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512a히13장20절(법망)-이 근호 목사
안양20170512a히13장20절(법망)-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20절, 히브리서13장이 끝인데요. 끝부분에 오면서 자꾸만 다시 1장부터13장까지를 정리하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제가. 그만큼 못 믿겠다는 말이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마지막 이야기하기가 참~ 해도 소용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데.
1장부터13장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살지요. 그런데 1장부터 13장은 뭐냐 하면 이미 미래가 거꾸로 우리의 현재에 찾아와서 미리 방문해가지고, 미래에 계시는 분이 현재에 잠입해서 들어오셔서 쉽게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시간이 모두 종결된 상태에 계신분이 “너희들 고생 많지.” 하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들어와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그 길을 지난 시간에 Path 경로라는 패스. 통과. 경로를 이끌어가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 내가 이랬었었지.’라는 과거완료지요. ‘이렇게 살았었었지.’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주님 입장에서는 뭐냐, ‘내가 이럴 수밖에 없었었지.’ 라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주와 함께 있어버리면 우리는 현재에서 이미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게 히브리서13장까지의 경과, 통로, 길, 절차,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해석은 뭐냐하면 인간이 단독적으로 어떻게 사느냐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개념들이 우리를 둘둘 말게 되느냐. 그러면 방금 했던 요것을 약간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생을 다 끝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지을 죄는 다 지어봤다. 성경에서 육십계명이니 하는 거 다 위반했다. 자, 죄를 다 지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 짓고 있지만 제가 말을 다 지었다고 했습니다. 다 짓고 난 뒤에 이쪽에 서자 말이죠. 서게 되면 평생은 하나님의 율법에 비해서 죄 아닌 게 없어요. 다 죄 지었어요.
죄 짓고 난 뒤에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요게 바로 히브리서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남는 건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가게 되면 우리에게 관심 끄는 건 뭡니까? 이 죄를 어떻게 씻을 것이냐,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그 문제가 남겠지요.
그래서 히브리서를 다른 말로 하면 ‘처리’에요. 처리. 어떻게 처리하느냐 에요. 존재+처리에요. 예수님 오실 때에 이 세상은 이미 종말에 성격으로 갑니다. 히브리서1장에 보면 마지막 때라는 말이 있어요.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잘난 것 같으면 마지막 때라는 게 필요가 없어요. 결국 그대로 가면 돼요.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못났고 세상이 얼마나 어설프면 필히 마지막 때가 있어요. 심판 때가 있어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셨다. 이렇게 시작해요. 히브리서를. 우리는 마지막 때라는 게 감이 안 온다니까요. 우리는 내가 늙어 죽으면 또 자식이 이 땅에 살겠지. 신중현이가 불렀던 작곡한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아름다운 강산. 아름다운 강산의 가사를 보게 되면 세상은 아름다운데 인간만 바뀐다는 겁니다. 종말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히브리서는 뭘 하느냐 하면 ‘웃기고 있네.’ 세상 자체가 끝나버리고 인간은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아름다운 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것이 신중현의 이야기고 히브리서는 물려주기는 뭘 물려줘. 니가 다루나? 내가 다루지. 끝장냈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라서.
히브리서1장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10절, 11절 보게 되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절, 그것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요. 멸망한다는 말은 이런 거예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수요일 설교한 거 잠시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이게 끝부분에 나오는데 중심부가 있다 했습니다. 중심부. 중심부가 있으면 다음에 뭐가 있겠어요? 주변부가 있겠지요. 주변부. 제가 설교하면서 이걸 산사태라 이야기했어요. 산사태. 홍수가 나게 되면 우리가 살던 집들이 밀리게 되지요. 오니까 자꾸 밀려서 주변으로 밀리게 되지요.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요. 이걸 저는 잡다, 라고 해요. 잡다함 또는 잡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런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이 잡다한 곳에 살면서도 자꾸 중심부 복음에 의해서 이끌리게 돼요. 이끌리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남들은 이렇게 가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중심부로 간다 하잖아요. 제가 잉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표현했어요. 수요일날. 잉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은 잉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뭐냐, 어디에 가던지간에 이게 어디 지평에서 땅을 뚫고 여기서 나와 버려요. 중심이. 우리가 어디에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있는 현장에서 갑자기 갈라지면서 십자가가 불쑥 이렇게 돌출해버려요. 돌출한 상태에요. 그러니 이것이 한국이던 일본이던 대구든 관계없어요. 내가 있는 그곳이 종말의 현장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있는 마지막 때의 모습들이 깔려있고 배치되어 있는 현장입니다.
