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05a 울산강의-레위기 9장 : 죽음 기능의 반복
20170505a 울산강의-레위기 9장 : 죽음 기능의 반복(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9장을 하겠습니다. 강의 전에 제가 레위기 9장을 읽어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레위기 9장을 읽어보게 되면 무슨 말인지 꼭 늪에 빠진 느낌이 들지요. 제사에 대해서 쭉 이야기는 하는데 제사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상당히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제사를 여러 종류로 하지 말고 간편하게 하나로 정해서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제사에 속죄제, 번제, 화목제 나오는데 이렇게 제사가 여러 종류가 된다는 이것도 복잡하지만 근본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 자신만 생각한단 말이죠.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제사에 관심 두게 한다는, 제사에 대해서 소개한다는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몰두를 하는 우리를 향하여 뭔가 하나님께서 모욕하는 느낌, 그리고 몰아세우시는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뻔히 아신다면 우리는 제사에 관심 두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 살 궁리하면서 거기에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가 신경 쓰는, 이렇게 하면 네가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를 해주셔야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시켜 볼까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레위기 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원하는 것, 제사 이야기할 때 어느 누가 여기에 관심을 두겠습니다. 관심 안 두면 돌려버리죠. 별로 하나님이 정이 안 든단 말이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동기를 안 준단 말이죠.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 있는 사람에게 제사는 이렇고, 화목제는 이렇고, 번제는 이렇고, 지난 8장에서는 위임식을 이렇게 했다. 위임식 하든 말든 누가 하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제사장 위임식 하는데 내가 굳이 거기에 대해서 관심 둬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의견에 대해서 차이, 충돌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 평소의 관심사가 하나로 이어지질 않아요. 이런 결과를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만들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돼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잘도 만들어내요. 간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라 해서 건물 하나 마련해서 하나님 이름으로 모이자, 목사 세우고, 의자 갖다 놓고 해서 교회 만드는 것, 부동산+동산+인물, 잘도 만들어요. 성경 레위기 9장에 관심도 없으면서 교회를 만든다?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 자신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여럿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봤자 지요. 교회를 말하는 것은 레위기 9장의 취지가 아니고 하나님께 잘 보이면 잘 먹고 잘 산단다. 그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 안에는 레위기 9장, 8장의 내용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교회 만들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돼있는 겁니다.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죽음’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 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지된 것으로 보고, 오직 인간만 정지돼있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 쪽에서만 설치는 상태가 죽음이에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내가 일 안 하면 하나님도 일하지 않는 줄 알고 있어요. 오히려 반대에요. 인간이 자기 일에 몰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쪽이 죽은 자가 돼버려요.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왜? 본인이 너무 설치니까. 레위기 8장, 9장 내용은 이겁니다. 전부 누구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제안한 거예요. 하나님이 굉장히 신경 쓰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원한 걸 들어주고, 네 부탁이니까 들어줄게, 이런 게 아니고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속죄제 바치고, 일방적으로 번제, 화목제 드려라. 