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14장8절(보고 믿는 것)17051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8절을 보겠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질문이 없으면 변화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질문을 하게끔 해서 그 깊이를 더합니다. 질문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이끌림을 지금 안 받고 있다는 뜻이에요. 끊임없이 질문이 나오는데, 나오도록 주님께서 유도했죠.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이 옛날에 했던 말씀을 자기들은 이해했다고 자꾸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이해를 했다고. 그래야 제자다우니까.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이렇게 그려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이만큼(◯)말씀했으면, 제자들이 이해했다는 말은 그 중의 극히 일부(◔)를 딱 떼어서 이것, 까맣게 색칠한 부분만 떼놓고 전체를 이해했다고 우길 거예요. 우긴다 이 말이죠. 일부만 떼고, “예. 나 이해했습니다. 주님 뜻 잘 알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간다 이 말이죠. 그럼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면 일부만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 알고 있는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근거로 삼아 주님의 그 다음 이야기를 전체로 삼아 이해하려고 또 시도하겠죠. 따라서 질문을 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과 같은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지금 끌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근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알고 있는, ‘나는 주님의 무슨 말씀이라도 다 알아들어.’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질문이 나왔다는 말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말고 더 큰 내용을 주께서 지금 또 쏟아내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질문하기 마련이죠. “나는 이 정도는 아는데 이 대목은 모르겠습니다. 마저 보태주세요.”라는 식으로 질문할 게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건 니가 아는 것 맞고, 근데 더 추가된 이건 몰랐지? 그 정보를 더하면 온전하게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고, 니가 전에 아는 가운데서 질문을 했는데 이 답변을 통해서 니가 알았다는 것도 니가 제대로 안 게 아니라는 근원적인 전복, 뒤집는 것, 근원적인 전복을 반복해요.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근원을 몰라요. 그러면 근원을 모른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자기 삶의 근원이 있을 거고, 이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보자! 잘 살아보자!”라는 이런 투다 이 말이죠. 근데 제자들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죽으러 가시죠.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으러 간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막 농담을 하잖아요. “우리도 죽으러 가자. 잠자러 간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모양이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더란 말이죠. 예수님이 죽으러 가는 이 노선과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근거하고 지금 서로 안 맞습니다. 맞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금 말씀을 툭툭 던지면서 니들이 가는 곳과 내가 가는 곳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니가 목숨을 내놓는다고 할지라고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처소가 없기 때문에 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거는 지난 시간에 했죠. 이게 뭐냐 하면 그 세계관이 단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베드로가 생각했던 주님의 세계고 천국이었는데, 누가 그러한 제안을 한다는 것에 베드로는 자기 사고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못 온다고 하니까 베드로는 아까 이야기한 전복, 뒤집기가 그 뿌리부터 전체다가 뒤집혀지는 그러한 결과를 낳게 된 겁니다. 여기에 빌립이라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했죠. 이 대목을 제가 길게 설명하겠습니다. 이거는 정말 길게 설명이 돼야 돼요. 아버지를 보여 달라, 이게 사실은 빌립 개인적인 희망이었겠어요? 아니면 열두 제자 그들의 다 희망이었겠어요? 다들 가만히 있는 것 보니까 누가 대신 자기의 속마음을 용감하게 예수님에게 먼저 이야기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하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이미 알고, 보고 있으니까. 