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88강 마태복음 23장 27절(시간의 중첩)20170529-이 근호 목사
대전-88강 마태복음 23장 27절(시간의 중첩)20170529-이 근호 목사 자, 마태복음 23장 2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와이기 때문에 이스라엘만 아는 하나님 나라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언약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 언약에 준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되는데,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언약에 대해서 오해를 했잖아요.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본다고요. 아들이 생각하는 그 아버지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신약에서는 아들이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이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가 된다 이 말이죠. 그냥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에요. 예수님의 나라기 때문에 예수님이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했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했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없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이 나타났으면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국을 누구한테 비교해야 돼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과 내가 평소에 천국 생각하는 것과 대조를 해보고 비교를 해봐야죠.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를 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비교해봐야 돼요.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누구 중심이죠? 나 중심이죠. 내가 잘되고, 내가 영원히 행복한 그런 나라하고, 예수님 중심의 나라하고 말씀을 통해서 비교를 해봐야 해요. 이 비교를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하신지, 이 비교하는 비교의 시범조교까지 주께서는 사용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천국을 가기 위해서 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이게 27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페인트칠한 무덤 같아요. 겉으로는 어떻게 보입니까? 아름답게 보이죠. 그러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죽은 사람의 뼈가 너희들 보기에 아름답냐? 아름답지 않냐?”라고 물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니들이 하는 짓거리를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살아있는 니가 죽은 사람의 뼈다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희가 지금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저쪽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나라하고 비교를 하지 않으니까, 예수님 쪽에서 예수님 나라와 저쪽을 비교를 해버리는 거예요. 비교해버리니까 저쪽은 이미 죽은 자들이, 사망한 자들이 자기 딴에는 아름답게 꾸몄는데, 꾸미는 목적이 뭐냐 하면 천국은 이와 같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꾸미는 거예요. 파이프오르간에다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에다가 수 백 명의 성가대와 그리고 헌금하는 사람들까지 가운입고 매미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 하고, 심지어 주차요원까지 완장차고 돌아다니고. 그게 너희들 보기에 어떻게 보이느냐?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 니가 죽은 뼈다 이 말입니다. 죽은 뼈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좀비죠. 좀비의 걸음걸이를 좀 보세요. 다 뒤틀려있죠. 제대로 육사생도처럼 걷지 않습니다. 이렇게 슬로우비디오로 걷죠. 이상하게 방향감각도 없어요. 맥이 빠져서 어깨 축 처져가지고, 알죠? 좀비 교회 목사도 좀비입니다. 좀비를 감추기 위해서 가운을 걸치죠. 가운을 걸쳐봤자 그 설교는 좀비가 설교를 하는 거예요. 좀비가 좀비답게. 시체가 시체답게. 교회에 가서 그게 보여야 되는데. 그걸 본다면 구역질이 나겠죠. 그러면 잘 안 가게 되겠죠. 심방 온다고 하면 오지 말라고 하세요. 대심방 가면 오야붕이 좀비에다가 여자좀비 수행원이 줄줄 따라다녀요. 그들 만나면 오늘 점심은 뭘 먹나? 이것만 생각해요. 오늘 누구 집에서 먹나? 목사는 봉투 몇 장만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는 싸움이 없이는 나라가 안 나옵니다. 예수님은 혼자 싸우고 있어요. 싸웠는데 이겼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기 위한 싸움을 해버려요. 져버립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마귀한테 져버려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알 수 없는 공포에 맞서 싸워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은 반대성향을 드러냅니다. “져! 져서 죽어버려!”