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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 의존교회 170512a (전시가치)-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디도서

서울 의존교회 170512a (전시가치)-이 근호 목사 디도서 2장 1절부터 6절을 하겠습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긴 말씀인데, 이 말씀이 아무리 길어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가 돼요. 어떻게 정리가 되느냐 하면 전부 다 지정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전자제품 같은 것들을 조립할 때 부속품이 제자리에 딱딱 꽂혀야 되겠죠. 제자리에. 이 위치, 제자리에 꽂힌다는 말이죠. 그러면 1절에서 6절까지 나오는 그 자리에 어떤 항목들이 있느냐 하면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 뭐 다 나왔네요. 늙은 남자는 이래야 해야 되고, 늙은 여자는 이래야 해야 되고, 젊은 남자는 이래야 되고, 젊은 여자는 이래한다고 나와 있죠. 그런데 이게 하나의 모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여기에 나를 집어넣으면 안 돼요. 나를. 주께서 이런 일을 하는 늙은 남자를 그 위치에 넣으실 거예요. 이렇게 하는 늙은 여자를 이렇게 넣고, 그렇게 되게 하실 겁니다. 젊은 여자 되게 하실 겁니다. 젊은 남자 되게 하실 거예요. 그럼 이름은 어디에 있느냐? 이름은 어디서 오느냐? 없어요.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저건 나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고 내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말씀이 나로 하여금 저런 자리에 적당하게 칩을 넣듯이 딱딱 꽂으실 겁니다. 나는 여기에 있고 나는 저 중에 어느 자리에 갑니까? 라고 시작하게 되면 그 자체가 말씀하고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주님은 말씀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여기에 있어도 우리를 없는 존재로 간주해버려요. 없는 존재기 때문에 지킬 것도 없어요. 뭐가 있어야 지키죠. 없는데. 주인공이 없고 주체자가 없는데 뭘 지킵니까? 죽은 해골이 뭘 지켜요? 좀비 영화가 미국에서 왔을 때, 여러분 좀비가 뭔지 아시죠? 살아있는 시체. 좀비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그 좀비가 무서운 이유는 좀비가 사람을 안 죽입니다. 좀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람을 먹죠. 죽이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먹어버린다는 것이 무서워요. 먹어버린다는 게. 저 사람이 나를 죽인다는 것이 무서울까요? 저 사람이 나를 삼켜버린다는 것이 무서울까요? 영화에 나오는 좀비는 칼 들고 “죽어라!”하면서 죽이고, 총 들고 두두두 쏘아서 죽이고, 또 딴 데 가서 죽이고 하는 이런 존재가 아니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삼킨다는 말은 내 몸의 전부를 자기 몸의 일부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말하죠. 전환시키는 것. 좀비한테 삼키는 것이 왜 이렇게 무서운가 하면 삼킴을 당하게 되면 내가 나를 지켜왔던, 평소에 꾸준하게 나는 내가 지킨다는 이것이 힘 있는 좀비 앞에서는 이게 소용이 없잖아요. 그게 기분 나쁘죠. 여자애들 지금은 두 살이 안 돼서 모르는데, 네 살이나 다섯 살 쯤 되게 되면 그때부터 애들이 자의식이 강하게 발달합니다. 발달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엄마가 함께 바깥에 외출하자고 한다든지, 교회에 가자고 해서 이거 입으라고 원피스를 내놓게 되면 애가 막 울어요. 왜냐하면 그 옷을 입기 싫거든요. 입어주면 되는데 그 옷을 못 입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옷 입는 것을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내가 결정해야 돼요. 내가. 그러면 애가 안 나가면 안 나갔지,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 침해받는 것을 새로운 두려움으로, 새로운 공포로 인식하는 겁니다. 그게 자아가 점차 커져가는 증거에요. 밥을 못 먹고 해서 인생이 힘든 게 아니고, 인생이 힘든 이유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이렇게 설계하고 내 뜻대로 세상이 움직여 주는 게 너무나 당연한데, 이게 내가 희망하는 세상인데, 그게 안 될까봐 조마조마하고 겁나는 겁니다. 그게 안 될까봐. 아까 질문할 때 우연, 필연을 이야기했잖아요. 우연, 필연이라는 개념자체가 있다는 말은 앞에 뭐가 전제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으매 세상은 나를 따라야 된다는 이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이게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나중문제고, 내 마음이 ‘그래,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나는 이 세상을 따라야 돼.’라고 선뜻 그런 마음이 본성적으로 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청소년 애들을 보게 되면 “이거, 이거 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 지시를 의도적으로 위반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내가 나답다는 것이 비로소 그 순간에 확인되기 때문에 그래요. “열시까지 오너라!” 근데 사람 심리가 이렇습니다. 착한 딸이 되가지고 늘 학교 마치면 6시 되기 전에, 저녁을 집에서 먹기 위해서 딱 오는데, 그 사실은 엄마가 알고 있어요. 근게 그걸 모르는 아버지가 혼자 착각을 해가지고 “요새 젊은 애들이 밤늦게 다닌다는데 너는 앞으로 무조건 10시 전에 들어와! 내 지시다.” 이러면, 지금까지 애가 착해서 꼬박꼬박 6시에 들어왔잖아요. 근데 아버지가 너는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너는 내 딸답다고 하면 몇 시에 들어오겠어요? 9시 55분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뭐냐, 성경해석은 주체를 의식하면서 주어지는 겁니다. 