자기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니까, 자기들은 모르고 예수님만 아는 그게 있는데, 그게 뭐냐,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는데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니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과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벌써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익히 알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니까 익히 알고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처럼 아버지도 짜짠~하고 나타나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이것이, 이 범위가 확장이 되겠죠. 예수님을 알고 있는 이것이 만약에 OK라면, 옳다면,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같이 알게 되면 이것도 뭐가 되느냐 OK, 옳은 것이 된다 이 말이죠. 이런 식으로 보여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럼 제가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오늘 한 시간이 될지, 끝날 때까지 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지금 하는 것은 이들이 눈으로 보면서 세계관을 형성할 때 어떤 식으로 형성했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빌립이 이야기했다는 말은 나머지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제자들끼리 싸웠을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것 보니까 빌립이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한 이야기 같아요. 빌립이 대표해서 한 이야기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날 우리들도 이 빌립 같은 사고방식으로 지금 같이 가고 있다고 봐야 해요. 빌립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게 뭐냐 하면 눈에 보면 믿고 눈에 안 보이면 믿기는 믿는데 좀 힘들다. 그렇게 되겠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보다 눈에 보고 믿는 것이 굉장히 좀 확실하다. 네. 들어오세요. 늦게 오시면 다시 새로 하는 원칙이 있잖아요. 진도 얼마 안 나갔어요. 요한복음 14장 8절을 하고 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그 이야기한 거예요. 8분 동안 한 이야기를 5초 만에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여주지 않고 믿는 것보다 보여주고 믿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또 믿기에 더 수월합니다.” “보여 주면”, 원인이죠.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는 “믿겠나이다.” 부사를 붙인다면 “든든하게, 또는 확실하게” “보여주면 더 믿어지겠나이다.” 이거는 나중에 도마한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문이 잠겼는데 오시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죠. 그러면 보고 믿는 것이 믿음의 최종상태가 아니고 더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의 중간과정이며, 중간과정을 넘어서서 보지 않고 믿는 경지까지 나아가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거예요. 그러면 보고 믿는 것에서 보지 않고 믿는 것까지 가려면 뭐가 형성돼야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 내용이 우리한테 되풀이 되는 겁니다. 되풀이 된다는 것이 단절이에요. 단절. 보고 믿는 이것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못 믿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 보았기 때문에 백퍼센트 이게 믿음이 아니고 가짜일 확률이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과거에 내가 기도해서 병 낫고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 그게 거의 백퍼센트 가짜로 믿을 확률이 굉장히 높은 거예요. 실지로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언인데, 방언기도를 예상했는데 방언이 터졌다. 그 방언 터진 것, 진짜 주님한테 얻어터져야 돼요. 백퍼센트 가짜에요. 계속해서 했었다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돼요? “이건 컵이야. 이건 책이야.”라고 평소에 보고 믿는 것과 그 구원의 세계가 단절이 일어나야 되는데, 단절이라는 경험이 없이 그냥 쭉 미끄러지다가, 참기름 발라놨는지 쭉 미끄러지다보니까 어느새 보이지 않는 곳에 왔다. 이래버리면 중간에 뭐가 빠져요? 끊어짐, 부정, 단절, 요한복음 14장 내용이, 제자들이 겪었던 내용이 하나도 여기에는 섞여 들어가지를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이건 줄곧 나는 보이니까 믿는다, 보이니까 믿는다, 보이니까 믿는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뭐 꿈속에 봤다고 이래 나오다가 결국은 워낙 보이는 증거들이 많이 나오고 쌓이다보니까 이제는 그 힘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거기서 생산되었다고 우길 수가 있어요. 양이 많다고 질이 됩니까? 그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에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계급을 엎어버리면 그게 공산주의 사회가 된다고 했어요. 역사는 뭐냐 양이 쌓이면 이게 질로 달라진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속담에 그런 게 있잖아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이런 것. 