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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88강-창 21장 22-27절(아비멜렉과의 언약)170517-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88강-창 21장 22-27절(아비멜렉과의 언약)1705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1장 22-27절입니다. 구약성경 26페이지입니다. 창 21:22-27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오늘 본문 내용에 있어서 아비멜렉이라는 토박이 종족의 추장이 아브라함을 먼저 만나러 오는 이유에 대해서 잘 납득이 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의 땅이고 아브라함은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될 사람이라는 것은 뻔히 그들도 잘 알고 있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탁을 누가 했느냐 하면,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부탁을 했지요.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는 잘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니까. 별 충돌 없이, 상충되는 일 없이 원만하게 그랄 땅에서 살 수 있다 싶어서 그랬는데 그동안 무슨 사건하나 일어났습니다. 아비멜렉이 겁도 없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려고 했지요. 사실은 사정도 모른채 그랬지요. 그러다가 혼이 난 거예요. 그 집안 전체 여자들이 임신을 못해서 대가 다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아비멜렉은 식겁한 거예요. ‘잘못 건드렸구나. 저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겠구나. 배후에 누가 있다. 배후에 아주 막강한 분이 계시다. 선지자 같다.’ 그런 생각에 도달해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했더니 아브라함이 과연 기도를 했더니 그 집안 여자들이 치료가 되어서 임신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들이 치료해서 아브라함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비멜렉이 비골이라는 자기 군대장관을 대동하고 나타났어요. 이 사람들이 왜 찾아오느냐 하는 겁니다. 이들이 찾아오는 것과 하나님의 이 땅에 내려진 그 약속의 내용이 더 심화되고 더 깊어지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아비멜렉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맹세를 하게 돼요. 27절 마지막에 언약을 세우는데, 23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고 언약을 세우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기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 같은 경우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 언약이라고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언약에 대해서 논외가 되는 거예요. 끼어들 자격도 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여기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아비멜렉과 언약이 맺어지고 맹세가 이뤄집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개의 이질적인 요소가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약속인데 여기서 약속 주는 자가 있고 약속을 받는 자가 생겨요. 그러면 약속 주는 자와 약속 받는 자 사이에 똑같은 질의 약속이 그대로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변치 않는 약속이 그대로 아브라함에게 도달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방민족이, 외부인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요. 이게 우리가 언약을 생각할 때 갖고 있는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먼저 다가선 것도 아니고 그 쪽에서, 이방민족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다가와서 언약을 세워버리면 아브라함이 이질적인 아비멜렉과 세운 언약과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과연 차이가 나는지, 아니면 동일한 언약의 확장인지, 우리가 그걸 생각해야 되거든요. 처음에 우리가 생각한 언약이라는 것은 순수한 내용 그대로 순수하게 도달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우리의 잘못된 선입관인 것을 창세기 이 본문을 통해서 수정이 되어야 됩니다. 약속 줬다, 약속 받았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했다, 나는 구원받는구나. 이게 우리의 선입관인데,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안돼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당황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면서요?” “천국가지.” “그런데 왜 예수 믿는데도 순하게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살기가 팍팍하고 믿음이 떨어지고 시험이 오고, 왜 이런 혼동이 일어납니까?” 이렇게 한다면 언약의 내용에 있어서, 구성에 있어서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는 순수한 것 너무 좋아한다. 하나님 순수, 나 순수, 그래서 언약이 맺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이 오해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여, 당신은 훌륭한 선한 선생님입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킬 정도로 한 선함 합니다. 