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616a히13장20절(언약의 피)-이 근호 목사
안양20170616a히13장20절(언약의 피)-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20절입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리 되어있지요. 거기에 예수님이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리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예수님을 끄집어낼 때, 뭐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언약의 피. 앞에 언약의 떼어버리면 한 자로 뭡니까? 피. 피로 끄집어냈다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는가를 이 시간에 알아봅시다. 왜 피냐 말이죠. 왜? 예수님이 착한 일도 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깨끗하게 말씀 지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피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디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보니까 '언약의 피'라고 소개되어 있지요. 언약 안에 들어있습니다. 자,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리 있고요, 십자가니까 붉은 걸로 해볼게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리 되어있고 여기서 뭐가 흐르느냐 피가 흐른다. 피가 흐르거든요. 그러면 인간들이 예수님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 당시 인간들은 다 알고 있지요. 아~ 저 분은 피를 흘렸다. 그런데 피를 흘렸다! 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예수님이 죽는다! 이렇게 알고 있어요. 죽는다. 어떤 사람은 ‘아! 저 분이 자칭 메시아라고 우기다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힘에 의해서 죽는구나! 안됐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피에 대해서 사람마다 피를 보는 느낌이 다 다르지요. A, B, C, D...,있다면 어떤 사람이던 피를 보던 간에 사람은 이 피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자기가 인생을 살아온 체험으로서 피를 보게 되어있어요. 자기 인샌 살아온 체험으로서. ‘나 피 흘릴 때 굉장히 아프던데 주님은 얼마나 아팠을까?’ 요게 A라는 사람의 피의 관점이에요. ‘아휴, 피가 나올 때까지 하게 되면 숨이 굉장히 막힐 건데.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또 이런 식으로 봐요. 또 어떤 사람은 ‘아, 피 흘리면 수분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피를 흘리면 목마르겠다. 내가 마음 같으면 물을 갔다 드리고 싶다.’ 이런 식으로 또 피를 생각하는 거예요. 어쨌든 그 동일한 피가 흐르는데 이 피에 대해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은 각자 자기 인생과의 바탕으로 해서 피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 피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인간들이 느꼈던 그런 체험에서 나온 피가 아니고 언약의 피로 되어있어요. 언약의 피. 언약의 피기 때문에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어떤 인간도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피에 대해서 알 수도 없어요. 언약을 모른다고 이렇게 단 칼에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언약을 안다면 언약 완성이 예수님의 피다! 하는 것을 아는 경우에만 피를 출발점으로 해서 거꾸로 언약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언약을 제대로 안 사람이라면 언약의 완성이 피다.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언약의 완성된 것이 피다. 그리고 내 살과 내 피가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새 언약이라 했기 때문에 언약을 아는 사람이라면 피가 완성이 된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면 언약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약부터 해서 피를 이해할 수는 없고 완성되는 피를 통해서 거꾸로 언약을 해석하게 되면 언약을 이해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 말이 복잡하지만 이해는 쉬울 거예요. 유대인들이 십계명을 볼 때에 예를 들어서 부모를 공경하라. 그럼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했으니까 공경합니다. 그럼 자기는 언약을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공경한 사람이 어느 날 몇 천 년 후에 1400년 후에 피 흘려 죽었다면 나는 부모를 공경했는데 피 흘려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분이 십자가의 피를 줬기 때문에 저쪽 노선이 언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냐, 아니면 나는 부모를 공경했다는 이 내 노선이 언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냐, 둘 중에 어느 것이겠어요? 어느 쪽이 제대로 이해한 거예요? 