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7. 6. 23) 2강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7. 6. 23) 40-2

세상에 대해서 과학은 움직이는 것과 정지한 것 둘로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원동력은 힘인데, 그 힘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뭡니까? 120가지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과학 몰라서 자살합니까? 부자가 고민하는 것이 과학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잖아요. 과학은 인간의 눈, 코, 입 등의 신체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인간은 신체 외에 미지의 무엇이 있어요.

이 미지의 무엇이 인간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것을 ‘의미의 세계’라고 합니다. 의미가 뭔가? 혼돈에서 분류가 되면 질서가 생겨요. 그 질서를 의미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문화입니다. 문화의 세계가 의미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전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내 몸을 움직여서 상대방과 부닥친다.’ 이렇게 됩니다. ‘상대방이 강하면 나는 반드시 진다.’ 야구는 뭔가? 투수는 공을 던지고 타자는 친다. 그럼 야구는 왜 합니까? 우리 편이 이겨야 합니다. 류현진이 5회까지 3대 1로 이기고 있으니까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이제 승리 투수 요건이 되었네.”라고 해요.

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겨야 합니까? 이상하지요? 부자로 살고, 남들 보기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왜 자살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우울증에 걸립니까?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체에서 의미를 도출하지 못하면 정신병이 됩니다. 그러면 정신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신체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면 치유가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온다. 또는 종교를 갖는다. 이것은 키가 작아서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의미가 정리가 안 돼서 그래요. 쉽게 말하면 자신이 기대하는 욕망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나오고, 열심히 사회활동 해서 내 욕망에 합치되도록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부 잘해서 법학대학을 갔고, 최종 목표는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에 떨어졌고, 이제 사법고시 제도가 폐지되었고, 로스쿨에 가야만 법조인이 되는데 로스쿨은 학비가 너무 비싸서 법조인이 되는 것은 포기하고 9급 공무원 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좋아서 찬치를 벌이는데 왜 이 사람은 만족하지 못합니까?

자기 욕망에 부합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은 9급 공무원이 목표였고, 자기는 판사가 목표였는데 못하고 9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즐겁지 않은 거예요. 이런 욕망은 누가 집어넣어 준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나에게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서울 법대 들어갔으니까 그 머리로는 9급 공무원을 해서는 안 되고 판사나 검사가 되어야 해.’ 이렇게 주위 사람들이 부추겨요. 욕망과 현실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욕망을 이뤄 틈이 없어지면 욕망이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욕망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욕망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습니다.

부부가 매일 싸우다가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은 살맛이 안 나요. 그래서 어떤 여자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먼저 죽거든 당신도 같이 순장해라.”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인간의 욕망 중에는 상대방마저 내 욕망을 위해 적당한 자리에 배치될 때 그 전체가 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은 이렇게 되어야 내 자식답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사윗감은 내가 고른다는 거예요. 세상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편리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은 과학이 아닌 의미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서로의 욕망이 부닥치면서 삽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이에요.

이런 인간 세계를 하나님은 말씀의 세계로 정리합니다. 말씀의 세계는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 세계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만약 주님을 위해 돈을 내놨다면, 돈은 과학적으로 따지면 노동의 대가니까, 내 땀과 수고를 내놓는 거지요.

이것을 왜 예수님께 내놓지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욕망이 있는 거예요. 그 욕망은 나의 의미가 되겠지요. 예수를 믿으면서 믿는 이유가 있어요.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있어요. 그 의미와 목적은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사람이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미 의미와 욕망의 바다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그 모두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씀의 세계로 바뀌려면 그냥 바뀌지 않고 내 욕망, 내 의미에 의해서 살해당하신 분이 있어야 하고, 그분 앞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때 나의 의미는 예초부터 없었고 세상은 오직 주로 말미암아 주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틈이 있을까요? 내 쪽에서 다가가면 내 욕망 때문에 항상 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나에게 주어지면 나는 완료의 일부로 가담된 상태입니다. 틈이 있으면 나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완료되면 틈이 없습니다. 이때는 완료된 덩어리의 일부로 내가 가담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내가 뭘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자기 의미를 위해 행동합니다. 그런데 뜻대로 안 되지요. 그러면 질문을 바꿔야 돼요. 질문을 바로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질문을 바로 해야 정답이 나와요. 엉뚱한 질문을 하면 정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똑바로 질문하는 것은 정답을 안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정답에 편입된 상태에서만 똑바로 질문할 수 있다고요. 바른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이 맞아요.