명령자를 느끼도록 말씀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명령자를 느끼도록 한다고 했죠. 인간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명령을 느끼면서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명령을. 세상 법이, 아까 제가 아버지가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다면, 그 딸은 평소에 한 번도 안 빠지고 6시 이전에 들어왔는데, 딸이 이렇게 착실한 것을 미처 모르고, 아버지 자기 혼자 항상 12시 되어서 들어오니까, 괜히 자기 딸을 뒤늦게 간수한다고 “우리 딸은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돼!”라고 하는 순간 그 딸은 6시 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9시 55분까지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객관적으로 따로 있고 주체적인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법이 있는 자를 늘 가름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구성하게 되어 있다고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처럼. 그럼 이 말은 뭐냐, 법이 없는 곳에는 뭐도 없어요? 법이 없는 곳에는 주체도 없어요. 법이 없는 곳에는. 어린애가 16개월에서 24개월쯤 되게 되면 자아가 형성돼요. 16개월에서 3살까지 자아가 대충 형성된다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하는데, 그때 자아가 형성되도록 누가 외부에서 자극을 주는 자가 있어요. 그게 부모에요. “쉬 할 때는 여기에서 하면 안 돼. 저기 가서 해야 돼.” “식사 할 때는 흘리면 안 되지.” “가려먹지 말고 콩도 먹어야 돼.” 3살 때까지 계속 잔소리가 주어집니다. “손님들 왔을 때는 그렇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점잖게 앉아있어야 돼. 인사할 때는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 꾸벅해야지.” 또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아니고 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말도 교정해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지시할 그게 없다면 그 애는 주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짐승하고 똑같이 돼버려요. 그냥 본능만, 계속 본능대로 하는 거예요. 어릴 때 부모가 옆에 있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두뇌 피질이 그때 굳어지고 형성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시와 명령을 해줘야 돼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뭐가 되느냐 하면 후천적 맞춤존재자가 돼요. 후천적 맞춤 존재. 어디에 맞춤 존재냐 하면 그 가정에 합당한, 그 가정의 질서와 역사적인 전통과 관습에 합치된 아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삭은 날 때 며칠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까?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죠. 그것은 인간의 모든 창조위에 권한 밖을 보여줍니다. 창조 7일 밖에서 8일 째 만들어져요. 사람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로마서 4장에서는 이삭은 없는 데서 생겼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거예요. 처음에는 없는 데서 생겨난 것이 이삭이고 나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삭을 바치라고 하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그냥 빈손으로 가도 돼. 가면 수풀에 양이 잡혀있을 거야. 그 양 잡으면 돼.”라면 될 텐데. 근데 지금 제물 없어가지고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하고 그 양 잡아서 제사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그거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제사 못 받아서 환장하신 것이 아니고. 그냥 양이 어디에 있으니까 양 잡아서 드려라고 해서 기능적으로 그냥 제사 드리면 됩니다. 그게 아니고 뭘 바치라고 했습니까? 양을 바치라고 하지 않고 이삭을 바치라고 했단 말이죠. 이삭을. 이삭을 바침으로 해서 뭐가 부각되느냐 하면 바친 자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고 바쳐진 제물이 하나님과 관계성을 성사시키는 겁니다. 그 제물이. 어떤 제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 그런 존재만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살아있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과 관련될 수 없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과 관련을 맺으려면 너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 앞에서 너 자신을 제거해야 돼요. 제가 강의 처음 할 때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늙은 남자는 이래야 되고, 늙은 여자는 이래야 되고, 젊은 남자는 이래야 되고, 젊은 여자는 이래야 된다고 했죠.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합니까? “자, 나는 젊은 여자한테 해당이 되니까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는 나한테는 별 볼일 없고, 나는 젊은 여자에 해당되는 그 법만 나한테 합치시키면 나는 성도가 맞다.”라고 이렇게 성경해석하고 싶죠.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평소에 하던 대로 주체는 뭘 가지고? 법을 가지고 자기 주체를 새롭게 정리하는 겁니다. 