당신도 선하고 나도 선하고 우리는 같은 유이기 때문에 내가 십계명 지키는 여기에 뭘 더 보태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 시비를 걸어버립니다. “네가 날 보고 선하다고 하는 그 선함자체를 뜯어고쳐야 해. 그것이 잘못된 거야. 네가 선하다고 내가 좋아할 줄 아나? 네가 내뱉는, 네가 입에서 토해내는 그 선함은 전혀 선함이 아니고 너를 망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잘못된 개념이라는 말이지요. 처음부터 그 부자청년은 예수님과 이질적인 거예요. 그렇다면 마태복음 19장에서 그 이질적인 내용, 주님 따르지도 않고 지옥 갈 사람을 왜 거론해 놓았는가? 그게 거론이 되어줘야 할 이유가, 예수님 옆에 있던 열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평소에 따라다니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부자청년이 영생 얻는데 실패로 끝남으로 말미암아 놀라기는 누가 놀랬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열 두 제자가 놀라버려요. 부자청년은 떠나버리고 나머지 남아 있는 의문점을 질의하는 것은 제자들 몫으로 돌아온 겁니다. 당사자인 부자청년이 떠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제자들이 부들부들 떠는 거예요. 구원받는데 걱정이 되어서.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부자청년이 하는 행위가 열두 제자가 평소에 하는 행위를 그냥 대변해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합격이라면 그러면 열 두 제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간 우리는? 뭔가 구원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잘못 정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걱정이 되어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부자가 천국 못 간다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만큼 어렵다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라는 원초적인, 평소에 궁금했는데 차마 말 못했던 근원적인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의 답변은 아주 단호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의 결론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라고 하면 잘 와 닿지 않을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과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 관계를 푸는 첫 걸음은 아비멜렉이 이질적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서로 질이 달라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모든 각 개별자가 분산되어 있다고 봅시다. 각자 자기 자리에 분산되어 있을 경우에 아브라함이 있어도 관심두지 않습니다. 관심 둘 필요가 없어요. 각자 자기인생 살면 되니까요. 분산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분산, 또는 이산, 흩어져 있다, 산재되어 있다. 또 인접한 사람, 근접, 가까이 접촉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하고? 언약의 사람하고. 이게 바로 아비멜렉이지요. 아비멜렉 말고 주위에 다른 종족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은 분산된 사람들이에요. 각자 자기인생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마주쳐서 인접한 거예요. 그게 만남입니다. 언약은 이론상 순수한 하나님이 순수한 내용을 순수한 나에게 주신다, 가 아니라 이 지상에서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갖고 있는 언약에 대한 오해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개선해나가는 효과를 허락하십니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라고 자부했다가 주께서 붙여준 인접한 사람, 연접한 사람, 여호와께서 만나게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생각한 것은 상상적인 것이고 허구적인 것이고 실제 언약은 내가 하나님을 쳐다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만남을 통해서, 그것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안 통하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통해서 ‘나는 뭐야?’ 자기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언약의 내용이 구체화되고 점점 더 그 내용이 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합시다. 우리나라 고려나 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신은 고정된 신이에요. 인간들은 태어나면 모두 자기 안정화 작업에 나섭니다. 사는 것이 안정적이기를 원해요. 안정적일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따라서 신을 믿되 고정적 신을 믿는데 옛날 우리나라에 용왕이 있었고, 산신이 있었고, 칠성신이 있었습니다. 용왕은 물을 다스리는 신이고, 산신이란 흔히 아는 산신령종류, 마을에 오래된 고목나무에 칭칭 감는 것, 그 산신은 위대한 영웅이 죽어서 산신이 된다는 설이 있고 산신이 마을의 고목나무에 붙어서 마을의 안녕에 효과를 주는 겁니다. 칠성신이란 하늘의 북두칠성이에요. 북두칠성을 쳐다보면서 국가나 마을의 장래에 대해서 점치고 안녕을 구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안정화작업과 관련되어 있어요. 사람이 고정적으로 살 때 마음에 평화를 느낍니다. 안식을 느껴요. 아비멜렉은 그랄 지방의 토박이에요. 잠시 아브라함의 침입, 언약의 침입이죠, 그 아브라함의 침입 때문에 흔들렸어요. 