대걸어?!!! 너 아직도 너한테 기대거느냐? 니가 보기에 니가 인간으로 보여?’ 이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 변하거든요.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을 안해줘요. 그럼 나를 포기하면 나는 어떻게 살지? 라고 하면 니가 말하는 나 대신에 주님이 하나님이 내세운 나가 있잖아요. 나는 무슨 나무요? 나는 포도나무 잖아요. 이 자체가 우리에 대한 모욕이고 모독이예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내가 있게 되면 항상 우리는 불신앙으로 작용해요. 불신앙으로. 우리항상 여기 있으면. 믿음도 아닌데 자꾸 갖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눈에 보는 데로 판단해서 생겨해버리는 그 믿음이거든요.
대구 강의에서 이런이야기 했습니다만은 우리의 믿음이 주의 믿음을 계속 가리고 있다고 했어요.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믿음을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나를 믿지 않는게 신앙생활이예요.
예수 믿는게 신앙생활이 아니고, 아주 주저없이 내 믿음을 내가 미워하는 것, 내 믿음에 대해서 나를 짓밟아 버리는 것, 이것이 신앙이예요.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얼마나 확정된 이 안에 있었으면 그까짓것 대충
나 같은 인생은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그 어차피 쓰레기에 갖다 버릴 인생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전혀 신경을 안쓰는 것, 안 쓰는 그런 태도, 이것이 신앙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볍게 버릴 수 있는 것. 나 자신에 대해서 가볍게 툭 던지듯이. 양말 엄지에 구멍나면 그거 옛날같으면 기우겠지만 요새는 안하잖아요. 가볍게 둘둘말아 버리죠. 가볍게. 속옷 드러우면 가볍게 버리잖아요. 남자들 어디가 멀리가서 빨 생각 안하고 그냥 던지잖아요.
그것처럼 더러운 것 가볍게 버리는 세월이 바로 우리네 인생입니다. 주께서는 빨리 분리수거 해서 버리라고 하는데 ‘이걸 왜 버려요?’ 이러고 있다 이말이죠. ‘버리라니까~’ ‘이걸 왜 버려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건데.’ ‘니가 지금 중요한게 뭔지 모르는 구나. 그게 왜 중요해?’ ‘눈에 보이잖아요. 제 몸이 눈에 보인다고요.’ 보이니까 사단난거예요. 보이니까. 보이니까 진짜 그리스도가 안보이는 거예요. 내가 너무 가까이 느껴지니까.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있어요. 나와 내 자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보이니까 이게 바로 주님의 믿음을 내 믿음을 그걸 완전히 도배를 해버리고 그것을 자꾸 안보이도록 해버리는 거예요.
대구강의의 끝 부분에 그런이야기 했거든요. 복음의 광채가, 이야기 했다고요. 온통 쓰레기 더미로 온통 치매 환자도 아닌데 하여튼 온통 모든 것 집안에 들어있으면 ‘이거 언제 치우지?’ 걱정되죠.
그런데 거기에 천사가 왔다. 베들레헴의 목자처럼 양치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죠. 천사가 오게되면 뭐도 같이 오죠? 하늘의 영광도 함께 딱 비춰버리면 내가 해야될 일이 그 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일도 있었어? 이거 뭐 소소한 일이네.’ 이게 소소한 일이 되고 그 하늘의 영광 있잖아요 광채. 그게 그 복음의 광채가 확 와닿아 버리면 ‘내가 해야되나? 억지로 해야되나?’ 하는 일들은 이제 가벼운 일이 되어버려요. 그것처럼 우리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온갖 잡티같은 것들이 다 끼어 들어요.
이것 해야되고 이거하나 터지면 저것 터지고 이거 해야되고 주차위반해거지고 한 5만원 이거하게되면 또 애기 아프다 하고 온 인생산다는게 걱정거리 따라가면서 뒤치다꺼리 하다가 볼일 보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복음의 광채를 비추어 버리면 ‘뭐 그럴수 도 있지 뭐 그게 중요해.’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그 복음의 광채를 누가 방해하느냐?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누가 방해하죠?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그렇게 되어있어요. 오늘 제목을 노골적으로 한다면 이것입니다.