거의 이건 뭐 횡포지요. 일방적인 요구를 한다고요. 그럼 우리가 간절히 신경 쓰고 있는 건 왜 안 받느냐? 우리는 죽어 있는 상태에요. 우리의 의견, 의사, 요구사항, 희망, 기대, 이 모든 것을 봉쇄작전으로 전부 다 차단시키고 이 세상은 너희들이 설쳐서 되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는 하나님이 설쳐서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설침 앞에서 인간의 모든 의사와 의견이 개무시 당한다는 말은, 인간은 곧 죽어있다는 겁니다. 인간 세계의 모든 흐름은, 지가 아무리 바쁘게 설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어있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이 설칠 때 이것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곧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고. 같이 의견 맞춰서 같이 일하는 법은 하나님 나라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하는 일에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이렇게 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 만들기는 원천적으로 봉쇄돼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레위기 8장, 9장 내용이 담겨있질 않아요. 그럼 레위기 8장은 뭐냐? 제사장 위임식 이야기에요. 9장 내용은, 위임 받은 제사장이 전에는 모세가 정치적으로 주도적으로 하던 모세의 일은 이제 어디로 넘어가느냐 하면, 모세는 지도자로 남고 이제는 모세가 가져온 모든 율법의 내용이 구체화되는 거예요. 대제사장 중심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구체화되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 산에서 받았던 취지가 레위기 9장을 통해서 대제사장 아론 중심으로 본격화되는 거예요. 그게 1절에 보면, 제 팔 일인데, 본격화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 화목제를 드리라는 겁니다. 제사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순서는 속죄제부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화목제로 그렇게 드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못 드리겠다고 나올 수 있거든요. 드리라고 했다고 고분고분하게 꼭 그래야 됩니까, 우리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이지 시킨다고 다 합니까, 라고 못 드리겠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이게 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첫걸음이에요. 예를 들어서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은 멸망한다. 넓은 길로 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게 성경해석 첫 대목이에요. 이게 우리 본성에 맞아요. 기도할 때 네가 필요한 것을 이방인들처럼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고 한다면, 성경해석 해보라고 한다면, 진짜 전도사나 강도사한테 시험 치고 싶어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기도 좀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하겠다는데 하나님이 나서서 말릴 겁니까? 내가 필요한 것 달라는데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라고 태클 걸고 나오십니까?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이건 하나님 뜻이니까 기도할 때 이것저것 달라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이렇게 해석해버리면 이것은 자기 몸에 안 맞는 지식일 뿐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받아들이면 나중에 행세하게 돼있어요. 기도 안 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기도 안 한 꼬라지 좋다. 하나님이 필요한 걸 주신다고 한 걸 무시하고 철야하면서 주시옵소서, 기도한 사람은 일이 잘 풀리고 나는 시킨 대로 했더니만 다 가져가고 남는 것 아무것도 없고. 난 이럴 줄 알았어. 차라리 그 말 안 들은 걸로 칩시다. 나는 아쉬울 때 기도하고 그렇게 살 거예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게 처음부터 네가 그렇게 해석을 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틱틱 거려야 된다 말이에요. 청개구리처럼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왼쪽 가고 싶은데, 라고 자기성향이 공개돼요. 신약에는 없는데 구약에는 십일조가 있다. 레위기에 나오잖아요. 못 하겠다면? 이게 십일조 해석의 기본이에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못 하겠다면?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내가 술잔 드는데 갑자기 주의 손이 날아와서 내 소주잔을 꺾을 거예요? 꺾어봐. 살아계신다면 꺾어봐.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본인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거부하게 돼있습니다. 