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4. 21) 2강
광주 강의(2017. 4. 21) 38-2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든지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죠. 아까 고스톱 이야기했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의 기대나 소망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은 명령에 순종하심으로 주가 되시는 것뿐입니다.
냉철하게 이야기하면 이것뿐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새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낼 뿐 나머지 모든 요소들은 거기에 빨려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자기 사명 완수를 위한 재료, 도구들이죠. 인간들이 ‘나는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라는 시도까지도 예수님의 주되심에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런 일들을 허용하시고 유도하십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드러났지요. 내 일을 내가 알아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군가를 드러내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수용 또는 배척을 하는데 주님이 부자청년을 배척할 때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즐거워했습니까, 당황했습니까? 당황했지요.
왜냐하면, 부자청년 뿐 아니라 제자들도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천국 간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늘날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닌 무당 집입니다.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 올리지 말고 대나무를 세워놓아야 격이 맞습니다.
무당 집에는 누구 있습니까? 무당이 있지요. 무당이 하는 일은 굿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찾아온 사람은 살풀이를 하고. 한을 풀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정성 드리고 착한 일하면 복 받는 줄 알고 착한 일을 시행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꼴이잖아요. 교회를 소개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가까운 굿하는 집을 소개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여기에 가는 이유가 주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다시 말하면 주님께 배척받은 적이 없어서 자신이 얼마나 큰 하자가 있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권총으로 자신을 쏘세요. 이 말은 자신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아는 거지요. 권총으로 자신을 쏘면 구멍이 생기겠지요.
인간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총으로 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성경을 100독, 1,000독을 해도 자기 앞에서 멈춥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떠나면서 가져간 것이 뭡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왜? 소중하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께 자신을 가지고 와서 영생을 추가하려고 했다가 안 되니까 다시 자신을 챙겨 떠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자기 자신은 남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자신을 총으로 쏘아 구멍을 내라고 했지요. 구멍 낼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의 갈 길을 지시하고 움직여야 하니까요. 스스로 자신을 구멍 낼 마음이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가 되는 조건은 뭡니까? 자신에게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누가 뚫습니까? 고맙게도 주님이 구멍을 뚫어줍니다. 주님으로부터 구멍이 뚫린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을 구멍 낸 권총은 십자가입니다. 권총의 총알은 십자가에서 나온 부활 또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찾아오면 부활하신 주님이 오십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서 찾아오시잖아요.
제자들은 도망쳤는데 주님이 찾아오셨어요. 이것이 수용이지요. 자기 사람으로 받아주시는 겁니다. 구약 아가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나는 그에게 속하고 그는 나에게 속했다(아2:16).” 이게 사랑의 절정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몸 되는 것이지요. 창세기 2장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고 나오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이지요. 사랑이 있으면 하나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몸밖에 없어요. 이런 자는 누구를 만나도 자기 잘되는 것만 챙기려 하지요. 심지어 예수님을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자기 챙길 것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서 얻는 것만 있었습니까? 아니죠. 잃는 것도 있었지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좋은데 바리새인들에게 불려 나갔지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나오는데, 나사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목숨을 잃었어요. 다시 얻었지만. 잃었다가 얻는 것이 좋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그냥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까? 잃었다가 얻으면 혼 줄납니다. 만약 죽었는데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사고방식에 구멍이 나야 합니다. 구멍이 뚫려야 한다는 말은, 주님이 구멍을 낸다는 말은, 수용이 된다는 말은, 구멍 난 인간조차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구멍 뚫릴 사람은 뚫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멍 뚫린 부분을,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공격을 하겠지요. 성도란 그 사람의 마음에 주님이 들어가 있는 자입니다. ‘아바타’란 영화가 있어요. 거대한 기계가 있는데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조종을 하면, 기계 스스로 움직이는 것입니까, 사람이 움직이게 한 것입니까? 사람이 움직이게 하지요.
이 형식을 갖추는 거예요. 겉모습은 옛날의 나인데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와서 조종합니다. 성령이 임한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어요. 요즘 인공지능, 또는 4차 산업을 예로 들면 적합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있다고 하면 끝납니까?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게 어떤 변화가 있는가? 내 스스로 산다는 것을 겨냥해서 주님이 쳐들어 온 것을 알지요. 성도는 매일 이 싸움이 벌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이루려 하고 주님은 이런 나에게 시비를 걸지요. ‘왜 너는 그것을 소망하니?’ ‘좋잖아요.’ ‘왜 좋아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남이 모르는 질문이 주어집니다.
