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여름수련회 [열왕기상] (총9강) - 재정리
201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열왕기상] 7강, 엄마 없는 아들
강의 : 이근호 목사, 녹취 : 정석훈 목사
인간은 왜 이 땅에 있는가?
만약에 이 세상에서 사람을 다 사람을 치워버리면, 산과 들, 짐승 등등, 이런 것만 남게 되겠죠. 일단 사람은 없는데, 마치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만들기 직전처럼 말이죠. 처음에는 사람이 없다가 6일째 만들었는데, 그 6일 아침까지 사람은 없고 다른 모든 것은 다 갖추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6일 마지막에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은 무슨 의미로 거기에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인간은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니까, 자기가 주인공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인간을 모두 다 치워버리게 되면, 그런데도 땅이 있고 하늘이 있다고 하면, 즉 인간이 없음에 불구하고 새들은 창공을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우리 인간은 이 땅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면 손님과도 같다는 말인데,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원리를 자기 마음대로 할 자격도 없고, 또한 그런 능력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질문을 다시 하면, "그러면 모든 인간은 누구로부터 규제를 받고 지시를 받는가?"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정리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내 즐거움대로 산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내가 태어났으니 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라는 식이 되어버리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빠져도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있는가?" 라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지랖이 넓은 선지자의 등장 !!
우리 인간들은 여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사는데, 그렇다면 그 원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구약의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민족은 그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주 조용하다는 말이죠.
우리가 열왕기상을 보면 이스라엘은 싸움이 일어나면서 아주 복잡한데, 하지만 그 시대의 이방민족에게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들에게 이런 복잡한 싸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냥 고요하게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데, "이 세상이 원래 그렇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만큼 이방민족은 자기들이 사는 이유와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데, 제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왜 있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겁니다. 물론 그냥 가만히 있다고 해서 알려지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선지자' 라는 말이죠.
그런데 선지자의 등장은 상당히 불길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잘 살고 있는데 선지자들의 등장함으로서, 그게 말썽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말이죠. 인간들끼리 잘하고 있는데 주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오지랖이 넓은 짓이 아니냐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사는 것이 목적인데, 그러니 좀 힘이 들어도 살아있으면 그게 정상이라고 여기니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이 전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래서 선지자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라고 외칩니다. 자기들이 보기에는 불길한 어떤 인물이 나타나서 오지랖을 떨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선지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엄마가 있는 자식과 엄마가 없는 자식 !!
그래서 열왕기상에서 선지자들이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사는 이유가 상당히 엉뚱하게 나타나는데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엄마가 있는 사람과 엄마가 없는 사람으로 구분을 하신다는 겁니다. 즉 "엄마가 없는데, 아들이 생겼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런 선지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터무니없이 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기존의 이 세상은 엄마와 아빠로부터 줄지어 나오는 자들로서 채워놓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너무 더럽고 역겹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엄마가 없는데 태어난 자식으로 이 세상을 물갈이하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다는 겁니다.
물갈이를 하겠다 !!
그러면 이게 왜 터무니없고 불길합니까? 그것은 기존의 인간질서와 토대자체를 제거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란 겁니다. 즉 엄마가 있는 사람을 엄마가 없는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기존의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열왕기상 15장에 나오는데, 1과 2절입니다.
(왕상 15: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제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왕상 15:2) 예루살렘에서 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여기서 제가 첫째 시간에 설명한 그림이 생각나야 하는데,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왕들이 이렇게 있고, 그리고 그 가운데는 선지자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성경을 보면 짜증이 나는데, "매일같이 바뀌는 왕들이 왜 이렇게 자꾸만 나오지? 왕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시는가? 에이, 몰라. 그냥 넘어가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2절에서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라고 하면서 엄마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왜 나오느냐는 말이죠. 여기 뿐만이 아니라 열왕기상 14장을 보면, 21절입니다.
(왕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엄마가 있는 자식은 문제가 심각해 !!
