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8. 25) 2강
광주 강의(2017. 8. 25) 42-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주님이 원하셔서 주신 것’이라고 했죠. 들풀도 참새도 주님이 키우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내 앞에 있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요. ‘이것이 좋을까, 저것을 좋을까?’ 하면서. 그리고 선택하면서 자기 선택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선택하면서 누적된 폐단을 적폐라고 하지요. 내가 나에게 폐단이 되고 이것이 계속 쌓입니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해서 내 인생을 이만큼 끌고 왔다.’고 우깁니다. ‘내가 잘못 선택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주님 입장에서 보면 밟아 죽여도 시원찮아요. 그리고 실제로 밟아 죽이십니다.
시편 2편에 나와요. 기름 부은 자를 알지 못하면 철장으로 깨뜨리는데 질그릇 같이 부수십니다. 세례 요한이 외친 것은 하나님의 복수입니다. 모든 인간이 마귀의 졸병들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강력한 복수를 외쳤습니다. 강력한 복수는 성경 곳곳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켰고, 큰 산 밑에 숨으면 바위가 무너져 심판하고, 무덤에 간 자들도 무덤에서 불러내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세웁니다. 그동안 인생 누구 덕분에 살았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죠. 노아 언약 때 이미 말씀하셨어요. 모든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물속에 다 잠겨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은 왜 살았는가? 본인이 잘해서 산 것이 아닙니다. 방주에 동승한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때문에 살았어요. 나중에 이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가 희생제물이 되지요. 정결한 것으로 노아가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을 살려주시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시고 지켜 주십니까? 인간의 선함을 보고 지켜주시는 게 아닙니다.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에 그들을 용납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주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펼쳐진 일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 은혜고 인간 자체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택을 합니다. ‘예배 참석할까, 말까?’ 고심하다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대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이렇게 자기 앞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 선택하면 할수록 계속 자기 결정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계속 의미를 부여하며 가는데 그것은 크로노스, 즉 시간의 지평입니다.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 갑니다. 내가 5년 전에 은혜를 받고, 그 은혜 받은 순간에 거듭났다고 생각한다면, 5년 전 그 때(카이로스)가 시간 속에 들어오면 그 때가 녹아버려요. 아이스크림을 상온에 오래 두면 녹아서 퍼지듯이.
이처럼 내가 5년 전에 은혜 받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 나의 선택과 의미가 시간(크로노스) 속에서 계속 유효하게 흐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개인구원이 이 시간의 늪에 빠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개인구원은 ‘나 어떻게 구원 받지?’ 이것을 늘 관찰합니다.
제가 [70 이레] 논문 발표할 때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 ‘개혁주의는 위선이고 거짓이다’고 했어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 중 논문을 사전에 읽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어요. “저 사람을 누가 초청했냐?”고 하면서. 개혁주의가 위선이라고 글로만 쓴 것이 아니라 그 이유도 제가 설명을 했어요.
한 번 개혁했다고 하면 그 자아가 새로운 자기의 영역을 마련하니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개혁된 것을 증거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니까 개혁주의 사상은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주장에 대해 화만 낼 것이 아니라 반박을 해야 되잖아요.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개혁주의 사상에는 없어요.
개혁주의는 시간(크로노스) 위에 세운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점차 성화 된다고 해요. 그러니 제 주장에 반박을 못해요. ‘내가 어제 은혜 받았다.’고 하면 그것이 오늘까지 유효한 줄 알고 있어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지속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순간입니다. 지속과 순간은 두 개 다 등장해야 맞아요. 하나만 등장하면 설명이 안 되고 지속에다가 순간이 되면 칼이 꽂이 듯이 순간순간이 오는 겁니다. 지속의 배경 위에 순간이 오고, 그 순간은 곧장 합치되어 흘러가는 강물처럼 지나서 보면 ‘그 때 참 좋았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도 지속 속에 섞여버렸지요.
그러면 순간이 셉니까, 지속이 셉니까? 인간에게는 지속이 우위에 속합니다.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인간은 시간 밖으로 나오면 그게 해탈이고 구원인줄 알고 있어요. 이게 개인구원이에요. 인간의 시간은 에이온(때, 세대)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절을 자기 구원을 위한 말씀으로 생각하면서 봐요.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의도가 있어요. 평소의 의도는 뭐냐 하면, 자기 앞에 닥친 모든 일에 자신이 선택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 이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옳고 그름을 내가 결정하기 때문에 내 결정 자체에 오류가 있으면 선과 악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인간들은.
따라서 선과 악이 있으려면 그것을 판정하는 나에게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나에게 결정권이 주어질 때 마지막 천국이든 지옥이든 갈 때 말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런 생각 전체가 죄라고 합니다.
