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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70908b약1장2절(실화)-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170908b약1장2절(실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결합시다. 지옥이란 같은 것의 반복이에요. 동일한 것의 반복. 낯설지 않잖아요. 이미 사람들은 언어로서 자기의 모든 의사를 통일시켜났기 때문에 거기서 독특한 것이 나오게 되면 용납이 안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예수님이 나쁜 짓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잖아요. 강도도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잖아요. 그 사람을 죽인 강도도 살아났지만 예수님은 죽었잖아요. 그리고 누가 죽였습니까? 주동자는 있지만 거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제거할 때 이게 선동이었습니까? 아니면 자발적이었습니까? 자발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면요,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 다니는 거, 아직 교회 다니면서 목숨 부지한 거,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아직까지 이 세상이 너무 순해. 자, 오늘 제목 나옵니다.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뭔가 분명히 예수님께서 위에서 났다 해도 그 말 안 믿었어요. 왜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위에는 여호와 계시는데 니가 왜 그 위에 있었느냐, 이리 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위에 있는 것도 땅에 와버리면 같이 땅이 되되 이게 안 맞는 겁니다. 이질적인 거예요.

이질적이면서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죽음이 발생되는 겁니다. 죽음이. 죽음이 발생되는데 성경은 이 죽음을 사도바울의 복음이나 야고보나 사도들의 역할은 뭐냐, 이 죽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로 바꾸는 거예요. 실화. 실제 있었다. 이걸로 바꿔요. 실화로. 실제로 이게 실화로 되어버리면,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실화가 되어버리면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망상이 돼요. 망상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착각 속에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 어디서 빠져 나왔는가, 이 세상에서 빠져나왔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일부잖아요.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몬 이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은 본인이 살아있는 걸 실화로 봤어요.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을 실화로 봤는데, 실제로 있는 이야기로 봤는데, 성경은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실화로 봄으로 말미암아 “니가 얼마나 망상에 빠졌으면 진짜로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죽여 버렸다. 이 인간들아! 이 하늘의 복수가 이제 시작된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니가 착각에 빠졌으면 죽어야 될 분과 죽지 않아야 될 분을 구분도 못하고 있었다 말이지요. 그러면 나는 여기 살아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야! 아야! 나는 이거 꿈꾸는 거 아니야. 살아있다.” 해도 이게 망상이 되는 거예요.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내 몸은 살아있다. 주사 더 나아주세요. 더 살고 싶어요. 호스 꼽아라. 나는 100살 더 살란다. 이 모든 짓거리가 이게 거짓이 되는 거예요.

거짓이라는 것은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추방시키는 그러한 범주 안에서 못 벗어나는 게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저 우리 애만 잘되면 되고, 우리나라만 잘되면 되고. 이게 전부 다 왜 거짓이 되느냐 하면 실화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실화가 연결이 안 되는 동네에 일방적 주장이기 때문에 이게 망상이 되고 허상이 되는 겁니다.

자, 허상의 특징은 뭐냐 하면 되게 오래간다고 여기지만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임시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여기서 누가 돌아가시면 이 아무개 돌아가면 이 임시, 박 임시, 임시적 조치였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노골적인 것은 박 마네킹, 최 마네킹, 하나의 작은 인형입니다.

그 인형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시한폭탄이 들어가 있어요. 우리 속에. 하늘이 주신 시한폭탄이 들어와 가지고 지금도 착칵! 착칵! 착칵! 심장고동소리가 시한폭탄이에요. 고거 멈추면 끝나는 겁니다. 고거 멈추면 모든 게 다 죽습니다. 왜? 죽음만이 실화기 때문에. 그 실화가 우리 속에 들어있는 유일한 실화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는 것만이 진짜로 실화인데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죽음만이 순수라 했어요. 아까 배웠지요. 순수는 뭐가 순수라고 했습니까? 일체 이물질이 없는 것. 불순물이 없는 게 순수지요. 깨끗한 거 순수지요. 진짜 깨끗한 것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만이 깨끗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의인이 돼요. 깨끗해요. 아까 개가 권사님에게 달려 들었잖아요. 달려 들었을 때 제가 언뜻 생각한 게 있어요. 저게 멋진 예화다 생각했는데. 그걸 한 번 해보겠습니다.

권사님 머리카락이 이렇게 있거든요.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걸 그리스도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내가 만들겠습니다. 이 전체를 투명함으로 십자가 안의 효과, 성령의 효과로 덮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두나(개이름)가 깽깽거리면서 지금 붙들고 있었다고요. 못 들어오거든요. 못 들어온다고요.

이 흩어진 열 두 지파를 하나님이 파견을 합니다. 파견을 해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다른 사람이 이질적인 것을 너희들도 몸소 체험하라는 겁니다. 요 유리판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요 투명함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분명히 십자가 안에 있기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당했잖아요. 실화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아팠고.

