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714b히13장22절(형제)-이 근호 목사
안양20170714b히13장22절(형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아까 첫 번 째한 쟁반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했잖아요. 쟁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해놓고 표정을 보니까 다 잊어버린 표정이에요. 우리 자신은 사후적으로 우리는 악이 된다. 따라서 나는 없는데 주님이 계셨기에 내가 새롭게 생긴 거예요. 옛날에는 나만 있으면서 나만 유지하면 되고 키우면 되는데 이제는 주께서 원하는 나를 만들 때는 쟁반이라는 것, 또는 영역, 새로운 주님이 안고 있는 아우라를 우리에게 제공해서 그 안에서 나를 새로운 나로 만들어나가시는데 그게 뭐냐, 말씀덩어리라 하는 거예요. 말씀덩어리.
말씀덩어리의 특징은 복음을 표현한다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인간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것. 그런데 배척한 그들이 곧 나도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라는 이걸 가지고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성.
보편성 하게 되면 느낌이 뭐냐, ‘내 책임 아니네.’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보편성이라 하는 것은 모든 자들의 성질이니까, 성깔이니까 유독 나만이 더 못됐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 한 아담에서 많은 인간들이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그 모든 인간들은 아담 앞에서 하나의 보편성을 갖는 겁니다. 아담의 확장이라고 보면 돼요. 아담의 확장. 아담의 속성이 퍼져있는 것.
그게 보편성이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총체성이 돼요. 총체성. 그러면 우리도 이 몸을 지녔으니까 우리는 아담의 몸이지요. 우리 조상,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 결국 아담에서 나온 거다 말이죠. 아담에서. 과학은 그걸 모르지만. 그들은 말해요. 호모사피엔스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호모사피엔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같은 포유류가 조상이라는 거예요. 포유류는 또 뭐냐 하면 단세포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조상이 없다는 뜻이에요. 원숭이가 조상이라는 말에는 결국 원숭이는 누가 낳는데? 이리하면 결국 조상이 없는 거예요.
과학은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몰라요.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른다는 말은 지금 자기 개인에 대해서 개인 치중으로 삶을 살아가면 된다. 내 삶만 잘 살면 그게 옳은 삶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편성, 총체성, 아담의 자손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잘살고 싶어도 다 같이 망하니까. 총체성이라 하는 것은 이 범위 안에 내가 포함이 되어버렸으니까 나 혼자 잘했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인 거예요.
내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보편성에서 나왔잖아요. 보편성이 다 썩었으면 나도 쓰레기에요. 나도 쓰레기인데, 나는 나만 쓰레기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되지요. 쓰레기는 아무 때나 건져도 쓰레기지요. 부모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그러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왜 돌아가셨는가, 죄 값으로 돌아가셨다. 한다면 이건 부모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아직 안 죽은 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부모를 죽인 죄가 여기 나도 갖고 있으면 나도 부모처럼 나이 많으면 죽을 거다. 죄 때문에 죽을 거다. 죄 때문에 죽을 거 같으면 자기 개인적으로 잘난 체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것은 터무니없는 막말이지요. 이야기 그렇지요? 논리적으로. 보편성 중에 아무거나 뽑았다면, 이게 만약에 빨간 사과라면 바구니 안에 빨간 사과가 담겨있으면 눈감고 뭐든지 집어내어놓으면 뭡니까? 빨간 사과 나왔지요.
그래서 보편성 안에는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과학은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지만, 보편성은 한 바구니거든요. 한 바구니에서는 남 비판에서 어디 비판? 남 비판은 성립이 안 되고 누구 비판? 나 비판이 곧 뭐다? 남 비판이 되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7장 초반에 나와요. 니가 비판하려거든 어떻게 하라? 너도 비판 받아라. 그 비판하는 것으로 너도 비판 받아라. 주님께서는 바구니 입장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예요. 바구니 입장에서. 니 혼자 떨어져 나온 게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닐 경우에는 뭐냐 하면 나는 대단하고 니는 나보다 못하고. 이럴 때는 사랑이 아니잖아요. 이건 개별적이잖아요. 그런데 보편성이 되어버리면 예를 들어서 가정주부가 장독대에 장을 열어놨는데 딴 데 바쁜 일 하고 있다 말이죠. “아이고, 비 오면 안 되는데.” 그러면 남편이 “그 비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러면 이건 개별적이 되지요. “비와? 그럼 당신 바빠? 그럼 내가 옥상에 가가지고 장독대 닫아줄게.” 그것은 한 보편성이 되는 겁니다.