계속 시도하면 언젠가 뭐가 되겠지. 방언 안 터진다고? 천 번 주기도문 외워봐. 방언 터져. 그런 요령이 있잖아요. 요령이. 습관이 누적되면 새사람이 됩니까? 습관이 누적되면 이게 자동화가 돼요. 사람이 사물이 되고 기계가 돼요. 주기도문 빨리 해보세요. 주께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기도문 기계가 돼요. 랄랄랄~기계 된다니까요. 여기서 그럼 이런 질문을 해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아버지를 안 보여줬잖아요. 근데 보여주면 어때요? 어떻게든 천국을 데려갈 백성 같으면 보여 달라고 하는데 소원대로 보여주고 “봤지?” “예.” “아버지 이제 됐습니다. 볼 일 보세요.”이렇게 해서 건지면 되잖아요. 왜 아버지를 안 보여줘요? 여러분 그 질문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질문을? 그렇게 보여 달라고 하는데,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주고 천국 보내면 되지. 보여 달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이 나쁜 짓 하려고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믿듯이 아버지까지 잘 믿어보려고 하는데, 얼마나 생각하는 것이 가상합니까? 얼마나 착해요? 근데 굳이 왜 아버지를 안 보여줍니까? 아버지를 보여줬으면 예수님 배반도 안 할 텐데. 저는 그런 의문이 드는데 여러분들도 그런 의문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보실 때 성경해석의 첫걸음이 뭐냐 하면, “나는 주께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첫걸음이에요.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이러면 이건 수상해요. 이거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아담이 범죄 해서 우리가 범죄 했잖아요. 그러면 성경해석은 범죄한자답게 해석하고 믿어야 돼요. 여자는 튕기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튕겨야 돼요. “주께서 뭐 처소 있어야 간다고요? 그럼 잘 됐네. 가기 싫었는데.”하고서 한 번 튕겨보시기 바랍니다. “나 안 갈래. 나는 지옥갈래.”이렇게 한 번 튕겨봐야 해요. 튕겨보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몇 번 튕기다보면 자기 본성에 딱 합당해요. 자기 죄성에 딱 합당해요. 십일조도 늘 하다가 안 하게 되면 찝찝한데 몇 번 안하다보면 굉장히 감사할 일이에요. “아이고, 내가 그동안 십일조라는 마귀 짓에 말려든 것을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이렇게 굉장히 감사하게 돼요. 사람의 모든 본성은 죄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쪽으로 이미 거기에 꽉차있어요. 처음에는 어색해서 죄를 억누르는 식으로 행동하지만 자꾸 버릇이 되게 되면 자기 죄 지어놓고 그걸 변명조로 나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잘 믿겠습니다. 십자가 믿겠습니다.” 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위선 또는 가면, 그런 걸로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 종류에요. 뭔가 내가 이렇게 주님 앞에 잘 보이면 앞으로 올 어떤 나쁜 액운을 미리 사전에 때울 수 있는,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어떤 면역체계 비슷하게, 미리 한 방 맞아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진짜 전염병이 와도 안 걸리는 것 있잖아요. 만약에 일주일 후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한다면 새벽기도에 가서 꿇어앉아서 하는 거예요. “주님. 저 꿇어앉았습니다. 제 무릎 피 나오려고 합니다. 지금 피나는 것을 받아주시고 일주일 뒤에 피 터지는 일은, 요걸 보시고 그건 안 나오게 하옵소서.”라는 심리 메커니즘이 막 작용하는 거예요. 애 고3을 앞두고 갑자기 부모들이 교인이 되어가지고 완전히 교회에 몸 바치는 사람처럼 되죠. 수능이 끝날 때까지만, 점수 나올 때까지만 그래요. 뭐 수능 끝나고 그냥 끊어버리면 또 니가 얍삽하게 그런다고 하니까, 또 수능발표 나면 그때 두고 보자고 이래 나오기 때문에, 수능점수 나올 때까지만, 안심 푹 놓을 때까지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보여 주옵소서”라고 할 때 평소에 인간에게 뭐가 장착이 되어 있느냐 하면, 보면 이해가 되고 그 이해덩어리를 자기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믿음이라고 그렇게 자기가 간주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그냥 자연스러우니까. 자, 그러면 이제 찬찬히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왜 보면 그렇게 믿음이 생길까요? 왜 보면 이해가 생기고, 안 보면 의심과 추측, 이런 것이 왜 난무할까요? 지금 질문하는 제가 나쁜 사람입니까? 나한테 돈이 이십 만원이 있다. 이십 만원이 있다고 딱 이야기를 하니까, 내 통장에 이십 만원이 있으니까 십 만원 빌려달라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통장 한 번 보자고 이러죠. 왜 말을 안 믿어줘요? 왜 보는 것이 안 보는 것보다 확실한 이유가 뭡니까? 이게 왜 확실한데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안 보여줬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 인간들아! 너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이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아버지가 안 보이죠. 똑같은 아담의 육신, 마리아의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력이 얼마에요? 한 5.0이 됩니까? 어디 어벤져스, 영웅이에요? 