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7. 28) 1강
광주 강의(2017. 7. 28) 41-1
마가복음 10장 35-37절을 봅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마가복음은 신약에 있습니다. 신약 이전에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기가 상당히 난해합니다. 난해한 정도가 아니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이스라엘 집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은 개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한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이야기한 것은 별로 없어요. 전체 이스라엘을 향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어쨌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야 되는데,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5:39).’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은 분명히 구약 성경도 자신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구약을 보면서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 제자들은 구원이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대합니다. 모세와 상대하는 제사장들도 사실은 제사장 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모세는 항상 이스라엘 전체를 염두에 두해 행동했습니다. 개인적인 소원을 가지고 나오지 말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예수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탁을 합니다. 이런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이런 실수와 잘못은 오늘날 우리를 겨냥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수한 이유가 38절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자들은 사적인 요구를 하기 위해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틀어막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해놓고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셨어요.
‘알지 못한다.’는 이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라면,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바로 이 점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나 개인의 문제로 기도하게 됩니다. 제가 구약은 집단 구원이라고 했는데, 구약의 이스라엘 집단 이전에 개인적인 관계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었지요. 아브라함을 살펴보면 내용이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수요일 설교가 아브라함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데 앞으로 어디까지 깊이 들어갈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사과의 한 부분이 상해서 벌레가 들어갔는데, 그 벌레를 잡기 위해 사과의 상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후비다보면 나중에 사과의 먹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면서 시작부터 오해를 하는 것이 뭔가 하면, 우리 안에 벌레가 들어있단 말이지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은 벌레. 그러면 그 벌레를 주님이 추적해서 체포하고 죽일 때까지 찾아오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추적해서 이기는 것이 세상 역사입니다.
그 현장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우리 몸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선한 자가 되려고 자기에게 악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손가락으로 악을 끄집어낸다고 자기를 후비고 뜯고 난리를 칩니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두뇌에 영혼이 있는가 싶어 머리 뚜껑을 열어봤더니 영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두뇌의 뚜껑을 열었으니까 없는 거예요. 뚜껑을 닫으면 있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영혼이 없어집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이중 스립’이란 것이 있습니다. 빛이 통과하도록 두 개의 구멍을 만들어 놓고 빛이 입자로 통과되는지 아니면 파동으로 통과하는지 실험하는 것입니다.
이 실험을 하면서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어요. 왜냐? 우리가 관찰하면 관찰했다는 것을 전자 입자가 눈치를 채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줘요. ‘입자로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입자가 구멍을 통과합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이 있는데, 고양이에게 독약을 먹이는 실험이 있습니다.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들여다보면 죽은 것 아니면 산 것 둘 중 하나인데, 확률이 50% 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자연세계에 인간이 주체가 되어 관찰하겠다는 그 순간 우리가 요구하는 왜곡된, 우리의 입맛에 맞게 결과가 나옵니다. 이건 뭡니까? 끝까지 진리에 대해서 자연은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감추고 있다고 멈출 인간들이 아니지요. 벌레를 잡기 위해 손으로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벌레를 찾아가보니까 벌레가 있어야할 자리에 정보만 있고 실체는 없어요. 정보는 기호에요. ‘실체야, 어디 갔니?’ 하고 물으면 정보가 ‘여기 있어요.’ 하면서 ‘벌써 들어오셨잖아요.’라고 합니다. 과학이 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인간이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봐야 됩니다. 관찰하고 측정해서 원리를 뽑아내고 다음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때 이 확인을 본인의 눈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출발이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간 과정도 눈으로 보는 것이고, 이 원리대로 맞네. 라고 확증하는 것도 내 눈으로 보는 범주 안에서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 없고, 자유의지 없고, 신도 없어요. 양심, 사랑, 우정도 없어요. 사랑의 원자는 어디 있지요? 영혼의 입자는 몸 어느 부위에 있을까요?
