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26강 사무엘상 7장 12절(언약과의 동행)20170529-이 근호 목사
대전-26강 사무엘상 7장 12절(언약과의 동행)20170529-이 근호 목사 오늘은 사무엘상 7장 1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2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여기 에벤에셀이 어디쯤 되느냐 하면 여기가 지중해고, 그 밑으로 애굽, 이집트가 있고, 그 위에는 시나이반도, 보통 이스라엘 지도 그릴 때는 사해, 요단강, 갈릴리 호수 또는 바다. 이 사이에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공격할 때는 요단강 건너서 침투해 들어가죠. 그래서 여기에 있는 원주민들을 다 추방하고 여기서 약속의 땅을 삼았습니다. 이게 약속의 땅이 된 이유가, 옛날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미 이곳을 자기 후손의 땅으로 먼저 예약을 해놨습니다. 여기에 B.C.2000년 경 쯤 아브라함이 등장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혼자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힘, 권력을 이렇게 대동하고 온 거예요. 어떤 권력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힘을 대동하고 왔다. 뭐 대동이라는 말을 해도 되고, 이걸 동행이라는 말을 해도 되고요. 언약의 힘을. 언약의 힘이라는 것이 구체화된 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니까,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투입됨으로 말미암아 이 동네가 시범케이스가 되는 겁니다. 어떤 시범케이스냐 하면 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이냐를 시범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그 전까지 사람들은 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가를 아브라함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잘 되면 복이고, 자기가 못되면 저주라고 본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죠. 한국교회가 다 그러니까. 뭐 교회는 절하고 같다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절이고 교회고 간에 형식, 제도 그 안에 중심은 뭐냐 하면 내가 잘 되면 그만이니까. 내 가정과 내가 잘 되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무슨 수단도 가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된다면. 말을 달리 한다면 자기가 뒤떨어지고 남보다 좀 못 된다 싶으면 빨리 원상회복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부리죠. 자기에게 철저합니다. 짐승이 그렇고 모든 생물이 그래요.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러죠.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을까요?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만드셨을까요? 그럴 리가 없죠. 그럼 또 질문해보겠습니다. 자기만 챙기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들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해서 자기만 챙기는 인간의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아니죠. 그 두 가지 경우를 봐서라도 교회가 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저 비는 것, 무당한테 빌다가 절에 가서 비는 것. 그 비는 목적이 뭐냐, 자기 자신을 위해서. 1월1일 신정 때나 정월대보름 때나 높은 산이나 바닷가에 왜 갑니까? 해 뜨는 것 구경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죠. 그냥 해 뜨는 것 보고 떡국 한 그릇 먹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손바닥 비비면서 비는 거죠. 그럼 여기서 KBS, MBC에서 마이크 들이댑니다. “올해는 뭘 빌었습니까?” “그저 우리 가족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남편 사업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누구한테? 신에게. 무슨 신이 그런 신이 다 있어요? 이미 이 자체가 신은 인간이 상상해서 지어낸 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 공부 좀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하고. 불교에서 신이 없다고 하면 장사가 안 되니까 칠성신은 있다고 해서 점 치는 것으로 절은 유지가 되고. 교회는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있으니까 갖다 붙이면 되는 거고.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해보면 교회는 언약이 궁금해서 환장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잘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야니, 성경쓰기라든지, 새벽기도라든지, 십일조 내기, 어떤 것도 거침없이, 금식이고 굶식이고 간에 뭐든지 할 수 있는 인간들이 교회를 이렇게 크게 키운 겁니다. 만약에 그런 교회에다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목숨 거세요.”라고 하면 아무도 안 오죠. 아무도 안 옵니다. 물론 오긴 오겠죠. 우선 자기에게 다급한 일부터 하다가 너무 심심하고 바쁜 일이 없어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생신도 아니고, 누구 아픈 것도 아니고, 바쁜 일이 없어가지고, 집에서 낮잠 이래 자도 저래 자도 재미없을 때는, 가볼까? 하고 이래서 오는 경우는 있지만, 언약을 알기 위해서 오지는 않거든요. 근데 천국은 뭐냐 하면 여기에 반드시, 항상 이 요소가 있어야 돼요. ‘미리’ ‘진작’ 미리 예수님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이 천국이에요. 