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7. 28) 2강
광주 강의(2017. 7. 28) 41-2
첫째 시간에 길갈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수치가 굴러간다. 이처럼 ‘길갈’이라는 지명을 설정해 놓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가 있는데, 지명을 점을 찍듯이 던져놓는 것은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지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중에 종합해서 예수님의 자기 인격에 집어넣는 식으로 이 땅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길갈의 요소도 나오고, 여호와 이레의 요소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길갈도 일종의 적폐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번제로 드려질 수 없는 자(이삭)가 수양과 동격이 되어 재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삭이 중첩이 됩니다. 이삭1, 이삭2. 이삭1에서 이삭2로 변하면서 여기서 숨겨진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언약이죠.
애굽은 비인격이고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와 싸웁니다. 벌이 무엇인가 하면,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맏아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인격이 아닌 인격이란 뜻이죠. 그 인격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이 아닌 수양으로 오신다는 것, 이것은 중간 과정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수양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삭1, 이삭2 사이에 언약이 등장합니다. 언약은 비인격입니다. 그런데 언약이 등장하면서 비인격인 언약이 인격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인격이신 분이 숨어계시다가 비인격을 내세웠고, 비인격이 결국 인격이 됩니다. 이 과정이 비인격으로 표현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 양심껏 살아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십계명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충성과 봉사를 하나님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직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방학 숙제로 학생들에게 배를 만들어 오라고 해서, 학생들이 종이로 만든 배, 나무로 만든 배 등 각자의 취양에 따라 배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학생들이 만들어온 배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데리고 현대중공업에 가서 15만 톤의 배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선생님이 만들어 오라고 한 배라고 했습니다. 그 큰 배 앞에서 학생들이 정성껏 만든 나무배를 배라고 내놓을 수 없어요. 결국 우리는 배 앞에서 수치스러워요. 내가 나름대로 배를 만들겠다고 설친 자체가 뭔가 큰 착각을 한 거지요.
주님은 개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을 원해요. 그 집단은 하나로 묶어야 돼요. 이 묶음이 언약이 됩니다. 그럼 묶어주는 언약은 어디에서 주어졌는가? 언약은 주께서 남긴 사건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길갈’ 또는 ‘여호와 이레’처럼 어떤 사건을 통해서 언약의 내용이 깊어지고 다양해집니다.
신약에 와서 이것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바뀌는 것인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그냥 바뀌지 않아요. 예를 들면, 사과가 5개 있는데 이것을 상자에 담았다면 한 상자가 되지요. 이렇게 집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사과를 없애버려요. 그러면 상자에 담길 사과는 없습니다. 이제 사과 상자를 새롭게 만듭니다.
이삭1에서 이삭2로 바뀌면서 언약이 나온다고 했지요. 바뀔 때 이삭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삭이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이삭은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둘째아들에게 배신당해요. 큰아들을 작은아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죽이려 하고. 이삭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어요. 둘로 깨졌어요.
깨지면서 그 틈에서 축복과 저주의 의미가 새롭게 생겨납니다. 수박이든 참외든 깨야 그 속의 내용물을 먹을 수 있지요. 이처럼 언약은 깨어져야 그 내용이 쏟아져 나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개인에서 집단으로 간다고 할 때, 아브라함부터 이삭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삭1에서 이삭2로 갈 때 이삭이 미지의 X로부터 배신당하지요. 야곱과 리브가죠. 여기서 배신당한다는 말이 나쁜 의미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이삭 자신이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고 수련회에 참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배신을 당해야 합니다. 이삭이 믿는 아들은 야곱이 아니고 에서입니다. 그러면 에서는 제 2의 이삭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소망하는 최종적인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 에서가 저주받고 박살이 났다는 말은 이삭의 꿈이 좌절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상상적 죽음, 상징적 죽음, 실재적 죽음입니다. 상상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입니다. 자연적 죽음이죠. 상징적 죽음은 자기가 기대하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상상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이 별 차이를 모르겠지요? 그런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연적 죽음은 관찰자가 있어요. 그런데 상상적 죽음을 죽은 사람은 다 죽고 남아있지 않아요. 임종을 옆에서 지쳐볼 수는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요 그 죽음을 체험할 수는 없어요. 죽은 사람은 자기의 죽음 과정을 설명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상상적 죽음은 말할 수 없고, 상징적 죽음을 말할 뿐입니다.