우리는 이렇게 투명막이 있으면 달려들어도 할 건데 이걸 없애버리면, 이 개를 마귀로 보면 마귀가 우리를 달려들 때 뭐로 보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마귀가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개처럼. 왕! 왕! 왕! “니 그러다가 죽는다!” “니 굶어죽는다.” “니 우사스럽게 죽는다.” “니가 그러면 외로워서 죽어.” “니가 의지 할 데 없어 죽어!” 모든 것을 마지막 공포, 마지막 두려움, 극단적인 두려움이 뭐냐 하면 “니 그러다가 개망신하다가 죽는다.” 모든 것을 죽음과 연관을 시켜가지고 협박 공갈을 해대는 겁니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목사의 설교나 강의할 때의 자세는 뭐냐, “나, 이거하다 죽을래.” 이리 되어야 돼요. 죽기 위해서 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을 보게 되면 불신자,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불신자들 보게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마귀 좀 쫓아 보내가지고 죽는 것이 안 두렵게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살기는 사는데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상태에서 편안하게 살게 하옵소서. 이런 조로 나오는데 그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주여,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냥 죽게 하옵소서.” 이리 되어야 돼요. 그냥 죽게 하옵소서. 하면 마귀가 떠나는데 요령 부려가지고 사탄을 이기면서 살게 하옵소서. 앞뒤에 붙여가지고 끝은 살게 하옵소서. 자꾸 살려고 하니까 일곱 귀신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어차피 눈 뜨면 지옥이고 눈 감으면 천국인데. 그거 뭐 나중에 눈꺼풀 힘 빠지면 그냥 감으면 돼요. 감는 것도 못해요? 이 눈 내려앉으면 되거든요. 살아가면서 가정문제나 자식문제나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마귀한테 시달리게 되어있어요. 이게 보호막이 없으니까 완전 노출됐잖아요. 지금 공부할 때는 야고보서 공부할 때는 위에서부터 오는 속죄에 사랑에 감사하다 해놓고 나가면 또 어떻게 살꼬. 또 시작된다 말이죠.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는데 인천에 사시는 분인데 “목사님, 지금 목사님 강의를 듣고 있는데 기도를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어요. 함축해서 간단히 하시면 됩니다. 함축해서. 지지리 늘어난 것을 함축해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니 그 다음에 또 오기를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안해야 되는데 자꾸 기도가 되는데 어떡하면 좋습니까?” 자식으로서 기도 안 해야 되는데.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했으니까 자식 기도가 자꾸 나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제가 기도 좀 조작하지 마세요. 기도 조작하지 마시고. 제 취지는 뭐냐, 이걸 질문할 게 아니고 기도라 하는 것은 요런 질문을 그냥 하나님 앞에 내놓는 거예요. 내 놓는 것이지 어떤 결과물을 손에 가지는 게 아니거든요. 기도라 하는 것은 끌어당김이에요. 기도를 정기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 없고요. 기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갑자기. 학교 간 아이가 걱정될 때는.

기도는 끌어당기고 주님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주님의 뜻이 포함된 채로 우리에게 응답으로 제공되는 겁니다. 염전이에요. 염전. 물하고 소금하고 다 끌어 모아 놓고 물을 증발시키면 뭐만 남지요? 천일 소금 남지요. 그걸 되돌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답변하기를, “기도는 의무가 아니고 삶입니다.” 삶이 의무입니까? 살아야겠어! 살아야겠어! 이렇게 삽니까? 그냥 설거지하고 방청소하고 이게 삶이잖아요. 사는 게 곧 기도에요. 하다보면 주께서 순간 순간 물기 빼고 천일염을 우리한테 가끔 줄 때가 있어요. ‘아이고! 이런 사실을 몰랐네.’ ‘아~’ 다시 요런 깨달음. 고게 천일염이에요.

우리를 염전으로 사용해서 우리가 마귀한테 이런 수모, 이런 서러움 다 가지고 와! 다 가지고 와! 쓱~~ 가져와 가지고 그 조치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천일염 빼는 작업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하게 되면 우리한테 뭐냐 하면 기쁨이 오지요. 빠진 게 뭐냐 하면 이거예요. 사소함.

돌아보면 전부 다 사소함 또는 심각하지 않음이에요. 왜 그러냐 사소하지 않고 심각한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큰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을 때는 모든 일이 심각하고 사소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오늘 25분 뒤에 나는 눈 감을란다. 이런 사람한테는 내가 살아왔던 이혼3번하고 11년 동안 노래 안하다가 11년 만에 노래하고 이런 모든 이야기. 요번 주일날 설교에 이런 이야기 나올 거예요. 요새 교인들이 믿기는 언제 믿었습니까? 요새 관심이 나훈아 리사이틀만 관심 있지.