여기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라고 하는데, 왜 엄마 이야기를, 굳이 엄마의 이름을 왜 소개할까요? 여러분은 누구와 소개팅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면 이렇게 엄마 이야기합니까? 그렇지가 않지요? 그런데도 이렇게 자꾸만 엄마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엄마가 있는 자식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아니 엄마도 없이 어떻게 자식이 나옵니까?" 라고 하지 싶은데, 그러니 선지자들이 한 오지랖을 떤다는 겁니다.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소리를 해야 어떻게 들어주든지 말든지 하는데, 전혀 납득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선지자는 자기의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대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엄마가 없는 아들이 등장한다" 라는 것을 사무엘하 7장 14절에 근거해서 제시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서 고한 내용인데 말이죠.
(삼하 7: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나는 내 아들과 가문을 만들어서, 거기에 있겠다 !!
여기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직접 아버지가 되고, 그는 자기 아들이 되는 가문을 만들텐데, 그 가문이 내가 기거하는 곳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집을 지어준다고 해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자리를 잡고 거하시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기 거주지를 만들겠다고 하신다는 말이죠. 즉 하나님은 '자기 아들' 이라는 인격 속에 인격으로 들어오시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지 엄마가 없는 아들이 등장했거든, 그 속에 너희들이 보고 싶어하는 하나님이 계심을 것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그렇게 말하는데, 아무튼 선지자는 참으로 이상하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의 존재 이유를, 즉 '있음'을 그만 바꾸어 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목사님, 나도 엄마가 없이 태어나고 싶어요" 라고 하고 싶지 싶은데 말이죠. 만약에 엄마가 없는 가문이 하나님의 가문, 즉 천국에 가는 가문이라고 하면, 그러면 기존의 있는 엄마는 취소하고, 엄마가 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예수님, 두 번 태어나면 됩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엄마가 없이 태어나는 날이 오는데,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게 된다면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는 뭐라고 합니까? "늙었는데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즉 자신의 태어난 과거를 근거로 해서 "두 번 태어나면 됩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전히 엄마를 고집하고 엄마에게 기대를 건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백 번을 태어나도 안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다" 라고 하시는데, 엄마를 육에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태어나는데 있어서 어떤 방법으로 태어나야 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자 니고데모는 바짝 욕심이 났는데, 하늘나라는 가고 싶은데 이제 그 방법은 예수님이 알려주셨고, 그러니 이제는 방법을 자기가 실천에 옮기면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성령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만 니고데모의 기대를 완전히 좌절시켜 버리신다는 겁니다.
바람은 그 흔적으로만 알뿐 !!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바람은 임의로 부는데, 그래서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렇다" 라고, 즉 "바람이 불면 태어난다" 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우발성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바람은 사람이 고대한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닌데, 바람을 기다린다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단만 바람이 지나간 뒷자리, 그 흔적을 통해서 바람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뿐이라는 말이죠. 바람은 요청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면서 그 흔적을 남기는데, 그 흔적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새로운 피조물이, 즉 영적 사람이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관이 아닌데, 우리 손에서 완전히 떠나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니고데모는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것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신 것은, "이것은 알고 모르는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너는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른다" 라는 겁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양자 물리학의 '이중슬릿' 실험 !!
이것을 보다 더 쉽게 설명을 해드리기 위해서,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이중슬릿실험'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쉽게 한다고 해놓고는 이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좀 그러한데, 듣는 사람의 기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ㅋㅋ).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네모가 난 구멍을 두 개 내고 거기에 전자총으로 쏘게 되면, 그 결과가 뒤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구분하는 실험으로서, 그렇게 빛을 이중슬릿 실험장치에 통과시키면, 그게 파동이냐 입자이냐에 따라서 그 결과 값이 달라진다는 말이죠.
파동은 회절과 간섭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따라서 파동이 양쪽 슬릿을 빠져 나오게 되면 회절과 간섭이 작용하고, 뒤쪽 스크린에 간섭무늬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반면 입자는 이러한 특성이 없어서 간섭무늬가 나타나지 않는데, 그래서 이렇게 이 두 가지의 차이를 통해서 실험물질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구분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빛이 파동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면 파동이 나오고, 또한 입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입자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입자와 파동이라는 괴물이 이미 인간이 무엇을 측정하려고 하는지를 눈치챘다는 것인데, 즉 "무슨 결과를 원하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과학자의 관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전혀 인격체도 아닌 입자의 관찰로 그 주도권이 되돌아간 식이란 겁니다.