기도원에 간다. 이거 필요 없어요. 가정의 주부로서 살면 그 가정 일상 속에서 십자가 복음이 거기서 돌출한다니까요. 분출해버린다니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성령께서.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함께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28장 마지막 대목이거든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은 세상에서 중심부를 찾지 말라. 성지순례하지 마라. 이 말이에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이 중심이 아니라는 거죠. 옴파로스가 아니에요. 배꼽이 아니에요. 땅 끝까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은 함께 붙어있다는 말은 다만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그 봤던 그 광경을 이제는 자기 백성에게 똑같은 광경을 보여주는 거예요.
물론 똑같은 광경인데 우리는 왜 못 봤느냐,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적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을 살다보니까 예수님이 중심부가 아니고 내가 사는 그 지점. 내 인생이 나의 중심부가 된 겁니다. 자기의 인생스토리. 인간의 경력. 살아온 인생. 그게 중심부가 된 거예요. 그래서 부부사이에 하나는 복음을 알고 하나는 복음을 모른다면 이건 중심부 싸움입니다.
반드시 이야기할 때는 자기 중심부에서 이야기 나오게 돼있어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쪽에서는 뭡니까?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똑같이 내 중심인데 내 중심은 찢어졌다. 폭탄 파편 맞아가지고 중심부가 찢어졌어요. 나도 니처럼 내 중심으로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자 했었는데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폭탄을 일으켰어요. 뻥하고 분화구가 생겨버렸어요.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고, 저쪽은 자기중심으로 사니까 대화가 맞을 턱이 있나. 대화가 안 맞는 거예요.
그저 아름다운 강산 후손에게 물려주세. 이쪽에서는 끝났는데 뭐가 아름다운데? 니 의미로 보니까 아름답지요. 그리스도로 보게 되면 이 세상은 폐기처분해야 될 세상입니다. 옛날에 우리 학교 다닐 때 공작시간에 만들었어요. 미술시간에 신문지 물에 개어가지고 그걸 입체적으로 산이나 들, 나무 만들었잖아요. 거기다가 색깔 칠하고. 숙제 내라하고. 그럼 입체적으로 도돌 도돌 나왔다면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이걸 구겨버린다 말이죠. 이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 이걸 구겨버리면 입체적인 그 자연세계위에 누가 소박하게 살아요? 조상 대대로 농사 지으며 살아왔던 그 모든 전통이 같이 구겨져버립니다. 같이.
이 개신교가 천주교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왜냐 하면 천주교 반대해서 개신교 됐는데 개신교가 역사를 이제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역사를. 우리 교회는 역사가 몇 년 됐고. 당회장실에 가면 역대 목사들의 사진이 쫙 나열돼 있고. 검찰청장실에 온 것처럼. 주님이 보시기에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자체를 구겨버리는데.
구겨버리면, 내가 열심히 나의 아름다운 내 중심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열심히 자식 키우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모든 것도 이건 무의미하게 구겨져버리는 거예요. 무의미하게.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성도가 뭐냐, 성도란 ①번 착실하고 바른 존재가 아니에요. 성도란 뭐냐 하면 ②번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만약에 성도가 착실하고 바른 존재가 되어버리면 반드시 이 인간은요, 어떤 결과물을 자기가 기대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착실하고 바르게 사는데 주께서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지. 반드시 내가 원하는 축복을 줄 거다. 이리 생각한다 말이죠. 그러면 그 축복이 오기 까지 결함이 있지요. 미흡 되지요. 미흡된 만큼 감사가 안 나와요. 기대가 나오지. 주는가 한 번 보자. 보자. 이리 된다니까요. 감사가 안 나오고. 감사가 유보된다니까요. 감사할 만하면 감사하겠다.
그러나 성령이 와버리면 착실하고 바른 존재를 이건 자기 의라고 완전히 짓밟아버립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데 쓰시잖아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닐 때는 무조건 뭐냐, 100%감사가 나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무조건 감사가 나와요. 범사가 감사한 게 ②번 경우에 아무것도 아닐 경우라는 것을 그걸 직관할 때 그 짧은 순간에 감사가 팍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된 셈인지 아무것도 아닌데 감사 나오면 이 감사한 것을 ②번에서 ①번으로 된 자료를 집어넣어버려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늘 범사에 감사하니 나는 정말로 착실하고 바른 성도다. 다시 ①번으로 이게 들어가 버려요. 이걸 가지고 순환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면 회귀라고 하고 어려운 말로 하면 동질성의 회귀라고 합니다.