미리미리,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생활 한다는 자체가 누구하고의 싸움이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냐, 내 중심이냐가 치열하게 자기의 삶속에서 싸우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섬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니까. 이걸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면서도 자기 삶속에서 치열하게 싸운 거예요. 그 싸울 때 그냥 싸운 것이 아니고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싸운 겁니다. 아브라함이냐 아브람이냐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냐 아브람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자식으로 결정되는 거예요. 아브람이 난 자식은 이스마엘이고, 아브라함에서 난 자식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이미 자기가 죽은 데서 태어난 것이 이삭이고, 이스마엘은 멀쩡히 자기가 살아있는데서 태어난 것이고. 자식이 아버지를 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믿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 자손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올 건데, 자손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자손이 바로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 선조 된 아브라함이 비로소 천국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합니다. 죄가 사라지고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신 그 효과로 의인되는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아브라함이 그걸 느끼는 겁니다. 이것은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야곱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야곱의 이름이 바뀌면 뭐가 되죠? 이스라엘. 맹렬한 투쟁을 하죠. 야곱은 형에게 갈 재산을 자기가 뺏어서 그 재산 안에서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십일조 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은 자기 행복을 위한 자기 수단이 되는 겁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빼앗는 자. 하나님이 주신 그 아버지의 축복을 자기가 속여서 빼앗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빼앗아 갖고 있는 야곱 자체를 주께서 빼앗아버려요. 야곱 자체를. 실컷 챙겨놓은 것을 무용지물로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기도해서 복 많이 얻어놨는데, 그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아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가진 그것, 내가 기도해서 얻은 그 모든 것이, 내가 자식 키운 모든 공로가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국에 방해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축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식을 버리고 돈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가지되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산물로 주어진 아파트고, 자식이고, 강아지고, 뭐 그거다 이 말이죠. 부산물로.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다는 말은, 내가 옛사람 같으면 그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다, 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날마다 새록새록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교회에서 복음 전하는 것은 쉬워요. 교회는 뭐 부수고 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들! 교회 있죠? 이거 아무 소용없습니다. 교회보다도 예수님이 더 중요해요. 그거만 설교하면 교회가 진짜 교회죠. 진짜 교회다 이 말이죠. 두 명 있어도, 세 명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만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순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주께서 발생시킨 교회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아브라함 자손이 이스라엘 국가로 되는데, 이스라엘 국가에 있어서는 백성들의 있음이 중요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있음이 더 중요해요.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 우주에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거예요. 존재적으로 하나님이 어디나 다 계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구체적인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를 통해서 주체적으로,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이런 원칙을 가지고 자기나라 이스라엘을 꾸리고 인도해 나오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아는 겁니다. 그 구체적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고 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나를 봤다는 말은 인물을 보라는 말이 아니고 기능으로, 예수님이 하신 모든 기능과 일들, 말씀, 그게 아버지의 일이다 이 말이죠. 그것이 예수님의 영,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 하나 하나가 보여주는 모든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어제 주일 낮 설교에서는 성도 자체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물이라고 했죠.