신체에서 의미로 나아가는 것이 치유인데, 그 의미는 우리가 만든 의미가 아니고 주님의 완료된 상태에서 주어진 의미로 나아갈 때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따라서 이 신체가 내가 아는 천국에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어요. 내가 천국 가겠다는 것은 일방적인 나의 의미입니다.

‘나는 예수 믿고 천국 가야지.’ 이것 부숴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물리치고 직접 이삭을 다루시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순종했다는 것이 순종이 아님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내가 주님께 순종했다는 것은 예초의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내가 뭘 할까요?”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물음입니다. “제가 독자를 바치겠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니에요. 내가 바치려고 했는데 나를 밀어내신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는 순종이고 그 순종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동원된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이미 주님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감사할 뿐이죠.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출몰했다가 곧장 사라지는데 이것은 나의 기억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기억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기억은 변동되고 한시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내가 나의 의식을 주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7장 14절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지요. 느끼는 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불평을 하면 지옥에 갈 것 같고, 조금만 기쁘면 천국 갈 것 같지요. 변덕스러움이 인간의 주특기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들의 욕망에 맞춰 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의 제자들 모습도 예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31절 봅시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처나 자식이나 남편을 바치면 100배나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는다.’라는 말을 하면 여기에서 인간은 경쟁에 나섭니다. 이것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내 인생을 책임 질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또 새롭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경쟁하고 싶어? 그러면 내가 기준을 제시할 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이것으로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나서다가 주춤하게 되지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나서려고 하겠지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도 주춤하면서 뒤로 처지면 내가 또 그 사람보다 더 뒤로 처져야지요. 주님이 말씀하신 뜻은 ‘이렇게 하면 최종 승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경쟁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피자가 한판 있는데, 3명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적당히 3등분을 해서 불평 없이 한 조각씩 나눌까? 우선 먹는 순서를 정하고, 마지막 선택권을 가진 사람이 피자를 자르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마지막 남은 조각을 먹어야 하기에 최대한 정확히 3등분을 해야 본인이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분배의 정의’라는 겁니다.

문제는 소유가 곧바로 인간에게 의미로 전달되지 않아요. 인간은 의미 없이는 못 삽니다. 정확히 3등분을 해서 3명이 한 조각씩 나누면 균등하게 가질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균등은 틈을 막아버립니다. 틈을 막으면 숨이 막혀 못 살아요. 니체는 스스로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왜냐? 천국에 가면 할 일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서 가기 싫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는 피자를 공평하게 나누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더 많은 피자를 먹거나 먹을 수 있는 희망을 걸고 몸 바쳐 살아온 거예요. ‘네 아들 군에 입해해서 고생할 때 내 아들은 공익근무하면서 집에서 출퇴근 했다. 승리했네.’ 이렇게 무엇이든지 내가 남을 이기는 재미가 있어야 삶이 행복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하기에 그게 나에게 희망을 주는 의미가 됩니다. 내가 이미 달성한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왜 산에 오릅니까?’ 물으니까, ‘내려오기 위해서 올라간다.’고 해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왜냐? 그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왜 의미 있는가? 그건 몰라요.

인간은 평생을 살아도 본인이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몰라요. 그런데 왜 사는가? 경쟁 때문에 살아요. 경쟁해서 승리하면 보너스로 이겼다는 의미를 줘요. 그래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31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겼다는 것은 곧 망했다는 뜻이에요. 남에게 이겼다는 것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에게 졌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은 남에게 져서라도 기어이 성공하고 싶은 자는 망한 자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는 결국 이긴 자는 아무도 없고 다 망한 자밖에 없어요.