젊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좀 봅시다. 4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절에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젊은 여자들은 여기서 뭘 해야 된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역할을 하라고 늙은 여자보고 그렇게 교훈하라고 하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럼 젊은 여자 같으면 뭐만 하면 돼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돼요. 그렇죠? 자기는 아직 늙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이 되죠? 그러면 젊은 여자는 몇 년 생부터 젊은 여자로 쳐줘야 됩니까?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성경을 해석할 때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했는데, 여러분 다 잊어버렸죠?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죠. 늙은 남자 없고, 늙은 여자 없고, 젊은 남자 없고, 젊은 여자 없어요. 없습니다. 아니,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 자체가 없어요. 뭐 사람이 있어야 이걸 지키지. 이걸 지킬 사람이 없는데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있고, 여기 주체자가 있고, 법이 있으면, 그러면 내가 법을 지키면 지금보다도 향상된, 경건된 신앙인이 될 거라고 이렇게 착각을 하는데, 주님의 모든 말씀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 인간에게 준 거예요. 지킬 사람이 없게 만들어요. 우리는 내가 먼저 있고 법은 나중에 있는데 성경은 반대에요. 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법에 합당한 사람은 주께서 따로 만들어서 여기에 칩처럼, 키보드 판의 칩처럼 딱딱 집어넣어버린다고요. 그러면 늙은 남자 역할이 생기고, 늙은 여자 역할이 생기고, 젊은 남자 역할이 생기고 젊은 여자 역할이 생기는데, 그러면 여기에 있는 자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반드시 경유하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나오면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부 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입장에서 이 역할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지체라는 입장에서. 근데 기존의 주체는, 주체가 있고 법을 지킴으로써 이 주체를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하나님의 경건으로 함양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보통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 이거는 먼저 내가 여기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에 있고 난 뒤에 법이 있으면 내가 이 법을 지키고 나면 훨씬 더 개선되고 나아지는 인간이 된다, 라고 보통 사람은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답습을 해온 사람들이에요. 부모로부터 맞춤아이가 된 거에요. 그게 사람의 양심이 되고 선악체제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어느 집에 가서 있더라도, 그 아이가 거기서 잠시 숙제를 하고 있더라도 그 아이는 그 집의 아이가 아니고 지가 태어난 자기 집의 아이로서 숙제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제가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애라서 몇 번씩 이 아이의 예를 드는데. 비 오는 날 버스를 탔는데, 비가 올 때 애들이 버스에 올라탔어요. 그럼 우산을 어떻게 할까요? 그냥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 들고 카드 찍고 들어오잖아요. 대부분의 애들이 그래요. 근데 한 아이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산을 착착 접어요. 제가 평생에 그런 애를 처음 봤어요. 그럼 그걸 누구한테 배웠어요?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가정교육을 그렇게 한 거예요. “니가 비 올 때는 니가 비 안 맞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뒤처리할 때 남한테 피해되는 것을 생각해라.”이미 그런 것을 훈련받은 거예요. 같은 버스 안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은 자기 집안에서 맞춤된 대로 그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빗물이 줄줄 흐르게 해서 남한테 피해주는 행동을 하죠. 그처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주위에 뭐가 착착 쌓이고 있다? 법이 쌓이고 있고, 그 법은 그 가정의 질서에 만족스럽게, 어른들, 기성세대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거기에 딱 맞춘 법입니다. 거기에 맞춤 가족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의 가족이 되죠. 그게 안 되면 “호적 빼라! 나는 니 같은 자식을 둔 적이 없다.”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나는 더 이상 못 키우겠다. 니 같은 자식이었으면 나는 낳지도 않았다.” 이런 과격한, 심한 말로 욕을 막 얻어먹고 하죠. 그런 식으로 양육 받고 훈계를 받는데, 백날 양육 받고 훈계를 받아봤자 그 사람의 주체를 쫙 쪼개보면 뭐가 들어있어요? 법이 들어있죠. 그것도 둘둘 감긴 채. 저는 그것을 인간의 나이테로 봅니다. 인간의 모든 나이테는 법으로 완전히 꽉꽉 차있어요. 법으로 차있어요. 그래서 누가 옆에서 시비를 걸면 “나는 이런 것 때문에 욕 얻어먹은 적 없다.”라고 이렇게 저항이 나오는 겁니다. 어릴 때 부모가 어른이 돈 주면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 된다는 것을 안 가르쳐주면 그냥 받죠. 근데 다른 쪽에서 어른이 돈 줬으면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라고 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은 적이 없다고 하죠. 왜? 그게 법이니까. 나의 주체 안에는 당신과 다른 법의 구조로 짜여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 성경을 들이대면 이 성경을 지키려고 할 거예요. 