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하는 자, 그것이 본인이 구원받으라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증거물로서 시장에 장보러 가든지 아니면 여행을 가든지, 어떤 지점에 가든지 그것은 그 자리에 확보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이렇게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움직이는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똑같이 마찬가지에요. 다시 한 번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약속의 땅은 누가 옴으로써, 아브라함이 개입됨으로써 약속이 다시 약속의 땅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오지 않으면 그냥 땅이죠. 그냥 땅은 창세기 3장에 보면 저주의 땅입니다. 저주의 땅이 아브라함이 옴으로써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복이라고 했습니까? 언약을 대동하는 것. “주님과 함께 있어. 나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거야.” 이게 복이라고 했죠. 그게 복입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옴으로써 축복과 저주가 구분되어 있죠. 복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것 말고 이 지상에 구체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고 복이고. 그럼 저주는 뭐냐, 저주는 아주 간단해요. 그냥 있는 것. 그냥 사는 것. 그냥 아무 일없이 살고, 내무부장관 되고, 국무총리 되고, 그냥 일어난 모든 것이 저주에요. 저주의 증거들입니다. 촛불 집회할 때 언약 살리라고 촛불집회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죠. 그럼 촛불집회는 저주의 집회에요. 태극기도 마찬가지고. 그냥 사는 게 저주에요. 그래서 성도는 이미 주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들이면서 저주의 땅에 오셨잖아요. 성도도 똑같아요.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아버지라 부르는 성령 받아 백성 된 입장에서 이 저주받은 땅을 예수님처럼 그냥 거니는 겁니다. 유유자적하면서 거니는 거예요. 오늘은 취직했는데 며칠 만에 잘렸는가,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오늘도 요양사가 되어서 어느 노인 집에 가서 싸우고 한 달 되어가지고 다음은 어느 집에 가서 싸울까, 아주 유유자적하게. 나그네 삶. 집착이 없죠.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두지 않죠. 집착과 미련이 돼버리면 자기의 증거자로서 인생을 사는 것이지, 동행자를 증거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그 이스라엘을 그냥 보지 마시고, 이스라엘 너희들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를 봐야 돼요. 이스라엘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만드신 나라기 때문에 언약에 따라서 이끄십니다. 그럼 언약이 작용하게 되면 특별한 이벤트, 사건들이 일어나요. 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명이 붙습니다. 그게 에벤에셀인데, 여기 하나 사건 터지고 이름을 붙이죠. 12절에 보면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이라는 뜻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도왔다. 자, 도왔다 할 때, 만약에 목사가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을 마다하고 “안 도와주셔도 돼요. 싫어요.”라고 이렇게 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죠. 사실은 사정을 알고 보면, ‘아휴,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라고 할 거예요. 오늘 본문만 제대로 알아도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를 알아요. 왜냐하면 도와줌, 하나님의 에벤에셀이 되려면 그들이 망해야 됩니다. 현재 있는 것을 더 추가적으로 도와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망하게 하는 거예요. 망하게 해놓고 극한 지점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럼 “어찌할꼬?”가 되겠죠. “이제 나는 끝났어!” 그러면서 뭘 포기하느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죠. 제가 주일 낮에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면서, 천국이 안식의 나라라고 한다면, 지상에는 천국 가기 전에 먼저 법이 있는데, 그 법은 안식법이라고 했죠. 안식법의 기본은 뭐라고 했습니까? 노동을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노동의 금지를 로마서 4장에서는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 노동의 금지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 인간들의 관행, 세상 살아왔던 그 관행에 의하면 아무리 천국이 귀하고 좋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이렇게 되거든요. 아니, 거지까지 되면서 천국가고 싶은 것에 손들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 같으면 몰라도. 거지인데 천국 간다, 여기에 실험대상을 찾는다고 하면 아무도 신청 안 합니다. 슬슬 밀죠. 믿은 좋은 니가 하세요. 권사님 믿음 좋은데 권사님부터 하시고, 목사님 그렇게 믿음 좋은데 목사님부터 하시죠. 자기는 뒤로 빠지는 거예요. 사실은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요. 할 사람이 없을 때는,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시키되 자진해서 안 내놓으니까 강제로 뺏어가 버려요. 그게 바로 열두 제자들입니다. 강제로 뺏어가 버립니다. 그들이 평소에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주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고 얼마나 빈말을 자주 반복했습니까? 