라고 이렇게 가르치시는데, 열 두 제자 중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칼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칼로 쓴 자는 칼로 망한다.” “주님이 고난 받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맨날 이런 식이라. 왜 교회에서 혼자서 기도 못하고 합심해서 기도하는 겁니까? 힘을 응집시키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힘을 응집시키기 위해서. 힘을 빼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기도를 시킨다니까요. 기도할 때 보면 시끄러워요. 쭈여! 쭈여! 쭈여도 아니고 쪄여! 쪄여! 쪄여! 믿쑵니까? 집 사쭈세요! 쌍둥이 애들 시켜서 집 사달라고 시키고 바람잡이 할머니 할아버지 있고. 시끄러워죽겠어요. 시끄러워 조용히 기도를 못해요. 결국 바람잡이들이에요. 전도사부터 해가지고. 전도사 지도 지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계약직이기 때문에, 얼마나 아래강단에서 강단을 두드리느냐,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계약이 되고 안 되고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계약이 안 되면 신학교 공납금이 안 나오죠. 그래도 푼돈이라도 받으려면 두드려야 되거든요. 주님께서 이렇게 싸움을 하실 때에, 시간의 중첩입니다. 시간의 중첩이라는 어려운 말인데, 두 개의 시간 층이 이렇게 같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시간의 중첩입니다. 인간들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현재 자기 이미지는 과거가 누적이 됐기 때문에 그 과거가 그대로 유지가 돼요. 그래서 단선이에요. 선이 하나밖에 없어요. 중첩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자기 시간을 가지고 데리고 옵니다. 사람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사람들은 시간속의 존재에요. 시간이 강물이 흘러가면 같이 딸려서 흘러가야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아까 그 분이 자꾸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데, 그건 나훈아한테 물어보세요. 청춘을 돌려다오. 사람이 왜 늙습니까? 늙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까? 아니잖아요. 이 시간이 나로 하여금, 시간에 내 피부가 뜯겨나가는 거예요. 조금씩 뜯겨나가요. 물론 피부가 뜯겨나가는 것이 아니고 탄력이 빠져나가죠. 하루하루 살다보면 촉촉하지 않고 자꾸 건조해져요. 그때그때마다 보충한다고 고급스러운 화장품을 여러 가지 바르다가 나중에 트러블이 생겨서 화장품 잘못 썼다고 하는데. 시간속의 존재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임의로 내 맘대로 못해요. 오는 봄을 누가 막을 것이며, 떨어지는 낙엽을 누가 풀로 하나하나 갖다가 붙이겠습니까? 못 붙이잖아요? 물론 마지막 잎새 같으면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서 희망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그리고 해와 달이 왜 떠있는지. 누가 뜨라고 했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저거 두 개 더 만들라고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해와 달, 풀, 혹은 민들레, 해바라기, 사슴, 다 더불어 있잖아요. 누가 이런 큰 잔치를, 파티장을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새로운 시간을, 시간과 공간을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인간은 시간속의, 또는 공간속의 존재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달고 오십니다.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단어와 어떤 행함이나 이런 것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인간들이 이해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겠죠. 시간과 공간이 뜯겨져나가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뜯겨져나가는 방법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뜯겨져 나가서 예수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죽음밖에 없는데 그냥 자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에 합류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언약에 합류한다. 언약에 합류하는데 방법은 뭐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예수님이 죽을 때 생겼던 그 살과 피, 그걸 같이 공유해서 먹고 마셔야 이동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 살과 피를 어떻게 먹고 어떻게 마시느냐? 성만찬이냐? 아닙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의 언약을 우리에게 미리, 이게 중요합니다. 미리. 미리 우리에게 줘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미리 죽은 자가 돼요. 기존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성령 안에서는 예수님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산자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시간의 중첩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중첩이 돼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기존의 시간은 시간이 되면 어떤 때가 오는데, 예수님의 시간은 때를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조작되고 인위적으로 정리가 되는 겁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옵니까? 