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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합시다. 눈에 보이는 그것을 믿게 되면,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들어오지 아니하면, 아예 처음부터 믿음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이 이러한 큰 문제점이 있어요. 중보기도 했는데 애가 더 비뚤어지게 나간다, “중보기도 소용없잖아.” 이 말은 뭐냐 하면 벌써 예상하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지금 괜찮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에 대한 합당한 결과가 반드시 눈에 보이는 어떤 실적 같은 것으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지금 열두 제자는 착실하게 3년 동안 같이 붙어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 붙어있는 것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붙어있는 것을, 목자를 치니 양들이 어떻게 돼요? 흩어진다는 구약성경 말씀이 그들은 자기한테 해당된다고 상상도 못한 거예요. 양들은 다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를 주님한테 씌운다는 그 원리원칙에 의해서 남의 이야기라고 여기는 거예요. 자기한테 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인간의 보고 믿는 그 속성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그걸 활용하시는 거죠. 활용하시는 겁니다. “실컷 안 믿어도 돼. 왜? 내가 구원시킬 것이니까. 니가 알아서 믿음 없음을 믿음 있음으로 바꾸지만 그거는 니가 평소에 니가 하던 대로 니 인생에 개입한 거니까.” 그렇게 돼버리면 그 처소가 없다는 말이 우습게 돼버려요. 그게 의미가 없어요.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까? 그런데 처소가 없다는 말은, 니 자리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니가 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그 통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눈으로 보고 믿는 믿음은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가 눈에 안 보여요.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이 방식이 그대로 적용돼야 이들이 구원받아요. 함께 있는데 눈에 안 보여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20장 29절,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것을 자꾸 예수님은 고집하시는 겁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그러나 인간은 눈이 있으니까 우선 보이는 것부터 믿기 시작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부터. 보이는 것부터 믿기 시작하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해요? 보이는 것부터 믿기 시작하는 이것을 보지 않고 믿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에 방법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귀었던 그 모든 관계를 이 제자들 속에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성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그 관계로 인하여 나온, 이 본문 당시의 결론은 뭐냐 하면 ‘처소 없음’입니다. 그럼 처소 없음의 반대말은 뭐죠? ‘처소 있음’이죠. 처소 있음은 이게 천국이 되는 겁니다. 처소 없음은 이게 지옥이 되는 거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첫째 시간 끝에 뭐와 관련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뭐와 관련되어 있다? 천국과 지옥과 관련성을 지닌다고 했죠. 스토아학파 다시 해봅시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을 어디서 찾았습니까? 그저 따뜻한 것은 위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낙엽은 떨어지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구나! 장미는 아름답고, 세상에!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셨구나!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것에, 여러 가지 것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스토아학파는 진선미眞善美라고 하는 겁니다. 많이 들어보지 않았어요? 대구에 가면 경북여고 교훈이 진선미에요. 이 진선미가 오늘날 현대 물리학에서는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바로 에너지로 바뀌었어요. 에너지. 모든 현대 과학은 에너지입니다. 과학이 에너지에요. 하루 성인이 섭취할 열량이 2800kcal에요. 2800kcal라는 말은 뭐냐, 이 에너지 열량이 있어줘야 우리의 간, 신장, 머리카락, 발...다 움직인다는 거예요. 결국 이 사고방식은 뭐냐, 우리는 뭐다? 기계에요. 기계고 열량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에너지라고 해요. 에너지는 오늘날 하나님의 퓨뉴마, 영이 되고, 신이 되는 거예요. TV틀어보면 전부 다 나오는 것이 뭡니까? 다이어트하고 음식이야기 많이 나오잖아요. 그럴 때 내가 대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뭐로 판정 나요? 열량을 얼마나 줄였느냐, 열량을 얼마나 효율화 시켰느냐, 그걸 보는 거예요. 전기에너지, 전기자동차, 모든 4차 산업의 이야기는 결국 에너지를 얼마나 절약하느냐, 활용하느냐 그 문제잖아요. 북한이 저렇게 핵폭탄해도 중국에서 석유 안 주면, 요새 전기도 안 들어온다고 해요. 세계는 무역 전쟁이라고 하는데 따져보면 에너지 전쟁입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요. 북한에 공장이 있어요. 공장 가동 못합니다. 뭐가 없기 때문에? 전기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 문제거든요. 근데 전기가 없어서 공장이 가동이 안 된다, 라는 식으로 이 세상을 설치한 자들이 누굽니까? 