워워~~가 되겠습니다. 어어~~워~~어~~ 복음의 광채를 못 비취도록 세상에 전부 이렇게 만드는거 어어~~~어어~~계속해서 이 일에 대해서 걱정하게 만들고 근심하게 만들고 ‘너 큰일났어, 큰일났어. 끝났어, 끝났어. 인생 끝났어, 인생조져놨어. 이제는 돈 나가게 생겼어. 이제 어떻게 살래? 아이구 차리리 죽어라.’ 이런식으로 자꾸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남편이 사고쳤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혼하면 되지 뭐. 왜요? 사소한 일이니까. 이혼이 사소한 일이예요. 막내아들이 죽었어요. 죽은거 데려가셨겠지. 그걸 어떻게 사소한 일이니까.
자기 자식 죽은 게 사소한 일이고, 자기 이혼하는게 사소한 일이고, 사고쳐서 교도소 가는게 사소한 일이고, 갑자기 차사고 나서 앉은뱅이 된 것이 사소한 일이고, 지가 졸음운전 했는데 깨고보니까 정신차리고 보니까 벌써 한 일가족 한 4명이 다 몰살 자기 차에 받아 다 죽어버리고 그런데 그것이 사소한 일이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언제 믿음 키워서 그정도 믿음 됩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제 이야기를 근원적으로 지금 이해 못한 사람이예요. 근원적으로. 왜냐하면 좋은믿음 이라고 할 때 계속해서 우리는 뭘 고집하냐하면은 지금 이 나를 어디에 넣는다? 나를 지금 나를 천국에 넣어볼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계속 지속되면서 천국가는 내가 되고 싶어서 계속 노력하다 보니까 일곱귀신이 일곱귀신 정도가 아니예요. 한 일만귀신 군대귀신 다 달라붙어요. 군대귀신 다 달라붙어요.
주님께서 다시이야기할께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니가 제대로 신앙생활 해가지고 너를 천국에 넣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내가 버린 너인데 왜 너는 내가 버린 쓰레기를 왜 자꾸 니가 아직도 그게 아까워서 손에 꽉 쥐고 있느냐 이말입니다.
그 군대귀신 다 갖다 붙어 땡벌들 다 달라붙도록 왜 자꾸 그토록 귀신 달라붙도록 왜 쥐고 있느냐 이말이죠. 그걸 왜? ‘아니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나는 천국가야되지 않습니까?’ 지금은 이 모양과 천국 가는 이 모양 변해야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야기 하는 성도는 변하는게 없어요. 우리는 나는 지금 신자 조금될거 같은데, 조금 조금씩 변해가지고 천로역정처럼 조금씩 노력하다가 인내하다가 고생하다가 나중에 천국간다.
나의 변화의 조짐에 대해서 기대하면서 바짝 믿음에다가 힘 부어줄라고 독수리처럼 올라가든 내려가든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키울려고 하는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는 이 순간 모든 변화 자체가 우리는 지금 헛꿈 꾸고 있는거예요. 헛꿈꾸는 거. ‘너 지금 다른거 생각하고 있어 다른거!!’
여러분 포도나무가 먼저입니까? 가지가 먼저입니까? 묻는 내가 나쁜 인간이예요. 포도나무 그 둥지가 먼저예요? 가지가 먼저입니까? 등치가 먼저이고 가지는 거기서 나오잖아요. 즉 예수님 뭐라고 하냐면 ‘내가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변화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고 이미 확정적입니다.
너희가 워낙 믿음이 없어노니까 그렇게 생각 않하지 나 따로 챙기고 예수님 포도나무 챙겨가지고 어떻게든 접붙여 가지고 가지되어 볼려고 백날 하게되면 여기 똥파리 마귀똥파리 마귀귀신 똥파리 다 달려들어가지고 괜찮은 충고들 다 합니다. ‘기도하세요.’ 뭐 충고하는거 있잖아요. ‘열심히 노력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니가 있다고 하는 인간은 절대로 이 포도나무 가지가 될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포도나무와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러면 가지는 뭐냐? 없으면서 같이 동질로 퀄리티 같이요. 없음의 퀄리티에서 같이 없음이 나올때만 그 포도나무가 숭숭숭숭 뽑아낸, 포도나무에서 쫙쫙 잡아당기면 거기서 뭐가 나오냐? 가지가 거기서 나오죠.