새벽 두시에 옵니까? 세시에 옵니까? 네 시에 옵니까? 도둑이 오는 시간은 지가 정합니다. 지가 오고 싶을 때 오면 그게 도둑맞는 시간이에요. 예수님은 뭐와 같이 오신다고 했습니까?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죠. 예수님의 재림은 시간 맞춰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오시면 그게 재림의 시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의 재림을 요구하거나 초청장을 못 보내죠. 그냥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근데 기존의 시간을 가지고 스케줄 짜면 안 됩니다. 뭐 이러니까 예수님 오시고, 뭐 이스라엘이 3차 대전이 일어나가지고, 마곡 터키가 어떻게 침범해서 예루살렘에 어떻게 들어오고, 그런 스케줄을 짠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가 안 죽었다는 거예요. 안 죽었으니까 주님께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안 죽은 이유가 성령을 못 받아서 그래요. 성령을 못 받았으니까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붙들고 그걸 통해서 탈출을 시도하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이 신학을 가지고 개혁주의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신학은 기초가 뭐냐 하면 역사에요. 역사. 역사기 때문에 진리가 없어요. 다만 진리로 점점 가까이 갈 걸? 간다는 것도 아니에요. “갈 걸?”이에요. 왜? 이천년보다 점점 더 재림에 가까우니까, 그만큼 정보가 이게 누적이 되어있으니까, 전에 보다는 점점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지, 진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은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믿어요. 현재 이 시간과 계속 연결되어 있는 어떤 시간에 주께서 재림하시면 그때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개혁주의신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거의 백퍼센트죠. 백퍼센트 모든 교회가 이 개혁주의신학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아니에요. 성령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목사들이. 여기 출신들이에요. 혹시 성령을 받았으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을 받았다면, “이건 아닌데?”라고 이렇게 되죠. 그거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기존의 교회하고 완전히 담을 쌓아야 되죠. 항상 성령 받게 되면 나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니 죽었나? 살았나?” “나는 죽었다.” “죽은 사람은 말 하면 안 돼.” “나는 살았거든?” “아니, 죽은 거야? 살은 거야? 둘 중의 하나만 해!” 아니, 둘 중의 하나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있어야 해요. 이쪽 기존의 시간공간에서는 죽었고, 예수님의 시간공간에서는 살았고. 둘 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두 개의 시공간이 중첩되어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 아버지에게 간곡한 기도를 드렸다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알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에이, 알지 뭐. 십자가 지게 되면 뭐 어떻게 되고 다 알지 뭐.”이러죠. 알면서 기도를 왜 해요? “내가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날 걸?” 다 알잖아요. 이미 이야기하셨잖아요. 이미 이야기하셨거든요. 근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마치 영원히 이별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기존의 시간관, 단선의 시간에서는 그걸 설명을 못하지만 복선으로 되어 있는, 중첩, 다중현실이라고 했죠. 다중현실 속에서는 주께서 하신 말씀 그 하나하나가 이게 아버지의 뜻이고 계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혼자 그냥 구원받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고 발산해야 돼요. 이 세상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어떤 투쟁과 어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 몸뚱아리 하나로 발산해야 돼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건 그렇게 생각하시고. 시간의 중첩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 그러면 그 시간으로 봤을 때, 따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완료가 되는 거예요. 끝났다. 끝. 이 완료를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마지막 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마지막 때는 기존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흘러가고 있다고. 아직 구원의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완료된 채 지속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하면 뭐냐, 질적으로 이미 새로운 질은 없고 끝난 거예요. 그러나 양적으로는 계속 하루하루가 가고 있죠. 지금 6시 가까이 가고 있죠. 양적으로. 양이 많아진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교도소에 어떤 사람이 갇혀있다고 합시다. 감방에 갇혀있어요. 