그렇게 세상이 굴러가도록 만든 자들이 누구에요? 바로 스토아학파 후손들이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것.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데, 근데 눈에 보이는 것이 믿을만하다는 것이 처음에 어디서 나왔어요? 내가 나를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여기 눈에 보임. 따라서 이 자체로 어떤 하자가 없고 무조건 나를 살려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처소 없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해줘야 알 수 있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이 이야기해줘야 해요. 예수님이 뭘 근거로 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아버지로 가는데 베드로야 너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느니라. 뭘 분리시켜요? 예수님과 그 외의 모든 자. 제가 강의할 때 몇 번 그런 이야기를 했죠. 안양강의에서도 했는데.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실체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을 지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하나, 실체 없이 이름만 먼저 나오는 것. 그게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벌어지는 현장을 보세요.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완전히 거기에 갇혀있어요. 설마? 홍해가 갈라진다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을 이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왜 홍해가 갈라질까? 그들은 어림도 없어요. 왜? 줄곧 하나님께서 바다가 갈라지게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홍해가 갈라지게 했죠? 그러면 주의 이름과, 주의 이름 외에 기존에 세상에 있는 모든 이름과는 싸움의 관계고 적대적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적을 뭐라고 합니까? 두자로? 악마죠. 악마.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을 지배한 겁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는 뭐냐, 사망이 세상을 삼켰는데 부활을 통해서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이 사망을 뚫고 이겼잖아요. 그때부터 생명이 사망을 삼키게 되어 있어요. 생명이 사망을 삼킨다. 삼킨다는 말은 일대일로 개인구원 하는 것이 아니고, 통째로 일괄해서 다 집어먹고 다 삼키고 그런 거예요. 마치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에, 다윗 시대 때 전쟁 어떻게 했습니까? 몽땅 다 전쟁했습니까? 오야붕끼리 일대일 대표로 했습니까? 골리앗 나왔죠. 이쪽에서는 누가 나왔습니까? 소년다윗 나왔잖아요. 골리앗 하니까 골리앗 크레인이 생각이 나는데, 얼마나 컸으면 골리앗이에요? 장수 목 베고 그들이 다 무너졌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다윗언약에 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아! 다윗 내세울 테니까, 악마 쪽아! 너희도 대표 한 번 보내봐라.” 주께서 다윗 내세웠습니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오실 다윗이에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고. 마가복음 10장, 누가복음18장에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호산나 찬양한다.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다윗언약대로 오실 분만 오시라는 이 말입니다. 그 대표자만 오면 돼요. 그 왕만 오면 백성은 왕이 만들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만드느냐,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만들거든요. 자, 여러분이 배웠으니까 주의 이름은 어떻게 적용된다? 그냥 곱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방해를 뚫죠. 우리는 뭘 믿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내가 실천에 옮긴 것을, 그걸 결과로 끄집어낼 때. 그때 우리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고 확인하게 되니까. 원인도 나, 그 원인자에게서 나온 결과도 동일하게 내가 있을 때 그걸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믿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고 했죠. 그러면 산을 옮긴다는 결과를 내려면 원인은 뭐가 돼야 됩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진짜 겨자씨만한 믿음인지 아닌지가 구분이 되려면 기도제목이 뭐가 돼야 돼요? “청계산에 저기 황해에 빠져라.” 뭐 기도 제목 내용이 그 정도는 돼야 되잖아요. 물론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청계산이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금강산이나 백두산이 돼줘야죠. “금강산이 좋다는데 잠시 남쪽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는가, 관광산업 때문에 설악산 옆으로 좀 붙어다오.” 왜 그런 기도는 금요철야 때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기도할 때 사람들이 이미 예상을 해요. 얼추 잘하면 되겠다는 파시빌리티possibility,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걸 미리 중보기도 내용으로 담습니다. 터무니없는 것은 하지를 않아요. 그만큼 인간이 전혀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을 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나를 믿으라가 아닙니다. 니가 믿음 아님을 니가 믿어야 돼요.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전혀 처소를 마련할 잽이 못 됨을 인정해야 돼요.