뭐 좋아봐야 2.0이고, 한쪽은 1.5고, 마리아가 시력이 안 좋으면 유전적으로 0,5가 나올 수가 있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요. 연약한 육신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뭐 예수님이 남보다 멀리보고 하는 그런 것은 없어요. 똑같아요. 그러면 이 제자들이 믿으려면 자기들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는 방식으로 교체가 되어야 돼요. 지금 어디고 간다? 아버지에게로 간다. 그런데 거기에는 너희를 위한 처소가 없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에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그 코스 말고 다른 코스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다른 코스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way,길이요. 너희들이 길이 아니고 바로 내가 길이다. 어디로 갑니까?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하니까 빌립이 하는 말이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이래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빌립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있으면 자기가 보고 가겠다는 거예요. 근데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 자체가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그 문제를 제가 언급을 했어요. 왜 보면 확실하고 안 보면 확실하지 않느냐? 그걸 여러분들이 한 번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걸 왜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되는데, 이걸 왜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이걸 생각 안 하게 되면 우리가 건성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셈이 되어버려요. 철저하게 해석을 못하고 건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건성으로 해석하기 전에 성경을 한 번 보시고 평소에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을 했는가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시편 104편 30절,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28절도 비슷한 이야기고요. 29절도 보면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이걸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람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앞에 보면 모든 자연 전체에 주의 영이 함께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B,C.3세기경, 서기로 한다면 290-208년경에, B,C.기원전이니까 그리스도가 오기 전이에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스토아철학이 있어요. 스토아철학이 그 시대에 있는데, 스토아 이전 사람이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고, 그 전 사람이 플라톤인 거예요. 그 전에는 소크라테스고. 이 스토아철학은 사도행전에 나오죠. 에피쿠로스가 라이벌로 되어 있어요. 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신이 전 세계를 다 만들었다는 겁니다. 신이. 자, 이제부터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이야기할 테니까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해보세요. 이 우주는 신이 만들었어요.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신이 만들어낸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의 그 논리가 당연한지, 문제가 있는지를 여러분들이 한 번 따져 보라는 겁니다. 천지를 만드신 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물건 속에 자기가 만든 흔적과 증거를 거기다가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둘로 나누었어요. 스토아학파가 능동 원인과 수동 원인으로 분류시켰어요. 이거 능동 원인은 작용하는 것. 이거 수동 원인은 작용 받는 것. 이렇게 본 겁니다. 작용하는 것은 신이고 작용 받는 것은 세계 모든 피조물이에요. 이렇게 분류를 했습니다. 능동, 수동으로. 그리고 능동, 수동할 때 작용하는 것에 모두 집어넣은 것을 가지고 퓨뉴마라고 했어요. 퓨뉴마는 헬라어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영’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영’이라고 하는 것이 이 퓨뉴마에요.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만드시고 호흡을 집어넣은 그 호흡이 퓨뉴마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신이 만들었고 신이 그들에게 신의 형상을 집어넣는데, 그 활동을 누가 한다고요? 하나님의 영, 또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이 이걸 이렇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을 찾는 방법은 이제 됐어요. 뭐냐 하면 이것들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버리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든 법칙이 마련된다는 거예요. 그 법칙이 뭐냐 하면, 법칙이 여러 가지가 되죠. 뜨거운 것이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오고. 