그러니 입자라는 그 실체가 관찰자인 우리 인간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를 사전에 미리 다 간파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서비스를 해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닌데, 오히려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입자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입자가 평소에 우리 인간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실험하는 것이 이 정도 밖에 안 되지?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해줄게" 라는 것인데, 그러니 또 다른 괴물이 있어서 인간을 마치 아기 다루듯이 하고 있으니, 과학으로 시작했다가 그야말로 귀신을 만난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죽은 물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월등한 괴물을 마주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웅장한 자연의 세계라는 말이죠.
생명나무에 선악과가 달리면, 그게 천국이겠는가?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인간이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는,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는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했기에, 그 기대하는 바에 따라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진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요리조리 모두 피해갑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의 기대대로 호응을 해준다면, 그 구원된 상태 안에는 그만 우리 공로가 섞이게 된다는 겁니다. 즉 "간절히 바랐더니 그대로 되었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천국은 자기의 간절한 바람이 그만 포함되고 마는데, 그러면 영의 나라에 육이 섞이게 되고, 생명나무의 나라에 그만 선악과 열매가 몇 개 달린 셈이 되고 말겠지요. 하지만 천국은 철저하게 생명나무만 있는 곳인데, 그러니 선악과의 요소는 일절 없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아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는데, 인간을 배제시켜버렸다는 말이죠. 그 배제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주는 선악적인 재주밖에 없는데, 선악을 구분해서 바르게 사는 재주, 그 이외에는 달리 부릴 재주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협상에 나서려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과 협상해서 넣어주는 곳이 아닌데, 인간과 협상하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갈아서 엎어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고깃집에서 불판을 갈듯이 말이죠. 물론 흘러오는 육에서 단절된 모든 인간은 모으겠지만, 육과 연결된 자는 결코 받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할례, 세례, 십자가의 죽으심 !!
이처럼 육과 끊어진 것을 '할례' 라고 하고, 이 할례의 완성을 골로새서 2장에서는 '세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 얼마나 인간적인 육을 끊어버리고 싶어서 할례의 완성인 세례를 주셨을까요? 우리가 그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례를 두고 골로새서 2장에서 '십자가의 죽으심'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니 "네가 들어오면 내가 죽을 게"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네가 들어오는 꼴을 도저히 봐주지 못하겠다. 차라리 내가 죽겠다. 내가 죽더라도 네가 너희 엄마와 아빠에게서 받은 DNA를 갖고 들어오는 꼴은 볼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차라리 내 죽음으로 바꾸고 만다"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의미라는 말이죠.
지금 장난 치냐?
그러니 육이 있는 사람은, 즉 선악과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반드시 어떻게 반응을 하는고 하니까, "참으로 어리석구나. 지혜롭지 못하게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서 천국에 간다는 것에 대해서, "지금 장난 치냐?" 라고 하면서 비웃는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지혜가 있고 이성이 있고 신을 사모하는 경건함이 있는데, 왜 그러한 것들은 값으로 쳐주지 않는가? 왜 우리가 행한 것은 모두 거부하고, 예수님이 행한 것만 우리에게 적용시켜 우리를 천국에 데려고 하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요소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으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는데, 즉 십자가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삽입시키는데, 그렇게 해서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준다는 말이죠.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이 곧 성전이고, 이 일을 하는 자들이 바로 레위인들이라는 겁니다. 남쪽 나라에는 레위인이 있고 북쪽 나라에는 레위인이 없는데, 그래서 북쪽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면 남쪽 유다 나라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레위인이 있다고 하면, 그런 나라는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있고 레위인이 있고 성전이 있다고 해서,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물론 성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성전 주변의 나라들은 멀쩡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강도는, 철저히 강도여야 !!