그럴 때 바깥에 있는 아들이 “아빠! 교도소에 갇히니까 답답하지?”라고 물으니까 아빠가 하는 말이 “아니야. 여기도 개발할 것이 많고 투기할 것이 많고, 여기도 아직까지 아파트 지을 곳이 많아.” 감방 안에서, 매일 해봐야, 개발해봐야, 지어봐야, 이 좁은 감방인데 누가 사겠어요? 인간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것이 거대한 감옥이라는 생각을,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한 거예요. 완료되어 있거든요. 질적으로. 그런데 김우중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죠. 근데 그렇지 않아요. 할 건 없어요.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근데 김우중이라는 회장은 그렇다 치고, 오늘날 선교단체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김우중이라는 사람하고 똑같은 이야기한다고요. 젊은 애들 모아놓고. 복음학교 이런데서.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뭐 파키스탄이 회개하고...이런 짓 하고 있다고요. 앵벌이 시키는 거예요. 계속 거기에 있는 애들은 뭐하냐 하면 계속 꿈만 생산하는, 일종의 포주한테 잡혀있는 창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꿈이라는 몸을 팔아서 니가 성도라는 지위를 니가 유지하라고. 마귀가 이렇게 시키는 거예요. 마귀가. 근데 복음학교를 보면, 기존교회 설교가 맘에 안 들어서 나온 교인들이 거기에 가서 훈련받으면 거기에 있는 준비된 창녀 같은 자들이 가르치고 거기서 푼돈 주는 그걸 가지고 생활하는 거예요. 은혜 받았다고, 세상에! 이렇게 십자가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을 못 봤다고. 목사님! 십자가중심으로 설교하는 것 들어봤습니까? 하여튼 십자가중심이라고 하는데 들어보면 아니에요. 지난 주일에 이야기했죠. 뭐 십자가이야기하면 다 십자가인줄 알고. 부채표가 없는 활명수는 활명수가 아니에요. 없어요. 없다고 해야 해요. 있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없다고 해줘야 마음이 편해요. 없는데, 있다. 아, 기적이다.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이래 되지, 있을 건데? 라고 하면 다 실망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뭐다? 죄인이고, 십자가마을이고 우리교회고 뭐고 다 죄인들의 단체다. 그래서 거기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죄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하고 뭐 어떻게 십자가마을 수련회해도 다 죄다. 이게 성령 안 받으면 이게 안 돼요. 우리끼리는 뭐 참된 교회다. 이러면 이거는 악마의 마지막 작품이에요. 이게 지방교회잖아요. 신천지고. 하나님은 주님만 받아요. 우리 안 받아요. 주님 안에만 들어가면 되지? 주님 안에 들어갈 때는 죽어서 들어가요. 내 이름이, 나라는 존재가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어서 들어간다고요.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았던 그대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못 들어간다고요. 인간은 살아있으면 종교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어떤 분에게 카톡을 짧게 보냈는데, “일찍 예수님 중심으로 사세요.”라고 이래 보냈어요.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목사라면 나 중심으로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라고. 그런데 이게 중요해요. “일찍” 다시 말하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이게 돼야 돼요. 이게. ‘가다보면 나중에 천국이 있겠지.’ 이게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의 중심이 아니면, 지금 오후 7시에 와도 지옥 갑니다. 지금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성령께서 일찍 와요. 왜? 성령은 무슨 영이냐, 종말의 영이에요. 종말의 영. 성령은 종말의 영, 일찍 영이에요. 시간을 중첩시키는 영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살잖아요. 초대교회가. 특히 대표적인 분이 스데반집사님입니다. 분명히 다중현실이거든요. 분명히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반기고 있어요. 그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전부 다 돌 하나씩 쥐어줬다고 이래 보는 겁니다. 누굴 빨리 나한테 보내라고? 스데반집사님을 고생 그만 시키라고. 돌 쥐어 줘가지고, 돌도 작은 돌이 아니에요. 요만한 돌은 아프기만 하지 안 죽어요. 죽을만한 돌을 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스데반집사님을 보면서, “하나님은 뭐하시노? 때리더라도 요만한 돌로 죽지는 말고 죽을 뻔까지만 해야지. 죽으면 되나?”라고 이렇게 하지만, 본인 스데반집사는 그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성령이 충만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성령은 뭐냐 하면 스데반집사가 모델이 되어가지고 종말에, 그러니까 다중현실, 떠나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있음을 증거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도행전 3장에 나오잖아요. 성전 미문에 왜 앉아 있느냐,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해준 것은 지금 예수님이 낫게 했다. 이것도 다중현실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낫게 하신 거예요.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 옥문이 열렸다. 간수가 놀라서 자빠졌다. 살려달라고 했다. 이걸 누가 했어요? 