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저편에서 170908
서울의존강의20170908a 디도서3장5절(죽음저편에서)-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꼭 구원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구원되고 싶은 의사가 전혀 없어요. 이 땅에서 잘 되기를 바랄뿐이죠. 잘 되기를. 잘 되기를 바라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것은,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겠죠. “나, 너 데려갈래.” “싫어요.” “가자!” “아뇨. 여기서 성공할래요.”라는 이런 속마음이 서로 상충되면서 다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되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기피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 메시아가 와서 일을 하되, 그 메시아가 하시는 그 일에 대해서 아무도 동조하거나 알아보지도 못하죠. 동조하지 않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그 메시아가 하는 일을 피해가죠. 피해가다 피해가다가 결국 못 피해가면 메시아를 떠밀어버리잖아요. 떠밀어도 말 안 들으면 채찍가지고 때려야 돼요.
그럼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할 때에, 그 우리라는 것이 사전에 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할 때, 그 우리라는 것은 구원받은 당사자들도 그 우리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본인들이 몰라요. 의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각기 다 양 같아서, 다 개별자로 돌아서서 일하기 때문에. 개별자로. 개별자로 돌아서서 일한다는 말은 개인이 원해서 하는 겁니다. 개인이 원해서 하는 일들이에요. 개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에요.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는 모든 기대와 상관없이 건지기 때문에, 모든 인간으로부터 구원은 기피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나름대로의 구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나름대로의.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 가치를 계속해서 연속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계속 이어져나가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구원의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본인이에요. 자기를 구원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를 구원해줘야 하나님이 하나님답다는 생각을 본인들이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겁니까? 안 보이는 겁니까? 우리가 눈으로 보고 알고 있는 거죠. 나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것을 건져내라는 겁니다. 구원하려면. 그래야 우리가 동의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는 양말을 기워주려고 왔다고 할 때에, 멀쩡한 양말을 해가지고 이거 기워달라고 할 사람은 없죠. 빵꾸난 양말 기워달라고 한다 이 말이죠. 빵구난 양말. 근데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가 미흡한지, 뭐가 빵꾸났는지, 뭐가 정상인지를 누가 정하느냐 하면 본인이 정해요. 본인이. 그래서 자기가 가치가 있다는 것은, 자기가 자랑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건 구원되는데서 빼놓고, 자기가 미흡한 것은 구원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만족스럽게 완성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거죠. 기도. 애가 공부 잘 할 때는 주로 간절한 기도가 안 되죠. 쑥쑥 오를 때는. 근데 애가 갑자기 수능을 앞두고 당황한다고 할 때는, “걱정하지 마! 엄마가 기도해줄게.”라고 하면서, 애가 지금 당황하니까 평소 실력만 발휘하게 해달라고, 뭐 겸손한척 하면서 그런 기도를 하잖아요. 그러면 평소 실력이 뭐 150점이라면 만족하겠어요? 평소 실력대로 해달라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이거는 뭐냐 하면 평소에는 그렇게 간절하게 안 하고 건성으로 하다가 갑자기 간절하게 한다는 것은 뭔가 다급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 다급한 일, 그 아쉬운 일이 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그 구원의 상태에서 미흡하다는 겁니다. 근데 이 결정을 누가 하느냐 하면 본인이 해요. 본인이 어떤 구원에 대해서 틀을 잡아놓고 하나님은 시다발이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 도와주시고 이것 보태주시면 아낌없이 순종하겠습니다. 충성하며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쉬울 것이 없으면 주님을 찾지 않겠죠. 교회에 나와도 그냥 오락삼아 나오겠죠. 오락삼아. 이 말은, “구원 필요 없습니다. 저한테는 그다지 구원이라는 게 중요하게 와 닿지 않습니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중에 구원이 다급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다급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몸이 아프다든지. 근데 병이 조금 나았다고 칩시다. 그럼 전에처럼 다급함이 유지가 되겠어요? 안 그러면 다급함이 사라지겠습니까? 이제 몸이 건강하니까 다급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사라졌잖아요. 그럼 주님은 그다지 중요한 분이 아니죠. 그럼 어디를 봐서 구원되는 겁니까? 도대체가? 그 사람은 구원이 된 거예요? 안 된 거예요? 안 된 거잖아요. 자기가 다급한 것은 해결했다 이 말이죠. 그럼 구원이 안 된 상태에요.
주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요? 말은 잘 한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구원했는데? 주님은 이 세상에서 없는 것을 제공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는 것. 근데 인간은 없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 중요한 거거든요. 자기를 포함해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있는 것 건져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서 없는 것을 건져내는 겁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들은 다 거부합니다.
왜? 있는 것들을 해놓으면 마치 자기 자신의 구원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합치됐다고 착각한다 이 말이죠. ‘내가 이렇게 아쉬운데 하나님께서 도와줬구나. 그렇지! 내가 아쉽다는 그 생각과 주님의 아쉬운 것과 합치가 됐어. 그렇지!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되었어.’ 이렇게 돼버려요.