그래서 십자가 옆에는 멀쩡한 인간이 오면 안 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자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직업이라면 좀 그렇지만, 그는 강도였는데, 성경은 여기서 일부러 강도라는 직업을 강조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강도라고 해도 오늘밤에 낙원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강도는 그 시대에서 순위가 매우 낮아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 가도 강도는 안 되는데, 구원받을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강도가 구원을 받는데 가장 적절하다는 말이죠. 그 육의 어떤 요소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강도질을 하자는 게 아닌데,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강도질을 2번을 하고 옆 사람이 10번을 했으면, "나는 저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데, 강도에도 수준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식이 있는 강도, 무식한 강도, 그런 것은 없어요. 강도짓을 몇 번을 하든 철저한 강도여야 한다는 말이죠.
엄마의 질이 더러워요 !!
지금 사람을 갈아치우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문제를 삼는 것은, "이 인간이 어디서 나오는가?" 라고 하는 인간의 출처인데, 그것은 바로 "엄마의 질이 더러워서 그렇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엄마를 언급하는 것은, 그런 엄마로 인해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가 똑같이 문제아라는 겁니다. 그러니 유다 나라도 희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북쪽 나라의 엄마는 왜 언급하지를 않습니까? 그렇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너는 죄인이야" 라는 말은, "너는 구원을 받았어" 라는 것인데, 이것을 부정어법이라고 했지요? 이렇게 부정어법, 즉 반대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너도 그것을 나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지? 그렇지?" 라는 겁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론하는 게 믿음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런 믿음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서 나온 믿음은 받지 않는데, 성령께서 믿음을 우리에게 택배로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보면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구성하신 믿음, 즉 주님의 믿음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모자람이 없는 5,000명의 양식 !!
그런 주님의 믿음을 분양해 주시는데, 택한 백성들에게는 한도 끝도 없이 제공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곧 '오병이어' 사건인데, 5,000명을 먹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일 5,015명이라고 하면 양식이 모자랍니까? 그게 아닌데, "예수님께서 베풀어주는 영생에 대해서는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가 누구와 함께 있는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 네 인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모두가 다 먹고 남도록 주시는데, 그 남은 떡이 12광주리인데, 그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 떡을 먹었던 사람들의 호칭이 '12광주리' 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12지파, 즉 "앞으로 이스라엘은 왕이 오셔서 백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마 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 14: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마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먼저 왕부터 엄마가 없이 태어난다 !!
그러니 자기 쪽에서 백성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데, 우선 왕부터 와야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순서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부터 엄마가 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왕부터 엄마가 없이 태어났다고 하면, 그 백성은 그 왕 때문에 저절로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 왕의 그 백성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신앙은 "내가 어떠한가?"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왕이 어떠한가?"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 그런 자가 곧 성도라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반드시 "나는 아닙니다" 라는 것이 동반되는데, 즉 "나는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고백토록 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하루하루를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가게에 손님이 몰려오더라도 다음과 같이 나와야 하는데,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이런 일을 벌이셨는데, 임의로 보냈습니다. 오늘 손님이 100명이 왔는데,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께서 임의로 보냈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소문을 듣고 왔다는 말을 믿지 마세요. 그게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아시죠? 그 다음부터는 얼마든지 오지 않을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 우연히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다음날도 100명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한 명도 오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일의 문제라는 겁니다.
성령은, 마지막에 나타난 복음 네트워크 !!
그러니 매사에 주님과 함께 성령의 바람 속에서 살아가시면 되는데, 말은 참 멋있는데 말이죠. 모든 것이 다 성령의 바람으로 살아가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프뉴마(성령)' 라는 바람이 응집되어있다는 겁니다. 그 성령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복음 네트워크라는 말이죠.
그런 가운데서 지상에 나타난 선지자의 모습은, 그들은 갈아치우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원수가 되고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불길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 속에 숨어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이고, 이 세상은 그 숨어있는 비밀과 역사를 주장하는 인간이 서로 다투고 있는 형국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역사 안에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은 인간에게 노출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노출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비밀이란 말이죠. 이것을 뽑아내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 와서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자녀는 엄마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팔자인데, 자기가 아무리 개과천선을 해봐야 엄마가 악하기에 자기도 역시 악하다는 말이죠.