아, 여자들이 결혼한 목적이 뭡니까? 이 보편성 노리고 하잖아요. 결혼해서 개별적으로 고집해 버리면 결혼을 왜 했습니까? 하녀로 취직한 거지. 결혼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나의 확장이에요. 나의 확장. 보편성으로 확장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는 싸우더라도 자기 남편에 바깥에서 욕 얻어먹을 때는 아무리 자기 남편이 나쁜 짓해도 운전을 잘못해서 접촉해도 무조건 이쪽 편, 내게 속한 편에 응원하게 되어있어요. 개인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절대적 개인이라 하는 것은 어떤 보편성을 배경으로 어느 정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고 했으니까 우리보고 어떡하란 말입니까? 타고난 태생이 이런데. 보편성이거든요.
보편성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이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다.’ 이게 진리일까요? 진리 아닐까요? 진리 아니지요. 그럼 진리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진리다. 이것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보편성인 내가 상상한 하나님입니다. 상상한 하나님. 이건 진리가 아니에요.
라캉이란 사람은 이렇게 했어요. 세 가지의 인간은 논리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하는 상상계 하는 게 있어요. 상상계, 그 다음에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상상계라 하는 것은 이미지를 결합하는 걸 상상계라 하고 이미지와 결합하는 걸 상상계라 했거든요. 상상계, 상징계 해놨는데 이렇게 해놓으면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니까 잠시 요걸 상상계, 상징계 해놓고 요걸 잠시 지우겠습니다.
지우고 현실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현실 뒤에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상상계적 현실, 상징계적 현실, 실제계적 현실, 이렇게 보면 돼요. 상상계의 현실은 뭐냐 하면, 사람은 뭔지 이미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미지가 각인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 전부 다 자기 앞에 이미지가 다가오기 때문에 그게 현실로 여기기 때문에 아빠, 엄마로 하는 겁니다. 상상계라는 말을 안 하고 그냥 현실이라고 했다면 “현실은 그냥 이미지지. 눈에 익히니까 아는 사람이고, 모르면 모르는 사람이지.” 이렇게 되지요. 이게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징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의미에요. 의미에는 상대방이 아니고 나한테로 돌아옵니다.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지? 아가씨가 총각 만나 결혼하면서 “저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인데.” 이건 이미지지요. “아이고, 오빠! 오랜만이에요.” 동네 오빠 만났다 말이죠. “너도 오랜만이네. 올라와서 서울에서 같이 사는구나!” 이미지로 끝나면 되는데 이미지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나중에 3,4년 자주 만나다 보니까 ‘저 오빠하고 결혼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의미가 생기지?“라고 이제 오빠를 한 남자로 사랑하는 한 남자로 보일 때 나의 의미로 세울 때 이걸 상징계라고 합니다.
상상계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냥 헤어지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이미 나의 의미가 된 그 남편이라면 남편이 잘못하면 내가 가슴이 아파요. 왜 남편이 없으면 나라는 현실이 깨져버려요. 그런데 아등바등 싸워도 남편 죽어보세요. 젊은 날에 남편 죽어보세요. 사고로 죽어보세요. 본인이 얼마나 운다고요. 아이고 싸울 때는 어지간히 싸우다가 “여보, 가면 어떡해? 나는 못산다. 나는 당신 없이는 못산다.” 막 이렇게 해요. 당신 없이는 못산다. 하지요.
왜냐 하면 남편이 곧 나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편 없는 나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아니 몸이 있는데 왜 존재 못해? 밥 주고 몸 있잖아. 내가 강아지입니까? 밥 주고 몸 있잖아. 내가 강아지입니까? 밥 주고 몸 있게. 아닙니다. 인간은 의미 없이는 못 살아요. 밥 주고 한다고. 로봇하고 인간 차이점은 로봇은요, 건전지 밧데리만 갈아주면 돼요. 인간은 자기한테 의미가 있어야 돼요. 의미가.
그 남편 죽고 난 뒤에 새 시집갔다. 그런데 영~ 성에 안 차는 이유가 자기의 의미의 층에 있었던 그 모든 추억들을 그대로 새로운 남자가 채워주지를 못해요. 채워주지를 못해가지고 새로운 남자 사귈 때는 그냥 혼인신고 하지 말고 그냥 사귀세요. 나중에 또 언제 갈라설지 모르니까.
첫 번째는 이미지 현실, 두 번째는 이것이 나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현실로 보고,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둘 다 나중에 이게 나중에 죽으면 이게 환상에 불과하다.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거예요. 이게 실제계입니다. 이런 것은 다 망상이에요.
