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4장 24절(성령의 보편성)170718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 14장 24절(성령의 보편성)170718b-이 근호 목사
예,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하고 아버지 사이에 성령이 있고, 그것을 보혜사라 14장에서는 보혜사라 합니다. 보혜사가 왔던 상태를 가지고 14장 24절에 보면은 저희가 내말을 지킬터이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 말을 듣는자는 내 말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해서 그 처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는 그 처소, 그 처소가 어떻게 운영되는가 그것을 미리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한테는 이것은 알수가 없어요. 왜냐면 오순절 성령이 안왔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한 이야기이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몸에서 이미 기획,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이 됬으면 그것은 나중에 몸에 지체까지 저절로 확산이 되는 것입니다. 확산되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왜 성령께서 하시느냐? 그것을 설명합니다.
왜 인간들의 제자들의 성심성의와 그들의 개과천선과 왜 그걸로는 안되고 왜 성령이냐하면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여기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단 말이죠 성령을.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의 특징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아는 사은아무게 없게 이 땅에서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하는 기능이 성령의 기능이예요.
알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전부 다 차단시킨 겁니다. 알아서 예수를 믿는 사람을 모두 다 차단시킨 겁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의 요한복음 14장 이야기 나오기 전에, 마태복음 12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언급한데가 있어요. 그 점이 좀 어렵더라도 여러분 오늘 좀 참으셔야됩니다. 어렵더라도 견뎌내야되요.
마태복음 12장 보게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에 보면 사람의 모든 죄와 해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해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왜 어려운 이야기이냐하면은 성령께서는 범위를 보편적으로 넓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착하냐? 나쁘냐? 했는냐에 대해서 일체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작용에 의하면. 성령이 오기전까지는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행함을 하고 어떤식으로 해야 구원받느냐는 사적인 문제예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 주셨고 말씀을 내가 지키면, 내가 지키면 남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킨 당사자 내가 구원받는 시대가 성령을 제껴버리는 시대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되면, 성령 오게되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상관없이 성령 나름대로의 보편이 되요. 보편이란 말이 어려운데, 만약에 성령이 이 동그라미 면적이라면, 나중에 예수님 오시면 성령의 면적이 퍼져버리면, 이것이 점이라고 한다면, 점이 큰 면적이 되버리면 면적내에 이게 바로 보편이 되는 거예요. 보편. 확대가 되요.
여기있는 성격이 성질이 본질이 이렇게 퍼져도 동일하게 모든 구석구석 동일한 성질이 거기에 다 적용이 되게되어 있습니다. 적용이 되는거예요. 성령께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묻지 않고, 니가 예수한테 얼마나 욕하고, 욕설하고 때리고 그것은 일체 묻지 않는다. 인자된 나에게 어떤식으로 했는가 일체 묻지 않고, 성령을 해방하게 되면 완전히 이 보편에 이 성령이 본 보편에 이거는 탈락된 사람,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으로 확인이 될 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런시대가 와요.
그럼 이런 시대가 될려면 이제 머리 잘 써야 되요. 이런시대가 될려면 성령과 함께 있는 예수님이 어떤 면면을 보여줬느냐 하면은, 어떤 인간도 본인의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가 확증이 되게 됩니다. 그래야 성령의 일방적인 보편성이 성립이 되요.
한 사람도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었더라 이러면 안되요. 단 한 사람도 자기행함으로 구원된적이 없었다가 분명히 해야되고, 앞으로도 계속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어야되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옵니다. 아니 12장 29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이렇게 되어있죠?
자 여기 세간이 세간과 집주인과 도둑 삼자의 관계를 한번 봅시다. 일단은 세간은 자기가 알아서 자기 집에서 탈출이 Exodus 탈출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세간밑에 뭐 발 달렸습니까? 요래요래요래. 쌀뒤주가 요래 걸어가가지고 담 넘어 갑니까? 못되지요.
아예 구원될자를 예수님은 뭐로 보느냐. 세간, 세간 살이 세간으로 쳐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간이 되어버리면 이 세간은 도둑이 오던, 집주인이 오던, 때리면 때리는데로 맞아야되요.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런거 없지요. 세간이라하는 것은 물건입니다.
물건과 인격, 물건과 인격의 차이점이 뭐냐하면은 인격체는 얼굴이 있고, 물건은 얼굴이 없어요. 인간이 사회성이 형성될려면 얼굴보고 사회성이 형성되요. 얼굴보고. 얼굴있는 자는 사회성이 성립되요. 눈을 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의 창은 뭐예요? 그 마음의 창은 그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오죠. 뭐가 밝아야한다? 눈이 밝은자는 마음이 밝다 했죠. 그래서 사실은 그 사람들 이렇게 보게되면 저는 이 눈을 보거든요. 눈을 딱 보게되면 눈이 주님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은 형광등이 갈 때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지럽죠? 왔다갔다 왔다갔다. 형광등 갈때쯤 되면.
눈이 관심사가 주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불안해요. 세상에 갔다가 왔다갔다...한쪽은 교회에 걸치고 한쪽은 집에...보는 내가 불안해. 복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예수도 믿어야되고 행함도 해야되고, 왔다 갔다 왔다갔다 형광등 왔다갔다 해야되요.