열왕기를 보면 나라꼴이 여자에 의해서 그만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데,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세벨에 의해서, 그리고 남쪽 유다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그만 망쳐버립니다. 여자의 아들이 아닌, 여자가 나서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왕하 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열왕기상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
이제 열왕기상 21장을 봅시다. 여기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이 나오는데, 이 땅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곳에 포도원이 생기고 거기서 나봇이 포도농사를 짓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이 이방나라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이곳은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거기에 포도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나봇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런데 나봇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 포도원과 자기 자신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여호와의 뜻과 약속과 법칙을 함유해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없는데서 포도원이 생겼고 없는데서 나봇 자신이 생겼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이세벨의 악함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인데, 즉 일종의 선지자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즉 "나는 없는데 성령의 바람으로 생겼다. 그래서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받게 되었다. 모든 교회가 싫어하는 십자가를 받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되면 주변에 숨겨진 엄마의 육에서 나온 자식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역이라고 시비를 걸고 나오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복음이 자기의 개인적인 구원용이 아니라, 자기 주변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노출시키는, 그런 선지자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나봇은 거절을 합니다. 바로 그때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데, 나봇은 이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팔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아합 왕이 찔찔 짜면서 누구를 찾아가느냐 하면, 자신의 아내인 이세벨에게 간다는 말이죠.
그러자 수심이 가득한 아합 왕을 본 이세벨이 그 이유를 물으니까, 왕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어떤 포도원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팔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 주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기에 율법에 의해서 팔지 못한다고 하더라" 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은 왕이잖아 !!
그러자 이세벨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당신이 뭐요? 왕이잖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왕이라는 것은 비어있는 권력의 공백을 자신의 권력으로 꽉 메우는데, 그래서 보이지 않는 중심이 아니라 보이는 자기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즉 "내가 왕이고 대통령이니 나를 쳐다봐야 안정이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런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감히 시비를 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바보처럼 나봇이 어떻게 나옵니까? 왕이 포도원을 그냥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 팔라고 하는데도, 여호와를 거론하면서 포도원을 팔 수 없다고 하면서 고집을 부린다는 겁니다. 감히 왕에게 말이죠.
그래서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나봇이 왕을 저주하였다는 이유를 들어서 돌로 쳐죽이는데, 완전히 막장 드라마인데 말이죠.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만다는 겁니다. 이것이 정치이고 현실이고, 이 세상을 운영하는 힘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이스라엘을 대변해주는 속성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그러면 지금 나봇이 민중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북 이스라엘에서 지하조직체를 구성해서 투쟁을 벌입니까? 전혀 그것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촛불집회를 벌인 것도 아니고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나봇의 세상적인 잘못이 무엇인고 하니, 단지 그가 하나님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고 하는 것,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봇은 왕이 포도원을 팔라고 할 때, 여기 3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의 주변이 그런 나봇을 그냥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데, 그만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왕상 21: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왕상 21:2)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왕상 21: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이 세상 나라에서는 인간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존재할 이유가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 유일한 이유가 되고 마는데, 달리 다른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따라서 누군가가 죽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처럼 죽기는 왜 죽어? 악착같이 살아야지" 라고 말이죠.
그러나 나봇의 경우에 자기 자신이 산다는 것은, 그게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인데,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대로, 율법대로, 언약대로 포도원을 얻었다는 겁니다. 즉 자기 토대는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자신의 토대라는 말이죠. 나봇은 단순 무식하게 그것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무엇을 따지고 말고 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나봇을 벗기고, 또한 이세벨을 벗기게 되면, 그 존재를 지탱하는 바탕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색깔입니다. 나봇은 재벌이 아닌데, 평범한 보통 백성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그 토대가 하나는 육에 속했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아들인데, 즉 모든 것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졌다는 겁니다. "우리 엄마가 그랬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제가 이렇게 엄마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 아마 여러분은 "나봇이 과연 엄마가 없이 태어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당연히 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 내막은 상당히 함축이 되어있는데, 일단 여기에서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6절을 보겠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 4절에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는 것은, "남자가 없이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법칙대로 아들이 태어난 것이 아닌데, 물갈이를 하실 분이 여자에게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것은 사무엘하 7장 1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여자가 아니라 특수한 여자를 통해서 이 땅에 나타났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복음이고 구원이라는 말이죠.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엄마가 없는 엘리야와 세례요한 !!