동질성의 회귀라 하는 것은 기도원에 가서 이런 예를 들면 돼요. 기도원에 차 끌고 가가지고 기도원에 앞에 주차 세워놓고 기도합니다. ②번 되는 걸 목표로 해서 기도해서 드디어 ②번 됐다고 칩시다. 주여, 아무것도 아닌데 오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와서 기도해서 은혜 받아 감사합니다. 하고 있는데 저 뒤에 사찰집사가 “여기 7다에 5600번 차주 누굽니까?” 이리 나오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오! 내 차. 내 차. 내 차 누가 끌고 나왔습니까?” 다시 ①번으로 회귀해버려요. 내 소유의 차가 있다는 말은 내가 먼저 있어줘야 내 소유의 차가 또 있잖아요. 내 게 된다고요.
만약에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니면 어떤 사람이 와서 내 차 발로 차면 “당신이 뭔데 내 차 발로 차! 내 차 물어내!” 이리 나온다 말이죠. 아무것도 아닌 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번 모션 쳐봤는데 그게 이미지인 것과 성경의 차이점은 그런 점이 나지요.
만약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주차장에 누가 주차하다가 약간 긁혔다 하면 ‘아! 내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주님차가지고 주님 차 박아났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다 말이죠. 그것도 진정성 있게 하게 돼요. 그런 생각은 차마 하기 싫지요. 그래서 그런 기도제목은 처음부터 아예 삭제가 되어있습니다. 주여, 차 박더라도 감사케 하옵소서. 이런 기도제목은 안하지요. 그러다 보니 기도할 게 없어요.
자, 1장에서 13장까지 오는데 뭐가 있느냐, 그걸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원래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요. 그런데 히브리 문법에 보면 ‘와우’하는 게 있어요. 와우연습법이란 게 있습니다. 이 와우연습법은 어떤 거냐 하면 히브리동사는 완료와 미완료밖에 없어요. 완료를 가지고 과거가 되요. 미완료는 미래가 됩니다. 동사가 시제가 이 두 개밖에 없어요. 현재는 상태 동사라 하는 게 있어요. 그대로 가는 거 이런 뜻으로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력들이 있으니까 영어문법 해볼까요. 현재분사와 동명사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둘 다 모양은 같아요. 뒤에 ing붙이는 겁니다. 현재분사라 하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것. play 같으면 즐기다. 놀다. ing 붙이면 playing놀고 있다.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이때는 한 동작을 할 때는 현재분사가 되는 겁니다. 동명사라 하는 것은 이건 동사 성질은 없고 명사 성질이 있어요. 뭐냐 하면 I am playing soccer. 나는 지금 축구를 하고 있다. 현재분사인데, 앞에 동명사가 되어버리면 My hobby is playing soccer. 나는 축구가 취미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현재 자기 상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일에 관한 것 이런 이야기를 해요.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의 완료와 미완료라 하는 것은 완료는 과거이고, 현재는 미래인데, 와우하는 게 뭐냐 and 그리고로 접속되어버리면 이게 연결되어버리면 과거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미래로 바뀌고, 미래가 뭐냐 하면 과거로 바뀌어요. 신기하죠. 이게 무슨 관점이냐 하면 세상을 볼 때 이미 다 모든 게 마무리되고 난 뒤에 다시 세상을 보자 이 말입니다.
마무리되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옛날 내가 꼬마로 있을 때 학교에서 이렇게 농땡이 부리고 말도 안 듣고 도망갔구나! 이런 게 느긋한 마음으로 보게 되지요. 그게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란 이미 다른 시간 층에 속하는 존재, 이게 믿음이에요. 다른 시간 층. 인간의 힘으로 이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간이 다른 시간 층으로 되려면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돼요. 성령은 예수님에서 나오거든요. 예수님의 몸이 무슨 몸이냐 하면 시간 층이 역사에 속하지 않고 묵시에 속하는 겁니다. 묵시란 말은 시간의 끝 이후에 상태, 세계, 그게 묵시의 세계에요. 고린도후서13장에 보면 그걸 삼층천이라 합니다. 삼층천. 묵시세계.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미래가 묵시에서는 과거가 돼요.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돼요. 이걸 한 번 쉽게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는 우리보고 이 땅에 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17장에 보면 니가 나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내가 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어떤 느낌, 어떤 체험, 어떤 실감을 하며 살아왔는가를 너도 똑같이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홀라당 나 따라오지 말고.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같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는데, 내가 속하지 않음과 같이 너도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 땅에 너희를 남겨놓아서 진리가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빠져나갔는가를 세상에 알게 하려 함이라. 이리 되어있어요.
