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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14장2절(처소)170502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14장2절(처소)170502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2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2) 여기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에 처소라는 말이 나오지요. 처소. 그런데 이 처소는 베드로의 입장에서, 지금 베드로는 “따라오지 마라” 해서 배제된 상태고요.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 처소를 그전에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습니까? 이 처소라는 곳을. 베드로는 생각이 이런 생각입니다. 여기에 항상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한테 접근할 때에 예수님한테 바로 접근 못합니다. 여기 열두 제자가 예수님 주위에 포진되어 있으니까, 예수님한테 접근을 하려다가, 제자들을 거치고 접근을 해야 되는데, 이 제자들이 하는 그 행위가 예수님에게 접근을 하려는 우리 행위를 지금 대신 해주고 있어요. 베드로보고 “오지 마!” 라고 한 것은, 베드로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를 대표해서 베드로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자세에 대해서 베드로가 대신해서 다 받았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베드로가 못 갔다는 말은 그 외에 누가 가도 “오지 마!”가 보편적으로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가신 곳에 자기가 같이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어딘가는 가실 거고, 그 가시는 곳이 뭐가 되냐 하면은 처소가 될 거고, 그러면 그 처소에 이 제자가 마땅히 거기에 있을 자리가 있다 하는 것은, 그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에 베드로 자기한테 뭐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자기한테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주님 외에는 다른 사람을 안 믿었으니까, 주님만 믿었으니까, 주님만 믿었으니까 자기한테는 주님에 대한 애정, 사랑, 믿음이 다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 믿음에 대해서 “오지 마!”라 하니까 베드로가 뭘 생각했겠어요? “왜 내가 합류하지 못하지? 뭐가 미비하지? 뭐, 서류가 잘못됐는가? 주민등록증을 한통 덜 떼 가서 못 가는 건가? 뭐 때문에 주께서 오지 말라고 하지?” 라고 분명히 궁금해 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야기합니다.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로 와서 나 있는 곳에 있게 한다.” 하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우리가 실마리가 풀립니다. 뭐냐 하면은 이 ‘처소’ 문제에요. 처소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게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처소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은 지금 제자들이 있을만한 처소는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고 하는 거예요. “네가 올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련되면 내가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오게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조건을 걸었어요. “처소가 지금 없는데, 네가 있을 처소는 없는데 마련되면 네가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 ‘처소의 조건’에 대해서 자기는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그냥 붙어있으면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처소가 무슨 처소 이길래, 제자들도 못가는 그러한 처소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를 뽑아놨으면 사전에 이 자리가 없다고 하든지 또는 진짜 주님께서, 주님이라면 언제든지 제자들을 합류할 수 있는 그런 처소를 만들어 놓고 일을 시작해야 되는데, 이제 와서 없데? 이제 와서 처소, 있을 곳이 없다는 거예요. 왜? 일을 왜 그런 식으로 해요? 처음부터, 다 와가지고 없다고 하면, 뭐, 발 빼는 거예요? 이거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 왜 그 시점에서 처소가 없다고, 비로소 그 실상을 공개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이것은 바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 처소 개념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처소 개념이 바뀌지 아니하면 나와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예수님만 알면 되지 처소개념까지 알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경솔함을 베드로가 대신 해서 이미 그 사실을, 형편을 다 알려 줬어요. “네가 나를 따라오고자 해도, 네가 가지고 있는 처소 개념이 안 바뀌면 그것은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처소 개념이 바뀔까요?” 만약에 묻게 된다면 “어떻게?” 라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 주님이 처소 개념을 제대로, 처소를 마련하고 다시 오게 되면 비로소 그때에 처소 개념이 “아하! 처소가 이것을 가지고 처소라 했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 처소가 없다고 이야기한 게 타당 하구나” 그제야 알게 된다는 겁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 처소 개념에 있어서 베드로를 배척하실 때에 1번(예수님: 예수님만 계실 처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만 계실 처소예요. 2번(베드로: 예수님+제자들) 베드로는 이런 처소 개념 없이 예수님 플러스 제자들, 함께 할 수 있는 이 처소 개념. 