내가 살고자 하는 이 모든 것에서는 심각하고 사소하지 않은 게 되어버려요. 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우쌰 우쌰 자꾸 불을 질러요. 니 살아야지! 살아야지! 자꾸 살아야지! 사는 게 남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사니까 그 다음부터는 기도가 의무가 되어버려요. 기도가 2번 빠졌으니까 내 사는데 지장이 되지 않겠는가, 헌금이 의무가 되어버리고, 성경읽기가 의무화 되고. 예배참석이 의무화 되어버리고.

야고보서 입장에서 보면 예배참석 할 때, “니 11시인데 왜 11시3분에 왜 왔어?” “아이고, 마침 고 때 차가 약간 밀려가지고.” “니는 11시3분에 왔기 때문에 요번 주는 니는 벌 받아야 돼! 매매해야 돼!” 이게 뭐냐 하면 스스로 뭘 만들어요? 내부에서 법을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법을 만들면 문제가 뭐냐 하면 법을 온전히 다 못 지킨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법을 마귀가 만들었거든요. 마귀가 왜 자꾸 법을 만들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갑갑하게 만들어버려요. 왜? 우리는 양적으로 보니까. 착한 일 이만큼. 나쁜 일 이만큼. 양으로 자꾸 생각하다보니까 마귀의 완전 밥이 된 겁니다. 그거 해야지! 그거 해야 착한 일 하지. 나쁜 짓했잖아. 이제 착한 일 2번해야 저게 상쇄되는 거야. 뭐해? 빨리해! 우리는 자꾸 휘둘린다고 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평안도 없고 무거워요. 참 무겁거든요. 거제에 사는 69세 된 노인네가 헬스하다가 90Kg의 역기 들다가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게가 90Kg가 넘어요. 우리는 깔려죽습니다. 마귀가 90에다가 또 90을 추가해요. 들 수 있다! 들 수 있다! 들잖아요. 그러면 하나 더 추가합니다. 270Kg들어야 돼요.

그러면 어디서 문제입니까? 우리가 실화가 아닌데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의 실화인지 알고 마귀가 준 망상으로서의 마치 영원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야고보서는 그걸 짧은 순간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짧게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이 준 성령의 기능이 중요하지, 내 존재가 중요하지 않아요. 가장 좋은 것은 어디서 온다 했어요? 위에서 오잖아요. 우리는 고만, 고만한 것들끼리 너무 많이 비교를 했어요. 너무 많은 비교를 했어요.

그래서 그 기도 질문한 사람에게 이야기했어요. 잔느 귀용이라는 중세에 유명한 여자 분이 있어요. 경건한 책을 많이 해가지고 교회가 너무나 실망스러우니까 영적 서적이 많이 팔려요. 허운석선교사도 브라질 선교사도 아마존에서 그 책 많이 읽어가지고 저한테 권하고 저도 그 책 읽어봤는데. 어떤 사람이 그 잔느 귀용의 책을 봤는데 어떻게 읽을까요, 도움 될까요? 하길래 도움 된다고 이야기하고 다만 그게 모델이 아니고 본인 사는 게 모델입니다.

자꾸 남 비교한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나는 더 살고 싶다는 하나의 발산의 표현이에요. 더 살고 싶은 표현입니다. 왜 살고 싶다고 하냐면 모델을 자꾸 만들거든요. 그 모델은 어디서 오겠어요? 괜찮아 보이는 곳에서 이미 봤기 때문에 온다 이 말이지요.

주께서는 직접 나를 만드는데 우리는 모델을 딴 데서 찾고 있어요. 딴 데서. 그럼 주님이 만드신 인생과 내가 원하는 모델과 모델사이에 격차가 나지요. 격차가 나게 되면 나오는 것은 불평과 원망과 불만밖에 더 나오겠어요. why me rod? 이런 거 있잖아요. 왜 하필이면 저에게? 주께서 친히 만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내가 만든 모델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늘 주님 앞에 불평하면 그것은 데살로니전서5장16절 성령 안에서 범사 감사하라는 말이 어떻게 됩니까? 감사하라는 말이 날아가 버려요. 감사 대신 불평을. 고마움 대신 원망을. 프란체스카 기도와 반대가 되어버렸어요.

전부 다 뭐냐 하면 나를 지키기 위한 의무 입장에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왜 자꾸 의무를 만드느냐 하면 그래야 내 속에서 양으로 볼 때 착한 일이 늘어나게 되면 늘어난 만큼 내가 어떤 안전빵인 줄 알고 이제는 어지간해도 벌 안 받는 줄 알고 그러한 양적 계산이 자꾸 자유하고 있거든요. 그거 허구입니다.

