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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4장16절(보혜사)170606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4장16절(보혜사)170606a-이 근호 목사 자, 오늘은 요한복음 14장 16절. 14장 1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6) 17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이렇게 되어 있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성령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될 때에 현상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세상이 저를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현상이 야기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보통 사람들이 성령 이야기 할 때 그냥 성령이 이렇다 설명을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게 너무 추상적인 내용이 돼요. 그래서 아주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해 봅시다. 성령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게 더 확실하죠. 성령을 받았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성령은 이런 분이고 뭐, 삼위일체 중에 삼위 한분이고,.” 이렇게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성령을 딱 받았다!” 이런 말입니다. 뭐, 아로나민 골드를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에 차이가 날까요? 안 날까요? 확실히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아니 광고에 그래 광고에. 아로나민 골드를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와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피곤이 막, 안 먹으면 피곤을 못 견딘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 차이점은, 뭐가 달라지면 이게 달라져요.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관심사가 어디에 관심을 두게 되느냐 하면은, 성령을 받지 않는 자는 어디에 관심을 두게 되느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여기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어요. 어디에? ‘소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소유에. 인간은 자기의 자신을 스스로 개선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은 소유하면서 개선을 해요. 성령도 소유하고, 예수도 소유하고, 삼위일체도 소유하고 하여튼 좋다는 것은 무조건 다 소유합니다. 아로나민 골드도 소유하고 하여튼 좋다는 점은 보약도 먹고 다 소유함으로써 그 소유가 집결된, 소유함에 모여진 집결된 이 장소가 개선할 여지를 두고 희망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람이 관심이 있다는 말은 뭐냐? 갖고 싶다는 거예요. 갖고 싶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보고 “목사님, 진돗개 드릴까요?” 하면 “나 관심 없어! 나 개 딱 싫어하거든.” 그런데 같은 개인데 대게를 준다? 아! 이거는 감사하죠. 왜? 갑자기 대게에게 관심사가, 대게에게 관심을 둔다 이 말이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바깥에 표현을 할 때 평소에 나는 뭐를 갖고 싶었다?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져요. 뭐냐 하면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성령이 오신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오신다고 했을 때 우리가 마중을 나가려면, 성령을 은근히 관심 가지고 소유하고 싶어서 기대를 갖고 있을 때 성령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게 아니겠습니까? 성령에 대해서. “안 그래도 성령 받고 싶어서 내가 얼마나 힘들이고 애썼는데, 성령 주신다고요? 그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기다릴게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저한테 진돗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 달라했어요? 그냥 오신데! 그냥 오시니까 이 경계선에서 주님은 이 땅에 성령을, 모든 사람이 자기 소유에 관심 있고, 성령을 주신다 하니까 이 경계선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뭐지? 왜 오지? 아, 오시면 왜 옵니까?”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여기에(성경) 그대로 하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받지도 못함이고. 그러니까 성령에 대해서 알지도, 받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말은 이미 다른 꿍꿍이속으로 이 세상이 꽉 차있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성령이라는 것은 뭐냐 할 때는, 이 세상을 뭐하냐 하면 이거죠. 이 세상을 고발하는 겁니다.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마이웨이라 하는데 내 방식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그것을 탓하거나 부정할까요? 자기가 이만큼 사는 것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공들여왔습니까? “자식 네 명이 있다.” 얼마나 공들였어요? 자식들 참, 엄청나게 공들인 거죠. 