뜨거운 것은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내려오는 것을 누가 했다? 퓨뉴마가 한 거예요. 퓨뉴마(영). 아까 여러분들이 시편 104편 30절 봤죠.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신이, 영이 모든 창조물을 만들어놓고 호흡을 거기다가 집어넣고 다 움직이도록 했죠. 아까 시간관계상 다 보지는 못했지만 앞에 보면 악어가 나오고 있어요. 26절,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절,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들이 죽고, 살고, 자라나고, 하는 그 모든 것은 누가 하신다? 신의 영이 그들에게 호흡도 주고, 호흡도 빼앗고, 자라게 하시고, 뭐 식물, 동물 가릴 것이 없이 다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능동 원인, 수동 원인이라고 했는데, 근원이라고도 봐요. 능동 근원, 수동 근원. 그래서 스토아학파 이 사람들은 신을 믿자. 신을 믿되 자연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부딪히는 모든 자연물 속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어요? 신의 영이 들어있으니까, 우리는 거기에 맞추어서 절제하면서, 욕심내지 말고, 너무 과도하게 살지 말고, 자연스럽게 신이 이끄는 대로 인도 하에 살자. 이게 스토아학파의 세계관이에요. 제가 아까 먼저 질문을 드렸죠. 이들의 논리에 문제점을 발견하라고요. 이거 칼빈주의의 주권사상이 아니에요? 칼빈의 주권사상?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걸 모르니까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면 스토아학파 이 사람들은 이단이고 죽일 사람들로 알고 있는 거예요. 이들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교회의 사고방식과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자, 질문을 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뭔지를 제가 분명히 질문을 했습니다. 이들의 논리 자체적으로 문제점이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는 자연만물이 그들의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죠. 이게 문제라 이 말입니다. 이게 문제거든요. 그럼 이 사람들이 사도바울과 복음으로 이야기할 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바울서신에도 나오고. 스토아철학이 나와요. “모든 것, 우리가 기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은 신의 입김으로 신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너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잖아.” 하고 사도바울이 그들의 사상에 대해 운을 떼면서 공격해버려요. 오늘 본문에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했죠. 그 말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 안 믿고 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잘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이거는 제자들뿐만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한계가 눈에 보이는 것은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왜? 눈에 보이는 것은 신이 만들었으니까. 그러면 신을 섬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제키고, 그냥 멍청하게 쳐다보는 것, 진짜 이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스토아학파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스토아학파는 다른 것 다 버리고 산에 와서 기도하자고 하는 이런 것이 아니에요. 모든 자연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성찬, 만찬 상인데 그걸 통해서 뭘 뽑아내면 돼요? 하나님께서 저 벌들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앵~하고 움직이게 했는가? 저 들소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풀을 먹게 하셨는가? 그걸 알면 알수록 그들은 신에 대한 충성도가 점점 더 높아가는 거예요. 왜? 많이 아니까. 뭘 많이 아니까? 하나님이 하신 그 작업과 그 내막에 대해서, 더, 더 자기 안에서 누적이 되니까, 그냥 하나님 안에 푹 파묻혀 산다. 이래 보시면 돼요. 푹 파묻혀 산다. 길에 지나가다가 돌멩이 찼어도, “주님이 주신 돌멩이를 내가 찼구나. 가슴 아팠어요.” 이런 식으로. 이 정도에 대한 믿음. 이거는 누구나 모든 인간에게 이미 본성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거예요. 이 스토아학파 이런 주장이 그 시대뿐만 아니고 모든 시대에도 이게 거부감이 없어요. 이게 뭘 닮았느냐, 불교에요. 불교 중에서도 화엄경이에요. 화엄경. 화엄경 또는 법화경이에요. 특히 화엄경 같은 경우에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달이 떴는데 거울을 탁 깼다. 거울의 파편 조각조각마다 달이 들어 있어 달을 비춘다. 이 세상에 많은 강이 있지만 어떤 강도 전부 다 달을 비춘다. 이 말은 모든 세상만사에는 부처의 마음이 전부 다 담겨있다. 스토아학파는 뭡니까? 모든 세상 만물에 신의 마음이 다 들어있다. 그 신의 마음은 노는 마음이 아니고, 우리보고 찾아오라는 마음이 아니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신이 노는 것이 아니고 퓨뉴마, 퓨뉴마의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영. 시편 104편을 봤죠. 그 영이 친히 지금도 이들을 호흡도 취하고 자라게 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세계관입니다. 