야고보서1장3절 봅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믿음에 시련이 있지요. 믿음에 시련이. 이렇게 서론 했으니까 이제 본론 나오면 알겠지요. 믿음에는 반드시 뭐가 따른다? 시련이 따른다.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어요.

왜 믿음이 시련이 따르느냐 하면 이 믿음이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잖아요. 예수님이 시련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 끝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믿는 자에게 시련을 주는 거예요. 이 세상 끝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시련이 오거든요. 믿음의 시련이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오히려 더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야고보가 지금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뻐하라는 율법이 아니고 “아마 기뻐하게 될 걸.” 이렇게 해석하면 여러분이 제일 편하게 해석하신 거예요.

너희들에게는 성령의 은사가 있기 때문에 위에 것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 특이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니는 좀 이상해. 미친 거 아니야? 그런 소리 들을 거야. 그럴 때 어떻게 하라고요? 벌벌 떨지 말고 조마, 조마 하지 말고 도리어 뭐하라? 기뻐하라 이 말이죠.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이런 식으로 튕겨줘라 말이에요.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늘에서 떨어진 대게인데 맛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저 쪽에서 “니는 어떻게 맛을 아는데?” “나도 몰랐지. 위에서 주니까 아는 거지.” “어떻게 주는데?” 열 두 지파한테는 반드시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게 되어 있어요. 야곱의 자식들에게는 야곱에게 준 복을 주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야곱이거든요. 인자가 돼요. 인자. 예수님이 야곱의 완성이잖아요. 언약의. 예수님이 야곱의 언약이니까. 자기 백성에게 열 두 지파에게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당연히 주지요. 야곱에게 일어난 그 사건을 완성된 단계에서 그들에게 할당을 해버린다는 거예요.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할당받은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냥 촌에서 농사짓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의 법률사무소라 해가지고 전화 와가지고 “혹시 어떤 할머니 알고 계십니까?” “그 할머니 이름은 들었는데요.” “할머니께서 당신을...주민등록증 한 번 대보세요.” “아, 그래요.” “당신을 벌써 양자로 삼아가지고.” “아~ 그 할머니. 그 할머니한테 내가 지난 5년 동안 옆집에 살면서 돌봐줬습니다.” “그 할머니가 자식이 없어가지고 할머니 부동산이 한 7채에다가 주식 한20억 되는데 자식도 없고 조카도 없고 아무도 없어가지고 양자해가지고 당신한테 모든 것을 할당했습니다.” 그 할당이 위에서 주신 할당이에요. 예를 들면.

우리는 열 두 지파 될 사람도 없어요. 그냥 일상생활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통보해서 이미 결정했대요. 합격을 했대요. 합격을 하고 통지서를 보낸 거예요. 그 통지서 보냈는데 예수님이 당했던, 받았던 완성의 통지서기 때문에 우리 앞에 오게 되면 주변에서 시련이 우리한테 오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한다는 이것 때문에. 가족끼리도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끼리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시련이 온다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라? 슬퍼하라는 말입니까? 기뻐하라는 말입니까? 기뻐하라 이 말입니다. 기뻐하라. 그럼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 빨리 이 땅에서 죽이던지 살리던지 빼내주세요. 하지만 아니야! 니가 시련에 인내를 만들어서 해야 돼요. 왜?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열 두 지파의 이스라엘의 기능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이렇게 표현하면 돼요. 미답. 미답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아직까지 디디지 않은 미지의 땅. 미답의 땅하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구원받고 난 뒤에 열 두 지파가 이동하지요. 이동 할 때 그게 미답의 지역이에요. 미답의 지역. 처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이스라엘이 어떤 개인적으로 간다면 미답이 아닙니다. 평소에 다 알던 그 흙먼지 나는 광야요, 그냥 산야고 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면서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해가 갑자기 멈추고 난리도 아니지요. 전쟁이 일어날 때 햇불과 항아리가지고 이기고, 낯선 현상들이 일어나지요. 이게 뭐냐 하면 땅을 새로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쟁기에요. 이스라엘이 그냥 민중이라면 그 하나 섞이나 마나 그렇고 그런 세상이에요.

그 세상은 그걸 환상으로 보지 못하고 그냥 옛날 그대로 이게 진짜 현실이라고 볼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동행하사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이방나라 가게 함으로서 그 가면서 만난 나라가 모압, 압몬, 블레셋 그런 나라잖아요. 그런 나라가 생소한 경험하는 거예요.

