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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7. 8. 25)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7. 8. 25) 42-1

마가복음 10장 37-38절을 봅시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뭐하는 사람인가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그분을 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모르고 있어요.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도할 때 뭘 전했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냈는데 보내신 예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의 상식을 전했는지 궁금하지요.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되면 제자들의 전도를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 뜻은 모르고 제자들의 잘못 된 뜻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전도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시킨 전도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전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버림 받아서 퇴장하실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전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세력을 더욱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전도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런 마음으로 전도했어요. 기존의 핵심 멤버가 있는데 그 공동체가 보다 확장되고 커지는 것을 목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땅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남에게 알려져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벌이는 일을 전도라고 여긴 것이지요.

공부해서 남 주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공부하는 이유는 자기의 소유를 확장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도하시는 내용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전도와 예수님의 전도는 취지가 전혀 다릅니다.

어제 미국의 어떤 여성이 복권에 당첨되어 약 8,000억 정도의 금액을 받았는데, 그 사람이 복권을 왜 샀을까요? 세상을 떠나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죠. 복권 안에 들어있는 내용과 자기가 원하는 내용이 연결되기 때문에 산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연결될까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성립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그들이 받을 것인데,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주면 전도가 안 되지요.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은 사람들이 원하는 내용이 아니라 불쾌해 하는 것을 전했어요. 예수님 등장 직전에 세례 요한이 나타가 복음을 전했어요. 그 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정부당국의 허락도 없이 제 멋대로 활동했다고 시비를 걸었어요.

출신 성분, 신학교 졸업 여부 등을 심사해야 되는데 누구에게도 그런 심사를 받지 않았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시비를 거는 자들이 “네가 누구냐? 네가 선생이냐?”라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은, 이미 전도하는 내용과 방식이 그 당시 확정된 매뉴얼이 있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정해놓은 유전이나 전통 자체를 심판하는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요한의 외침은 전도가 아니가 저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민중들은 세례 요한의 말이 옳은지, 아니면 기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옳은지 잘 듣고 판단해 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생각조차 심판해 버립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어요. 정신 차리란 말입니다. “너희들 지금 속고 있어.”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실 분은 --” 하면서 예수님을 전했어요. 세례 요한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예수님이 아직 정체를 드러내기 전입니다. 즉 요한이 예수님을 전하는 최초의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전에 복음이라고 전했던 모든 내용들이 다 엉터리였음이 드러납니다. 왜냐? 세례 요한이 최초로 복음을 전한 자였기 때문이죠. 최초는 예수님이 보내셔야만 발생되는 것입니다. 최초는 송곳 끝이라고 생각하세요. 송곳을 쥐고 계시는 분이 송곳을 움직이지만 그 끝이 물체에 닫게 되면 구멍이 생기겠지요.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최초가 됩니다. 예수님이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고 세례 요한처럼 뒤에서 조종하는 분에 의해 사로잡힌 자만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항상 그 시대의 송곳이에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옛날 인물로 간주하는데, 지금 예수님이 살아계시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마주치는 지점에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늘 자신을 최초의 인물로 간주해야 돼요. 최초의 인물로 간주한다는 말은, 나는 기존의 세상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천사입니까? 아니죠. 그냥 인간 세상에 살았잖아요. 하지만 세례 요한이 그 동네에 산다고 해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으니까 선지자가 된 거잖아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보낸 최초의 인간이라면 기존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자들과 분리(차이)가 성립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소원합니까? 드론이 땅에 있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드론이 드론 값을 할 때는 공중에 떴을 때입니다. 뜨는 기능이 있어야 드론입니다. 여기서 제가 묻는 것은 뜨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구를 장착하고 예수님 안구로 세상을 보기를 소원합니까?