이렇게 둘이 나누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처소 개념을 자기가 부정하고, 예수님만 계실 처소 개념으로 이게 바뀌어야 돼요. 이게 바뀌어야 예수 믿는다는 게, 내 식대로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원하는 식대로 믿어져야 돼요. 예수님이 믿는 식대로.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믿음을 요구한 게 아니고 너에게는 믿음이 있다? 없다? 믿음이 없음을 제자들에게 요구 한 거예요. “너는 왜 네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네가 왜 몰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 없을 수가 없지, 믿고 있는데 믿음이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저는 주님 믿습니다!” “믿음 없는 거야.” “아니, 내가 있다는데!” “아니, 없는 거야.” “이상하네? 왜 믿음이 없지?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야.” “이상하네? 그럼 내 것 탈탈 다 털어서 다 드리겠습니다! 이정도하면 됐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야.” 믿음 없는 자만 구원받습니다. 믿음 없는 자만. 믿음 없다는 사실을 믿는 자만 구원받아요.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이렇게 배척받았기 때문에 그 뒤쪽에 태어난 우리들은, 이제는 베드로의 실수와 그 무식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직행으로 예수 믿으면 될게 아니냐?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14장 끝을 괜히 쓴 거예요. 그거는 있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베드로, 바보다~ 바보! 우리같이 믿어야 되는데, 그렇게 잘못 믿으니까 그렇지!”하면 안돼요. 반드시 베드로가, 베드로가 체험했던 그 체험을 공히 우리도 같이 경험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치 나한테 내가 구원 받을 믿음이 있는 것처럼 베드로하고 똑같은 실수를 해서, 내가, 우리가 스톱이 돼버려요. 막히게 되는 겁니다. 자, 베드로가 주님 보시기에 처소에 갈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베드로가 주님 보시기에 지금 합류할 수 없잖아요. 이게 제 말이 아니잖아요. 분명히 오지 말라고 했으니까 합류할 수 없지요? 없으면, 합류할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것을 베드로가 그것을 수긍해야 돼요? 안 그러면 화를 내야 됩니까? 뿔따구 나서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이제 와서 나를 내치다니! 분하다!” 이렇게 해야 돼요? 안 그러면 그것을 수긍을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요? 오지 말라고 하니까 “예~” 이래야 됩니까?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더 고집을 부려야 돼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수긍을 해야 되겠지요? 어차피 못 가는 거 수긍을 해야 되잖아요. 네? 그거 둘 중에 하나도 못 찍었어요. 수긍을 해야 되잖아요. 그 수긍이 뭐냐 하면은 “나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함을 믿는 거예요 결국은. “나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구나!”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누구 소관으로 넘어가버렸어요? 온다 했는데 안와도 마찬가지예요. 온다 해도 주님이 온다고 약속은 했지만 안와도 무방해요. 올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내게 “다시 가겠다.” 할 때 그 대상자가 꼭 나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이미 주도권은 저쪽에 넘어갔잖아요. 넘어 갔으면 열두 제자 입장이나 안 그러면 지옥 가는 마귀 입장이나 똑같은 입장이 되고 마는 거예요. 그동안 예수님 핍박했던 바리새인 입장이랑 똑같은 입장이 되는 겁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나의 제자 됨을 포기해야 되고, 주님에 의해서 제자 됨을 믿어야 돼요. 내가 나는 제자라는 것을 포기해줘야 돼요. 내가 제자인 것을 내가 소유하면 안돼요. “주님이 제자 되게 하셨으니 알아서 하실 겁니다.”라고 주님에게 그 모든 결정권이 주님께 넘어가는 동시에 슬그머니 내가 쥐고 있던 것이 맥이 풀리고 힘이 빠져야 됩니다. 그동안 “나는 제자야. 나는 수제자야. 제자야.” 할 때 “내놔!” “이거, 이거 가지고 가면 안 되는데!” 다! 몽땅 다 빼앗겨야 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있는데, 어릴 때 한 다섯 살, 여섯, 일곱 살 초등학교 때, 옛날 국민학교 때요. 옛날에 제가 국민학교 때는 설은 큰 명절이지요? 구정은 아주 큰 명절이었습니다. 그 전날 이제 부모님이 대구 서문 시장에 가서 한복, 한복 깨끗한 거 가지고 온단 말이죠. 그 전날, 그러니까 설 그 전날에 한 거예요. 어떤, 전에도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어느 코미디에 보니까, 동물의 왕국에서 까치가 아주 임금한테 혼이 났어요. 박살났습니다. 왜냐 하면은 “왜 설날보다 하루 먼저, 니가 왜 설날을 먼저 했냐?” 까치 까치 설날은 오늘이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내일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돼서 까치가 혼나는 그런 코미디가 있어요. 코미디. 이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아이가 내일 아침에 그것을 입고 어른들한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아야 되는데, 아이가 이게 여자아이가 너무 성질이 급해서 옷을 미리 입은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가 “당장 내놔! 내일 깨끗이 입어야 하는데 내놔!”