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 170609a (실패)-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 170609a (실패)-이 근호 목사 디도서 2장 9절부터 10절을 보겠습니다. 9절,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10절,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방금 읽었던 이 본문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 구주 하나님이 여기에 개입되지 아니하면 성립될 수 없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하라 그리하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한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빛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으면 이렇게, 이렇게 안 되는 이야기를 내가 했다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이건 기적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에 속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낼 수가 없다. 이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낼 것 같으면 하나님이 구태여 여기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너희끼리 잘 해놓고 나한테 검사 맡으라는 이런 식이 되어버리니까. 늘 하나님한테 곁눈질하면서, 지금 이게 옳습니까? 그릅니까? 라고 물어본다는 것은, 지금 내가 잘하고 못하고의 그 판단 기준을 내 쪽에서 내가 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답변을 해야 해요. 왜, 내가 생각한, 왜, 내가 지어낸 그런 교훈을 가지고 그걸 지켜서, 그걸 하나님께 숙제라고 내놓지 못할 이유가 뭐냐?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행동을 가지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충실했고 그것을 잘 정리해가지고, “하나님 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하나님한테 가지고 나오는 것이 왜 거부당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에 개입하시는 이유는 바로 인간은 자기 원천과 관련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훈으로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통해서 움직이다보니까 인간은 자기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자기 근본, 원천. 근데 그 근본, 원천은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면서 관심도 안 가질뿐더러, 그게 나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본래의 자리를 꼭 알아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본래의 자리를. 만약에 어떤 집의 딸이 시집을 갔는데 애기를 낳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딸한테 “니가 시집가서 딸을 낳아보니까 아버지의 심정을 알겠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딸이 하는 말이 “뭐? 뭔데? 나는 그냥 아버지의 심정하고 관계없이 딸을 낳았는데요?” 이렇게 하면 아버지 쪽에서 “니가 자식을 가져보니 니 원천을 알겠느냐?” 그럼 딸이 “그래도 모르겠는데요? 아버지가 뭣 때문에 질문을 했는지, 그 취지를 모르겠어요. 아버지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십니까? 뭡니까?”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니가 옛날에 왜 저를 낳았냐고 질문한 적이 있잖아?” “몇 살 때요?” “열두 살 때” 다 잊어버렸으니까 대화가 끊어지죠. 아버지는 “니가 열두 살 때 아버지는 왜 저를 낳았습니까? 라고 했을 때 내가 답변하기를 니가 나중에 시집가서 자식을 낳아보면 안다.”라고 했다 말이에요. 근데 열두 살 때 한 이야기를 스무 살 때 알 수 가 있나요. 다 잊어버렸죠. 그러나 아버지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니가 자식을 놓게 되면 비로소 아버지가 너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딸 낳고 난 뒤에는 자기 딸밖에 몰라요. 아버지의 심정은 오히려 더 모르죠. 자기 딸 챙기기 바쁜데 언제 아버지 심정을 압니까? 인간 사회에서 은근히 그런 교훈 같은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사회란 기적 없이 움직이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구태여 하나님의 기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보기에 나는 반듯하게 살면 나는 반듯하게 사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종들이 자기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으면 “하지 뭐. 까짓것 월급 준다는데 못할 것 없지.”이래 된다 이 말이죠. 월급 준다는데 고개 숙이고 순종하죠. 