예수님이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언약에 대해서 그동안 몰랐다가 되고 몰랐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면 언약을 지키는 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보니까 내가 부모 공경하면 말씀 지킨 것이라 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보니까 나의 인생 체험에서 나왔어요. 인생 체험에서. 인생 체험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육’이라 합니다. 육에서 언약을 이해했고 육에서 예수의 피를 이해해놓고, “나는 피를 믿습니다.” 라고 해버리는 거예요. 육이. 그런데 영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언약 완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그 결론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피다. 해놓고 오늘 본문은 뭐로 되어있어요? 그게 무슨 피라 했습니까? 그게 언약의 피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알고 있는 피와 주님이 알고 있는 피가 달라요. 그렇다면 여기서 히브리서 마지막 대목에 와서 뭘 정리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의 피를 믿는다 하는데 과연 우리가 제대로 이해했느냐, 그걸 다시 한 번 분석하고 점검해야 됩니다. 그러면 점검하는 쉬운 예를 들겠으니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보통 공간을 가지고 사방이라 합니다. 사방이라 하는 것은 방향이 4개라는 뜻이에요. 동서남북이지요. 그러면 방향이 동서남북 4개밖에 없겠습니까? 이렇게 공간이 있다면 중심이 있다면 북, 동 이것밖에 없어요? 북, 동 중간에 또 있잖아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라는 영화도 있듯이. 북북서로. 그러면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안하고 그냥 동서남북으로 대충하는 거예요. 그러면 공간을 동서남북 정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에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문어하고 낙지가 영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문어하고 낙지가. octopus라고 해요. 문어하고 낙지를 미국 사람은 외국 사람은 영어로 같은 단어를 사용해요. 똑같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문어하고 낙지 맛이 달라요. 한국 사람에게는. 여러분, 다릅니까? 나는 다른 줄 모르겠는데. 항상 문어 낙지를 그냥 먹는 게 아니고 산낙지하고 문어 맛이 다르잖아요. 다른데 외국 사람은 그걸 구분을 못한답니다. 그냥 둘 다 octopus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문어, 낙지를 보면서 분류체계방법이 그냥 같이 가는 거예요. 분류 방식이. 따라서 세상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설정할 때에 인간은 그냥 개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볼란다. 하는 자기 방식이 있어요.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볼란다. 어린애가 기차가 지나가니까 “야, 기차간다.” 이렇게 하니까 엄마가 “얘, 저거는 기차라 하지 말고 저걸 열차라 하는 거야. 기차라 하는 것은 옛날에 연기 태울 때 하는 기차야.” 이렇게 하게 되면 애는 그걸 짜증내요. 왜냐 하면 자기는 그렇게 까지 세분화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안 그래도 딴 거 신경 쓸 거 많은데 그까지 신경 못 쓴다 말이죠. 특히 시어머니들이 며느리 처음 올 때 기죽일 때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얘야,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세분해야 돼.” 혼수를 해온다. “뭉쳐서 혼수를 해오면 안 돼! 요거는 고모님 거, 요거는 누구 거, 요거는 누구 거, 다 해야 돼! 우리 집안은 그런 집안이야.” 초장부터 기 죽이려고. “니가 아직 시집을 모르는 모양인데.” “제 남편 말은 제사가 10번이라는데요.” 그러면 “10번이라도 사실은 10번 더 되는데 많이 줄여서 10번이야.” 이런 식으로. 그 깊은 층, 만약에 보통 시가집 아니고 종가집에 시집왔다면 그 20대 30대 초반의 아가씨가 뭘 알겠어요? 그냥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옆에서 시다바리라 해서 밥해주면 훌륭한 며느리 되는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가 “얘야, 나는 이제 손 뗀다. 나도 어지간이 많이 했다. 우리 시어머니한테 많이 당했는데 이제는 니가 앞으로 종가집 제사 다해라. 반찬은 56가지이고. 전 이런 거 다 준비하고.” 이러면 감당 못하지요. 그만큼 개념이 세분화되어 가는 거예요. 어떤 특정 지점에 세분화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세상을 볼 때 언약으로 보는 거예요. 언약으로 보는데. 인간은 세상을 볼 때 세상의 기존의 인간들이 나한테 막 던져준 개념들이 있어요. 시집에서는 이렇게 하고 직장생활을 이렇게 하라. 그 개념들 대충 주워 모으면 그게 남들한테 인정받는 내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나라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남으로 인하여 살아가요. 만약에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할 수밖에 없어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새는 청소년들도 부모한테 꾸중 듣고 이러면 죽으려고 해요. 옛날에는 밥이나 먹여줬으면 고마운 줄 아는데 꾸중 들었다고 가출해버리고 꾸중 들었다. 가출했다. 그러면 가출하기 전에 너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부모로부터 조립당하는 부모로부터 구성당하는 나인 거예요. 