우리가 이제 살펴볼 엘리야의 경우에는,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엄마가 없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물론 엄마는 있기는 있었겠지만, 그게 성경에는 나타나지를 않아요. 이 엘리야가 엄마가 없는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그 특징을 보여주는 근거가 신약에 보면 나와있는데,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겁니다.
이 세례요한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에게서 태어나게 돠는데, 성령의 예고에 의해서 말이죠. 남자가 없이 태어난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나는데, 그러니 그 노선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장차 올 하나님의 아들부터 해서 그 노선이 거꾸로 구약적으로 흘러가게 되면, 이 세례요한이 마지막에 오게 될 엘리야라는 겁니다.
그게 구약 말라기서 4장 5절에 나오는데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라고 말이죠. 또한 마태복음 11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고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라기서의 예언이 성취가 된다는 말이죠.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선지자는, 엄마가 없이 태어난 자의 모든 양상을 !!
그렇다면 이 엘리야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엘리야를 바로 보면 잘 모르고, 엘리야처럼 오는 제2의 엘리야, 즉 세례요한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죠. 이 세례요한의 호적을 조사해보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인데,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즉 천사의 예고를 통해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례요한의 역할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게 아니라, 오실 메시야를, 그분에 앞서서 미리 그 길을 예비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엘리야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엘리야 안에게 함유해서 응축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들 헤쳐 모여라!" 라고 하면, 엘리야의 치마폭 속으로 다들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엄마가 없이 이 땅에 태어난 자의 모든 양상을 다 보여준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선지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는 이 땅에서는 '붕' 떠있는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선지자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열왕기상 11장에 1절에서 4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왕상 11: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왕상 11:3)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왕상 11:4)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한도 끝도 없는 솔로몬의 사랑 !!
이제부터는 나라가 그만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솔로몬 때부터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이 어디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표정을 보니까 믿지를 못하겠다는 분위기인데, 마치 "목사님,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 같다는 말이죠(ㅋㅋ).
그건 그렇고, 여기 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솔로몬의 사랑은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3절에서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라고 하는데, 왕비를 빼고 무려 천 명의 여인들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때도 비아그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말이죠(ㅋㅋ).
그런데 그 천 명의 여인들이 그냥 온 것이 아니라 각자가 무엇을 다 달고 왔는데, 과연 무엇을 달고 왔을까요? 각자의 신을 달고 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4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
여기에 보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직접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데,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듯이 말이죠. (녹취 구 - 목사님, 이것이 다윗언약의 핵심이죠?)
이렇게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는 것은,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사랑할 때부터 다윗노선에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나쁜 짓을 했다고 여기지 마시고, 다윗이 안고 있던 속내가(?) 솔로몬 때 와서 드러나는데, 즉 무엇이 다윗의 노선이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물론 솔로몬이 그것을 계산해서 이방 여인들을 사랑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
바로 그 다윗의 노선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들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열왕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엄마가 있는 자들로서, 그래서 망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 엄마들이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데, 5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왕상 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왕상 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왕상 11:8)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어떻게 보면 솔로몬은 정말이지 남자다운데,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종교까지도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자들은 그야말로 남자를 제대로 만났는데, 왕에다가, 미남에다가, 부자에다가, 물론 여자가 너무 많아서 좀 그렇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면 이렇게 다윗과 노선이 다른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질책을 하셨습니까? "내가 분명히 다윗의 가문에서 내 아들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런데 너는 내 아들이 나오지를 않는 노선을 이미 개시했다" 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의 노선은, 그 아들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방 여인으로 인해서 남북이 갈라지고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고 부서지는 와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들이 자기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누구를 핍박합니까? 바로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들이 선지자들이라는 겁니다.