종교관이기도 하고. 하나의 인생관이기도 하고. 자, 이들의 문제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스타트, 출발을 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이 되니까,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예수님 제자들의 주장이나, 오직 성전이 있으니까 우리는 택한 백성이라고, 성전이 눈앞에 보이고 거기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니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메시아가 감람산에 설 것이라고, 누가 뭐래도 감람산에 서 있잖아요. 감람마운틴이 있잖아요. 감람마운틴. 그 감람마운틴에 두 다리 턱 걸치고 스가랴의 예언대로 오실 거니까. 그때 올 때 뭐로 본다? 두 시선으로. 눈 나쁜 사람은 안경 쓰면 되고, 눈이 약간 부시면 선글라스 쓰면 되고. 봐가지고 “어! 메시아 왔네!” 메시아 온 것을 보고 믿으면 어디에 간다? 구원받고. 또 더 괜찮은 볼거리는 뭐냐 하면 주께서 휴거하러 오실 때, 몸을 삐쭉하게 해서, 이걸 제가 치킨 런Chicken Run이라고 했는데, 닭이 럭비공처럼 되는 것이 있잖아요. 그처럼 삐쭉하게 해가지고 휴거 책에 보면 나오잖아요. 사람들을 막 잡아 땡겨서 끌려올라가잖아요. 그걸 눈으로 목격해서 진짜 성경말씀 요한계시록 그대로네! 라고 믿게 되면 그거 좋은 믿음이에요? 나쁜 믿음이에요? 글쎄, 그 믿음이 사단 났다니까요. 그 믿음이 바로 진짜 믿음을 가로막는 마귀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이. 눈으로 보고 믿는 믿음이.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요? 그들이 그렇게 잘 믿는데, 예수님한테 아버지를 잠깐만 보여 달라고 하면 “자, 봤지? 아버지 이제 볼 일 보러 들어가세요.” 왜 이렇게 못 해주냐 말입니다. 보고 믿는 것이 그들의 한계인데. 적어도 그 한계를,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 한계를 하나님 쪽에서 해결해줘야 그게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보고 없는 믿음 내놓으라고 하지 말고. 똑바로 하라고 닦달내지 마시고. 친절에 친절을 더하시면 되잖아요. 친절한 금자씨는 아니지만 하여튼. 정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오늘 밤에 잠잘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든지. “춘자야!” 뒤에 바이브레이션을 막 넣어가지고 “춘자야~~~니가 고생이 많구나. 나 때문에. 조금만 견디면 내가 언제 몇 월 몇 시에 감람산에 두발 딛고 올게.” 이렇게 계시를 주게 되면 얼마나 좋아요. 그것만 떴다 하면 유튜브에 계시 받은 어린애. 일곱 살 어린애가 계시 받았다. 오십 넘은 아저씨가 계시 받았다. 뭐 유튜브에 그런 것이 쫙 깔려있습니다. 그런 것이. 코카콜라 목사부터 해서 펩시콜라 목사까지 전부 다. 거기에 천국 갈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식의 믿음은 왜 주께서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뭘 누락시켰기에 그런 겁니까? 보고 있기에, 주께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보고 있기에. 보기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보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보기 때문에. 이제 차분하게 한 번 해볼게요. 아까 스토아학파에서 보는 것부터 출발했죠. 보는 것부터 출발하면, 이제부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진짜 쉬웠어요. 보는 것부터 출발하게 되면 인간은 남을 보기 전에 누굴 먼저 첫째로 봅니까? 거울을 통해서 누굴 먼저 봐요? 나를 먼저 보죠. 그러면 거울 앞에 보이는 나는 믿을만해요? 안 믿을만해요? 믿을만하죠. 나의 존재성은 내가 눈에 보이고 만져지니까 내가 여기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는 이것이 나는 없어져도 무방하다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안 나오고, 있음 자체를 죽어서도 어떻게 천국까지 집어넣을까 하는 의지가 더 강렬하게 있겠죠. 어렵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믿는다고 할 때에 빌립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믿는다고 했을까요? 빌립이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끼고 자기 자신을 포기 안 하는 자기 사랑에 의해서 믿는 겁니까? 빌립이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같이 뛰어들지 않았죠? 피했잖아요. 피한다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죽는 예수님보다 뭐가 더 귀하다? 내가 더 귀한 거예요. 그럼 평소에 내가 나를 바라볼 때 그냥 맨숭하게 바라본 것이 아니고, ‘이 귀한 것, 이 사랑스러운 것, 내가 니 지켜줄게.’라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거예요. 거기서 뭐가 나왔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그 믿음이, 예수님이 요구한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평소에 나를 지키겠다는 그 신념의 표상이에요. 신념의 연장선이라니까요. ‘믿어서라도 나는 나를 지켜 줄게.’라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아주 최고 어려운 것이 나와요.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할 때, 나를 지키겠다는 나는 누구고, 지켜주겠다는 나는 누굽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점선으로 보이지 않는 내가 따로 있어야 돼요. 