그래서 부모로부터 뭘 하나할 때마다 속속 집어넣지요. 집어넣는데 계속 부모가 잔소리가 심해지니까 이게 집어넣는 그것이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으응 내가 원하는 아들은 그 모습이 아니야! 계속 이렇게 나오니까 그 아들이 “그러면 나 누구에요?” 그러면 자기 자아 찾기 위해서 그만 가출해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여기서는 부모 말에 부합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출해버리고 뛰어나가는 거예요. 골치 아프지요. 그러면 엄마, 아빠는 괜히 책임감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속으로 이런 생각 들어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니는 니 줏대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말이죠. 엄마 말 다 듣는다고 해서 사실은 엄마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엄마가 아들에게 뭘 하는 것은 니 나름대로의 구성된 니 자아상을 내 말을 참고로 해서 콩고물로 생각해가지고 싫으면 툭툭 털면 그만이고 필요하면 언지고 해서 니 나름대로의 인생을 만들라고 했는데 애는 엄마 말 아니면 나는 없어. 이리 돼버리면 갑자기 엄마의 자기 책임이 많아져버립니다. 많아지게 되면 누가 힘드느냐 하면, 잔소리하는 엄마가 힘들어져요. “나이가 몇 살인데 니 앞길 니가 못하나?” “엄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사실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는 가정도 있지만, 대부분 노골적으로는 이야기 안하지만 자꾸 엄마나 아빠 눈치를 봐요. 저 괜찮지요? 요번 성적 괜찮았지요? 그렇게 되면 좀 의식 있는 엄마 같으면 ‘내가 나이 20이 넘어서도 뭔가 내가 잘못 가르쳤는가? 저한테 정신적으로 내가 압박을 너무 심하게 했는가? 애부분에서 내부분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은근히 이제 와서 발빼려하니까 또 발목 잡을까 걱정되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째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남이 인정해 줄때만 자아가 돼요. 남이 인정해 줄때만.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이게 무슨 결속이냐 결속인데, 무엇과 결속이냐 자기가 속해있는 현 세상과의 결속입니다. 현 세상과의 결속. 그래서 이건 세상이 계속해서 아담자식들을 세상이 만들어요. 세상이 아담의 죄 있는 그 죄인을 오는 세상이 또 만들고. 오는 세상이 또 만들고. 현실은 그렇게 되어있어요. 현실은 무지 무지 간단해요. 세상이 나를 만들었다. 끝! 요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내가 만들 때 내가 만드는 재료는 바로 언어에 의해서 개념이 실려서 나한테 왔고 나는 남한테 이야기할 때 그걸 말로서 글로서 이렇게 보여주게 되면 나는 그 사람한테 인정받는다. 이리 되는 겁니다. 나는 누가 만든다 했어요? 세상이 만든다. 세상의 일부가 바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나의 부모, 세상이 이만큼하다면 그 중의 한 빌라, 한 가정이 있다면 이 가정에서 한 남자, 여자 있었고 그 사람이 나를 낳았으면 나는 이 가정의 자식이 되는데 이 부모는 또 기존의 살았던 모든 세상의 자식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의 자식이에요. 결국 어두움의 자식들이에요. 우리는. 빛이 아니고 어두움의 자식들이에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자, 여기서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요런 힌트를 딱 얻어야 돼요.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그럼 나는 세상에서 내 힘으로는 못 빠져나가지요. 그러면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은 나한테 누가 알려줘서 될 수는 없어요. 새로운 세상이 오게 되면 그 새로운 세상과 연관된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천국 가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세상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이야기 아니고 세상이야기를 하는 그 논리와 똑같은 논리가 맞은편에 있어요. 맞은편에. 그게 무슨 세계냐 그게 낯선 세계에요. 낯선 세계. 자, 이제부터 어렵게 시작합니다. 이 기존의 세상은 언어로 서로 통해요. 말로 서로 통한다 말이죠. 쉽게 말해서 개념으로 통한다면 이 낯선 세계도 마찬가지로 언어로 개념으로 낯선 세계가 찾아옵니다. 낯선 세계가 찾아오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예레미야에서는, 이사야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 해요. 천상회의에 참석한 선지자들이 말을 하니까, 예레미야가 말을 하니까 낯선 세계의 말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어두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어는 그 단어고 문맥도 그 문맥인데, 그 문맥이고 그 단어인데 말이 안 통해요. 그러니 똑같은 단어인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나가 아까 뭐했습니까? 피라는 것. 예수님이 피를 흘리니까 아프겠다. 아~ 저렇게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아휴, 목마르겠다. 얼마나 고생했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통하는 내가 들었던 개념, 단어에 의해서 피. 피라 하는 것은 지금 히브리서 13장20절 나오지요. 