산을 넘었더니 넘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산이 새롭게 보입니다. 언제까지 나의 만족을 찾아야 합니까? 어느 선에 서야 만족이 있겠어요? “아이 성적이 올라 행복합니다.” “네 행복을 버리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주님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부자청년에게 던진 질문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지는 거예요.
“제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목숨 바쳐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뭔데?” “행복을 원합니다.” “그 행복 나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느냐?” 우리는 내가 이 정도 하면 이런 현실이 올 것이라고 하는 순간, 그것과 예수님 따른 것을 자꾸 바꿔치기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바꾸지 나중에 그렇게 하는가? 이것은 우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앞장세워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만약 내가 생각한 구원에 내가 안착하면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소중한 분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챙겼는데 더 이상 주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기대한 것을 이미 챙겼으면 됐지.
‘연발성’이란, 계속 총을 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계속 쏩니다. 딸을 결혼시킨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부모로서 이제 할 일 다 했다.’고 했는데, 주님께서 ‘할 일 다 했으니 잘했냐?’라고 성령의 총으로 우리를 쏘는 거예요. 아버지답게 산 것과 예수님과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반대로 ‘나는 이제 인생 살맛이 안 난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의 안정을 기구하는 그 생각과 예수님을 바꾸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논리를 더 진척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과 나쁜 일 전부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일이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몇 번 떨어졌어요. 떨어질 때마다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지요. ‘돈도 들고 시간과 노력도 투자했는데 아무 성과가 없구나.’라고 불평하면, 주님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네가 원하는 것을 꼭 얻어야 하냐?”
이 말은, 내(주)가 누군가를 증명하며 살면 되지, 꼭 네가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이정도야!’라는 것을 누구한테 증명하려고 하느냔 말이지요. 자기 주재파악도 못하면서. 내 존재를 남들에게 증명해 보기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본래의 일,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명하는 일을 가로막는 거예요.
이게 악마에 속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활용하는 것이지, 우리 좋으라고 찾아오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성령이 찾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예수님 생각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잠도 안 자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있습니까? 못 살지요. 그런데 천사는 어떻습니까? 먹는 것, 잠자는 것과 무관하게 삽니다. 같은 피조물이지만 천사는 잠도 안 자고, 안 먹어도 돼요. 왜 우리는 인간이 원형이라고 생각합니까?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이 왜 합당한 것이라고 여깁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잘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거예요. 철저하게 인간 자신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게 물 마시고, 밥 먹고, 잠자게 하는 거예요. 이것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고 40일을 보냈지요.
그 때 사단이 달려들어 유혹하지요. “먹어야 살지.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라도 먹어야지.”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먹고 마실 자격도 없다는 것으로 출발하는데, 사단에 사로잡힌 모든 인간들은 먹고 마시는 것은 기본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사단을 붙여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는 것은 기본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사단이 심어준 것임을 폭로한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다가 지옥가면 그만인데, 예수님이 등장한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등장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는 성령이 오신 게 문제입니다. 사울이 율법에 흠이 없고,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 잘난 맛에 그냥 살면 되는데 성령이 찾아와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면서 설치고 다니니 사람들이 감당할 수가 없어요. 교회는 친목단체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경건과 거룩은 다 뽑아내서 ‘천국 들어가세!’ 라고 외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거기에 정성을 더하고 의지와 신념을 더해서 사람을 모으고 단체를 키우는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교인이고.
그 친목단체 사람들이 자신을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가관이에요. 얼마나 사단에게 길 들여졌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겠어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문제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문제가 많았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신약의 예수님이 만들 이스라엘은 문제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구약의 멸망당한 이스라엘 말고, 영생 얻을 이스라엘을 예수님이 만들잖아요. 만들면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럼 12제자가 보여 줄 것은 ‘우리는 같은 인간이라도 이스라엘과는 달라.’ 이러면 안 되고, 멸망한 자들과 똑같은 인간이었는데 누가 손을 대는 거예요. 그렇다면 12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여줄 것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래서 망했다.’ 그 망하는 실습 장소에 조교가 등장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부자청년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할 이유를 부자청년이 보여주었고, 그것을 지켜본 자가 12제자들이고, 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오랜 시간 주님과 동행했으니 더 이상 알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로운 면이 보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신감이 떨어져요.
