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7b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제사 안에서
20170707b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제사 안에서(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강의 끝부분 다시 할게요. 인간이 죄의식을 느끼는 경우가 법을 어겼을 때가 아니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낄 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반드시 행복하게 돼있는데 내가 왜 불행할까? 갱년기라서 그렇거든요. 갱년기와 십자가 아무 상관없는데 기분이 우울해서 내가 죄가 많아서 우울하다고 관련시키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외부를 관찰해요. 바깥의 것을 활용해서 나의 행복이 목적이 돼요. 그런데 나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도 다니고 예수도 믿고 모든 걸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장래에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면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문제는 행복이 쾌락이거든요. 즐거움. 행복이 어느 선까지 오면 행복이냐? 이쯤이면 행복이라는 게 없어요. 행복하다는 그 순간부터 허탈이 주어집니다. 그것으로 성이 안 차요. 계속해서 행복이 쫓기듯이 또는 뭔가 귀신이 날 부르는 것 같아. 이쯤 와야 행복하잖아아아아~ 귀신이 자꾸 불러. 그 정도로는 안 되잖아아아아~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것처럼 불러댄단 말이죠. 그러니까 허겁지겁 거리면서 더 나은 행복, 쾌락, 만족을 위해서 여기다 뭘 동원시키느냐 하면, 성경보기, 헌금하기, 전도하기, 교회봉사하기 불쏘시개처럼 막 집어넣어요. 시키는 대로 집어넣어서 목적은 나의 행복, 그리고 끝도 한도 없는 행복.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행복. 이러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관찰해서 나와서. 뭔가 주시한다는 것, 저게 탐이 난다는 것, 십자가 내 바깥에 있고 하나님이 저 하늘에 있다는 것, 이게 관찰이잖아요. 나는 주님의 십자가 과거를 생각한다. 현재의 주님이 아니고 과거의 주님을 생각하고 과거에 성경 보면서 성지순례하면서 고고학적 과거를 밟으면서 그때 주님 고생한 것을 회상하려고 하는 거예요. 회상한다는 말은 지금은 아니고 그때 그 모습을 기껏 어줍지 않은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백날 상상해봐야 목적은 고정돼있어요. 그렇게 상상해서 내가 주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사적인 감언, 즐거움, 쾌락, 희락에 스스로 도취돼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레위기를 보세요. 굉장히 냉정합니다. 자기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다는 사실, 이것은 바로 이유 있어 죽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죽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았으니까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도 그 죽음을 새롭게 율법의 내용을 전달시킨 기회로 보자는 겁니다. 기회를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10장 1절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이 죽었지요. 제사장이 죽은 게 아니고 신이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죽은 걸로 이해해야 됩니다. 신이 죽었다고 하니까 니체가 생각나지요. 신은 이미 죽었다고 한 이야기의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이 주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의 주인이다. 내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거든요. 이것은 여러분이 이미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잖아요. 교회 다녀도 여러분이 주인공이 아닙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니체의 말입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 의지가 나오는데 그 의지가, “네가 너의 주인이야.” 그 의지가 우리한테 계속해서 강권하여 부추기고 있는데 그 의지는 자신이 말릴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의지를 니체는 그걸 힘, 권력으로 봤습니다. 힘 의지, 권력 의지라고 해요. 우리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내가 되고자 하는 힘에 놀아나고 있으니 그 힘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본인이 제대로 솔직하게 사는 모습이다. 이걸 초인. 우리가 곧 신인데 신을 찾지 말자. 그런데 왜 신을 찾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자기의 주체됨을 포기하고 노혜 근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는 어떤 노예근성도 탈피하고 세상은 우리가 만든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자. 이 니체의 정신이 히틀러까지 이어졌고 세상의 사람들은 이것으로 나갑니다. 요새 초등학생도 립스틱 칠하고 다닌다는 거예요. 이게 초인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꾸밀 줄 아는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시대가 미쳐 돌아가는 시대에요. 