그럼 이러려면 이것은 우리의 요청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했던 내 소망이 아니에요. 이건 순전히 일방적으로 주님의 소망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오늘 제목으로 적당한가 싶은데, ‘주님의 횡포’에요. 주님의 횡포입니다. 왜 내 남편을 만나야 되는가. 전에는 내가 골랐다고 보는 거예요. 그게 옛날에 과거 때 안목에서는 내가 고른 남편이고 내가 선택한 남편이에요. 뿅 갔지 뭐. 좋아 죽고 못 살았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새로운 예수님의 묵시적 관점에서 보면, 복음 전하기 위해서 현재의 남편을 만났었어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 전하기 위해서. 누가 누굴 전하는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집어넣기 위해서 주변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한 겁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로마서8장에서 아주 비정하게 이야기합니다. 하여튼 성경은 정내미라는 건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하갈은 쫓아내야 되고. 그래서 제가 수요설교하면서 했잖아요. 쫓아내서 보호할 것 같으면 애초부터 쫓아내지 말지. 무엇 때문에 쫓아내놓고 보호하긴 왜 보호하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도대체 본문을 봐서는 잘 모르잖아요. 언약 적으로 보면 이제 그게 보이는 겁니다. 주님의 횡포에요. 내 가는 길로 오지 않으면 아예 천국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 가는 길. 길이 어디입니까? 길은 없어요. 길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까 분화구처럼 솟아 나온다고 했지요. 불쑥 불쑥 솟아나오는 겁니다. 이걸 세자로 이야기로 하면 도깨비에요. 도깨비. 도깨비는 예상 못했는데 불쑥 불쑥 튀어나와요. 도깨비는. 완전 공유. 공유 압니까? 연속극을 봐야 말하지. 도깨비가 사람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요. 가슴에 칼 꽂고 사랑 아니면 뽑지를 않고 그런 내용이 나와요.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도깨비하면 너무 세속적이니까 이걸 그냥 성령.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이리 보시면 돼요. 성령이 나오게 되면 바로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과거 관점, 과거를 생각해서 미래를 생각하는 관점을 우리 힘에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까 철저하거나 착실하게 사는 것은 의미 없다 했지요. 우리 힘으로 주의 길을 갈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주의 길은 주께서 인도해야 돼요.
그 인도하는 자를 보혜사라 하고 보혜사라 하는 것은 우리를 환자 취급하는 거예요. 그 보혜사는 원뜻이 간호사라는 뜻입니다. 이 간호사 옆에 우리는 기브스하고 있지요. 화장실도 못가고 삐딱하게 해서 꼼짝 못해요. 링거를 끌고 가요. 주사 맞을 때는 엉덩이 까고. 그 때 그 때마다 성령 되시는 보혜사가 다 줘요. 다 준다고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생각하는 멋진 인간 만드는 게 아니고 비정하게도 주님이 어느 쪽으로 가는가를 보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가신 길이 보이게 하는 겁니다. 일종의 뭐냐 하면, 이게 또 제목이 탐이 나네.
‘증강현실’ 3D. 삼성판매점에 가면 안경 끼고 있지요. 권투하라 하면 사람 없는데 저 혼자 권투하고 있다 말이죠. 3D. 실제로 입체로 나와 있으니까. 증강현실 속에 우리를 놓이게 하는 겁니다. 증강현실이 나타나게 되면 지금 제대로 주님의 길을 가는 거고, 갑자기 증강현실이 사라지고 ‘정신 차려! 이 바보야! 신앙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은 돈이 최고야! 돈이 있어야 사는 거야.’ 이렇게 제 정신 돌아오게 되면 히브리서 같이 날아가 버리죠. 히브리서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히브리서가.