배척하게 돼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아느냐 하면, 내가 죽어 마땅한 걸 아는 그 순간 주님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서 이만큼 산 게 아니고 죽어야 되는 데 못 죽어서 질질 끌려와서 내팽개치듯이 살아왔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언제고 죽을 수 있고 그런 주님은 늘 살아계셔야 합당하다는 것을 비로소 그때 아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레위기 8장, 9장을 보게 되면 말씀의 숲에 빠져서 길을 잃어버려요. 재미 하나도 없어요. 건너뛰고 싶어요. 확 당기는 사건도 없고. 그런 사건은 레위기 10장에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 쓰다가 제단에서 불이 나와서 홀라당 타버릴 때 “그것 참 신기하네.” 하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런데 8장, 9장은 백날 봐도 기억에 남질 않아요. 이게 왜 있는지 몰라요. 이게 왜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날,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살아있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협조를 받지 않는 이유가 우리는 하나님 일에 끼어들 입장이 못 돼요. 왜? 죽은 자니까. 그런데 죽은 자가 지가 죽었다고 하면 참 고맙겠는데 죽은 인간들이 안 죽었다고 길길이 날뛰니까 문제에요. 그게 바로 레위기 10장이에요. 시키는 대로 제단불로 향을 피우면 안 죽었어요. 그런데 아까 제가 말한 성경해석 원리대로 제단불로 향을 피워라. 못 하겠다면? 그 해석이 뭐냐? 그래서 죽었어요. 죽었을 때 나답과 아비후는 참 재수 없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오늘날 우리 이야기를 대변해주고 있어요. 이제 8장, 9장 내용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입장이 됐습니다. 레위기 1장부터 그랬습니다만 읽어보면 짜증 나. 레위기 때문에 성경 안 본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출애굽기까진 재미있었잖아요. 레위기에 와서 진을 다 빼놨어요. 막 토하려고 해요. 그 정도로 힘든 거예요.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까 봉쇄라 했는데 다른 말로 단절입니다. 단절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제사장 또는 대제사장을 둠으로써 지금 너희들의 바라는 모든 것들을 자칭해서 그들은 자기를 이스라엘로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인한 아들이란 뜻이에요. 축복의 아들, 언약 백성. 원래 뜻은 하나님이 사람과 싸운다는 뜻인데 그것은 야곱의 이름이잖아요. 야곱이 언약의 복 받은 백성 아닙니까. 그게 집단화된 거예요. 그 자식들이니까. 이렇게 자칭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소통이 잘 되고 원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인간의 대표로 봐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 죽음이 있어야 됐거든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죽음을 빼버린 겁니다. 이스라엘로 태어났기에 이스라엘로 우기는 겁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부모를 만나서 대한민국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대통령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태어났기에 그 나라 그 백성 아니냐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니라는 거예요. 죽음을 왜 자꾸 빼느냐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이 죽음 말고 주님의 생명에 의해서 위층에서 만들어질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란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음이거든요. 인간 세상에서 죽음을 반복해요. 죽음을 반복하는 걸 제사라 합니다. 계속해서 제사, 제사, 제사. 위임식 할 때 번제, 화목제를 드렸거든요. 하루에 세 번 드리고 칠일 동안 21번 드립니다. 그리고 제 팔 일에 모세가 아론에게 또 제사 드리라는 겁니다. 또 속죄제, 번제, 화목제. 속죄제가 뭐냐? 죽음. 번제가 뭐냐? 죽음. 화목제가 뭐냐? 죽음. 죽음을 계속 중첩시키는 거예요. 죽음을 중첩시키는 이유가 바로 조금이라도 인간들이,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 만드는데 기여하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튀어나오지 않고 차단시키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 증거가 레위기 10장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다른 불로 향을 피웠더니만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잖아요. 여기 있는 인간은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반복된 제사를 통해서 죽음을 경유해야 진짜 이스라엘에 참여하게 됩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생산되는 와중에 인간의 의견은 일체 반영하지 않는다는 단절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도로 죽음으로 와버려요. 나답과 아비후처럼.