따로 있어서, 그 나를 여기 신체로 있는 나하고 일치를 시켜줘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점선으로 있는 나는 희망을 갖고 소망을 가져요. 지금의 이 꼬라지 보다 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그런 나를 내가 그것을 시도하겠다는 거예요. 시도하겠다는 것은 이 숨어있는 내가 그만큼 기대를 하는 거예요. 기대를. 소망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이미 그렇게 되어진 내가 소망한 것이 아니고, 나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내가, 소망한 대로 내가 나를 다루고 있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알아들으세요. 내가 나한테 기대를 건다는 말은 이미 내가 어느 정도 되고, 한 달에 수입이 칠백 만원 정도 되고, 칠백 만원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내가 있을 것 아니냐는 말이죠. 근데 그 나는 누가 만들었냐는 말이죠. 지금 칠십 만원 받는데 칠백 만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할 때, 육백 삼십 만원은 결함이 되죠. 결함이 되면, “육백 삼십 만원 벌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해야 돼.”라고 누가 누구한테 지적을 합니까? 보이지 않는 내가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나에게 계속 지금 충동질하는 거예요. “바보야! 뭐 하고 있어? 맨날 집에서 잠이나 자지만 말고 더 일해서 돈 더 벌어야지.” 내가 자꾸 나보고 충동질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일 것 같으면요, 그런 생각이 안 들죠. 그걸 자의식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자의식은 정박아, 이 사람들은 자의식이 없어요. 어린애라든지, 아이큐가 30이면 자의식이 없어요. 이걸 내가 해야 하는 행동인지, 아닌지 그런 것도 없어요. 허허허 그냥 웃고 돌아다니는, 그걸 사자성어로 동네바보 아닙니까? 여자 같으면 꽃 꽂고 “나무에 눈이 와요?” 누가 욕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유진박 같은 사람들. 바이올린은 잘 켜는데 바보 같아요. 또 우리나라에 유명한 피아니스트. 세계대회에서 2등까지 한 사람 임동혁. 임동민, 이 사람은 계대 교수까지 했는데,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부모가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부모가. 천재가 돼야 한다는 이게 막 밀려와가지고. 여러분은 천만다행입니다. 잘하는 게 없어서 천만다행이에요. 바보가 되면 희망도 없어요. 근데 희망들을 가진다는 말은 현대인들은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는 니 나와! 숨어 있지 말고 정체를 밝혀! 내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니 나와 봐! 니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니? 도대체 니를 누가 만들었어? 바로 그걸 모르는 거예요. 인간은 그걸 몰라요. 진짜 나는 내 뒤에 항상 숨어 있어요.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 책에 나오는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암소가 들어오죠?”라고 이야기하니까 어떤 아이가 손들고 하는 말이 “큰 암소가 어떻게 내 작은 마음에 들어와요?”라고 질문했단 말이죠. 그거 일리가 있는 질문이죠. 암소는 크고 나는 작은데 어떻게 암소가 내 마음에 들어옵니까? 참 그거 설명한다고 선생님이 애 먹었을 거예요. 뭐 이미지라고 해도 이미지가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돼요? 그런데 마가복음 5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거기에 귀신 들린 청년이 나와요. 귀신 이천이 돼지 한 마리당 하나씩 들어갔다고 치면, 이천의 귀신이 한 청년 안에 다 들어있었어요. 그 청년 안에. 그런데 그 청년이 “나는 귀신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그냥 보통 평범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내용은 이상하지만. “예수여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청년이 뭐 행동은 이상하지만 진짜 외국인처럼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그 청년을 봤을 때, 그 청년을 어떻게 봅니까? 이게 어려운데, 우리가 남을 볼 때에, 평소에 내가 나를 다루었던 그 방식으로 남한테도 그대로 같은 적용을 해버려요. 그 애도 나처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짐작하고 같이 이야기를 해버린다 이 말이죠. 그렇게 돼버리면 귀신 이천 마리 들어있는 청년을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은 보고 믿겠다는 이것이, 보는 것은 다 이해되고, 보는 것만 믿을 수밖에 없다는 이 지시를, 뭔가 수상한 귀신같은 존재가 들어앉아가지고 인간에게 자꾸 그걸 시키는 거예요. 니가 안 보이거든 믿지 말고 보이거든 믿고, 관념으로 믿었거든 나중에 눈으로 확인할 그때까지 믿음을 보류해놨다가, 관념으로 했고 추상으로 했던 것이 실제로 딱 보이거든 그때 ‘아하! 믿는 것이 맞구나.’ 이렇게 확정하라고 자꾸 누가 시키는 거예요. 누가 시키겠어요? 마귀가 시키는 거예요. 빌립은 자기 안에 마귀가 들어있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합니까? 니가 목숨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너는 내가 가는 곳에 갈 수 있다? 없다? 갈 수 없죠. 못 가면 믿음이 아니에요. 그냥 못 가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못 가는 이상 그의 믿음, 소망, 사랑이 전부 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아니, 천국도 못 갈 믿음, 소망, 사랑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지 자랑합니까? 