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4장18절(예수님의 기억)170620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4장18절(예수님의 기억)170620b-이 근호 목사 주님의 기억 속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고아가 되잖아요. 그럼 우리 속에는 주님의 기억이니까, 주님이 이 땅에 다녀가신 그 현상이 반복되어야 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아담이 옛날 조상 아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축소판처럼 되어가지고, 아담이 갖고 있었던, 아까 시공간 했죠. 그게 어려운 말인데. 아담이 마귀로부터, 배후로부터 시험받고 난 뒤에는 모든 시공간이, 이 세상이 저주가 일어나는 그런 시공간으로 바뀌었어요. 땅도 탄식하고, 땅이 제 때에 곡물을 내지 않고, 지금 우리나라 보세요. 비 안 온다고 난리잖아요. 비 안 오죠. 진작 비 올 때 감사하지, 비 안 온다고 하고, 또 비가 오게 되면 입 싹 닦아버리고. 평소에 기우제 좀 드리지, 비 안 올 때 기우제 드린다고. 그만큼 평소에 감사하는 것이 없어요. 자기위주죠. 그처럼 이 세상은 그 자체가 뭔가 문제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힘들게 만들어요. 힘들게 만드는 아담의 저주가 후손들에게 함께 있는데, 거길 예수님이 다녀갔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저주가 어디서 오고, 뭣 때문에 저주가 오는지를, 그 근원적인 이유를 예수님이 다녀가면서 우리한테 보여준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죠. 악하고 음란한 세대. 그들은, 자기들은 멀쩡하고, 자기들은 정상이고, 여기에다가 플러스해서 기적만 해준다면 우리는 감사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멀쩡하고 거기다가 기적까지 주시면 주신 주님께 감사하겠다고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주님은 우리가 정상이고, 기적을 받을만하고, 기적을 누릴만하고, 기적에 대해서 소유할만하다는 이 자체를 공격하는 겁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기적을 원한다면 너에게 합당한 기적은 뭐냐 하면 죽음밖에 없다는 거예요. 죽음밖에 없다. 진즉에 죽어야 될 존재인 것을 너희들이 왜 모르느냐, 라는 이 말입니다. 진즉에 죽어야 될 것을. 니가 만약에 니 죽음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나의 이 기적을 니가 이해할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와서, 너희들의 세상에 와서 나도 너희와 같이 함께 죽는 이 기적을 이해할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대단한 메시아고, 그들에게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시고, 그저 쭈시옵소서의 메시아인데, 오신 주님은 날마다 죽노라, 에요. 나는 죽음 외에는 줄 게 없다는 거예요. 죽음 외에는. 같이 죽자는 겁니다. 살려달라고 하니까 주님은 같이 죽자는 거예요. 니나 혼자 죽으라고 인간들은 이래 나오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우리가 고아니까 구원해줬다. 끝. 이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보여줄 게 있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아담의 축소판도 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압축판, 축소판인 거예요. 그러면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이라고 했잖아요. 주님 가신 길을 우리 인생을 통해서 재현해내시는 일을 주께서 하게 하십니다. 그 주님 가신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이 길이에요. 상당히 여러분이 의외로 느껴지겠지만, 이렇습니다. 출현과 사라짐. 또는 출몰과 사라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주님을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게 만들어요. 출몰하셨다가 사라졌다가. 출몰과 사라짐을 두 글자로 하면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이라는 뜻이 뭐냐 하면 사전에 예비 된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사전에 예상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절대로 예상한 삶이 아니고, 본인이 기대한대로도 안 되고, 기도한대로도 안 되고. 예상한대로도 안 되고, 예측한대로도 안 돼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출몰과 사라짐이에요. 주께서 나타나셨다가 곧장 사라져요. 그래야 인간 손에 주님이 발목 잡히지 않기 때문에. 잡을 수 없어요. 미끄러지기 때문에.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지금 요한복음 본문 자체도 마찬가지고, 누가복음 마지막에도 그 대목이 나와요. 24장 13절에 보면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절,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했다는 소식을 이야기하면서) 15절,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동행하지만 눈이 가리어져서 알지 못한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축소판이 되어가지고, 이 땅에 살면서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못 알아보는 제자들과 그리고 그 시대상을 자기들의 인생을 통해서 그대로 반영해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저녁 잡수실 때 잠깐 눈을 뜨게 해주니까 “아! 