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170714
안양20170714a히13장22절(형제)-이 근호 목사
오늘은 마지막 히브리서 끝부분 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이 마지막인데 22절부터 끝에 가서 보면 사람이름 나옵니다. 사람들이 거론되어 있어요. 편지니까. 히브리서1장에는 아무런 사람에 대해서 소개 없다가, 히브리서1장에서는 뭐냐 하면 마지막 때에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맨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하나님께서는 그냥 마냥 숨어계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분명히 하나님 쪽에서 나타냈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을 못 붙잡는 사람은 어떨 수 없는 거죠. 맨날 하늘 쳐다본들 하나님 어디 있느냐, 이렇게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 이 땅에 자기 자신의 흔적을 남긴 거예요. 그것을 이스라엘한테는 뭘 남겨놨느냐, 바로 율법과 그리고 또 하나 더 있지요. 율법과 선지자로 나타났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선지자로 말미암아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칸영화제 같으면 카펫이라 볼 수 있지요. 카펫을 애들 놀라고 깔아놓은 게 아니고 그 위로 누가 밟고 온다는 겁니다. 그 위로. 영화배우들이 감독이 밟고 들어오잖아요. 누가 밟을까요? 하나님이 스스로 카펫을 깔고 하나님이 스스로 그 위에 밟는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은 히브리서에서 은연중에 계속 강조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걸 은연중에 강조한 것을 내가 달리 표현해보겠습니다. 말씀덩어리. 인간이라는 눈에 보이는 껍질이라면 하나의 만두의 외피라면 속은 말씀덩어리죠. 보통 손자나 애들 맘에 드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이고, 이쁜덩어리 하잖아요. 아이고, 사랑덩어리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말씀덩어리로 보고 선지자와 더불어서 선지자를 밟고 마지막 때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성도라 하는 것은 옛날 선지자의 길을 남긴 똑같은 취지로서 말씀덩어리로 이 땅에 남겨두는 겁니다. 말씀덩어리라 하는 것은 말씀은 뭐냐 하면 내용이 되겠고요, 덩치 덩어리라 하는 것은 이것은 형식이 되겠습니다.
내용과 형식이 결합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복음이 표현되는 겁니다. 복음의 표현. 내용은 말씀 형식은 하나의 그릇이에요. 그릇에다가 말씀이 다가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생활의 태도, 이것이 뭐냐 하면 다 복음에 관한 복음의 표현으로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선지자를 통해서 옛날에는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그럽니까? “니가 건방지게 나한테 그런 소리하다니? 니나 나나 똑같은 인단이잖아.” 이렇게 사람들이 하겠지요. “니가 나보다 공부를 많이 했어? 니가 똑똑해? 니 어느 대학 나왔어?”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뭐냐 하면 말씀덩어리이기 때문에 나를 표현하는 게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말씀을 표현해온 겁니다. 그러다가 인제 마지막 때에 성도가 등장하면 성도가 옛날 선지자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본인이 본인을 무시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본인이 본인을 무시하면 안돼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서 나 인생 성공했다. 실패했다. 나 출세했다. 잘산다. 못산다. 그런 잣대로서 그런 평가를 자기한테 내리지 말라 말이죠. 말씀이 내가 가난하게 만들면 가난하게 되는 거고 말씀이 부하게 되면 부하게 만드는 거고, 중요한 것은 나의 표현이 아니고 복음의 표현입니다. 복음의 표현.
주님의 표현으로서 나타나게 되면 남들이 나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그렇게 휘둘릴 필요가 없다 말이죠. 휘둘릴 필요가 없어요. 이건 우리 집안 이야기인데 제가 결혼하기 전에 어디에 처음 소개 시켰느냐 하면 우리 집안에 장례식 할 때 성당 장례식 할 때 온 집안 다 모였을 때 고모 성당에서 장례식 할 때 그 때 제가 넌지시 들이밀어 봤어요. 이런 분하고 사귄다. 이렇게 하니까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우리 어머니죠. 위에서 스캔하는 거예요. 훑어보는 거예요.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어머니 경우는 훑어보지요. 그 스캔하는 거, 그 훑어보는 거, 거기에 우리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결혼하고 난 뒤에 제 아내 말은 “참 웃기더라.” 별 잘나지도 않았는데 되게 잘난 체 하더라. 이제는 식구가 돼가지고 아내한테 지금 봉양을 받는 입장에 있어요. 옆집에 있어서. 이제는 스캔 뜨는 입장이 아니고 제 아내 없이는 못사는 입장이 됐지요. 결국은 복음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오늘 제목이기도 하는데, ‘소중한 것’이에요.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소중한 것. 그런데 마음에 소중한 것이 들어있지 않으면 모든 변화가 다 나한테 걱정으로 압박을 줘요. 근심걱정으로 변화되어서 나한테 오는 겁니다.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으면 그게 걱정이 되어서 날아와요. 그래서 이 히브리서를 끝내면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보고 히브리서를 보면서 이걸 먼저 항상 생각해야 돼요.