흔들렸기 때문에 그 아브라함과 같이 거주하고 있는 이상은 함부로 건드리면 큰 탈이 나니까 옛날 하는 방식대로, 아브라함이 없을 때 안정화작업을 했던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라면서 정치적인 협상을 제시하는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당신에게는 막강한 뒷배 하나님이 있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에 비해서 열등하기 때문에 일단 당신에게 고개 숙이고 들어간다. 하지만 나는 토박이니까 나의 권리도 보장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동등 되게, 좋은게 좋다고, 아예 우리 사이에는 서로 싸우지 않기로 맹세를 하자는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과 아브라함이 가면서 주변에 인접한 이방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느꼈던 점, 그리고 아브라함언약 때문에 평소에 사는 방식이 어떠하다는 것이 전부 다 노출되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게 되면……, 전도가 인접 아닙니까? 만남이니까 만나게 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쪽에서 이야기를 하지요. “나도 교회 다니고 예수 압니다.”라고 하면서 그 뒷말이 뭐냐? “예수님 때문에 인생 참 행복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비멜렉 같은 사고방식을 드러내요. 주님 때문에 점점 더 안정화되고 사는 것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아니었으면 그게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처럼 들리겠지만 21장 오늘 본문을 봄으로써, ‘아, 저게 지옥 가는 사람의 고백이구나.’가 들통 나는 거예요. 진짜 아브라함언약의 내용은 모르고 유사언약, 자기가 노리고 있는 것, 자기가 노리고 있는 바를 추가해서, 예수 믿는 행위를 추가해버리면 안정화를 더 굳히는데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평소에 나는 늘 내 안정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하나 미처 빠트린 것이 있다. 뭐냐?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복 받고 천국 가서도 복 받는다는 그것을 놓쳤구나. 그러면 그것을 하나 추가해서 얹으면 되는 거예요.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종교생활이거든요. 오늘 본문 내용의 취지가 거기에 있어요. 아브라함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자기 것을 포기할 맘도 역시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잘 보이면 되지요. 잘 보이면서 이러한 좋은 관계를 안정화작업 한다고 언약을 맺고 맹세를 하면 되는 겁니다. 정치적인 협상을 하는 거예요. 이 정치적인 협상으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가 하는 설교 아닙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 놓치기 아깝지요? 옛날 잃어버린 것 보상받고 싶지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능력자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실 겁니다.” 이게 바로 아비멜렉의 종교입니다. 이방인들의 종교지요. 부자청년의 종교고.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와서 온갖 아양을 다 떨어요.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고정된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칠성신이고 산신이고 용왕 믿는 거예요. 고정된 신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황의 안정화작업을 위해서 안정된 신을 믿고 싶은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나를 위한 하나님일 때 그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제가 설명을 하면서도 무척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비멜렉이 선제적으로 찾아온 노림수가 있다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나와야 될 것을 예상하지요. “당신은 거짓 신을 믿으면서 어디서 고귀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 네가 언약을 알아? 약속을 알아? 너하고 맹세 안 해. 너 아직 정신 못 차렸어. 더 당해야 돼.” 이렇게 하면서 맹세를 안 해줘야 되고 언약을 안 해줘야 되는데 분명히 맹세를 했고 기분 좋게 언약을 했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했느냐와 관계없이 아브라함은 맹세를 했고 언약을 해줬다는 그 말입니다. 이게 어디서 언약을 모독해,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니고 상충되고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약을 해준 거예요. 아까 제가 분산형이 있다고 했지요. 모든 인간은 언약과 분산되어서 따로따로지요. 관심도 없어요. 그저 자기 인생 살면 되지요. 다른 것은 인접형, 아브라함과 인접하면서도 언약을 모르는 인접형. 그러면 아브라함 본인은 뭐냐? 통일체에요. 하나님과 통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의 내용을 앞으로 주도하고 이끄는 것은 아브라함의 몫이 아니고 그것은 아브라함과 통일되어 하나가 되어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 되게 해서 몰고 가시는,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 지상에 내려오는 하나의 경로가, 과정이 되는 겁니다. 저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세상, 자기욕심밖에 모르고 자기 욕심만 챙기는 이 세상에 아낌없이 들어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그 고상한 언약이 아니라, 그게 언약의 실제 내용이 아니라 이 땅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천 가지 만 가지 오해를 다 뒤집어 쓴 모습으로 언약이 오는 겁니다. 심지어 열 두 제자도 예수님을 몰랐어요. 지난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했어요. 