주께서 바울과 실라에게 드라이버 주고 전기톱 줘가지고 지지직해서 소리 다 들리고, 알아서 나오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간수들 잠 다 자게 만들고 몰래 나온 거나,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저절로 열릴 때나, 사도바울 자기 자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느냐? 소속이? 주님의 소속인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빨리 죽는 거다 이 말입니다. 고생그만하고. 사도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그 소원을 주께서 들어줍니다. 하나님도 참 너무 길게 끌었어요. 로마에 가서 그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 소원이 될 때 하늘에서는 “생일 축하합니다! 이제 왔나?” 하면서 반기고 했을 거예요. 제대하는 기분이죠. 폭죽 막 터트리면서 드디어 사도가 자기 할 일 끝내고 제대했다! 사도바울은 이걸 미리 이야기했어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생명의 면류관, 그러니까 생일 빵이 기다리고 있으니, 축하 빵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조금도 후회 없이 떠난다. 잘 있거라. 다만 말씀만 편지로 남기고.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남기고. 지난,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런 이야기는 이 국면이 우리가 아는 이 세상 국면이 아니고, 다른 현실 국면 속에서 대화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국면을 전제로 해야 된다고 초반에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럼 사도바울이 일한 것도 아니고, 스데반집사님이 일한 것도 아니고, 성령이 일하죠. 그럼 성령은 누가 보내신 거죠? 예수님의 주되심이 보냈잖아요. 예수님이 성령 보낸 이유는 결국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종말이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이, 마지막이 언제인가를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질적으로, 시간이 진척되더라도 의미 없어요. 질적으로 이미 마지막이에요. 마지막의 특색이 뭐냐, 마지막에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새로운 피조물이 발생된다는 것. 반딧불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거죠. 죽은 이삭이 살듯이, 이미 다 같이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너! 너! 너! 깨어나! 하고, 마치 에스겔 37장의 말씀이 임하면 바짝 바른 뼈에 살집이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성령이 터치해서 깨어난 사람이 있어요. 그게 마지막 때라야 그 솜씨를 부려요.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게 깨어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해요. 그냥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걸 깨우는 겁니다. 그래서 손으로 터치해서, “너 일어나! 잠자는 자여 어둠에서 일어나!”라고 할 때, 손에 뭐가 묻어 있느냐 하면 이미 예수님이 충분하게 깨울만한 근거가 은혜의 탱크 속에, 은혜의 탱크가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가 그 탱크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하겠어요? 예수님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소중하게 여기겠죠. 거기다가 뭘 자기 것을 보태겠어요? 안 보태겠어요? 안 보태죠. 그런 설교가 나오는가 한 번 보라 이 말이죠. 그런 설교가 나오는지. 교회 가면 그런 설교가 나오는지를 들어보라 이 말이죠. 맨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우리 목사님 인간성 얼마나 좋다고요. 세상에! 일부러 어려운 장애자들 키우고요. 우리가 아무리 해도 못 따라가는 얼마나 선한 일을 한다고요.” 이러고 있다고요. 지금 엉뚱한 소리 하고 있다고요. “우리 목사님은요, 생활비도 안 받아요. 사모님이 일하는 것도 그걸 다 선교비로, 구제비로 다 내놓고요. 헌금 강요도 안하고요. 우리 목사님은 얼마나 마음을 낮추고 산다고요.” 그거 할 거면 절에 성철스님 찾아가라고요. 그게 일찍 온 천국입니까? 일찍 온 천국은 뭐라고 했던가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죄. 그렇게 양자들이고 장애자 키우고 다하세요. 여러분, 여러분 보기에 이게 지금 마음 낮춘 겁니까? 이게 바로 교만이고 죄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목사 같으면 제가 복음을 안다고 인정할게요. 장애자 키우든 월급을 안 받든 관계없이. 마치 모범이 되는 것처럼, 주기철 목사하고 똑같아요. 모범된다고 자기가 신사참배를 안 했어요. 왜 안하냐고 하니까 모범이 된다고. 자기는 목자니까. 목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자기가 왜 교회 머리가 되는데? 지는 죄인인데. 신사참배를 안 할 수도 있어요. 안 하고 난 뒤에 뭐라고 해야 됩니까? 신사참배 이게 뭐다? 죄다, 라고 이야기를 해줘야죠. 하나 안 하나 죄라고 이야기해줘야 되죠. “나는 이거 안 하고 빨리 제대할 테니까 니들은 이거 하고 더 오래 더러운 지옥 가서 살아라.” 이래서 떠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거는 교인들이 보니까 목자가 모범을 보인다고, 예수님의 모범을 보인다고 이래가지고 신사참배 안 한 거예요. 그러면 신사참배 안 한 주기철 목사는 마음속으로 음란 없어요? 그거는 안 하고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음란은? 인간의 성욕, 리비도, 이거는 말릴 수가 없어요. 인간이 손 댈 수 없다고 어제 오후설교 때 했잖아요. 