‘내가 죽으면 얼마나 아플까? 심장이 멈춰 숨을 못 쉬면 얼마나 답답할까?’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죽음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뿐이지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상징적 죽음은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대처합니다. 죽기 전에 재산도 분배하고 유언도 하지요.
아무리 죽는 사람을 많이 지켜봤다고 해도 본인이 죽지 않는 한 죽음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겁을 먹고 있고, 두려워할 뿐이죠.
실재적 죽음은 죽었는데 죽은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상상적 죽음, 상징적 죽음은 망상입니다. 실재적 죽음이 진짜 죽음입니다. 인간은 이름 자체가 흙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이 흙이 되는 것이 아니고 흙이 흙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을 준수하는 조건 하에서만 인간입니다. 선악과 따먹지 않은 때는 인간입니다. 따먹는 순간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소급해서 ‘너는 흙이 아닌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때 인간처럼 보이는 망상의 때가 있었다는 것이죠. 흙이면서도 인간처럼 행세한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일곱 살 아들에게 하는 말이 “이 빵은 맛있는 빵인데 손님 대접하려고 산 것이니까 너는 절대 먹으면 안 돼.”라고 하고는 밖에 나갔습니다. 아이가 1시간을 참고 2시간을 참았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안 돌아와요. 왜냐? 엄마는 아이가 빵을 먹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이 없어요.
아이가 빵을 먹자마자 엄마가 들어옵니다. “이 녀석아, 빵을 먹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먹었어. 나는 처음부터 네가 이 빵을 먹을 줄 알았어. 이 나쁜 자식. 죽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참았던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마귀를 에덴동산에 집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인간도 온전한 인간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자랑합니다. 사도바울도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본인이 매일 본인에게 배신당해야 합니다.
착하다고 여긴 내가 스스로 망상을 꿈꾸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결코 착한 자가 아닌데 괴물이 와서 늘 망상을 되풀이 하게 만들어요. “너는 착하니까 복 받는 것이 마땅해.” 이런 망상을 계속 집어넣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의 본색을 알려주니까 내가 망상을 가졌고,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착각을 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것들을 껴안고 산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우리가 ‘길갈’이 되고, ‘여호와 이레’가 됩니다. 왜냐? 구약에 나오는 모든 장소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장소가 아니고 죄 많은 자기 백성과 부딪치면서 나타나는 사건들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질문하신 것 있지요? 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 놓고 후회를 하시는가? 자신이 만든 것을 후회하신다면 하나님도 앞일을 잘 모른다는 말인가?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자인하는 것이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다 퍼주고 다 해줬는데 그는 내 소유가 안 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필요한 것 다 해주고 달라고 요청한 것은 다 해줬는데 결국은 그것이 내 소유가 안 되는 것. 이것을 ‘희생’이라고 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희생관계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버리고 다시 되찾는 것.
그러니까 ‘후회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인간들 납득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혼자 독백으로 하시지 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가? 그 내막이 역사적으로 구체화 되기 때문이지요. 그 사건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버린 자식을 되찾는 이유가 뭡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안 버리는 것이 아니고 버린 후에 되찾음으로 인간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랑과 희생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미워해놓고 다시 사랑할 때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규정했어요. 따라서 구원 받을 사람은 주님께 미움 받고 되찾는 방식이 그대로 우리 안에 사건으로 반복되면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낯선 사랑으로 구원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도움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 받지요. 예수님의 도움으로 구원 받으면 우리의 모습 그대로 구원을 받아요. 우리 안에 달라진 것이 없어요. 선교단체에서 구원을 설명할 때 위에 천국, 아래 인간, 그 중간에 십자가를 그려놓은 것이 있어요. 인간들에게 십자가를 타고 천국으로 건너오라고 해요.
땅에 있는 인간이 십자가를 다리로 삼아 천국에 간다면 천국 가는 본인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그것이 없어요. 그러면 수치스런 인간을 천국에서 수입하는 꼴이 됩니다. 천국이 뭐가 부족해서 땅의 것을 수입하겠습니까? 요단강을 건너갈 때 레위인이 중간에 서지 말고 그냥 물이 넘어오지 않게 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지요. 못 건너가게 합니다. 땅에 살면서 땅의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은 안 받아주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걸 달리 말하면 땅에 있는 인간에서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천국이 없어요. 있어도 모르면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국이 드러났을 때는 ‘나는 이런 천국이 있는 줄 몰랐어요.’라고 하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나는 천국을 기대했어.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해서 천국 가는 자는 없습니다. 천국은 ‘길갈’ 또는 ‘여호와 이레’ 이런 낯선 사건이 네비게이션이 되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반복해서 탕자가 되지요. 빵 대접하는 탕자,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탕자, 헌금하는 탕자, 설교하는 탕자.