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돼요? 이미 확정해야 돼요. 내가 뭘 끄집어내도 주께서는 NO! 삑(☓)안 받는다는 것을 확정해야 되겠죠. 그 확정은 뭐냐, 십자가에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니 때문에 내가 대신 죽는다는 확정된 원리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떤 짓을 해도, 십일조, 선교, 금식....뭘 해도 그게 죄가 된다는 것. 그게 확정되도록 누가 이야기합니까? 바로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그걸 꽂아주죠. 그래서 성령이 찾아오면 베드로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갑니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나오죠. 그거 한 번 생각해봅시다. 베드로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너를 띠 띠고, 허리띠 쥐고 강제로 이끈다는 거예요. 그러면 원치 않는 길이니까 베드로 나름대로 뭐가 먼저 전제되어 있어야 해요. 베드로가 뭘 하든 원하는 것이 있어야 돼요. 원하는 것이 있어줘야 원치 않는 길이 이게 의미가 생긴다니까요. 원하는 것이 한 달에 한 번만 생깁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원하는 것이 있겠죠. 아침에 눈만 뜨면. 눈만 뜨면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바꿔주죠. 이걸 과학적으로 말하면 에너지인데, 아까 에너지2800kcal가 있어야 산다고 했죠. 베드로가 사는 것은 바로 이 성령에 의해서 사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베드로가 바울에게 당한 것도 다 주의 뜻이고 그거 원치 않는 거예요. 베드로가 원하는 것은 뭡니까? 할례 받지 않은 사람하고는 식사 같이 하지 않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했습니까? 그거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베드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받는 것이 바로 원치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충분하게 베드로는 솔직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내놓아야 해요. 이게 사실은 복음에서 제일 이해하기 힘든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했잖아요. 거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다? 개인 거룩에, 개인구원에 집착하고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개인구원이 없기 때문에. 없기 때문에 집착해야 해요. 만약에 개인구원이 없고 집단구원만 있다면, 인간이 그 소리를 듣고 베드로처럼 자기는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개인구원 안 한다.” 하고 스스로 개인구원 없애고 집단구원으로 가려고 할 거예요. 제가 아까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그런 이야기했어요. 막 산다 이야기. 어떤 사람이 막사는데, 막사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그게 막 사는 겁니까? 할 때, 막사는 것은 항상 결과 선에서 평가해야 막사는 거예요. 이걸 원인 선에서, “막살면 구원받는단다. 막살자.” 이게 원인 선에서 투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지나고 보니,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니, ‘참 내가 막살았구나.’ 금식하는 그런 막삶. 목돈 헌금하는 막삶. 전부다 막살았음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항상 결과적으로 해줘야 해요. 결과적으로. 결국 결과적으로 한다는 것은 인간이 그만큼 주님 앞에 활용 당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겁니다. “참, 나같이 못난 인간 그동안 잘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이용해주십니까?” 이렇게. 그러니까 요한복음14장에 나오는 내용은 제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14장이 어디와 연계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할게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육신 때문에 죽으신 거죠.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땅에 다시 전달한다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어떤 차원에서, 니 죄를 니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더냐? 라는 내용까지 십자가 이후에 계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주입시키는 겁니다. 정보를 주입시키기 되면 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이 이야기가 그냥 헛된 이야기로, 과거의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 아니고, 계속 남겨둬서 이걸 반복시켜줘야 돼요. 이걸 반복해야 돼요. “보면 믿겠습니다.”하는 말이, 제가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보고 믿어야 해요. 제가 이걸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동적입니다.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자동적으로. “지난번에 일이 잘 풀린 것, 내가 무심코 기도했더니만, 일이 잘 됐네.” 갑자기 기도한 원인과 그 잘된 결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되어 있어요. “그때 어렵다고 해가지고 내가 딴 생각 안 하고, 약간의 돈이 좀 남는 것이 있어가지고 한 십 만원 했더니만 아이고, 세상에 삼일 만에 삼백 만원이 들어왔네. 가만히 있어보자 30배네. 이거 잘하면 60배나 100배도되겠네.” 이렇게 연결시켜버려요. 자동적으로 연결시킨다고요. 그러면 이 연결시킨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걸 나한테 장착하겠죠. 장착시켜버리면 이걸 누구한테든 떠벌리겠어요? 안 떠벌리겠어요? 자연스럽게 이걸 떠벌리게 돼요. 