실은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예수님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 가진 것을 사랑하는데, 내가 가진 자식과 내 부동산과 내 미래, 은행의 통장 잔고, 연금, 자기가 투자한 교회, 이런 것을 사랑하거든요. 이런 것을 사랑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제로 모든 것을 뺏어버리면 자기의 노선이, 원래 인간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누적입니다. 현재란 과거의 누적이에요. 심지어 현재라는 이미지도 과거의 기억의 중첩입니다. 내가 현재 나는 누구다, 하는 것을 쪼개보면 과거에 내가 경험한 것들 중에서 괜찮을 것을 편집한 것이 누적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남이 나를 보는 것과 나한테 원수 진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것과 다 달라요. 자기는 좋은 이미지만 관리하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임의대로 잘라서 나쁜 이미지는 전부 다 갖다 버리고, 좋은 이미지만 골라서 된 거예요. 나를 모른다는 것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가짜다 이 말입니다. 가짜죠. 현재 내가 누구인줄 모르고 과거에 경험한 것, 체험한 것만 가지고 왔다. 그럼 여기서 강제로 미래에 대해서 또 예측을 해요. 그러면 이 힘은 현재의 힘도 아니고, 미래를 이끄는 힘은 현재의 힘도 아니고 과거의 힘이 속도를 자제 못해서 쭉 그냥 밀어버리죠. 이걸 가지고 관행, 더 쉬운 말로 하던 대로, 별나게 살지 않고 평생 하던 대로 살아. 이겁니다. 관성의 법칙이죠. 한 번 이렇게 시작한 것은 중간에 강제로 막지 않는 이상 줄곧 그 길로 가는 겁니다. 절에 다녔다가 교회에 왔다. 교회 와서 뭐 바꾸죠. 찬불가에서 찬송가로 바꿔도 그 마음은 그냥 하던 대로 해요. 줄곧 쭉 가던 대로 간다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럼 이 노선을, 천국 가려면 이 노선에서 뭐로 바꿉니까? 천국 노선으로 바꿔야 되겠죠. 내가 나의 과거에 집착해버리면 천국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있든 말든 나는 절에 가기 때문에 교회하고는 상관없다. 나는 극락과 상관있지, 천국하고는 상관없다. 이래되겠죠. 나는 염라대왕과 상관있지, 예수님하고 상관없다. 이래 되겠죠. 근데 어느 순간 성령이 와서 노선을 바꿔버리면 그 석가모니라는 것, 부처라는 것이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전에 예비 된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처를 믿던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등장인물이 되겠죠. 노선이 바뀌면. 그러면 이거는 내가 사는 것이 점선이었는데, 그동안 없었으니까, 성령을 받아버리면 이 점선이 실선이 되고 내가 살아온 것은 착각이었다는 말이죠. 그동안 내 인생이 이런 인생이라고 착각했는데, 이 착각이 실선 되기 위해서는 이 실선에서 뭐가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 마트에 가서 채소 파는데 가면 시원한 김이 나오죠. 이렇게 말씀이 쏟아지게 되면, 과거에 내 기억된 인생 속에 말씀이 결합이 되게 되면 인생 살아온 것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전부 다 착각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살아왔던, 이 노선이 생각했던 나의 미래상도 결국 죄가 되는 거예요. 어제도 죄짓고 오늘도 죄짓고 내일도 죄짓는 겁니다. 줄곧 그리 가는 거예요. 근데 이게 죄로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미 성령 안에서 천국에 속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이미 십자가에 속했다. 십자가는 뭐냐 하면 약속의 완성이거든요. 나는 이미 약속의 완성이기 때문에 더 보탤 것이 없어요. 약속이 완성됐기 때문에 예수님 관점에서 지나온 인생도 보고 나도 보고. 나도 보니까 전에는 나는 뭐 박사다, 나는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다, 국회의원이다, 뭐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 관점으로 보니까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는 거예요. 국회의원 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박사증 찢으라는 말이 아니고, 찢으면 좋겠지만 막상 찢으려고 하면 아까워서 그게 잘 안 찢어져요. 그냥 죄인으로서 박사 되었고, 죄인으로서 국회의원 된 거죠. 그래서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이렇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작업을, 이런 고백을 끄집어내는 것이 주님이 벌이시는, 대동하는 주님이 벌이시는 전도가 되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계속 짓게 만들고 자기가 알아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럴 능력은 없어요.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은혜 안의 십자가 중심에서 흘러나온, 마트 채소에 뿌려주는 김처럼, 아주 시원한 사이다 같은 그런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그 순간순간마다 나는 죄인인데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단독적으로 나는 죄인이고, 주님보시기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되고. 언약 안에서. 내 안에서는 죄인이고 주님 안에서는 의인되고. 이렇게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니가 누구냐 하면 죄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니는 뭐야 하면 나는 의인이다. 그럼 그리스도 빼면 나는 죄인이고. 그래서 이걸 구체적으로 하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에서 나는 죄인이고, 보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라면 죄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도 역시 나는 죄인이고, 죄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그 분만이 의롭다 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더 나가면 죄인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행한 것은 죄일까요? 