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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7. 6. 23)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7. 6. 23) 40-1

마가복음 10장 28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을 때, 내가 예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요. 그래서 둘이 결합 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다면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데 꼭 나대지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할 때 베드로가 지금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본인이 주님에 의해 고침 받아야 할 대상이란 점을 감 잡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땅에 있는 사람이 천국 갈 때는 달아져야 하고 바뀌어야 합니다.

바뀌는데 본인이 알아서 바뀌겠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바뀌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내가 나를 고치겠다.’는 의식이지요. 사실 교인들이 교회 올 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옵니다. “고칠 부분만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서 개과천선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요.

만약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환자가 알아서 치료하면 의사가 필요 없잖아요. 의사에게는 항상 병든 자가 있어야 해요.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때 ‘병든 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비정상이고 병든 자란 사실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맞장구를 쳐줍니다.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재마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자신만만하게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버리겠나이다.’라고 한 것은, ‘주님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것도 할 수 있겠어?”라고 묻는 겁니다. 베드로는 주님만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다 털고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세상에서 얽히고설킨 것이 많아요.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자식, 전토 이런 것들로 얽히고설킨 거예요. 이런 것들을 먼저 잘라내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베드로는 감히 하지를 못했어요. 그냥 이 몸 그대로 주님께 가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 생각은 그것이 아니고, ‘네가 평소에 얽힌 것들이 너로 하여금 천국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너에게 얽힌 것들을 잘라 보란 것입니다. 자르면 어떻습니까? 시원합니까, 아픕니까? 아프지요. 만약 예수님이 거론하신 항목들을 베드로가 다 잘랐다면 주님은 또 다른 항목을 제시하실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법무부 장관을 뽑는데 안경환 씨가 왔잖아요. 이분은 대학 교수니까 그냥 교수 생활을 하면 됩니다. 만약 어떤 분이 안경환 씨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대학 교수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나는 대학 교수인데, 옛날에 어떤 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인신고 했습니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지요.

대통령은 이분이 강제로 혼인 신고한 것은 모르고 그를 법무부 장관 후보로 뽑았는데, 막상 뽑으니까 뒤에 이런 거추장스런 것이 있는 거예요. 이분이 장관 후보로 뽑히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주님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자기는 대학 교수이기에 대통령의 부름에 따르겠다고 나섰지요. 그런데 검정관이 뒷조사를 해보니까 여러 가지 거추장스런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할 때, 과연 이런 관계를 쳐낼 수 있는 능력이 베드로에게 있겠습니까? 없지요.

26-27절에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할 수 없다’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베드로는 할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할 수 없는 이유를 여러 항목을 거론하면서 ‘이런 것들을 끊을 수 있어?’라고 하신 거예요. ‘이런 것들을 버리면 100배나 받는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모친 100명, 자매 100명, 형제 100명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혈육의 형제, 자매를 버리면 수도원에 100명의 형제, 자매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전토는 어떻게 됩니까? 수도원 전체가 내 것 됩니까?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전토를 버리면 금세에 100배를 받는다고 할 때, 이 모든 것은 누구의 소유로 본 거예요. 베드로 본인의 것이죠. 그러면 100배를 받는다고 할 때 내 것으로 100배를 받아야 해요. 수도원의 같은 형제 100명 필요 없어요. 수도원 땅이 아닌 내 이름으로 등기 된 땅이라야 해요. 내 것 버렸는데 그것이 씨앗이 되어 내 것이 100배가 되었다. 이건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주님이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내세도 결국 내가 받는 것이 되지요. 그런데 나의 영생이 있습니까? 없어요. 하늘나라는 주님의 나라이지 내 나라는 아닙니다.

과학 실험실에 배양액이 있어요. 배양액에 모종을 심으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요. 우리의 몸이 배양액에 담겨 영생을 얻습니다. 이 배양액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리고 배양액에 담기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과 피의 만남이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성립이 안 됩니다. 새언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하고, 죄인이 있어야 돼요.