예수그리스도가 쫙쫙 그 엿가락 당기듯이 나올 때, 그때 가지가 되면 그 원둥치와 가지 사이에 어떤 이음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몸체가 늘어진것이기 때문에 그 몸체가 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이것은 뭐냐하면 바로 모독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다른말로 하면은 고발이 되요 “고발” 나는 참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나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고발하는 겁니다.
고발하는데요, 그 고발하는 것을 다른 말로 양날의 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율법같은 경우에 지키면 뭐 받는다고 했어요? 복 받지요. 그쵸? 지키면 복받지요. 안지키면 뭐 받습니까? 예, 안지키면 자주받지요. 율법이.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는 말씀도 결국은 뭐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고발용이죠. 고발용 같으면 이 고발했다는 말은 이 굉장히 저주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고발당하게 되면 이것이 축복이 되는 고발당함을 아는 자는 이미 축복을 받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율법의 기능처럼.
여기서 이 문제를 더 나아가기 위해서 문제를 하나 내겠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은것입니까? 아니면 택한 백성을 위해 죽은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거예요? 택한자들만을 위해 죽으신겁니까?
모든사람이냐? 아니면 택한백성이냐? 이것 때문에 침례교 장로교 뭐 싸우고 있는데, 둘다 정답을 몰라요 둘다. 하여간 기독교 이천년 역사가 다 그렇지만.. 둘다 정답을 몰라요. 그게 뭐냐하면 이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 예시용(用)입니다. 예를 들어 준거예요 예를 들어 준 것.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은 노량진에 가면은 경찰공무원, 공무원 학원들 있죠. 선전물에 보면은 우리학원에 이번에 7급 수석 나왔습니다. 라고 합시다. 그러면 이 학원 다니면 전부다 공무원 합격하는겁니까? 아니죠.
그러면 이 학원이 거짓말 하는 거예요? 거짓말 아니죠. 그러면 이 학원 간 사람중에 7급 공무원 수석한 사람 있긴 있죠. 이게 바로 예시용입니다 예시용.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다 보여주려고 다 십자가 모든 사람이 죄로 다 죽었는데 그 효과에 대해서는 뭡니까? 택한 자에게만 효과가 가는 거예요. 예시용이란 말 한마디로 다 끝났다 이말이죠.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고발하죠.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 믿는사람은 모든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중에서 보여주기는 다 보여주고 구원받는 사람은 다 가 아니고. 그래서 그것은 예를 보여줬다. 예를 시. 보이다. 예시용이 되는 겁니다 예시용.
그렇게 예시용이 되게되면 사람들은 어떤 효과가 일어나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공문에 노량진에 가면 붙여놨잖아요. 우리학원에서 이번에 7급 20명나왔습니다. 9급 이번에 50명나왔습니다 하게 되면은 그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들은 보고 어느 학원가고 싶어요? 그쪽 학원 가고싶어하죠. 이왕이면 저쪽은 12명됬다하고 여기는 50명 됬다하면 이왕이면 이 학원에서 잘 가르쳐서 합격했다 해서 그쪽에 가겠지요?
성경에도 마찬가지예요. 내 십자가 내가 택한 백성으로 인해서 은혜줄자가 있느니라 이렇게 하게되면 사람은 자기가 어느걸 선택하게 됩니까? ‘나 예수 십자가 믿고 은혜로 구원받고 싶어.’ 라고 그쪽에 나오겠죠. 반드시 그렇게 하겠죠.