주님이다!”라고 알게 된 거예요.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그 다음부터 같이 생활하시면 될 텐데, 같이 생활하시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했습니까? 또 사라져버렸어요. 도깨비같이 또 없어졌어요. 너무 사랑하는데 도깨비 공유가 나타나지 않아요. 공유가. 가슴에 칼을 빼야 되는데. 기도하는데 오시지를 않아요. 주도권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왔을 때에 인간들이 왜 메시아를 못 알아봤느냐 하면, 구원의 주도권을 자기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개인구원이죠. 내가 뭘 하면 내가 나를 스스로 구원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되느냐, 거기에 몰두 한 거예요. 그런데 구약 성경에 보면 개인구원은 없어요.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18절을 다시 봅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했죠. 제가 처음에 말씀드리면서 본문에 두 개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죠.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주께서 분주하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너희라는 것. 집단으로 본다는 겁니다. 구약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집단으로 봐요. 집단으로. 집단으로 보기 때문에 전체가, 천 명 같으면 천 명 전체, 만 명 같으면 만 명 전체가 완전하게 의롭지 아니하면 그건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어요. 뭐 비율로 해가지고 한 2퍼센트 없어도 내가 눈감아 줄게, 라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천국 백성이 천 명이라면 천 명 몽땅 거룩해야 돼요. 만 명이라면 만 명 다 거룩해야 돼요. 이것을 제가 사실은 주일 낮 설교 때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주일 낮 설교 제목이 뭐였던가요? 평균이죠. 평균. 사람들이 평균이라는 말을 할 때, 예를 들어서 사과 다섯 개가 있고 세 개가 있는데 평균해버리면 네 개, 네 개가 되죠. 상당히 가진 사람은 서럽고 없는 사람은 기분이 좋죠. 하지만 그래도 좀 참을 만 한 게 아직도 네 개나 있잖아요. 자기 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은 그 정도 밖에 안 돼요. “평균케 하세요. 그래도 내 것은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평균은 그런 평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내 것이 없이 된 자들의 집합이에요. 그래서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돌 그룹이야기를 했잖아요. FT아일랜드, 블락비, 맨날 으르렁 거리는 EXO, 거기다가 백뱅, 슈퍼주니어, 방탄소년단, 그이야기를 왜 했느냐 하면 그 콘서트에 가보세요. 공부 잘하고 못하고, 이쁘고 못생기고 할 것 없이, 소녀 팬들은 전부 다 난리도 아니에요. 오빠만 있으면 자기는 존재도 없어. 그럴 때 내가 잘 해야 된다는 스트레스는 거기서 한 방에 다 날라 갑니다. 내가 뭐 해야 되고, 내가 뭐 남한테 인정받아야 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오빠만 인정받으면 다 돼요. 오빠만 인정받으면. 슈퍼주니어만 인정받으면 다 돼요. 지드래곤만 인정받으면 다 돼요. 지드래곤 모르죠? 그런 사람이 있어요. 빅뱅의 멤버에요. 그것만 있으면 다 돼요. 아이돌이 우상이에요. 우상. 그게 평균이에요. 평균이라니까요. 니는 고아인데 착한 고아고 니는 못된 고아고, 그게 없어요. 그냥 고아에요. 고아라는 것은 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니가 착했나를 못됐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너는 부모 없음. 그걸 끝나는 거예요. 부모 없음. 너는 이 땅에서 건질 자 없음.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될 역할은 뭐냐 하면, 메시아를 붙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 메시아는 절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고, 메시아가 원하는 대로 그냥 조치하시는 분이다. 이걸 보여줘야 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도랍시고, 우리가 호출한대로 쪼르르 주님께서 “도련님, 뭘 도와드릴까요?” 이래해버리면 우리가 영웅이 돼버려요. 우리가 갑자기 가치 있는 존재가 돼버린다고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단 말이죠. 가룟 유다도 못 알아보고, 열 한 제자도 못 알아봤어요. 못 알아본 그 지경, 그 형편, 그러한 사고방식을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재현되는 겁니다. 주님 만났다고 기뻐하죠. 그럼 다른 사람이 주님 만났는데 어떻게 생겼느냐고 보여 달라고 하면, 못 보여주죠. 왜? 이미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에. 좀 진득하게 있어가지고, “자 드디어 방금 동남아 공연 마치고 우리 주님이 오셨습니다. 자 무대에 모시겠습니다. 자 다같이 박수!” 뭐 이렇게 돼야 되잖아요. 없어요. 