하지만 그것은 이 본문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본문 말씀을 진짜 행하게 되면 너의 숨어있는 원천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왜 자꾸 원천, 원천, 원천이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지금 행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네가 원래 어떤 존재인가를 결부시켜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요.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잖아요. 그럼 아기예수로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아기예수를 보면서 자기들이 누군지를 알까요? “그거 참 아기 귀엽네.” 그럴 뿐이지 자기 자신을 알까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를 하겠습니까? “저 분은 육지고 바다가 하여튼 물만 보시면 뛰어들어서 걷기를 좋아하시는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다. 사람을 초월하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근데 그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지, 진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 의미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손들고 “주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또 예수님이 병을 고치면 “예수님만 병 고쳐서 폼 내지 말고 저도 병 고쳐서 폼 나게 한 번 살아봅시다.”라고 손들고 그걸 거론하고 싶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 좋다는 천국에서 저희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습니까?”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이 된 취지냐 이 말입니다. 스타가 되고 영웅이 되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이 된 그 취지가 거기에 있습니까? 전에도 언급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더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빼기(-)를 하셔요. 빼기. 빼기를 하시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현재 자기가 생각하는 이것이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계속 추가, 추가해서, 추가적으로 그걸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식당가서 주는 반찬 먹으면 되는데 꼭 반찬 더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주인 입장에서는 반찬값이 더 많이 들어가죠. 그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되었다. 왜 내가 이렇게 되었지? 라는 생각은 안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초인적인 것, 멋있어 보이는 것,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요건과 요소들을 계속 끌어당겨서 그걸 부풀게 해가지고 이만큼 더 건지고 갖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게 소유욕인데, 계속 좋은 것은 다 소유하고 싶어요. 남이 천국 간다고 하니까, 남이 장에 가니 자기도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자기도 천국 간다고 우기고. 남이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막 기도해가면서 응답받았던 그 응답이 막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죠. 기도하는 목적이 저 사람처럼 되기를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나는 어디서 왔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기도합니까? “주님이여! 저는 어디서 왔습니까?”라는 이런 기도를 할 수만 있다면, 그건 기도하기 전에 이미 은혜를 받았어요. 이미. “주여, 제가 누굽니까?” 자문자답해가면서, “내가 누굽니까?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왜 만들었습니까?”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주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죠. 근데 “단무지 하나 더 주세요. 고추 더 주세요. 국물 더 주세요. 밥 하나 더 주세요.” “밥 추가되면 천원인데?” “에이, 그럼 안 할게요.” 계속해서 더 있기를 원하는. 그러다 뚱뚱보 돼가지고. 근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원천을 모르게 되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남들이 좋아하는 것. 내가 있으면 남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나? 그걸 추구하게 돼요. 자기의 원천에 대해서 안다면 더하기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빼기죠. 이런 것이 그동안 나의 원천을 가렸군요. 내가 이런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노렸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에 대해 완전히 블라인드blind,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가 앞으로 어디 가서 살 사람인지도 모르고, 천국 가서 산다면 이미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을 해야 될 텐데, 말은 천국 간다고 하면서도 생활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전부다 지옥에서 놀던 가락들을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지옥에서 놀던 가락들을. 