세례 요한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포기했어요. 세례 요한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지 않았는데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세례 요한이 외친 말씀은 멀쩡한 이 세상을 광야로 규정합니다. 세례 요한이 가는 곳마다 광야가 됩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서 자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기는 광주고, 위로 올라가면 서울이 있고, 밑으로 내려가면 대구가 있고,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는데 주님이 보내신 사람이 되면 광주, 대구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광야냐 아니냐로 새롭게 나눠져요. 예수님의 안목에 의해서 세상을 재편성합니다.

재편성했을 때, 세례 요한은 목이 잘려 쟁반위에 올려졌지요? 이것이 세례 요한에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목이 잘릴 때 주님이 자신을 보낸 효과로 마음에 안심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주님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죽으면서도 자기가 깨달은 바를 더욱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기회가 된 거지요.

그 전에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의심도 했지만, 주님이 세례 요한을 죽일 때 확실하게 죽였어요. 어떻게 죽입니까? 세상에는 수상한 권력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그 수상한 권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혀 윤곽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질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들이고 따뜻한 이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시고 예수님이 보낸 자가 등장하니까 세상 모든 것이 재편성 됩니다. 흩어져 있는 쇳가루는 질서가 없습니다. 평화롭게 각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론에 좌석을 싣고 현장에 나타나면 쇳가루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요. 드론에서 메가폰을 통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외칠 때 그는 확정된 안목으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런 세례 요한이 부럽지 않습니까? 인생 이렇게 살고 싶지 않나요? 드론 위에서 메가폰 들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인간 세상을 관통하며 외쳤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도망치고 물건 옮기고 난리를 치는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 “이 불은 불도 아니다. 회개하라. 지옥불은 더 무서운 불이다.”라고 했다면 인간들의 반응이 어떻겠어요?

세례 요한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기존의 인간들과 다른 점은 ‘나를 위해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위해서? 아닙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인간들이 있어 세상은 두 영역으로 나눠져 있고 그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인간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닌 이유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생각합니다. 즉 건전한 존재라야 거룩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그것이 잘못이고 엉터리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인간이 있고 이것이 세상 전부라고 여기는데, 이 틈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어요. 주님이 등장하셔서 인간들끼리 건전하다고 여기는 존재를 저주 받을 자로 규정하셨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신들은 이방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저주했어요.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같은 분이어야 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전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셨는데, 제자들은 다니면서 전도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면서 다녔어요. 이것이 전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주님이 떠날 세상입니다. 세상에 주님이 자기 자리 만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미련 없이 떠납니다.

과연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하나님은 계실까? 만약 있다면 누가 와서 설득력 있게 날 믿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세례 요한을 보내 ‘회개하라!’고 외치도록 했지요. 그럼 뭘 회개해야 됩니까? 그들의 의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 의도가 뭡니까? 천국, 지옥을 왜 궁금해 합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면 자신의 문제점이 보여야 합니다. 만약 문제점을 발견했다면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이것이 아니고 ‘정말 천국, 지옥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나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갈까, 지옥 갈까 정말 궁금하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예요. 회개할 생각은 없고 단지 궁금한 거예요.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하자가 있음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궁금증도 정당한 생각으로 여깁니다.

1960년대 톰 존슨이란 가수가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렀어요. 이 노래 가사를 보면 ‘고향 마을에 가면 어머니, 아버지가 마중 나오고 옛 친구 메리가 마중 나와 나를 반기겠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꿈입니다. 꿈을 깨니까 사방이 새까만 감옥으로 둘러싸여 있고, 간수가 자기를 끌고 가고 굳은 표정의 신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뭔가 하면, 자신은 사형수가 되어 곧 사형이 집행될 시점에 잠시 자신이 꿈을 꾸게 된 거예요.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
As I step down from the train
And there to meet me is my Mama and Papa
And down the road I look and there runs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열차에서 내려서 보니 고향 마을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인듯 하구나
그곳엔 나를 마중 나오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고
길 아래쪽에선 금발 머리와 앵두빛 입술의 메리가 뛰어오고 있네
고향의 푸른 잔디의 느낌은 이렇게 좋은 걸....