지금 제자들과 예수님이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언약의 구성 요소로 미리 만난 거예요. 예수님은 새언약을 아는데, 제자들은 몰라요. 베드로는 피 안에 잠긴다고 생각지 않고, 피 흘리는 예수님이 아닌 멀쩡한 예수님과 자신이 함께 있으면 천국이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과 똑같아요.

교회 있고, 목사 있고, 내가 있어서 열심히 충성하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려면 달라져야 한다고 했죠. 그럼 내가 알아서 달라지면 될 것 아닙니까? 시키면 순종해서 제가 변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평소에 늘 교인들에게 뭔가를 지시만합니다. 본인이 믿는 예수님을 소개한 적은 없어요.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안 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니까 이것을 하세요.’라고 지시만 합니다. 이것을 교인들이 원하니까 목사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합니다. 지시를 하고 명령을 내리면 교인들은 스스로 고치고 바꾸면서 삽니다. 이것이 납득이 되고 서로 소통이 됩니다.

술 끊으라고 해서 술 끊었고, 담배 끊으라고 해서 담배 끊었고, 십일조 하라고 해서 십일조 했고, 안식일 지키라고 해서 안식일 지켰고 모든 것을 본인이 해왔단 말이지요. 그리고 성경에 그런 명령들이 있으니까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본인이 잘 모르고 전문가인 목사가 있으니까 목사가 성경을 보고 필요한 것을 지시하면 나는 그 지시에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이런 것을 원하는 교인들이라면 저는 이렇게 설교하겠어요. ‘안개처럼 살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시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세요.’ 그러면 교인들의 반응은 어떻겠어요? ‘그렇게 살면 내가 죽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지금 교인들이 바라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채 영생을 보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심보를 알아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 내가 100배로 갚아 줄게.” 결국 문제는 산 채로 점점 큰 희망을 갖기를 원하는 죄인들의 심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을 죽어야 됩니다.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피는 예수님이 죽어서 흘리는 피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피죠. 그래서 예수님의 피 앞에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 규정되어야 하고, 이것이 새언약을 이루는 요소가 됩니다.

베드로는 멀쩡한 상태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주님은 베드로를 죄인으로 바꿔야 돼요. 베드로는 자신이 부족한 죄인인줄 알지만 어디까지 가는 죄인인지 본인이 가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새언약에 부합되는 죄인 되기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인 만드는 작업에 예수님이 관여해야 됩니다.

주님이 말씀을 줘서 말씀 앞에서 본인이 주님 말씀대로 행해보면 행할 수가 없지요. 우리나라 여자 스님이 감독해서 만든 영화 ‘산상수훈’이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어요. 영화 내용이 뭔가 하면, 기독교를 깔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기독교 2,000년 역사가 흘렀지만 아무도 풀어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감독(스님)이 불교의 방법으로 정답을 알았다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안 믿는 가운데도 산상수훈을 실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달리 표현하면, 새언약을 몰라도 산상수훈을 지킬 수 있는 묘책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언약적입니까? 전혀 언약적이 아니죠. 지금 불교는 있음에서 없음의 세계를 분석하고 있어요.

그런데 복음은 주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에서 피어나요. 주님은 우리가 보기에 사라진 그 세계에서 나타나신 분이에요. 주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경로가 새언약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경로를 ‘언약’이라고 해요. 여기에 관여하신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언약도 모르고 산상수훈을 해석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나타났다가 사라진 분은 언약 관계에서 오신 분이기에 이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구약에 의하면 아들의 나라가 아니면 나라가 아닙니다. 저주 받아야 돼요. 이스라엘이 아니면 무조건 저주받아요. 왜냐하면 이스라엘만 아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아들로 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맏아들로 삼아서 맏아들과 아버지의 계약에 의해서 맏아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함인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부름 받은 것은 장차 예수님이 이루실 새언약에 대한 요건으로 부름 받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요일 이런 말을 했어요. ‘피를 뽑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고. 소라는 알맹이만 빼먹고 껍질은 버립니다. 소리 껍질이 알록달록한 것은 문제될 것 없어요. 우리 몸이 아픈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목사님, 제가 성도라고 하면서 마음이 기쁨이 없습니다. 혹시 지옥 백성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이런 말은 주님과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갈라지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상관이 없어요. 사람들이 베드로처럼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얽히고설킨 것이 많아요. 조카 결혼식 한다는데 부조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냥 형편대로 하면 되는데, “저들은 우리 결혼식에 얼마나 했지?” “안 왔다고.” “그러면 나도 안 간다.” 왜 이렇게 얽히고설킨 것이 많은지?