없으니까, 인간이 주님을 부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필요할 때마다 호출해서 주님을 하나의 연예인처럼, 이렇게 교회가 매니저가 되고 예수님이 연예인이 되어 앞에서 재롱부리도록 못한다 이 말입니다. 못하는데, 그런데 교회는 곧잘 해요. 교회는. “오늘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들 믿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들을지어다.” 이렇게 목소리 자체가 변조가 되거든요. 평소에 하는 목소리하고 설교 할 때 할렐루야! 하는 목소리하고, 변조 자체에, 주님께서 여기에 삼위일체로 함께 내주하는 것처럼, 그들은 이걸 영업비밀로 삼아요. 영업비밀도 아니지만. 이걸 영업기술로 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사가 특별한 옷을 입는다든지, 배지badge를 단다든지, 휘장을 절기마다 바꾼다든지, 그렇게 종교놀이를 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동조를, 우리는 이런 종교놀이를 원했다는 것을 얻어내게 되면 여기에 돈이 모이고 이 교회는 부흥되는 거예요. 주님은 그 현장을 누구에게 목격하게 하느냐 하면 바로 고아를, 자기 백성을, 성도를 목격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 성도는 뭘 느끼겠습니까? 주님이 당했던 그 서러움과 곡해와 오해를 온 몸으로 같이 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 가신 길이에요. 주님 가신 길이 이런 오해와 밀침과 소외와 배제를 당했던 길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고생했다는 것은 아는데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사람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주님을 배척했는지, 사람에게서 나오는 주님을 배척할만한 그 요소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몰라요. “주님 혼자 고생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끝나버려요. 이제 우리차례인데? 우리가 그 고생을 이 땅에서 완전히 느껴야 되고, 우리가 온 몸으로 체험을 해서 발산해야 될 것인데, 사람들은 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가고 있고 주님은 여기서 고난 받고 고생하고 쫓겨 가는 그 모습을, 우리는 그냥 팔짱만 끼고 영화를 보는 것처럼 보고 있어요. “힘내라 주님! 저 나쁜 놈!” 이러고 있다고요. 본인은 제 3자가 되고 말았어요. 주님과 같이 쫓길 생각은 안 하고 제 3자가 된 거예요. 제 3자가. 그럼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늘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늘 주님과 고난 받기를 준비해야 됩니까? 라고 저보고 이야기를 하겠죠. 근데 그게 우리한테는 허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잠시 그런 느낌이 있다가, 출몰과 더불어서 곧 뭐가 된다? 사라져버리죠. “주여, 십자가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눈물 찔끔찔끔 흘렸는데 그거 3초 내지 5초가거든요. 갑자기 지가 은혜 받은 모습을 찍고 싶어요. 찰칵 찍어가지고 사진 밑에다 쓰죠. “나 천구백 몇 년도에 은혜 받았다.” 이미 이 은혜를 자기가 동결시켜요. 동결. 은혜 받은 것을 계속 우려먹으려고 냉동시키는 거예요. 3년 전 은혜 받은 것. 이런 것. 이래 돼버리면 주님이 마치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한 번 성령 받았다고 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성령이 자동적으로 우리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에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측이 안 되고 예상이 안 된다고 했죠. 우리는 예측, 예상 안 돼요. 안 돼야 되고. 되게 되면 나는 교주가 되는데요? 자동적으로 주의 은혜를 막 발산하고, 자동적으로 원하는 것 다 주고 이렇게 되는데요? 사도바울이 손수건을 가지고 죽은 자를 살려냈죠. 그럼 그 손수건 가지고 가는 곳마다 다 써먹었습니까? 나중에는 때가 묻어서 시커멓게 될 뿐이죠. 지금 유럽에 가보세요. 유럽이나 어디에 가보면, 뭔가 성모마리아가 눈물 흘린 곳, 또는 암소를 만지면 애기 놓는 곳, 거기만 맨들맨들해요. 다 닳아가지고. 우리나라에도 돌 할머니라고 있어요. 영천에 가면 있어요. 그거 만지면 되고. 대구 근처에 갑바위가 있어요. 세 번 빌면 그 중에 하나는 된다고요. 세 가지 빌면 그 중에 한 가지는 된다고. 33.3333퍼센트. 빌기 위해서 780미터를 할머니들이 올라온다고요. 의지의 한국인이라. 고난을 딛고 그 어려운 곳 까지. 수능 칠 때만 와서 차가 밀려요. 그래서 수능 칠 때는 교회 좀 일찍 오라고 해요. 차가 밀리니까. 우리교회 가는 길목에 있거든요. 전 세계 어디에 가도 아담의 축소판이라니까요. 아담의 축소판. 선악으로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이걸 나의 동질성, 동일한 내가 계속 연속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개인구원입니다. 나만 살면 그만이니까. 집단으로 보지 않고. “니하고 나하고는 달라.” 이게 아니에요. 다른 게 아니에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주께서 찾아오셨잖아요. 찾아오셔서 똑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 믿었으니까 내가 예수 믿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돈 좋아하는 것 다 좋아하고, 일부러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이 그걸 하게 합니다. 어떻게요? 