이게바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 하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함께 하는 줄 알았죠. 그래서 관점이 뭐냐하면은 포도나무 관점이 아니고, 자기가 가지가 된다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포도나무가 있는데 나는 포도나무 했잖아요. 그러면 가지는 어디서 나옵니까? 포도나무에서 나오는데 사람들 들어보니까 가지가 어떤 특정 예시된 사람들이 가지가 되는 거예요. 7급공무원 7급 합격한사람있으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를 거치지 않고 가지자리에다가 자기를 딱 밀어 상상을해요. ‘나 가지할래. 예수님 가지할래.’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를 안 거쳤어요. 예수님의 나라고 하는 것을 거쳤어요? 안거쳤어요? 이것을 안 거친거예요.
이것을 안 거치고 이 ‘나’ 대신 어떤 ‘나’를 붙들고 있느냐하면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했잖아요. 이 나를 붙들고 나를 구원하는 그러한 수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이용할려고 한겁니다. 이용할려고.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나부터 출발하지 말고 포도나무로부터 출발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나오죠. 예 포도나무로 출발하면 되요. 그 말은 맞는데, 나에서 포도나무 갈 때 어떻게 갈수 가 있느냐는 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땅에 어떤 인간도 찾아볼수 없는 없는 존재거든요.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필히 내가 있는 이상은 그 예수님을 떠밀고 배반하고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있음이 갖고 있는 속성이예요.
우리 있음은 예수님 보시기에 전부 다 변하고 쓰레기이기 때문에 이게 맞을 리가 없어요. 코드가 전혀 안 맞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코드 안 맞다는 생각 못하고, 이렇게 내가 착실하고 바르게 살면 주님과 같이 연결되겠지 라고 생각해가지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하고 믿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 뭘 가린다? 그 믿음이 예수님이 주신 믿음을 가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요한복음15장 보면 어떻게 하는냐 하면 이렇게 정리하면 제일 편합니다.
예수님의 모노드라마 라고 생각해봅시다. 모노 드라마가 뭡니까? 주연 본인이고 감독 본인이고 연출 본인이고 딱, 모든 것이 딱 누구? 예수님 자기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은 그러한 권한이 있는 이유가 천지창조 하실때에 그 모든 천지창조는 누구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주려고 하는 하나의 설치냐 하면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설치물이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코스모스나 뭐 기린이나 코끼리나 인간부터 전부 다. 그 말이 어디나오냐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죠.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심지어 악한 마귀든 간에 모든 만물은 누구의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에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모노 드라마예요 모노드라마.
혼자를 위한 모노드라마에 모노드마라 있다 이 말이죠. 이 혼자서 모노드라마 있는데 현재 그렇게 된 모든 피조물이 인간들이 마귀가 뭐로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인간나름대로의 자기를 위한 모노드라마로 세상의 모든 변화와 지금 연결시키고 있어요.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것을 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 자동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마련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도 나를 위하여, 그래서 제가 주일날 하나님 영광 주권사상 하는 것들 때려죽이고 싶다 그런 말 했잖아요.
뭐 예수중심 십자가 중심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내게 될 때 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모노드라마 위해서 내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드라마를 쓸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은.
나한테 필요있는것과 없는 것을 자꾸 갈라버려요. 걷어낸다고 했는데 대구강의에서. 이것을 자꾸 걷어내요. 이것은 나한테 필요없는거고, 이것도 나한테 필요없는것이고. 자꾸걷어내는 거예요.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물었죠. 욥이 자기 고난 받는데 황무지에 비오는 것과 관련있다고 욥이 생각 했어요? 못했어요? 생각을 못했지요.
지금 내 온몸이 종기나서 아픈데 창문열고 ‘황무지에 비가오네. 저것과 나와 무슨 관련성이 있을거야.’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안했지요. 했습니까? 할 리가 있습니까? 할 리가 있어요?
그래서 엘리후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엘리후가 네 번째 친구 마지막친구가 뭐라고 하냐하면은 욥보고 하는 이야기가 ‘욥아 니가 뭔데 하나님을 심문하느냐?’ 심문. 심문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는 거예요.