사람이 끌어 모으는데 급급하다보니까 성경말씀에 뭘 하라, 하라고 나오면, “이거 하면 나한테 보너스 더 주겠습니까?” 이래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이 내신 숙제를 해서 숙제를 한 그 보상으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챙기겠다. 챙겨보겠다. 이런 식으로 성경말씀을 대하니, 그게 자기 좋아라고 말씀 지키는 것이지, 자기 비대해지기 위해서 말씀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면, 하나님이 하늘에 그냥 가만히 계셔서 쳐다보기만 한다고 보지 마시고, 실제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평소에 아버지의 교훈을 어떤 식으로 준수했는가를 봐야죠. 그걸 봐야죠. 그분은 십자가 지심으로써 인간의 원천을 보여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을 때도 있었고 병을 고칠 때도 있었지만, 그거 한다고 마귀가 “어머나 놀라라!” 하지 않습니다. 정말 마귀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협박, 공갈하면서 말리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말리고 싶었던 것. 그거는 십자가 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지면 안 된다. 정말 희한하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누가 말렸습니까? 베드로가 말렸는데, 베드로보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해놓고는 가룟 유다한테 들어가서 예수님을 죽이죠. 그렇잖아요. 죽으시면 안 되면, 그러면 살려주든지. 마귀 입장이 왜 왔다 갔다 해요. “분명히 니 입장을 이야기해봐. 니 뜻이 주님 죽이는 거야? 아니면 살리는 거야?”라고 마귀한테 물어보세요. 마귀는 구태여 하나님이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주의에요. 인간이 바르게 살아서 하늘나라에 가면 되지, 구태여 하나님이 인간의 더러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땅이 악마가 사람들을 철저하게 세뇌를 시켜놨어요.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이미 사람들에게 통보를 했다니까요.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구원의 방법이 뭘까요? 율법 지키면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다. 이미 악마가 온 인간들 마음속에 그걸 다 집어넣은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 아, 이것, 이것 하라고 하네. 내가 그걸 지키면 나는 선하다. 하나님이 구태여 이 땅을 방문할 필요가 없잖아요.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러면 되지, 말씀 줘놓고 안 돼! 하고 내려오게 되면 말씀 준 취지가 모호해져버려요. 말씀 준 취지가. 그래서 사탄은, 악마는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방해 안 한다면 예수 당신을 처단하지 않겠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이 오시는 목적이 만약에 우리 인간과 관계없이 따로 논다면, 중요한 말씀이에요.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생각이 섞이지 않고 따로 논다면, 따로 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함으로써 전처럼, 오직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가 줄곧, 쭉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저도 따로 놀래요.”라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어야 해요. 그럼 “저도 따로 놀래요.”라고 하면 주님께서 “니가 어느 동네에서 살았는데 따로 놀라고 하느냐?” “저는 이런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게 어떤 동네인데?” “말씀을 지켜서, 의롭게 되어서, 그것으로 구원받겠다는 그 동네에 살았었는데 이제는 따로 놀래요. 나는 그들과 안 놀래요.”하고 나오게 되죠. 그러면 예수님을 구박하던 그 구박이 이제는 누구한테 쏠리게 되죠? 마귀가 이제는 졸개들을 통해서 인간을 구박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말씀을 바르게 지켜서 착한 일 하는 것 그 외에는 천국 가는 길은 없다. 니 정신 차려라 이놈아! 정신 차려! 말씀이 있잖아. 경전이 있잖아. 아니 경전 말씀이 없더라도 니 양심이 있잖아. 니 원래 선하고 착해. 왜 착한 것을 그렇게 썩히느냐? 그 착한 것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썩히느냐? 착한 것을 말씀 앞에서 마음껏 니가 발휘를 하게 되면 니는 얼마든지 누가 보기에도 깜짝 놀랄만한 훌륭한 사람이 될 텐데. 그건 누구나 다 동의하고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하는 그 길을 놔두고 뭣 때문에 딴 쪽으로 자꾸 머리가 돌아가느냐 이 말이죠. 신명기 봐라. 지키면 뭐 준다? 복 준다 했잖아. 근데 복 주는 방법을 이미 하나님이 줬는데, 왜 니가 말씀 지켜서 복 받는 방법 말고 왜 다른 방법을 자꾸, 자꾸 고집을 부리느냐?” 그리고 마귀는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천국 가 본 사람 없어. 