돈을 좋아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 전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이게 24시간, 매달, 매일, 생각나던가요? 먹는 것을 족한 줄로 알라. 이렇게 생각이 나던가요? “여보! 이게 반찬이 뭐냐? 완전히 이거 뭐야? 콩나물국이 며칠 째야?” 그럼 아내가 있다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아세요.” “감사합니다.” 이래 돼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 때가 언제 오느냐 하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 밥 먹을 때, 어서 빨리 퇴원해가지고 사재 밥, 집 밥 먹고 싶죠. 그럴 때 반찬투정 안 합니다. “반갑다 밥아!” 이러면서 먹죠. 근데 그게 며칠 가겠어요? 그 느낌이? 며칠 안 가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요. 여자들이 아내가 되어서 남편에게 반찬을 잘 해준다고 하는데, 반찬의 끝은 어디입니까? 두 가지? 세 가지? 잘해주면 당연히 잘해줘야 되는 것으로 아예 착각을 한다니까요. 다 같이 돈 버는 입장에서 집에 가면 피곤해 죽겠는데도 반찬 해야 되니까 하게 되면 오늘은 좀 반찬이 많다가, 그러다 그 다음날 한두 가지 빠져버리면 오늘은 반찬이 없는 것이 돼요.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였어요. 처음부터 밥하고 간장하고 주면...밥도 할 필요 없어요. 마트에서 파는 햇반하고 주면 될 것을 괜히 고등어 구워준 거예요. 괜히. 괜히 맛있게 해주고 괜히 구워줬어. 그거 안 해주면 사랑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여기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데, 사람은 동질성이 있어가지고 이미 은혜 받은 것을 가지고, 줄곧 그것을 자기의 동질성으로, 은혜 받은 내가, 어제 은혜 받았다면 오늘도 어제의 그 내가 나라고 계속해서 이어져가고 싶은 거예요. 계속 그렇게 가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누구를 증거 하겠어요? 주님을 증거 하겠어요? 자기를 증거 하겠어요? 주께서 나를 이렇게 괜찮은 존재로 만들었다고 자기를 증거 하겠죠. 제가 왜 자꾸 뜸을 들이느냐 하면, 구약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가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자기들이 구원받은 나라, 특수한 나라라는 겁니다. 그럼 특수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에게는 없고 자기 민족에게만 있는 요소를 계속 붙잡고 싶어 하겠죠. 그 붙잡는 것이 문화잖아요. 인간이 만든 것. 성전. 성전을 그렇게 붙들고 싶은 거예요. 성전을. 결국 이스라엘의 성전은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불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느헤미야 성전이 있어요. 느헤미야 성전은 좀 어설픈데, 그 성전은 헤롯 때에 증축이 되었어요. B.C40년경부터 헤롯 아들 때까지 증축이 돼요. 증축된 그 헤롯성전은 A.D70년에 디도라는, 로마군대에 의해서 작살나버렸습니다. 다 깨지고, 유대인들이 다 쫓겨나고 없잖아요. 그 뒤에 아랍사람들이 와서 살았는데, 마호메트가 A.D600년경, 6세기, 7세기에 와서 거기다가 황금돔 성전을 만들었어요. 원래 이 터가 없어요. 예루살렘이 계곡인데 아랍사람들이 이 터를 깎았어요. 헤롯 때부터 해서 이 터를 깎아가지고 이 넓은 터에다가 했고, 유대인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통곡의 벽에만 가서 절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미국이나 한국에서나 문자적으로 구약을 보고 종말을 믿는 사람들은 전3년 반 환란시기에 누가 나타느냐 하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요. 내가 보기에는 니들이 적그리스도인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 성전을 접수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3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 고난을 많이 줘요. 주고 난 뒤에, 3년 반 지나고 나면 그때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가 오는 것을 다 알아버려요. 재미 하나도 없어요. 메시아가 언제 오는지 정보를 다 알아버렸어요. 이 말이 왜 위험한 말이냐 하면 내일은 온다, 안 온다? 내일은 안 와. 오늘 2시 40분에는 안 와요. 왜? 예루살렘에 아직까지 적그리스도가 안 나타났으니까. 도둑이 내일 안 오는 도둑 봤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정보를 자기 사적인 구원, 이스라엘 구원, 이스라엘이 했던 잘못이 그거에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온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위하여, 인간을 위해서 온다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말씀은 누구를 위해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성전을 주장하는 이야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아요. 차이남이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사건을 유발시키면 내가 믿음이 좋다, 내가 잘한다, 신앙생활 잘한다, 라고 할 때에, 아하!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을 죽게 한 죄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병원에 갔을 때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한 말씀이 생각나듯이, 퇴원하면 또 마찬가지에요. 