이 단어를 이렇게 봐도요, 언약의 피로 이렇게 하니까 이 ‘언약의 피’라는 한글로 된 단어를 보면서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한글 쓰는 이 세계에서의 피는 어떤 개념을 품고 있고 한글 세계에서 영원한 언약 그런 개념을 동원해가지고 예수의 피를 이해하고 해석해버린다 말이죠. 이렇게 하니까 낯선 세계에서의 입장에서는 그 뜻이 그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의 체험에서 나온 피, 언약, 그 개념이 낯선 세계에서 보기에는 그게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보고 하는 말이 그 착한 분을 왜 죽였느냐 이렇게 하지만 그 남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이 시대에 낯선 세계의 말을 우리가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지금 가정의 가정주부로 있으면서 매일같이 주님을 죽이는 거예요. 개념이 다르고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언약에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는 언약에 들어가기 전에 언약이란 단어 자체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 그 약속이잖아요. 약속 단어 모를까요.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약속 알아요. 언어 알아요.” 이렇게 한다 말이죠. 좀 더 확대해보면 하나님의 아들, “아! 하나님의 아들 알아요.” 그리고 아들, “아들알지요. 우리 집에도 아들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들 낳았다. 하나님 믿고 아들 믿으면 우리는 구원받는다. “아휴, 나 잘 알지요.” 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그리 잘 아는 사람이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여호와 알지요. 자기 아들이지요. 다 아는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죽였잖아요. 히브리서 끝부분에 와가지고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성경을 제대로 지금 이해했는가를 점검 타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돼요. 히브리서 마지막에 와가지고. 낯선 세계에 휘둘려야 됩니다. 낯선 세계. 만약에 낯선 세계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세계라면 이건 전도할 때 말만 잘하면 전도가 돼요. 니가 아는 개념, 내가 아는 개념, 같은 동네에 살기 때문에 알지? 나는 이런 뜻으로 이해했어. 으응, 언더스탠. 응 되지. 이러면 그만 형제가 되어버리고 전도한 게 되고 갑자기 사랑하는 이웃 형제 노래 부르면서 어깨동무하고 그런다 말이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전한 말이 아니라 했지요. 방금 말을 해놓고 말이 아니래. 이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 있어요? 고린도전서2장4절에 나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내가 말을 하는데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 아는 그 말로 듣기느냐? 그거 아니거든. 나는 말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에 담긴 의미로 하는 게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한다. 성령 낯선 세계입니다. 낯선 세계의 위력이 너희로 하여금 내 말이 기존에 인간들이 쓰는 통용되는 그 뜻이 아님을 안다는 거예요. 십자가가 우리가 있는 세계에서는 정치범을 죽이는 사형방식이 되지만, 사도바울 낯선 세계에 속한 사람한테는 뭐냐 그거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능력이 없어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거예요. 제 말의 취지를 잘 아셔야 돼요. 기존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십자가 달린 그 사형수를 내가 믿어주면 나는 구원받는다. 이게 기존의 맥락에서는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낯선 세계에서는 뭐냐 하면 십자가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난 게 아니고 그 십자가가 살아있어 그 십자가 졌다는 그 말 자체에서 2000년 전의 능력이 지금 2017년도에 그대로 이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 결과물로 우리한테 받아진다는 걸 믿는 것. 이게 낯선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축복입니다. 내가 믿어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내속에까지 들어와서 믿어지게 하는 거예요. 이게 새 언약의 원칙입니다. 새 언약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의 허락도 없이 우리 안에 접수하고 점령해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는요, 술술 풀려요. 그 다음 문제는 뭐냐 하면 “왜 우리 쪽에서 다가가서는 안 됩니까?” 할 거잖아요. 성경이야기는 뭐냐 “니는 뭘 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니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면 우리 쪽에서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도 말씀은 지켰습니다. 율법은 지켰습니다.” 할 때 저쪽에서 하는 말이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에 나온 이야기가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겼습니다. 자기는 믿는다고 알았지요. 