처음에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분리될 때 애굽에서는 상상도 못한 경험을 했습니다. 온 나라의 맏이가 다 죽어버려요. 맏이가 죽는다는 것은 대가 끊기는 겁니다. 대가 끊긴다는 것은 인간의 육은 아무 무가치하다는 뜻이에요. 왜 그 부모들이 맏이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을 할까요? 맏이에 대해서 왜 애착을 하느냐 하면 그 맏이가 아버지를 대표하는 겁니다. 나는 죽어도 나는 죽지 않았다. 그게 맏이가 있을 때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맏이가 없어버리면 나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리 되겠지요. 맏이라는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신을 믿었잖아요. 신을 믿는데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물로 맏이를 삼았습니다. 이방나라도 마찬가지에요. 신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신이 안 살아있으면 우리를 보호 못한다고 본 겁니다.

제사지낼 때 맏딸이 드리는 게 좋겠어요? 맏이가 드리는 게 좋겠어요? 맏딸은 착실하게 아버지 모시고 맏이는 어디 갔는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소식도 없지마는 아버지는 누굴 기다립니까? 안 믿는 사람 같으면. 맏딸 니가 제사 드려라. 하겠습니까? 빨리 맏이 찾아와가지고 오라 합니다. 왜? 나 죽으면 누가 제사를 드리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 이 맏이라 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으면서도 안 죽었다. 라는 유일한 흔적이 둘째 셋째가 아니고 맏이에요. 그런데 그 맏이를 죽였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전부 다. 이건 사람의 목가지 위를 자른 거나 똑같아요. 목가지 자르니까 인간이 아니지요. 없으니까. 처음부터 니가 인간들이 아니야! 환상이었고 꿈이었다 말이죠.

그럼 맏이를 그냥 꽂아놓으면 어떻습니까? 꽂아놓으면. 이게 실화지요. 그래서 로마서8장에 보면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든 믿는 자의 맏아들이 되게 함이라. 그럼 우리는 뭐만 제공하면 돼요? 우리 얼굴 제공하지 말고 우리 몸체만 제공하고 맏이 부위는 남겨두고, 맏이 부위는 누굴 꽂아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로 꽂아 놓아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이런 소리하니까 세상에서는 이질적이어서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 언어가 한국 언어지만 못 알아들어요. 이질적인데. 그러니까 뒤에서 수근, 수근 할 때 그게 시련이에요.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지금 믿었다. 데려간다. 아닙니다.

남겨둔 이유는 이 땅에서 진리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고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게 하고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아래의 것은 버리고 위에 것을 마음 두고 살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거기에 야고보서가 필요하지요.

그 다음에 4절 봅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방금 이야기한 거고요. 이미 하나의 통째로 들어가 있으니까. 아까 권사님 그림으로 그렸었지요. 투명막으로 그리고 개가 달려들었잖아요. 개가 달려들 때 시련이 뭐냐 하면 시련은 있어도 실천은 없습니다. 아무리 달려들어도 주님께서 주안에 있는 사람 같으면 결국은 위에서 오는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바라보게 해요. 마지막에는. 결국은 십자가 바라보게 합니다.

“주여, 십자가가 먼저 왔잖아요. 제가 믿은 게 아니잖아요. 십자가가 먼저 왔잖아요.” 지난 수요일날 처음 설교할 때 이렇게 했지요. 자꾸 우리 쪽에서 갔다 댈 생각하지 마라. 우리 것은 안 받고 주께서 찾아와서 쪼갠다 했잖아요. 쪼갤 때 우리는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몰라요.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저는 뇌종양 같다고 했지요.

안에 쪼개보면 “이런 게 있었네.” 그게 하나의 시그널, 신호를 자꾸 외부에 보내니까 내가 하는 뜻대로 안되고 내 뜻대로 뭐든지 안 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돼요. 뭐든지. 안 되는 그것이 시련이다 이 말이에요. 안 되는 그것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에요. 내 뜻대로 해보세요. 우리는 세상적 사람 벌써 됐어요. 안 그래도 세상 사람이지만.

5절에 보세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는데 생각해 보세요. 지혜가 아쉬워하는 사람 그 자체가 이미 성도입니다. 돈이 아쉽지 지혜가 아쉽습니까? 딱 깨놓고 이야기합시다. 아이 돈이 아쉬워서 늘 궁시렁 궁시렁 거렸지.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해도 괜찮은데. “제발, 징징대지 마오. 제발.”

제발, 징징대지 마세요. 주님은 이것보다 훨씬 당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얼추 말 통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안 믿는 친구는 있지요. 아직까지 시련을 들 당해서 그래요.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싫어했어요. 제자들도 다 배신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살아가면서 징징대지 마세요. 일곱 귀신 붙어있는 것 같아요. 살고자 하니까 자꾸 이런 것들이 징징댈 일이 있잖아요.

후히 주시는 지혜가 뭐냐 하면 후닥 밀어 붙이거라. 에 필요한 지혜들에요. 지혜. 5+7=12 이런 지혜 주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죽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 수 있는 요령. 죽으란 말이 아닙니다. 지금 제 말 잘 들으셔야 돼요.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죽는 것을 목표로 생을 할 수 있을까. 죽는 것을 목표로 하면 되는 거예요.