히브리서가 밥 줍니까? 이게. 들여다보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집니까? 까마귀가 와서 짜장면 중자해서 떨궈 줍니까? 이거 보게 되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성경이. 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방해되지요. 이 시간에 돈 벌면 되지 이거 할 필요 없어요. 방해돼요.
그런데 도깨비 같은 성령이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게 주님 가신 길이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길이 곧 진리에요. 우리는 자꾸 진리를 확보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길이 열어줘야 그 열린 길이 진리가 되고 그게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 생명, 어디 있고 우리가 따먹고 따내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니까요. 기도 빡시게 하면 진리 막 들어오고 있고 기도 빡시게 하면 영생 얻은 것처럼 하는데, 그게 아니고 길이 갈라져야 돼요. 진도에 길이 갈라지는 게 달력보고 예측해가지고 관광객들 기다리면 오게 되어있어요. 진도에는 옛날에는 모세의 길이라 했거든요.
모세의 길은 양쪽에 물이 절벽이 되고 있었어요. 성경에 보면. 진도 안 가봤지만, 아무리 봐도 무슨 벽이 있어요? 바지락 잡는다고 전부 다 비닐봉지해가지고 발자국만 있지 무슨 벽이 있습니까? 홍해는 바다도 유효해요. 그냥 바다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바다는 바다대로 유지하고 속에 길을 낸 거예요. 그래서 바다에 길이 났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고.
차라리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뒤따라온 애굽 군대들이 정상적인 생각을 했어요. 저희들이 미쳤구나! 오, 길이 있네. 저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저들도 갔으면 우리도 갈 수 있겠다. 갔는데 바닷물이 합체됐지요. 그러면 빠져죽으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왜 이렇게 우리를 빠지게 했습니까? 신이여. 이렇게 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답변할 필요 없지만, 굳이 답변한다면 “바다는 물고기 사는데다. 니 몰랐어?” “그럼 저 사람들은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증강현실이지.” 바다 안에 3D나올 줄은 몰랐던 거예요. 바다 안에 길이 있을 줄 몰랐거든요.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 길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했지요. 이 말은 뭡니까? 너희들은 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주님이 열어줘야 되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성경 공부한다고 내가 길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그냥 사시면 돼요. 사시면 도깨비 나타날 거예요. 도깨비.
자, 정리해봅시다. 도깨비가 나타날 때는 뭐가 달라진다? 보는 이 세상이 주님이 다녀간 세상으로 바뀌게 돼요. 이건 내가 살던 신중현의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강운 강산이 아니고 이렇게 꾸겨지도록 처참하고 피 막나오네. 70억이 피가 막 나오네. 자식이고 남편이고 없어요. 구겨져버리는데 없어요. 멸망한다니까요. 증강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다니까요.
다시 한 번 봅시다. 이걸 성령이라 했는데 히브리서 쪽에서 하면 미래. 미래는 뭐예요? 이미 모든 역사가 끝나고 난 그 이후, 그걸 제가 다른 노래에서는 연극이 끝난 후. 연극이 끝난 뒤에~ 연극이 끝나고 주님께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다시 방문하는 거예요. 수련회 때 이걸 시조로 했잖아요. 길재의 시조 「회고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았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폐허가 된 이 세상에서 다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예수님이 이런 고생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기 이야기밖에 할 게 없어요. 우리 이야기 안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창조주가 이런 수모를 당했거든. 그 때 니 고마운 줄 알아라. 내가 당한 수모 니도 똑같이 당해.” 요게 히브리서2장18절,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 하는 거고, 그 다음에 4장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요.
5장7절9절에 봅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구원의 뭐가 되지요? 구원의 근원이 되지요. 근원을 틀어막을 수 있습니까? 못 틀어막지요.