며칠 전에 대구에서 퀴어 축제를 벌였어요. 동성애 축제를 벌인 거예요. 서울광장에서 3년째 2만 명 모여서 축제를 벌일 계획이 돼있습니다. 동성애란 정신병자거든요. 일반적인 상식은 이래야 돼요. “우리 병들었어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것까지는 봐줄 수 있는데 “우린 병들어도 정상이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나처럼 살아. 우린 그럴 권리가 있어.” 그걸 허용하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고쳐달라고 하면 수용하겠는데 우리는 당당합니다. 이건 아니란 말이죠. 정신병자가 칼로 사람 죽여 놓고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어떤 의지가 안 거야. 그러니까 난 책임이 없어요. 동성애 축제 벌이면 그 다음에는 전국 사기꾼 축제를 벌입니다. 사기꾼으로 사는 것도 하나에 재주다. 그 다음에 가스관 타고 올라가는 전국 도둑놈협회 나올 거고. 나중에는 골프 치는 사람한테 접근해서 등쳐먹는 이걸 꽃뱀이라 하지 않고 골프장에서 한다고 해서 들뱀이라고 해요. 이렇게 사는 것도 권리를 보장하라고 나온다니까. 그리고 인권을 앞세움으로 그걸 민주주의이라 해요. 조금만 아니라고 하면 전체주의, 파시즘이라 하고. 한 마디로 세상이 미쳤어요. 그런데 요즘 와서 미친 게 아니고 처음부터 미쳤어요. 관찰이에요. 나는 무엇이 행복하냐? 니체 말이 맞아요. 그동안 엄마 말 듣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엄마가 맞벌이하느라 정신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의지를 유튜브에서 배워요. 동영상으로 배워요. 동성애란 것도 이성애적으로는 재미없거든요. 덜 쾌락적이고 덜 자극적이니까 그 선을 넘어가면 뭐가 있을까? 일단 넘어가놓고는 넘어간 자기를 정당화해요. 우리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 왜? 민주주의니까. 전 세계 23개국에서 동성애 결혼을 인정했다는 거예요. 네덜란드에서 제일 먼저 했고, 얼마 전에 런던에서 동성애 부부를 인정했어요.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의 개신교 국가였어요. 성경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음이 중요하지 성경 있음은 뒷전이에요. 내가 있는 게 중요해요, 성경 있는 게 중요해요? 내가 있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이 내가 오늘날 교회에 다 퍼져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신앙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로 결정됩니다. 가정교육도 다 그렇게 하고. 인품? 잘 사는 집안 아이들 다 좋아요. 그 집안에 돈 있을 시간까지만 좋아요. 돈 없는 집안은 인품도 나빠요. 항상 돈 없다고 싸우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품보다 돈이 우선하는 세계에요. 이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를 쉬쉬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전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관찰에서 나왔어요. 과학이 왜 뜨느냐? 관찰이에요. 별이 있고 망원경이란 도구를 사용하지요.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그 눈은 내 눈이잖아요. 결국은 망원경을 몇 배로 확대하든 간에 관찰하는 거예요. 보는 것만 믿겠다는 겁니다. 내가 보고 자신한테 도움 되는 것만 추려서 믿겠다는 겁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잖아요. 향로 불을 잘못 다뤄서 죽었다. 이것은 눈 있는 사람은 그렇게 관찰되는 겁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것을 확대시키면 이렇게 돼요. 제사 안에서 보는 제사와 제사 밖에서 보는 제사가 달라요. 제사 밖에서 제사를 보게 되면 제사 잘못 드리면 큰일 난다. 우리가 죽는 수가 있다. 앞으로 향로 불에 제대로 담아서 드려라. 그러면 율법 완성 되는 겁니까? 향로 불 제대로 드리면 천국 갑니까? 제가 알고 있는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가요. 언약의 피로 용서받아 간다고요. 향로 불 잘 드려서 나답과 아비후 같이 안 되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둘이 짝이 되는데 그들이 헌금 반을 빼돌려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헌금 안 빼돌리고 처음 마음먹은 대로 드렸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그게 아니라고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반 속여서 드려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헌금할 때 제대로 헌금하자. 이게 관찰이에요. 제사 밖에서 제사 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에 손해되고 행복에 방해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 차원에서 행동을 조신하려는 하나에 수완, 요령부리기에 지나지 않아요. 교인들은 교회 올 때 요령부리며 오고 목사는 고객에 맞추어서 요령부리는 기술 가르쳐주고. 어떤 장로 돈 아끼지 않고 헌금 했더니만 사업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것도 요령이라니까요. 처세술이에요. 자기 생존에 테크닉에 불과한 겁니다. 그게 이단이 아니면 뭐가 이단이에요. 힐링? 힐링 같은 소리하고 있네. 힐링의 뜻이 뭡니까? 마음 고치는 거잖아요. 고쳐서 뭐 할 건데. 지금 레위기 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신이 죽었다는 거예요. 신이 죽었으니까 너희도 따라 죽으란 겁니다. 죽은 것 보고 난 안 죽을래, 하지 말란 말이에요. 자칫하면 죽을 뻔했네. 