그 일을 누가 선배 격으로 했는가, 열 두 제자가 한 거예요. 열 두 제자가. “우리가 죽기까지 고생했습니다. 제 목숨 내놓겠습니다.” 열 두 제자가 한 그 길을, 우리는 “에이, 제자들 배반이나 하고.” 이렇게 남 이야기로 여겼는데, 성경을 보면 열 두 제자가 간 그 길을, 똑같은 짓을 같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구원받았거든요.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이유가 뭡니까? 십자가의 긍휼로 구원받았다. 자, 그렇다면 제자들이 십자가의 긍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 긍휼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내가 주님께 몹쓸 짓을 했는데 긍휼을 줬잖아요. 그럼 긍휼을 극대화 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뭐 기도 좀 했더니만 뭐 30배 나왔고 뭐 나왔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아, 나밖에 모르는 이런 짓이 반드시 나한테 일어날 일이었다 이 말이죠. 막살아야 될 일이에요. 막사는 것을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놓치지 않을 거예요. 주께서 전혀 놓치지 않습니다. 막사는 것 다 필요한 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이게 막사는데 포함이 된 거였구나. 아, 그때 큰소리 친 것, 뭐 잘한 짓은 아닌데, 했어야 할 짓이었구나.’ 그때 누가 와서 툭 친다고 합시다. “당신이 기도해서 응답받는다고 소문났던데? 기도해서 전에는 삼백 만원 받았지만 기도 더 빡세게 하면 육백 만원 받을 텐데 한 번 해보지?”라고 이렇게 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참 죄 지은 거야. 근데 그걸 통해서 십자가의 긍휼을 다시 한 번 깨달았어.” 그럼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뭐가 나와요? 누굴 증거 합니까? 주의 이름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제 여러분이 정확한 뜻을 알겠죠. 결국은 주의 이름이 제자들을 떠난다? 안 떠난다?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제자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빼놓고. 제자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계속 관여하죠.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뭐든지 조심해서 주의 이름으로 하면 응답받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는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야 돼요? 자기 원하는 대로 가야 되죠. 여기에 누가 개입합니까? 주님이 개입하죠. 아까 한 것을 다시 합시다.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홍해가 갈라졌을 때 나중에 다 건너오고 보니까 누가 개입되었어요? 이거는 주의 이름이 개입했죠. 주의 이름.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은 용사요” 미리암의 찬양 가사 내용에 나와요. 지나보니까 주의 이름이 관여했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시행했다는 말은 제자들이 언제 압니까? 처음부터 이거는 주의이름이 했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했는데 거기에 누가 관여해요? 주의 이름이 관여하잖아요. 목사님 관여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관여 안 하면 주의 제자가 아니죠. 관여 안 하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아니고 사도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두 제자가 도망치듯이 엠마오로 내려갔잖아요. 내려가는데 거기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뛰어들었죠. 못 알아봤어요. 왜 못 알아봅니까? 보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뛰어들어서 믿는 거예요. 뛰어들어서. 주님이 뛰어들었어요. 주님이 뛰어들었다는 것은 낙엽지고 하는 이 정도로 뛰어든 것이 아니에요. “니가, 니 혼자 살도록 나는 내버려두지 않겠다. 너는 니 맘대로 사는 양이고 나는 너를 구원할 책임이 있는 목자기 때문에.” 그러면 양은 “나는 믿었습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갈 길로 갔습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면서 목자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제가 주일 낮에 설교 할 때, 철저하게 개인구원에 집착해야 하고, 자기 거룩만 자랑질 해야 되고, 비슷하게 했잖아요. 자기밖에 모르고, 그건 안 가르쳐줘도 평소에 하는 행위가 그 행위에요. 툭 치면 나오는 그 행위가 자기밖에 몰라요. 왜 다른 집은 수돗물이 나오는데 우리 집은 왜 안 나오는데? 이거잖아요. 이거. 갑자기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 이론이 어디서 나왔는지 날아가 버렸죠. 왜 다른 집은 수돗물이 나오는데 왜 안 나오느냐 말이죠. 그럼 성령이 “니 왜 범사에 감사 못해?” “그거는 이론이고요. 실제로 화나잖아요?” 그래서 수돗물이 안 나와서 보니까 고장이 났어. 돈 한 십 만원 나갔는데, 수도 고치려고 온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거는 예상 못한 일이잖아요. 사도바울의 전도가 그런 거예요. 사도바울의 전도가. 절대로 사도 이름으로 구원한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 이름으로 구원한 적이 없어요. 항상 사도가 있는 곳에 누가 개입한다? 주의 이름이 개입하죠. 개입해놓고, 오늘 본문 14장 13절을 보세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제 납득이 됩니까? 아, 결국은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니가 한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 내가 개입했다. 주님의 이름이 개입했기 때문에 네가 한 그 모든 것이 주님이 개입해서 한 일이 돼버려요. 홍해가 갈라진 것 예상 못했습니다. 결국은 갈라지게 됐습니다. 근데 홍해를 처음부터 다시 돌려봅시다. 홍해로 가지 말고 샛길로, 아스팔트도 있지만 좋은 길로 가게 하시면 왜 안 됩니까? 