그때는 유명한 노래 나오지요.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이제는 남이 되어 다 떠나버리지요. 아~~ 얄미운 사람. 세상 얄밉다 하지 마세요. 본인이 지금 꿈꾸고 있는 거예요. 실화는 예수님의 죽음이 실화지 내가 순수하지도 않고 순수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순수해요.

그러니까 눈 뜰 때,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그냥. 눈 뜰 때. 나중에 눈 감아놓고 “아이고~ 해 볼걸.” 하지 말고, 눈 뜰 때 하고 싶은 대로 살아요. 지혜라 하는 것은 이제 앞으로 나올 거니까 그 때 죽 2장, 3장 지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고. 하여튼 주신다는 것.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이 대목을 교회에서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면 주께서 주신다는 겁니다. 뭘? 그건 이야기 안 해요. 그건 이야기 안하고 무조건 주신다는 거예요.

자, 사람들이 신을 다루는 심보가 이래요.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듭니다. 어떻게 채무자로 만드느냐, 내가 먼저 선심을 써버려요. 하나님 앞에. 선심을 쓰게 되면 하나님은 선심을 쓴 사람에게 되갚아야 될 심리적인 압박을 제공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앉아서 기도하면 될 걸 신발을 벗고 난로 펴도 되는 걸 있는 난로도 꺼버리고 그것도 방석을 치워버리고 이렇게 꿇어앉아 함으로 말미암아 심리적으로 하나님께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진짜 안 해주면 섭합니다.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어버리고 내가 채권자가 되어버려요. 선심해서 줘놓고 보자~ 이리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어버려요. 이런 심보가 있는데 마귀는 자꾸 이런 식으로 가르쳤거든요. 하나님은 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계속해서 마귀가 설교자에서 계속해서 그걸, 설교자는 마귀의 조직원들이니까. 양아치들이니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인들에게 채무를 느끼게 만들어야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교회를 뭐냐 하면 교회를 운영한다고 하죠. 운영. 운영이란 말은 앞에 어떨 때 운영이라는 말을 붙입니까? 회사 될 때 운영이지요.

그러면 교회 실패가 뭐냐, 운영이 실패하게 되면 교회 실패가 되겠지요.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마네킹에다가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꽂은 것을 그게 바로 교회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건 운영이 아니에요. 그냥 존재 자체에요. 존재 자체.

그러나 교회가 운영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 교회 운영이 뭘 방해한다? 교회를 방해하는 거예요. 교회 있음이 교회를 훼방질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그래서 그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기도해도 응답 없다는 이유가 믿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 두 마음을 품어서 그렇습니다. 8절에 보면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기도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할 때는 마음이 하나로, 그러니 기도응답 받는 방법은 이대로 하면 흔들리지 말아야 되고 그 다음에, 한 놈만 조진다 하는 것처럼 하나만 보고 기도해야 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기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요, 이게 하늘이 주신 은사고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기도할 때는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노리고 기도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기도하는 시각이 A라면 반드시 B라는 시각을 생각 안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노동할 때 목적 없이 노동하지 않잖아요. 목적이 있잖아요. 목적이 기도응답이고 그 원인제공을 기도가 제공한다면 요 사이에 뭐가 남느냐 하면 결핍이 생기잖아요. 결핍이. 결핍이 생긴다는 자체는 이미 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에요. 안 되면 어떻게? 안되면 어떻게? 안되면 기도를 새로 늘여봐? 기도 그냥 하지 말고 헌금하고 기도해봐? 꿇어앉아 기도해봐? 안되면 중보기도처럼 기도 잘하는 어떤 권사를 모시고 같이 해봐? 아님 목사한테 기도를 부탁해봐? 온갖 것이 헛일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 자체가 이건 엉터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고 하늘이 주신 은사로 기도할 때는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목적이 뚜렷하면 돼요. “죽겠습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한 기도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왕궁의 왕비가 된 것은 이 자리에서 죽으라고 왕비가 된 것을 상상하나이다. 이때를 위함이라. 내가 지금 왕비가 된 것은 왕비로서 살려고 한 고 때가 아니라 죽을 때가 따로 있음. 죽고 나면 왕비고 뭐고 소용없잖아요.

왕비로서 죽을 이때를 위해서 죽으면 제가 왕비 그만두고 죽겠나이다. 하고 기도한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의미는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십자가 자체가 죽음이잖아요. 죽음을 이 땅에서 다시 반복해 버리면 이 세상이 무슨 세상이냐,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이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만 뭐가 들어있다? 영생이 들어있다 라는 것을 맞닥뜨리면서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응답은 이미 얻었습니다.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는데 그 정해진 응답이 영 시원찮고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한 예를 들면 딸이 내일 모레 결혼한다. 그러면 결혼하기 전에 기도 안 될 수가 없지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요. 기도하지요.