그래서 그런사람들의 특징을 한자로 하면 ‘욱’ 두자로 하면 ‘교주’ 세자로 하면 ‘한푼만’ 네자로 하면 ‘정신병자’ 다섯자로 하면 ‘복수할거야’ 여섯자로 하면 ‘나도신자다’. 일곱자로 하면 ‘내말빨서게해줘’ 전부다 자기에 관한 겁니다. 자기에 관한.
그래서 성도는 성도가 성령오게되면 ‘헉’ 그 다음 두자로 하면 ‘앗싸’ 네자로 하면 ‘고마워요’ 다섯자로 하면 ‘그냥떠날래’ 여섯자로 하면 ‘너한테준것도아깝다.’ 일곱자로 하면 ‘나 언제데려갈거예요.’ 드론같아요. 드론. 그만큼 안정되게. 세상에 세상과 땅 어느쪽이냐 갈등하지 않습니다. 성령오게 되면.
그 눈이 안정되어 있어요 눈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헉! 그런 것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 한테 하면 ‘나도 신자거든’ 이렇게 나와요. 그 말하는데 얼굴이 막 불안해. 눈돌아 갔어. 애들 막 화날 때 눈돌아 가잖아요. 이 세간 살이 얼굴은요 세간 살이 얼굴은 누가 대신하냐하면 그 집주인이 그동안 그 사람을 대신해서 얼굴을 대신해서 얼굴을 대체한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되고 나는 어떻게 움직여야 되고, 그것을 마귀가 나를 가지고 마귀의 심성, 마귀의 본성가지고 대신 나를 갖고 논겁니다. 마귀의 심성이 뭐냐하면은 내가 신 처럼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신처럼 되는데 방법이 뭐냐? 악은 버리고 선을 취하는 것, 그것이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를 가지고 어쨌든 간에 내가 될수 있도록 나쁜 사람 되지 말고, 좋은 사람 되어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오든 어떤 하나님이 오든 내가 ‘나 이렇게 착해요.’ 라는 소리 하면서 들이밀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심지어 그 착함은 자기 잘못에 대해서 여유분을 마련할 정도가 아니구요. 이것은 어디까지 가냐하면은 자기 자식이나 손자나 자기 가족이 만약에 나쁜짓할때는 내가 대신해서 쿠폰을 많이 모아놓는 거예요. 쿠폰을.
중국집에 가가지고 쿠폰 많이 모아두잖아요. 많이 해 놓으면 내 아이가 못나서 벌받을 것을 어미의 착함의 마일리지가 딱 들어서가지고 ‘하나님이여 저를 봐서라도 우리 딸은 어떻게 너무 심하지 않게 벌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많이 모아놓은 마일리지 어떻게 써먹을 겁니까? 그런데 써먹어야지요.
여러분 종교, 교회 딱 그거예요. 딴 것 아무것도 아니예요. 교회가는 착한일, 예수믿는 착한 일 해서 마일리지 쌓아서 나한테 좀 내가 여유분이 있으면 남한테 나누어 줘서 이웃사랑이죠, 나눠주어가지고 우리 식구 우리 가족이나 천당가자 그것뿐이예요. 그게 전부예요. 그게 바로 세간에 갇혀있는 꼴, 악마가 그렇게 우리한테 그거 외에는 다른 진리를 우리한테 이야기 한적이 없습니다. 마귀가. 그건 진리도 아니지만, 거짓말이지만.
세상에 주님이 담 넘고 올지누가 알았겠어요. 주님께서 답을 떡하니 자세가 좀 건방지다만은 앉아가지고, ‘삐리리’ 불면 우리가 알아서 ‘저 소리는 무슨소리인고?’ ‘주님의 소리다 나가자.’ 문을 열고 들어가 그렇게 구원받는 줄 아는데 아니예요. 주님과 우리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주님과 우리관계 같으면 우리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보편성이 될려면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갇혀있는 그 주동자가 누구냐? 그게 마귀, 악마예요. 그래서 도둑이 와서 우리를 데리고 ‘자지?’ ‘잡니다.’ ‘가자, 가자’ 이렇게 하는게 아니고, 누굴 찾아갑니까? 도둑이.
집주인을 찾아가 집주인하고 좋게 돈 흥정해가지고 ‘이거면 되? 이거면 되겠어?’ 이러는게 아니고, 아예 집주인을 묶어 버리죠. 수갑채우고 포승줄 두 번 더 돌리고 하죠. 그러면 악마가 어떻습니까? 거기다가 입까지 막아버려요. ‘음!!음!!’ 이렇게 하고 있지요. 그러면 아주 당당하게 ‘가자! 이 뒤주야 가자. 이 컴퓨터야 가자!’ 끌고 가는데 이 세간 살이를 보란 듯이 가는거예요. 보란 듯이.
여러분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영화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그 나치때 아버지가 자식한테 기 안죽을려고 그 유대인이 잡히잖아요. 유대인이 잡혀가지고 로마한테 죽을 때, 그 얼마나 아버지로서의 그 참 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부끄럽겠어요. 그러나 자식한테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잡혀가면서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잡혀가면서도 당당하게 걸어가요. ‘아빠 지금 마지막 게임하는 중이야.’ 거짓말 하면서 애 한테 기 안죽일려고 하듯이.