우리교회 어떤 반주자가 애기를, 딸을 낳았는데, 나이 많아 딸을 낳았는데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렇게 운대요. 왜 우느냐? “얘가 뭔데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돼?” 이제 한 달 됐는데, 애 키우는 게 자기는 처녀로 있으면서 경험하지 못한 아주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니까 평소에 하는 생활방식은 뭐냐 하면은 희생이 아니고 자기 단도리거든요. “이거 내꺼! 이거 내꺼!” 자기 챙기기에 급급하면서 처녀로 살다가 집에서 애 낳고 애는 시도 때도 없이 밤낮으로 울어재끼죠. 귀뚜라미도. 울고 달래줘야 되고, 달랜다고 뚝 그치면 그게 기계지 인간이겠습니까? 온갖 뭘 해도 계속 울 때에 “왜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어야 되느냐?” 그 상황을 자기 인생에다가 담을 자리가 없어요. 왜? 자존심이 있거든요. 항상 깔끔하고 깨끗하고 그런 게 있는데, 모든 지저분하고 다 이렇게 자기가 완전히 뭉개지는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한테 너무 실망스럽고 억울하기도 하고 이래서, 이럴 때는 할 방법은 뭐 밖에 없습니까? 혼자서 우는 방법 밖에 없죠. 여러 번 운다는 거예요. 그것을 남자는 모르리~ 정말 모르리.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뿐만 아니고 애 키우는 고통이 얼마나 어려운지 남자는 모르지. 요즘은 이제 남자도 애를 같이 키우기도 하잖아요. 옛날에는 애 키우는데 남자가 끼어들고 그런 건 없어요. 남자는 애 울면 애 가지고 문 열고 바깥에 던지기 바빴지. 그만큼 이렇게 자기가 단단하게 고정돼 있는 인생에 대해서 갑자기 난데없이 누가 외부적으로 왔을 때에 이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허물어지는 경계선이 있어요. 부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좋다고 말하는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요. 사랑도 뭔지 모르는데 하여튼 일단 좋다는 거예요. 둘이 있을 때 좋은데 막상 살아보니까 조종할 요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조종할 요소. 변기 뚜껑 열고 오줌 누는 것부터 해서 양말 벗어서 거꾸로 하지 말고 반드시 해야 되고, 조종할 요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왜 그게 괴로웠냐 하면은 이러다가 내가 단단하게 고정돼 있는 이건 나만의 것, 얼마나 끌어 모았어요? 나만의 소유. 이 내 것을 저 상대방 때문에 내 인생을 변질시켜야 될 어떤 위험한 것을,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제일 위험할 때가 뭐냐 하면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거. 내가 아닌 내가 되어버리면 그걸 뭐라고 하냐 하면 그걸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그 산후우울증이 올 수도 있어요. 내가 아닌 나. 그 유명한 말 있잖아요. 내가 이러려고 사냐 하는 거. 내가 왜 이러려고 사느냐 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는 나는 따로 있고, 그리고 현실의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나로 달라질 때에 그 갭, 그 간격을 뭐로 메꿔야 되는데 뭐, 쇼핑으로 메꿀까요? 뭐, 취미생활로 메꿔? 어떻게 메꾸냐 말이죠. 그래서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게 좋고요, 결혼했으면 애 낳는 게 좋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해석하는 나’와 ‘해석되는 나’와 이게 하나가 아니고, 이게 여기에 큰 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해석되어진 나와 해석하는 나, 젊을 때는 비슷해요. 젊을 때는. 고집들이 있어서.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가면 해석하는 나와 해석되는 나와 합치가, 일치가 안돼요. 그럼 일치가 안 되면 그럼 뭘 포기하겠어요? 나를 포기하고 현재 되어지는 이것을 그냥 수긍해야 되겠죠. 그런데 수긍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극도로 반항해요. 수긍을 하는 게 아니고. 자꾸 괜찮았을 때를 향하여 미련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현실은 다를 때에 그 중간의 갭을 그건 누가 메꿔준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바로 교회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가서 요구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지금 이 모습은 내가 원치 않는 내 모습이니까,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빨리 단결해서 하나 되게 해주신다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들 못해드리겠습니까?”하고 하나님에게 거래에 나서고 흥정에 나서는 겁니다. 그거 아니면 교회 갈 이유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교회 왜 갑니까? 미흡한 게 있어서 가고, 미흡하기만 하면 돼요? 그 미흡한 거 채워줬다는 소문 듣고 가는 거예요. “기도를 하든지, 헌금 하든지, 봉사 하고 말씀공부 하게 되면 네 소원 들어 준다더라.” 라는 그거 듣고 가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그렇게 믿고 싶어! 그렇게 믿고 싶어 와서 뭐라고 하면, 상시 들어가요.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이거 얼마나 안 믿어지면 믿습니다가 들어가겠어요. 그러니까 교회 가서 주님 생각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생각을 하면서 교회 가는 거예요. 자기 생각하면서 해석되어지는 나 말고 지금 내가 해석하고 싶은 나, 그 나를 하나의 이상, 모델로 삼아서 아예 오기를 부리는 거예요. 오기를.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거기에 누가 보조를 맞춰 주냐면 목사가 보조를 맞춰주지요. 