아무도 없어. 그냥 시도하는 거야. 확률상. 협력해서 의논하고.” 천국 가 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없으니까 누구나 장담 못하는 이런 입장에서는 가장 가능성 있는, 가장 천국에 합당한 행위는 뭐냐, 말씀 주고 말씀 받아서 바르게 사는 거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열두 제자,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 된다고 하니까, 베드로 입장에서는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데,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선한의지를 마음껏 발휘해서 깜짝 놀랄만한 착한 일을 하겠다는데,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왜 그래야 되는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불행과 비극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이래 나온 거죠. 지금까지 한 것은 뭐냐 하면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라고 했죠. 빼기는 뭐라고 했죠?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는 것이 내 안에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이제 빼내가는 거예요. 이번 달 월급이 올랐다. 그럼 월급이 올랐으니까 이걸 나는 뭐로 보느냐 하면 행운 또는 복으로 본 거예요. 복으로 봤는데 이 복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예수 믿는 행위 때문에 복을 얻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바른 복음을 알아서 복이 왔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빼기를 더하기로, 나한테 수입이 더 늘어난 그것을 주님께서 빼기를 하는 것의 방향과 정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방향이 수상한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디도서 2장 9절부터 하신 말씀인데, 이 디도서 2장 9절부터 나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죠.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동안 스스로 가리었던, 덮고 있었던 그것이 제거되고 우리의 원천이 노출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했죠.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그 하나님은 그냥 저 하늘에 멀리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왔을 때에, 나타난 진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었느냐 하는 겁니다. 더하기였습니까? 빼기였습니까? 자기 목숨을 더 유지하려고 왔습니까?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려고 왔습니까?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려 왔죠. 그 분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이죠. 교회에서 뭘 가르쳐야 돼요? 하나님을 가르쳐야 되죠.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빼앗기는, 이 땅의 더러운 악마의 무리들한테 모든 것을 몽땅 빼앗기는 하나님이었죠. 그러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과 정반대로, 정반대가 마귀죠. 마귀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음을, 교회 가서 말씀을 보고 그걸 알아야 되겠죠. 그럼 알면,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 잘 믿었던 것이, 공들였던 것이 날라 가버리고, 껍질이 벗겨지고, 빼앗기겠죠. 빼앗기게 되면 우리의 원천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의 원천이 뭡니까?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죠. 그러면 죄인한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니가 이 말씀을 지키라고. 죄인에게.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립적인, 중성적인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고, 죄만 있는 인간에게 이 말씀을 준 거예요. 죄만 있는 인간에게. 그럼 죄만 있는 인간에게 이 말씀을 주니까, 결국 이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죄가 더욱더 죄로 드러나겠죠. 죄가 더욱더 죄로.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입을 막고 우리로 하여금 뭐 아래에 있게 함이라?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너희들의 죄가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다 이 말이죠. 교회 갔을 때는 주님이여, 오늘도 뭘 벗겨주시렵니까? 이래 되죠. 그러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오늘도 뭘 추가해서 챙겨주시겠습니까? 이래 생각한다 이 말이죠. 복음을 모르면. 빌리 엘리어트, 라는 영국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의 내용이 뭐냐 하면 빌리라는 소년은 원래 아버지가 권투를 가르쳤습니다. 