사실은 더 심하게 해야 되는데, 그러면 갑자기 중심이 말씀보다도 딴 거 상상할까봐 제가 걱정이 돼서 더 심하게는, 19금까지는 안 가고 건전한 선에서, 사건의 경계선상에서 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만 들으라고 그렇게 보지 마시고, 이 말씀이 여전히 두 개의 중첩된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보고. “이왕신앙생활 하는 거, 주님이여! 아름답게 하겠습니다.” 신앙생활 아름답게 하지 마세요. 죄를 아름답게 짓는다고 죄 아닙니까? 바람피울 때 여인숙에 가면 더럽게 바람피우는 거고, 호텔에 가면 아름답게 피우는 겁니까? 우리가 이걸 한 두 번 들을 소리가 아니고 평생 들을 이야기입니다. “니가 회칠한 무덤이다.” 왜? 주님이 이미 우리를 죽일 때 육체를 남겨놓고 죽였잖아요. 육체는 육체대로 살면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할 때는 이 육체를 통해서 니가 왜 죽어야 되는 존재인가를, 남은 육체를 가지고 늙어가면서 실컷 체험하라고 주신 육신이에요. 그야말로 이 육신은 아담의 하체를 덮은 것처럼, 인간의 근원적인 오리지널 씬original sin, 원죄죠. 샤론스톤의 원초적 본능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원초적 본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니가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경험하라는 겁니다. 사람이 젊을 때는 자기의 품위유지와 고상함을 단단히 챙기죠. 자물쇠 채워가지고 스스로 자기한테 너무 철저하게 하지만, 나이가 적어도 사건의 경계선 60이 넘어가면요, 이게 느슨해져요. 자기 철저함이 느슨해져가지고 이거 뭐 방귀 뀔 때 안 뀔 때 못 가리고, 빈자리 남아 있으면 가방 던지고 궁댕이 들이밀고, 늙은 사람도 서 있는데 젊은데 앉아있다고 막 대도 않는 잔소리해대 쌌고, 점점 70, 80이 되면 정신이 완전히 좀비가 돼요. 혼이 나갔어요. “아이고 어머니에, 우사스러우니까 그러지 마세요.”라고 해도 “뭐 어때서? 뭐가 어때서? 하여튼 요새 젊은 것들이!”이래 나와요. “아이고, 나는 우리 어머니하고 어딜 가지를 못해. 얼마나 낯 뜨거운지. 우리 어머니가 언제부터 그랬노?”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게 원죄가 있어서 처음부터 그랬어요. 다 원초적 본능이에요. 다 샤론스톤이에요. 전부 다. 그저 늙은 남자들은 젊은 것들이나 찾고. 나이 60넘어가서도 힙합hiphop한다고. 스웩swag~스웩swag하면서 흔들고. 아이고, 꼴사나워서. 그냥 파마하지 생머리해가지고, 얼굴 완전히 빠졌는데 생머리해보세요. 완전히 귀신같아요. 여기 지금 나오는 아름다운 이 모든 것, 이것은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우리한테 계속 적용되고, 이 말씀이 오면 우리에게 일부러 의도적으로 이러한 재료들을 우리 몸을 통해서 주께서 만들어냅니다. ‘아, 내가 주님 좋아하지만 역시 나는 여성으로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구나.’ 그 아름다움이라는 집착과 그리고 아름답지 못한 것에 대한 어떤 슬픔, 애환, 탄식, 그런 것들이 나이가 90이 되어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어떤 tv를 보니까 81살 된 할머니가 악기를 열 가지 배운다는 거예요. 자기는 배워서 좋은데 같이 배우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역인줄 압니까? 왜? 나이 많이 먹으면 냄새나거든요. 그리고 선생도 배려하다보면 수업진도가 안 나가요. 제가 이렇게 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럼 죽을까? 죽고 싶어도 안 죽어지는데 어떡하라고?”이렇게 하거든요. 제 말은 연세 많으면 성경공부 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을 낮춰서 오라는 말이죠. “이 젊은 것들이!”라고 하지 말고. 대우받으려고 하지 말고. 성의 받으라고 하지 말고. “힘없지만 도와줄 거 없나?” 이런 마음자세로 오면 얼마나 좋으냐 이 말이죠. 왜? 죄인이거든요. 아니, 죄인이 무슨 권리를 주장합니까? 죄인이 무슨 나이 많은 행세를 해요? 조심해야지. 어차피 우리는 중첩되어 있으니까 행세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주의해야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29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화 있을진저, 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땅에 아브라함이 있음으로 해서 뭐가 생긴다?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축복과 저주가 생기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완전히 완료, 완성이니까. 마무리 끝났으니까. 이제 끝이에요. 그냥. 종말은 끝이거든요. 저주가 무엇인가는 살다보면 아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저주라니까요. 그냥 살아가는 것이 저주기 때문에, 내가 뭐 이렇다 하는 이 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나를 주어로 삼는 거예요. 저주의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중입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일찍 그 다음에 무슨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주께서 나를 이렇게 하셨다. 나를 이렇게 죄인 되게 하셨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나이 들어가지고 잔소리만 늘어나게 하셨다. 잔소리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습니다. 앞에 주어만 붙이면 돼요. 주께서 젊은 것들이! 라고 잔소리하게 했다면 할 수 없어요. 이거는. 안 하고 싶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잔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설거지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근데 내가 참 주책 떨지? 