지금 그것은 가짜로 그렇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일부러 마귀가 있는 곳으로 휘익~ 돌게 합니다. 아까 집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교회 좀 자주 다니라 하지요. 휘익~ 일부러 마귀있는 곳에 가요. ‘봐라봐라 저 하는 이야기 너는 훅 빠졌잖아.’ 우리가 주의 손을 잡는게 아니예요. 주님이 손목을 잡고 가는데, 가다보니까 주님 손이 몇 개인지? 옆에 보니까 내 비슷한 동생이, 그래서 양쪽 다 공통점이 있어요. 둘다 마귀한테 잡혔다는 그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이웃사랑이 교회에서 성도끼리 사랑이라하는 것은 뭐냐하면 양쪽다 주특기 자랑하는거 양쪽다 뭐냐하면은 불가능을 다 포함한체 불가능을 내어놓고 교류해야되요. 불가능을.
‘나는 기도잘해서 구원받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 안되고 ‘나는 기도도 할줄 몰라요. 했다하면 두시간 반, 아~난 기도 못해.’ ‘아~~참 기도 잘하네요. 난 세시간하는데.’ ‘나는 내가 안수해가지고 병 나은 사람이 한 40명 되는데, 아 난 그것밖에 못해요.’ ‘아 난 50명인데...’ 전부다 그 자체가 구원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불가능한 요소임을 내놓을 때 비로소 교제가 되요. 교제가.
옛날에 30~40년 전인가? MBC에서 웃으면 복이와요 그런 코미디 프로그램을 했는데, 거기서 구봉서, 배삼룡이 둘다 다 지금 죽었지만, 그 사람들이 프로에 나오는데 양반집 인사법하는거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은 서로 상놈인데 양반인척 한다고 어디서 뭐 대서소를 하나 베껴왔는데 순서를 정해줘요. ‘어험~이렇게 시작합니다.’ 그걸 세상에 어험~하면 되는 걸 가지고 둘다 다 똑같은데 베껴왔기 때문에 ‘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다음순서 저쪽에서 하고 자 이제 내 차례이요 이렇게 한다고.
그 말은 뭐냐하면 둘다 겸손한거예요 둘다. 둘다 다같이 겸손하듯이 성도의 교제라 하는 것은 내가 이런식으로 해서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런식으로 내가 헛 짓 했습니다라는 것. 이런식으로 십일조하고 이렇게 교회 충성,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이런짓 해가지고 나한테 복이나 올까? 구원이나 될까? 상급이나 예수믿는 것은 기본이고 천당가면 상급더 쌓을까? 이런 사기에 넘어가가지고 이런 짓거리를 했습니다 라고 내놓을때만 교제가 되요. 안그러면 교제가 안됩니다.
못난이 3형제 있잖아요. 그런데 물론 이렇게 하게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못난 이것이 자기 의가 될수 있으니 그땐 조심해야되요. 못난 것을 또 자랑질 하는거 있어요. 못난걸 녹음해가지고 ‘니가 못났나, 내가 못났나’ 또 시합해가지고 둘이 멱살잡고 내가 더 못났다고 싸우고 이러면 안되고
어떻게 못난걸 했는가? 그걸 잠깐 설명해드릴께요. 내가 한번 적어볼께요. 내가 못났다. 누구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는 내가 처리할수 없는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악마에 속한 우리를 우리가 뭣도 모르고 예수님 죽였는데 반대해서 주님은 우리손에 죽은 자기손에 죽었던 그들을 도리어 죄인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피를 흘렸단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성령안에서의 보편성, 보편성이라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되는게 내가 못났다가 성립이 안되요. 왜냐하면 내가라고 하면 이게 뭐냐하면 이게 주체가 되거든요. 주체는 상황따라서 이게 바뀝니다. 주체는 상황따라서 바뀌어요. 주체에서 상황따라 바뀌는데 그 바뀔 때 마다 공식이예요.
자아 + 상황 = 주체가 되요. 나는 허상, 허상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상황에 비추어서 ‘그래! 그게 나지!’ 라고 새로운 주체로서 구성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만약에 2017년도 5월 5일이라하면 2017년도 5월 6일에는 또 이 주체가 같을까요? 다른주체예요? 다른주체죠.
자아는 어때요? 동일한 자아예요. 왜냐하면 자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 허구는 자아의 실체는 없어요. 자아는 없어요. 없는데 뭐가 있느냐하면 몸이 있어요. 몸을 자아라고 이렇게 허구적으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어렵지요? 자아라는 것은 없어요.
여러분 신체 머리부터 한번 전신거울 앞에 서세요. 그 중에 자아가 어느지점에 박혀있습니까? 요만한 점으로. 심장에 있어여? 머리에 있어요? 발바닥에 자아가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거울에 비취는 것이 뭡니까? 자아가 비취는게 아니고 뭐가 비춰요? 내몸이 비취잖아요. 내 몸이 비취면 나는 어디있어요? 없잖아요. 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아닙니다. 아 있다 없다를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실제로 박힌 눈으로 거울로 보고 확인하잖아요. 한번 쭉 스캔해보세요. 스캔. 쭈욱~. 내가 어디있어요? 없지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없어요.