성경구절을 가지고 맞춰줍니다. “이렇게 기도해서 이런 효과 본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 유명한 구절이 뭐냐, 과부 이야기 알죠? 과부가 재판장에게 갔는데 귀찮다고 “내일 오시오!” 하니까 “아닙니다! 들어줘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했더니만 귀찮아서라도 응답한다. 그런 구절이라든지,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가 자식 없어서, 아들 없어서 그렇게 서러움 받을 때 얼마나 기도했으면 그 제사장 엘리 제사장이 “아줌마 술 먹었어요?” 할 정도로 했겠어요? 그만큼 정신없이 기도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어쨌든 간에 정신없이 했든 뭐든 그건 과정이고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잖아요. 결과물에 누굴 낳았어요? 사무엘을 낳았잖아요. 사무엘만 낳았습니까? 다른 아들도 세 명인가 낳았잖아요. 세 명인가, 뭐 몇 명인가? 여러 명 낳았거든요. “이야~! 이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구나! 이런 하나님을 안 믿다니!”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합니까? 계속 하나님 앞에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응답받은 성과를, 그다음에 뭡니까? 성과를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나는 졸지에 주위사람에게 무슨 사람으로 인정받느냐 하면은 무슨 사람이 돼요? 믿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능력 있는 자가 돼요. 능력 있는 자, 믿는 자가 돼 버리면 이건 바로 내가 해석하고 싶었던 그 목표를, 내가 교회에서 달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주님 사랑입니까? 어때요? 이게 주님 사랑입니까? 아니면 자기 사랑이에요? 자기 사랑이죠. 지금 방금 하는 이야기 가운데서 인간이 이렇게 해석하고 해석 받는 이게 본심인데, 그 이야기부터 해서 그 이야기 할 때 성령이, 성령 이야기가 들어갔어요? 안 들어갔어요? 안 들어갔지요? 기도해서 응답받는데 성령이 왜 들어갑니까? 자기가 말씀 지켜서 복 받는데, 말씀 지키면 복 받는다면서요? 말씀 지켜서 복 받는데 성령이 왜 들어가요? 선교해서 선교회비 냈는데 거기에 성령이 왜 들어갑니까? 십일조해서 십분의 일 떼서 하는데 성령이 거기 왜 들어가요? 거기에 성령 안 들어가도 사람이 계산도 못합니까? 백만 원 같으면 십 만원. 내잖아요. 여기에 성령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요. 십분의 일 계산 그 정도는 나정도 머리가지고 되거든요. 여기 성령이 왜 들어가요? 아니, 딱 깨놓고 말해서 외부 도움 받아서 할래요? 아니면 본인이 할래요? 어느 것이 평소의 내가 사는 생활방식에, 나한테 딱 적합합니까? 내가 나한테 물어보고 내가 결정하는 게, 내 의지로 결정하는 게 편합니까? 아니면 찡찡거리며 이것도 못한다. 저것도 못한다. 늘 이렇게 귀찮게 물어보는 게 그것이 내 평소의 생활에 적합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사람이 지가 할 것은 지가 해야, 지 자존심이 계속 살아나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지난 주일오후에 이런 설교를 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왜 천국 문을 안 들어가는 이유는 그게 닫혀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예요.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열린 문을 그냥 들어가면 이거는 자기의 뭐가 빛이 안나요? 자기의 행함이 빛이 안 나잖아요. 자기 행함이 빛이 안나버리면 주께서는 뭘 안 물어요? 내가 얼마나 내 인생 이만큼 살았는데, 내가 내 인생 이만큼 공들였다는 것을 자랑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죠. 그렇죠? 그냥 열린 문에 그냥 들어가 버리면 내가 쪼다가 되고 바보가 되도 구원받는 셈이 되잖아요. 이게 싫은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고 하냐하면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하죠. 그러면 그 소리를 들었으면 바리새인들이 그 소리를 진지하게 들으면 뭐해야 됩니까? 세리와 창기가 되려고 애를 써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인생밖에, 자기 인생만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간다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서도 사랑해야죠. 그러면 천국 가는 방법은 뭡니까? 세리 되고 창기 되는 방식을 하면 될 텐데 안 그러지요? 그럴 수 없죠? 예수님을 죽여 버리잖아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이 분명히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미 방법을 이야기해줬습니다. 모든 걸 팔고,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러면 뭐가 돼요? 이젠 부자 아니죠? 다 줬으니까 부자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미 자기의 방식이 뭡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 했죠? 그러면 십계명 지킨 것이 영생 얻는데 보탬이 된다? 안 된다? 그것마저 공중에 찢어 버려야 돼요. 자기 과거의 성적표 있잖아요, 성적표? A⁺ 있는 거, 우수수수 하는 그거 찢어 버려야 돼요. 그런데 그거 찢은 순간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공들여 살아온 그 인생 자존심도 같이 찢겨버리고, 해석하는 나도 같이 찢겨버리는데, 누구 좋으라고 내가 내 인생을 찢어버립니까? 그렇게 할 사람은 없지요. 아무도 없지요. 천국 문을 열어놓았을 때 인간이 얼마나 성깔이 더럽고 못됐는지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 행함, 자기 공로, 자기 성과, 죽자고 평생 그것만 쥐고 살아간다는 것이 문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안 들어감으로써 그게 다 노출되는 거예요.