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6 - 시간의 삽입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6 - 시간의 삽입
07,08,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3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전도서 3장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다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때' 라는 것은 시간에 속하는데, 이 시간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전 3: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전 3: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 3: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목적'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목적' 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모든 것이 목적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목적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목적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여기에 하나로 쏠리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말이죠.
그러니 이 목적과 연관성을 가질 때만, 여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들, 즉 인간만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짐승들, 그것들이 관련이 있고, 그렇게 될 때 여기서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의미라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이 주변을 둘러본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사람은 태어나게 되면, "나는 왜 이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었는가?" 라고 하면서 그 의미를 계속해서 찾게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것은 이쪽 의미와 충돌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즉 차이가 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 중심의 의미가 되어버리면, 전도서 3장에 나오는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라는 것과, 그게 서로 같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자기의 목적이 말이죠.
그렇게 사람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게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의미를 찾을 때마다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진짜로 숨겨진 하나님의 목적과 늘 부딪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딪침이 바로 죄가 되고 어둠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가 되니 범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목적이 그렇게 부딪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창조한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기기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중심의 의미를 계속해서 우기다가보니, 거기에 의해서 징벌이 따르고 저주가 따르고 형벌이 따른다는 겁니다.
불교와 유교 !!
하지만 불교의 경우에는 이런 목적이 없는데, 불교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 그 사람에게만 그 무의미가 의미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해탈이 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이 세상 전부를 다 알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고 악이 되고 어둠이 된다는 겁니다.
불교의 고승들이 그 얼마나 점잖은지 모르는데, 그리고 공부도 엄청나게 많이 한다는 말이죠. 그들은 말을 결코 함부로 하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지도 않는데, 그리고 길을 가다가 여자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일을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경우는 성리학에 의해서, 즉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기초해서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을 두고 '선비'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선비가 있던 시대에도 불교가 민중들에게 확산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조선시대처럼 유교사상에 의해서 국가의 기본이 형성되어버리면, 그게 하나의 사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만 국가의 법으로서 장착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법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있는 것과 같은고 하니, 선과 악이 결정되어있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에게 법이 있다" 라는 것은,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악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국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그 악인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처벌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불교가 그런 조선시대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불교가 그만큼 점잖다는 겁니다. 즉 기존의 법망으로도 악인의 축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 그만 전쟁이 터졌다고 하면, 그러면 불교신자들을 군인으로 모집을 해야합니까? 신앙적인 양심에 의해서 그만두라고 해야합니까? 불교는 교리적으로 살생을 하지 않는데,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군사는 모집을 해야하고 말이죠. 그래서 유교 쪽에서 보는 겁니다. 과연 그들이 군사가 되어서 살생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말이죠.
이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
그런데 사명대사의 경우에는, 먼저 스스로 지원해서 군대를 만들어서 살생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먼저 나라가 있어야 불교도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큰 살생을 막기 위해서, 즉 전쟁을 막기 위해서 작은 살생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부처님의 뜻이라고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입장이 변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불교가 살아남는데, 그래서 유교 쪽에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 뭄뚱아리 하나 제대로 살리기 위한 수완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되면 불교는 전혀 국가권력에 위협하는 세력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고려시대의 불교라는 것도, 또한 신라시대의 불교라는 것도, 그게 하나의 정신이 아니라, 대중들이 불교를 믿으니 왕도 같이 믿는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종교가 그만 권력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제가 불교와 유교의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오늘날 기독교도 역시 마차가지라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몸뚱아리가 편안한 것인데, 그렇다는 말이죠. 요즘 날씨가 무척 더운데, 밤에 잠을 잘 주무십니까? 제대로 잘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기도타임이라고 해서 기도를 하면, 그러면 서늘해지면서 잠이 잘 옵니까?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덥다고 하는 것, 목적이 그렇게 온다는 말이죠. 이렇게 더울 때, 즉 자기 신체가 힘들 때, 지금 여기 기온이 견딜 만한지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말이죠. 하지만 날씨가 덥다고 하는 것, 그게 주님의 목적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제가 덥다고 날씨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은 그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의미는 자기 신체의 컨디션에서 나오는데, 그래서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데, 그런데 날씨가 더워서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는 쾌적한 것을 원하고 있는데, 그게 몸이 자연스럽게 요구하고 있는 의미인데, 그런데 기온이 무려 36도까지 몰라간다는 말이죠.
그렇데 도와주지 않는데, 그러면 주님의 목적이라는 것이 여기서 벌써 자기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덥게 하셨는데, 그러나 자기는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분이 나쁜 것과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맞지 않는데, "더워도 감사합니다" 라고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더운데 누가 감사합니까? 무슨 지옥생활도 아니고 말이죠.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말자 !!
그래서 이 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추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데,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37도에도 견딜만한 몸을 자기가 어떻게 주문해서 만들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조금만 온도가 높아지든지, 혹은 낮아지면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컨디션,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전도서에서 분명히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라고 했는데, 그것을 가만히 추적해보면 "너의 인생도 아닌데 니가 왜 건방지게 책임을 지려고 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을 추궁하고 있다는 말이죠. 12사도의 경우에, 그들이 가는 길이 자기가 원해서 가는 길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후회를 했습니까? "사도가 괜히 되었어. 주님이 자기를 따르고 했을 때 거부했어야 하는데" 라고 말이죠.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나, 오늘날의 성도들이나, 그들은 전부가 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부르심이 없으면, 즉 주님의 찾아옴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주님을 찾겠다고 하면서 손을 들고 나서는 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가짜라는 말이죠.
우리는 갈 곳이 없어 !!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의미를 날마다 삭제시키는 것, 그러면 우리 자신의 의미는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목적인데, 그게 전도서 3장에 나온다고 제가 앞에서 언급을 했는데 말이죠.
지금 처음에 했던 강의를 다시 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