마찬가지지만, 그때그때마다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이 말씀이 주는, 말씀 앞에 우리를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말씀 앞에서 아무것도 내가 지킨 것이 없어요. 못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못 지키라고. 근데 우리가 못 지키게 될 때, 이 못 지키는 것이 서럽고 불편하고 암울하고 지옥가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못 지킨 채로 지옥가고, 천국 갈 사람이 아닌데, 내가 못 지킨다고 아는 순간, 말 할 수 없는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나올 때, 그것은 바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에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잖아요. 배척받을 때마다 주께서 느끼는 것이 그거에요. 이렇게 배척받고 고난 받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그 기쁨이 주님의 기쁨이 되었던 겁니다. 그걸 그대로 우리에게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 가신 길이 십자가 길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보고 사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마태복음 16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근데 베드로가 와서 말리죠.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사람과 사탄을 이미 한패 먹게 해요. 이미 한패 먹는다고요. 그러니까 “에이, 베드로가 너무 심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이러면서 베드로를 탓할 것이 아니고, 오늘날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자만케 하고 교만케 하고, 나 믿음이 좋다고 까불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감사를 해야 된다니까요. 고마워해야 돼요. 마귀가 안 도와주면 우리는 죄인이 안 돼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혹이라는 것은 넘어지라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지금 사탕을 많이 먹어 이가 아파서 이제는 안 먹고 있는데, 마귀가 와서 사탕 두 개를 보여주면서 나에게 절하면 이 사탕 두 개 준다고 한다면 마귀한테 절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니나 먹고 이빨이나 상하세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유혹이라는 것이 급수가 높아요. 시시한 유혹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시한 유혹들이. 기복신앙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 그게 유혹이라고 여러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유혹이에요. 왜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까? 무슨 좋은 날을 보려고? 뭐 하려고 목숨 바쳐요? 목숨 바친다고 하면서 조금만 아파도 아야! 하면서....., “북한을 살려야 돼! 북한 전도하는 사명을 받았어!”하고 갔는데, 잡혀가지고 울면서 “잘못했습니다.”라고 했죠. 그러다 약 잘못 먹어 미국으로 송환해서 온지 사흘 만에 죽어버렸어요. 기자회견하는 것 좀 보세요. 이 좋은 나라를 제가 욕했습니다. 용서해달라고 눈물 흘리면서 기자회견에 나온다고요. 지금 한국사람 여섯 명이 갇혀 있잖아요. 여섯 명이. 유일하신 문재인 대통령이 다 구해줄 거지만. 미션임파서블, 톰 크루즈 보내서 구해줄 거예요. 이 사람들이 전부 다 목사들이에요. 목사들. 이 사람들이 기자회견 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이 좋은 김일성 아버지 나라를 욕해서 죄송합니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할까요? 바로 내일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해서 살고 나면 뭔가 주께서 나에게 상을 줘서 이 북한이 기독교로 뒤집어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라고 내일을 예상한 거예요. 그럼 인간의 죄가 뭡니까? 딴 게 아니에요. 내일 염려는 내일 염려하라는 그 말씀에 안 걸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내일을 생각합니다. 아까 시작하기 전에 자본주의이야기 해드렸죠. 자전거는 밟아야 앞으로 간다고요. 자본주의의 생명은 뭐냐 하면 신용사회에요. “지금 빌려주면 내일 갚아줄게.” 투자한 이유가 뭡니까? 투자하게 되면 다음에 이자가 붙어서 온다는 내일을 기약하는 거예요. 사업은 그 때문에 하는 거예요. 내일, 모레 때문에 하는 거예요. 오늘 재림하면 사업 안 합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장림이가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한다고 해놓고, 지는 1994년에 탈 적금을 넣어놨다니까요. 자기는 알아요. 이게 헛방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흰옷입고 올 때, 이장림이는 지가 생각해도 웃기죠. 아니, 농담도 못해요. 지는 농담으로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진담으로 여긴 거예요. 진짜 온다고.