탕자가 되지 않으면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탕자가 처음 집을 나갈 때는 아들로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는 자진해서 아들임을 포기합니다. 이런 달라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아버지가 다 조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 바뀔 수 없는데 하나님이 바꿔주십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 바라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아픔은 결핍이고 건강은 과잉입니다. 이 생각이 바로 죄악입니다. 주시는 대로 받아야지 주신 것에 대해 결핍을 느끼고 ‘내가 기대한 것 주세요.’ 이것이 바로 이삭1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삭1이 자기 둘째 아들에게 축복을 다 물려주고 자신이 후원했던 첫째 아들에게는 저주를 내려요. 왜냐? 그 아이가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저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야곱에서 속기 전에는 몰랐어요. 자기는 저주 받아야 하는데 가짜 자기가 자기를 배신한 거예요.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나는 복 받을 만해서 복 받는다. 나는 복을 받을 거야.’라고 자기에 대해서 잘못된 망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똑같아요. 전혀 주재 파악이 안 됩니다. 제자들은 오해하기를 주님 쪽에서 먼저 선택했잖아요. 제자들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책임지고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주님은 거부합니다. 나는 중첩되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주님은 거부하고, 같은 나인데 첫 아담에게 속했던 나와는 주님이 관계를 끊어버리고 둘째 아담 예수님과 관련된 새로운 관계를 껍데기만 빌려서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말이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산다.” 바로 이 작전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꼭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의 말은 알아듣겠는데, 그렇게 되면 기쁨이 없지 않습니까?’ 왜 본인이 기뻐야 하지요? 그것을 보고 본인이 기뻐한다는 것은 제 3의 나를 따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기뻐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태어날 때 들판에 목자들이 있었지요. 이들이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천사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어요. 하늘의 영광이 땅에 오면 평화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정상적인 연결된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평소에 특별히 착한 사람들입니까? 목자가 기뻐하심을 입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 마음입니다. 목자는 천사의 등장에 두려워 떨었어요. 목자가 본인의 감정에 대해서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가를 측정할 수 있는 제 3의 자리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럼 믿음이 뭔가?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아요.’라는 이것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기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믿으세요. 내가 꼭 내가 원하는 수준에 올라 기뻐해야 하나님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배신해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 자신을 배신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속이고, 그것에 의해 내가 피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내가 나를 속이고, 그 벌도 내가 받고, 그 벌을 받으면서 이런 인간이 되게 하심을 주님께 감사하면서 순환 논리가 형성됩니다. 나는 구원의 기쁨을 얻고 싶다. 누가? 내가. 그런데 그 나는 배신당해야 해. 기쁨을 꿈꾸는 것은 헛된 망상이구나. 허망한 것을 알았으니 기쁘다. 이렇게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아브라함, 개인입니다. 이삭도 개인, 야곱도 개인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개인이 아니에요. 갑자기 12아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아들로 바뀝니다. 창세기 끝부분에 보면 야곱이 12아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적인 축복이라면 절대 저주스런 내용이 포함될 수 없습니다.
“큰 아들은 망해라.” 이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개인적으로 축복이라고 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대하며 복을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 입장에서의 축복은 12아들이 모여 하나의 꽃다발을 이룰 때 그 자체가 축복이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어떤 아들에게는 축복인지 저주인주 분간도 안 되는 그런 내용은 각자 할당받은 역할로 보면 됩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머물렀지요. ‘우리 지파 양떼들 잘 먹일 수 있겠다. 이곳에 머물자.’라고 할 때 그들이 오해한 것은 12지파 전체가 복을 받지 개인 지파가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는 말이 ‘너희들이 다른 지파와 힘을 합쳐 전쟁하지 않으면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하니까, 그들이 다른 지파와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에 동참하고 승리한 후에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모세가 허락했습니다.