그지? 죄인이야.”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거 참는다고 의인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늘 세상을 보면서 주께서 뜻대로 하게 하는 근심, 다시 말해서 말씀, 말씀에 의해서 지적받을 짓을 세상에 나가서 하면서 또 지적받는 즐거움. 지적받고 죄인에게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저 모든 것에 감사밖에 안 나와요. 감사밖에 안 나옵니다. 기도를 하면서 응답은 감사로 끝나야 돼요. 기도로 끝나지 마시고. 기도했다, 기도 중간쯤이다, 기도 끝났다, 끝. 이게 아니라, 기도를 했으면 기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감사로 끝나야 돼요. 기도하기 전부터 감사해야 되는데, 주께서 기도하게 하셔가지고 잊어버린 감사를 회복시키는구나, 다시 느끼게 하시는구나, 하고 느끼면 되죠. 기도를 만약에 안 하게 되면 기도 안 한 것도 죄인가? 여기에 자꾸 스트레스를 받아요. 다시 29절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적, 위선이라고 보면 되고, 그들은 선지자 하면 굉장히 받들어 모시는데, 너희가 누굴 죽였다? 너희가 선지자를 죽였다 이 말이죠. 30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뭘 근거로? 선지자의 노선은 예수님에게 도달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를 알면 누굴 알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눈치를 채야죠. 그런데 선지자는 높이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시한다는 것은 바로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그 후손이 된다는 겁니다. 악마죠. 악마의 앞잡이들이에요. 근데 이 세상에서는 주님만 안 그렇고 나머지기는 다 그렇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얼음! 땡! 놀이를 하는 거예요. 얼음하면 가만히 있고, 땡하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얼음! 땡! 해가지고 너는 새사람이다. 그 새사람 된 사람은 예수님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똑같이 이 땅에서 겪게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했더니만 갑자기 삐져서 친한 사이도 갈라지고 헤어지고. “이러려면 헤어져.” 갑자기 잘 사귀다가도 복음이야기 해가지고 헤어져버리고. 그런 경우, 예수님이 그렇게 하게 한 거예요. 좋은 관계인데, 딴 거 이야기하면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데, 복음이야기 하니까 갑자기 원수가 돼버리는. 그런 경우들이 있죠. 32절 봅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양으로 채우라 이 말이죠.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이래보면 돼요. 독사가 있다면 인간의 등허리에 독사가 있어가지고, 평생 이 독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독사가 날름거리면서 계속 무는 겁니다. 독사가 인간을 계속 물면, 거기서 나오는 것이 스트레스죠. 전부 이 단선적인 시간 속에서 “니 그러면 벌 받는다. 저주받는다.”라고 계속해요. 악마는 우리를 정죄하는 자에요. 이 독사를 누가 얹었습니까? 주님이 얹었어요. 주님이 얹어가지고 정죄케 하는 거예요. 심지어 욥한테도 누가 왔어요? 사탄이 왔잖아요.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사탄을 만나게 했잖아요. 사탄이 어디에 있느냐, 사탄은 이 세상의 모든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정신세계 안에 있어요. 정신세계 안에. 인간이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다하면 전부 다 사탄의 지시 하에, 지휘 하에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 사탄을 움직이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자기중심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최고죠. 그것을 주일 낮에 이렇게 했죠. 자기표현. 죽을 때까지 자기표현. 그래서 사람이 언제 자기표현이 그치는가? 병원 중환실에 있는 모니터에서 띠띠띠~하고 선♒이 잡히다가 띠이익~하고 이 선━으로 그치죠. 이거 나올 때까지는 헉헉거리는 자기표현이라고 했어요. 띠이익━하면 끝. 이 끝을 바로 종말이라고 했어요. 주님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우리는 맥박 해봐야 사실은,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으로써 띠이익━너의 이름은 이미 죽은 자요.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죽은 자한테는.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안 받아요. 안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 모든 것을 그냥 주시죠. 죽어야 될 몸까지 주신 거예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죽어야 될 몸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5장 43절,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욕된 거예요. 우리보기에는 두 살 된 아이가 너무 예뻐요. 거울 보면서 혼자 놀고 까부는 것이, 그게 너무 예쁜데. 그게 왜 예뻐요? 우리는 늙었고 그 아이는 생명이 가득하니까, 참하고 뭘 해도 다 이쁘고 똥 싸도 예쁘고 똥도 다 이쁘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욕된 거예요. 추잡하고 더러운 거예요. 지금은 안 보이지만 그 아이가 90살까지 살아서 늙어보세요. 제가 주일 오전에 했는가, 오후에 했는가, 90세 넘은 할머니들 동창회 사진 한 번 찍어보세요. 전부 다 이게 뭉개져서 전부 다 평평하게 되어가지고 얼굴을 다 뻬빠로 밀은 것 같아요. 