지켜버리면 이 사람은 누구한테 쫓깁니까? 결국 마귀한테 쫓기는 거예요. 계속 정죄 받아요. 1절에 봅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2절,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그럼 늙은 남자를 60대로 봅시다. 60대 아저씨 불러 놓고, “당신은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면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으로 온전케 했습니까?”라고 물어보세요. “아니 이 호로자식이 어디서 어른 붙들고 함부로 하냐?”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인간은 자기의 몸 처리를 어떻게 해야지, 이게 인간의 전부에요. 몸 있다. 처리한다. 그냥 처리하는 거예요. 뭘 정당화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법과 경험과 체험들을 정당화하면서. 늙은 남자를 한 열 명으로 해놓읍시다. 열 명으로 해놓고, “당신은 경건하며 근신하며 절제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믿음과 사랑과 인내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요. 교회 다니는 사람 열 명 모아놓고 물어보면. 근데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라고 하면 다 달라요. 왜냐하면 처리과정에서 자기 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이건 비겁한 변명이고, 이게 결국 뭐냐 하면 위선이죠. 위선을 부리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것은 이런 인간이 있다고 해야 해요? 없다고 해야 해요? 이렇게 위선을 떠는 이런 인간은, 그런 남자는 나이만 들었지, 오늘 본문 디도서 2장에서 말하는 늙은 남자한테 해당이 돼요? 안 돼요? 해당이 안 되죠. 해당이 안 되면 늙은 남자는 없는 거예요. 그럼 주님께서는 뭘 주느냐, 명령을 준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명령자를 주죠. 명령을 줘버리면 명령을 받는 자가 있고 명령을 주는 자가 있죠. 그럼 주체가 몇 명입니까? 달랑 두 명이죠. 두 명 나왔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겠어요? 누가 주체자냐, 하는 경쟁이 생기겠죠. 이 주체자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냐, 예수님이 이 몸 되기 위해서 말씀을 줬느냐, 아니면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잘난 내가 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줬는가에 경쟁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겠어요? 생기겠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말씀 주시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말씀인 겁니다. “늙은 남자야! 니가 이 말씀을 나름대로 지켰다고 우기느냐? 그렇다면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지금 제가 고함을 지른다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고요. 누가복음 18장을 봅시다. 1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 하나이다”이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자칭 자기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전에서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의인이라고 한 것은 뭘 했느냐 하면 12절에 나와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십일조라는 율법이 있으니까, 이런 율법대로, 법이 있으니까 법을 지키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은 법만 봤지 법을 준 명령자가 누군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자기 관심사는 이 명령을 따라서 현재 갖고 있는 자기 몸을 완벽하게 의로운 변신을 시키는 데에 지금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법주세요. 내가 지켜서 착한 사람이 될게요. 천당 갈게요.”이거라니까요. 이거. 그거잖아요. 십일조 언급을 왜 합니까? 평소에 지금 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 바리새인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은 십일조를 합니까? 안 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해요. “옛썰!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럼 십일조를 잘 하고 있다고 우기니까, “그럼 당신은 죄인이요? 의인이요?”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합니까? “나는 법대로 살았으니까 의인이죠.” 이 말은 나는 착한 늙은 남자고, 나는 착한 늙은 여자고, 나는 착한 젊은 남자고, 나는 착한 젊은 여자라는 이 말입니다. 법대로 했으니까. “아니, 내가 법대로 안 했어요? 법도 없는데 제가 십일조 하는 겁니까? 먼저 십일조라는 법이 있으니까 자기가 했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고 십일조라는 법이 있으니까. 법을 지키는 겁니다. 법을 지키는데, 최종 판결자, 순회 재판자가 나타났죠. 순회 재판자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나는 피고를 죄인으로 간주하노라”탕! 탕! 탕! 끝났어요. 근데 다른 사람 보세요. 어떤 사람은, 13절에 “세리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근데 이야기가 바리새인부터 먼저 나오죠. 죄인부터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에 죄인부터 먼저 나와서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니는 의인이다.”라고 하게 되면 바리새인이 그걸 보고 그대로 뒤따라서 할 거예요. 왜? 