권투를 가르쳤는데, 빌리라는 애는 억지로 권투를 하죠. 억지로 하다가 성장하면서 자기는 자꾸 발레 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결국 이 빌리라는 소년은 유명한 발레리노가 되었다는 그런 영화입니다. 근데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봤어요. 빌리라는 소년이 억지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권투를 하는데, 영 권투에 재미가 없어요. 자기는 발레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권투를 안 한다고 하고 발레를 했는데, 발레에 소질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소질이 없어요. 그래서 발레 했다가 성공도 못하고, 권투도 안 되고, 그냥 살다 죽었어요.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영화 보러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안 오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영화라는 것이 인간을 속이고 현실을 속인다 이 말이죠. 권투 억지로 시켰는데 권투 안 하고 발레해서 성공한 사람이 몇 퍼센트 되겠어요? 노래 내서 히트 친 사람이 몇 퍼센트 되겠어요? 거의 없죠.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의 실패를 현실로 안 보고, 그저 일부 성공한 것을, 그걸 현실이라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도. 1억을 투자해서 가게를 차린 사람들 중에서 1년 안에 24,000개가 부도가 납니다. 투자를 1억이나 했는데 장사가 안 돼서 문 닫는 가게가 우리나라에서 24,000개에요. 1억 투자해서 이윤 남기고 성공한 것이 24,000개가 아니고, 반대라니까요. 이게 팩트에요. 24,000개가 팩트에요. 이게 현실이고 사실이에요. 이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인간이 억지로 그걸 감추기 위해서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보는 겁니다. 거기서 희망을 찾는 거예요. ‘비록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저 영화처럼 성공하겠지.’ 현실에 살면서도 현실을 모르는 척 하는 이 억지, 언제까지 억지스럽게 살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너는 처음부터 성공한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성공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 오셨어요. 성공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니 자체가 성공할 존재가 아닌데 뭘 성공을 원해? 그거 통보하러 오셨어요. 그거 통보하러. 근데 열두 제자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데 성공하려고 하는 거예요. 구원에 성공하려고. 3년 따라 다녔으니까 무슨 좋은 게 있지 않겠는가? 어디 좋은 게 있어요? 자기들은 예수님 배반하고 다 도망쳤는데. 예수님이 우리보고 니는 성공할 권리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꾸준히 볼 때 우리의 원천을 보는 겁니다. 원천.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너라는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을 바로 말씀을 가지고 드러내고 폭로시킵니다. “종들로 자기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라는 말씀이 나오면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먼저 설정하느냐 하면, 종으로서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한 자신의 모습을 먼저 떡하니 상상하게 됩니다. 먼저 상상하게 돼요. 상상한다는 말은, 이게 현실이다? 현실이 아니다? 그거는 현실에 없는 건데, 자기 안에서 일방적으로 상상한, 상상의 세계를, 허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종들로서 자기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 ‘야, 바로 이 말씀에 딱 맞는 사람이 나잖아!’라고 일방적으로 설정을 그렇게 하고 맙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자기의 원천을 뭐로 보느냐 하면 말씀대로, 종으로서 상전에게 순종하고 범사에 기쁘게 하는 그것을 나의 본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나의 본모습으로. 그게 본모습이라면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죠. 의인인데 주님이 왜 오셨겠어요? 의인일 것 같으면 주께서 십자가지실 필요가 없잖아요. 격려차 위문공연이나 벌이지 왜 오셨습니까? 올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교훈도 필요 없고, 하나님의 교훈이 빛날 필요가 없죠. 빛나도 누가 빛나요? 자기 자신이 빛을 내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뭐냐, 왜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못 지키게 하고 다시 십자가로 데려갈 수밖에 없는 말씀이 되느냐, 그것은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본인은 이렇게 오해를 하죠. 내가 지금 하는 행동 하나하나 그것만 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는 자신의 모든 과거가 얽혀있는 관계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습도와 날씨, 바람, 풍속, 자기의 장기, 위, 컨디션, 허파의 컨디션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다 얽혀서 행위가 드러나요. 