그래서 몸이 뿜어내는 효과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자아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하면은 자아란 이 몸에서 자아 나왔지만 여기서 이 자아라고 불러주는 것은 뭐냐하면 바로 남들이 내 몸이기 이전에 남들이 나를 부를 때 우리는 여기서 이 몸에서 ‘나 여기있어요.’ 하고 내비취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할 때 저 여기있습니다 할 때 그 때 그게 바로 아담의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홀로 있을때는 자아라는 것이 없어요. 항상 대리적인 관계가 있을 때 자아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그냥 목마르다 물 마시잖아요. 그런데 물마시면서 요란스럽게 ‘내가! 지금! 나에게! 물을 마신다!’ 이런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물 마시는 사람 없어요. 그냥 물 마셔요. 신체가 목마르니까 신체란 손을 들고 마신거예요.
그런데 딱 마시고 난 뒤에 누가 와가지고 ‘누구야 이 물 마신자가?!누구야!’ 라고 불러주니까 ‘아이고, 내가 마셨네. 내가’ 할 때 내가 나온다 이말이지요 내가. 꿈에 여러분 등장하지요 꿈에. 밤에. 모든 꿈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나지요. 꿈에 자기 본 사람있습니까? 꿈에는 자기가 주인공인데 자기가 안보여요.
어쨌든 항상 몸이 있는곳에 뭐가 따라붙는다? 나 라는 것이 붙어 있는데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그때 그때마다 이 주체가 자기 가치가 달라져요. 주체라는 것은 뭐냐하면은 남들이 불러줄 때 ‘나는 이런사람이라고 이야기 해야지.’ 그 순간적으로 마음먹는 그것이 주체예요. 마음먹는 주체예요. 그래서 주체라는 것은 상황따라 달라져요.
예를 들어서 주체가 혼자 집에 있을때는 효자인데, 예비군복만 입으면 완전히 개되는. 상황에 따라서 나오지도 않는 소리 휙휙 불다가 나중에 마누라한테 걸리기만 해봐라. 괜히, 그 술판에 갔다가 술도 못먹는데 술먹고 완전히 토하고 있단 말이죠. 별로 술도 안먹는데 그 분위기 맞춰준다고.
이게 뭐냐하면은 상황이 내가 뭔가 되겠다 하는 것은요 그 주체가 되겠다 하는 것은 나중에 술깨고 난뒤에 자기가 억지로 재조립해서 그렇지, 막상 상황에 딱 들어가면 그 권세에 굴복하게 되어있는데 이게 뭐냐하면 마귀한테 당했던 그 버릇이다 이 말이죠.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이것은 자동적이예요 자동적. 그동안 이 몸을 악마가 관리했잖아요. 관리한 그 속성이 상황따라 유감없이 나와버립니다 유감없이.그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이 우리집에 시집올려고! 이게 드라마 아닙니까? 근본도 없는게 뿌리도 없는게 시집와서 응! 꼬셔가지고, 임신했나? 이거면 되겠어? 갑자기 봉투 딱 내밀고 유학 가라. 없애버려라 하잖아요. 근본도 없는것들이 어디 감히 간병인으로 들어와가지고 다 쫓아내버리고 자기가 사모님 역할할려고, 이렇게 된다면 그럼 어떤 예를 들어서 그런일이 없는데 예를 들으면 그런게 있다 합시다.
간병인이 들어왔는데 이름이 김선아죠. 간병인이 들어왔다 칩시다. 들어와가지고 품위있는 그녀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들어와가지고 쫓아 낼 때 그 여자가 왜 그 회장님 사모님 될려고 했는가? 상황이 보니까 간병인되어 월급타는 것 만족스럽지 않아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합니다.
나는 간병인으로 사기전과 있는 것을 속이고 간병인으로 살게됬겠다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까 이 집안이 말이 아니고 잘만 하면 사모님 되가지고 그 재벌회사를 몽땅 차지할수 있겠거든요. 그러면 새로운 상황이 왔을 때 뭐가 병행됩니까? 욕심을 더 내게 되죠. 욕심을 내게되는 그 속성을 누구한테 배웠냐 이말입니다. 제가 지금 묻는 것이.
누구한테 배웠어요? 세간 살이가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누구한테 그동안 길들여져 있었어요? 누구한테? 집주인한테 길들여져 있죠 집주인한테.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 오시기전에 이미 악마의 보편성이 꽉 자리잡고 있는거예요 보편성이. 그 보편성에서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요? 구원받으면 나오는게 뭐겠어요? 악마의 심성으로 예수믿는 것 밖에 더 있어요?
악마의 심성으로 삼위일체 믿고 심성으로 율법지키고 뭐 더 있습니까? 다 평소에 ‘나는 신이다, 내가 최고다, 나한테 관심있고’ 그 버릇 그대로 있죠. 이미 악마가, 악마가 뭐냐하면 ‘너는 니가 신이 될수 있다.’ 왜냐 악마 본인이 신 되고 싶어서 반항했잖아요. 악마 본인이 독자적인 노선 걷겠다고 한 그 심성을 세상이 그대로 물려받은거예요.
모든 아담의 자손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성경500독하고 기도 빡시게 하고 백날 해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마지막 목적은 뭡니까? 역시 이런행위가 나한테 투자가 되니까 나는 이런 행위로 말미암아 지금보다 향상된 변화된 나의 새로운 존재다 이렇게 나온다 이말이죠. 그런 목적없이 무슨 교회를 갑니까?
전에 설교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주님이여 죽여주옵소서’ 이런 목적으로 교회갑니까? ‘주여 오늘도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런건 우리교회밖에 없어요. 십자가 마을밖에 없고 다 그렇게 하지 않아요.