왜 망상이냐, 아까 이야기한 보편적인 것. 세상 전부가 나를 위한, 나한테 의미되라는 상징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 늘 따지면 세상은 나 위주로 오는 게 아니잖아요. 서울에 비 왔다고 좋아하지요. 대구는 13mm왔어요. 지금 한 달째. 대구는 가물어요. 서울은 매일 비오고 오늘도 비 온다고 예고되어 있고. 그런데 대구에 비 안온다고 걱정들 하십니까? 왜? 그게 무슨 나의 의미가 돼요? 대구에 비 안 오는 것 하고 무슨 의미가 돼요? 안 되지요. 그러니 얼마나 일방적이고 나 위주입니까?
그러던 그 나가 조금만 있으면 늙어죽어요. 이제. 죽게 되게 되면 그러면 세상엔 왜 태어났지? 내가 세상에 있어야 의미가 있는데 내 죽으면 예수도 의미 없고 하나님도 의미 없고 자식도 물론이고 남편도 물론이고 강아지도 마찬가지고. 내가 죽으면 의미가 순식간에 다 손실되고 없는 거예요. 없애는 그것이 뭐냐, 그게 실제계. 그게 실제에요. 내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그게 실제계에요.
물위의 파도 거품 보세요. 있을 때는 있어 보이지만, 지나가면 이게 거품이 날아가고 없잖아요. 인생은 그런 거예요.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왜 태양은 빛나는가? 나는 지금 남자하고 헤어졌는데. 내 헤어지는 걸 가지고 울어주지는 못할망정 태양은 왜 이렇게 까불면서 반짝 반짝 빛나는가? 스키터 데이비스가 부른 거예요. 옛날 60년대 팝송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가슴 아픈데 파도는 왜 치느냐 이 말이죠. 그게 실제계에요. 실제계. 다시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내가 어떻게 살았던 상관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말을 거론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됩니다.
아까 첫 번 시간에 이야기한 것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성도라 할 때는요, 여기에 있는 단어 있잖아요. 진리라는 거, 이 단어가 나한테 의미 있는 단어로 오는 게 아니고 나 자신도 내가 아닌 나로서 주께서 구성을 했으면 거기에 투입되는 모든 단어도 예수님한테 있던 그 단어가 나한테 그대로 나에게 합류가 되고 여기에 덮치게 되고 구성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진리라 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을 수 있는 자격이 나한테 있어요? 없어요? 나한테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진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내가 진리라고 묻게 되면 뭐가 문제냐, 내가 진리라고 묻게 되게 되면 나의 상징계에 소속돼 버려요. 물었던 내가, 묻는 내가 그 정답을 누가 정답이라고 판정을 내리는가 하면, 물은 내가 판정을 내려버려요. 나한테 납득이 될 경우에만 진리가 돼버려요. 그러면 그 진리는 나의 의미가 돼버린다고요. 의미는 나의 상징계에 속해요. 일방적인 나의 현실로 돼버립니다. 내 위주의 예수님이 되어버려요. 내 위주의 하나님이 돼버려요. 그렇잖아요?
비 이약기해 봅시다. 서울에는 비가 왔는데 대구에는 비가 안 온다. 그러면 대구 사람은 “뭐 기후제 해야 되나? 비가 왜 이렇게 안 와. 마른 장마해가지고 비도 거의 오지도 않고 바닥은 갈라지고. 왜 그런데?” 라고. 넌지시 신에게 질문 한다고요. “하나님이여, 우리 고장에는 비가 안 옵니까?” 묻게 되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지구는 누구 겁니까? 이 지구는. 성경에 지구라는 게 나와요. 이 지구상에 오시리라. 누가복음 마지막에 보면 주께서 구름타고 지구상에 다시 오신다고 했어요. 그러면 지구는 누구 겁니까? 하나님거지요. 그러면 지구의 책임자가 누구에요? 자기 것 자기가 관리하잖아요. 자기 화단을 누가 물줍니까? 남이 줍니까? 본인이 주듯이. 지구가 주님의 화단이라면 물을 누가 줘요? 주님이 알아서 줄 거다 말이죠. 그러면 그 화단의 물을 받아서 큰 채소나 식물이 화단 걱정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안 해야 되지요.