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어떤 세계인지 감 잡으셨습니까? 질문해볼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잔인한 분을 믿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거든요. 그 아버지와 그 자식,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아들입니까? 성도에요. 성도는 인정사정도 없어요. 내가 남한테 인정을 베푼다든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이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주제넘게 우리가 누굴 사랑하게 되면 이것은 제사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단절의 원칙을 위반한 거예요. 신약성경에 보면 무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비를 베풀라. 네가 동정하는 자가 되라. 불쌍히 여겨라.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너도 이와 같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네가 사랑을 받은즉 너도 형제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할지니라. 사랑하는 이 계명 외에 다른 계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얼마나 많이 이야기가 긍휼, 사랑, 동정하는 자가 되라, 불쌍히 여기라. 많이 있는 것 인정하지요. 그럼 그걸 해석해보세요. 아까 제가 말씀한 대로 해석해보세요.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하면 뭘 줄 건데요? 사랑 못하겠다면?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하고 내게 수천만 원 사기 친 인간은 사랑 못하겠다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요. 나는 못합니다. 때려죽여도 못합니다. 원수는 사랑 못합니다. 바람피워 이혼한 남편을 사랑하라.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니가 들어와서 내 인생 조졌는데. 남자 잘못 만나서 평생 그때부터 고생했는데. 지만 조지면 괜찮지요. 그 때문에 자식들까지 인생 버린 원인 제공한 그 남편, 남편도 아니지요. 그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해요? 미쳤어요. 걸리기만 해봐라. 내 인생 물러내. 내 청춘 돌려줘. 니가 뭔데 내 인생 조져놓느냐 말이죠. 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니 인생을 완전히 짓밟아놓은 그 인간에게 오늘도 따스한 아침 햇살은 비췄고, 그의 심장을 뛰게 했고, 그 인간 어젯밤에 잠 잘 잤다. 그 남자 촌에 가서 농사지었는데 이번에 대풍년 들게 했다. 누가 그렇게 한 건데? 그 사람 대머리도 아니네. 머리카락도 자라게 하시고 발걸음도 세시고 그 원수를 누가 키우십니까, 누가 자라게 하시고, 누가 생명을 보존하게 하십니까? 우리 주님이잖아요. 우리 하나님이잖아요.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차라리 김추자 노래판을 틀어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내가 그런 인간을 사랑하라면 나는 하나님 안 믿는다. 그런 불합리한 하나님 못 믿는다. 그렇게 당해놓고 해석을 자기 멋대로 하지 마시고 진즉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그럴 줄 알고 말씀 줬다. 그럴 줄 알고 레위기 8장,9장 줬다는 겁니다. 내가 네 충성을 원했는가, 내가 니 기도를 원한 줄 아느냐, 네 봉사를 원했어? 나는 일체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약속의 땅을 만들었다. 약속의 땅을 만들고 천국을 만드는 그 모든 것은 어떤 인간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 아들, 두 분이 다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하지 못한 것을 홀로 다 이루셔서 약속의 땅을 만든 겁니다. 예수님 오기 전에 그러한 징후가 뭐냐 대제사장이에요. 대제사장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회막에 들어가서 피를 뿌려요. 여기도 나올 거예요. 회막에 피 뿌리는 것은 제사장도 못합니다. 대제사장, 여기선 아론이죠. 아론이 들어가서 손가락에 피를 찍어서 9장 9절에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제단 뿔도 바르고 단 주위에 피를 뿌립니다. 제사장이 해요. 이해했는지 확인해봅시다. 죽음의 세계와 주님이 말씀대로 만드시는 약속의 세계와 중간에 서있는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대제사장. 그것 하나 기억하세요.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차단, 봉쇄되는 겁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은 누구 말만 들어야 돼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해야 돼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안 했더니만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인데도 불구하고 죽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되려면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일단 불도저로 밀어서 시체로 만들어버려요. 어디서 네가 한 행세했다고 까불어. 그 입 다물라. 