제가 질문 드리는 겁니다. 가로막힌 홍해로 가지 말고,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었거든요. 근데 왜 그 길로 안 가고 홍해로 가게하십니까? 다른 길로 가면 나의 이름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그래요. 뭐가 개입이 안 된 셈이에요? 주의 이름이 안 된 셈이에요. 물론 내가 가면서 주의 이름, 주의 이름 찬양하면 되잖아요. 그거는 주의 이름이 아니에요. 내가 주의 이름 불러 원인이 되게 되면, 주의 이름 부른 어떤 결과가 나올 거라는 것을 누가 생각한다? 잘못된 나의 믿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잘못된 믿음이라고 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또 그럼 목사님 우린 잘못된 믿음 안 하고 옳은 믿음 하면 되잖아요? 이래 나오지 마세요. 벌써 제가 열 번도 더 이야기했는데, 이래 나오지 마시고 잘못된 믿음을 행하세요. 주의 택한 백성은 주의 이름이 개입하고, 지옥 갈 사람은 그건 나한테 묻지 마세요. 개입 안 하면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헛된 믿음 하다가 지옥 갈 수밖에 없죠. 실컷 교회 다니고, 실컷 주의 이름으로 하고, 지옥가고. 세상에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어요. 예수님 제자로 뽑혀가지고 지옥 갔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활용하신다니까요.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에 내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떤 누가 나를 굉장히 억울하게 한다. 이럴 때 어떤 대처를 해야 될까요? 오늘 이거 알았는데, 이거는 실습문제입니다. 실습문제. 이론이 아니고 실습문제. 누가 굉장히 억울하게 한다. 직장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억울하게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거예요? 답변을 기다리는 내가 잘못된 거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뭐와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까? 천국과 지옥. 다른 말로 하면 처소 있는 사람과 처소가 아예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 그럼 어떤 사람이 나를 억울하게 한다면, 지금 그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느냐 하면 지옥 안 가도 이미 지옥에 있음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럼 지는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되죠. “나는 이래서 지옥 간다.” 지금 이러고 있는데, 이 사람들 그렇게 하도록 하게 해주세요. 나는 이래서 지옥 간다고 하는데 마음대로 하게 해주고 욕 할 필요 없다고요. “여러분들은 행해서 구원받습니다.”라고 하면 마음껏 지옥 가는 행동을 하게 해주라 이 말입니다. 해줘요. 그리고 그 하는 그 이야기가 우리는 납득이 돼요? 안 돼요? 납득이 되도 너무 잘 돼요. 왜? 같은 한통속이니까. 똑같은 한통속인데, 지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한 똑같은 인간인데, 다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의 이름이 개입되어 있으니까, 아! 구원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구나! 근데 이 통 안에서 모든 일이 누구 이름으로 시행된다? 주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한시도 노시는 법이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에게 행악질하고, 우리를 억울케 하는 모든 일도 다 어디서 나왔다? 주께 나온 행위에요. 그래서 니가 그런 일들을 보거든 지옥은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지옥이 있다는 것을 니가 목격하는 의미로 생각하면 돼요. 그렇다면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놓고 오늘 본문 13절을 읽어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 원인자에 누가 들어가죠? 이 원인자에? 여기 원인자로 누가 들어가죠? “너희가” 들어가죠. 그럼 이 원인자는 누굽니까? 제자들이죠. 그럼 13절로 제자들이 구원받았습니까? 구원 안 받았습니까? 13절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십자가 없으면 구원 됩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십자가 없으면 구원 돼요? 변화산에서 그 사람들 왜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돌아가시는지 그거 물어보러 왔죠. 그럼 이 말씀 14장 13절로 제자들이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아이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사람들의 처소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렇게 해놓고 예수님이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로 가고. 제자들은 떠나버리죠. 그래놓고 다시 성령이 오면 이 본문을 다시 보라 이 말입니다. 주께서 던진 모든 말씀이 분명히 우리를 주체로 보고 던진 말씀인데 이게 의미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대로 행해봐라 이 말이죠. 행해봐라. 한 번 해봐라. 니 속에 어떤 괴물이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 아까 쉬는 시간에 권세자들을 위해서 하라고 할 때, 로마서 13장에서는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봤어요.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을. 베드로전서에서는 권세자들에게 하라 니가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요한계시록에 가보세요. 그 권세자들이 뭐에요? 짐승입니다. 짐승. 다 세 개를 종합해봅시다. 종합해보면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해서, 복음의 진수, 이 땅에서 복음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복음이 드러나려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가 배신자가 되어야 해요. 