3년 6개월동안 비가 안 왔어요. 엘리야 시대 때에. 그건 안 와야 돼요. 왜냐, 하나님이 관리하기 때문에 자기건 자기가 알아서 관리해요. 제대로 다 아시기 때문에 비를 안 내린 거예요. 3년 6개월 동안. 그게 사후적으로 믿어질 때 신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이 낸 질문에 답으로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날 그런 설교했지만, 내가 뭐 되고 싶다고 모델을 따로 설정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지금 이 모습이 이것이 주께서의 가장 합당한 모델이에요. 더 좋을 수가 없어요. 이 보다 더 좋은 수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현재 이 모습 그대로 더 좋을 수가 없어요. 다른 얼굴 더 손대지 마세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어요. 최고에요. 최고.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그 말이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주인공 되는 그런 상징계나 상상계를 우리는 그건 착각에 불과한 겁니다.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자, 이제 잠이 좀 오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들어갑니다.
자, 보편성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보편성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 책임이 아니고 이렇게 된 것은 아담의 속성이기 때문에 누구 탓할 수도 없고 거기에 한데 끼어가지고 한 다리 끼는 거예요. 군중들 속에 한 다리 끼었으니까 같이 넘어지고 같이 쏠리고 남들 관심 두는 거 뭔데? 뭔데? 끼어들게 되어있고요, 뭐 금리 오른다 하면 걱정하고 또 북한 핵폭탄하면 또 같이 걱정하고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이 보편성. 보편성하니 어려우니까 그냥 바구니. 이 사과바구니. 이 쟁반에 천도복숭아밖에 없는 이 쟁반에 여기에 난데없는 자두가 딱 등장했습니다. 보편성이 깨져버렸어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인간들은 그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에요. 더는 없어요.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 우리끼리가 전부에요. 따라서 살려면 우리끼리라도 합쳐야 돼요.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라도 뭘 기대하느냐 하면 질서를 원합니다. 질서를 위해서 누굴 뽑는가, 왕을 뽑고 지도자를 뽑아요. 누구 좋아라고? 자기 좋아라고. 무질서는 자기한테 힘드니까. 왕 뽑고 전적으로 충성 봉사함으로서 이득은 누가 챙긴다? 내가 챙기는 겁니다.
인간의 개별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으니까. 결국 믿을 것은 우리 바구니밖에 없는데 여기에 어떤 분이 등장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검은색깔인데 예수님만 붉게 왔다 이 말이죠. 이럴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오해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어릴 때 태어나잖아요. 어른으로 태어난 게 아니지요.
어릴 때 태어나게 되면 거기에 가족의 기성세대들 부모들이 뭘 줍니까? 이 세대에 통용되는 의미와 단어를 계속 마구 쑤셔 넣겠지요. 이렇게 할 때 너는 착한 사람이고, 이렇게 할 때 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똑바로 행동해! 니가 행동 틀리게 하고 생각 다르게 하게 되면 너를 가만두지 않고 너를 죽일 거야. 그러니까 니가 밥이나 먹고 살려면 지금 기성 기존의 단어를 니가 습득을 해야 돼. 이게 뭐냐 하면 교육이라는 거예요.
교육받지 않은 인간은 망나니입니다. 나중에 교도소가요. 나 이럴 줄 몰랐습니다. 횡단보도에 빨간불인데 막 건너가는 거예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 죽던지 교도소 가든지 벌금 내던지 해야 돼요. 지킬 것은 지켜주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질서라 하는 겁니다. 질서는 누굴 위해서 있다? 질서는 바로 거기에 공동체 속에 나한테 이익이 있기 때문에 질서를 지켜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생각하는 이 모두가 현재 모두가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 다닌다 해도 예수님 빼놓고 생각하는 건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빨갛게 들어왔다 말이죠. 들어왔으면 이 검은 일반 사람들이 자기 생각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할까요? 못할까요? 못하지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기존에 자기 생각, 자기 잘되기 위한 생각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 했거든요. 옛날에는 병 걸린 귀신 덕분에요. 그러면 병을 낫게 해서 귀신 나오게 하고 병 나으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갈릴리 바닷가에서 활동하는 소식 듣고 많은 사람들이 정어리 떼처럼 우르르 몰려다닌 거예요. 저리가면 저리 우르르. 방탄소년단 이런 거 있잖아요. 빅뱅. 지드래곤. 이런 팬들. 젊은 애들 좋아하는 거. 이런 거 연예인 쫓아다닌 것처럼 소문 듣고 와락 가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당 우르르. 한국당 우르르. 전부 다 몰리는 것처럼.
가을에 추수철에 곡식들이 바람 한 번 불면 이리 쏠리고 이리 쭈르르륵 고개를 다 숙이지요. 같이 바람 부는 대로. 이걸 특이성이라 하는데 이 특이성을 자진해서 하고 싶어요? 안 하고 싶어요? 안하고 싶지요. 애 먹어요. 어떤 애는 7살 먹고 했는데 걱정을 해서 밤에 잠을 못자고 뒤척이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우주과학책을 보는데 곧 행성이 와가지고 지구를 박아버리면 다 죽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걱정이 돼서 잠을 못 자는 거예요.