자, 피아노에서 도라는 것을 땡하고 쳤습니다. 그게 도인지, 시인지, 레인지를 어떻게 알아요? 레가 아니니까 도죠. 솔이 아니니까, 미가 아니니까. 미치고 도 쳐보세요. 소리의 높이가 다르잖아요. 그러면 도를 치는 동시에, 이걸 도라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이거는 레는 아니고, 미는 아니고, 파는 아니고, 솔은 아니고, 라도 아니고, 시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고 도를 치는 겁니다. 연주자가 도를 치면서 시를 치면 연주 자체가 틀린 연주잖아요. “청중 여러분! 저는 악보대로 정확하게 도를 쳤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러면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이 행동 할 때 뭐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이미 내가 하는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판정환경이 이미 전제로 깔고 행동에 나서는 거예요. “제가 하는 행동이 맞아요? 안 맞아요?”라고 누구한테 자꾸 물어보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그 행동을 옳다, 그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니 행동은 옳은 행동이야, 나쁜 행동이야, 라고 이렇게 하겠죠. 그렇게 남들이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남들이. 왜냐하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들 중에서 흉내를 내고 모방을 하면서, 당신들이 이렇게 한 것을 옳다고 했으니까 나도 같이 끼어들어서 하면 옳은 사람이 되겠죠? 라고 이미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교육받고 그걸 자진해서 흉내 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럼 여기서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기준이 뭘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내용이 없어요. 선과 악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익이 되려면 선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고 악은 우리에게 손실을 준다. 이렇게 될 때 구체화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본성을 갖고 있어요. 내 몸은 내가 지키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여기에 면역이 형성됩니다. 면역이. 면역이라든지 뭐 이런 것이 형성되어가지고 이익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손실되는 것은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몸이. 나쁜 병균이 오게 되면 백혈구가 이걸 몸 바쳐서 막게 되어 있습니다. 몸 바쳐서. 근데 이 몸이 말하는 이익이라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나 이전에 먼저 여기에 존재하고 있던, 형성되어 있던 그 사회에서 이미 결정된 거예요.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은 무슨 체제냐 하면 협력체제입니다. 협력체제. 공장을 가거나 또는 여자가 시집을 갈 때, 그 시집은 어떤 체제입니까? 협력체제죠. “아이고, 이거 여왕마마 오십니까?”라고 이래 안 하거든요. “공주마마 오십니까?”라고 이래 안 하죠. “밥 할 때 숟가락 좀 놓고, 새댁이라고 한복 입고 폼만 잡지 말고, 옷 갈아입고 시아버지한테 국도 끓이고 솜씨 한 번 부려봐.” 이렇게 협력체제에요. 무엇을 위한 협력입니까? 이미 기존에 정립되어 있는 집안, 가정. 이 가정의 우애를 훼손하지 않고 연대성을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협력하기 위해서 며느리가 하나 들어온 거예요. 그게 그 가정의 뭐가 되느냐 하면 이익이 되는 거예요. 이익이. 여기서 문제 하나 낼게요. 살림은 잘하는데 그냥 직장이 없는 며느리가 들어왔다. 1번, 살림은 잘하는데 직장이 없어요. 그냥 살림만 잘해요. 2번, 살림은 못하는데 변호사다. 3번, 직장도 없고 살림도 못하는데 예쁘다. 그 셋 중에서 누가 사랑을 제일 많이 받겠습니까? 그거는 보나 마나에요. 그런 프로 있잖아요. 며느리는 셋인데 시아버지는 다섯 명이 나와서 며느리 골라잡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성경공부 한다고 보지도 않겠지만. 그런데 거기서 누가 제일 인기가 있는 줄 알아요? 변호사에요. 살림 못해도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요리사 하나 둘 수도 있고. 얼굴 예쁜 것도 자꾸 보면 별로에요. 나중에는 돈 많이 주는 손이 얼굴을 대신해줍니다. 봉투~ 봉투~ 열렸네! 이게 얼굴을 대신해줘요. 이미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못하는 게 없기 때문에, 돈은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얼굴 이쁜데 시집와서 얼굴 너무 이쁘다고 폼 잡다가, 폼을 너무 많이 내다가 몸이 아프다. 이거는 갖다 내버릴 수도 없고. 천덕꾸러기죠. 그럼 친정어머니가 “아이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우리 딸이 젊을 때는 건강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시집와서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와서 살림도 못하는 게 만날 콜록콜록 기침해가지고.” 