정보가 되면 모든 것이 하나로 교류가 됩니다. 어느 정도인가? 옆에 정보가 ‘인간들이 영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뇌를 잘라 확인하고 있다.’라고 알려주면, ‘너는 정보만 제공해라.’고 다른 정보가 이야기해요. 그런데 영혼을 찾으려고 두뇌를 열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뇌 뚜껑을 닫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면 눈물을 흘립니다.
실체란 조각조각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고, 조각난 부분을 모아 전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실체입니다. 실체는 나눔이 가능한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서 제 4차 산업의 특징은 인간을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현재의 인간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은, 팔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팔을 끼워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이 한쪽 고장이 나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고. 이제는 두뇌마저 바꿔서 아바타처럼 활용이 되는 거예요.
‘사물 인터넷’ 시대가 되었습니다. 집 밖에서 집 안의 밥솥, 보일러, 세탁기를 원하는 대로 가동합니다. 명령자가 현장이 없고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도 나 바깥에서 내 몸을 움직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치들이 운영되고 있고, 그 외에 많은 부분에서 실시되고 있어요.
나는 실체입니다. 실체는 늙어 죽어요. 그러면 내가 살려면 실체를 쪼개고 또 쪼개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정보로 바꾸면 나는 영원히 살 수가 있어요. 나를 쪼개서 화성에 보내면 그곳에서 다시 조립하면 됩니다. 인간은 어차피 정보의 조립이니까. 원자 밑에 입자가 있고, 입자는 정보로 되어 있어요. 입자는 실체가 없고 정보로 되어 있어요.
그 정보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면 나는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어요. 다시 태어날 때는 이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괜찮은 정보로 바꿔치기 하면 키도 크고, 인물도 잘 생기고, 사전에 모든 질병은 제거되고, 남자로 살다가 지루하면 여자로 살아보다가, 스파이드맨 처럼 힘 센 자로 살 수도 있고 --
이 모든 선택은 그 사람이 회사에 돈을 얼마나 지불하느냐에 따라 고객맞춤 서비스를 해줍니다. ‘아직은 이런 세상은 아니잖아요?’ 라고 반문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세상이 오든 안 오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의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를 개인으로 생각할 입장이 아닙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개인이 아닌 단체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처럼 우리 개인이 영원한 천국에 가고 싶은 거예요. 내가 계속 나이기를 바란단 말이지요. 도중에 내가 사라지고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하고 이걸 원치 않아요. 한 번 나는 영원한 나이기를 원하지 내가 중간이 소멸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러니까 내 안에 벌레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 벌레를 손가락으로 후벼 판다고 벌레를 잡을 수 있습니까? 벌레 잡으려다가 자신을 파괴시킬 뿐입니다. 내가 통째 벌레 덩어리입니다. 내 인생의 일부가 잘못 되었고, 나머지는 괜찮다는 생각은 인간을 나눠서 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고 착한 것 95%, 나쁜 것 5%라는 겁니다. 그러면 95%는 손댈 것이 없고, 5%만 벌레가 먹은 부분입니다. 그러면 95%가 나쁜 5%를 잘 관리하면 되는데, 관리하는 방법은 교회 와서 말씀배우고 실천하면 나쁜 5%도 착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서울에 큰 교회 많지요. 그 교회에서 하는 일이 뭡니까? ‘당신은 바탕이 순수하고 좋은데 약간의 흠집이 있기에 열심히 말씀 배우고 순종하면 점점 좋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듣는 사람들은, ‘나는 성경 대부분은 아는데 일부는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이렇게 자신을 나눠서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터무니없는 요청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벌레가 나의 일부만 파먹은 것이 아니고 이미 벌레가 좋아하는 성향으로 바뀌었기에 벌레를 불러들이는 거예요. 벌레가 우리를 좋아해요. 왜냐? 어느 구석을 먹어도 맛있어요. 이 사실을 인간은 모르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만 알아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나의 대부분은 선한 부분이고 일부 악한 부분만 고치면 괜찮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싫어합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나는 별 문제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인이란 지적, 그리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말에 시큰둥하지요. 자신은 정상이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남에게 큰 피해 입히지 않고 욕먹지 않고 잘 살았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길갈’이란 지명이 나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집단으로 할례를 명했습니다. [복음의 생산] 책을 보면 ‘할례와 세례’라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골로새서 강의하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정석훈 목사님이 걱정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수련회 강의 녹취록은 올리지 말자. 올리면 책을 만들어도 살 필요 없다고 오해한다.’는 거예요. 출판 사업에 지장이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책에는 강의에서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 많이 추가되어 있어요. 책에서 할례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면, 보통 할례를 남자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어요.