“무엇이 신자가 아닌가?” 부터 시작해야 돼요. 우리는 자꾸 신자 되려는 그 선입감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무엇이 신자 아닌가?” 라고 출발해서 성경 속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신자가 나오잖아요. 이래야 신자라는구나! 라고 하고 다시 바깥에 나와야 돼요. 나와서 다시 물어야 돼요. 무엇이 신자 아닌가?
처음의 무엇이 신자 아닌가? 하고 두 번째 무엇이 신자 아닌가? 하고 같은 문장이지만 같은 뜻이 아닙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시작을 뭐냐 하면 “무엇이 신자가 아닌가?” 제가 답변을 일방적으로 내려 볼게요. 무엇이 신자가 아닌가 하면, 주일성수 안하는 것, 십일조 안하는 것, 성경 안보는 것, 교회 봉사에 태만히 하고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살지 않는 것, 이런 게 신자 아닐 거라고 해서 교회 다닙니다.
이미 교회 올 때부터 본인이 신자되겠다고 작심하고 마음먹는 순간 신자 아님이 같이 병행해서 같이 여기에서 정립이 돼요. 나처럼 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여기는 뭐냐 하면 사교단체지요. 교회라는 게. 이걸 소위 커뮤니티라고 하는데. 하나의 공동체. 사교단체에요. 사교단체해가지고 찬송하고 예배하고 있잖아요. 그거 그대로 흉내 내고 따라 붙이기 하는 거예요. 모방도 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뭘 하고.
그러다가 두 번째 뭐로 바뀌는가 하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요. 성령을 통해서 성경 속으로. 성령이 아니면 성경 속으로 못 들어가요. 들어가 보니까 거기서 무엇이 신자가 나옵니다. 이럴 때는 나는 마땅히 신자며 나같이 않은 것은 신자 아니다. ‘그것도 신자야? 나같이 돼야지.’ 이런 마음으로 그대로 걸으며 왔다가 막상 성령을 통해서 성경 안에 들어와 버리면 히브리서 안에 들어와 버리면 거기에 신자가 나와요. 신자가 나오는데 그 신자는 교회라는 그런 사교단체는 없어요. 지금 성경대로 나오는 그 인물이 교회에는 쳐다 볼래야 없어요. 왜? 다 사교단체에 놀러오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 성경 속의 신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살려고 오잖아요. 죽으려고 온 게 아니고. “주님, 저 죽여주옵소서.” 그게 소원이 돼가지고 오지를 않는다 이 말이지요. “주여, 도대체 언제 죽이십니까?” 이런 기도하려고 교회 온 게 아니고 “언제 살려주십니까?” 이것 때문에 온다고요. 언제 살려주십니까? 이번에 수술했는데 잘 빠지고 깨끗하게 해주시고 주여~~ 효과 보게 하옵소서.
이 커뮤니티.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 있다고 간주되는 사교단체에서 흉내 내기를 시작했다가 성령을 통해서 성경 속에 가보니까 성경 속의 인물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하고 전혀 관련성이 없어버려요. 그래서 세 번째로 나갑니다. 세 번째 결론은 뭐냐 하면 ‘신자 없다’ 입니다. 신자 없어요.
왜 신자 없느냐 처음에는 뭐냐 하면 내가 신자 되려고 교회 갔거든요. 들은 풍월은 있어서 신자 되어서 죽어서 좋은데 간다 하니까 신자 되려고 하다가 내가 되어야 할 신자는 애초부터 그런 거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신자 되려하는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신자 됨을 훼방하고 막았었어요.
예수 믿으면 신자다. 누가? 내가. 이게 바로 대표적인 엉터리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게 신자가 아니에요.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구원은 내가 믿고 안 믿고 상관없이 주님이 결정한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사후적으로 그게 믿어질 때 그게 신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신자 되고 안 되고는 처음에는 이게 나의 일인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게 내가 신자 되고 성경 공부하고 이런 일들이 이게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 주님의 일이 돼요.