하고 한복을 빼앗겠지요? 그럼 빼앗겼을 때 그 아이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 이, 이건 내건데~” 이러면서 빼앗기겠지요? “내건데~” 하면서 빼앗기겠죠? 지금 베드로의 심정이 그 심정이단 말이죠. “나 제자인데~” “제자 이리 내놔!” “나 수제자인데~” “수제자 내놔!” 다 뺏어 가버립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내게 걸쳐 있는 그것을, 마치 내가 마땅히 내 것인 양, 가질 권리가 있는 양 여겼던 그것이 혼쭐나면서 빼앗겨야 돼요. 그래서 신앙인은 뭐냐? ‘빼앗김’을 체험해야 됩니다. 3종 세트 빼앗기면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다 빼앗기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거 다 빼앗기면 돼요. “나 죽어서 천당 간다.” 그것도 빼앗기고 “나 누구를 사랑한다.” 그것도 빼앗기고 “믿습니다!” 그 세 가지 몽땅 다 빼앗기면, 그 빼앗겼다는 말은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내 구원은 내가 믿고, 내가 소망하고, 내가 사랑하는 나에게 주도권이 있다 하는 이 사실이, 진짜 믿음, 소망, 사랑을 훼방하고 그것을 가려버리고 그것을 먹칠하는 그런 것은, 처소에 들어갈 자격도 안 되는, 처소를 완전히 다른 엉뚱한 처소로 이끄는 그런 요인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내가 걸치고 있는, 설빔이라 하죠? 맞습니까? 설빔, 설에 입을 옷. 이거 입고 내가 폼 내야지 했던, 미리 당겨서 생각하는 그것. 지금 빼앗겨야 돼요. 자, 여기까지는 전혀 여러분들이 어려운 것을 느끼지 못할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다. 처소 개념이 무엇이 어려우냐 하면은 지금부터 어려워요. 이제 올 사람 다 왔기 때문에 슬슬 시작해야지요. 처소 개념은 부재다 이 말이에요(처소=부재). 부재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 없는 거예요.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처소 개념은 이것은 가짜니까, 홀라당 이 개념은, 이거는 지적 받아야 돼요. 이건 엉터리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나와 함께 있다는 처소 개념은 이건 엉터리니까 이 처소 개념 가지고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합류할 수 없고 따라 갈수도 없었어요. 그러면 예수님만이 아는 처소 개념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럼 제가 아까 질문 했듯이 그러면 너희들은 모르는 처소 개념은 따로 있다고 왜 진작부터, 진작에 왜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안했느냐 말이에요 이걸. 이걸 왜 진작에 이야기 안했느냐 이 말이죠. 왜 결정적인 시기에 와서 “처소 없었다. 사실은 처소 없어.” 라는 말을 왜 이제 끄집어 내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은 이 처소 개념과 예수님이 누구신가의 개념하고 이게 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처소=예수님).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고 그 주변을 처소라 한다. 이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처소가 없다면 내가 알던 예수님은 그 예수님이 아닌 것으로 인식을 해줘야 돼요. 그것이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이, 내가 여기 있으면 인간이 아는 처소 개념은 내가 있는 그 주변을 처소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 인간이 있고, 그 주변을 처소라 여기는 이 공간개념은 결코 예수님의 공간개념으로 이게 연속성을 가질 수 없는 거예요. 같은 종류로서 이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베드로의 예를 들어서 보면 이거는 확실 한 거예요. 이어질 수가 없어요. 예수님하고 나하고 같이 있다. 예수님이 떠나려고 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가시거든 나 따라가겠습니다! 원래 같이, 같은 공간에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게 같은 공간이 같은 처소가 아니다 이 말이죠. “너는 네가 생각하는 처소 말고 다른 처소가 있는데, 그 처소에는 네가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이제 베드로가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이상하다. 왜 지금 같이 있든지, 같이 있으면 되지 이게 왜 안 되느냐?” 예수님의 개념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개념에 변화가, 그 변화를 예수님께서는, 이건 제자들을 떼놓고 그 변화를 시킵니다. 그 변화가 뭐냐? ‘부재 속에서 채택된 현존’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것을 가지고 ‘이름’이라고 해요. 이름. 그 처소 개념, 어떤 장소가 있다는 말은, 그냥 빈 공간이 있을 때는 장소라 하지 않습니다. 그 장소를 장소되게 하는 것은, 그 장소의 주인공이 거기에 분명히 누구 하나는 분명히 있어야 돼요. 거기서 누구를 위한 빈 장소냐? 이렇게 돼야 되지, 그냥 빈장소가 있다는 말은 이게 말이 안돼요. 누구를 위한 빈 장소냐? 하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누구를 위한 빈 장소냐? 예를 들어서 지금 여기에 사무실이 있는데 와보니까 여기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고 내가 제일 먼저 왔다. 그러면 내가, 여기에 일단은 나밖에 없으니까 나를 위한 공간, 내가 이 처소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바깥에서 누가 “누구야? 남의 사무실에?”이래서 온다면 어떻습니까? 이 처소가 비록 내가 여기 있더라도 이 처소에 본래 주인공은 따로 있지요? 따로 있는 동시에 “누구야? 너 뭐야? 나가?” 이렇게 돼버리면 처소는 있지만, 나는 이 처소에서 처소와 무관한 부재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 부재의 존재가 되지 않고 이 처소에 합류하려면 그 주인공 되시는 분이 나를 뭐해요? 호명을 해줘야 돼요. 내 이름을 불러 줘야 돼요. 이름을 부를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진정 이 처소에 주인공이라는 것, 그것이 확인 돼야 돼요. 