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참,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고, 교회 다니는 우리 자신들이 내가 다니는 교회를 위험하게 빠뜨리는 하나의 요소로서 작용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오늘 본문대로 하게 되면 간단합니다. 성령이 오되 아무도 못 알아본다. 일단 그렇게 정리해봅시다. 왜 못 알아봅니까? 아까 이야기 했죠. 인간은 자기 소유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소유가 되지 않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나라는 인간이 이런 소유가 중첩 되어있기 때문에. 중첩. 소유가 중첩 되어있어요. 중첩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중첩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보통 중첩이라는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기왓장을 중첩했다 하면 기왓장을 하나 놓고, 기왓장을 또 하나놓고 이렇게 되죠. 우리 외손녀가 어느 날, 어제인가 화상통화를 해보니까 사과를 먹는데 사과를 보통 이렇게 하나 먹잖아요. 그런데 사과를 두 쪽으로 겹쳐서 먹어요. 그래서 “왜 저렇게 두 개로 겹쳐서 먹지?” 하니까 내 딸이 하는 말이 어제 햄버거를 가지고 이렇게 자기가 먹어보니까 그것을 보고 사과도 햄버거처럼 이렇게 먹는다는 거예요. “이거 참 부모 하는 걸 그대로 하는구나.” 이랬는데, 이게 흔히 아는 중첩입니다. 중첩인데,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중첩이 이런 내용이 아니에요. 중첩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중첩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양자가 중첩되었다는 말은 어느 한쪽이 이렇게 있고, 양자 하나가 있고, 양자, 초립자가 하나 있고, 여기도 하나 있는데, 이게 거리가 한 250만km라고 합시다. 거리가. 그러면 누가 봐도 이거는 따로 놀죠? 25m도 아니고 250만km니까 이건 전혀 완전 딴 공간이잖아요. 그런데 한쪽을 작용하면 한쪽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이게 양자 세계에요. 이걸 이용해서 만든 게 양자 컴퓨터라 하는 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을 양자물리학에서 중첩이라고 해요. 중첩. 중첩 또는 얽힘. 비슷한 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어디서 일할지 모르기 때문에 확률로 이야기해요. 확률로. 이걸 양자 컴퓨터에서는 큐비트라고 0과 1을 하자. 이것을 큐비트라고 하는데 큐비트란 의미가 뭐냐 하면은, 1이면 1이고 0이면 0이고, 1이면 1이잖아요. 0도 아니고 1도 아니고 확률상 1되고 확률상 0되는 그 양자현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게 존재적 개념이 날라 가 버리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기능적 개념으로만 바뀌어져야 돼요. 양자물리학이나 이게. 지금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이걸 설명 할 수밖에 없어요. “저 사람 구원받았습니까?” “예,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어디에 가도 성령이 하는 일이 나오겠네요?” 이렇게 했을 때에 “그 사람이 구원받았고 성령 세례 받았기 때문에 뭘 해도 성령의 일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오류에 빠지냐 하면은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이게 성령의 일이 돼버려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내가 이 컵에 물을 마신다면, 방금 이 물은 내 안에 들어왔지요? 그러면 나는 무슨 티를 내야 되냐 하면은 이 물을 마셨다는 티를, 내가 서울 가나, 대구 가나 어디에 가도 티를 내게 되어있다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존재론적 관념이에요. 존재 안에다가 뭐가 하나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못 빠져나오고 어딜 가도 그 티를 내게 되어있다. 인간성 좋은 인간은 어딜 가도 인간성 좋다. 보통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가정교육 잘 받으면 어딜 가도 가정교육 잘 받았다.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걸 인간들이 그런 존재적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보느냐 하면 성경을, 주님께서 어떻게 활동하느냐는 관심 없고, 내가 이 말씀대로 과연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하나님의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성경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내가 소유하면 되는데, 그럼 소유하려면 뭐냐 하면은 전에는 성령 못 받아서 율법을 못 지켰는데,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어디서 뭘 해도 성령 받은 티를 내게 되고, 그 성령 받은 티가 바로 모든 말씀을 다 지킨 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뭐가 돼버려요? 뭘 해도 성령의 일을 하니까 나란 존재는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위대한 절대적 신이 되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그 심보가 뭐냐 하면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뭐가 된다? 니가 뭐된다?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겸손한 사람 있잖아요?”하는데, 그 겸손이 신이 되는 하나의 요건으로 들어간다고요. “부족 합니다~” 이게 하나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더 월등한 신의 자리에 오른 게 됐다니까요. 