초장에 예수님께 능력 받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때는 좋다고 따라다녔는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아졌어요. 예수님은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고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어요. 그러면 죄를 알아야지요.
21-2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제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은 사랑해서 이야기했지만 부자청년은 결국 떠나버렸지요.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것입니다. 근심하며 떠난 부자청년은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는데 재물이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있는 재산 다 바치고 예수님을 믿어야 참 신앙입니까?
부자청년은 자신의 재물이 어떻게 해서 생겼다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율법 잘 지켜서 받은 복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평소에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했던 모든 짓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걸 부자청년이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떠난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배척하신 거예요.
23-2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쉽다고 해야 합니까, 어렵다고 해야 합니까? 어렵다고 하면 안 되고 쉽다고 해야 돼요. “누가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했지요. 이 말을 왜 먼저 말씀하지 않았지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신다.’고 처음부터 말씀을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왜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셔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십니까? 예수님만 하나님을 알고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이것을 알려면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을 폐기처분해야 돼요. 인간이 원하는 것을 폐기처분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다.’ 이미 주께서 확정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안 보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 이런 말씀을 의지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어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이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새언약이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성경 해석이 귀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구절 말고 다른 구절도 있잖아요.”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몰라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인간들이 유발시켰습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날 죽인 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간단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너는 지옥 가야할 죄인이었다.’고 하시면서 죄인 됨을 보여주는 삶으로 이끄시는 그런 관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목사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해요.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이 구멍 뚫리지 않은 거예요. 남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다 끌어와서 내 것으로 만들어요. 복음을 전하면 들은 후에 “목사님, 복음 알면 아들 낳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이 말은, 결국 복음을 내 소원 이루는데 접목시켜 활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려고 해요. 그러니 복음을 이해할 수 없지요. ‘내 것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사단의 마음이 주님의 복음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자기를 챙기려고 하는 마음에 구멍을 뚫립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 마음에 구멍이 뚫리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나를 위해 살아온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납니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악이 주님의 의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욕심이 올라와서 ‘주님의 복음을 믿었으니까 내 소원도 하나 들어주세요.’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늘 이런 것이 올라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죄와 더불어 삽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고 성경도 읽으면서 일이 잘 성사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마음이 다 자기 욕심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죄악이지요. 그러면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데, 죄는 나쁘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도 아닙니다. 우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을 주님은 죄로 바꾸기 때문에 하든 안 하든 우리는 바뀝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늘 바뀝니다. 우리는 그냥 터널을 통과할 뿐입니다. 통과하면서 자신이 만든 터널을 꿈꾸면서 살아가요.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됩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을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혼자 미치면 이상하지요. 그러나 다 같이 미치면 정상이 됩니다.
촛불을 혼자 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100만 명이 같이 촛불을 들면 자랑스러워요. 마귀가 우리에게 ‘너는 가치 있어. 소중한 존재야.’라고 계속 속삭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연속적으로 우리에게 구멍을 냅니다. 그러면 그 구멍으로 바람이 불어오게 되고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너무 과격합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자들도 참 힘이 들었어요. 참고 주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의 본색을 다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하고 더러운 우리 자신이 폭로되지요.
그러나 장차 성령이 오게 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다뤄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0:21).” 이 말씀을 성령 받은 바울, 베드로에게 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할 거예요. 왜냐?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다 이루시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신자입니다.
내 자식이 어떻게 되든, 내 집안이 어떻게 되든 주께서 주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면 됩니다. 감사는 ‘주가 말씀대로 하실 겁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가 보여 줄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특징은 누구를 만나도 모든 공로를 남편에게 돌립니다. 주님은 성도를 이렇게 만들어요. 이것은 본인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구원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희귀한 일입니다. 그 희귀한 일을 매일 느낀다면 세상에 이런 복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달라고 애원하는 자에게는 안 주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복이 주어지니까 이건 희귀한 것이지요. 희귀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 할수록 기쁜 일입니다. 남과 싸울 때, 남을 욕하고 싶을 때 예수님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 ‘나는 남에게 욕할 자격도 없고, 내가 욕을 듣는다고 해서 화 낼 입장도 아니고, 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통곡할 일도 아니고 이것마저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란 점을 깨닫게 되면, 성령이 주신 온유와 화평이 절로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자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인 줄 알았는데, 제자 아닌 자들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본인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님이 누구신지 보여주는 사건임을 깨닫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5. 24. 08:57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