배신자인데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해줘야 해요.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죽도록 충성케 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주의 이름이, 성령이 그렇게 몰아넣고 있잖아요. 그럼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촛대를 옮기죠. 그럼 온전한 교회도 옮겨집니까? 옮겨지지 않습니까? 온전한 교회는 옮겨지지 않아요. 그럼 온전한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온전한 교회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정답은 촛대를 옮기리라는 그 말씀을 주의 이름으로 믿게 된 그들이 온전한 교회에요. 항상 주의 이름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이에요. 주님 때문에 생긴 결과물. 내 결과물이 아니라. 그래서 이걸 바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항상 우리에게는 매일같이 단절이라는 것이 주의이름으로 이렇게 개입되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이 개입되면 우리에게는 단절이 주어지는 겁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12절에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이 본문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 당시 제자들이 봤다고 해봅시다. 제자들이 이걸 믿었다 칩시다. 제자들이 여기서 배신할 마음이 있겠어요? 아니면 함께하고 싶겠어요? 세상에, 이런 보너스가 어디에 있어요? 너희들은 내가 하는 것보다 어떤 것도 한다? 더 큰일도 하죠. 아니, 큰일 하겠다는 사람이 배신해요?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칩니까?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여종 앞에서 불 쬔 것이 나오죠. 닭이 운 것이 나오죠. 지금 오늘 본문 말씀 큰일도 하겠다는 사람이, 목숨 바치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저주했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씀을 주님께서 왜 미리 하시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2절 끝에 나와요.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왜 합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이야기하거든요. “너희들이 나를 믿으면 나보다 더 큰일을 한다. 알겠지?” “예.” “너도 알겠나?” “알겠습니다.” “됐어. 내가 너희들 보니까 내 마음이 든든해.”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근데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왜 합니까? 바로 방금 말씀 한 큰일이 너희들 명령으로는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서 이제 본격적으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야, 나는 예수님보다 더 세다. 더 잘한다.”라고 이렇게 하겠어요? 아니면 모든 일을 주의 이름으로 하겠어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이런 이야기를 제가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나를 향한 일이 아니니 걱정 말라.” 이렇게 요약될 수 있어요. 지금 아버지에게로 가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누구 지시를 받습니까? 아버지 지시를 받죠. 그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금 나를 향한 일입니까? 아니죠. 나를 가지고 하는 일이지만 나한테 뭔가 기대를 하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나를 향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신 일을 적용시키는 일이잖아요. 나한테, 우리한테 뭘 얻기 위해서 위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뭘 해도 죄인 중의 괴수잖아요. 철이 없잖아요. 다만 나를 가지고 주님께만 영광 돌리면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는 뭘 하면 안 돼요? 걱정을 하면 안 돼요. 나를 향한 일이 아니니까 부담 갖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돼요? 담담하고 묵묵히. 묵묵히 살면 되잖아요. 어차피 이 세상에서 내 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근데 실제로 일이 안 되면 걱정하잖아요. 걱정할 때마다 우리를 죽여 버리잖아요. 우리를 날마다 죽이고. 걱정 말아요. 그대.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얼마나 찬송가적입니까? 나를 향한 일이 아닌데 우리는 너무 예민해. ‘주께서 나를 벌하려고 했구나. 그래, 헌금 좀 안 했다고 차사고 나게 해서 이십 만원 날려버리게 하고.’ 모든 것을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데. 괜히 우리가 너무 민감하고 예민하게 해가지고. 예민하니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면, “그러면 이케요? 저케요? 이러면 인생 보상해주겠습니까? 이거 하면 들어주겠습니까?” 그거 짜는데 하루 종일 걸려요. 하루 종일. 앞으로 내 미래는 주님의 은혜 받아서 어떻게 풀리는지. 잘 풀리는 집은 화장지고. 그걸 연구하는데 하루 종일 보내요. 내가 저 사람한테 이렇게 해주면 주께서 잘 했다고 뭘 해줄지. 짐 들고 오는 할머니를 밀어줬다. 그러면 두 시간 뒤에 나에게 어떤 행운이 오는지. 이거 연구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징크스라고 합니다. 축구 선수들 수염 안 깎고 개인적으로 뭐 안 하죠. 시험 치기 전에 손톱 안 깎는 사람도 있죠. 이게 터부잖아요. 본색 다 드러났잖아요. 완전히 우리가 미신쟁이에요. 미신쟁이. 앞에 있는 내가 원하는 결과를 따내기 위해서 어떤 짓도 다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우리. 