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복음 2002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3:5-12
Re..마 3: 5-12 (세례 요한의 죽음)
이름 : 이근호(IP:)
세례 요한의 복음
2002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3:5-12
3: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겟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선지자의 말은 객관적으로 볼 때 참으로 건방지게 들립니다. 속으로 "너 뭐야? 너만 믿음 좋고 다른 사람은 다 엉터리란 말인가?"라는 거부감을 유발시킵니다. 누구라도 자칭 선지자라고, 혹은 신의 계시를 받았노라고 나서기만 하면 뭔가 고상해 보이고 거룩해 보임직도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정말 세례 요한이 복음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다 적용되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복음의 내용과 일치되느냐 아니냐로 판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계시받았노라고 주장해도 예수님의 뜻과 다르면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3:33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동일한 부류를 보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같이 평가를 내립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지적할 대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갈 인간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선정하는데 있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왜 두 분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꼭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 극렬한 용어를 동반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 극도로 악한 환경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열왕기하 22장에 보면, 거기에 미가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유다 나라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서로 손을 잡고 아람 나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과연 이번 전쟁에서 남북 연합군이 승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때 자기 나라의 선지자들에게 물어보기로 한 겁니다.
무려 400명 가량의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이번 전쟁은 두 왕의 승리라 되리라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미가야라는 선지자는 딴 계시를 전합니다. 두 왕을 패배하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의 400명 가량의 선지자들이 거짓 계시를 전하는 이유는,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는 겁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천상 회의를 참관했는데 거기에 있던 악마가 말하기를, 400여명 선지자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어서 모두 거짓 계시를 말하도록 조치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시드기야라는 거짓 선지자가 미가야 선지자의 뺨을 때립니다.
바로 이런 거짓 선지자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보기에 그 당시 성직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쁜 환경 속에서 복음은 말해지게 됩니다. 미가야 당시에 선지자 세계에서 400:1의 비율로 복음을 아는 자가 희귀했습니다. 퍼센테이지로 따져서 참된 선지자는 0.25%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비율은 99.75%입니다. 그러니 거의 전부다가 악한 세상 천지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기쁘디 기쁜 소식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하는 복음이 오늘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여기에 보면, 불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생각하시기를, 악한 자들이 불로 망한다는 것이 무어거리 기쁜 소식일 수 있느냐 하시겠지만, 여러분 미가야 선지자보고 이런 소식을 전해보세요. 그 분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성도에 있어 기쁨이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그것입니다. 이쪽 인간 세계에서의 번잡함 때문에 혼란스럽더라도 저쪽 하늘 쪽의 생각만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이 땅의 걱정은 일시에 다 부질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통해서 저쪽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나님은 사람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타작마당만 정화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확정된 뜻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에 태우겠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만 알면 모든 것이 태평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합니까? 그것은 이 경쟁 사회에서 남에게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승부근성으로 단단히 무장된채 남을 꺽고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다 모으려고 합니다.
승리는 무조건 쟁취해야하고 그리고 그 승리는 이유없이 사수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다보니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해지고 그저 자신의 힘과 재주와 능력 모으기에만 관심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기쁜 소식이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쥐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이 이런 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권력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새끼들의 특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은 나쁜 열매라고 보았고 그 열매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에 태워지는데 곧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 받는다고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진정한 능력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그 분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비록 물로 세례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세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례라는 것은, 저항 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온 몸에 부여받는 것을 뜻합니다. 물 세례란 물로 뒤집어 쓰는 것을 말하고, 불 세례란 무서운 불의 저주를 온 몸에 받는 것을 뜻하고, 성령 세례란, 예수님의 마음과 영으로 덮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다 받아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물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복음 전달의 행위에다 집어넣지 않고 따로 봅니다. 그것은 물 세례가 결코 구원을 결정짓는 능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은 온전히 추가적으로 다른 요소가 불필요할 정도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불 세례와 성령 세례는 둘 다 받아야 구원이 가능한 겁니까? 십자가의 능력이 들어오는 것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 세례란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상태를 뜻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령이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이룩해 놓으신 그 업적을 다 지닌 분의 영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그 안에 불 세례가 같이 포함하게 됩니다. 더 쉽게 말씀드려서, 불 세례란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보면 참지 못하고 달려들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열매는 불에 태워지고, 쭉정이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불 세례를 자진해서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 분은 죄도 없으신 분인데도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짊어지고 가시는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무서운 저주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2:5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은 그 전에 이미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다 받았지만 이제 또 받을 세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실 쓴 잔과 같은 겁니다. 마가복음 10: 38-39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당할 하늘의 저주로부터 빼내어주시기 위해 대신 희생하시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성도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라, 철저하게 불 세례와 성령 세례를 실시하시는 하나님의 확정된 뜻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우리 성도들을 참으로 자유케 하시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물세례와 불세례와 성령 세례를 토대로 하여 우리 성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정 구원의 능력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의 구원됨이 결코 사람의 구원 욕심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었습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이런 복음을 전하고 안다고 하는 것은 미가야 선지자가 가는 길의 재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악한 세상을 보고 원망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만 승리자가 되겠다는 욕심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으로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