근데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 사울이었을 때에 그렇게 주님을 사모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 때, 예수님께 기도해서 잡아 죽였습니까? “주여, 오늘도 한 서너 마리 사냥하게 주옵소서.” 이렇게 해가지고 주님이 “오야, 인간 몇 명 필요하냐?” “예수님 열 명만 처리하게 해서 넘기게 하옵소서.” 뭐 이렇게 기도했습니까?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사울이라는 사람은 여호와께 기도했지, 주님 앞에 기도한 적 없죠.
왜냐하면 있는 것을 구원해달라고, 있는 것을 협조해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의 생각은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구원된다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없는데, 그 사울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구원하잖아요. 사전에, 아마 이런 것이 구원될 거라는 모든 예상을 주께서는 비켜나가십니다. 빗나가게 해버려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죠. 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다수겠습니까? 의견이 일치된 거예요.
그리고 좁은 길은 말이 좁은 길이지 거기는 찾는 이가 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요. 없는데 있어요. 그러면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 아이큐가 뛰어나고 영재기 때문에 그리로 간 겁니까? 좁은 길 자체가 없어요. 이 세상에 좁은 길 자체가. 길은 한 길 밖에 없어요. 멸망의 길 밖에는 없어요. 그러면 좁은 길이라고 주께서 언급하는 것은, 이거는 없는 길인데, 주께서 활동하시는 것에 따라서 이것이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거예요. 좁은 길이.
그래서 거기에 가는 사람들은 본인 힘으로 덜렁덜렁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한 걸음, 두 걸음, 매 걸음마다 주께서 동행해서 가지 아니하면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인도함이라고 합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 전체가 있는 것, 그리고 이미 가진 것, 눈에 보이는 것, 그것 구원해달라고 사울처럼 그렇게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주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죄”,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이 세상에 죄가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 세상은 죄가 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죄 아래”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세대는 죄 아래 있어요. 죄 아래 있으니까 죄 아닌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죄 아닌 게 없죠. 모조리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왜? 죄-아래 있으니까. 이 세상이 죄 아래 있고 죄 아닌 게 없다는 것은, 유일하게 예수님만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그것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살해당해가지고 빠져나옴으로써, 살해당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악마이야기, 마귀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악마의 최종적인 목적이 뭐냐, 악마의 노림수가 뭐냐, 악마적인 모든 활동의 마지막 목표는 뭐냐, 이 땅에서 복음을 치워버리는 겁니다. 복음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복음을 추방하는 겁니다. 복음을 내쫓는 거예요.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죠.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의 광채를 가려서 비취지 못하도록 이 세상 신이 지금 놉니까? 활동합니까? 활동하죠. 이 세상 신이 복음을 보지 못하도록 활동하는 그 증거가 이 세상에 가득 차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수소폭탄 실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요? 그쪽에 가있죠. 성주 사람들은 사드배치 반대에 가 있죠. 지금 울산에 있는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소 더 짓느냐 마느냐에 가있죠. 지금 이게 복음이 아니잖아요. 복음에는 관심이 없죠.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수학참고서에 사탄이 나오느냐고 물었잖아요. 안 나오죠. 수학정석에 사탄이 안 나오죠. 뜨개질 교본서에 악마의 이야기 안 나오죠. 악마를 뜨개질하다, 뭐 그런 것이 안 나오잖아요.
세상의 뉴스고, 방송이고, mbc파업이고 뭐고 전부 다 누가 배후에서 작용한 겁니까?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뭘 앞장세우기 위해서? 뭘 뒤로 빼돌리기 위해서? 이 세상이 죄 속에 갇혀있다는 이것을, 복음이라는 이것을, 누가 빠져나온 사람이 있다는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월드컵 9회 연속 진출이라는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고. 앞으로는 뭐냐 하면 11월 3-5일에 서울에서 나훈아 콘서트를 합니다. 대구는 12월 15-17일까지 하고. 부산에서는 11월 24-26일까지 하고.
표는 12분 만에 매진되었어요. 나훈아가 아주 훌륭한 일을 합니다.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나훈아가 뭐 복음 간증집회 합니까? 아니잖아요. 복음 전하기 위해서 리사이틀 열지를 않죠. 이번 콘서트의 주제는 “복음이 무엇인가? 십자가가 무엇인가?”라고, 뭐 그런 것을 내걸었던가요? 아니죠.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게 아니고, 낙담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 신이, 악마가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해도 우리 관심사를 딴 데로, 복음 쪽으로 돌리기가 힘들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이 되죠. 만약에 직장에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이건 다급한 나의 문제잖아요. “직장에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가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악마의 작전이라면? 순종해야죠. 뭐. 평소에 늘 순종한 것처럼 순종해야죠. 우리는 하루의 일상을 어디에 놀아나느냐 하면, 뭣에 울고 뭣에 웃느냐 하면은, 악마가 우리를 밀고 땡기고 하는 것에 우리는 웃었고 울었던 겁니다.
이미 우리의 몸과 정신 자체가 악마의 하는 모든 일에 같이 파도를 타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익숙해졌으니까. 그게 우리에게 뭘 제공하느냐 하면, 이 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행복을 제공해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라고 찬송가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저는 살짝 그 찬송가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왜냐하면 너무 초반에 결론부터 내려서 문제에요. 우리는 이런 것이 좋았는데 이제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 라고 되어야 해요.