바리새인은 지금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야 됐기 때문에. ‘내가 주의 법으로 무장하게 되면 지금보다 점점 더 향상되는 그런 존재로 변형될 것이고, 이런 식으로 가게 되면 백퍼센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자신을 만들어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세리가 갑자기 왜 의인이 되었습니까? 자기 안에 잘난 게 있어서 죄인 되었습니까? 잘난 게 없다는 것이 발견되어서 죄인 되었습니까? 자기 안에 잘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죠. 알았는데, 그게 왜 의인이 되는 겁니까? 자기 안에 잘난 것이 없으면 지옥가야지 왜 의인되어 천국 가는 겁니까? 바로 천국과 지옥은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어떻게 답변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판결자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명령자에요. 명령자. 오늘 디도서 2장 1절을 다시 봅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너라는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 젊은 여자를 어떤 특정인 보고 말한 것이 아니고,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위치라고 했죠. 어떤 위치? 말씀의 위치. 말씀의 위치는 뭘 보여주느냐 하면, ‘역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다.’라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위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명령할 위치에 있습니다. 명령자입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증거 하는 겁니다. 성도의 기능은 예수님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괜찮은 늙은 남자, 늙은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처음 예수 믿을 때 한 번 알고 그 다음부터 안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이 말씀이 계속 적용돼야 돼요. 전에는 늙은 남자한테 적용된다고 생각해서 젊은 여자인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말씀이, 나중에는 늙은 남자한테 했던 그 말씀이 바로 지금 젊은 여자인 나에게도, 나의 이야기로, 나의 죄를 지적하는 이야기로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돼요. 왜? 그래야 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순환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따라서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디도서 2장 본문의 말씀은 기존의 어떤 인간을 죄인 되고 의인되게 하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서 없애버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을. 왜 없애버리느냐? 말씀을 주면 지키려고 하니까. 말씀 주면 지켜서 지킨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받으려고 설쳐대기 때문에. 이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독자적으로 자기가 어떤 관찰의 위치를 따로 설정한 것처럼 그렇게 행사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 났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말씀가지고 그 인간을 날마다 죽여야 되죠. 아까 아브라함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했을 것 같으면 모리아산 어디 수풀에 가면 양이 잡혀있을 거니까 잡아서 드리라고 했을 것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니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명령자가 누굽니까? 명령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죠. 그럼 그 순간이 명령이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요? 명령을 준수함으로써 자기가 신앙이 있음, 신앙 테스트에 합격자, 라는 생각을 갖고 싶죠. 나중에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가를 지상의 언어로 표현했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거냐를 아브라함에게 명령하는 형식으로 미리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거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작업에 활용당한 거죠. 활용. 이용당한 거죠. 아브라함은 하나의 도화지고 그림은 누가 그리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는 거예요. 이삭이, 사람이 죽어야 되고, 그 죽음의 의미는 양이고, 대신하는 양, 죄인을 대신하는 양으로서 하나님 나 자신이 죽어야 그 다음에 복은 아래로 점점 더 전수된다는 것. 그런 기능으로 앞으로 내가 일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실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의 인생을 담보한다고 하는 건데, 거기에 합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브라함의 본인 뜻이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그 실어진 아브라함의 언약의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언약의 내용이 나오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자기 인생은 만날 저지당하고 블로킹당하고, 그 블로킹 당한 것을 계기로 아브라함이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또 다시 펼쳐지고, 이러한 것이 아브라함언약, 그 다음 이삭언약, 이삭이 등장하고, 이삭은 자기 원하는 사람을 밀어주려고 하다가 이게 어떻게 됩니까? 원치 않는 자식에게 복을 다 밀어주죠. 원치 않는 자식에게. 이게 바로 희생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삭이 죽어야 이삭의 하나님이 산다 이 말이죠. 