과연 박는 확률이 얼만지. 영재 발굴단에 수요일 날 보면 나오는 프로그램에 전부 그런 애들이 나와요. 아주 특이한 애들. IQ 적어도 160되는 애들. 생각하는 것이 너무 특이해서 부모들이 애를 먹어요. 장단 맞춰 준다고. 돈 들여 사줄 것 다 사주고. 그 7살 먹은 애가 이런 이야기해요. 자기의 평생의 반을 천문학에 바쳤다는 겁니다. 3년 동안 바쳤어요. 자기 평생의 반을 천문학에 바쳤는데 이제 해결책이 없어서 큰일 났다는 거예요. 그 애는 장래성이나 있지.
예수 그리스도는 뭐예요? 메시아가 왔을 때 사람들이 메시아가 이용가치가 있다고 확 달려들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죄. 죄라는 것은 자기한테 의미 있기에 나한테 손해되는 것이 죄고 이익 되면 의가 되는 게 아니고 나를 불행하게 하면 죄고 행복하게 하면 의가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오기 전에는 통째로 보편적으로 죄가 되는 겁니다. 보편적으로.
왜 목사가 복음만 전해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복음이 빠져버리면 이건 지옥 가는 전세버스 탄 거예요. 또 운전사가 졸음운전해가지고 앞에 가는 50부부 죽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 죽고 있지만. 하여튼 십자가 복음만 빼버리면 아주 교회 오는 게 편할 수가 없어요. 왜? 바깥의 행세 그대로 하면 되니까.
“하나님이여, 나에게 어떤 이익을 주시렵니까?” “뭘 하면 이익주시겠습니까?” 그 사고방식. 예수님 어떻게 하면 떡을 먹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 어떻게 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이런 것처럼 예수가 오던 누가 오던 관계없어요.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그 보편적인 인식이 꽉 짜여있는 한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거기서 죄라는 것을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12제자 중에서 예수님 알아보는 사람 딱 한 명도 없었어요. 12제자들은 다 떠나고 말았어요. 왜? 납득이 안 되니까.
자, 그럼 예수님께서 말을 제대로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게 아까 첫 번째 한 강의에요. 말을 한다는 것은 들을 때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께서 어떤 단어가 나오던 간에 이미 죄의 지배하에 있고 악마의 지배하에 죄 속에 있는 사람은 그 단어를 뭘로 곡해하겠습니까? 상징계. 나한테 이익이 되고 나한테 도움 되라고 저 말씀 줬을 것이라고 곡해를 하지요.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의미는 나중에 성령이 와야 되고 성령이 오기 전까지 그러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돼요. 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오늘 내가 몇 번째 하는지 몰라요.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다? 밀쳐서 쓸모없는 존재라고 밀쳐서 미워해서 죽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에요.
그러면 성령이라는 것은 그 십자가의 그 사건을 앞장세우고 나타나시는 분이 성령이거든요.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뭡니까? 더 이상 예수님을 이용할 수 입장이 안 된다 말이죠. “예수 믿고 천당 가자.” 라는 말 자체가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인이 천국가면 천국이 완전히 지옥 되는 돼요. 나는 갈 수 없는 존재구나! 아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아이, 갔으면 안 되지요. 어디 군화발 그런 흙발을 가지고 남의 깔끔한 집에 들어갑니까? 이 더러운 죄진 몸 가지고 어디에 그렇게 깨끗한 완벽한 의의 나라에 들어갑니까? 말도 안 되지요. 이야기 여기서 끝내버리지요. 안 된다니까요. 안 돼! 못 들어가는 거예요. 갈수가 없어요.
성령오기 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돼? 예수 믿으면 돼요?” “회개하고 죄 이해하고 예수 믿고.” “알았어. 알았어. 천천히.” “회개 먼저 하고 회개하면 주께서 용서해 주고, 용서 받으면 성령의 세례 와서 그래서 나는 어쨌든 천국 가고.” “됐어. 알았어.” 집에 가서 막 외운다고요. 회개하고 한다는 것을.
시작부터가 잘못이에요. 그게 다 나한테 의미가 된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 죽었는데. 그게 십자가 원수인지를 몰라요. 아무도 갈수가 없습니다. 12제자 아무도 못갑니다. 그런데 제자들 갔잖아요. 가있다고요. 주님이 찾아 집어주니까 간 거예요. 성령이 와서 데리고 가니까 가는 거예요.