마치 판사가 죄인에게 따지듯이 욥이 자기의 순수함과 결백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누가 피고석에 앉았냐하면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있고, 자기가 판사가 되어가지고 ‘내가 무엇이 잘못됬는데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낫다고 저사람에게 나오지 않는 고난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라는 식으로 ‘욥아 너는 왜 하나님을 심문하느냐?’ 이말입니다. 엘리후가 네 번째 친구는 하나님께 책망받지 않았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책망받았지 네 번째는 책망 안 받았거든요. 이 말이 왜 중요하냐하면은 인간이 속으로도 잠시 잠깐이라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든지 자기 인생에 일어난 일로 짜증을 부리게 되면 이것은 뭘 의미하냐하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소환시켜서 거기다가 따지고 심문하는 식이 된다는 사실을 욥이 대표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아까 오늘 한 강의와 결부시키게 되면 욥이 그렇게 고난 받는다고 하나님을 심문하는 이유는 결국 뭡니까? 나의 존재가 나에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세상 모두 하나님마저 다 나를 위해서 이 존재를 위해서 이렇게 도와주고 돌아가야 이것이 자기 보기에는 자기 눈에는 이것이 정상인겁니다.
이게 정의고, 이것이 진리고, 이게 생명이고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이것은 욥의 자기의 대한 그 믿음이 결국 무얼 가리고 무엇과 적이 되었죠? 순간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죠. 원수가. 적이되었잖아요.
강의를 쭉 했지만 그 문제점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 문제점이 있어요? 나한테 문제가 있지요. 나에게 문제가 있다 없다를 내가 생각할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절대로 생각못해요.
물 묻은 손으로 전기선을 만졌다 그럼 찌릿하잖아요. 찌릿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물 묻은 손을 닦고 깨끗한 손으로 만져야되는데 물 묻은 손으로 해서 잠시 감전됬구나.’ 하잖아요.
그러면 이미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알았죠?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안 그 자아를 본인이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귀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귀하게 받아들이죠. 왜? 이제는 수정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물 묻은 손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그 점을 알았으니까.
전에보다 더 향상된 내가 되었으니까 이 아까워서라도 이런 나를 그동안 공들인게 얼만데 못버리죠.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제 말은 결국은 뭐냐하면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를 버릴 수 있다? 없다? 못 버립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제자들과 듣는 모든 우리들에 대해서 고발하는 모습입니다. 고발이란 결국 뭐와 이어진다? 저주로 이어지는 겁니다. 고발하고 정죄하고 결국은 이것은 저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할때에 확정적인것과 그리고 계속 달라질 여지가 있는 것과 어느 존재가 이 우주의 중심적인 존재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이미 시추선이 박혀있는것과 내가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있는 우왕좌왕하는 내 모습과 한번 비교를 해보세요.
비교해보면 아 우리는 나 밖에 모르는 그러면서도 내가 어떻게 될지도 우왕좌왕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 어디로 튀면 어디로 튈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런 불안정한 우리를 아직도 아까워 하면서 기껏 쥘 것은 나 밖에 없으니까 나 밖에 없으니까 나만 쥐고 그냥 세상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처음에 이야기 한, 지금까지 강의 내용 한번 정리해보면은, 주님의 그 죽으심은 모두를 위한 행위가 아니고, 모두에 대한 아까 뭐라고 했죠? 예시죠. 그런데 이 예시는 누구를 위한겁니까? 예수님의 모노드라마예요. 예수님의 모노드라마.
혼자도 화투치는 거예요. 혼자서 피 내놓고 혼자 노는 게임이예요. 혼자 노는 게임 예수님 혼자. 물론 배후엔 아버지 계시지만.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 세상에 천지창조 된거라고. 거기서 주께서 혼자 마귀도 주께서 마음대로 가지고 활동하시면서.
뭐 주님이 혼자 다 혼자하는 즐기는 게임이니까 뭐 불만있어요? 왜 혼자하십니까? 예수님만이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 그러면 우리는 뭐냐? 기능이죠. 우리는 기능이예요.
예수님은 그냥 유일한 영원한 존재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서 예수님도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뭐로 나타나냐하면은 기능으로 나타나요. 기능이 뭐냐하면은 확정된 기능.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요.’ 이것이 바로 복음의 광채입니다.