진짜 못돼먹었어요. 그래놓고 그걸 가지고 주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누구 영광입니까? 자기 영광이죠. 자, 13절 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누가 영광 받아요? 아들이 영광 받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일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아주 정확하게 된 것이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정말 걱정 말아요. 그대에요.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누구로 말미암아요? 예수님 말씀 잘 듣는 나로 말미암아요? 아니죠.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 곁에는 성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있다? 주님이 함께 있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 뜻대로? 아버지 뜻대로 주님께서 나를 조종해나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조종해나갈 때에 우리는 항상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 뜻이, 내 고집이 부산물로 계속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부산물로. 거기에 대한 정확한 예를 들라고 하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죠. 증거 대라고 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잖아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를 하는데 어디로 인도하느냐? 물 있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어요. 사람 죽으라는 말이에요? 뭘 유도하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원망을 유도하기 위해서. “아니, 물은 주고 인도해야지?” 그러니까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니까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미리 알고 있는 물과 양식 정도는 챙겨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끔 고기, 양식, 물은 챙겨주겠지. 어떻습니까? 챙겨줬어요? 챙겨줬어요. 어디서? 물 없는 곳에서 물 챙겨주고, 양식 없는 곳에서 양식 챙겨주고, 고기 없는 곳에서 고기 챙겨줬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왜 안 챙겨줍니까? 여러분 냉장고에 보면 물 없어요? 그건 약수터에서 내가 떠 온 거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다 주께서 없는데서 있게 하신 거예요. 근데 우리가 그거는 기본으로 여기고 그건 별로 감사하게 여기지 않아요. 그럴 때는 갑자기 수돗물이 안 나오게 한다든지 해가지고, 물 귀한 줄 이제야 알겠네. 그게 주의 이름으로 수돗물이 안 나오게 하신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항상 목적은 뭐냐 하면 내 영광, 아버지가 아들의 영광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너희들도 예수님의 영광만을 설명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한다고 주의 영광, 주의 영광 노래 부른다고 되느냐, 아니에요. 우리가 죄인으로 살아야 되고,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평소에 하던 것 있잖아요. 잘 하는 것 있잖아요. 이기주의. 그리고 자기자랑, 자기믿음자랑, 자기기도자랑, 자기선교자랑, 자기신앙경력자랑, 꾸준히 지치지 말고 하세요. 아낄 것 없어요. 어차피 인생은 거기서 거기에요. 자랑 안 한다고 하는 것이 더 수상해요. 어쩌면 자랑 안 하고 있다는 그것이 새로운 자랑거리로 구성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보는 것만 믿습니다. 실적만 믿어요. 두 세 사람도 주와 함께 있다. 참 이론은 좋아요. 교인이 두 명인데, “기쁨으로 감사합시다.” 참 이론은 좋은데, 갑자기 두 명 있는데 사십 명 보냈다. 옆에 교회가 돈 문제로 싸워서. “에이, 정말 믿음 좋은 분위기였는데..” “목사님 가라고 할까요?” “가라 할까?” 이런 사람 없어요. “두 사람만 기도했더니만 주께서 더해주셨구나.” 이렇게 해석한다니까요. 그러면 있는 사람까지 사십 이 명 됐죠. 이거 기도하면 사백 명 올 참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온 사람들 중에 오야붕이 설쳐가지고 두 명까지 다 나갔어요. 목사 자기만 남았네. 롤러코스터를 타요. 천국, 지옥을 내려갔다 올라갔다 어지러워요. 주께서 매일같이 흔들바위처럼 흔들어댑니다. 그래도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흔들어대니까 걱정 말아요. 그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걱정한다고 해서 미래가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걱정 안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자, 그렇다면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근데 뭐가 날라 갈까봐 걱정하는 줄 알아요? 목사님 이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잖아요? 참 재밌죠. 왜 기도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십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감사 할 것만 있는데 구태여 기도할 필요 없잖아요. 그럼 기도는 왜 하는 겁니까? 기도하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응답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할 때만 기도해요. 그렇잖아요. IN PUT들어가야 OUT PUT나오고, 입력 들어가야 출력 나오고. 기도 안 하는데 기도 응답이 왔다. 이걸 우리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기도를 안 했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에. 