주님은 우리의 얽히고설킨 것을 자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차돈이 죽을 때 흰 피가 나왔다고 해요. 형제를 끊으면 어떤 피가 나옵니까? 흰 피가 나옵니까? 자매를 끊으면 파란 피가 나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무엇을 잘라도 그것은 새언약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너는 나를 죽이는 역할만 하면 되지 네가 무엇을 자르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정글 속을 걸을 때 칼로 나무를 자르면서 길을 만들어 나아가지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내, 남편, 자식을 칼로 자르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죽어야 했습니다. 수요일 설교에서 말했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멈춰라.”고 하신 이유는 ‘이삭은 네가 관여할 번제가 아니고 내가 직접 관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죽이든, 아니면 이삭 대신 양을 죽이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필요한 절차입니다. 이삭을 양으로 바꿨다는 것은 양이 이삭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양은 양이 아니라 장차 오실 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라고 했지요.

주께서 준비하시기에 우리가 준비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뭔가? 주님의 준비하심에 우리자신을 포함시키면 됩니다. 내 인생을 내가 다루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준비를 최적화 시킵니다. 주께서 준비하실 때는 특징이 있어요. 예측 불가입니다. 인간들이 자꾸 자신을 다루니까 주님은 내가 나에게 손을 떼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왜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를 버리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죄를 안 짓겠다는 사람이 죄 의식이 강렬합니다. 천국은 죄 없는 자가 가잖아요. 만약에 천국에 죄 있는 자가 간다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지요. 그러면 최소한 죄 없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 없는 상태에 본인이 본인을 가두어서 깨끗한 자가 되도록 힘쓰겠지요. ‘이정도 목표면 나는 깨끗한 자다.’ 라는 목표가 각자 있는데, 주님은 인간을 더 늘려버립니다. 결국은 다 포기하게 만들어요. “더 이상은 못 따라 가겠습니다.” “내가 그걸 노렸어.” 따라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하니까, 주께서 “이래도 좇아 올래?”라고 하면서 인간의 목표치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십니다. 보험을 올리는 것과 똑같아요.

주님이 내놓는 것은 새언약의 셋트를 위해서 틈을 냅니다. 틈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무엘하 13장을 보겠습니다. 11-12절에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그리고 15절에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기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다말을 사랑해서 동침하자고 한 지 얼마나 지나서 이렇게 미워한 것이지요? 금방이잖아요. 누이를 차지하고 싶어서 과자를 먹고 싶다는 핑계를 만들어 강제로 덮칠 때에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고 했지만, 강제로 강간을 했습니다.

암논은 이복동생 다말을 사랑했어요. 13장 2절에 보면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고 했어요. 이렇게 사랑한 여동생을 강간한 후에는 즉시로 미워하고 버렸어요. ‘미워하는 미움이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했다’고 했어요.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랑이 다 있어요?

이게 뭔가 하면, 사랑할 때는 틈(간격)이 있었어요. 그런데 동침한 후에는 간격이 사라졌어요. 자기 밖에 있던 것이 자기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이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는 강력하게 소유하고 싶은 대상이 있었는데, 이제 소유 대상이 없어진 거예요. 그렇다면 암논은 결국 누이동생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본인의 욕망 대상을 사랑한 거예요.

환상이 환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을 임시로 자기 누이동생으로 삼은 거예요. 그런데 누이동생을 차지하고 나니까 환상이 사라진 거예요. 그러니까 “너 때문에 내 꿈이 사라졌잖아.” 라고 하면서 누이동생을 미워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 가문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다윗 가문은 다윗 언약의 영향을 받습니다.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으로 오지요? 다윗의 자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때는 이 세상이 다윗 언약의 장을 형성합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면 예수님이 등장한 모든 세계가 다윗 언약에 준해서 자리를 배정받습니다.