쉽게 말해서 나한테 어떤 소리가 나오고, 어떤 반응이 나오고, 어떤 태도가 나오든 그걸 뭉치면 뭐가된다? “역시 나는 하나님 맞아! 역시 나는 완벽해! 난 절대자야!” 내가 절대자 된 사람이에요. 자기가 절대자 될 때까지 인간은 만족함이 없어요. 모든 불만은 뭐냐? 절대자가 못 되서 불만이에요. 주식을 하나 샀다고 합시다. 샀다. 샀는데 과연 이게 주식이 안 오르면, 그건 천만 다행이죠. 아, 역시 내가 뭐가 아니구나? “신이 아니구나. 역시 하나님하고 나는 동기생이 아니고 하나님이 날 안 도와주시는구나.” 이러면 되는데, 했는데 마침 오른다? “이야~ 이거 하나님도 나를 알아보네?” 자기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절대자 된, 미래를 미리 예측한, 절대자 된 그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비록 일곱 번 실패해도 여덟 번째는 성공하겠지!” 그 재미로 살아가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신 됨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아느냐? 철학자들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화가 나듯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존재자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들아!” 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인간은 존재자입니다. 존재 플러스 자(존재+자)입니다. 존재자, 놈 자(者)자를 써서 존재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고 바로 존재입니다. 그런데 존재자는 존재를 모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제발 자신을 좀 낮추세요!” 이게 하이데거 철학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뭐냐 하면은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안다고. 그런데 안다고 우기는 게 누구 중심으로 알아요? 자기중심으로 알잖아요. 자기중심으로서 알게 되면 거기서 필히 뭐가 나오느냐면 범죄가 나와요. 세상의 모든 범죄는 뭐냐? 자기밖에 몰라서 그래요. 자기밖에 몰라서. 술집에서 술 먹으면서 소리 크게 외치는 거. 이게 소리 외치면 다른 사람의 음파에 너무, 이야기하는데 지장이 된다. 이걸 알면서도 크게 합니까? 아니잖아요. 시비 붙지요. 다투지요. 쌍방구타. 경찰서 가는 거죠. 세상의 모든 범죄는 누구밖에 몰라요? 나밖에 몰라요. “내가 너 사귄다고 돈 투자하고, 가방 사주고, 여행 보내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남자 만나서 왜 나를 떠나? 너 떠나려면 내 손에 죽어라!” 이게 뭡니까? 지가 그 사람한테 해준 것 밖에 모르지요?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그런 범죄를 안 저지르면 본인은 압니까? 그걸 범죄 대기자. 또는 잠재적 범죄인이라 해요. 아직 자극을 못 받아서 범죄를 안 저지르고 있는 것뿐이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걸 가지고 “당신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그게 존재밖에 모른다. 자기는 존재자인데, 존재자를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 존재자인데 존재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돌아가야 돼요. 만약에 지금 내가 경기도 안성 땅에다가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는 농사 빚 갚고, 농협 빚 갚고 하려고 하는데 비가 안와? 비 안와서 기분 좋아요? 지금 비 안 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습니까? 이게 만약에 성령 받은 기능인이라면 비오고 안 오고가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죠? 그럼 주님이라는 것이 존재입니까? 기능입니까? 주님은 존재죠. 주님 살아 계시잖아요. 실제로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주님 존재하고 내 존재하고 이게 뭐냐? 경쟁 관계에 있잖아요. 경쟁 관계. 비 안 왔다? 나는 농사지었으니까 비가 왔으면 싶은데, 주님께서, 이 충청도에 비가 안 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분 나빠 해야 될까요? 성경에 나온 대로 범사에 감사해야 될까요? 뻔한 답변을 알면서도 제가 묻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답변을, 정답을 여러분 입으로 해보세요. 해볼 때 껄끄럽게 정답이 안 나와요. 정답이 나오느냐고요? 껄끄럽게! “아! 난 그 질문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게 아니잖아요. 지금. “아이 씨~ 뻔히 알면서 왜 물어요? 난처하게.” 이게 존재 경쟁이라 해요. 존재경쟁. 제자들이 예수님을 왜 안 믿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존재를 신으로 만들어 줄줄 알고 믿은 거예요. “예수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습니까?” 항상 지향하는 게 뭐냐 하면은 누가 잘났나? 누가 높으냐? 그 누가 잘났나? 누가 높으냐? 하는 것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입니까? 어디서 배운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 세상이 다! 아까 쉬는 시간에 말했지만 그게 구조잖아요. 구조가 낳은 자식이 우리 존재가 됐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 정신 차리고 이제는 제대로 삽시다!” 지금 이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어요. “제대로 삽시다!”하면 제대로 산 사람이 뭐가 됩니까? 두 자로 하면? “제대로 삽시다!”하면 그게 두 자로 하면 뭐가 돼요? 일본 가시기 전에 정답 맞춰야 되는데? 그게 ‘존재’에요. 존재. 또 존재를 그렇게 비교하면서도 우리 존재를 포기 못한다니까요. 그렇게 사는 괜찮은 존재가 누구라고요? 나! 이게 바로 해석하는 주인공, 나에요. 이걸 주체라고 해요. 나, 주인. 