할례를 전체를 아우르는 테두리로 설명했어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새로운 할례, 새로운 세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세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 받은 것으로 말했고,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만 단독자지 나머지는 단독자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실체고 우리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체가 될 경우는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실체가 됩니다. 소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악과 따먹은 후에 주님이 인간을 추방한 이상 인간은 흙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이라고 할 때는 마지막 아담이 등장하고 그 아담과 연결이 될 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면 인간이 아니고, 아버지를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아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실체가 연장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들이에요. 이들이 이스라엘이고 천국 백성입니다.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어떤 자세로 출발하는가 하면, 나 개인의 자격으로 출발해요.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은 ‘요놈 잘 됐다.’고 하면서 그런 자를 잡아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갔던 풀무불 속에 집어넣어요. 개인으로 찾아왔는데 그 개인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으면 거기서 개인은 녹아 없어지고 새로운 개체가 됩니다.
초콜렛을 여러 개 모아서 포장지를 벗기고 큰 통에 넣어 불에 녹이면 초콜렛은 하나가 됩니다. 그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그것이 교회고, 그것이 실체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연대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어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개인에서 출발한 사고방식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간단해요. 초콜렛을 녹여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틀로 갑니다. 그래야 구약과 예수님이 연결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여호수아 4장에 보면 ‘길갈’이란 지명이 나옵니다. 20절에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길갈이 뭐냐?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취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길갈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수치가 굴러갔다.’가 됩니다.
‘굴러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치’가 중요합니다. 그럼 뭐가 수치스럽다는 겁니까?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어요. 하나님은 애굽과 상대했습니까, 바로와 상대했습니까? 애굽은 나라 이름입니다. 비인격이죠. 그러나 바로는 인격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벌이 인격적입니까, 비인격적입니까?
죽음의 사자가 와서 벌을 내릴 때 그것이 인격적이었습니까, 비인격적이었습니까? 인격적이었지요. 바로의 맏아들이 죽었으니까요. 어떤 인물이 죽었잖아요. 비인격과 인격은 결합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격과 비인격이 이미 결합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비인격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보이지 않는 배후의 인격에서 애굽이라는 가상체가 나왔다고 봐야 됩니다.
이것이 구체화 된 것이 다니엘에 나오는 네 마리의 짐승입니다. 짐승은 인격과 비인격의 혼합체입니다. 이 짐승은 네 나라입니다. 다니엘이 네 나라라고도 했지만 네 왕이라고도 했어요. 그럼 나라냐, 왕이냐? 요한계시록에 보면 음녀가 말을 타고 있어요. 왕이 짐승을 타고 있어요.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 사물 등의 비인격적인 모든 것들이 고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격과 관련된 비인격들입니다. 물체, 사물을 철학자들은 ‘즉자 존재’라고 합니다. 여기서 ‘즉자’를 빼면 그냥 ‘존재’입니다. 외부에서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있는 자리에 그냥 그대로 놓여 있는 것들을 즉자 존재, 혹은 존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을 존재라고 하면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존재라 하지 않고 ‘실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과 다른 점은 내일을 기획하고 염려하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면 왜 염려하는가? 해답은 몰라요. 그냥 염려가 돼요. 데카당스는 ‘반항한다, 반발한다’고 표현했어요.