그러면 다윗으로 인해 형성된 모든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재현됩니다. 암논이 이런 죄악을 범하는데, 암논의 아버지는 다윗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죄가 암논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겁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면, 다른 사람들도 다윗의 자손의 관계로 재정립됩니다. 예수님의 새언약에 의해서.

모든 것이 언약에 의해서 정리, 정돈 되어야 하거든요. 지금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 정리, 정돈 되는 거예요. 다윗 언약이 완성된 것을 새언약이라고 하니까. 새언약의 내용은 다윗 언약에 준해서 정리, 정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율법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치는 왕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 왕가에서 오빠가 누이동생을 범하는 일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면 암논이 누이동생을 범하는 이 행위가 죄로 등장하려면 어떤 율법이 동원되어야 합니까? 없어요. 만약 암논이 다말과 동침한 후 그를 더욱 더 사랑해서 아내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축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옛날 모세 시대 때는 죄가 아닌 것이 새언약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죄냐 하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규정받아야 돼요. 규정할 때 주시는 말씀이 뭐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니면서 즉흥적으로 하신 말씀과 기적들이 율법적 기능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요. 성경에서는 세상의 의미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둘째는 인간 때문에 생긴 것이고, 셋째는 성경 속의 세상입니다. 성경 속의 세상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이것은 언약적으로 규명한 세상입니다. 예수님 오신 후의 세상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을 어둠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나머지 의미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연과학적 세상관 2)인문과학적 세상관입니다. 자연과학적 세상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세상은 운동과 정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관찰에서 나왔고, 관찰을 눈이 있기에 시작된 겁니다. 보는 것이 믿는 거예요. 보지 않고서는 믿을 것이 없어요.

내가 믿었다는 말은 뭔가 봤다는 겁니다. 내가 보지 못했다면 남이 본 것도 포함됩니다. 만약 누가 UFO를 봤다면, 앞에서 내가 볼 것도 계산해야 됩니다. 인간의 공포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면, 지금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나를 박살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공포가 됩니다.

내가 미처 당하지 않은 일을 뉴스 시간을 통해서 만납니다. 경기도 어떤 아파트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 아파트도 불이 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을 보면, 나도 운전 조심해야지.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내 것이 와장창 깨어질까봐 두려운 겁니다.

목사들은 교인 한 사람 떠나면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설교 하면서도 ‘왜 안 나왔을까?’를 생각합니다. 지난 주 설교에 상처를 받아 안 나온 것인가? 교인들과 싸워서 안 나왔나? 온갖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늘 말썽만 일으키는 분이 오늘 안 나왔다면 오히려 안심이 되지요.

눈으로 관찰을 하면서 운동과 정지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에서 정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봤어요. 그런데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등장해서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지하는 것은 마찰력 때문이다.’고 했어요. 이 세상에서 뭔가 움직일 때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속도와 위치를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이런 공식을 이용해서 로켓이 달에까지 가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이것이 세상이에요.

우리의 신체는 네 가지 힘이 있어요. 중력, 장력, 약력, 전자기력. 위장의 움직임은 중력에 해당되겠지요. 위에서 내려가야 하니까. 세포는 전자기력 때문에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핵의 플러스, 마이너스에 의해 움직이니까. 장력과 약력은 원자핵과 관련되어 있기에 실재적으로 잘 못 느낍니다.

과학적으로 이런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2) 인문과학적 세상관이 왜 필요합니까?

선을 보는데 “남자가 어떻더냐?” “남자의 혈압이 150까지 올라간단다.” 지금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잖아. “내 타입인가?” 이런 말이지요. 이것이 뭔가 하면, 의미입니다. 눈물을 왜 흘리는가? “눈물은 소금끼로 되어 있는데 --” 이렇게 설명하면 안 돼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세상을 과학으로만 생각지 말고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데 의미는 10분 후에 계속합시다.

(2017. 7. 5. 08:3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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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