이게 왜 죄가 됩니까? “이 세대(에이온)를 본받지 말고”라고 했는데, 이 세대가 인간을 가둬놓은 거예요. 가둬진 악한 세대에서는 공중 권세 잡은 신, 사단이 줄곧 하나님 행세를 해 왔습니다. 이 자비로운 하나님, 사랑 많은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신 앞에서는 인간이 긍정이 돼요. 자기 긍정이 성립 된다니까요.
인간이 믿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잘 살고 싶습니다.’가 성립이 된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고 싶고, 이것은 하기 싫어요.’를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 마가복음 10장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 저는 이런 짓 안 해야 되기에 안 했고, 저런 짓해야 되기에 했습니다. 저 잘했지요?”라고 할 때, 이들에게 예수님이 마실 저주의 잔이 눈에 들어올까요?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요소가 빠져 있어요. 본문에서는 주님과 주님 제자가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저것을 하고, 이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시는 저주의 쓴잔을 마시려고 하잖아요.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지요?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처참한 죽음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요. 왜냐? 예수님의 길을 앞서 가는 역할을 맡았기에 자신이 처참하게 죽을 줄 알았어요.
자신이 죽는 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죽는 것이 사소한 문제라면 자녀 결혼하는 것은 더 사소한 문제지요. 자신이 죽는 마당에 자신의 위신과 체면이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쓴잔을 마시라.’는 겁니다. 쓴잔을 마신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주어진 것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을 논리적으로 추리해 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봅시다. 빵이 있으면 그 보이는 빵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지요. 그런데 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거기에서 믿음을 뽑아내는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것이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믿는 자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나를 만들었겠지.” 이것은 주님이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이 주신 쓴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살고,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께서 이것 때문에 쓴잔을 마셨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이 전도할 때 ‘전대에 돈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 말씀은, ‘전도하면 산다.’는 것도 아니고, ‘전도했기에 너는 월급 받아도 마땅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네가 전하는 그 말로 인하여 너도 나처럼 이 세상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져 감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 믿습니다. 못 믿어요. 못 믿는 것이 당연하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변화산에서 놀라운 광경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아니죠.
베드로가 속한 이 세대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마귀가 베드로를 노리지요. 베드로가 마귀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악한 권세에서 벗어난 거예요. 베드로가 기도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도는 소용없습니다.
이 세대가 표적을 원하는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잖아요. 즉 선지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이 정신 차려야 할 유일한 표적이라는 겁니다. 죽음이 기적이에요. 내가 오래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내가 죽어야 마땅함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기적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구원을 바라니까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가게 해달라고 하지요. 이런 것은 주님이 듣지 않습니다. 개인구원은 없어요.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선택을 합니다. ‘포도를 살까, 복숭아를 살까?’ 이처럼 매사에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자신에게 규칙이 되고 율법이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기에 법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깡패의 세계에도 무법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의 삶의 원칙과 규칙이 있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법은 저주를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따로 있기 때문이죠. 시험을 치는데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시험을 치는 것은 인정하지 않지요?
다른 사람이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산상설교에 보면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라.’ 이것이 주님이 주신 시험이거든요. 왜 시험이냐?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존 율법에서 ‘3+7’이라고 하면, ‘10’이 정답이잖아요. 우리 생각에는 율법이 먼저 있고, 그 율법에 대해서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3+7=4+6’ 이런 식으로 새로운 율법으로 정답을 냅니다. 의와 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율법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법을 스스로 만듭니다. 육교가 있으면 육교 밑 도로를 건너면 쉽지만 힘들어도 육교를 건너지요. 왜 그렇습니까? 빨간 불이 켜지면 왜 계속 가지 않고 멈춥니까? 이건 내 규칙입니다. 새벽 3시에 차를 몰고 가는데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빨간 불이 왔습니다. 그런데 사방을 살펴도 차가 없습니다. 그래도 파란 불이 켜질 때까지 멈춰 있습니다. 그러나 신호를 무시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의 법대로 행동합니다.
인간에게는 법 없는 사람이 없어요. 인간은 개인구원이기 때문에 내가 잘 되어야 해요. 왜? 나는 중요하니까. 왜 중요한데? 그건 묻지 마. 무조건 나는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식입니다. 나는 왜 불행하면 안 되지요? 여기에 정답을 말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성경대로 하면 나는 행복하면 안 되고 불행해야 됩니다.
남이 불행하면 기분 좋아요. 그러나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돼요. 최순실씨가 사형 선고받으면 춤을 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말씀이지요. 이건 새로운 율법입니다. “이런 율법이 있는 줄은 몰랐지? 그러니까 너는 의미 없는 자야.”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문제 출제자가 주님이에요. 주님이 출제했으니까 이 문제는 주님만 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풀 수 없습니다. 그러면 법에 의하면 우리는 저주 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불행해야 돼요. 비현실적인 생각 하지 마세요. 우리는 죽어서 지옥 가야 돼요. 나가도 저주 받고, 들어가도 저주 받고.
