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강-YouTube강의(말씀과 생명)170502-이 근호 목사
189강-YouTube강의(말씀과 생명)170502-이 근호 목사
189강, ‘말씀과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과 생명이 같이 겸해서 나오는 대목들이 성경에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요한복음1장입니다. 요한복음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니, 이것은 이 말씀이 나올 때는 사람들이 말씀이란 말을 왜 이렇게 거론하는지를 그 취지를 잘 모르지요.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생명이란 말이 나와요.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 기존에 말씀이라는 분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사람들이 생명이라고 여겼던 것, 우리가 아는 목숨 부지한다는 그 생명은 사실은 가짜라는 겁니다. 수상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목숨을 가졌다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를 않고, 니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너 자신을 어느 쪽으로 강력하게 끌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나 지금 목숨 붙어있어.” 라고 거기서 생각을 멈추지 말고 목숨이 붙어있다. 붙어있다. 붙어있다. 오늘도 나는 살았어. 살았어. 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목숨이 하나의 미끼처럼 작용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생명이라고 보는데,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우리를 둘러싼 어떤 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게 빛에서 나오는 힘이냐, 그걸 생명이라 하고 어두움에서 나오는 목숨이라면 그건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 몸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의 어떤 행동에 나설 때는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몸의 신체가 100조개의 세포가 발휘하고 있는 영양소가 타서 발산되는 에너지를 자기가 사용함으로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은 방향이 딱 정해져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잘 되는 것, 내 원대로 되는 것, 내하고 싶은 대로 딱 결과물을 낳는 것, 그런 쪽으로 쓰여 지지요. 나는 저 사람을 전도하고 싶다. 할 때 배고프면 못 하잖아요. 그럼 일단 식사하고 배부른 상태에서 말을 하더라도 지치지 않도록 조치해서 전도하면 그게 전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하던, 교회 가서 예배드린다. 할 때 배고프면 못 가니까 아침 밥 먹고 가지요. 이 모든 전제가 뭐냐 하면 사람은 일단 떡으로 먹고 에너지가 충만할 때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마귀의 일도 할 수 있다.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밥을 일단 먹고 난 뒤에 그리고 이왕 밥 먹고 행동한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거기다가 남들이 나를 알아줄 때, 인정해줄 때, 존경해주고 사랑해줄 때, 이건 밥 먹는 에너지보다 더 신이 나서 기가 살아서 더 활동하지요.
그러니 사람은 떡으로 사는 거고, 사람은 남들이 알아주는 것으로 사는 거고 또 이 땅에서 소망과 목적은 있어야지요. 소망 없는 사람은 허무해지니까. 세상에 뭐 하나 더 자기 영향력이 확장되고 갖고 싶은 것 더 많이 가질 때, 세상의 아름다운 것, 참한 것 그리고 탐나는 것, 세상 부귀영화를 가지고 이런 것이 기본으로 갖추고 그걸 내용으로 할 때, 우리는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여기에 대해서 성경을 덮어버리면 거기에 대해서 누구나 동의합니다. 교회 왜 가는가, 살아있는 걸 더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사는데?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죽어서도 더 살아있게. 이걸 희망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금 이 땅에서 살아 있는 게 과연 살아있는 현상인지 아니면 반대로 죽어있는 현상인 것을 만약에 누가 따진다면 우리는 벌컥 화를 낼 겁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더 살려고 애를 쓸 건데, 만약에 내가 누가 나보고 죽어있다고 한다면, 아~ 죽어있는 인간이 더 살 이유가 없잖습니까? 살 필요도 없고. 죽은 인간이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죽어가고 있다면 살아있다는 그 보람이 없을 거니까 삶의 동기 부여도 되지 않을 거다 이 말이죠. 화를 낼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내가 더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되고 니가 지금 죽어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어있다면 우리 말고 누가 제대로 살아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살피게 될 거예요.
요한복음1장에서는 말씀이 바로 생명이라는 겁니다. 말씀만 생명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된 그 분만 생명이고 그 분만 생명이라는 것은 나머지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세력, 악마의 세력에 그들이 포로 잡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요한복음1장에서는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했고 그 잡혀있는 것을 요한복음1장에서는 권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두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이 왔으되 그 사로잡혀 있기에 아무도 그를 영접치 아니했다. 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활동에 기본이 뭐냐 하면 행여 저들이 나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일하신 게 아니고 처음부터 가능성을 단절시켜 놨습니다. 니가 나를 알아봐?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너희에게는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데 왜 너희는 그걸 사용하지 않느냐?” 그런 식으로 주님은 다가서지 않는 겁니다. “아~ 너희들이 잘만 하면 알아볼 수 있는데. 아~ 너희들이 부여된 기회를 놓치네.” 이런 식으로 주께서는 전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갑니다. “니가 나를 믿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어떻게 어두움이 빛을 알아봐요? 그러니까 나는 내 의지로서 내 이성으로서 내 지식으로서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는 그 모든 구라. 그 거짓은 어두움이 만든 종교에서 나온 거죠. 기독교란 이름의 종교. 교회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그것을 활성화시킨 겁니다.
그것을 그렇게 거짓을 유포시킨 거예요. 여러분들이 정신만 바짝 차리고 마음에 결심만 해주신다면 언제든지 예수를 믿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아! 사랑의 하나님이시구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구나! 알아본다는 겁니다. 그러한 방식은 주님이 집어넣은 방식이 아니고 이미 마귀가 모든 인간을 예수님 올 것을 예상해서 그런 거짓 것을 유포시켜 놨던 이 어두움 세력의 그 현장성을 그만 그냥 노출된 거예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3장에서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생명 되시는 분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개과천선을 노렸던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갑자기 벼락 맞는 것 같은 느낌. 주님 앞에 갑자기 납치당한 느낌. 보쌈당하는 느낌.
아무 방어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쑥 들어와서 데려가서 자기 사람으로 전환시켜 놓고 “니는 바로 빛 앞에서 어두움이었다.” 라는 것을 차후 적으로 이미 모든 구원이 끝나고 난 뒤에 영생을 주시고 난 뒤에 사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넣어주시는 겁니다. 함께 동행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은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태초에 계신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자는 없고 다만 주님 쪽에서의 낮아짐과 낮아짐. 죄인 만큼 낮아졌던 그 낮아지심의 혜택 속에 끌려 들어간 사람만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그 생명과 함께 있음으로서 주님의 생명에 공유하고 있음을 믿게 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