뭐 좀 하라고 하면 기침을 해대 싸서 그냥 들어가서 약 먹고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한다면, 이거 뭐 시어머니가 며느리 수발이나 들고 있을 군번이냐고, 짜증이 난다 이 말이죠. 뭐 종이 상전한테 순종한다고요? 사장이 월급만 많이 줘보세요. 순종하지 말라고 해도 순종해요. 이미 순종할 때 노림수가 있는데 그게 뭐 순수한 거예요. 이미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상전한테 보너스 많이 타게 되면 남들이 참 복 받았다고 이렇게 해줄 것이라는, 이런 은근한 자기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노림수가. 그걸 관심사라고 하거든요. 모든 자신의 관심사가 말씀을 대하는데 이미 선입관으로 그게 발휘가 돼요. 관심사가. 교회 오면 말씀 지키라고 목사가 한 소리 하면, “예. 지키겠습니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관심사를 내다보고 하는 거예요. 관심사를. 결혼식 때 신부 친구로서 축가를 부르러 간다. 뭐 명분은 좋죠. ‘돈만 은행계좌로 부치고 가지 말지. 뭐 귀찮은데.’ 그렇게 하고 있다가, 신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신랑이 뭐하는 사람인데?” “신랑이 의사다.” “그럼 친구들은?” “전부 다 의사다.” “그러면 가야지.” 남의 결혼에 관심사가 달라요. 관심사가. 교회 나올 때에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다니까요. “예수님 믿고 말씀 지키면 뭐 줄래요?” 관심사가 달라요. 그 관심사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바로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속해 있는 그 주변에서 나를 나라고 봐줄 때 내가 되는 거예요. 그 소속에서. 그 소속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충족할 때 그게 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고, 인정받는 거예요. 주위사람들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는 남들이 알려줘야 내가 누군지 알아요. “저 어때요?” 이거잖아요. 여자들이 화장하고 옷 입을 때 신경 쓴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보! 이 옷 어떠노?” “그 옷 괜찮네.” “그럼 이 옷은?” “그것도 괜찮아.” 근데 나갈 때 보면 이 옷도 아니고 저 옷도 아니고 딴 옷 입고 나와요. 왜 딴 옷을 입습니까? 옷이 자기한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어떤 이익? 남한테 좋은 평판을 받는 거예요. 그럼 남한테 좋은 평판을 받는다는 것은, 나는 그 사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관계가 굳건해진다. 이 말입니다. 굳건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을 찾아내야 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첫 번째, 인간은 자기만 챙긴다. 또는 자기만 위한다. 같은 말이에요. 남들은 나를 위하는 도구가 된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혼자 살 수가 없어요. 이게 모순되는 거죠. 자기만 챙기면 혼자 산속에서 살든지. 자기만 챙기면. 근데 혼자 못 살아요. 짝이 있든지, 그리고 대인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짝, 대인관계.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두 번째를 강조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같이” 또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은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고, 같이 이루고 함께 이루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종들로는 자기 상전에게” 이 말씀이 이루려면 종은 상전의 입장을, 상전은 종의 입장을 생각해야죠. 둘이 뭐에요? 하나의 짝을 이루잖아요. 하나의 짝을 이룰 때 그 사이에서 뭘 보느냐 하면 사랑을 보는 겁니다. 사랑이 혼자서 하는 것을 봤어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자기 외를 사랑할 수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만 사랑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하는 내가 나보다 더 남을 사랑한다는 게, 그게 과연 성립이 되느냐를 보는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만약에 정말 내가 한방에 반해버렸어요. 충격 받을 정도로 반해버렸어요. 그 순간의 상태를, 자기마음 상태를 조사해보면, 나는 없어요. 나는 없어도 괜찮아요. 그대만 있다면.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라고 하죠.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작아지고 싶어요. 내가 내 사랑을 보는데 내가 장애물이 돼요. 이 순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영구 없다!”가 되는 거예요. 나는 없는 거예요. 나는 없어도 좋아요. 나 같은 것 없어도 좋아요. 엄마가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이 밥 떠먹는 것을 보고 엄마는 밥을 안 먹어요. “엄마! 왜 밥을 안 먹는데?” “나는 안 먹어도 좋아. 니 입에 밥 들어가는 그것만 봐도 좋아. 나는 안 먹어도 배불러.” 