선지자는 연결성이 없어 !!
왕조는 세습이 되지만 선지자는 연결성이 없어요.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지하조직을 구성하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엘리사도 엘리야가 끊어질 때 비로소 등장하는데, 각자가 하나님의 지시의 의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라는 직분은 주님께서 부리실 때까지만 하면 되는데, 제대하라고 하면 제대하면 되고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는 나라를 복구하는데 있어서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데, 그야말로 팔자가 편해요. 물론 핍박은 엄청나게 받고 욕도 바가지로 얻어먹지만, 하지만 그 속마음은 굉장히 편하다는 겁니다. 어차피 망할 세상을 향해서, "이것들아, 망해라" 라고 외치는 것보다 더 편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첫째 강의 때 왕들의 이름을 말씀드렸는데, 인간에게 있어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이게 현실의 전부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가 있다. - 그래서? - 그렇게 있으니 살아야지. - 어떻게 말인가? - 우리끼리 나라를 세워서 잘 살아야지" 라고 하는데, 이것이 전부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현실로 보는데,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이 현실에 깊이가 있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싸움을 하는데, 그들의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실에서 잘 되기 위해서,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고 단합하고 싸우고 한다는 말이죠.
선지자, 그리고 불길한 자연 현상들 !!
이것이 바로 육의 나라인데, 이 육의 나라는 그 어디에도 빈틈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난데없이 불길한 일들이 자꾸만 생기게 하신다는 겁니다. 남쪽과 북쪽 나라에 말이죠. 그렇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선지자는 뒷북을 치듯이 소급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왕이시여,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주신 약속의 땅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라고 말이죠.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나봇의 포도원도 그러한데, 그 포도원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즉 "왕이시여, 포도원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비약속적인 이방신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입니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왕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게 그냥 말로서만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을 동원해서 불길한 징조를 일으키시는데, 그렇게 선지자들의 말에 같이 보조를 맞추어준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것만 하고 이번 시간은 마치겠는데 말이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렇게 평화로운 커다란 원 안에 조그만 검은 점이 생겨서, 이것이 마치 암세포처럼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 하얀 평화로운 나라에서 불길한 점이 생겼다고 하면, 그래서 나라에 가뭄이 들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퍼지면, 그러면 선지자가 튀어나와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것들은 이 검은 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나라는 망해도, 언약은 망하지 않는다 !!
다시 말해서, "나라는 곧 망해도 언약은 망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나라는 망해도,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기어코 이 지상에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체작업에 들어가는데, 즉 판을 바꾸어버립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여러분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이런 징조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라고 외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당신들은 절대로 망하기 전까지는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개과천선을 하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말을 그들이 듣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외친다는 겁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이중슬릿 실험에서 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입자를 관찰하는데, 그런데 도리어 관찰을 받는 입자가 관찰을 하는 물리학자를 관찰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자기 나라를 아무리 잘 가꾸려고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선지자들은 "너희들은 우상을 섬기고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상숭배로 인해서 망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그 어떤 우상숭배에도 끄떡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전혀 차질이 없이 진행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불길한 자연현상과 짝을 맞추어서 말이죠.
그러한 예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데, 1절을 보겠습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와 대가뭄 !!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에 엄청난 가뭄이 들었는데, 그때 무려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3년 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단순히 자연현상의 수준이 아니라, 그것은 선지자의 등장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들이 엘리야가 하는 말을 믿었을 것 같았으면 애초부터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선지자의 말을 듣게 되면 자기들의 존재 토대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불길한 일이 있다는 것, 혹시 오늘밤에 주무시다가 이 근처로는 가지를 마세요. 잘못하면 뜨거워서 화상을 입는 수가 있다는 말이죠(ㅋㅋ). 그렇게 이 세상은 우리 인간들이 함부로 다룰 수 없고 처리할 수 없는 불길한 요소가 있는데, 그런 가운데 이 세상이 지금까지 왔고,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10분만 쉬겠습니다.
2017,9,15 새벽 1시에 다시 정리함. 녹취 구2017,9,15 오후 7시에 또 다시 정리함.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