베드로가 그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그 베드로가 그 말을 알아들으려면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죠. 자, 그렇다면 한 번 봅시다. 아까 그 스토아학파에서의영은 출발점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모든 눈에 보이는 만상 속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께서 그렇게 움직인다고 했죠. 그러나 베드로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성령이 어디서 왔습니까? 모든 만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한 분, 누굽니까? 오직 아버지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오잖아요. 그래서 성령 받은 베드로가 무슨 중심으로 설교를 해요? 누구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하면서 모든 인간에게 귀신들렸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요. 너희들이 보는 거나 안 보는 거나, 인간들이 안 보이는 것도 사실은 보는 것을 재료로 해서 이걸 추상적으로 약간 연장을 한 것뿐이에요. 그걸 외삽이라고 하는데, 외삽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대구강의 때 했거든요. A에서 B로 통하는 이 논리를 연장시켜서 C까지 동일한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범위를 외부 쪽으로 넓힌다고 해서 외삽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지가 보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이거 보니까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믿음으로 통하겠지, 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 외삽이에요. 이게 뭐냐, 이걸 가지고 두자로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 지금 이 시대에서 방사성동위원소를 할 때 500년의 측정이 잘 되니까 이걸 지구 초창기에도 방사성동위원소가지고 연대 측정하면 동일하게 되겠지. 이걸 외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구나이는 45억년. 우주나이는 137억년. 얼마 전에 또 바뀌었어요. 137억년에서 109억년으로. 들쑥날쑥 지 맘대로에요. 빅뱅이 있다고요? 빅뱅을 안 믿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주가 빅뱅한다. 전부 다 외삽이에요. 전부 다 종교교리에요. 종교교리. 아무 증거 없습니다. 블랙홀이 있다고요? 블랙홀을 본 사람이 없고 사진 찍은 사람이 없습니다. 블랙홀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은 현미경으로 보고, 실험실습으로 보고, 모든 게 보고부터 시작해서 보고, 보고, 보고....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스토아학파의 제자들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은. 그 과학에 근거해서 경영학, 인문학, 사회과학, 법학, 전부 다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져서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쭉 나오는 겁니다. 전부 다 빌립의 제자들이죠. “보면 믿겠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으로 ‘기다려라. 니가 보고 믿는 것이 얼마나 니 믿음이 아닌 것을 성령이 오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보고 믿는다고 했기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그 죽음을 내용으로 해서 찾아오신 영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 십자가 영이라고 하거든요. 십자가 영으로 오십니다. 십자가 영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죽은 사람이 되죠. 그럼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뭐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 전에 누가 살았어요? 귀신이 살아가지고 나한테 지시하죠. “그 정도 믿음 가지고는 안 돼. 기도 더 해야 돼.”라고 시키는 거예요. 십자가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걸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걸 죽여 버리면 우리의 몸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돼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사람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첫째 시간의 결론이 뭐냐, 이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존재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꽃이 있고 존재한다가 아니라, 모든 세상만물은 지옥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인가와 연계되어 있는 겁니다. 꽃은 핀다가 아니라 저 꽃이 피는 것과 천국과 지옥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 개구리가 운다, 개구리가 우는 것하고 천국과 지옥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전부 다 새로운 배치, 새로운 관계망이 형성되는 것. 그건 성령께서 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뒤에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