그럼 근원에서 뭐가 나오느냐, 폭파하듯이 나오지요. 그걸 누가 틀어막습니까? 화산에서 터져 마그마 나오지요. 마그마를 누가 도로 화산에 주워 담습니까? 터지면 터지는 대로 흘러내려야지요. 그 흘러내림의 한바가지 뒤집어 씐 사람이 성도라 이 말입니다. 그 터져 나올 때 이미 역사이후 역사가 끝난 미래가 우리에게 한바가지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거울에 보는 내 모습은 사실은 이런 식으로 구겨져서 또는 이런 식으로 늙어서 성형 보톡스해도 입만 튀어나오지 별로. 주저앉고 자꾸 구겨져요. 피부 자체가. 탄력 없는 정도가 아니고 뭉겨지고 구겨진다니까요. 자꾸 구겨지니까 그 미흡함을 메꾸기 위해서 자꾸 어린 손자, 손녀한테 뺨 대고 하잖아요. 손녀는 냄새난다고 밀어내는데. 중간에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이고~ 요거 이쁜 것. 그 탄력. 자기가 잃어버린 거예요. 이미. 생명이 다 빠져나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죄값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것은 바보들이에요. 과학하는 사람들이. 바보들이 뭐냐 하면 자기가 늙어가는 것을 모르고 지 아는 것만 자꾸 쥐고 있는데, 그거 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똑똑해도 휘발성처럼 빠져나가는 것. 그럴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아~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같이 멸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구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니고 죽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죽으라고. 이렇게 살다가.
그러면 죽으라하면 일찍 자살시키지 왜 길게 살게 하십니까? 예수님의 길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베드로에게 찾아왔을 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면 찾아온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고 사도바울에게 찾아 온 것도 다른 복음은 없다. 십자가 복음만이 복음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사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사도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 12제자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천주교는 역사적으로 전체, 성령 받은 사람만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국가 전체에 대한 이데올로기거든요. 국가 전체를 종교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납득하고 있는 요소를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양심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일시해버린 겁니다. 양심이 있잖아. 이건 동양철학이지요. 동양철학이지만 양심이 있잖아요. 양심이.
양심을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생명. 아까 생명을 뭐라고 했습니까? 길. 생명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죽으라고 있고 쪼그라들고 늙고 죽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생명은 없어요. 없는데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다는 거예요. 이건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피조물은 다 주어진 거라는 거예요. 이런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공통 요소. 이걸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했어요. 간주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형상을 회복하는 거라는 거예요.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러니 인간의 생명, 양심을 분석해보니까 뭐가 있느냐 하면 이성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옛날부터 천주교는 유식한 사람은 성직자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고위직에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따지면 되고 그 다음에 못 배운 사람들은 의지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신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요게 양심이 없으면 육이니까.
그러니까 이때는 뭐냐 하면 비극을 아주 슬픈 비극을 교회에서 조성하면 되지요. 거기 조성하는데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어머니의 무슨 사랑? 자식사랑을 집어넣으면 되지요. 사랑을 설명할 때 감정적으로 설명하면 되잖아요. 이건 무식하건 유식하건 관계없이 여자가 태어난 이유가 뭡니까? 자식 낳기 위해서 태어났잖아요. 자식 놓기 위해서. 자식 놓고 난 뒤에 남편은 발로 뻥 찬다 이 말이죠.
뉴질랜드 같은 경우에는요, 법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국가에요. 페미니스트국가인데, 여자가 이혼했다 하면 양육권은 남자는 아예 없어요. 남자가 양육하는 건 0%에요. 남자가 소득의 월급의 80%를 매달 영원한 아내한테 줘야 돼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어딜 가느냐 하면 남자는 미국에 가버려요. 못 살겠다고. 힘들어서. 법무장관해서 다 여인 천하였어요. 지금은 너무 심하다 해서 남자가 됐지만. 얼마전만해도 여자들 세상이었습니다. 뉴질랜드가.
그래서 남자들이 못 살아가지고 전부다 미국으로 가버리니까 딸들이 엄마를 달려드는 거예요. 엄마 때문에 결혼할 남자가 없어요. 다 도망가 버리고. 무조건 80%래요. 여자가 바람피웠던 관계없어요. 무조건 80%랍니다. 남자는 바람피우면 문제가 되지만 여자가 바람피우면 문제가 안돼요.
이 세상에서 자식을 놓는데 자식에 관심 있다 보니까 남편은 이제 가정의 뒷전이 되는 겁니다. 이게 육적인 본성이잖아요. 이러한 육적인 본성은 무슨 조건이 되어야 하면 이 세상은 영원토록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까 히브리서5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니가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도와준다 했지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의 주제가 내가 이 땅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니가 알아라.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 마지막 때라 한 겁니다. 그래서 앞에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선조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 구원하려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전부 다 한 뭉태기의 한 조각씩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파편들을 갖고 있습니다. 파편들을. 노아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심판주의 모습을 갖고 있고, 그리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뭐겠어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육에 나지 않은 다른 아들을 이삭을 가졌다는 그 것.