니가 살아버리면 니가 원하는 맏이 에서에게 모든 복을 다 줘버려요. 주님께서는 이삭을 사용하면서 이삭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려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그대로 적용시켜버립니다.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려요. 허수아비는 어떤 허수아비냐, 허수아비란, 자기 나름대로 주의 뜻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 허수아비에요. 그냥 허수아비가 아니고. 부지런히 말씀 지키겠다고 애쓰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주님의 일에 훼방자요, 방해자로, 포행자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죄인 중의 괴수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도바울은 그걸 늘 고백해요. “나는 이 땅에 꼭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 내 소원이 있다면 나는 빨리 죽는 거다. 하지만 살든 죽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내가 살고 싶어서 살려 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필요에 의해서 더 살아서 복음 전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그럼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말은 “그 정도로 나는 별 볼 일이 없는 인간이고 그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일은 누가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에게 오늘 묻는 것은 그겁니다. 바르게 살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래? 이걸 묻는 거예요. 성경 보고 ‘나는 개뿔도 아니네.’ 이걸 느낄 거예요? 아니면 ‘아, 나는 살아서 남들에게 신앙인이라는 것을 과시해야지.’라는 재미로 살래요? 어느 쪽이에요? 어느 쪽이냐 이 말이죠. 그게 어느 쪽이냐가 결판난 것은, 아까 뭘 봤습니까? 누가복음 18장 봤다고 했죠.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바리새인이 먼저 나오죠. 자랑질 많이 했죠. “십일조 했습니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기 힘든) 십일조 했습니다.” (하기 힘든)이 들어가요. “하기 힘든, 그 귀하디귀한 돈을 십일조로 냈습니다. 구제했습니다.”라는 것을 먼저 끄집어내죠. 주께서는 바리새인을 지옥 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세리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죄인일 뿐입니다.”라고 하죠. “니가 가라! 천국.” 왜? 너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누굴 보여줘요? 아무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그냥 구원의 손길, 그걸 아까 명령자라고 했는데, 그 명령자를 그대로 백퍼센트 다 보여주는, 훼방하지 않고. 왜? 본인은 꺼져있으니까. 주님께서는 “꺼져줄래!” 꺼져줄래, 라는 말은 나가놀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거품이 되어서 꺼지라는 이 말이거든요. 바른 인간하지 말고.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은 평생 두고두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이 되는 겁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법이 아니고, 뒤에 누가 계시다? 법 제정자, 명령자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뭐가 되면 돼요? 죄인이 되면 되는 겁니다. 어떤 죄인? 못 지키는 죄인이 아니고 지켰다고 우기는 죄인. 못 지키는 죄인은요, 이거는 아주 직무유기입니다. “이 말씀 지키세요.” “이근호 목사 말대로 하면 우리는 죄인이라 못 지킨다며? 나 안 지킬래.” 좋다. 참 핑계 멋지다. “나 안 할래. 죄인이라 안 할래. 나 기도할 줄 몰라. 나 선교할 줄 몰라요. 나는 죄인인데 뭐.” 그거는 죄인이 아니고 얍삽한 거예요. 죄인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최선을 다하여 내가 이렇게 말씀을 잘 지키다니!’그게 죄인의 자리에요. ‘이 정도 하면 얼추 남보다 더 신앙적이잖아.’라고 착각하는 자리가 죄인의 자리라니까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죠. 그게 죄인의 자리에요. 그런데 그걸 전부다 배설물로 여긴다? 누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내가 지킨 모든 의를 배설물로 여기는 거예요. “저리가! 저리가! 아휴 냄새나! 이 잘난 나야 꺼져줄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용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근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반 이야기했어요. 요 본문에서 반 이야기했어요. 얼추 다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반 이야기했습니다. 왜 반 이야기했다고 하느냐 하면, 자 2절 봅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그러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원칙을 적용시켜보면 늙은 남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죄인인데 의인되게 했다면,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늙은 남자로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내 버려요. 늙은 남자의 기능을 하게 돼요. 나이와 관계없이. 일곱 살 먹은 늙은 남자가 등장합니다. 열두 살 먹은 소녀가 늙은 남자로 등장해요. 등장해서 뭘 하느냐,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을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절대로 내가, 주체가 했다고 하지 않고 다른 주체를 내세워버려요. 