숟가락에 밥 뜨면 반찬 하나 올려주죠. “내가 알라(어린아이의 경상방언)가? 오늘은 늘 알라이고 싶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이상하게 어떤 특정한 순간이 오게 되면, 어떤 계기가 되게 되면 자기를 자발적으로 없애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내가 있음에 상대방의 그 빛이 가려진다고 생각할 때, 자기가 그 앞에 있다는 그 자체가 싫어질 때가 있어요.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것이, 부처처럼 자기만 도 닦고, 거울보고 도 닦는 것이 아니고. 누구 앞에 섰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나의 모든 것이 나에게 미움이 되는 거예요. 미움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죽어도 좋은 거죠. 이러한 사랑을, 두 개(자기만 챙긴다. 혼자서는 못산다.)를 합쳐서 표현하게 되면 주체이동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나게 되면 주체는 누가 주체입니까? 본인이 주체죠. 본인이 주체인데, 여기에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죠. 그러면 시키는 대로 하겠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종들로는 자기 상전에게”라고 할 때, 에베소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상전을 대할 때, 성도라면 주님을 대할 때 너는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그 자세를 그대로 상전한테 하라 이 말입니다. 근데 사실은 이게 인간적인 행함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섰다가 상전 앞에 서버리면, 상전이 상전 값도 못하는, 뭐 되지도 않는 인간이라고 이렇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주님 앞에 서면 자기를 잊어버리지만, 상전 앞에 서면 ‘니가 지금 돈 좀 있다고 유세하냐? 갑이야?’ 뭐 이런 식으로. 같은 인간이라고 그런 마음이 싹 가셔버리는 겁니다. ‘니가 뭔데 내가 너한테 기고 빌어야 돼? 에이! 내가 더러워서 월급 때문에 다닌다.’ 이래 나온다 이 말이에요. 주 안에서라는 말이 또 있죠. 그 앞에 보면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누구에게 하듯 순종하라? 주님께 하듯이 순종하라. 근데 그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이 순종합니까? 안 되는 이유가 주님을 만나 본적이 없어서 그래요. 주체가 이동했다가 다시 남편 앞에 서게 되면 더 성질나서 더 굳건하게 돼버려요. ‘내가 평생 니한테 시집와서 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런 생각이 막 든다 이 말이죠. 없는 주체까지 증강이 되고 강화가 되고 이러죠. 그래서 제가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주 안이라는 말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주 안에서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제가 이걸로 바꾸고 싶어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로 바꾸어버리면, 아까 세상적 유행가에서는 그대 앞에 서면 작아진다고 하는데, 이게 작아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 사랑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돼요. 죄인이. 죄인이 된다고요. 그럼 주님이 우리보고 니가 상전 앞에 서라고 하는 말은, 너에게 잠재되어 있는 그 죄를 니가 상전 앞에서 마음껏 노출시키라는 이 말입니다. 말씀이. 말씀을 줌으로써 우리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거든요. 이 말씀이. 이거는 뭐 십자가 지나 안 지나 마찬가지에요. 모든 말씀은. 모든 말씀은 우리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가 몰랐던 그 원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옴으로써, 물 위를 걸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병 고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저렇게 저주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하잖아요. 아까 그 이야기했죠? 주님이 오심으로써 우리의 원천이 발각되었잖아요. 그 발각된 원천을 유지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말이죠. 사랑. 그러면 내가 상전 앞에 섰을 때에 “니가 뭔데?”가 아니라, “참, 고맙습니다. 저를 취직시켜줘서.”라는 이런 마음으로 한다 이 말이죠. “사장님! 참 고마워요. 원래 법정 최저시급이 6,470원인데, 우리 사장님은 얼마나 자비로운지 4,300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렇게 취직이 안 됐으면 4,300원도 못 받을 뻔했는데, 최저임금까지는 못 가더라도 그래도 4,300원이나 주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이런 마음이 들까요? 이 세상에, 이 서울에 직장이 딱 한 군데라면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근데 옆에 직장은 6,000원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이 문제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 10분 쉬고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