그리고 야곱 같으면 요셉의 아들에게 어긋맞게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어떤 수모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수모당한 예수님이 오히려 창조주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고. 모세 같은 경우는 뭡니까? 세상의 모든 보화와 영화를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할 때, 뭐와 함께 백성들과 함께 뭐 받기 위해서? 고난 받기 위해서, 고난 받는다는 그러한 내용을 또 품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사기에 나오고 이사야 같은 경우는 톱으로 켰다는 것. 이사야의 톱으로 켰다는 건 전설이지만. 이사야의 톱으로 켰다는 것은 그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해도 세상이 오히려 가해자가 감당치 못하는 거예요. 히브리서11장에 나오잖아요.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저 정신머리는 도대체 원천이 뭐야? 저 존재의 원천이 뭐냐? 우리 같으면 살려주세요! 라고 나올텐데 도대체 이건 후딱 떠나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11장13절에 보면 뭡니까? 그들이 나그네지요. 나그네인데 갈 곳이 있지요.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하늘의 큰 성을 예비했다. 되어 있잖아요. 이게 감동이 와야 돼요. 감동이. 이 세상 같으면 돌아갈 기회가 있겠지만, 명절날 다시 복잡하지만 고향 돌아가겠지만, 그게 아니고 저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야~ 이거 설명해야 돼요.
이거 설명해야 됩니다. 자, 마태복음5장에서 니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했는데,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 누가 적당한 방법을 이야기해보세요. ①번 돈을 내던진다. ②번 교회에 낸다. ③번 놓치지 않을 거예요. 자기가 꼭 쥐고 있는다. ④번 방법 없다. 몇 번이겠습니까? 방법 없어요. 전도서에 보세요. 이 세상에는 이왕 허무한 거 재미나게나 살아라. 일본이나 놀러가고. 그냥 재미나게 살아라. 미련두지 말고 살아라. 미련 둘 거 없어. 이거 뭐 아름다운 강산인데 자손에게 물려주고. 아~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자유롭게 이 세상을 포기한 모습으로 구애받지 말고 살아라 이 말이지요.
만약에 내일 밤에 유집사님이 이사 간다면 매일 평범하게 살다가 큰 넓은 아파트에 이사 간다면 내일 아침에 이사 차 온다면 오늘 저녁에 쓰레기 안내놓지요. 쓰레기 분리수거 그거 걱정 안하지요. 어차피 집안에 있는 게 전부다 쓰레기니까. 안하지요. 그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하지 마라. 대통령 누가 되던지 홍준표 안됐다고 서러워할 필요 없고. 이 동네 이야기 아닙니다. 저 대구동네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이 땅은 사는 쓰레기고 우리 사는 꼬라지보면 쓰레기에요. 우리 사는 게 쓰레기라니까요.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강남이나 해외 명품 파는데 보세요. 쓰레기들이 쫙 나열되어있는데 이게 철따라 쓰레기가 바뀌어요. 쓰레기 트렌드가 바뀐다고요. 이왕 쓰레기 같은 거 이쁜 쓰레기. 어차피 쓰레기는 쓰레기고. 그러니까 좋은 거 뭐 너무 거절하지 마세요. 어차피 쓰레기니까. 이쪽 쓰레기도 해봤으면 저 쪽 쓰레기도 한 번 입어보면 되지요. 마음을 그리 잡숴라 말입니다. 그리.