의일까요? 죄가 되죠. 그러면 헌금 한 것도 죄가 되고, 교회 나온 것도 죄가 되고, 성경공부 한 것도 죄가 되고, 뭘 하는 것도 죄가 되죠.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간음하지 않는 죄를 지으시고, 토색하지 않는 죄를 지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간음하지 않는 것을 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세요. 간음 안 하는 죄, 헌금하는 죄, 아마 다음다음 주 낮 설교에 헌금하는 이야기 나올 거예요. 아마 충격적일 겁니다. 제가 지금 벼르고 있어요. 자, 다시 들어가 봅시다.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빼앗기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해요. “이렇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주님께서 빼앗지 아니하면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이게 정신을 못 차렸구나.”하고 확 빼앗아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4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 되 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길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라고 되어 있죠. 4장부터 7장 끝까지 땅 빼앗겼다가 겨우 7장 마지막에서 회복했어요. 확 뺏어버렸어요. 왜?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왜? 그 땅은 약속의 땅이니까. 약속의 땅은 뭐냐, 뭐가 복이고 뭐가 저주인지,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것이 복이고 저주는 그냥 편하게 사는 것이 저주에요. 그냥 편하게 사는 것. 금슬 좋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저주입니다. 애들 공부 잘하는 것이 저주고. 본인이 잘하는데 누굴 믿어요? 본인이 잘하는데? 필요할 때 예수를 이용하면 되지, 여기 주인공은 나에요. 내가 주인공이고 예수님은 보조에요. 보조를 시다라고 하죠. 시다발이 아닙니까? 램프 이렇게 문지르는 이유가 뭡니까? 평소에 램프한테 푹 빠진 것이 아니에요. 그 알라딘 램프를 문지르는 이유가 뭡니까? 문지르면 누가 나와요? 모자 이상하게 쓰고 뿅~! 하고 등장하는 노예가 나와 가지고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 하면서 나오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평소에 램프한테 바라는 것 없어요. 아쉬울 때나 문지르면 되는 거예요. 아쉬울 때나. 새벽기도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언제? 아쉬울 때. 그럼 새벽기도 그만둘 때는 언제냐? 해결될 때 그만두죠. 해결됐는데 나올 필요가 없잖아요. 잠자야죠. 새벽잠이 얼마나 달콤한데요.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기도를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점치러 언제까지 가야 돼요? 점이 맞을 때까지 계속 가야 돼요.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 종교라는 게 왜 악마가 만든 최후의 발명품인지를 아시겠죠? 인간이 자기한테 환장하고 결국은 해답 못 얻고 미지의 상태에로,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면서 끌려가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악마의 노예입니다. 악마의 노예인데, 우리를 주인공 삼아버린 거예요. 주인공인데 이상하게 기분 나쁜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이면 내 인생을 어떻게 좌지우지해야 되는데, 돌아가는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이상하게 기분 나쁘게 말려든 느낌.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 다섯 번, 여섯 번 떨어지고 5년째 해가지고 합격되었을 때, 그 5년째 목표가 뭐냐 하면 공무원시험 합격이죠. 그렇게 해서 6년째 되었다 칩시다. 행복해요? 아니거든요. 짧은 순간뿐이에요. 지금 뭔가 누구한테 속고 있어요. 이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행복이 아니고, 저것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니고, 뭔가 이상해요. 뭔가 말려든 것 같아요. 거짓말하는 세력에. 그럼 진실은? 진실은 없죠. 15절을 한 번 봅시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사무엘은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절,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벧엘과 길길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아까 여기 사해 있고 요단강 있고 갈릴리바다 있다고 했죠. 이 동네를 순회합니다. 에벤에셀은 이 동네에 있어요. 이 옆에 아벡이라는 곳이 있고. 이 동네가 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의 땅인데, 블레셋이 지중해 옆에 있잖아요. 다 빼앗긴 거예요. 다 빼앗겼는데 하나님께서 다 찾게 해가지고, 딱 여기까지만, 옛날 그 상태까지만 회복시켜주신 거예요. 여기에다가 에벤에셀, 도움의 돌을 세운 거죠. 여기까지 도왔다. 다 빼앗기고 도와준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순회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바로 에벤에셀 전쟁에 대해서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전해야죠. 그 당시에는 책으로 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제사장에게 선지자들에게 들은 것을 가정의 목회자인 아버지가 후손들에게 전달, 전달하는 겁니다. 무엇을 전달했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럼 자식들은 뭐라고 합니까? “에이, 그건 알죠. 