그들은 나서서 가려고 해요. 자기가. 자기가 엉덩이 먼저 털고 방석 털고 나서서 가려고 하니까 아사라 말아라 된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하고 그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갔지요. 그 현장에 주님은 없고 “이제는 뭐~ 하던 가락 고기나 잡자.” 했는데 주께서 나타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쪽에서 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 쪽에서. 마치 참기름 바짝 친 송편을 손으로 잡으려 하면 미끄러지듯이 자꾸 미끄러져서 안 잡혀요.
그러니까 주님이 내 쪽에서 안 잡힌다는 것은 이미 마지막 때에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겁니다. 지금 내 이야기가 바울과 디모데가 무슨 관계인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울과 디모데가 무슨 관계이냐. 디모데가 바울을 사모하고 그런 거 없어요. 유스드라에서 만났는데 그런 거 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잡아버리면 그 때부터 어떤 작업이 반복되느냐 하면 이미 잡은 것을 또 잡는 그것을 허락을 안 합니다. 주님이 나를 잡았는데 이 잡은 내 팔이 주님을 이렇게 잡으려고 한다면 주께서는 용납을 안 해줘요.
12제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고기 잡으러 갔지요. 주님 그 때 나타났잖아요. 그게 세 번 째 나타났는가 그런 거 같은데. 그 다음에 함께 살았습니까? 아니면 제자들 곁에서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안 보여요. 내 쪽에서는 잡을 수 없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잡으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의 옛사람은 보편성인 옛사람은 뭔가 소유해야 안심하는 버릇이 있어요. 소유해야. 성령도 내 거 만들어야 안심이 되고. “성령 나가지 마세요. 나가면 나 떼치 할 거야. 나가지 마세요. 한 번 들어오면 나가지 마세요. 바짝 기도할 테니까 성령 나가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뭐든지 소유할 때 이것이 나의 의미가 돼요.
나의 의미가 된다면 내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건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더 중요해요. 주님께서 만약에 잡아버리면 주님께서 내 머리를 딱 잡았다 칩시다. 이건 사실은 실습을 해야 좋은데. 형편상 잡았다 칩시다. 내가 팔을 잡아가지고 이미 잡혔는데 잡으려고 하게 되면 이게 헛수고로 끝나지요. 오늘 제목 또 바뀌었다. 헛수고로.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헛수고를 일깨워주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헛수고된다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여기서 나올 게 이것밖에 안 나와요. 감사만 나옵니다. 발걸음 세는 것도, 머리카락 자란 것도, 모든 것이 주께서 붙잡아 준 거예요. 키 큰 아저씨가 애를 잡고 있으면 애는 팔을 잡아서 막 싸워도 못 싸우지요. 레프트, 라이트해도 미처 짧으니까 안 되지요. 주께서 늘 이렇게 붙잡아 주신다는 것을 성도는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성도를 이렇게 예수님이 빨갛잖아요. 성도를 빨갛게 그리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같이 같은 편이니까 빨간 성령 세례를 주시지요. 이걸 제가 대구강의에서는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 세례를 로봇 팔이라고 했지요. 로봇 팔 발진! 삐죽 삐죽해가지고 로봇 팔이 와서 조종하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 앞에 누가 안 보이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입니다. 요 예수님 지워볼게요. 성도한테는 연결되어있어요. 성령을 통해서 연결되어있는데,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니까 사람들은 지금 누굴 보고 있느냐 하면, 이 성도를 보고 있지요. 성도를 보니까 예수님 당시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별 특이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 해가지고 완전히 개 무시 했지요. 말 듣지도 않고. 죽여 버렸잖아요.
똑같은 현상이 우리한테 나타날까요? 안 나타날까요? 똑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나타날 때 이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거예요. 나쁜 짓해서 욕 얻어먹지 말고 복음으로 고난 받으라고 베드로전서에 보면 나와 있어요. 베드로전서에서는 그걸 복음이라 하지 않고 선한 일로 고난 받으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 때에 한 번 보세요. 이번엔 파란 걸로 하겠어요. 어떤 사람이 성령도 안 받아 놓고 방금 요 강의 듣고 지가 성령 받았다고 아까 상상계에서는 뭡니까? 이미지화시키는 거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령 받았다고 이렇게 했습니다. 주님이 준적도 없는데. 이렇게 성도가 받았다 하니까 지도 받고 싶어가지고. 받았다고 치는 거예요. 치고 이건 가짜가 되겠지요. 빨간 것은 진짜 성도 되겠고. 했을 때 둘 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요. 똑같은 단어.