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전부 다 뭣 때문에 옵니까? 전부 다 개인구원이에요. 개인구원. 자기는 구원받고 싶은, 개인구원이에요. 여러분, 개인구원 없습니다. 집단죄인밖에 없어요. 집단죄인이에요. 집단죄인. 어느 누구도 주님을 알아볼 사람은 없어요. 만약에 내가 주님을 붙잡고 동업자가 되어서, 나는 주님의 매니저고 주님은 연예인이 되어서, 어디 행사에 다니면서 “주님 여기 계십니다.”라고 소개한다면, 그 주님은 누구의 소유가 돼요? 나의 소유가 되죠. 만약에 그 괜찮은 주님을 남이 뺏어가 버리면, 주님을 한 목사님이 뺏어가서 교회가 부흥되면 나는 뭐가 돼요? 나는? 아휴! 저거 내 건데? 모든 문제는 개인구원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방송이나 유튜브에서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을 좀 들어보세요. 목사들 설교 딱 들어볼 때, 딴 거 살피지 마세요. 목사가 저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개인구원을 아니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지 좀 보세요. 백퍼센트입니다. 전부 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회개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회개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어요? 회개하는 자만이 개인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노리면서 하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교회라는 것은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는 중개업자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그 교회 자체가 마귀가 그렇게 세웠고, 마귀가 도와줘서 그렇게 교회를 세웠는데, 그 마귀가 상당히 고맙죠.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그 전체 유대사회가 한 마음, 한 뜻이 된 겁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된 거예요. 나라가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이데올로기를 지금으로 말하면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해서 이걸 마르크스는 허위의식이라고 했어요. 허위의식이라고 한 것은 뭐냐 하면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때, 완전히 그들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서 집어넣은 거짓의식이라는 겁니다. 붕 뜨게 하는 판타지를 집어넣어서 지배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계급에서 노동자는 이 자본가의 지배계급을 엎어야 공산주의세계가 된다. 이데올로기가 없어지게 되면 지배하는 자도 없고, 지배받는 자도 없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공산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공산사회. 뭐 촛불집회에서 안 들었습니까? 이데올로기가 어떠니 하면서 정치적인 용어를 많이 들었죠. 뉴스만 틀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남을 속이기 위해서 하는 건데, 문제는 남을 안 속이는 진실이 뭔가는 없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는 다른 속임수로 대체할 뿐이지. 허위의식의 진수가 뭐냐는 바로 예수님 중심으로 규정되어야 해요. 내가 허위의식이 아니야, 니가 허위의식이야, 니가 이데올로기야, 라고 서로 욕하지 말고, 정말 모든 인간이 합심해서 죽여 버린 분이 계세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떤 의미에서 모든 교회가 합심해서 죽인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에요. 교회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허위의식의 보조를 맞추어줄 때, 그들이 하나의 고객이 됩니다. 단골이 돼요.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갈 때 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행운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 응답되기를..’이러면서 교회 온다 이 말이죠. 오고 난 뒤에,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약에 성령께서 그 교회에 목사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되면,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교회 올 때 가진 노림수가 더럽고 수상하구나. 내가 바로 죄인이구나. 내가 바로 고아구나. 정말 아무것도 갖추지도 못했으면서도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야지, 라고 까불대고 촐랑대며 놀았구나.’라는 사실. 내가 내 인생을 꾸리게 되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어요. 내가 미래를 계획하게 돼요. 내가 미래를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라고 자꾸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고요. 