에서와 야곱은 둘 다 망했어요. 이 두 사람의 행태가 언약적 요소가 됩니다. 언약이 필름이라면 그 필름을 확대한 것이 세상이에요. 에서와 야곱의 구분이 이 세상의 모든 구분을 만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싸우다가 다 망합니다. 그 싸움에 소위 승자가 되었다고 자부한 자(야곱)와 마주쳐 싸운 분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결국 야곱과 하나님이 싸운 거예요. 이 싸움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에서와 야곱의 싸움에 뛰어든 거예요. 틈을 만들기 위해서 뛰어든 거예요. 야곱은 형을 이겼기에 게임이 끝났다고 봤어요. 그런데 형의 군대가 몰려오니까 야곱은 형을 요리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 자리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했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야곱이 하나님과 싸운 거예요. 그래서 야곱의 이름은 ‘하나님과 싸운 자’입니다. 사람과 싸웠고, 또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싸운 적이 있는 그 내용에 새로운 내용에 맞는 외피로 등장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알맹이는 주님이 언약적으로 관리하고, 바깥은 까불다가 주님의 외피가 되고. 하나님과도 싸우고, 사람과도 싸우고. 왜 싸웠습니까? 내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야곱은 ‘속이는 자’란 의미입니다. 속이는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는 것이지요.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 ‘나중 된 자’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잘났다고 하기에 주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기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인데, 그 싫어하는 자리를 예수님은 자신이 출몰하는 맨홀 뚜껑으로 사용하셨어요. 그러기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같이 망하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복음의 생산] 머리말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처음부터 재수 없는 곳을 찾았어야 했다.”

처음부터 재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해요. 교회에 가면서 ‘어떤 행운이 찾아올까?’ 이런 기대를 하면서 가면 안 되고, 어디를 가든지 ‘내가 진짜 망한 자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가 주님이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채찍 소리가 들리는 곳”이 우리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높이고, 기도로 무장하고, 말씀도 상시 복용하면서 신앙의 정상에 서려고 해요.

재수 없는 곳에서 살려는 생각이 왜 안 들까요? 암논이 다말을 차지하고 버리는 이 노선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노선에 있어야 합니다. 암논은 내가 욕망하는 것을 이루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복 여동생을 취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욕망이 있는지 본인은 몰라요.

사람은 욕망하면서 그 이유를 몰라요. 인간은 유령과 같이 살아요. 내 속에 귀신이 있어요. 이걸 과학적으로는 규명하지 못해요. 그래서 과학적인 세상은 실용적 목적 외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과학자가 행복합니까? 아니죠. 도박을 왜 합니까? 재미가 있어서 해요. 과학은 왜 합니까?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만들어서 먹는 것이 직업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직업이 다양한데, 이것은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겁니다. 어떤 직종에 종사해도 모두 농산물을 먹고 살아요. 예술, 과학, 문학을 하는 사람도 비가 안 오면 끝입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살하지 않고 술과 담배, 도박으로 욕망을 해소해요.

술, 담배를 끊었다고 신자가 아니고 삶의 의미를 알아야 돼요. 삶의 의미도 모르면서 술, 담배 끊었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닙니다. 그동안 담배를 왜 피웠으며, 술은 왜 마셨는지 알아야 됩니다. 실패자로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한 일이에요. 술을 마시면 객기를 부리지요. 객기는 허풍이잖아요.

허풍, 허세를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그래요. 예수 믿는다고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있는데, 술은 안마시지만 부흥회는 가요. 왜 갑니까? 홧병 때문에 가요. 사람은 최후 승자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배양액에 식물의 씨앗을 뿌리듯이, 배양액은 예수님의 피고, 그곳에 담긴 씨앗은 우리 죄의 몸입니다. 이것이 합쳐져야 언약이 완성되고 새생명이 탄생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피 없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32-34절 봅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시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들은 모르지만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너희들이 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다.’라는 것이고, 이것을 주님이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핍박하도록 주님께서 분위기를 몰아가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그럼 나는 잘못이 없네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려들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성도이고,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하시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지’ 이렇게 나오면 이 사람은 관심사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요.

성도의 모든 일이 주님과 결부되어 있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주님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무가치한 일이 아니고 고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예전에는 내 의미이기 때문에 고귀했는데 이제 주님이 구성한 일이기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 좌절하는 것은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좌절하면 좌절로 끝나지 않아요. 그 후에 마귀와 결탁해서 실패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 와서 주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단속하는 일에 전력을 다합니다.