아브라함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줄 알았지요. 믿는다면 더 이상 믿으면 합격이잖아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까. 합격 같으면 테스트가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서울대학 합격했는데 또 서울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그렇지요? 육군사관학교 합격했잖아요. 육군사관학교 합격했는데 팔굽혀펴기 이거 떨어지면 취소된다. 이런 거 있습니까? 이미 합격해놓고. 없다 이 말이죠. 이미 합격하기 전에 팔굽혀펴기하고 턱걸이하고 체력검사 다 보잖아요. 경찰시험에서는 손 쥐는 힘이 없으면 안돼요. 어떤 사람은 필기시험에서 거의 만점 받아 합격됐는데 세 번이나 손 쥐는 힘이 안 되어서 떨어졌는데 기어이 되기는 됐어요. 노량진에 경찰공무원하면 손 쥐는 시험까지 다 가르칩니다. 학원 다녀야 돼요. 집에서는 이거 소용없어요. 운동하고 다해야 돼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 내 쪽에서 하나님을 믿었어요. 이미 믿으니 하나님의 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테스트가 필요치 않은데 주께서는 창세기22장에서 테스트해버려요. 니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바쳐라. 이미 합격했는데 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믿음에 그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내가 믿어요. 내가. 이쪽 인간세계에서의 모든 단어사용은 항상 숨겨져 있는 주체가 있어요. 비가 온다. raining이 아니에요. 그냥 쓸 때는 raining이라고 쓰지 않고 It’s raining. It’s 라는 것은 가상적인 주어를 갖다 붙입니다. 그것이 비가 내린다. 그것은 그냥 붙이는 거예요. 주어가 항상 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주어가 되는 겁니다. 믿음하면 누가 믿는다? 내가 믿는 거예요. 남이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다. 이건 터무니없는 거죠. 그런데 낯선 세계에서는 누가 믿었어요? 예수님이 믿었는데 내가 구원받아요. “나도 믿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까? 주님이여! 나는 믿을 수 있는데.” 이리 되잖아요. 그럴 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니는 믿을 수 없어. 왜? 니는 처음부터 관계가 끊어진 죽은 자니까.” 죽은 자니까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라는 이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믿음은 나의 믿음과 의가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은 자를 가지고 우짜 우짜 어떻게 어떻게 하신 분. 그러니까 죽은 이삭 대신에 수풀에 갇혀 있었던 하나의 양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했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했잖아요. 양 잡아서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양 잡아서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받는 것은 약속된 사람을 받아요. 인자. 수요일 날 들어봤으면 알아요. 인자를 받아요. 인자를. 시편8편 인자를 받는다고요. 인자가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 양 바칠 자리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을 잘못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양 바칠 자리에 인자가 들어간다. 하잖아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나중에 왔고 앞에는 양 드린 제사가 있었으니까. 시간상 양 제사 있다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드리잖아요. 시간상 그리 되는데. 사실은 내용상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리에 어떤 분이 들어간다. 알려주기 위해서 미리 양을 모형으로 계속 바쳐온 거예요. 그래서 양은 모형이 되고 예수님은 실체가 된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양을 바쳐버리면 양을 바친 주체가 누굽니까? 내가 “하나님 보세요. 제가 양을 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주일날 할 걸 다 했다. “제가 양을 드립니다. 받으세요.” 이게 구약 때 한 거예요. 그런데 양 자리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야 된다 말이죠. 이삭을 바치기를 원했던 거예요. 양은 폼이에요. 그냥. 형식이라고요. 양 백 마리, 천만마리 바쳐 바야 구원 못 받아요. 이삭을 바쳐야 된다고요. 이삭을 바칠 것을 양으로 대체시킨 거예요. 그렇다면 그걸 알고 양을 바친다면 이건 양이, 양이 아니고 누구 양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체를 대신해야 돼요. 그러면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누구의 믿음으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드린 아버지의 아들이 된 입장에서 우리 자리에 아들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 앞에 옳은 믿음을 드림으로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일에 파급된 예수님의 일에 초청받은 이끌림 받은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으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믿음의 주체가 “내가 믿습니다.”