그럼 인간이 자기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개선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란 말이죠. 그러려면 누구를 붙들고 해야 합니다. 그게 누군가? 인간은 사회를 붙들고 그 일을 개시합니다. 촛불 집회가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이 왜 촛불 집회에 참석합니까?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지요? 본인한테 이익이잖아요. 그래서 인간만이 내일을 기획하고 생각하고 염려하면서 대비한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한 방에 물리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거짓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라고 했어요.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앞서갑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에서 토끼가 패배한 이유가 거북이보다 앞서갔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로봇이 인간을 흉내 냈는데 지금은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자문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기계에게는 없는 자의식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인공지능은 사물이기 때문에 즉자존재입니다. 그러면 실존은 인간밖에 없어요. 동물이나 물체가 할 수 없는 거짓말을 인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공지능도 이제 농담을 합니다.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인간이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제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과 너무도 유사하게 되었고, 어떤 부분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습니다.
인간들만의 고유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갖고 있는 부류를 종으로 나눴는데, 이제 기계가 그런 능력을 가졌기에 인간만의 부류에 기계가 끼어들게 되었고, 인류라는 종이 파괴될 상황이 왔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이 모든 것을 수치스런 컨테이너로 봅니다.
더운 날씨에 컨테이너 속에 들어가 본 적 있습니까? 완전 찜통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 자체가 컨테이너입니다. 그 안에 수치가 가득한 거예요. 거기에는 개인이 없어요. 그 자체가 수치고 역겨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 없이는 일하지 않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지 않고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절대 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신은 인간의 라이벌이고, 모델이기에 신은 인간의 존재 의미입니다. ‘나는 신처럼 될 거야.’ 이것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우리 속에 심어놓은 거예요.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복음 없으면 나는 역겨운 존재라는 말입니다. 제가 세상을 컨테이너라고 했는데, 창세기와 욥기에서는 궁창이라고 했습니다. 밥상을 차려놓고 벌레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모기장같은 것으로 덮어 놓지요. 궁창은 이와 같은 거예요.
컨테이너나 궁창 안에 있는 것들은 절대 그곳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 속에는 수치스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집단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심판을 내릴 때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할례를 행한 자와 할례를 행치 않은 자.
할례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이 곧 예수님의 몸으로 행한 할례다. 또는 세례다. 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이미 죽은 자와 아직 안 죽은 자를 분류하시는데, 이미 죽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안 죽은 자는 저주 받은 자이지요.
따라서 본문에 나타난 제자가 예수님께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과 연관해서 오셨는데 제자들은 개인적인 필요를 예수님께 채워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이건 구약의 정신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왔을 때 요단강에 홍수가 나서 물이 넘쳤습니다.
그러면 키 큰 사람은 건너고 키 작은 사람은 못 건널 상황이 된 것입니까? 아니죠.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질적인 면에서 이미 집단화 된 거예요. 못 건넌다는 점에서 너, 나 따질 필요가 없어요. 물에 빠지면 누구든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왔어요.
이 확정된 집단을 위해서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강물에 들어가니까 강물이 멈춰서 다 건너왔어요.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정상입니까, 못 건너는 것이 정상입니까? 못 건너오는 것이 정상인데 건너왔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비정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거나 예측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우리가 예측 못할 일이 계속 발생되어야 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일이 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내가 기대한 일이 벌어지면 나의 사적인 실존이 결부됩니다. ‘나는 인생 이렇게 잘 살았다.’하고 나를 집어넣어요. ‘지난 학기 내내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어. 이제 방학이 왔으니 나는 평안히 쉴 자격이 있는 자야. 방학 때는 만사 제쳐놓고 쉬자.’ 이렇게 되면 자기 드라마가 됩니다.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까 좀 쉬어도 된다.’ 이것은 기대가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 인간은 이미 개인으로 굳어진 거예요. 이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면 굳어진 개인은 찢어지지요.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7. 8. 11. 10:14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