우린 살자, 이렇게 단결하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뜻은 이겁니다. 죽어봐야 무엇이 생명인지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 밖에 있지 말고 제사 안에 들어와서 제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제사법을 지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오인 것을 아셔야 해요. 여러분, 십자가 안에서는 말씀을 못 지킵니다. 물론 십자가 밖에서도 못 지키지만. 못 지키는 이유가 십자가 안에서 말씀 지킬 주체가 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신 것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전까지는, 하나님 사진 찍으세요. 순종, 순종. 아들에게 칼을 들이댔지요. 자기가 받은 정보는 그것뿐이었어요. 아들을 바치면 믿음인 줄 알겠노라. 자기가 아는 정보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정보는 몰랐습니다. 칼을 거두어라. 이 정보는 사전에 받은 적이 없어요. 주님이 개입했습니다. “됐어, 그만. 거기까지 네 역할.” 수풀에 양 있다. 수풀에 양이 가둬있다는 이야기는, 그것은 듣도 보도 못한 정보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브라함이 자식 이삭을 바치는 것이 아브라함 본인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인 줄 알았지요. 그게 테스트가 아니고 그것마저 하나님의 일로 흡수 통합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에 소재가 돼요. 하나님이 그림 그리는데 물감의 한 종류가 돼버렸어요. 날름 그 전체가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 일이 장차 예수님 오실 때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모든 율법과 말씀이 완성이 되는 최후의 테스트를 앞당겨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참여한 거예요. 북한의 김일성 생일 때 퍼레이드를 하고 운동장에 모여서 카드섹션을 하죠. 김정은 동지 만세, 글자가 뜨잖아요. 거기에 평양동중학교 2학년 4반이 카드섹션에 참여했다고 칩시다. 자기가 들고 있는 패널 한 조각은 김정은 동지 최고, 라고 안 나와 있어요. 김정은의 ‘ㄴ’ 일부잖아요. 전체 이미지는 누가 관찰합니까? 본부석에 앉아있는 김정은이 관찰하잖아요. 전체 그림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는 겁니다. 거기는 아브라함은 ‘ㄴ’ 끄트머리에 참여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한 일을 우리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은사는 다양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지 아들 바치는 식으로 참여했고. 우리는 골프 치는 것으로 참여하고. “나이스 샷!” 하면서 주께 영광 돌리고. 다 달라요. 골프 쳐서 천당 가나, 자기 아들 바쳐 천당 가나 결국 예수님의 이미지에 합류해서 구원받기는 마찬가지거든요. 관찰자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주가 되신 주님만 보면 되지 우리는 거기에 파편들이고 조각들이란 말이죠. 참여한 거예요. 그래서 막 사에요. 만약에 우리가 막 살지 않고 정신 차려서 주님께 영광 돌린다면 내가 구원받을 요건을 여기서 장만하고 있어요. 그래놓고 내 믿음 좋으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는 식으로 나오고.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게 자기 몸에 예수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관찰을 자기가 해요. 자기를 믿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잘 믿는다고 상상한 내가 주체가 되어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종교잖아요. 제사 안에서 보면 메시아가 죽어요. 메시아가 제사장으로 왔거든요. 그런데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죽잖아요. 다시 말해서 제사의 중심은 제사를 잘 드림에 있는 게 아니고 제사 과정에서 누가 죽었다는 이 점에 제사에 핵심을 이루는 겁니다. 그 이유가, 누구든지 자기 죽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싫어하는 것을 주님이 대신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뭐든지 하게 마련인데 그 한다는 그것이 죽음과 이어져있게 되면 언젠가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하게 되면 그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에 참여함이 되게 돼있어요. 나는 삼성그룹 이사 되어 죽을래.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 겁니다. 나는 이번에 외무부장관 되어 죽을래. 그러면 그 외무부장관이 구원받습니다. 이번에 당신을 인도에 대사로 파견합니다. 주께서 또 죽이시는구나. 자자, 인도에 가서 죽어야지. 그러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관련돼있는 겁니다. 땅 툭 던져놨는데 보상금 백배 받았다. 돈에 치어죽어라. 주여 돈에 치어죽겠습니다. 돈에 뒤집어서 살겠습니다, 하면 안 돼요. 돈에 뒤집어 죽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실은 그런 생각이 잘 안 떠올라요. 왜냐하면 우리는 니체에 의해서 내가 신이 되는 권력 의지가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 이런 식으로 죽고 싶어 하지 않아요. 제가 강의할 때 요 근래 여러 번 하는 게 중요해서 그런데요. 남녀가 부부 되는 것은 같이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혼자 죽는 것보다 같이 죽는 게 덜 외롭잖아요. 