인간치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근데 우리는 육으로서는 아담의 축소판인 동시에 영으로서는 예수님의 축소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담처럼 세상에서 나만 위해서 사는 거기에다가,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마음까지 덮쳤으니까, 우리가 증거 할 것은, “나는 죄인이요, 이런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주의 증인되는 겁니다. 이런 역할을 누가 하게 하느냐, 성령이 해요. 19절을 봅시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아까 우리가 배웠죠. 출몰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사라져버려요. 출몰하고 사라져버립니다. 주님이 우리 손에 놀아나지 않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잖아요.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까? 분명히 함께 있겠다고 했는데, 막상 제자들이 느끼기에는 예상 못할 때에 출몰하고, 계시지도 않고, 안부도 안 하고 떠나버리고. 주도권이 제자들에게 있지 않아요. 그럼 제자들은 주님도 함께 없는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리요, 라고 하죠. 근데 성령께서 온다. 그럼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또 성령을 붙잡아야 합니까?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졌던 모든 고초를 제자들에게 그대로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의인이죠.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죠. 성도는 주님 안에서 뭐가 됩니까? 아무 행한 것도 없이 뭡니까? 의인이죠. 근데 성도 외에 모든 사람은 뭡니까? 행함으로 자기 의를 만들어서, 그걸로 천국을 뚫겠다는, 유리천장인지, 뭔 천장인지를 뚫겠다는, 그렇게 노력하는 죄인들이죠. 우리가 의인이라면 그런 입장에서 죄인들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하고 말이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어요? 안 통하는데, 주께서 그런 사람들 중에서 뽑아 세워버리면 다 같이 주님 앞에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반갑다 친구야가 되죠. 반갑다 친구야가. 이미 교회는 우리가 만들지 않더라도, 이미 교회는 주님께서 곳곳에 다 심어놓고 다 박아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가보세요. 혹시 교인이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가면 혹시 있을지도 모릅니다. 없는데, 기대는 안 하는데, 혹시 있을지 모릅니다. 자, 그러면 그들을 욕해야 되는가? 안 믿는 사람들을 욕해야 되는가? 이걸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중요해요. 자, 나는 주님을 알았다. 저들은 모른다. 욕 할까요?만약 욕을 하게 되면 우리는 개인구원에 빠진 사람들이 돼버립니다. 내가 욕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뭘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저 욕하고 싶은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입장에 있을 때 주께서 찾아오셨잖아요. 그럼 찾아오셨으면, 나한테 뭔가 기대한 것이 없어요. 나한테 기대한 것이 없는데, 내가 뭔가 발설을 하고 내가 말한다는 것은, 이미 또 독자적으로 나의 영역을 만든 것이 돼요. 만약에 그렇게 욕을 해버릴 경우에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한테 욕을 얻어먹는 저 사람의 아침식사와 그리고 어젯밤에 심장이 계속 뛰게 한 것, 오늘밤의 따뜻한 잠자리를 니가 마련했나? 내가 마련했나? 라고 물어요. 로마시대 때, 사도바울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칼로 쳤다. 그럼 “저 사도바울의 목을 쳐라!” 라고 말할 때 에너지가 나올 것이 아닙니까?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은 아침에 분명히 밥을 먹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 밥 누가 먹여줬어요? 신부가 먹여줬어요? 누가 먹여줬어요? 누가 그 사람을 살게 했느냐 말이죠. 주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주님이. 주님이 살게 하신 사람을 우리가 왜 욕하느냐 이 말이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역할을 하라고 하신 건데. 무슨 역할? 나는 그 사람한테 목 베임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그것을 체험케 하신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돌 던진 사람들을 욕했습니까? 스데반집사가 돌 던진 사람들을 욕 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에게 전도한 거예요. “여러분들을 지금 먹이고 살린 그 분이 이 땅에 왔다가 갔습니다.” 이거 이야기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 하나님이 왔다가 갔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 사람들이 분해서 짱돌 들고 때려죽였다 이 말이죠. 스데반집사가 죽으면서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이 주님이 허락한 일이라는 것을 저들이 모르고 있나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저를 이미 의롭게 하신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신 것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이게 짝이 맞아요. 