사람이 착해야 복을 받잖아요. 나쁜 짓하고 염치없이 복을 달라고 할수 없단 말이죠. 뭔가 하나님 앞에 바친게 있어야 그 다음에 당당하게 복달라 할수 있다. 복 주면 누구것이 됩니까? 남의 것 됩니까? 누구 것 됩니까? 내꺼 되잖아요. 그럼 나는 그 만큼 향상되고 나는 점점 더 절대자 되는데 그 만큼 가까이 approach 접근해 가는 겁니다.
이것은 타고 났어요.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고, 악마가 이미 그런식으로 자기 악마의 집에 세간 살이를 그렇게 다 깔아놨다니까요. 바둑판도 그렇고 가스렌지도 전부 다 악마의 품성으로 완전히 전부다 악마의 작품으로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저기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집주인을 안 찾아가고 아까처럼 금방처럼 앉아서 해 볼까요? ‘삐리리~삐리 나는 십자가죽었다.’ 하면 ‘저건 십자가다. 우리를 위해서 흘린 피다. 찾아가세.’ 악마를 안 거치고 찾아가게 되면 그러면 그렇게 예수믿는 것은 누구 좋아라고 예수믿는 것입니까? 답변해봐요. 누구 좋으라고 예수믿는거예요? 예? 자기 구원받을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교회의 주장은 뭐냐하면 자기구원이예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뭘 하면되지? 목사님 알려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의 피는 우리의 장손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이고~까짓것 믿지. 뭐 어려워요. 예수 피 믿죠.’ 선지국 피도 마시는데 그 피를 못마셔? 내가 좋다는데 뭘 못해 내가 한 행동이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데 뭐 못해요 뭘 마다 합니까?
뭘 안 거쳤습니까? 악마를 안 거치고 다은 독립적인 자립 의지 또는 자유의지가 있고 어떤 정보를 주면 정보를 내가 습득해서 그만큼 향상된다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무장되어 있죠. 이 자의식에. 이 자의식에 무장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보편성은 백날 교회믿어봐야 악마의 보편성이 확장된 것 뿐이죠. 그러면 주님은 우리한테 찾아올 때 어떻게 오느냐? 악마를 거챠서 오잖아요. 악마를 거쳐서 올 때 악마를 거쳤다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예요. 십자가.
이것은 너와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고, 나의 보편성에 니가 함몰되느냐하는 문제예요. 나의 보편성. 니가 어떻게 나한테 하느냐가 아니라 나의 큰 월남치마, 이 월남치마라는 것 여러분 아세요? 주름치마인데 월남치마인데, 펑퍼짐해서 발까지 다 덮여요. 권사님 월남치마 알지요. 월남 안가봤지만 다 아시잖아요. 주름치마. 서문시장가면 많이 팝니다.
발까지 이 치마가 길어요. 옛날 아이들이 엄마한테 이 치마밑에 갔다니까요. 하도 이 치마가 커가지고 ‘엄마 미안해.’ 숨어버렸어요. 숨바꼭질 할 때 애들이 꼬마들이 엄마치마 밑에 숨었다니까 치마가 하도 면적이 넓어서.
예수안이라는 보편성 안에 우리를 집어 넣어 버립니다. 집어 넣고 혼자 못 움직이게 만들어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데 그 동행하는 모습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이 관계해 있잖아요. 그 성령의 관계를 여기에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우리는 성령안에서 같은 처소가 되어서 이동해도 같이 이동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지금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지킨다? 뭘 어떻게 한다. 결국 그 말씀의 완성은 사랑이죠.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말씀의 완성은 뭘 지켰다가 아니라, 사랑이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한거예요. 여러분 다 아는 예 이지만 여러분들이 이 기를 좀 살려야 되니까 여러분 다 아는 문제 답 이야기 해보세요.
어떤 남편이 있는데 평생을 바람을 안피웠어요. 그게 사랑입니까? 쪼다죠. 그게 사랑이겠어요? 나는 간음질 한적없다. 바람 피운적 없다. 그것도 자랑입니까? 정말 남편이라면요. ‘여보 내가 바람도 못 피워서 미안해.’
무슨말이냐 하면은 현재 바람 못피우는 것 마저도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용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 남편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남편 없습니다. 없다고 치고, 왜냐하면 그게 사랑이라는것은 뭐냐 ,사랑이 사랑이 아니고 당신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그게 사랑이예요.
그런데 그 아내 앞에 밝히면 안되요. 반드시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되요? 아내와 나 있다면 중간에 십자가를,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되요. 십자가를. 이 십자가를 보게되면 십자가를 바라보게되면 내가 당신을 명령할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나한테는 없음을 알아요.
모든 부부싸움은 자기한테 권한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부부가 싸우는...뭐 이쪽은 전혀 부부싸움을 안하니까. 모든 부부는 어떤 권한 행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거예요. 권한행사 때문에.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한테 해준거 뭐야?’ 이렇게 되는거예요. 나는 여자가되서 한달에 7백 벌었는데 너는 백수가 되가지고 살림이나 해가지고 더는 더 못산다. 나는 너한테 7백만원이나 벌어주는데 너는 한푼도 안벌고 쓰는 재미로 뭐가 말이 많냐 이렇게 될 때, 권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권한문제. 권한문제가 될려면 보편성에서 탈피해가지고 개별과 개별자의 만남이죠.