교회 다니고 성경 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다시 내던져 돌아오는데. 아까 양자, 얽힘. 또는 양자, 중첩. 얽힘, 중첩은 좀 다르지만 같다고 봅시다. 전문 물리학자 공부할 게 아니니까. 양자 이것은 확률적으로 태어나는 거. 확률적으로. 그러면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성령의 일을 할 거냐? 아니면 내 육체의 일을 할 거냐? 하는 것은 결국은 뭡니까? 내가 미리 짐작할 수 있어요? 없어요? 짐작이 안 됩니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에 “내가 했다!”는 내 존재를 내비치지 마시고요. 내 존재는 죽은 걸로 보세요. 나는 죽고 내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나를 가지고 주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증인되기 위해서 나라는 것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시는데, 그 기능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오신분이 누구냐? 바로 지금 제가 이야기 하려는 성령입니다. 성령. 누가 “성령이 무엇이냐?” 묻거든요. ‘소속’이라고 이야기하세요. 소속. 제일 알기 쉬운. “성령은?”하면 뜨겁다! 뜨거운 거 하지 말고, 그건 난로가가 뜨겁고, 성령은 “와와 라라~”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벙어리 되지 마세요. 발악하지 말고, 성령은 그냥 소속이다. 소속. 내가 소속된 영역이 성령이죠. 그리스도 안. 내가 거기에 소속되게 되면 나는 내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해서는 더는 못삽니다. 못 살고,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것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주님이 현재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열두 제자들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낫게 했을 때에 누가 봐도 현상적으로 누가 낫게 했습니까? 뭐 몇 마디 말하고 일어나라 하니까 일어나고, 그 일어나라는 명령은 누가했어요? 제자들이 했지요. 누가 봐도 제자들이 능력으로 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니까 누구한테 돌립니까? “내가 안했어요.” 내가 안했고 그리고 주님을 소개하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앉은뱅이하고 직접 매치 해가지고 주님이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우리는 그 옆에 구경하는 구경꾼이죠. 사도들이. 목격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기이한 현상, 예상 못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에 “그럴 줄 알았어! 주님이 살아계셔서 그 일을 할 줄 알았어!”라고 증거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했다!”가 안 나와요. “내가 주님한테 하청 받아가지고 내가 했습니다!”가 안 나와요. 주님한테 하청 받아서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아예 주님이 내 안에서 일을 하시는 거죠. 저 부산에, 우리가 부산에서 공부하고 난 뒤에 단골로 가는 쌈밥집이 있어요. 그 집에 가면 메인 코스가 나오고 골라잡아서 할 수 있는 각자 취향대로 하는 게 있는데 “막국수 잡수실 랍니까? 뭐 드실 랍니까?” 그 중에서 통밥이 있어요. 또 알밥도 있고. 나는 막국수나 쟁반국수 이런 거 먹는데, 통밥이 뭐냐 하면은 대나무 통에다가 밥 담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이 대나무에요. 내용은 뭐였어요? 주님의 구조. 아까 말한 구조 또는 주님이 하신 언약. 말씀이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 그러면 앉은뱅이가 낫는다는 것은, 이걸 언약적으로 보면 때가 되매, 확률적으로 때가 되매, 앉은뱅이가 앉은뱅이 돼야 되고, 때가 되매 앉은뱅이 갖다가 사도라는 것을 주님께서 만나게 해가지고, 사도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어서 그때부터 이제는 앉은뱅이가 아니고 걷게 되는 그런 이벤트를, 누가 목격했다? 이 대나무되는 사도들이 목격을 한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누가 했다고 합니까? 사도들이 경건과 능력으로 했다고 하잖아요. 그럴 때 사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이야기 했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증거 하는 방식은, 성령이 와서 주님을 증거 하는 방식은 이미 공식이 나왔네요. 어떻게 합니까? “나는 아니요!” 반드시 이게 들어가야 돼요. “나는 아니요!”라고 들어가야 돼요. “나는 아니요!” 어떤 분이 우리 교회 와서 기도를 하셨는데 멀리 계신 분이거든요. 울진에 사시는 분이에요. 일부러 왔어요. 그래서 전부터 아시는 분이라서 억지로 기도를 부탁해서 짧게 한다고 하시는데, 그만큼 짧게 할 줄은 몰랐는데 하여튼 짧게 했어요. “예수님은 생명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 분한테 미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님은 생명이다.”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앞에 뭘 하나 달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두움이요. 나는 죽음이요. 주님은 생명이다.” 주님은 진리라 할 때는 반드시 앞에 뭘 달아야 되나? “나는 거짓이요. 주님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리스도 몸이라 할 때는 “현재 모인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목사가 꼭 해야 돼요. “현재 우리가 모여 있죠? 간판 달았죠? 이거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돼요. 그래야 각각 기능, 그 순간 그 기능이 나오도록 해 주는 것을 기대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했는데, 다시 한 번 여러분 아시겠죠? 