재단도 따로 만들면 안 됩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이 재단이 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교회이고, 교회를 바라보면 교회 아닙니다. 교회를 망하게 하려면 교회를 칭찬하고 높이면 됩니다. 교회가 작으면 무시할 수 있지만 큰 교회에서 자신이 장로가 되고 헌금도 많이 했으면 그 교회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교회가 진짜 교회를 드러내기 위한 망상이고 허상인 것을 알 때 그것이 바로 진짜 교회입니다. 그러면 가짜 교회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안 됩니다. 그런 교회 없으면 배신할 거리가 없어요. 왜 우리가 막 살아야 합니까? 막 살면서 나 자신에게 배신당해야 해요.
자기 욕심에 자신이 배신당해야 합니다. 남이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 자기를 배신하는 거예요. 모든 고민, 걱정, 후회는 주신 것에 대해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가 뷔페식당에 가서 만족하지 않는 경우는 ‘고구마 맛탕’이 없을 때입니다. 많음 음식이 있어도 이것이 없으면 미흡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왜 뷔페식당에 내가 원하는 음식이 있어야 합니까? 이건 억지입니다. 이 세상은 주인이 따로 있어요. 아프면 아픈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지 왜 건방지게 내 요구를 발설합니까? “하나님, 나에게 고난을 주시면 안 됩니다.” 이게 누구 이야기죠? 욥이 이야기했어요.
전도서에 보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어요. 솔로몬이 이걸 깨닫게 된 것은 평생을 헛짓하며 살다가 말년에 깨달은 사실입니다. 만약 솔로몬에게 독신으로 살라고 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많은 여자와 많은 재산과 많은 지식을 가졌지만 결국 그가 고백한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했어요.
배신당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배신당하지 않겠다는 것은 내 것을 고수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을 철학에서는 ‘동질성 유지’라고 합니다.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나로 이끌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소유로 채우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내가 나의 우상이 됩니다.
우상을 바라볼 때마다 흐뭇한 이유가 자신이 수고하고 땀 흘린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 가사가 생각나네요. 자식 키우면서 고생하고, 남편 구박 참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찬미를 합니다. ‘나는 나다. 건드리자 마라. 건드리면 죽는다.’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무장했습니다. 강퍅한 모습입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 아내가 솜사탕 같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강퍅해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한 나를 사랑해요. 연애시절 가방 사달라고 해서 가방 사줬어요. 만날 때마다 자기가 식사비 다 내고 했는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귈 때 죽이고 싶지요.
남자와 여자를 처음 사랑할 때는 솜사탕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다가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둘 다 적자존재가 되고 말아요. 가구나 냉장고처럼 그냥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얼굴도 보지 않고 말합니다. “밥 먹자.” “리모컨 어디 있지?” 서로 눈을 쳐다본다는 것은 아직은 약간의 솜사탕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솜사탕은 내가 힘을 가하면 저쪽은 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상대에게 뭔가를 요구했는데 상대가 전혀 변하지 않을 때는 말문을 닫게 됩니다. 아직 어린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를 통해서 상대에게 말을 겨우 건네지요. 왜 상대의 눈을 보면서 말을 건네지 못합니까? 그동안 내가 사랑을 줬는데 되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가 올라오기 때문에 차마 상대의 눈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노력에 대해 자신이 배신을 당한 것이지요. 주님이 이렇게 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는 주님을 잘 못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축복에 의해 할당받는 것이지 내 축복을 따로 챙기는 대상자가 아닙니다. 마귀가 사적으로 나에게 이익을 챙기라고 했지 주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나를 위한 망상, 사적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나를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이 사상 외에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됩니까?’라고 물어요. ‘기도해라.’고 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지?’라고 되묻고.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펼쳐져야 합니다. 37절 말씀을 보세요.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지요. 이런 요청을 한 사람은 형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런 잘못을 제자들이 했다는 것을 왜 기록해 놓았습니까? 우리가 매일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요청한 두 제자는 yes, 혹은 no의 답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38절).”라고 하십니다. ‘알지 못한다’는 말씀 자체를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됨으로 자기와 자기의 관계는 끊어지고 자기와 예수님의 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에 ‘나와 나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는 신앙적인 고백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정말 중요한 사건입니다. 날마다 배신당하도록 조치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원천은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늘 새로운 것이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나올 때는 그동안 우리가 사단에 속았다는 것도 함께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처럼 내 기분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기쁘면 천국이고 내가 슬프면 지옥인 줄 알고, 내가 즐거우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가 괴로우면 불평했습니다. 이런 나의 모습을 통해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8. 25. 10:09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