아까 했지요. 은혜라는 거, 진리, 복음,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요. 그러면 바깥사람들이 둘 다 진짜 성도라고 착각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핍박을 해본다고요. 핍박을. “그래, 그렇게 예수가 좋으냐? 응? 니 아버지보다 예수가 더 좋아?” 이렇게 핍박을 하게 되면요 가짜는요, 버티다 버티다 가짜는 자기 의미거든요. 자기 구원하기 위해서 이 짓하다가 핍박을 해보니까 “그래, 그래, 안할게.” 이렇게 되어버려요.
자기가 만든 믿음이기 때문에 자기가 거둘 수가 있어요. 시장에 전 펴놨잖아요. 도로까지 점령하다가 나중에 퇴근할 때 어떻게 합니까? 다 전 거둬가지고 셔터 문 닫잖아요. 자기가 만들어낸 신앙이기 때문에 자기가 회수도 가능해요. 참 편리하지요. 잉.
그러면 이 사람은 욕을 안 얻어먹게 돼요. 특히 젊은 목사들이 복음 안다고 복음 막 전하거든요. 그러면 장로들이 “어디 이게 이 바닥에 와가지고 우리 교회 역사가 80년인데 니가 젊은 게 뭐 안다고. 그럼 그동안 80년동안 당신 선배 다 거짓말쟁이야! 다른 사람은 지옥 갔어? 그러면. 니만 천당 가고.” 장로가 이리 나오니까 자기 재계약도 남아가지고 “예, 설교 조심하겠습니다.” 해가지고 완전히 복음은 날아가 버리고 그런 설교했다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취직해가지고 70세까지 목사 정년 70이거든요. 즈그들이 맘대로 정했어요. 70까지 해놓고 밥 먹고 사는데. 사모님은 좋아하지요. 취직하고 좋아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뭐 잘났다고 신자야. 성령세례 니가 지어낸 게 아니야? 일부러 상상한 거 아니야?” 이리 한다 말이죠. 그럼 이 사람도 뭐라고 하는가 하면, “회수할게요. 다시는 복음이야기 안할게요.” 이렇게 할 수 있다 말이죠. 다들 하는 분위기인데. “입 다물게요. 복음이야기 안 할게요.” 해도 문제는 이 쪽 가짜는 자기가 만들어낸 믿음이기 때문에 성령세례기 때문에 자기가 취소가 가능하지만, 진짜 성도는 본인이 안 하고 싶어도 성령이 가만두지 않는 사람. 이게 진짜인 거예요.
고난 받는 게 취미인 사람 없어요. 12제자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도 틈만 나면 불속에 들어가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제발 좀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 이게 사도바울의 소망인데 성령이 직접 왔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원하는 자기한테 의미가 아니고 주님한테 의미가 되는 일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걸 어떡해. 일어나는 걸 어떡해요.
자기도 파란 거 되고 싶어.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런데 그게 내 뜻대로 안되고 주께서는 점점 더 복음이 의도하는, 복음이 나오는 상황들을 유발하고 만들어낼 때에 이거는 자기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냐, 바로 주의 일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뒤의 12제자의 갔던 길이 이 길이었습니다. 빨간 길. 사도바울에게 주신 길. 나의 갈길 다 달리고 나에게 생명의 면류관 줬으니, 절대로 자기가 잘했다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 주께서는 나를 가만두지 않는 것. 이게 아까 히브리서1장1절에 나왔던 것. 선지자들을 여러 모양으로 그렇게 다룬 겁니다.
히브리서 24절 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라 하니까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과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빨간 연결고리를 확인하라. 그 말이지요. 그럼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오늘 강의한 게 맞다면 이게 신앙생활이 옳다면 조건이 뭐가 필요한가 하면, 조건이 빨간 걸로 합시다. 주님은 계시고, 현존해 계시고, 성도는 같은 빨강으로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돼요? 아니면 뭐가 필요해요? 요것도 있어야 되겠지요. 같이 있어야 되겠지요. 특히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핍박해야 될 조연급들, 엑스트라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요게 바로 현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복음을 위하여 주님에게만 의미가 있는 보편성, 새로운 보편성, 새로운 총체성을 우리가 눈을 뜨고 이해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게 파란 쪽 그리고 검은 쪽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이 가라지에 대해서. 이 불신자에 대해서. 그것도 의미가 있고 다 필요해서 나한테 이런 핍박이라든지 이러한 오해를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도 필요 없는 자들이 아니에요. 주께서 다 필요한 겁니다. 이걸 뭐냐, 공생애의 반복이라 해요. 예수님 공생애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반복시키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짜에게 마땅히 욕해야 되고 미워하고 싶지만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 파란 사람들, 검은 사람들, 하루 세끼 장 누가 봐줬습니까? 내가 봐줬습니까? 내가 그 사람들에게 돈 줬습니까? 그 사람 생존하는데 북한의 김정은 존재하는데 집사님이 뭔가 용돈 보태준 게 있어요? 김정은 배가 툭 튀어나오게 누가 키우십니까? 주께서 키우잖아요. 주께서.