정리하는 의미에서. 만약에 성령을 안 받았다고 칩시다. 안 받고 난 상태에서 성경보고, 교회 만들어서 천국 간다고 사람들에게 소개해서 모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고백이 나오겠어요? 제가 하는 건 이런 이야기입니다. “관심사가 엉망이면 나오는 것도 당연히 엉망이다.” 이말 맞죠? 관심사가 엉터리에요. 그러면 나오는 것도 뭡니까? 엉터리죠. 자, 그렇다면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관심사는 이것뿐입니다. ‘개인구원’입니다. 개인구원. 개인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서 나온 신학을 가지고 무슨 신학이라고 하냐면, 이걸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 전에 그 복음 전한다고 소문난 김성수 목사라는 그분이 복음 전했잖아요. 그분이 그 내용을 보면 어디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그러나 교인들은 딴 건 다 좋은데 개혁주의 신학 전체를 포기하는 것은 교인들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왜? 개혁주의 신학을 만약에 빠져나와 버리면 그들이 은근히 기대했던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괜찮은 목사 만나서, 괜찮은 목사, 복음 받아서 괜찮은, 남 보란 듯이 “한국교회 한번 봐라! 이런 교회도 다 있다!” 지 교회 자랑하고 싶은 그 욕구와 욕망을 가져갈 수가 없어요.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 땅에 괜찮은 교회 하나 좀 있어야 되는 게 마땅한 논리고, 그렇다면 그 교회를 누가 할 것이냐? 복음 전하는 목사가, 바르게 전하는 목사. 한국교회 썩은 것을 도려내시고, 이 땅에 진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그 목사가 와서 주게 되면, 그야말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통하는 진짜 교회가 될 거라는 그 희망, 그 희망을 교인들이 포기할 수가 있겠어요? 여러분, 지하철에 공익광고가 있어요. 지하철에 가면. 111 이라는 광고 봤습니까? 지하철 타시면 나오는데, 111 이라는 그 광고.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다 신고하라고, 111에다가 신고하라는 하는 광고 기억 안 납니까? 사람들 시커멓게 실루엣 그려놓고, 이렇게 하얀 111 틈으로 이렇게 해놓고, 위에서 광채가 비취는 그 광고요. 이야기 듣고 지하철 한번 타보세요. 이런 게 있어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바로 그 서머나 교회 있죠? 서머나 교회가 바라는 게 이거에요. 하나님의 그 진리가 우리 교회에 빛의 후광처럼 촤악 비취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에, 아까 성령은 뭐라고 했어요? 소속이죠? 이런 교회에 소속 했다면 나는 이건 뭐, 나의 미래, 나의 구원은 따놓은 당상인거에요. 땡잡은 거죠. 그리고 거기에다가 또 김성수 목사님이 뭐 합니까? 헌금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이건 뭐, 돈까지 챙길 수 있고, 헌금 부담 없지, 목사님 혼자 고생해서, 공부해서 설교 한 시간 반씩 했는데, 전도 안 해도 “소문 듣고 왔어요.” 해서 조회수 만 얼마해서 꾸역꾸역 들어오지, 그런 사람들이 자진해서 돈을 냅니까? 교회 운영비에 대해서 앞장서서 사람이 걱정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있는 교회는 자꾸 가기만하고, 자꾸 빠져나가고, 일본가고. 걱정되잖아요.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이런 좋은 일이. “고생 너 혼자해라. 우리는 그냥 그 쇼에 관람, 박수치고 잘 합니다!”하고 박수 쳐주면 되는데, 그것까지 부정을 해야 돼요. 복음은. 그것까지! 그것까지 건드려야 되거든요. 그게 과연 건들일 수 있었는가요? 아니면 못 건들었나요? 건드리는 시늉만 했는가? 진짜 건드렸느냐? 이거는 주께서 아시겠죠. 나는 아는데, 나는 못 건들인 걸로 나는 알고 있거든요. 설교 딱 보면 알잖아요. 교인들이 호응해줬다는 것을 저는 알아요. 주의 뜻도 아니면서 괜찮은 교회 해보겠다는 일반 교인들의 여망에 부응했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아닌 척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이런 것은 미국에 있는 성현경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설교 너무 좋다? 이 말을 제대로 들어야 돼요. “괜찮은 교회는 누구나 한두 군데는 있어야지!” 이렇게 해석해서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저런 교회에 등록 해버리면 뭐가 빠지냐 하면은 “나는 죄인이요!”가 누락이 돼버려요. 아까 제가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교회 이야기할 때 뭐라고 했어요? 주님의 몸이 교회라면 나는 뭐다? “내가 생각한 그 교회는 어떻게 완벽에, 완벽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춰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라고 고백이 나와야 돼요.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아! 이렇게 교회는 많은데 내 몸, 내 마음하나 안심하고 다 던져놓고 나중에 눈떠보니까 천국오고, 이런 괜찮은 진짜 제대로 된 교회, 백퍼센트 다 신뢰하고 믿고, 마음 놓고 뭘 해도 나중에는 결국에는 천국에 골인되는 그런 교회 하나 내가 소속되면, 내가 얼마나 좋겠나?”하는 그런 바람이 있죠? 그 바람이 뭐냐 하면은 개인구원 욕구에요. 그게. 그게 개인구원 욕구라고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고.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구원받습니다. 그런 공식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건 뭐 속독, 글씨 빨리 읽는 것만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그거 배우게 되면 그 배우는 소유가, 그게 배우면 누구한테 소유되겠어요? 소유? “저 정보 괜찮네?” 내가 또 소유하겠죠? 그러면 난 소유하고 중첩 되겠죠? 