개별자 개체. 개체자와 개체가 만나게 되면 이것은 어떻게 해도 뭐냐? 사랑이 아닙니다. 대표자가 없으니까. 내가 나의 대표자가 되니까, 자꾸 자기 권리만 이야기 하는거예요 자꾸 자기 권리만.
이건 뭐 실제로 예를 드는건 아닌데요. 아내가 바깥에 몸에 피곤하다. 그러면 분풀이를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남편보고 이제 분풀이를 푸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따라 남편이 반듯하네. 뭐 시비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도무지 찾을수 가 없어. 아내가 오면 밥상 탁 차려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뭐하나 딱 걸렸다 하면 그 틈새에 틈새시장을 노려 그 틈새에 오늘 있었던 모든 스트레스를 다 풀어버립니다.
그것이 사람이 세상 사는 방식이예요. 풀지 않으면 폭팔해버리니까 안되요. 만만한게 집안이기 때문에 집안 가족들에게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남편은 쓰레기통이죠. 아내도 마찬가지고 쓰레기통이예요. 그래야 부부가 유지가 되요. 양쪽 다 쓰레기가 되야 유지가 되지 한쪽이 선인, 신성 이렇게 나오면 못 삽니다.
한쪽이 도사, 도인이 되면 안되요. 한쪽이 천사고 한쪽이 악마되면 안됩니다. 둘다 천사되면 물론 안되고, 둘다 악마가 되야되요. 왜? 출생지가 악마이기 때문에. 둘다 세간 살이이기 때문에. 둘다 못난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평소에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도대체 당최 어떤 점이, 어떤 점이 악마에 악마를 대변하는 성격이냐를 이제 97세 살때까지 너무 끌었습니까? 95세까지 죽을 때 까지 계속해서 펼쳐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나의 뭐가 되느냐? 나의 피해자가 되요. 나의 피해자. 나는 가해자가 되고. 그럼 나는 내가 죄인되는데 드디어 성공한겁니다. 남들은 다 피해자로 다 만들어 놓고 자기의 성질의 분풀이로 다 만들어 놓고, 자기는 ‘아이고 속 시원하다.’ 이런식으로 인간들은 살아가기 마련이예요.
인간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인입니다.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인이 되요. 카프카(Kafka)라는 독일 작가의 ‘법 앞에서’ 라는 단편작품이 있어요. 단편작품이 있는데 시골농부가 호출당했어요. 어떤 그 재판받으라고 호출당했는데 문은 열렸어요.
문이 열렸으면 들어가면 되는데, 앞에 문지기가 있어요. 문지기가 있는데 문지기가 하는말이 ‘너 앞으로 계속 만나는 문지기 너 감당하겠어?’ 문은 열렸는데... 그 문이 법의 문이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은 인간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처벌 받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처벌 왜 받는지 그 이유는 니가 알아서 채워야 되요. 니가 알아서.
참 그 책이 심오하지요. 사람은 별 나쁜 짓 하지도 않았는데, 사는게 이렇게 힘들어요. 사는게. 그냥 산속에 혼자 살면 힘든거 모르는데, 그 산속에 가도 5일장 있잖아요. 5일장 내려와서 나이키라도 신발 살라하면 힘들어요. 이거 분명히 3만원짜리 같은데 5만원, 10만원하네. 그걸 깍아야된다는 그 괴로움 미치는 거죠.
좋은관계아니고 나쁜 원수관계되야한다는 그런 것부터 해서 모든 그들 찌끄러기가 다 싫어요. 산속에 그냥 전기 쓰고 사는데 가끔은 누가 오느냐하면은 전기검침하러 와요. 그것도 귀찮아.
산다는 자체가 이유도 모르는체 벌받고 있으니까. 그 이유를 누가 알아야 되는냐. 본인이 살면서 그것을 마주쳐야 됩니다. 분명히 범죄인으로 호출해놓고 아무 소식이 없어요. 나를 호출한 판사쪽에서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냥 문지기만 있어요. 들어갈려고 하니까 ‘감당하겠어? 너? 갈수록 점점 죄인되는데 힘든데 감당하겠어?’ 결국 그 농부는 죽어버려요. 왜 죽는냐? 죄인으로 죽어요. 뭐도 모르는체? 죽을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체 죄인으로 죽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성경 내용을 잘 이야기 했는지. 그래서 카프카의 대목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사람이 왜 죽는지는 모르는데 사형할 때 사형 방법이 뭐냐? 그 사람의 신체에다가 재봉틀로 뭐하냐하면 재봉틀로 그 사람의 죄목을 죽는 순간에 죄목을 자기 신체에다가 타투, 문신을 새겨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 멀쩡한 몸이 죄 지은게 아니고 원래 이런 죄목을 잔뜩 짊어 진 체로 다만 내가 내 죄를 모르는체 갔다가 마지막 사형당하는 그 순간에 내 몸을 보니까 원래 이런 죄목들이 나한테 삽입되었기 때문에 그 삽입된 죄가 효과, 효력을 나타낸다고 나는 한평생 힘들게 살아야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게바로 복음 아닙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거든요.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뭐를 부르러 왔다? 죄인! 타투가 되어있는 인간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이죠.