그 주체가 누구게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리스도가 내뱉은 말씀을, 그리스도만이 이 말씀을 합당하게 해버려요.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믿음이 뭐냐, 라는 규정을 내가 하는 겁니까? 주님이 하는 겁니까? 주님이 하는 거죠. 이게 어려운 거예요. 성경대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하게 하는데, 믿음이 무엇이냐? 사랑이 무엇이냐? 인내가 무엇이냐? 라는 그 규정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한 나에게 그걸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해버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믿음이 되도록, 사랑이 되도록, 인내가 되도록. 그럼 믿음, 사랑, 인내는 하나의 성령의 열매로써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오죠. 예수님에게서. 그러면 성도는, 늙은 남자가 된 열두 살 아이는,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주님 앞에 부름을 받게 되면 이 아이는 이 믿음, 사랑, 인내라는 말씀으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가게 됩니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아이는 뭐가 되느냐, 죽은 자가 돼요. 쓸데없는 자, 쓸모없는 자, 찬송가에 나오죠. 아~하나님의 은혜로~♬ 그 다음에 뭐죠? 이 쓸데없는 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줄곧 쓸데없는 자죠. 쓸데없어야 이 성도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믿음이 나오고, 예수님의 사랑이 나오고, 예수님의 인내가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나와요. 믿음, 사랑, 인내의 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찬양으로 된 것이 그 내용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인내,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만 나타나야 돼요. 따라서 이런 과정, 절차는 인간은 못합니다. 주께서 인간을 아주 짓밟아놓고서 나오죠. 주일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쥐어짜면 뭐가 나온다고 했어요? 피가 나오죠. 그 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그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함께 쥐어짜버리면 그리스도의 피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피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요. 이 차이점을 잘 알아야 돼요.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체가 예수님이 될 때 믿음이고, 내가 주체가 되면 그건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인내도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Do you understand?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사랑 줬다고 보답하지 마세요. “아이고, 나에게 사랑을 주시다니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본인이 하면 보답이 돼요. 내가 얻어 챙길 것이 있으면 보답이 되는데, 챙길 것이 없는데 무슨 보답이 되겠어요. 어떤 보답도 할 이유가 없어요. 주님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흥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사랑을 줬는데 니는 뭘 줬느냐?” 주께서 뭘 받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뭘 받아요? 벼룩의 간을 빼먹지. 뭐가 있어야 빼먹지. 빼먹을 것도 없는데, 이미 주님이 다 가져갔는데 뭘 빼먹어요. 다 가져갔는데, 국세청에서 와서 빨간 딱지 다 붙여놨는데 뭘 줘요? “이렇게 국세청까지 와서 너를 몽땅 망하게 했으니까 보답해라.” 망하게 했는데 뭘 보답을 해요. 보답이 안 되죠. 헌금이라는 내용은 구약에서 나와야 돼요. 신약에서 백날 들여다봐야 헌금이라는 의미가 안 나옵니다.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헌금이에요. 헌금은. 마치 설날 때 세배하는데 구십 넘은 노인네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노령연금 한 이십 만원하고 어디서 해서 한 육십 만원밖에 없는데 뭐가 있겠어요. 근데 대학 들어 간 손자들이 죽 앉아 있다 이 말이죠. 대학생 되었으니까 한 십 만원씩 주고 싶은데 돈이 있어야 주죠. 그때 뒤에서 아이들의 엄마, 딸이죠. “엄마! 봉투 받아서 줘라.” “그래.” 딸한테 받아서 손자들한테 주고. 이거 뭐 다보고 있는데. 자기가 준 게 아니죠. 딸이 준 것 가지고 했죠. 그러면 그 세뱃돈의 주체는 뭐냐 딸이 준 돈이니까 딸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경유해서 주가 되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죄인이 없으면 주가 안 돼요. 죄인을 계속 가지고 놀아야 돼요. 계속 죄인을 앞장세우면서 예수님은 계속 주가 되시는 겁니다. “니 대신 내가 죽었어. 니 알았지? 니 대신 내가 죽었어. 니 알고 있어? 니 대신 내가 희생을 했어. 니 알고 있어?” 그게 바로 주의 주 되심의 원칙이고, 오직 세상의, 우주의 원칙은 그 원칙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모든 돌아가는 우연이고 필연이고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죄인과 더불어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이 사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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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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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