그런데 부부로 살려고 한다면 그건 철없는 짓입니다. 같이 죽으라고 결혼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먼저 죽고 난 뒤에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까봐 걱정 되어 요구사항이 있어요. 내가 죽으면 내 옆에 순장해라. 그럴 수 있나, 이렇게 물어요. 얼마나 솔직한지. 이게 권력의지라는 겁니다. 모든 권력의지는 자기 행복이 진리에요. 그 다음에 관찰하는 것이 행복에 도움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로 가려가면서 사귀고 자기 권력의지에 맞추어서 태도, 눈빛, 그리고 모든 행동 방식이 내 행복에 보탬이 되는지에 근거해서 그때마다 표정들이 달라요. 그런데 그 앞에서 내가 죽었다. 제사의 핵심이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사람들은 제사 잘 드려서 될 수 있는 데로 안 죽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교회 다녀서 더 살기를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쉽게 말해서 나랑 같이 죽자. 같이 죽으면 살 것이요, 나랑 같이 죽지 아니하면 죽을 것이다. 부자야, 모든 걸 다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영생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어렵습니까? 어렵진 않잖아요. 어처구니없어서 그렇지. 그래서 성경은 똑똑한 것과 지혜로운 것을 구분합니다. 똑똑한 것은 내 몸 내가 간수하는데 뛰어난 것이고,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 그 마음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 그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고민이 없어요. 어린아이가 고민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부모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이용할 뿐이에요. 어린아이가 고민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를 대신하니까. 부모의 세계 일부가 본인이기 때문에 든든한 부모 세계 안에 있는데 왜 내가 걱정합니까? 따라서 이 말을 다시 정리하면 제사 안에서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은 제사 안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거든요. 죽어야 아버지 품에 안기니까. 너희는 내게 배워라. 네 자신을 포기하라. 물론 죽어도 포기 안 돼요. 주님께서 포기 안 되는 나에게 포기되는 나를 생성해서 따로 분리시키는 작업을 성령에게 일임했습니다. 나에게 나의 것이 따로 뽑아나요. 옛사람에서 새 사람이 따로 귀신처럼 빠져나오는 작업을, 성령의 주특기가 그겁니다. 죄인에서 인간을 뽑아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할 때 히브리서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기도했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뜻을 꺾고 아버지 뜻에 순종하게 된 겁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그것은 따로 분리하면서 주께서 우리를 데려가는 겁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으로 뽑아낸다,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판정할 수 있느냐 하면, 이렇게 판정되거든요. 여러분,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맞는지 보세요. ①계속 사랑하기, ②미워하기, 어느 게 사랑함일까요? 성경에선 말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라. 자기를 왜 미워하느냐 하면 2번은 할 줄 몰라요. 나는 미워하는 것은 할 줄 몰라요. 나는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밖에 못해요. 그래서 내가 남편을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한다. 절대로 남편/아내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내 사랑에 부합되는 걸 발견할 때까지 그 사람의 내부를 헤집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나오는지 보자. 안 나와? 우리 갈라서. 우리 헤어져.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계속 나오는 조건하에 사랑해주는 겁니다. 결국 사랑함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회수하는 내가 나 사랑하기에 상대에 말려들기를 간곡하게 노리고 꼬시고 협박하고 공갈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왜냐하면 남은 남이고 나는 나거든요. 내가 남에게 내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요. 인간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돼요? 뭐가 사랑이냐 하면, 자기를 미워할 줄 알면 그게 사랑이에요. 왜 우리는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미워하느냐 하면, 그 사람보다 내가 낫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한테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이 더운 날 짜증이 나서 미워하는 거예요. 티비를 켰는데 꼴 보기 싫은 탤런트 나왔다면 채널 돌려버립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드는 게 나왔다. 송혜교와 송중기가 결혼할 줄 알았어. 그 소식을 아는데도 계속 트는 거예요. 계속 보고 싶어서.