에서 뭐로 바뀝니까?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은 에베소서2장8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에요. 선물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한테 없는 게 새롭게 주어지는 게 선물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나한테 오면 어떻게 돼요? 낯선 세계가 이쪽 세계에 오면 어떤 고백이 됩니까? 이쪽 세계에 있으면서 낯선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부정적으로 어떻게? “나는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이 고백이에요. 내가 주체돼서 구원 받는 동네가 천국 아니에요. 그러니 천국가면 면류관도 다 반납해요. 내가 쓴다면 내가 주체인데, 면류관을 쓰지 않고 벗어서 누구한테 주욱 달려갑니다. 누구한테 달려갈까요? 주님이 쓰시옵소서. 옛날에는 대학 졸업식 할 때에 대학가기 힘들었을 때 기존에 8%밖에 대학 갔을 때 대학 졸업식하게 되면 부모님하고 사진 찍잖아요. 그러면 학사모를 지가 먼저 쓰고 그 다음에 학사모를 누구한테 씌우냐 하면, 엄마한테 씁니다. “이건 내가 대학졸업 하는 게 아니고 엄마의 공이 큽니다. 시금치 팔아서 밭 팔아서 했습니다.” 엄마는 또 그걸 눈물 흘리고 자랑스럽게 학사모 쓰고 사진 찍는 건 좋은데 그 얼굴이 늙었어. 학사모하고 어울리지를 않아. 그 사진 가지고 촌에 와가지고 사진액자에 사진 여러 장 더덕 더덕 붙이는 거예요. 애 낳으면 또 붙이고. 먼지 허옇게 묻고. 퇴색된 사진 있잖아요. 그렇게 붙였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식 입장에서 첫 월급은 부모님 내복 사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뭡니까? 모든 공로를 누구한테 던져요? 주님한테 던지는 거예요. 참 쉬워요. 부도났잖아요? 부도난 공로를 누구한테 돌립니까? 주님 덕분에. 애 성적 막 내려가잖아요? 그것도 주님한테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가 엉망으로 나왔어요. 누구 덕분입니까? 주님 덕분에 머리 잘못 깎았어. 주무시다보니 그만 잘못 깎았어. 낯선 세계입니다. 이 성경의 세계는 낯선 세계에요. 낯선 세계인데 우리가 낯선 세계인지도 모르고 건방지게 주체를 가지고 그냥 덤벼든 거예요. 덤볐다는 말은 성경 자체를 이미 시작할 때부터 곡해하고 왜곡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또 죽이는 2번 3번 계속 죽이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가 무슨 예인가 하면 성경을 볼 때에 바로 인간의 자기 주체를 위해서 보는 경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개인구원’이라 합니다. 개인구원으로 성경을 보는 한 예를 들겠습니다. 시간이 역사가 이리 있다면 항상 개인구원의 출발은 역사에요. 역사 선이 있다면 예수님이 여기 재림이 이쪽이라면 마지막 때가 어떤 때냐 하면 1290일로 봅니다. 이걸 7년 환란으로 봐요. 어디서 많이 봤던 그림 같지요. 다니엘에 보면 70이레 중에서 7+62=69가 돼요. 1이레가 남았어요. 1이레는 ½+½로 되어있어요. 요 1이레를 설명해서 1290일, 1335일 요렇게 다니엘 끝에 보면 마지막 때까지 두 개의 시간 기간이 나와 있습니다. 1이레는 7년이니까 3년 반 돼요. 반 토막 내야 되니까. 문제는 관심사가 이렇게 그려놓고 휴거를 언제 받느냐 이거에요. 휴거를 언제 받느냐? 환란 전에 받느냐? 이때가 환란 때니까 환란 전에 받는다. 이 때 휴거한다. 휴거하고, 휴거하고 난 뒤에 그동안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는 이게 죽 산다 말이죠. 살아가면서 악마가 마지막 발악을 하니까 사는 게 괴롭잖아요. 고로우니까 그때는 힘드니까 회개하는 거예요. 힘드니까 회개를 하면서 여기에서 이제는 휴거를 하는 사람이 있고, 힘드니까 잘못했습니다. 하고 중간에 휴거하는 사람이 있고, 고집부리다가 재림직전에 휴거하는 사람 있고, 그러니 휴거가 한 번 내지는 두 번, 세 번, 네 번, 막 이리 될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이론이 분분해요. 들어보니 아스라이 추억들이 생각나십니까? 그런데 앞의 환란은 뭐냐, 소환란. 환란이 좀 이렇게 약해. 요건 대환란. 요거는 견디기 힘들어. 아주 심한 환란. 중간쯤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요.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뭐냐 하면 요 때 적그리스도는 하는 짓이 있어야 돼요.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성전이 회복이 돼가지고 이스라엘 성전을 박살을 내야 돼. 그러면 여기서 그 못 돼먹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이제사 정신 번쩍 차려가지고 우리가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죽였구나! 어이고~ 어찌할꼬. 회개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면 이방인에다가 이방인 + 이스라엘이 딱 되게 되면 요게 수가 다 차게 되면 그 때 예수님이 재림해가지고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설이 있고. 벌써 여기부터 휴거자체가 천년왕국해가지고 위에서 2층에서 즐기고 있고, 카페도 2층 있잖아요. 2층에서 지금 커피마시고 있는데 아래층에서는 지금 물난리 났어요. 느긋하게 즐기면서 아래층을 보면서 “그리 진작 예수 믿지. 그래~ 그러니 여기다가 바코드 박지 말라 했잖아.” 이런 식으로. 히히닥거리는 그런 설도 있고. 아니야, 환란이라는 것은 환란 속에 환란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휴거를 일찍 받는 것이 아니고 재림 때 받는다. 한꺼번에 받는다. 이쪽 설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오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기 때문에 무사히 적그리스도를 통과한다. 