이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성령 받아서 범사에 감사합니다. 자기 행복밖에 몰랐던 그들이 놀랍게도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그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지요.
사도는 자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자기는 산 자가 아니라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이니까요. 이제 십자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쓴잔 속에 빠진 사람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은 죽었고, 세상에서 볼 때 나는 죽은 자가 됩니다.
살아 있으면서 죽었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때 그 예수가 십자가를 내세우면서 사도 바울 안에 살아 있는 거예요.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전도하지 말라. 전도가 죄다.’라고 하면서 전도하지요.
‘선교하는 것이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주님이 이발사라면, 어떤 사람이 앉아서 “뒤쪽과 옆쪽만 약간 자르고 나머지는 손대지 마세요.”라고 주문하고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거울을 보니까 대머리가 되어 있어요.
“왜 머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이발소는 당신을 위한 곳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곳입니다. 당신은 오늘 주님의 첫 손님입니다.” 세상에 이런 특별한 이발소가 있다는 것을 알리세요. 그리고 기존의 이발소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가도록 하는 이발소인 것을 알려주세요.
이것이 지속(크로노스) 속에 떨어지는 때(카이로서)죠. 이 때를 쉽게 표현하면, 성탄절에 무대 장치를 하면서 금가루, 은가루를 뿌립니다. 우리가 하나의 금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것은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미래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 미래는 크로노스입니다. 지속적인 시간입니다. 과거 – 현재 – 미래.
그런데 전도서 3장을 보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여기에 ‘때’가 나오지요. 전부 금가루, 은가루입니다. 죽는 것도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어 죽는 겁니다. 그러니 죽을 때를 겁내지 마세요. 미래에 관한 것은 때를 주관하시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들이 모여서 오늘 하루의 삶을 사는 거예요. 어찌 보면 하루살이죠. 하루하루 사는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따져서 현재의 행동을 망치지 말고,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의 모든 인생은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됩니다.
참새가 창고에 먹을 것을 모아두지 않아도 사는 것은 참새의 생명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이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도 인간이 아닌 들풀이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다.’ 전쟁할 때가 있다는 말은, ‘평화로우니까 전쟁은 없겠지.’ 이런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랄 것이 아니고, 평화로우면 평화로운 대로 즐기고 전쟁이 나서 죽으면 죽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선택 잘해서 지금의 나를 미래까지 끌고 가려 하니까 자연스럽지 않고 억지가 돼요. 그리고 이 억지에 기도를 가미합니다. 그리고는 기도 응답을 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기도 응답이 되면 신자고, 기도 응답이 안 되면 신자 아니라고 스스로 또 법을 만듭니다. 이 법이 문제인 것은 자기에게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겁니다. 이것이 모여서 개인구원이 되고. 이것은 쓴잔이 빠져 있어요. 제자들은 철없는 말을 해야 합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뭡니까? 주님 섬겼으니까 나도 한 자리 차지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적폐입니다. 죽을 때 자신이 쌓아놓은 것이 아까워서 어떻게 죽을지 궁금합니다. 예수님 답변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지요. ‘너는 너를 모른다.’는 것이지요. 나는 나를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주님이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어떤 일이 주어져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선택할 사항이 아니기에 그냥 순응해야지요. 한병철씨의 책 [심리 정치]를 보면 이 세상을 순응 사회라고 했어요. 풍조에 고개 숙이고 맞춰주려고 애쓰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랩을 노래할 때는 진지해집니다. 수학 시험 칠 때보다 더 진지해요.
왜냐? 이미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 세대에 순응되어 있어요. 인간은 이 세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풍조는 ‘율법 지켜서 구원 받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빠져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는 빠져나왔습니다. 또 세리가 빠져나왔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도 빠져나왔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도발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세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주님에 의해서 튕겨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사단의 힘은 대단합니다. 이 사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습니다. 따라서 내 이름과 공로는 절대 내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서 주님이 빼내셨기에 그 이후에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자랑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이 세대에 순응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성도는 압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나의 결심, 의지, 노력, 믿음이 얼마나 이 땅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무능을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내 자신을 아는 거예요.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전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나는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알 때 이것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잖아요. 이 말 보다 더 자유로운 말이 없어요. 이런 상태에 있으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요. 잠시 후 사형집행 당할 죄수라 할지라도 이 복음을 알게 되면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허락하셔서 당하는 일을 우리는 내 장기로 전환시켰습니다. 나는 이러니까 의인이고, 나는 이러니까 가치 있고, 이러니까 살 이유가 있다고 얼마나 대세에 따랐습니까. 주여,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주께서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 쓴잔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9. 21. 08:56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