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진리 같으면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거예요. 기독교신자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게 되면 기독교신자든, 통일교든, 여호와증인이든 관계없이 신천지 구천지 다 가리지 않고 잘해줍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나를 안 좋아하는 복음 아는 자? 죽으라고 악 씁니다. 꼴 보기 싫어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정말 사랑이란 나를 미워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회개거리가 되면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영감,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나를 미워하잖아요.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영감이, “평소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겁난다.” “난 당신을 너무 철저하게 빼먹을 것 다 빼먹었어.” 전에 했잖아요. 나이 70넘은 할아버지가 돈 안 벌어온다고 집 나가라고 한. 나이 70에 어디 가서 돈을 법니까? 아침 차려달라니까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돈 벌어 와라. 아침 차려줄게.” 논리상 맞는 이야기인데 약간 억울한 느낌 안 듭니까? 좀 이상해. 누구든지 만나거든 미워하세요. 그게 사랑입니다. 이 책에 보면 나와 있어요. 내가 보기에도 괜찮다는 내용이 있어요. 자식에게 폭력을 가하면 자식이 살고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자살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육신으로 왔을 때 주님이 자기를 비웠다, 낮췄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얼마나 개판인지 생각해보세요. 온 나라 전체가 동성애밖에 없다면 거기서 정상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산다면 얼마나 욕 얻어먹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전부 미쳤다는 뜻이에요. 악마에 의해서 다 정신병자 돼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보다 정상적이라고 우기며 억지를 부리는 자기 자신을 계속 사랑하는 겁니다. 목사는 지 교회를 사랑하고. 지 교회를 사랑하니까 주님을 복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가 깨어져도 난 예수님만 사랑할래.” 이런 목사 어디 있어요. 그런 목사 봤습니까? 내가 얼마나 공 드린 교회인데 이걸 왜 놓쳐. 그런 목사도 목사라고 설교 들으면서 앉아있는 이유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교인들도 교회 왔다 후다닥 가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집구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와도 돌아갈 집구석이 있다니까. 돌아갈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 가려고 온 게 아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온 거예요. 복 챙겨서 빨리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안 미워해서 그래요. 그 이유가 말씀에 의해서 죽는 사건이 안 일어나서 그래요. 그래서 성령은 십자가, 죽음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주님 죽었는데 너는 뭐하느냐는 거예요. “미안합니다. 안 죽어서 미안합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살린 거야.” 죽어야 마땅한데 계속 살리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갱신하기 위해서. 계속 살아있어야 우리의 포개진 죄가 드러날 것이고 한 꺼풀, 두 꺼풀 드러날 때마다 그 틈새에서 십자가 은혜, 죽음의 은혜, 예수의 피의 은혜, 용서가 능력으로 나오잖아요. 그 순간 그 사람은 그 시점에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미를 드릴 수 있고 주의 은혜에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19절 봅시다.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속죄제, 번제를 모세 당시에는 잘못 드렸다고 닦달 내는 데 죽는 것을 봐서 그것이 더 선하다고 확정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할 때 20절에,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네 말이 맞아. 그걸 몰랐구나. 이 일 이후에 어떤 일이 전개되는지 오늘 본문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원래 없는 나라에요. 히브리인들은 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없어요. 히브리인들은 애굽이란 실제로 있는 나라의 일부에요. 애굽에 떼어낼 때 조건이 있었어요.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종족들의 맏아들은 죽었고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은 살았을 때 바로가 기겁해서 나가라고 해서 나갔습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은 완료된 이스라엘일까요, 미완료된 이스라엘일까요? 미완료된 이스라엘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실제로 어린양의 피를 내서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기 때문에. 그들이 바를 때 그들의 손으로 발랐어요. 자기 손으로 행한 게 있단 말이죠. 행한 게 남아 있는 한 무조건 이스라엘은 미완성이에요. 