복음의 광채라는 것은 그것을 아는 순간 그 무겁던 내가 그 무게 한 200t 나가던 내가, 아무튼 엄청나게 나가던 내가 무게가 새털처럼 제로가 되는 거예요. 그 전에 어떤 아저씨는 60살먹은 아저씨가 90kg들었다가 깔려 죽었어요. 바벨에.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제가. 깔려죽었다고요.
지금 우리가 그래요 우리가. 우리가 지금 온 우주보다 더 무거운걸 들려고 하고 있어요. 이 우주가 내 맘대로 되야되고 내 뜻대로 되야된다고 지금 낑낑 드는 겁니다. 들어봤자 이 우주는 누굴 위해 있는거예요? 나를 위해서 있는겁니까? 나를 위해서 있는게 아니죠.
그럼 누굴 위해서? 예수님! 확정된 예수님의 존재를 위해서 있지요. 그럼 우리는 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를 위해서 애쓰는 것은 결국은 지금 예수님하고 지금 한바탕 붙자는 이야기예요. 결국은. 마귀짓을 하고 있는거예요. 우리가 마귀짓을 하고 있는거예요. 매일같이.
집에서 자식 키우는 엄마가 애 초등학교 5학년쯤 돼서 학원에 뭐 무슨학원을 2개 3개 4개막 돌린다고요. 돈도 없는데. 막 억지로 해가지고. 막 남편하고 싸워가면서. ‘아 그렇게 시켜도 되나?’ ‘아니야 시켜야되. 요새는 다 시켜야되.’ 그래서 다 시켰는데 그런데 애가 갈수록 성적이 내려간다다 분통이 터지겠어요? 안터지겠어요?
돈 문제보다 애가 성적이 바보병신되는거 아닌가? 나중에 취직도 못해 굶어 죽는거 아닌가? 이런다고요. 그러면 그 순간 그 사람은 그 자식이 90kg 가는 바벨이예요 바벨. 90kg. 90kg짜리 되는 거예요. 아침에 눈만 뜨면 먼저 오늘 또 뭐 밤새 게임안했나? 이거 쳐다보는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자식에 짓눌려가지고 갈수록 안그래도 갱년기 오는데 갱년기 일찍 왔어. 자식만 보면 ‘나 너 때문에 못살겠다.’ 자식은 있다가 ‘엄마는 엄마 인생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안됩니까?’ ‘야 니가 엄마되바라. 그 소리가 나오는가.’ 그러면 자식이 ‘나 엄마 될려면 멀었는데 나 결혼안할건데.’ ‘아이고 속터져! 속터져!’ 이렇게 하지요. 결혼해도 속터지지만...
어느날 배낭메고 ‘나 유럽여행 갔다올게.’ ‘너 그 나이에 시집가야지!!’ ‘남자도 싫고 다 싫어 나 혼자 살거야.’ ‘아이구 철딱서니 없이~’ ‘엄마도 만만치 않거든~’ 이 세상에 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철광석하는 그 사람 철 있어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세상이 중심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그냥 악마의 기능만 발작일으키듯이 악마의 기능만 아침에 눈만뜨면 이렇게 기침하듯이 계속 악마의 모습만 계속 기능적으로 발산합니다. 계속 발산합니다.
나는 어떻게 되고...? 맨날 앞에 내가 붙어요 나는 어떻게 되고? 나는 어떻게 되고? 나는 믿는 자 일까? 안믿는 자 일까? 그 믿는다는 것이 90kg짜리예요. 왜 믿어야되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음을 놓아버리세요.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의 믿음을 찟어 버리면 비로서 주의 은혜가 보입니다. 그동안 주의 은혜를 내 믿음이 너무나 가렸으니까 내가 주님 믿는다고 하다보니까 전혀 은혜를 못 느끼고 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했어요.
내 믿음 포기 나 안 믿습니다 이러니까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니까 갑자기 바벨이 0.5g, 인생이 0.5g 전혀 무겁지 않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날라가버렸어요.