Yes, they'll all come to meet me
Arm's reaching, smiling sweetly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래, 모두 나를 만나러 오겠지
팔을 뻗어 안으며 맑게 웃어주겠지 ...
고향의 푸른 잔디의 느낌은 너무나 좋구나

The old house is still standing
Though the paint is cracked and dry
And there's that old oak tree that I used to play on
Down the lane I walk with my sweet Mary
Hair of gold and lips like cherries
It's good to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비록 칠은 갈라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가 살던 옛집도 그대로 있고
내가 올라가 놀곤했던 그 오크나무도 그대로 있네
금발 머리와 앵두빛 입술의 내 사랑 메리와 오솔길을 함께 걸으니...
고향의 푸른 잔디의 느낌은 너무도 좋구나....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At four grey walls that surround me
And I realize that I was only dreaming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Again, I'll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문득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4개의 회색 담장뿐..
그제서야 나는 내가 단지 꿈을 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네..
왜냐하면 그곳엔 간수와 슬픈 얼굴의 신부가 서 있었기 때문이라오
팔짱을 끼고 우린 새벽길을 걸을 것이고...
나는 다시 한 번 고향의 푸른 잔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Yes, they'll all come to see me
In the shade of that old oak tree
As they lay me 'neat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러면, 모두가 나를 보러 오겠지요
그 오래된 오크나무 그늘 아래로
그들이 나를 고향의 푸른 잔디 아래에 묻어 줄 때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Green Green Grass of home]의 색깔이 초록입니다. 그런데 감옥은 어두운 회색입니다. 만약 내가 사형 집행 직전에 있는 사형수라면 나에게 어떤 색깔이 행복으로 보이겠어요? 고향의 푸른 잔디만 있으면 행복할 거예요.

어릴 적 늘 보았던 푸른 나무, 철마다 피는 흔한 꽃, 먼지 나는 오솔길이 있다면 더 이상의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교도소에 감금된 자에게는 그 흔한 녹색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깨달을 겁니다.

예수님의 전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 세상은 헛된 꿈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곧 사형집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자신에 앞서 세례 요한을 보낸 거예요. 그는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혼자 살았어요. 이 모습을 수련회에서는 ‘엄마 없는 아들’이라고 표현했지요.

모든 선지자는 세례 요한에 복속됩니다. 엘리야로부터 시작한 선지자가 엘리야고 끝납니다. 말라기에서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온다고 했는데 그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 엄마는 불임 여성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엄마 없는 아들이고, 이 아들이 왕과 대결합니다. 이것은 장차 신약 시대에 아빠 없는 예수님과 아빠를 가진 모든 세력들과의 싸움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전하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보낸 세례 요한은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낸 세례 요한이 이런 취지를 갖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보낸 12제자도 어떤 마음자세여야 합니까?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이어야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세례 요한과 같지 않아요.

제자들이 언제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이 되는가 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할 때입니다. 이 때는 자신의 목숨도 사소하게 여깁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고 사는 것은 중요치 않아요. 나에게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지지 않아요. 이런 것들은 철학자들이 따집니다.

철학자들은 선과 악을 나눌 때,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안 좋은 것은 악이라고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선이고 불행해지면 악입니다. 스피노자는 내가 활성화되면 선이고 내가 축소되면 악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들은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자기 몸 중심의 선악을 따지는 인간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어요.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자격도 능력도 없어요.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자신이 선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 판결을 내립니다. 임용고사를 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을 합니다. 중식당을 100번을 가도 갈 때마다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식당에 아무도 없고 혼자 있으면 고르기 쉬워요. 그러나 먼저 온 손님이 있다면 그 분이 먹는 음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요. 인간사회는 상호간에 감정을 주고받습니다. 이것을 뇌 과학자들은 ‘거울 뉴런’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뇌세포가 모방하는 기능이 있답니다.