어디서 천국에 대해서 개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느냐. 가만있어. 천국은 내가 만들어. 이게 레위기 8장, 9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 들어요, 안 들어요? 하여튼 진짜 말 안 들어요. 어린아이 같아. 저의 경건, 거룩으로 보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고. 제가 정성들여 다림질한 오만 원짜리 헌금을 받아주셔야지요,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죽여 버릴까? 인간의 교회 만들기는 봉쇄돼있습니다. 그것 교회 아닙니다. 자기 자랑하는 동네에요. 정성과 열심과 충성과 건전함과 자기 능력과 자질, 남과 비교하고 경쟁해서 자랑질하는 곳이에요. 교회가. 신약의 대제사장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레위기 8장, 9장을 그대로 따와서 대제사장으로 오신 거예요. 히브리서에 나와요. 그 대제사장을 우리가 믿는다고요? 말도 안 돼요. 죽은 놈이 뭘 믿어요. 죽은 놈은, 죽은 게 아니에요. 자기 잘난 맛에 오늘도 찧고 까부는 게 죽은 놈이에요. 이 땅에서 죽은 자의 특징은, 자기에게 몰두하는 거예요. 내일 결혼 주례 있는데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점이 있어요. 결혼해봤자 결혼생활 20년, 30년 하게 되면 이제는 아내도 귀찮고 남편도 귀찮고 좀 혼자 살고 싶어. 뭐 파뿌리가 어떻고 그때는 뭣도 모르고 누가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예’ 대답했는데 안 살아봐서 그래요. 나중에 좀 살면 옆에 누가 있는 것도 귀찮아요. 그럴 때 우리는 왜 너와 계속 살아야 되는지 누가 좀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어. 한 오년 살면 다른 여자 만나 살고, 또 헤어지고 이랬으면 좋겠어. 차도 오년 주기로 바뀌잖아요. 날이 갈수록 사랑한다? 몰라. 사랑 안 해서 억지로 소리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한 20년, 30년 살다 헤어진다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지. 얼마나 불쌍한데 나 보고 자기 평생을 맡겼는데 내가 남자니까 남자답게 끝까지 저 여자를 보호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게 의무라니까요. 이게 사랑이 아니고 의무가 되니까 문제가 돼요. 그래야 남자답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거예요. 이렇게 주례사하면 큰일 나지요. 성경에서 부부란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날이면 날이 갈수록 저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억지로 의무로 지켜주겠다는 게 아니고 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느뇨? 이래 된다니까요. 바랄 걸 바라야지 어떻게 그걸 바랍니까? 처음엔 덜 사랑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당신이 사랑스러워져. 아내가, 어느 정돈데? 나는 없어져도 좋을 정도로 사랑해. 네가 진심이야? 의무감 아니고 진심이야. 가면 갈수록 나는 엷어지고 당신은 두꺼워져. 그러니까 결국 성경말씀은 로마서 3장 말씀대로 처음부터 결혼하나 하기 전이나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합당합니다. 죽어 마땅하니까 아쉽다 생각하지 마시고,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성경대로 일하심이 좋아지느냐 하면, 내가 죽을 자란 걸 알 때.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이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죄의 구조 안에 집어넣어서 그 안에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그걸 중간에 대제사장이 제사라는 약속 또는 약속이란 구조를 통해서 죄를 생산해요.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의 제사를 통해서 나왔던 죄의 생산과 자신의 현 모습을 비교하고 연결시켜 보란 말입니다. 이래도 네가 죽은 자가 아닌지 보라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속죄제에요.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의 모두 죄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죄의 종류를 나눠요. 모르게 한 죄는 속죄제로 봐줄게. 하지만 알고도 지은 죄는 속죄제로도 안 돼. 진짜 죽어야 돼. 연약해서 지은 죄는 속죄제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 용서해줘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돼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들이 돼요. 제사장의 복장을 지난번에 했잖아요. 폼 나지요. 폼 나는 게 제사장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에 죄 지은 우리도 거기에 합세하는 권한을 주고 자격을 허락하노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신랑이잖아요. 그럼 신부가 있을 게 아닙니까. 예수님은 신부를 자기처럼 영광스럽게 만들어낼 책임이 있어요. 조건이 있어요. 본인이 죄를 알 때.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성도는 특징이 뭐냐? 같이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를 알아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거예요. 