참아야 된다. 그렇게 통과해야 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본 백성 회개하라고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에서는 전도그만하고 이스라엘로 이사 가서 그 사람들 유대인들을 위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유대인들이 빨리 회개해줘야 이게 결합이 되어가지고 예수님 재림한다니까요. 유대인들이 느긋하게 자꾸 딴 짓하고, 차 시간 됐는데 화장하고 느긋하게 하게 되면 늦어지면 우리들이 더 환란 속에 있으니까 힘들거든요. 그러니 지금 조사해보니까 유대인들 가운데 지금 5만 명쯤 된답니다. 5만 명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1500만 명중에서 5만 명이니까 몇 %되겠어요? 온 이스라엘이 다 들어가야 되니까. 온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더욱 더 열심히 해가지고 전도해야 된다. 쉽게 말해서 돈 내라. 이스라엘 전도하는데 돈 내라 이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기는데. 자, 이런 이야기에 초점이 어디가 있습니까? 이 모든 성경에 있는 단어, 다니엘, 요한계시록, 모든 단어의 초점은 결국 뭐부터 출발한 거예요? 개인구원이죠. 개인구원의 주체가 누굽니까? 본인이에요. 본인. 내가 성경연구해서 나 구원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다만 구원 받았는데 그동안 정보가 부족했는데 성경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해가지고 그 정보가 안 잊어버리고 내가 갖고 있으면 나중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건데? 사람은 나이 들면 아는 정보도 잊어버려요. 아는 성경도. 희미해진다고요. 오늘 조카 오는 것도 잊어버리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에요. 앞으로 점점 그럴 거예요. 점점 뒤죽박죽이에요. 젊으신 분은 몰라요. 그거 뭐 정신 바짝 차리면 되지 하는데. 정신 바짝 차려도 안 되고 심지어 메모해도 어디에 메모했는지 모른다니까요. 메모해도. 어디에 치웠는지 몰라요. 치워놓는데 잊어버리면 안 돼! 가만히 있어봐라. 어디에 치웠더라. 성경책을 가져와놓고 뒤에 놔두고 성경책 안 가져왔다고. 정신없을 때는 말려야 돼요. 목사님! 그만하세요. 할 만큼 했습니다. 주위에서 말려야 돼요. 안 말리면 안 되는 줄 알고. 교주인줄 알고 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이런다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그들의 기쁨을 인간들의 타고난 악마의 욕구를 구원 욕구를 채워줬습니까? 그래서 내가 하잖아요. 창세기3장에 보면 인간은 쫓겨났다. 그리고 그냥 아이구~ 실수다. 실수다. 미안하다. 내가 다시 찾을게. 이게 아니고 실수가 아닙니다. 아예 생명나무 차단시켜놨어요. 왜 그랬겠어요? 그리고 그 의지가 그 때 뿐일까요? 계속될까요? 세상 끝 날까지 그 의지가 계속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3장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야기해요.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도행전 중간 중간에 나와요. 영생주기로 합당한 자에게는 안다. 영생주기로 합당한 사람, 또는 영생 받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되어있어요. 사도바울은 말씀을 전하면서 세상적인 자기 자아 주체에 홀로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고 누구나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그런데 낯선 세계 그러니까 성령이죠. 낯선 세계에서 그 주체를 덮친 그 사람이 누군가를 찾는 방법이 바로 복음 전하고 말씀전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으니까 “당신은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이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본인의 의사로 믿는 게 아닙니다. 본인의 자유의지로 믿는 게 아니에요. 로마서9장 창세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됐기 때문에 지금 내 말에 믿어지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로마서10장에서는 그걸 아주 단 도리 하듯이 이야기해요. 로마서10장15절 봅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남들이 사도바울보고 “니나 내나 똑같은 인간이잖아.” 이렇게 할 때 사도바울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람들이 믿을 사람들이 아니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자기는 주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기도제목이 이렇습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홀로 산다는, 사람이 보내심이 없으면 사람은 혼자 살다가 굉장히 외로움을 느껴요. 그런데 보내심을 받아버리면 보내신 자와 함께 있기 때문에 외롭지를 않아요. 나한테 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니는 남자로 살지 말고 여자로 살아라. 이 모든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이상히 평발이 되어서 양말이 잘 떨어집니다. 니는 양말 잘 떨어지는 사명을 받은 거예요. 모든 조건들이 나라고 구성된 모든 조건들이 보내신 분의 작품이에요. 보내신 분에 의해서. 보내신 분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되돌아보니까 모든 것이 주께서 다 만들어준 구성물이에요. 