기도할 때 또 갑자기 이근호 목사가 또 인간적으로. “주여, 결혼할 때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하다가 조작 좀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하 있는 그대로 해야 되지. “주여, 일단 날씨는 좋아야 되겠습니다. 결혼할 때 이 결혼 무효다! 이리 나오면 우사 당하니까...,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요번 이억오천 들었는데 주여, 좀 이렇게 퇴직 안했으니까 3억3천 나와 가지고 그래도 결혼식 하고 딱 끝나고 내 수고비는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6천정도는 뽑아가지고 신혼여행 왔을 때 한2천 남고 4천은 우리 수고했다고 크루즈여행갈 수 있도록...” 겉으로는 말 못하고 속으로는 그게 있지요. 기도할 때.

날씨 좋고, 역시 끝나고 나서는 부주가 많이 들어와서 요번에 집하나 사주는데 그 집 사준다고 우리 집 한 2억 나갔는데 그거마저 보충해야 될 거 아닙니까. 결혼하고 우리도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부주를 좀 은혜롭게 해주시옵소서. 주여, 이게 얼마나 참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라고 기도하게 되면 응답은 어떻게 나오겠어요? 응답은.

이렇게 나온다고요. 응답을 내가 미리 또 점쟁이처럼 해볼까요. “니 딸 키운 게 누구 덕이고?”이리 나와요. “주님이요.” “그럼 니가 생전 남자 없다가 사랑하는 이 남자 아니면 안 된다고 바쳐가지고 만난지 2개월만 결혼한 것이 누구 마음을 준 거고?” “주께서 주신 겁니다.” “그럼 이 결혼식 처음부터 누가 주관할 건데?” “주님이 주관하실 겁니다.” “그럼 부주 받는 거 오만원짜리 가고 그 대신 오천만원짜리 올 건 그거 누가 할 건데?” “주님 하실 겁니다.” “그러면 지금 니가 기도 은밀하게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결국은 니 일한거야? 주의 일한거야?” “제 일입니다.” “니 일 한 거 맞지?” “맞습니다.” “니 죄인이야?” “죄인 맞습니다.” 이게 응답 아닙니까?

주님 일은 주님 일대로 벌려 놓고 주의 일하면서 주의 일은 어디서 나온다? 내가 어느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인간을 그 현장에서 내가 죄 짓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같이 계시는 주님이 자기 발언을 하는 거예요.

아까 인간들의 발언은 뭡니까? 인간들이 납득이 되는 이야기지만, 주님과 우리 이야기는 믿는 자만 이해가 되고 믿는 자만 알아채는 응답을 받는 거예요. 그 응답을 남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못 알아듣습니다. 본인만 알고 계세요.

“주여, 이 딸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온 것도 결혼식 하게 된 것도 결혼식 날에 모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주체측이 되는 혼주가 되는 그런 결혼식 되게 하옵소서. 하고 예수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고 탈탈 무릎 털고 일어나면 뭐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아이고, 오셨습니까? 먼 길에...” 이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벌이는 결혼식에 자기는 서빙만 하면 돼요. 서빙만.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고 결혼식을 하게 되면 구름 한 점 오면 이걸 비오면 어떡하나? 오늘 비오면 오백만원 할 사람이 비 온다고 안 오면 어떡하나? 조그만 그런 걱정해가지고 비오면 또 음식이 쉬게 되면 결혼식하고도 음식이 상해서 치료비 물어주면 또 비용도 다 나가고. 또 결혼식 하는데 축가하는 인간이 또 세곡해가지고 결혼식 짜증내고 하면 안 되고 음식도 밥맛없다고 하면 안 되고 걱정하게 되면 이 인상이 결혼식 하는 혼주가 어두워져요. 나중에 아들 결혼식 할 때는 기도 꼭 그렇게 하세요. 아직 멀었다 마는.

이게 바로 두 마음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내 상황을 지금 나를 둘 다 죽여 버려요. 없애버려요. 기도하면 없애면 나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만 할 뿐이에요. 주님이 벌인 혼인잔치에 나는 그저 밥이나 얻어먹는 식으로 살면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기도는 누가 하느냐, 예수 이름이니까 결국은 예수님 이름을 이야기하는 내가 시작했다가 끝은 진짜 주의 이름이 기도를 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어요. 그게 야고보에요. 됐지요.

9,10절에 봅시다. 10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야~~ 이 말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낮은 형제가 자기 높음을 자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높아진 거예요? 낮아진 거예요? 결국 높아진 거죠. 높아지니까 또 낮아져야 돼요. 이건 말로서는 잘 안 되는 거예요. 결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됐다는 말은 그럼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 자면 나중된 자가 먼저됐으면 그 사람 다음에 또 뭐해야 돼요? 먼저 됐으니까 또 어디로 가야 돼요? 나중되어야 되지요. 나중 됐으니까 또 높은 자로 또 가겠지요. 그러니 이 말은 뭔가 무한 수난을 끊어주는 그게 있어야 돼요.