전도서 말씀대로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똑같아요. 뭐 인생이 인물을 보여준다고요? 안 보여줘요. 나이 들면 다 똑같아요. 죄의 결과는 마찬가지에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점점 사망에 가까워요. 그러니까 젊을 때 가꾸라고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전도서 말이 맞아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으면 피곤해서 못 놀아요. 피곤해서 여행도 못 가는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걸 찬송가에 집어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니까 미리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보니까 ‘아하, 우리가 죄인이구나.’ 죄를 졌으면 벌을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벌이, 인생 자체가 형벌이에요. 우리는 갇혀있습니다. 사는 게 저주에요. 사는 게 저주니까 그 안에 사는 나도 저주를 증명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주를 증명하면서 뭘 오길 바라는가 하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해요. 저주받았으면 지옥가야지 왜 천국을 넘봐요.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지옥가야지. “언제쯤 지옥 갑니까?”이래야죠.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것도 몰라요. 천국을 왜 넘봅니까? 천국은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것이지, 기다리면 가는 곳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착각한 것이 그겁니다. “내가 언제 갑니까?” 가기는 왜 가요? 천국이 마중 나와서 오게 되죠.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못가니까 오는 것이잖아요. 못가니까. 오늘 본문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독사의 새끼들, 욕이죠. 독사의 새끼들아! 하니까 애비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그 애비의 그 자식이라는 말이죠. 같은 DNA를 받았다는 말이죠. 마귀가 어디에 있느냐? 니하는 행세를 보면 마귀의 행세라는 말이죠. “목사님, 마귀의 행세가 뭡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십자가 복음을 반대하면 마귀에요. 마지막 때에 이 땅이 마지막 때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마귀고.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 다른 걸로 대체하는 것, 그럼 오늘날 십자가 대신으로 대체하는 것이 뭐냐, 과학, 또는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자들은 과학 빼놓고는 모든 것은 다 뭐가 된다? 미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자만이 참된 진리를 아는 종교인이 되는 겁니다. 과학은 종교에요. 이 종교교육을 지금 공교육으로 해서 모든 국민에게 다 가르쳤습니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미신이다. 믿지 마라. 그거 엉터리다.” 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북한도 과학을 하기 위해서 핵폭탄 만들었잖아요. 과학기술. 북한 자체는 종교니까요. 그럼 과학하게 되면 어느 나라에 갑니까? 화성에는 가게 될 줄 몰라도, 달에는 가게 될 줄 모르겠지만, 천국에는 못 가죠. 왜? 과학의 확장이 지옥이니까. 그래서 마귀가 일찍 우리에게 합리적인 과학이성을 믿게 한 겁니다. 똑똑함을 주장하죠. 그 똑똑함에 반해서 십자가는 뭡니까? 똑똑한 자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죠.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뭐가 된다? 구원의 능력이 되죠. 이거는 오직 탁 건드려서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만 과감하게 외치지, 이걸 지적으로 알아가지고는 못 외칩니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요? 미쳤다는 소리나 들으려고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사랑에 미쳤다. 이 말은 뭐냐, 안 미쳐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십자가에만 거기다가 완전히 몰입해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에, 거기에 완전히 몰두하지 못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도 물론 인간적으로 하면서 십자가에 몰두하지 않지만, 그때그때마다 마트의 채소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한 김을 뿌려주는 것처럼 말씀을 뿌려주니까, 십자가에서 나와서 뿌려주니까, 그 말씀을 통해서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만들죠. 혼자 원어연구 해봐야 십자가에 안 통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죽게 되면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죄인인 것을 알고, 그 죄인인 것을 알게 하는 그것이 이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죄인된 것과 연결된 겁니다. 이럴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 확인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대동해서 살아간 아브라함처럼, 그런 입장이고, 그런 신세고, 이 지옥 같은 세상, 마지막 세상에 복의 근원으로서, 복의 증거자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