그래서 교회 봉사 안한다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에서 “주께서 하게 하셨다.” 로 주체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 집안에 아내가 아니다. 가 아니라 저 남편하고 결혼해야지. 가 아니라 주께서 결혼하게 하셨다. 고 이렇게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다고 신자가 아니고 “니 남편을 어떻게 생각해?” “자식을 어떻게 생각해?” 그 사이에서 나의 신자 됨이 풀풀 표현되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 관계만 신자가 아니라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과 태도가 다 신자 모양새를 내는데 거기서 뭐가 나온다? 복음이 나와요. 복음이란 예수님이 주체가 되는 걸 복음이라 해요. 그래서 내 행함은 안 되는 거예요. 행함은 내 행함이기 때문에 신자가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함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주체가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옛적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그 말이 선지자가 맨날 하나님만 연구했다는 말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 일상 삶을 살아갔어요. 생활했는데 행한 그 속에서 장차 오실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예수님을 그 시대에 모양으로 부분으로 모양으로 표현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장차 메시아의 몫이다. 라는 것을 그 시대에 표현을 한 겁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좀 더 어렵게 설명할게요. 인간이 이리 있다면 인간을 둘러치는 아우라, 기운 같은 것. 성모 마리아 뒤에 둥그런 노란 거 있잖아요. 후광 비슷한 것. 베냐민 이란 사람이 표현한 아우라. 이 후광과 더불어서 여기서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아우라 어려우니까 시.공간이라 합시다. 시간과 공간이 어려우면 그냥 위상, 이 말이 어려우면 위치, 위치가 어려우면 자리, 이 자리가 어려우면 쟁반. 나는 위에 올려놓은 사과. 쟁반을 통째로 옮기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지자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기드온 같은 경우에는 자기는 안하려하거든요.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본인이 하고 싶어 했다는 말은 이미 쟁반이 쟁반 때문에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선지자라는 새로운 위상이 나옵니다. 그럼 선지자가 단어잖아요. 선.지.자. 그럼 이 선지자가 단어만 아니고 오늘날 신자 또는 성도. 전부다 단어에요. 이 단어는 바로 쟁반을 표현하는 겁니다. 쟁반, 자리, 위치, 위상 이걸 표현하는 거예요.
따라서 제가 하는 이 말은 뭐냐 이런 뜻이에요. 나라고 하는 나는 없다. 입니다. 이게 되어야 신자에요. 나라고 하는 나는 없는 거예요. 남들이 불러주는 김아무개. 없어요. 물론 없는 대도 있는 척을 해줘야 그들과 대화가 되니까 “김 아무개요!” “예” 이렇게 하지요. “아민이!” “예” 호명했을 때 그 호명한 자의 앞에서 주체가 된다 말이죠.
알티씨? 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이데올로기의 세계. 이 가상의식의 세계에서는 나라는 것은 사회가 불러줘야 내가 인간취급 받는다. 아무도 안 불러주면 니가 자살하던지 굶어죽던지 아무도 안 불러주면 있으나 마나 이미 자기는 있더라도 사회에서 없는 존재는 죽은 존재입니다. 죽은 존재에요.
그래서 사람은 밥 없어도 못 살지만 외로워도 못 살아요. 노래는 외롭거나 슬퍼도 하니처럼 달려가지만 실제로서는 사람이 왜 일을 하는지 알아요? 외로워서 일을 해요. 배고파도 죽지만 권태롭고 심심하면 죽을 지경이에요. 뭘 해야 돼요. 테니스를 치던. 뭘 해야 된다고요. 끊임없이 해야 돼요. 그들과 어울려야 되지요.
그러나 그것은 항상 미완료입니다. 내가 보고 하는 거예요. 내가 보고 하니까 내가 예상한 것이 지금이 아니고 내가 예상한 것이 내 미래에 있으니까 그 사이에 결핍이 생기겠지요. 결핍만큼 뭐가 생기느냐, 근심과 걱정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소중한 것이 없으면 나한테 걱정이 찾아오지요. 저게 될까? 안될까? 그 일의 계획이 될까 안 될까? 걱정되지요. 그러나 소중하다는 말은 내가 소중한 게 아니고 나로 새로운 나로 유발해 내는, 새로운 나로 만들어내는 이 시.공간, 아우라, 위상, 위치, 자리, 쟁반이 소중한 거예요. 이게 바로 평범한 인간을 선지자로 만든 주님의 위력입니다. 이게 주님의 위력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만드느냐? 아니요. 말씀덩어리로 만들어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죽여 버려요. 왜? 내가 있는 한 주님의 일에 방해되기 때문에. “나, 이것 해주세요.” 하는 자체가 주의 일을 방해해요. 그러니까 금요 철야기도 주님한테 방해하고 있는 중이지요. 주님한테 지금 데모하고 있는 중이에요.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옮겨달라고 서울광장에서 데모하고 있는 중이에요. 집단적으로.
내가 없는데 왜 나를 위한 기도라는 그게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내가 없는데 무슨 기도를. 이 집에 돼지, 소 키웁니까? 돼지 안 키우지요. 돼지 안 키우는데 교회가가지고 돼지우리 만들어주시옵소서. 주여! 돼지우리 우리 집에.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이 집에 내가 없는데 나를 위해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6장에서 기도할 때 뭐라고 합니까? 너라고 하는 것은 그냥 너가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그 관계에 포함된 We, 우리 안에 포함된 너라고 내가 지목해 줄 때 비로소 너는 주기도문을 이해하게 되고 주기도문에 합류가 되고 주기도문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되는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합시다.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은 없는데, 내가 생각한, 내가 의식하는 나는 없는데, 나의 충분한 아우라, 영역이 내가 속한 영역, 장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히브리서 제일 마지막에 봅시다.
히브리서를 마지막 설명하면서 제가 이렇게 뜸을 드립니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