구성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아직까지 히브리서13장20절 아직까지 안 들어갔어요. 들어가기 전에 우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되기 때문에 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고 언어 속에 말도 포함되지요. 말이 있고 이 말은 말을 통해서 자기의 주체의 본색이 나와요. 본질이 다 나와요. 그런데 이 똑같은 말을 누가 사용하느냐 낯선 세계에서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이 말을 사용을 해버렸어요. 다 같은 단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말을 사용하니까 “아~~ 그런 뜻이군요.”라고 자기 주체를 부인하지 않고 그냥 덤벼드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마태복음9장에서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주님께서는 이 죽음이란 단어자체를 그 제자가 쓰는 거하고 주님이 쓰는 거하고 달라요. 숨 쉬어도 죽은 자다. 지금 살았다고 하지만 그건 죽은 거다. 죽은 이삭을 누가 살립니까? 어린 양이 살리잖아요. 하나님이 살리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이 있어야 돼요. 이삭을 뭐로 본다? 죽은 자로 보고 어린 양이 이삭을 살릴 때 비로소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되고 그걸 증거 하는 자가 아브라함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어서 그 믿음에 테스트가 똑같은 테스트가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등장한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것이 십자가 끝이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보니까 ‘아! 내가 죽은 자구나! 실은 내가 지금.’ 십자가를 바라본 내가 죽은 자구나 하는 것을 아는 자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죽은 자입니까?” “예, 죽은 자입니다.” “그럼 죽은 자 행세를 해보세요.” 이러면 사람들은 “어휴!” 한다고요. 시체 놀이한다고. 그게 죽은 자가 아니고, “아이고, 목마르네. 요거 마시고 어디 놀러갈까요?” 요게 죽은 자의 모습이에요. 제가 했지요. 요거 참 중요한 건데. 평범한 것이 저주다. 그냥 평범하게 사세요. 그게 저주에요. 나쁜 짓한다고 저주가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나중에 국회의원되고 대통령될 때 그게 저주라니까요. 평범히 살고 어떤 남편이 있는데 머리는 약간 희었지만 유엔에서 좀 활동하다가 외무부 장관해가지고 하는 그게 저주라니까요. 그게 죽은 거예요. 죽었다 하니까, “그럼 나는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하는 게 죽은 게 아니고 까불고 설치고 만날 모였다가 찜질방 놀러 다니고 놀고 난 뒤에는 점심 먹고 하루 다해가지고 저녁때는 남편 밥해주고 이리 사는 거. 그냥 평범하게 애 키우고 개 키우고 이리 사는 것. 이게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은 되게 바빠요. 할 일이 많아요. 오늘 스케줄이 꽉 짜여 있어. 오늘 저녁 때 무슨 드라마 봐야 되고. 할 말이 있고 할 일들이 꽉 있다고요. 그게 죽은 모습이에요. 이게 뭐냐, 오늘 강의 제일 처음에 했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그 세상 자체에서 규정이 되지 본인이 본인을 규정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학자는 인간은 지혜롭다는 거예요. 그 학자가 왜 주장하는가 하면 원숭이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겁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원숭이하고 비교하고. 그게 바로 심리학자들이고 생물학자들이에요. 맨날 연구하는데 쥐하고 연구하고 원숭이하고 연구해요. 안 죽고 영원히 사흘 만에 사신 분 앞에서 연구해야 될 게 아닙니까. 예수님이 연구대상이 아니고 만날 지보다 못한 거 비교해가지고 인간은 영원히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을 보아라. 달까지 가잖아. 달까지 가는 게 중요합니까? 달 만드신 분이 중요합니까? 빵 만드신 분이 중요해요?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중요합니까? 만드신 분이 중요하잖아요. 주님이 주신 거 공기가지고 사용하면서도 지 잘났다고 우기는 게 인간입니다. 배후에 악마가 역사해요. 마귀가 그렇게 하게 했어요. 무쏘의 뿔로 가라. 니는 니 힘으로 살아가라. 다들 지 힘으로 살아가잖아요. 평범한 겁니다. 다시 평범한 거 이야기해볼까요. 인간의 소망은 이것밖에 없어요. 안일무사. 쉽게 짧게 하면 편하게! 요거에요. 우리 집 가훈, 편하게! 요게 좀 천박하면 우리 집 가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에요. 전부 다 행복하자! 에요.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이겁니다. 인간이 행복한 게 목적이다. 행복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 너무 욕심내지 말고 준칙이 있어요.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의 그것이 왜 로마시대 때 그게 안 받쳐줬느냐 로마는 이렇게 합니다. 시저는 이렇게 합니다. 나라가 잘돼야 개인도 행복한데 개인이 행복하다고 나라가 잘되나? 나라가 원하는 것은 니 행복이 아니고 국가에 복종하라. 남자들은 군에 안 가는 게 편해요. 그러나 가야 돼요. 나라 없으면 내 행복도 없어요. 인민군 되어 가지고 아바이 수령 섬길 겁니까? 그러니 인간이 행복하지만 인간의 모순점이 있어요. 나냐? 아니면 나보다 더 센 어떤 힘이냐? 그 고민 죽을 때까지 안 풀립니다. 그걸 어떻게 푸는가,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