주님은, 보지 않고 믿어야 돼요. 보고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자기처소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만 처소가 있어요. 따라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되려면 보는 믿음을 포기를 해야 돼요. 이것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해야 돼요. 실적 보고 믿는 것,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나오는 결과를 전부 다 부정해줘야 됩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의 이름으로, 예수님 자기 이름으로 영광을 받거든요. 그러니 예수님의 자기이름 앞에서 인간이 자기 눈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허용될 수가 없지요. 이런 이야기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설교 다시 해 볼까요? 순수한 하나님이 순수한 약속을 순수한 나에게 순수하게 전달한다. 끝! 그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아브라함도 자기 이득을 위해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기 안정화를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는 바가 됩니다. 아브라함에 의한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 하나님을 위한 아브라함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 더러운 세상에 내려와서 아브라함과 함께 온갖 경험을 다 겪어야 돼요.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이 지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에요. 온갖 수모를 다 당해야 됩니다. 아까 한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질적인 아비멜렉의 일방적인 그 요구에 대해서 순순히 다 들어주느냐 그 말이지요. 그것은 머물고자 하는 자, 머물기 위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을 요청하는 것과 어차피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야 하면서 보여주는 언약의 내용이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떠나야 될 사람, 사람은 나그네거든요. 떠나야 될 사람은 훌훌 털어버려야 돼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만드느냐? 아브라함을 썩어지게 만들어요.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한다는 이 사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관계없이 아브라함언약이 아브라함과 동행하면서 아브라함은 갈수록 절실하게 점점 더 느껴져야 돼요. 내가 썩는다는 것, 그리고 저 아비멜렉은 자기 자신이 썩어지는 것도 모르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뭔지도 모르면서 언약의 사람을 무조건 붙들고, “우리 좋게 지내자. 서로 싸우지 말고.” 이런 식으로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 이질성. 그렇다면 언약은 뭐냐? 모든 이질성을 축소하는, 이 세상 있는 모든 기억을, 모든 역사를 하나로 응축해서 축소하는 경우, 사건이 언약이 되는 겁니다. 역사의 박제. 더 이해하기 쉽게 할게요. 저는 깡패들들 만나본적도 없는데 드라마 보면 깡패들 세계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사채업자가 돈 안 갚을 때 찾아가서 아주 심한 욕을 하지요. 사시미 칼로 회를 친다는 욕이 있거든요. 아주 끔찍하지요. 물고기를 회로 뜨면 형체는 없어지고 모든 것이 분해되잖아요. 주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을 사시미 칼로 회 뜨듯이 다 분해해버립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우리의 과거는 다 산산조각 나버려요. 어떤 형태, 형체가 없어요. 옛날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 전에 흑백으로 나왔던 ‘늬우스’라는 것을 한 번 보세요. 최무룡이니 이미자니 고복수니 흑백영화에 나오잖아요. 지금은 다 죽은 사람들인데 후라이보이 곽규석이나 구봉서도 나오고요. 이 사람들이 다 지금 어디에 갔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화려했고 대단했고, 자기 딴에 긴긴 90평생 살았는데. 물론 곽규석이라는 사람은 6십 얼마에 암으로 죽었지만. 나름 다 “참 지겹다. 왜 이렇게 안죽는지 모르겠다. 인생 왜 이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고 난 뒤에 한 4십년 5십년 지나버리면 그 사람들 다 분해되어서 없어요. 인간은 다 없어요. 하나의 황사먼지 같아요. 정말 먼지가 되어서 없어요. 우리의 과거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는 물방울, 하나의 안개거든요. 안개처럼 방울방울 다 날아가 버렸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아비멜렉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겪었던 일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을 구성하기 위한 그 경험은 언약 안에 전부 다 보관이 돼요. 그게 언약입니다. 기억의 보관함이에요. 언약적 차원에서 생겼던 것들의 보관함이 되는 겁니다. 그 보관된 언약이 택한 백성을 대신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아브라함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예수님이 오셔서 그 언약이 보관했던, 자기 백성이 겪었던 그 일은 사실은 주의 이름이 겪었던 그것을 자기 몸으로 성취를 해버려요. 성취를 해버리면 그들의 모든 허무와 죄는 예수님의 대리죽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의 작품, 의의 백성을 생산하는 생산품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만나면서 우연히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언약의 통일체기 때문에……, 언약의 통일형, 저쪽은 인접형입니다. 