저들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 나는 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 이렇게 해서 한 세트가 되는 거예요. 어떤 세트? 십자가의 반복성을 보여주는 세트. 주님이 어떤 세계에 다녀갔는가를. 주님이 어떤 고초를 거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 피를 내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수모가 응축된 것이 피로 나왔는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날마다 갈수록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더하다 이 말이죠. 날마다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게 살고 회사 잘리고....., 이것도 하나의 그냥 심심하게 살기 보다는 롤로코스트 타는 그런 재미가 있잖아요. 잘리고 또 취직하고 하는, 뭔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좀 어지럽죠. 좀 어지러운데, 주님은 이것보다 더 어지러웠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주님께서 물 위를 걸었죠. 그리고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럼 그때부터 베드로가 물만 보면 환장했습니까? 야, 내 트랙이다! 해가지고 그 다음부터 신발 벗고 뛰어다녔어요? 아니죠. 물 위를 걷게 된 그 자체를 베드로가 예상 못한 거죠. 예상 못했으니까, 예상 못한 것을 한 번 했으니까 그 다음부터 물만 보면 그냥 물 위를 걸을까요? 물 위를 걷는 능력이 출몰했다가 곧장 사라지죠. 왜? 개인구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복음의 그 일은 아직도 진행 중 입니다. 재림 할 때까지 십자가는 계속해서 진행 중입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성급해가지고 먼저 하나님이 내 안에 있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순서를 지금 안 지키고 있는 거예요. 순서가 항상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가 된 것이 먼저 순서입니다. 제가 주일 낮에 평균이 뭐냐 설교 할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떤 평균을 주었는지를 생각하라고 했잖아요. “우리 욕심내지 말고 우리들끼리 평균하자.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자.” 이러면 안 돼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에 어떻게 왔는가를 설명했죠. 예수님께서 부유한 자로 가난하게 되었죠. 예수님이 뭣 때문에 부유하다고 했습니까? 부유한 이유가 뭡니까? 하늘나라에 보석이 많아서 그걸 다 팔면 돈이 많아져서 부자입니까? 이 부유가 뭐냐 하면 영광이죠. 그러니까 이 영광을 버리고 가난하게 된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평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감사가 풍성하게 되면 이미 그 안에서 하나가 된 겁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 교회도 평균되어야 하는데, 하면서 내가 한 달 수입이 오백인데, 저 분은 백이다. 그럼 오백과 백을 평균하는 방법은, 500더하기100을 나누기 2하면 돼요. 300만원이죠. 그럼 내 것 200주고 서로 300씩이 되면 이게 평균됩니까? 이게 바로 사회정의에요. 사회정의라고요. 이 사회정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주장한 거예요. 공동체의 정의를. 피자 판이 있습니다. 이 피자 판을 세상적인 정의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절차를 정해요. 절차를 1등, 2등, 3등을 정하고, 이 피자를 제일 마지막에 먹을 사람에게 이것을 자르라고 하면 제일 공평해요. 제일 마지막 사람이 자르면 어떻게 자르겠습니까? 두 개는 크고 하나는 작게 자르지 않겠죠. 왜냐하면 먼저 먹는 사람들이 큰 것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에 먹을 사람이기 때문에 제일 정확하게 3등분해서 자르겠죠. 이걸 존 롤스라는 사람은 《정의론》에서 어려운 사람이 가졌다면 얼마를 가지겠는가? 그것이 사회정의에 합당하다고 내세운 겁니다. 미국의 경제학자 존 롤스가. 그래서 사회정의라는 것은 결국 돈 문제에요. 돈 문제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정의는 돈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다 우리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증인들이기에 똑같아요. 더 착하고 덜 착하고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 부탁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자기 행동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선악체제로 심판하지 마세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주께서 이미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일을 일으키신 겁니다. 소경이 되든지, 절름발이가 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금 가장 최적의 삶을 살아가게 하신 겁니다. 모든 경우가 항상 맞아요. 지난달도 맞고, 지금도 맞고, 내일도 맞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세상과 비교하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