문설주에 바른 게 당사자가 본인이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안다 합시다. 그리고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밥 먹여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엘리야처럼 까마귀가 떡과 물을 제공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돈을 벌지 않는 한 돈은 들어오지 않게 돼있습니다. 복음을 알든 기도를 철야를 하던 간에 돈 버는 작업을 해야 돈이 들어오는 걸로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돈 버는 작업을 해야 돼요. 아르바이트를 하던 배달을 하던지 간에 그렇게 해서 일당 받아서 마트에 라면 사서 먹고 그렇게 인생사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믿는다고 해서 돈 안 번다는 것은 말 돼요, 안 돼요? 예수 믿는다고 돈 안 버는 것은 자살행위죠. 말을 바꾸겠습니다. 예수 믿고 아르바이트해서 돈 버는 것은 나쁜 짓입니까? 내가 주를 버리를 세상에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이런 말을 해도 돼요, 안 돼요? 왜 예수 믿어도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이유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모르냐 하면 제사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건 완료된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완료된 이스라엘은 제사 드린 것과 이스라엘 됨과 상관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주의 일이지 내가 예수 믿으려고 애쓰는 것과 아무 상관없고, 내가 돈 벌려고 직장 생활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여러분이 돈 벌 때 내 양심껏 벌 수 없어요. 이윤 안 남기고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윤 남기는 것이 나쁜 짓입니까? 목사님,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은 나쁜 짓잖아요?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 나쁜 짓입니까?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은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지 나쁜 짓은 아니에요. 지금 교육부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한 달에 오만 원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십 만원 받았습니다. 나쁜 짓입니까? 오십 만원 받은 짓이지 나쁜 짓은 아니란 말이죠. 그걸 왜 나쁜 짓이라 합니까? 뭐가 나쁜 짓이냐 하면 다른 데는 오만 원 받는데 오십 만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할 것이라고 연관시키는 그게 나쁜 짓이에요. 말을 다시 해봅시다. 한 달에 오만 원 받아야 되는데 너무 가난해서 오만 원 안 받고 공짜로 가르쳤습니다. 그게 착한 짓입니까? 그것은 학원비 안 받은 짓이지 착한 짓이 아니에요. 그런데 안 받고 도와줬다고 착한 짓이라고 여기는 그게 나쁜 짓이에요. 이제 오늘 강의 이해되시겠습니까? 제사의 완성은 하나님이 죽는 것이지 내가 제사 드린 짓은 아니에요. 따라서 제사를 드려서 영광 돌렸다고 할 때는 아직까지 미완료된 엉터리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매주 예배를 드리세, 라고 하는 것이 이단 짓이에요. 왜 예배를 10시 55분은 안 되고 11시 드려야 됩니까? 일요일에 새벽기도하고 오전예배, 오후예배 세 번만 드립니까? 자정 예배는 왜 안 드립니까? 누구 마음대로 안 드려요? 그게 옳은 짓이라면. 제가 지난 낮 설교에 헌금에 관해서 이런 설교했어요. 헌금 하는 게 무의미해요. 무의미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헌금을 하든 무의미한 것을 아는 순간 그게 달랑 오백 원이든 오십 원이든 주님 보시기에 넘치는 헌금이에요. 왜? 안 해도 되는 데 하니까. 안 해도 돼요. 그런데 헌금을 안 하게 되면 나쁜 짓이라는 게 나쁜 생각이에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헌금 안 하면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 맞아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가 일 안 하면 돈 안 생기죠. 맞는 이야기잖아요. 교회 헌금 안 하면 문 닫지요. 전기 끊어지고 차압되고 하잖아요. 그게 맞지요. 교회가 문 닫는다고 해서 그게 나쁜 짓입니까? 목사님, 잘한 짓은 아니잖아요. 잘한 짓은 아닌데 그게 나쁜 짓입니까? 상관이 없다니까. 구원은 십자가 피로 구원받지 교회 세워서 예배드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교회 다닐 수 있고 일주일에 열두 번도 더 할 수 있는 거예요. 왜? 상관이 없기 때문에. 지금 제사를 드리라 했잖아요. 죽었잖아요. 속죄제, 번제 상관없어요. 그걸 아론이 알게 된 거예요. 장차오실 메시아가 죽어서 예배가 완성되지 제사 드린다는 것은 관찰이에요. 관찰은 제사 드린 예배드린 헌금 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단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 집어넣읍시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기가 뭡니까? 주여,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이게 고백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 짓는 것 외에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이 날마다 갱신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