우리는 신이 만들었고 신이 함께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원칙, 그걸 언약이라고 하죠. 언약인 자기 원칙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계속 적용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잘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기 원칙을 강제적으로 적용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라! 만약에 니가 삐딱하게 하나님 원칙을 모른다면 너는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다른 이방민족들에게 항시 침범의 공격이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공격해 와가지고, 그들이 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 없어 할까요? 그만큼 살만하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가진 것 가지고도, 하나님은 연금의 하나님이라, 연금 빼먹어도 구십은 살겠다, 대책 다 해놨거든요. 그 대책 자식 하나 부도나버리면 다 날라 갈 수가 있지만. 그렇게 단도리 한다고 했는데도 뭐....., 이렇게 자기가 잘 되는 것, 자기중심으로 하는 이 모든 것이, 그냥 아무 일 없이 편하게 살더라도 이게 저주에요. 그래서 주께서 저주를 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충실한 셰퍼드들을 주변에 쫙 깔아놓았습니다. 여차하면 물어! 물어! 해가지고 물게 하죠. 물어버려도,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안 믿어요.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고 뇌물 갖다 바치고 곡물 갖다 바치고. 그러나 우리끼리 절대로 침범하지 말자고 도장 찍고 백날해도 결국은 거덜 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게 되어 있죠. 빼앗기고 난 뒤에, 다 털려가지고 그때는 누구를 찾느냐 하면,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찾죠. 그럼 하나님께서는 뭐냐, “니 원래 살아있어.” 살려주세요, 원래 살아있어, 라는 이런 개념자체도 옆에 있는 블레셋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사니까 우리도 그게 부러워서 저 사람들처럼 살아야지. 미국이 잘 사니까 미국처럼 살아야지. 뭐 일본이 잘 사니까 일본처럼 살아야지. 뭐 이런 식으로 해서는 그 사람은 이방민족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것 밖에 안 돼요. 성도냐, 성도 아니냐 하는 것은 산다는 개념부터가 이미 달라져야 하고 특이해야 됩니다. 사는 게 뭐냐? 뭐가 사는 거냐? 내가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무조건 이거는 앞에 내가 붙으면 저주입니다. 죽음입니다. 뭐냐 하면 주님이 내 안에 살 때, 그걸 생명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말은 이거는 내가 살아도 생명이 아니고 사망이 되는 겁니다. 사망에 생명이 올라타게 되면 그게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사는 것을 생명인줄 알고 자기 목숨을 내놓으니까, 주님께서는 니 목숨 내놓아도 니 처소 없어. 생명이 없다. 길이 없다. 진리가 없다. 이 말은 곧 천국에 니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전에 가락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니 자리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자진해서 그런 사고방식이 생길리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주께서 말씀으로 들락날락하면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 지금 하나님의 이름, 다른 말로 언약의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용으로, 증거물로서만 너는 그 관계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났고, 죽어서는 그 언약의 하나님과 합류하는 그런 자들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보통 신분자가 아닙니다. 이거는 돈 주고서도 살 수 없는 신분자입니다. 아주 특이한 피조물이에요. 이런 인간이니까 북한에 살아도 괜찮고, 남한에 살아도 괜찮고, 북한에서 탈북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이 함께 있는데 왜 탈북을 합니까? 주님이 남쪽에 와서 무슨 볼 일을 보겠다고.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무슨 볼 일을 보겠다고. 그래서 뭐 강제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뭐 일이 있어서 나오는 것은 나쁜 짓은 아니에요. 그러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신앙인이고 북쪽에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 못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오히려 유혹이 더 많다고 보면 됩니다. 북한사람들은 자기가 지옥인 것을 알잖아요. 근데 남쪽은 자기가 지옥이면서도, 지옥을 모르니까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적어지고, 북한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하고. 사도바울의 소망이 저절로 나오는데, 물론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약속의 땅의 특징은 온전함이 없어요. 항상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자, 긴장이라는 것이 뭐냐, 그냥 대치되는, 어둠과 빛을 긴장이라고 하지 않고 한쪽이 만약 손을 놔버리면 후딱 다른 쪽으로 훅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이 긴장이에요. 긴장. 우리는 이걸 항상 대치단어로 보는데, 낑낑거리는 이걸 긴장이라고 보잖아요? 그러면 스트레스 받아서 안 돼요. 긴장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한쪽이 이렇게 와버리면 갑자기 저쪽이 허약해져요. 만약에 내가 세상을 좋아하게 되면 주님은 나에게 있으나마나한 존재고 별로 생각도 안 나고 별 볼일 없는 인물이 돼버려요. 