뇌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엉터리입니다. 과학 자체가 엉터리에요. 인간에게 필요하고 편리한 것을 따로 뽑다보니까 선과 악을 과학이 다 정해버렸어요. 이번에 중소기업청 장관후보자가 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한 사람이었어요.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어요. 진화론을 믿는 자체가 바보들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이 지성으로 느끼는 것은 겨우 60~70년입니다.

인간이 수용했던 모든 정보가 길게 잡아도 70년짜리입니다. 70년짜리가 지구 57억년을 단정하고 우주의 39억년을 단정하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건 겨우 돌이 지나 옹알이하는 아이가 박사들 100명 모아놓고 강의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이 하나의 모델이라고 보면 제자들은 어설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설픈 증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라고 했잖아요. 이런 말이 세례 요한의 입에서는 나오겠습니까? 절대 안 나오지요. 어설픈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5-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세례 요한의 주어진 기능을 계속 하는 거예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곧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심판을 선언한 것입니다. 심판을 말하면서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지요. 이건 옛날 엘리야를 모방한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9-10절을 봅시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전하는 복음은 자기 목숨을 시시하게 보지 아니하면 결코 전할 수 없는 내용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걸 요즘 표현으로 바꾸면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접으라.’는 것이지요.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의 전제가 뭡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좀 더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밥 먹고 살기 위해 복음 전했습니까? 아니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럼 자기 목숨 버릴 각오를 가진 사람만 목사가 되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다짐을 해도 결국은 자기 목숨에 연연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 전했으니까 먹을 것은 주님이 주시겠지.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먹을 것은 충분히 주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 이 세상이 심판 받아야 할 이유는 인간의 의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복음을 깨달았다고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저의 두 가지 말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저는 보았어요. 하나는 ‘막 살아라.’는 말에 넘어지고, 또 ‘개인 구원은 없다.’는 말이 돌아서요.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주어진 모든 일은 주님의 뜻으로 펼쳐집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아 계심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셔서 우리는 살아 있을 뿐입니다. 톰 죤슨의 노래처럼 사형수는 고향의 푸른 잔디를 그리워하지만 우리는 쉽게 경험하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셔서 누리는 것임을 압니다. 여기서 또 ‘주님이 살려 두셨으니 나는 의미 있는 사람 아닌가?’라고 할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의미는 십자가를 증거할 때만 의미가 있지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포도를 먹었는데, ‘달고 맛있다.’고 한 사람이 있는데, 왜 이런 말을 했지요?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맏이가 팥죽을 받고 장자의 명분을 판 이야기를 했어요. 거기에서 야곱은 움직이는데 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먼저 태어났으니까 장자지 여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가? ‘달고 맛있다.’를 지옥에 가서도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지옥에 갔다면 천국을 원할 것입니다. 포도가 맛있는 것은 아닌데 거지 나사로가 간 천국이 포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잖아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지요. 이것을 제자들은 지금 모릅니다. 주님께서 전도할 때 ‘ ~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는 “너는 나처럼 죽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말만 잘 한다고 해서 전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 받을 자가 구원 못 받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을 보내실 때 주님의 권능이 함께 가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도 고쳤습니다.”라고 제자들이 기뻐했지요. 그 때 예수님 하신 말씀은 “귀신이 나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지요.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하시는 말씀을 전혀 이해 못했어요.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칭찬하면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이 천국의 삶인데 왜 또 다른 천국을 소망하겠어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아무도 자기를 안 알아주고 외로워서 죽습니다. 지옥은 아무도 사랑할 대상이 없고 사랑하지 않는 곳이라고 토스토에프스키가 말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무조건 사랑하라. 이것이 토스토에프스키의 구원론입니다. 단테의 [신곡]에서의 지옥은 ‘여기에 오는 자는 희망을 버려야.’ 희망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말합니다. 문학가들이 성령을 받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죄임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히고 나는 자유롭게 산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거예요. 본인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2017. 8. 30. 08:5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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