인접형이기에 아브라함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요. 아브라함도 사실은 모르지요. 모르는데 그가 와서 우리 맹세하자, 할 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맹세하는 것은 좋은데 너희 종들이 우리 우물 강탈해 갔잖아.” “몰랐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 만남에서 사이좋게 지낸다는 말은 통일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인접한대로 줄곧 가자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태반이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요. 왜? 인접형으로 예수 믿기 때문에. 그러면 참으로 그리스도와 통일형이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구원받지요. 하지만 그 사람 본인이 먼지라는 것을 알지요. 매일같이 먼지를 쌓고 있지요. 하루를 살면 먼지가 이만큼 또 쌓이지요. 사시미 칼 가지고 완전히 회를 떠버리세요. 매일같이 나는 회 꺼리가 돼요. 맛있다, 하고 찍어먹는, 주께서 잡수시는 그 회 꺼리.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히브리서에 보면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그 회 꺼리가 며칠 더 진행될지 자기는 몰라요. 언약이 주도하기 때문에. 본인이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턱 하니 나는 놓치기가 싫어요. 나를 내가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인간적으로 맹세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정치적 협상을 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것을 허용합니다. 어차피 나도 하나님 앞에서 아비멜렉이니까. 어차피 예수 그리스도앞에서 우리는 아비멜렉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합니다. 인접형이에요.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회를 뜸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접형에서 통일형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내가 네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 따라서 주님을 추방시킨 이 땅은 우리의 땅도 아니고 우리의 고향도 아니에요. 주님이 찾아온 주님의 고향이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주님의 본적이 우리 본적이 되고 주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고 나는 그 남편의 호적을 따라서 영원히 천국에서 같이 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천국 사는 방법입니다. 누가 와서 나를 일방적으로 데려가 줘야 되는데 우리는 데려가기 전에 내가 먼저 주님이 손목을 잡지요. 우리가 잡은 손목은 먼지가 되고 회 떠야 됩니다. 날라 가버려야 돼요. 제가 몇 년 전에 믿었습니다, 그런 소리도 회 떠서 공중으로 날라 가버려야 돼요. 여러분이 돌아가고 난 뒤에 한 3십년만 지나면 옛날 빛바랜 사진 보면서 ‘참 우리 아버지는 후딱 살다가 후딱 갔다.’ 할 겁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이런데 후딱 갔다는 거예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이 우리를 언약 속에 박제로 만들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앞장세워서 언약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온 거예요. 우리의 발자국이 아니고 언약의 발자국이고, 우리의 인생이 아니고 언약이 고난 받는, 핍박받는 언약의 그 길로 우리가 합류하도록 통일형으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그렇게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라고 나오지요. 그 다음에 24절에 보면,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어디서? 언약 안에서. 회 뜬 채로 날마다 분해되고 날마다 쪼가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점점 더 이 쪼가리가 살면서 더 많이 배출이 되지요. 70년 살면 70년 산 쪼가리가 나오고요. 80년을 살면 그만큼 쪼가리가 나옵니다. 그 모든 쪼가리는 죄의 쪼가리에요. 우리는 우리와 인접하고 우리와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저 사람이 무슨 뜻으로 저렇게 교회에 나오고 무슨 뜻으로 예수 믿는다고 하는가, 그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쪼가리가 되어야 할 이유를 또다시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따라서 날마다 주께서는 회를 떠서 과거는 낱낱이 조각조각 내주시고 이제는 소망으로 앞을 보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재촉해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를 같이 재촉해주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연이 아니고 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혼자 잘났고 혼자 대단한 것 같은데 만나서 협상하고 타협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인 것을, 현재 우리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세울 때 지나간 것은 다 조각나게 해주시고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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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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