이게 긴장상태에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한 번 봅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우리의 소원은 항상 치이게 되어 있어요. 그 중에 치이는 것은 우리자신이 치이는 거예요. 분명히 많이 가졌는데 허탈해지고 허무해지고. 이게 아닌데...난 이게 행복인줄 알았는데 이게 다가 아니네. 자식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나서는 이제는 우리 둘이 편하게 살자고 하는 그것이 별로 그게 오래 안 가고. 빨리 손자를 놓든지. 또 자식 놓고 잘 살면 다투면 안 되는데 하고. 또 안 다투고 잘 살면 쟤들한테 좀 기대볼까? 이거 뭐 한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행복을 쫓아가는 겁니다. 근데 행복은 자전거 타고 가고 우리는 걸어가고 있고. 행복은 잡힐 듯 안 잡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요만큼 가면 저만큼 가요. 노사연의 님그림자 같아요. 저만치 앞서가는데 따라갈 수가 없어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는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하나님이니까, 전지전능한 것으로 알고 있죠. 그러나 나의 소욕에, 육체에, 성령께서 맥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물러가고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인데? 내가 못하면 강제라도 모가지 쥐어서라도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니가 욕심낼 때 내가 잠시 자리 비워줄게.”이런단 말이죠. “욕심 많이 내고, 그럴 때는 내가 빠져줄게.” 얼마나 성령이 연약한지요. 좀 강제로라도 패고 이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욕심 좀 냈다고 삐져가지고 삐짐하고 있고. 그럼 말씀도 보기 싫고 하나님도 싫고 예수님도 싫고 복음도 듣기 싫어요. 그런데 하는 일이 뭔가 이게 아닌데 하게 되면 벌써 성령은 두 팔 벌리고 “탕자야! 이제 돌아왔느냐?” 하여튼 탕자를 일 년에 몇 번 했는지, 들어왔다 나갔다, 또 들어왔다 나갔다가, 자동문이라도 달고 싶어요. 하도 가출했다가 들어왔다가 하니까. 아버지여! 하고 왔다가 사흘 뒤에 또 세상이 좋다고 가출했다가. “두 번 다시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다가 사흘 뒤에 또 놀러가자고 해가지고 또 놀러가서 한바탕 춤추고. 이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계속해서 아쉬울 때 찾고 또 도와주면 헤헤거리고. 헤헤거렸다가 다시 이방우상을 또 섬기고. 왜 이스라엘 역사가 그래야 되는가? 언약의 주인공이 되시는 우리 주님이 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나오는, 연약하심으로써 십자가 지셨거든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럼 십자가를 믿는 우리도 이 땅에서는 무진장 연약한 거예요. 큰소리치거나 남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은 우리한테 전혀 필요치 않아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 믿는 권력을 가지고 사용한다면 주께서 그 권력을 빼앗아버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에 예수 믿는데 대통령이 된다, 그럼 그 나라를 내 나라처럼 착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주님이 계셔야 되는데, 연약한 주님이 계시지 않고 강한 권력이 있어버리면 권력은 짐승과 관련되어 있어요. 악마가 관련되어 있다고요. 여러분들에게 외무부 장관시켜주고 권사님에게 대통령 출마하라고 하거든 하지 마세요. 집사님이 말리세요. 부탁합니다. 말리세요. 돈도 돈이지만 괜히 해서 위장전입 한 것 다 털려가지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면 인위적으로 조작해버린다니까요. 먼지나오는 것은 고사하고 조작을 해버린다니까요. 조작을. 그게 정치입니다. 나중에 아니면 말고 할 때면, 그때는 명예는 다 끝나는 거예요. 여기 사무엘상 7장 17절 마지막에 봅시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40년 동안 이스라엘 다스리면서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은 거죠. 그러면 사무엘이라는 존재자체가 뭐냐 하면 사무엘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사무엘이, 사무엘이, 사무엘이 어떻게 했다 하는데, 사무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무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누굴 가립니까? 지금 진짜 제대로 존재하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무엘이 가리게 되면, 하나님의 그 다음이 전략은 뻔합니다. 누굴 제거해버려요? 사무엘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사무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 다음이야기가 뭐냐 하면 8장인데, 8장 3절을 봅시다.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죠. 보세요. 제거하잖아요. “아휴, 아버지가 선지자니까 얼마나 자식 교육을 잘 시켰을까?” 하는데, 아닙니다. 선지자가 훌륭한 메시아가 아니에요. 선지자는 메시아 일부를 보여주지만, 선지자가 하는 것은 내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선지자를 세우는 겁니다. 내가 이 현실에 주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너희들 앞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함께 있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하늘에 계시는 거고, 이 구체적인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 언약 자체가 이 땅의 어떤 원칙이기 때문에. 원칙 없는 땅의 역사는 없어요. 원칙인데, 그게 무슨 원칙이다? 언약의 원칙. 언약대로 가는 겁니다. 그 언약의 원칙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늘 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