기도 한 적이 없는데 기도의 응답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살짝 짜증이 난다니까요. ‘주께서는 기도 안 했는데 줘놓고 나중에 열 배로 빼먹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걱정이 된다니까요. 공짜 들어오는 것 별로 안 좋습니다. 위험한 거예요. 공짜. 보이스피싱 그 종류잖아요. 그러면 기도는 어떻게 할 거냐, 무시로 기도하고. 사도바울 에베소서 3장에서 기도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들에게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고 길이를 더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니” 간구가 나왔죠. 아까 13절에 보면 기도를 누구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잖아요. 그럼 주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허락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시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내용을 나름대로 넣을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성경대로 합니다. 누구든지 남한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걸 기도제목으로 넣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집어넣어야,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주의 뜻대로 하는 기도죠. 근데 이 사람이 이 말씀을 집어넣은 순간,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모르는 게 돼요. 이 말씀의 뜻도 모르면서 무조건 집어넣었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 이 말씀을 기도한 당사자에게 기도한 대로 되돌리게 되겠죠. 그렇잖아요. “그래. 니 소원이 그렇다면 소원 들어줄게.” “주여 좁은 길로 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팔 걷어 부치면서 “고뤠? 내가 좁은 길 맛을 한 번 보여줄게.”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겁을 내는 거예요. 주의 이름 가운데서 근사한 것 있잖아요. “온유하고 자비롭게 하옵소서.” 이런 것 하는 거예요. 왜? 그런 걸 하게 되면 남한테 무슨 소리 들어요? “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구나. 야 진짜 온유하다. 주께 영광돌리네.”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것 말고 좁은 길로 가게 해달라고 하는 이런 것은 진짜로 응답 받으면 곤란하잖아요. 비록 영생의 길이라 할지라도. 고생길이 훤한데 그걸 왜 자진해서 나갑니까? 진짜 겁이 많아서 온유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또는 권세자를 위해 기도하라 해서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시다. 문재인 대통령 때문에 불교가 확 죽고 갑자기 기독교가 부흥이 되게 해달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사전에 그 본문 내용을 안다고 여겼을 것이 아닙니까?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미리 예상을 하겠죠.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근데 주의 이름으로 개입을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본인이 그렇게 기도한 순교자가 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바로 그 말씀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은 내 이름이 날라 가고 주의 이름만 가득차서 주님께만 영광 돌리도록 나오게 하는 그것이 바로 기도응답입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기도케 했고 응답도 내가 너에게 줬다. 따라서 너는 무시로 기도해라. 내용을 니가 자꾸 점검하지 말고. 이게 맞을까? 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되 응답은 주께서 주의 영광 돌리는 쪽으로 되게 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은 마지막에 뭐로 끝나느냐, 감사로 끝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성령이 주는 기도 응답은 감사입니다. 처음에 할 때는 뭐 불만이 가득해요. “뭐 기도해도 무슨 소용이 있다고 기도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내용을 기도제목으로 하세요. 어떤 사람은 기도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주님 기도할 줄 모르는데 기도하는데 섰습니다. 교인들은 빨리 끝내고 나오라고 하는데, 저도 빨리 끝내고 나가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왜 이런 기도를 못합니까? 우사스러울까 싶어서.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막 설교를 해요. 들으라고. 그리고 어떤 분은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복음내용하고 좀 틀린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오후설교 때 했잖아요. 아슬아슬했다고. 그러니까 사람이 항상 길 가다가 무심코 내뱉는 말도 그걸 기도로 전환시켜서, 우리 자체가 응답입니다. 응답이 뭐냐, 걱정하지마라. 니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같이 산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으로 영광 받는다는 것, 제자들은 이해했다고 여겼습니다. 그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주님 다시 찾아왔습니다. 처소마련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미 처소가 마련된 상태에서 주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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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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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