북한의 신자들을 김정은한테 걸려가지고 총살당했다. 그럼 그 총 쏘라고 명령한 김정은은 누가 세웠어요? 주님이 세운 거예요. 총 맞아 죽는 그 사람들은 누가 만든 겁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고 때 죽으라고. 개인적 의미 없지요. “아하! 나 남한에 갔으면 신앙생활 잘할 건데.” 그럴 필요 없어요. 남한에 있다고 와가지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게 아닙니다. 북한에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 못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북한에 신자를 신자로 안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나 안 믿습니다. 지하 교회를 단체로 안 믿어요. 그쪽에서 하는 고백들 듣고 있어요. 제가. 성경 하나 가지고 글자 써가면서 기도하면서 북한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걸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거 믿지 않습니다. 내가 고난 받는 게 내가 신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 라는 게 신자에요.
적어도 나는 죄인이며 우리 북한에 김정은 있는 것도 주의 뜻이며 김 정은이가 어떻게 발각되어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냥 그것마저도 나한테 가장 적합한 감사한 사태일 뿐입니다. 라는 그런 고백들이 복음적 고백이 나온다면 형제인가?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이상 돈 달라는 결국 북한 선교비 내라는 하나의 상품화된 중간 브로커가 조작된 돈 빼내기 위한 그런 놀아난 같이 합세해가지고 연기를 하고 있는, 연출을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95%에요.
나이지리아 어려운데 학생들에게 돈 달라. 필리핀이 어려운데... 그런 식으로 선교비 주면 안돼요. 니가 아는 예수가 어떤 예수냐, 이 말이죠. 불신자들이 있는 것도 이렇게 감사해야 돼요. 가짜 사도가 있는 것도 감사해야 되고.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빨갛지만, 사실은 내가 원한 게 아니잖아요. 언제든지 우리는 검게 되어도 우리는 할 말 없음! 그리고 신앙 아니면서 신앙인척 해도 나는 할 말 없음! 그러니까 몽땅 지옥가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항의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 없음! 그런 고백이 나와야 되죠. 그런 고백이.
그냥 일방적으로 찾아와가지고 니는 내 사람이라고 성령세례 줘버리고 “니가 나를 죽였잖아.”라고. “피 봐라. 찢어진 살 봐라. 이래도 니가 나를 안 죽였어? 너는 보편성, 아담의 보편성 속에 속했기 때문에 니가 특별히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다 같이 잘못한 잘못이 너라는 하나의 개인적 방식으로 그냥 튀어나와서 나를 핍박 했는 그게 니 죄인이야.” 라고 할 때 “아멘, 맞습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뭐 거기다가 키를 달고 “저는 좀 다를 걸요.” 그럴 필요 없어요.
진짜 끝으로 지금 이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이지요. 내일 되면 요런 사항가지고 또 무슨 변화무쌍한 또 사건이 우리를 기다릴 줄 모릅니다. 어떤 변화 사건이. 그럴 때 내일 되면 우리가 빨간 게 아니고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스스로 우리가 까맣다고 보셔야 되고 또는 파랗다고 보셔야 돼요. 우리 자신이.
그러면 성령께서 오늘만 주고 내일은 안 주고 그런 게 아니고 그렇게 만드신 것이 사후적으로 주께서 성령을 주시니까 ‘아! 내가 까마도 괜찮고 파래도 괜찮은데 주의 뜻에 의해서 빨갛게 되었구나! 왜? 예수님의 공생애를 반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내일되면 또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문제는 내일 곗돈 타는 날이라 이거 또 생각하지 않고. 또 다 잊어버리고 모레 되어서 생각난다고요.
그럼 내일은 뭐냐,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럼 모레 돼가지고 ‘어제는 복음 한 번도 생각 안했네.’그렇게 하신 것도 누구라고요?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성도는 개인적으로 반성하거나 개인적으로 자기를 후회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그건 주제 넘는 짓이에요. 후회하고 반성해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사후적으로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다시 돌아보니까, 지금까지 내 된 것이 주의 은혜라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전체를 보게 하옵소서. 너무 개인적 의미만 챙기지 않았습니까.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천사들도 부러워한 그러한 상황인 것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잊지 말고 생각날 때마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