남편이 애먹인다. 이혼하면 되잖아요. 그건 사소한 일이니까. 그게 뭐 문제예요? 그럼 이혼안한다하면, 안하면 되지. 뭐가 문제예요. 헤어졌는데 또 합치자 한다, 합치면 되는거예요. 어차피 너나 나나 다 기능이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 포도나무죠. 단일성입니다. 그런데 가지는 다양성이예요. 가지는 다양성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똑같은게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보니 똑같은 옷 하나도 없어요. 똑같은 옷 하나도 없어요. 분홍색에다가 청색에다가. 똑같은 옷 없잖아요. 얼굴도 다 달라요. 지문도 다 달라요. 그게 다양성입니다.
이 다양성이 됨으로서 우리는 본인을 그 다양성중에 핵심요소로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반칙적인 요소인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는 거예요. 다양성이기 때문에 그 다양함에 일부라는 그 생각이 절대로 나는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서서 중심역할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한테 더욱더 확신시키는 거예요.
무슨말이냐 로마서 14장에 그런말씀나오는데 니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했죠. 그 왜 그런 이야기 합니까? 니가 비판할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이것을 요한복음8장 같으면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 와 같은 거예요.
‘너는 왜 나처럼 안되?’ 때문에 비판하는거거든요. ‘너는 왜 나처럼 안되?’ 때문에 비판한다고요. 내가 기준입니까? 내가 중심이예요? 내가 포도나무입니까? 포도나무가 이렇게 있다면 가지는 짧을수도 있고 길수 도 있고 말라 비틀어질수도 이것은 가지는 다 달라요.
나라는 가지가 표준이 될 수 없다 이말이죠. 여러분 다리에 털 있잖아요. 그 중에 어느털이 표준이예요? 그냥 몸체 우리 다리에 있으니까 그냥 털이 숭숭 나온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리에서 나온 털이예요. ‘내 털처럼 되라!’ 이건 말이 안되요. 머리 노랗게 물들일수도 있고 거멓게 물 안들이고 갈수도 있고.
이게 90kg 나가는 바벨이 되면 안된다 이말이예요 90kg. 남들이 부러운 것이 그것이 100kg바벨 되면 안되요. ‘너는 100kg하던지 나는 이것만 들게.’ 이러면 된다 이말이죠. 인생을. 어떤 사람을 결혼을 세 번, 세 번하든 4번하든 나는 안하면 되고 뭐 그것은 주께서 기능적으로 허락을 그렇게 하신거예요.
다른 사람은 교인이 이천명이고 이천명하든말든. 나는 두명, 두명 하든말든. 분명히 주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으리라 하면 우리는 가지가 가지를 믿으면 안되잖아요.
가지의 믿음, 그것은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믿음. 가지가 맨날 흔들리니까 자기가 어지러우니까 자기 믿음 아닌 줄 알고. 흔들리니까 가지지 안 흔들리면 몸체이지요. 우리는 가지란 말은 제발 좀 세파에 흔들려라 이말이예요. 흔들리고 이랬든 저랬든 간에 흔들리는 이유가요 우리는 내가 나를 믿을 대상이 아니다. 믿을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흔들리는 흔들리는~ 이런 노래 있잖아요. 그런 노래 있어요. 그냥 주께서 기능대로 살면되는 겁니다. 그것의 모든 출발점은 뭐냐하면은 나라는 존재는 이미 주님의 존재가 등장한 이상 나라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창조를 끄집어 내면서 창조아닌 것은 우리를 주께서는 폐기처분하는 그 과정속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내가 늙어죽는다 그러면 그 안에는 몸에 붙어있는 가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기능이 있거든요. 그 기능이 뭐냐하면 바로 주께서 심어준 기능이예요.
이것하고 첫째시간 마칩시다.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에 자기 떡 먹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주님 떡 떼어 줬잖아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잔을 나눌 때 각자 잔 먹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잔을 부어줬죠.
이것은 뭐냐하면 내가 준 것 그것 회수하는 거예요. 주님의 모노드라마예요. 내가 준 그 떡, 내가 준 그 잔, 그것이 중요한거예요.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액체예요. 포도나무에 나온 액체고 나머지 모양새에서는 다 달라요.
왜 다른가? 어느누구도 우리의 표준은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 빼놓고는 표준이 없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