‘얼마나 헌금을 하면 실패한 것이 회복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목사들이 그동안 교인들을 속여 왔기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당신들이 죄를 회개하면 당신의 소원을 주님이 들어주실 것입니다.”라는 소리를 설교시간에 늘 합니다. 거기에 적합한 성경이 욥의 이야기입니다.

‘욥이 고난을 받았지만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았기에 나중에 많은 재산과 함께 아들 7명, 딸 3명을 받았잖아.’라고 합니다. 정말 욥기의 내용이 이런 것입니까? 욥이 나중에 더 큰 복을 받기 위해 고난 받기를 요구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욥에게 고난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끝에 있는 성공이 좋아서 욥의 고난을 자처하려 합니다.

공부도 잘 못하는 고3 아들에게 갑자기 신학교에 가라고 떠밀면서 노리는 것이 있어요. 해피 앤딩을 노리는 거지요. ‘마지막을 생각하면 이 정도 고생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먼저 된 자가 승자다’라는 기존의 자기 의미에 빠져 있는 거지요.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준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이렇게 파탄이 나는구나.’ 희망을 기대했는데 주님 말씀을 들어보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끝에 보세요.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의 의미는,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에 동참할 때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후에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셔서 영생을 주셨고, 그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남은 인생을 우리가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실패하는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미 통장에 출연료 입금되었고, 그 후에 남은 인생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겁니다.

이 연기는 어떤 역할입니까? 주인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아이를 쥐어박는 연기, 내 귀한 딸이 문제투성이 집안에 시집가는 연기, 남편이 늦게 귀가하고 말썽을 부리는 연기, 아침부터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연기, 심지어 우울증 걸리는 연기. 그러나 이 모두는 환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환상의 세상인데 이것이 진정한 현실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성공해야 구원 받는 줄 알았습니다. 다 꿈이고 주님이 만들어주신 무대인 것을 늘 깨달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7. 14. 08:20 녹취 마침)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9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6,192 묻고답하기 세상의 모든 이론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7-07-16
16,191 자유게시판 여름수련회 재차 광고 - 최고관리자 17-07-16
16,190 강의 억지 170714 디도서 최고관리자 17-07-15
16,189 강의 형제 170714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7-07-15
16,188 자유게시판 20170711b 부산강의 : [시편]2(1편)-율법의 등받이 시편 최고관리자 17-07-14
16,187 자유게시판 20170711a 부산강의 : [시편]2(1편)-율법의 등받이 시편 최고관리자 17-07-14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7. 6. 23) 2강 - 최고관리자 17-07-14
16,185 자유게시판 96강-창 24장 1—4절(이삭의 아내)170712-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7-07-13
16,184 묻고답하기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17-07-12
16,183 강의 율법의 등받이 170711 - 최고관리자 17-07-11
16,182 자유게시판 20170707b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제사 안에서 레위기 최고관리자 17-07-11
16,181 자유게시판 20170707a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제사 안에서 레위기 최고관리자 17-07-11
16,180 강의 [17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13 - 대표자 - 최고관리자 17-07-10
16,179 자유게시판 244강-고후 9장 10-15절(하늘나라 농부)170709-이 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7-07-10
16,178 자유게시판 141강-신 26장 16-19절(하나님의 명령)170709-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7-07-09
16,177 묻고답하기 영의 싸움 - 최고관리자 17-07-09
16,176 강의 제사 안에서 170707 레위기 최고관리자 17-07-07
16,175 자유게시판 가락-요한복음14장20절(체험)170705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7-07-06
16,174 자유게시판 가락-요한복음14장20절(체험)1707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7-07-06
16,173 자유게시판 197강-YouTube강의(주님의 약속)170704-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17-07-06
16,172 자유게시판 196강-YouTube강의(이스라엘의 미래)170704-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7-07-06
16,171 자유게시판 95강-창 23장 1—4절(사라의 죽음)170705-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7-07-06
16,170 묻고답하기 너희로 소원를 두고..... - 최고관리자 17-07-05
16,169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7. 6. 23) 1강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7-07-05
16,168 자유게시판 243강-고후 9장 6-9절(넘치는 착한일)170702-이 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7-07-0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