성도는 죄를 생산하는 제사의 구조 안에서 자기 죄를 아는 반면에 성도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 다른 말로 율법, 제사의 구조에 포착이 안 됐기 때문에(이방인이죠) 양심상 뭔가 이 세상에서 반듯하게 살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비겁한 변명과 핑계로 이어져요. 내가 집에 일찍 들어오려고 했는데 친구가 와서 그랬다. 오늘 내 생일인 줄 아나, 모르나? 아는데 친구가 와서 한 잔했다고 나오거든요. 어린이날이라 얘와 놀아줘야 되는 것 아는데 회사에 바쁜 일 있다고 가봐야 된다고 나온단 말이죠. 엄마 입장에서 어린이날이니까 얘와 놀아줘야 아빠라고 나오잖아요. 어린이날 부모는 아이와 놀아줘야 된다고 율법 어디에 나옵니까? 율법에 안 나오지요. 그 엄마는 어린이날 아이와 놀아주는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죽는지 이유를 몰라요. 얘한테 바른 엄마가 됐으니까 자기 죄를 모르는 거예요. 성의를 다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았을 뿐이에요. 어째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안 되는데 더는 못해줘.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뭘 더 하란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말씀의 구조, 제사의 구조 앞에서 우리가 뭘 해도 일체 우리의 선행 같은 것을 주께서 받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 우리가 어떻게 설치고 부모한테 효도하고 어버이날 봉투에 십만 원 넣어 드려도 그게 죄고 죽은 짓이라니까. 왜요? 저한테 물으면, 제사장이 차단의 선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의 기능을 우리의 선행으로 모욕하면 안 돼요. 거기다 보태거나 모독하거나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이 우리에게 착한 일 많이 하고 나도 널 용서하고 합쳐서 천당 보내줄게. 이런 일은 없어요. 그런 것은 오늘날 천주교나 교회에서 하는 소리에요. 그런 것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복음이란 간단하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것 아닙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대제사장이 살아요. 그럼 우리는 어디 속하느냐 하면,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잖아요. 이스라엘 진이 있으면 중간에서 활동하고 있잖아요. 나중에 성전 지으면 성전에서 일하고 기거했어요. 제사장이 함께 있다는 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제사장이 살아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뭘까요? 나는 외롭다, 혼자 있고 싶다. 이게 관심사입니까, 아니면 나밖에 모르는 이런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선 무슨 일을 하셨지? 어느 쪽에 관심 있어야 돼요? 주님한테 관심 있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왜 혼자 있고 싶어 하는가? 그것부터 알아야 돼요. 그건 바로 육체가 한 덩어리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말이냐 하면, 창세기 2장 끝에 보면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요. 그런데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실패했어요. 그러면 두 사람이 한 몸이 아니라 두 사람이 두 몸이 됐지요. 한 몸이 못 됐다는 말은, 내가 누구한테 다가가든, 내가 자식한테, 내가 아내한테 다가가든 간에 내 몸 자체가 그 사람에게 하나의 폭탄이 되고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잘해봤자 그는 날 이해 못하고 나는 그를 이해 못해요. 이건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 못한 징벌입니다. 벌을 그런 식으로 받아요. 외로운 게 벌이에요. 인간이 사는 게 벌이듯이 인간은 외로운 게 벌이에요. 우리 어머닌 맨날 외롭데. 외로운 데 해결책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같이 놀아주면 안 외롭습니까? 같이 놀아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놀아줘야 덜 외로워요. 그런데 그쪽도 인간이잖아요. 언제까지 내 횡포에 참을 것 같습니까? 나중에는 못 참습니다. 요양사가 놀아준다? 요양사는 돈 보고 놀아주지 예뻐서 놀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를 키웁니다. 개와 한 몸 되렵니까? 나중에 천당 갈 때 개 끌고 갈 거예요? 안 되잖아요. 고양이 끌고 갑니까? 이미 인간은 실패작이에요. 따라서 실패작인 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누굴 만나도 군중 속의 외로움, 그런 뜻이에요. 식구 여러 명 되도 명절에 웃으면서 윷놀이하고 고스톱 치면서도 외로워요. 어릴 때는 재롱부리고 돈 받고 좋지요. 열두 살만 되도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온다고 해요. 하여튼 크면 따로 논다니까. 바로 그럴 때 너만 외로운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예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 없어요. 열두 제자도 못 알아듣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