낮은 형제는 자기 높음을 자랑할 때 이 자기가 예상한 자기가 아니고 주님 안에 있는 자기에요. 아까 그 그림 다시 그려볼까요. 이 바깥을 가지고 상상하다가 현실도 아닌데 현실인 줄 알고 상상하다가 다시 쏙 들어올 때 높게 해주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이야기할 때 본인이 덩달아 높은 것이지 내가 높다는 것은 높은 게 아니에요. 그건 건방진 거예요. 자고한 것이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예수 믿음 안에 있어야지 자기가 예수 믿어버리면 그건 교만한 거예요. 주님이 주신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지 내 믿음 가지고 의롭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가난한 사람이 바깥에 있는 그 가상현실을 보고 진짜 현실인 줄 알고 “나는 지지리 더러운 팔자라서 아직도 가난하냐?” 이렇게 나올 때에 뭐를 모르느냐 하면 니가 속한 이 공간이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높여준 공간인 것을 깜빡 잊은 거예요.

그럼 잊은 것을 어떻게 조치하느냐 하면 갑자기 여기 부자들을 배치해 버려요. 부러움이 안 될 수 없지요. 야씨~ 좋겠다. 이리 되잖아요. 마치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나라가 보는 앞에서 쑥 들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디에 빠집니까?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우잖아요.

이게 흩어진 열 두 지파가 옛날 열 두 지파한테 우리가 참고로 해야 될 그 요소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망했잖아요. 이 흩어진 열 두 지파 안 망해요. 안 망하는 이유가 보게 해요. 옛날 생각하면 망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사는 보고 부럽냐? 저들이 바로 낮은 거예요. 저게 바로 마지막 사형수가 먹는 만찬이에요. 돼지죽일 때 마지막 사료 많이 주는 거 하고 마찬가지에요. 이거 먹고 곧 가요. 그게 끝이에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에 대한 복수는 어떻게 한다고 했지요? 그걸 외울 필요는 없지만. 묻는 제가 잘못이지만. 세상에 대한 복수는 내가 구원받는 게 복수지요.

세상에 나가서 팔 벗고 복수하지 마세요. 내가 아듀~~ 안녕! 바이 바이! 이게 복수에요. 그래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뒈져라. 나 간다. 나는 너희들이 갈 수 없는 곳에 가. 하고 손 흔드는 사람 그게 거지 나사로입니다. 끝까지 거지에요. 하나님 고집도 대단해. 끝까지 고집해요. 예수 믿고 뭘 믿어도 끝까지 거지였어요.

너희들 나보기에 거지로 보이나? 환상적인 그런 안목으로 보니까 거지로 보이지. 나는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거예요. 아브라함 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말이 그렇지 사실은 거지와 한 가지 아닙니까. 인자는 뭐를 둘 데가 없다? 노숙자지요. 예 노숙자. 노숙자에요. 노숙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엎어서 부한 자를 뒤집어버리고 자꾸 뒤집어 버리고 뒤집어버리는 이유가 실제로 그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 나라 있기 때문에 뒤집는 거예요.

그 나라가 실화고요, 우리 같은 건 다 이것은 망상인데, 사람들은 망상밖에 안 보이니까 이게 진짜 실화인 줄 알고 거기에다가 언어를 주고받으니까 그 언어하고 성령이 하는 복음 언어하고 이게 이해를 못 하는 겁니다.

이해 못하면 그들에게 많은 서러움과 핍박을 겸하여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기 보게 되면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여기 꽃, 풀이라 되어있지만, 여기다가 이 세상 아는 사람들 혹시 신문지상에 나온 방송에 나온 사람들 하나, 하나 대입해보세요.

이건희 회장에다가 꽃을 대입하고, 잘 나가는 사람에다가 풀을 대입하고, 하여튼 여러분을 속상하게 했던 이런 사람들, 집주인한테 꽃을 대입하던지, 여러분 돈 떼어먹고 사기 친 사람들한테 해보세요. 여러분들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대입해 보세요. 그러면 그들은 뜨거운 바람이 불면 다 바짝 마른 풀로 다 환원됩니다.

자, 마지막 묻습니다. 이 꽃이 실화입니까? 아니면 바짝 마른 풀이 실화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결국 바짝 마른 풀이 실화에요. 실화.

이게 진실이고 현실입니다. 다른 현실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바로 팩트 fact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괜히 미워하고 싫어했지만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자꾸 살고자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님 복음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차라리 죽는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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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9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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