그걸 가지고 뭐라 했는가, 고난이라 말이죠. 고난이라 해서 지질이 궁상 떨며 사는 게 고난이 아니고 요번에는 강남 쓰레기 가보고 캐나다 쓰레기도 한 번 구경 가보고. 스위스 로마 쓰레기도 이태리 쓰레기도 어떤 쓰레기 있나 가보고. 그리고 크루즈 지중해 쓰레기도 한 번 가보고. 그렇게 느끼는 안목. 예수님이 빠져나간 세상이 얼마나 개판 같은 세상이었는가를 우리보고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게 그냥 니 마음대로 사세요.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지난 수요일날 이야기했지만 참 중요한 기도 이야기했어요. 절대로 신앙생활하지 말라고. 그러면 마귀한테 쫓기게 됩니다.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로 무장해버리면 자기 신앙생활 한 게 아까워서 자꾸 테스트를 하려해요. 내 기도발 어느 정도 될까? 이번에 헌금 목돈 했는데 어떤 결과 나올까? 막 시험하게 되면, 마귀가 “더 해야지. 그 정도 해서 먹히겠어. 더 해야 돼. 기도도 오래 해야 돼. 성경 석장? 두 장 더 해야지. 신앙이 늘어나면 성경도 더 봐야지.” 이런 식으로 자꾸 일곱 귀신이 와가지고 애를 먹여요. 아예 턱턱 숨이 막히게 한다니까요. 숨이 막혀가지고 뭘 할 수가 없어요. 부담되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마귀가 있는 이유가 그게 맞아요. 우리한테 딱 속성에 죄로 태어난 게 맞는데 그렇게 할 때, 숨이 턱턱 막히는 그것을 이제 오늘 본문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13장 20절 보면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언약의 피로 되어있지요. 언약의 피. 요거 이야기할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세상은 법망으로 짜여져 있다.” 앞에 부사를 붙인다면 촘촘히. 세상은 법망으로 짜여져 있어요. 007영화 마지막 대목쯤 보게 되면 007이 애쓴다. 007영화나 미션 임파서블을 보게 되면 그 요원들이 그걸 지키기 위해서 적외선 쫙 깔아놨는데 아주 곡예를 하지요. 기어갔다가 타넘고 갔다가 할 때 안경을 써야 보여요. 그냥 보면 경호에 다 걸리니까. 안경 써가지고 적외선 있지만 막 타잖아요. 이 법망이 쫙 깔려져있어요. 법망이.
법망이 깔려있는데 그 법망을 누가 이걸 인지를 하느냐 하면, 누가 느끼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천주교에서 말하는 양심이 인지를 해요. 양심이. 어떻게 부모가 돼 어가지고 자식한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대번 법망 하나 걸렸어. 그러면 찍! 하고 억! 하고 그래요.
어떻게 남편이 배고픈데 밥을 안 해줘? 그럼 또 찍! 하고 걸린 거예요. 그것도 밥인가? 정성을 들여야지. 그럼 정성들여 했다. 반찬이 3가지야? 5가지는 해줘야지. 돈 번다고 고생했는데. 그럼 5가지한다. 신선한 재료를 사야지. 오늘 마트에서 사와야지. 이건 끝도 없어요. 끝도 없어.
KBS2에서 무슨 프로가 있느냐 하면 살림을 되게 못하는 아줌마가 하도 살림을 못해가지고 얼른 방송국에 요청을 했어요. 요청을 하니까 셰프가 와가지고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처리하면서도 맛있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그 프로가 있었어요. 남편은 아내가 반찬을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가지고 오는데 1주일동안 그대로 가지고 와요. 반찬이 똑같아요. 여자가 요리를 할 줄 모르니까. 요리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우유를 하면 벌써 유효기간 1주일 넘은 우유는 잘 안상하지만, 그래도 1주일 넘은 걸 가져와가지고 자식들 불안 불안한 거예요. 남편은 콘프레이크해가지고 우유해서 지가 먹고. 여자보고 반찬 좀 하라 하면 여자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니 결혼했잖아. 니 먹고 싶거든 니가 알아서하던지. 어쩔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는 요리를 못하니까. 만약 그 요리해보세요. 더 못 먹어요. 그럴 때 셰프가 다 요리해주잖아요.
지금 이 세상의 이 법망은 우리가 성취할 수가 없어요. 거기다가 마태복음5장 산상설교까지 더 추가시켜놨으니까 맹세하지 말라 했지요. 기도할 때 뭘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달라고 기도 안하면 기도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주께서 니한테 뭐가 있어야 될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니 입을 통해서 이것 필요합니다. 저것 필요합니다. 하지 말란 말이야! 밤새지 말란 말이야! 하는 것처럼. 그런 기도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기도 안하면 뭐 할 건데? 그런데 우리 교인들이나 어떤 사람을 보면 말을 여기까지 딱 들어요. 그리해놓고는 기도할 게 없다고 나한테 항의가 막 들어오는데. 기도할 거 없으면 안하면 되지 항의는 할 필요 없지요.
주의 법망에 대해서는 우리가 못 지킵니다. 기도 하나도 못 지켜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할 수가 없어요. 그 놈의 양심 때문에. 자, 이걸 어떻게 할 거냐. 이 법망 어떻게 할 거예요? 10분 쉬고 해야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