중풍병자가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가 중풍병 고치러 왔어요. 친구하고 조를 짜 가지고. 하여튼 존재하는 것이 남한테 피해를 줘요. 대기표를 뽑아야 되요 사실은. 대기표 순서표를 뽑아야 되는데, 이게 사람이 아무리 급해도 지붕을 뚫고 하이킥이예요? 뭐예요. 지붕뚫고 내려오는 그런 반칙이 어디있어요. 남들은 뭐 지붕 못 뚫어서 못 뚫습니까.
사람이 점잖아야 되잖아요. 뭔가 경우가 바라야지, 규칙이 있는데 지붕뚫고 내려왔어요. 수리비 만만치 않을거 같은데 견적 얼마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붕 뚫고 들어왔을 때 그렇게 뚫고 자 하는 그 염원이 목적이 뭡니까? 집사님 목적이 뭐였을거 같아요? 그 사람들의 목적이.
중풍병 낫게 해 달라고 했죠. 참 주님을 모독해도 보통 모독한게 아니예요. 중풍병 낫게 해 달라는 거예요. 뭔데 하나님이 자기 중풍병 낫게 해줬습니까? 낫게 하겠어요? 너 뭐 잘났다고. 아까 이야기 했지만 모든 문제는 뭐가 생긴다? 자기한테 뭔가 요구할수 있는 권리가 자기한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건 마귀 심성이예요.
주님께서는 중풍병을 낫게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버리죠. 죄를 용서하니까 중풍병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이쪽의 보편성 그게 중풍병자 친구들 입장에서는 ‘중풍병! 중풍병! 낫는거! 낫는거!’ 목적으로 병 낫는거 목적으로 하다가 그 보편성에 있다가 고치고 낫더니 그 죄의 보편성은 날라가 버리고, 아니 그 병의 보편성은 날라가 버리고 죄 용서해주시는 분의 보편성안에 모든게 휩싸여 버렸습니다.
그럼 묻습니다. 그 중풍병 걸린사람 천년 살았습니까? 만년살았습니까? 늙어 죽었겠지요. 늙어 죽었잖아요. 뭐 결국 죽었잖아요. 이제는 그리스도 죄 용서 앞에서는 용서 받고 난뒤에는 죽을 때 중풍병 걸려 죽으나 그 병이 도져서 죽거나 암에 걸려서 죽든지 그것은 주께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이제 그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아까 주체 이야기 할때에 자 공식 이야기 해보세요. 뭐 + 뭐는 주체다? 자아, 이 허구입니다. 자아는 없어요. 신체 + 상황이 되게 되면 이게 ‘나는 기타잘쳐’ 기타 잘치는 사람 보지도 못했어요. 그 동네에서 자기 반에서 잘쳐. 그러다가 전문가 앞에 가면 아휴 기타 때려부셔버려요. 주체가 바뀌어요. 주체가 바뀐다 이렇게 되지만 사실은 정답이 아니고요, 이렇습니다.
이렇게 주체가 바뀌는게 아니고 여기에 물결이 있다 물결. 물결, 주님의 성령의 물결. 성령의 물결에 우리 몸이 사해처럼 동동 떠다닌단 말입니다. 떠다니게 되면 여기 A지점에 주체가 다르고, 둥둥 떠다니는 동일한 인간이 B지점에 왔을 때 주체가 달라져요.
아까는 내가 어떤 주체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하면 내 자아가 미리 예상하게 되고 목적으로 삼을수 있어요. 목적 삼으면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 될수 있어요.
‘주여 이런 인간되게 하옵소서.’ 술 끊고 담배 끊고 뭐 커피도 끊고 다 끊고, 자기가 생각하는 괜찮은 존재를 미리 땡겨서 상상해서 그 상상에 맞추어서 목표를 잡아가지고 내 기도빨이 어느정도 위력이 있는지를 중보기도 있는지를 시험, 측정, 시험 해보겠다는 시험에 빠지게 되버리죠. 그러면 그렇게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는 주인공 이 누구입니까? 나.
이때 이 주체가 있을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이렇게 되옵소서 하면 주체A, 주체A가 가상했던 주체B가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폐쇄적이죠? 자아 패쇄적이죠. 그럼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자기가 목표 설정해 놓고 여기서 기도할까요? 십일조 할까요?
이런식으로 자기 즐거움, 자기가 즐거운 어떤 종교생활 하게 되면 이게 바로 취미가 되버리는 거예요 취미. 오락이 되고. 도 닦는재미, 도 닦는 재미, 날마다 향상되는 재미.
이걸 가지고 외부에서는 경건했구나, 거룩하구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취지에 맞구나 이런식으로 막 구라를 막 떠니까 자기는 평생을 이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못 벗어나고 이걸 또 자랑질을 해야되거든요. 자랑질 할려면 이 간증을 이 과거사를 자기의 과거 역사를 자랑질할 맞는 맞춤교회를 찾아가야되요.
찾아갈 때 어떻게 찾아가? 약간 봉사해 본다구요. 봉사해가지고 우리교회처럼 봉사하나마나 이렇게 가만 있으면 그 교회 안가고, ‘아이고 성도님 이렇게 봉사하니까 성령받았습니다.’라고 칭찬들을 하게되면 자기가 외부적으로 확증이 되니까 좀 더 있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성령받지 못한 사람은 악마의 품성 때문에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기보세요. 이사람 뭐냐하면 주체가 A에서 바뀌는데, B를 예상을 못한다는 거예요. B가.