그러면 우리가 가장 궁극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의 행복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편해지는가, 내가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남자한테 인정받는 존재가 되느냐, 나와 그리고 내 가족이. 남한테 어떻게 하면 내가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이 평소에 우리의 행복의 요건이 되었어요.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의 죄에서, 죄라는 말은 뭐라고요? 결국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죄거든요. 죄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나의 행복을 걷어차고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어서 나의 행복도 아낌없이 걷어찼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들겠습니까? 안 들겠습니까?
내가 없는 그러한 상태를 우리들이 원할까요? 원하지 않을까요? 원하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데서 피해라. 내가 원하는데서 피해야 돼요. 내가 설정해놓은 목적, 목표가 있잖아요. 거기에서 도망치세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내 목적과 목표는 그 틈 사이가 전부 다 나의 상상력으로 메워집니다. 그 상상력은 우리가 힘든 인생을 살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해요. 의지를 부여해요.
근데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이렇게 이야기했죠. 성도는 용기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해석으로 산다고 했잖아요. 해석으로. 제가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용기에 대해서는 구원과 상관없는, 내 행복을 손에 쥐기 위해서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 연속적이라고 했죠. 자기의 꿈이 계속해서 연속되죠.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상상과 이게 연속된다 이 말이죠. 연속돼요.
이거는 누가 와서 건지는 것이 아니에요. 꾸준한 것이지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하다보면 무슨 일이 나겠지, 뭐가 되기는 되겠지, 구원이 되기는 되겠지, 이렇게 계속 연속, 연속이 되는 거예요. 천로역정처럼. 어떤 계단을 타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어질 때마다 누가 나에게 용기를 부여해주겠어요? 내가 나에게 용기를 부여해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부여해주지 않습니다. “힘내라! 힘!” 자꾸 용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용기를 부여하잖아요.
그럼 누가 강화가 됩니까? 누구 의식이? 내 의식이 강화가 되죠. 더 굳어지겠죠. 따라서 나로부터의 구원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나로부터의 구원이. 그동안 구원받으려고 애썼는데 그걸 아까워서 어떻게 놓아요. 아까워서. 거기에 들어간 밑천이 얼마고 시간이 얼만데. 성경 백독한 그것이 아깝잖아요. 그런데 성경 백독을 해도 결과적으로 강화된 것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나” 헌금을 해도 “나” 전도 선교를 해도 “나”
결국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완벽하게 거짓말이고,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에 나는 예수님을 원한다고 했죠. 그 나의 원함에서 우리는 피해버려야 해요. 그게 구원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것에서 피해야 될 이유가, 그 원함의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거는 구원이 될 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왜? 나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죄 아래에 속했기 때문에.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내 뒤에 악마가 나를 쫓아와가지고 악마가 천국에 가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놔라 이거!”해도 안 놓습니다. 악마가 내 허리끈 쥐고 같이 쫓아 들어와요. 왜냐하면 나는 악마의 작품이기 때문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습관화했고, 나의 몸의 자연스러움은 다 내가 이익이 되는 쪽으로 되도록, 생각과 정신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요. 누가 나에게 그런 정신을 심어줬습니까? 누굽니까? 악마잖아요. 죄 아래.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 아래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있다? 없다?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없잖아요. 그럼 예수님 빼놓고 없다면, 모조리 다 죄 아래 있다면, 죄 아래 있는 것들이 요구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죄 아래 있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죄가 무엇이냐? 라고 그렇게 물을 게 아니고요. 죄 아닌 게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봐야 해요.
제가 질문할게요. 모든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자, 죄 아닌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 하나님 빼놓고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죠. 죄 아래 다 묶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죄 밖에, 주님 말고, 성부성자성령 말고, 죄 아래 있으면서 죄 아닌 게 무엇입니까? 이거는 질문 자체가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죠. 답이 있습니다. 알려드려요? 죄 아래 있으면서 죄 아닌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파국”입니다. 모든 게 다 무너지고 깨지는 겁니다. 파국인데, 이 파국을 다른 말로 합시다. “죽음저편” 죽고 심판 이후의 저편. 이게 죄 아닌 겁니다. 캘거리 강의에서 제가 이것을 소개한 기억이 나요.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을 죽음으로 봤을 때 거기서 빠져나온 상태가 부활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이 땅에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이 땅에 성령을 보냈습니다.
본문 디도서 3장 5절 끝에 보면,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죠. 성령의 새롭게 하심. 성령이 본격적으로 성도에게, 또는 사도들에게 온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본격적으로 오셨잖아요. 이방인에게로, 유대인에게로 왔죠.
그런데 성령이 왜 오셔야 되죠? 성령이 왜 오셔야 되느냐? 성령이 오셔야 될 이유는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예요. 자기백성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면 이 말이 맞는다면,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면 구원될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구원이 된 상황이라면 자기 의로운 행함으로 구원되는 겁니까? 성령의 오심으로 구원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