차곡차곡 쌓이겠죠? 그러면 그 공들였던 게 아까워서 어떻게 그게 내가 세리 되고 창기가 되겠습니까? 그게 아까워서. 그거 써먹을 수 있는 천국 문을 찾아다니죠. 내가 이정도로 믿음이 좋고 이런 기도 잘한다를 티내고 그걸 칭찬해줄 수 있는 그런 단체, 교회를 찾아가겠죠. 그런 교회 가야 칭찬 받으니까. 성령이 왔다는 것은요. 예수님 오신 것과 똑같아요. 예수님 오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왜냐하면 이사야 53장보면 그게 예언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양 같아서 딴 짓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누구하고 계약했더라? 우리는 딴 짓하고 있고, 하나님은 자기 종, 목자하고 채찍질하고 때리고 맞아가면서 이렇게 해가지고 거기에 피를 맞음으로, 채찍에 맞음으로 낫기는 누가 나았어요? 딴 짓하고 있는 우리가 나음을 입고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 예언이 그대로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통해서 적용이 된다면, 우리는 바로 이점이 성경에서 납득이 돼야 돼요. 우리가 도대체 어느 정도 개판이기에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약속을 했는가? 그리고 그 개판이라고 말하는 그 내용 중에 하나가 바로, 괜찮은 교회에 소속 돼서 구원 받겠다는 내 개인적인 구원의 여망.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자기가 어떤 인간인줄도 모르고, 무조건 이제는 내가 괜찮은 보험회사 들듯이 미리 당겨서 내가 챙겨놓으면, 무슨 일을 해도 다 안심된다하는 자기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이런 시도하는 그것이 바로, 그게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인정해야 돼요. 사후적으로. 결국에는 존재 아닙니까? 내 존재. 존재가 있으니까 사랑하죠. 그거 사랑해보니까 주님 사랑은 뒷전이고 내 사랑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전하는 목사가 복음 전할 때에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저 사람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어떤 요소 때문에 내가 저 사람에게 동감하는가? 만약에 교인이 성령을 받았다 합시다. 이제는 어렵지 않아요. 성령을 받았다하면, 아까 성령은 뭐라고 했습니까? 소속이라고 했죠? 새로운 소속.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속. 그렇다면 이 새로운 소속이 오면 기존의 소속은, 이 존재 소속은 포기해야 돼요? 포기 안해야 돼요? 자동적으로 밀려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통밥처럼 우리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고 변두리로 밀려가면서 우리는 이 소속을 날마다 포기해야 되겠죠. 그냥 억지로 포기하느냐? 아니면 수고하면서 포기해야 되느냐? “내가 뭘 해도 죄인입니다.” 다윗처럼 말이죠. “내가 상한심령입니다.” 죄인이면서 포기하겠죠. 그러면 성령 받은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설교하는 게 이게 의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목사 하는 이게, 내가 전도하는 이게 의가 아니고 이것마저 죄라는 사실. 그리고 듣는 나도 더욱 더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 그걸 듣고 있다는 사실. 그럼 그렇게, 그런,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소속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 의인이고, 예수님만 주님이라는 존재라고 붙일 수 있는 분. 존재라고 붙일 수 있을 경우에만 이게 뭐가 붙을 자격이 되냐 하면은 이름이 붙을 자격이 있어요. 이미 이름이 흙인데 다른 이름은 필요 없어요. 박 머시기, 뭐 문재인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그냥 흙이에요. 주님께서 “아이고, 이름 잘 지었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흙 주제에 이름은 디게 이쁜거 짓네. 뭐, 김 꽃봉오리? 김 꽃봉오리는 흙이 안 됩니까 여러분? 우리 이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이 확정되면 우리의 이름은 이미 확정 되었어요. 우리는 그냥 흙이니까, 아담이니까 흙으로 돌아가요. “그럼 나는 왜 여자 됐어요?” 여자 적 기능하라고 여자 된 거고, “나는 왜 남잔가?” 남자 적 기능하라고 된 거에요. 기능하라고. “왜 태어날 때 우리 집은 재벌이 아닌 거야?” 재벌 아닌 집에 태어나서 기능하라고 재벌 아닌 집에 태어난 거예요. “나는 왜 재벌이냐?” 뭐 그런 사람 없습니다만, 재벌 집에서 마음껏 누리면서 예수 믿으라고 재벌인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 청년은 내가 뭐 부자고 어떻고 자꾸 자기 존재에다 관심 두니까, 주께서 그것을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꾸는 겁니다.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꾸는 거예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그거는 네 일이 아니고 누구일이다? 주의 일이에요. 어디에서 어떻게 결혼을 해서 살든지 간에, 뭐 도쿄를 가든지 간에 주의 일이에요. 그게 내 존재를 위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나는 들러리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어디에 가나, 내 주 모신 곳이 어디에 가나 뭡니까? 하늘나라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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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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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