내일 내가 뭐가될지 예상을 못하고 더 나아가서 예상하면 안되요. 오늘 염려는 오늘로 하고 푹 주무셔야되요.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아주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다른 것 못 물어보고 이렇게 물었어요. ‘잠은 잘 주무십니까?’ 잠은 잘잔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 지구 75억 인간중에서 잠 잘 자는 사람 나와보라 그래요. 현재 75억 인구중에서 잠 잘 자는 사람 나와보라 그래요. 숫자 몇 명 되겠습니까? 문재인? 지금 못 잡니다. 여러분 가운데 잠 잘 주무시는 사람 누구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예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잠이라 하는 것은 미리 온 죽음이거든요. 내일까지 단절되어 있으니까 죽음이죠. 죽음이란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이 죽음 이거든요. 그러니까 잘 때, 가세요. 그냥. 주무실 때 ‘안녕~ 자식들아 안녕~ 나 요걸로 간다. 그런데 에어컨좀 틀어주고 갈때라도 시원하게 갈테니 안녕~’ 죽음이란 매일같이 현실화시키는 장차 올 죽음을 미리 당겨서 성취시켜서 현실화시키는 것이 잠입니다.
그래서 잠을 안 잔다 하는 것은 이 무슨 악마의 심보예요. ‘못 죽겠다! 내 뭐 할 일이 있어. 내일 뭘 해야되!’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절벽에서 손을 놓으면 되는데, 절벽에 손을 놓는 것이 잠이거든요. 밤은 깊었는데 절벽에서 손을 안 놓네. 발가지고 손을 꽉 찍어버려.
그냥 놓아야 되는데 그 밤 만큼은 제발 손을 놓아야 되는데, 밤에도 내일 걱정해가지고 손을 못 놓는게 자기 상상한 주체B 때문에 A가 지금 힘들어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한테 가해자가 됩니다. 참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여자는 항상 한발은 죽음에 있고, 한발은 현실에 있기 때문에 여자가 정말 지혜롭다 라구요. 왜? 죽음을 생각해볼 때 이 땅에서 연약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남자는, 여자의 이름은 뭡니까? 생명이예요. 영생이죠. 그런데 남자이름은 뭡니까? 흙 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남자는 맨날 흙 위에서 왔다갔다 해요. 땅덩이 흙 위에서 흙. 결국 내가 하는 행세가 나로 하여금 흙으로 밀어내는 중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자기는 최고로 알지만 사실은 여자보다 강하지만 강한자가 바보예요. 그래서 주님의 이 땅에서의 공유라 주님의 처소라 하는 것은 약한자들만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약해서 죽거든요. 약한자로서 주님께서 돌아가셨고, 사도들도 때리면 때리는대로 맞으면 맞는데로, 잘된 것은 잘된대로 받아들이고, 못난 것은..
내가 가난에 처할줄도 알고 부에 처할줄도 알고 이것은 내 소관 아니니까. 내 소관아니니까 그냥 내가 물위에 떠다니는 거예요. B를 몰라요. 내일 내가 뭘 될지를 몰라요.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지 뭐.
그 살려달라는 권한이 나한테 있다? 없다? 없어요 어차피 세상살이는 독자적인 세상살이 없어요. 주인이 누구냐가 다를 뿐이지 어차피 잡혀있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체포되어 있기는 마찬가지 거든요.
이제 갑자기 우리가 만약에 쌀뒤주 압니까? 여러분 쌀뒤주 압니까? 만약에 우리가 쌀뒤주라고 합시다. 사도세자 2주동안 갇힌 쌀뒤주. 쌀뒤주가 이렇게 있다고 합시다. 있는데 우리가 쌀뒤주라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 뿐이예요. 이것을 고칠려고 하지 마세요. 타고난게 나 밖에 모르는데 나만 사랑하는데 그걸 어떻게 고칩니까?
뭐 결혼이 뭐고 감동 먹는다고요? 아이고 그거 속지 마세요. 인간은 자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감동 안먹어요. 궁극적인 감동은 자기에게만 감동 먹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해줬으니까 나는 당신한테 감동해서 나도 당신을 사랑해.’ 라는 내가 얼마나 대견한지.
결국은 자기한테 감동먹잖아요. 핑계는 남 핑계대지만 결국 자랑질은 결국 누구 자랑질입니까? 마지막 남은 것은 자기 자랑질이예요.
그러면 우리입장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니까 안고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 우당탕탕 이쪽 주인하고 담넘은 도둑하고 한바탕 싸우는 것 여기에 대한 목격자를 가지고 이게 바로 12사도들입니다. 12사도.
사도가 때려도 복음전해야 되니까, 나에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가 너에게 주노니 주의 이름으로. 악마를 이긴 그 소식에는 내가 전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미 월남치마 속에, 오늘 제목을 월남치마라고 하면 아무도 모르겠지. 그냥 처소 집에가서 생각해봐야해요.
이 안에 들어있는 사람 같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곡해받고 오해받고 아버지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너는 너의 아비는 악마다.’ 라는 그런 오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을 똑같이 반복되시거든 그런 현상일어나시거든 여러분들을 이미 예수님의 성령의 보편성 안에 속했다고 보시면 되는것입니다. 오늘 제목 나왔다 ‘성령의 보편성’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와 함께 있기에 모든 율법의 완성이 주의 사랑인 것을,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