확인 돼야 됩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이 처소가 나와 합류하기 위해 있는 처소가 아니고 이게 호명, 나를 호명해줄 그분만을 위한 공간, 그분만을 위한 처소이라는 것이 확증되고 난 뒤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불러 줘야, 그래야 베드로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여기 들어올 줄 알았어.” 이런 생각을 조금도 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어이고, 이게 웬 횡재야~ 이게 내가 갈 곳이 아닌 곳인데 참여가 됐네? 내가 올 수 없는 곳에 내가 들어오게 되었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아들의 나라. 지금 유대인들은 무슨 나라를 생각하느냐 하면은 하나님 나라 생각하잖아요. 세례 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생각 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은. 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들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 나라에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하면, 아들 된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이스라엘이니까 아버지 나라,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 여기에 누가 같이 물들어 있느냐 하면 역시 베드로와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예요. 뭐 배운 게 이것밖에 안 배웠으니까. 지금 이것이 그 당시에 대세니까 이걸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요. 천국이 오게 되면 우리는 천국의 백성, 거룩한 백성이니까, 할례 행하고 안식일 행하니까, 언약대로 할례하고 언약대로 안식일 지켰으니까 언약대로 우리는 천국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천국 하늘나라가, 하늘나라가 무엇으로 바뀌었느냐? 이게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 이것 때문에 아드님이 구박을 받지요? 배척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핍박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 천국을 믿던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을 핍박하고, 그들의 소망이 소망을 핍박하고,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랑을 핍박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랑이, 이것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여기고 하는 그 사랑이 결국은 누구를 핍박하게 됐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이란 말 하지요? 핍박. 핍박이라는 말하잖아요. 점잖게 지식 알아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핍박이라는 그러한 경계선을 거쳐야 돼요. 핍박. 핍박하지 않고 천국 갈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핍박하고 싶어 한 게 아니고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을 아무리 봐도 자기가 지금 하나님 사랑하고 믿고 하는 이것을 본인이 부정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어요. 왜? 내가 믿고 있는데? 내가 믿고 있는 걸 “내가 믿는 게 아니야!”라고 하려면 이게 믿는 게 아니라는 다른 증거물이 있어야 돼요. 예를 들어서 식사 가운데 아버지가 뜬금없이 “큰 아들아!” “예”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또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합니다.” 또 “사랑하느냐?” “아니 뭐, 말로 할 수 없고 속을 까뒤집을 수도 없고 아버지가 아시지 않습니까?” 뭐 이럴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원할 때 그 베드로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요. 베드로 안에 이렇게 예수님을 핍박하는 모든 요소가 베드로 안에 가득 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아셔요. 따라서 그것을 전부 다 째가지고 그걸 버리지 않는 한, 그것을 노출 시키지 않는 한 아들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만약에 이 상태로 만약에 베드로를 집어넣어버리면 베드로는 기존의 예수님을 핍박했던 요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대로 아들의 나라에 가게 되면, 그 핍박한 요소가 뭐냐 하면은 나의 결심과 나의 선택과 나의 의지가 하나님 나라에도 통한다는 것을 그대로 간직한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은 아들의 나라에, 그 요건에 충족하지 못해요. 이게 요건에 위배되는 겁니다. 아들의 나라 특징이 뭐냐면 오직 아들의 공로만 유지, 들어가야 돼요. 아들의 공로만! 그런데 베드로가 만약에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아들의 공로 플러스 베드로의 자기 공로가 거기에 추가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온전한 아들의 나라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베드로보고 “얘들아 못 온다.”고 하지 않고 베드로로 하여금 “목숨 바쳐서, 제 목숨 바쳐서 주를 따라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시기적으로 무르익어야 돼요. “인간이 예수님이라는 스승을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라는 그 끝장 보는 거, 끝장의 헌신. 그게 나올 때까지 주께서는 계속 유도해 오신 겁니다. 그걸 해놓고 “목숨 바치겠습니다!” “알았어. 볼 일 없어, 가.” 줄 것 다 줬는데 NO에요. 줄 것 다 줬는데. 오톡카지? 오또카지? 문제가 돼? “이거 어떡하지? 갑자기 납득이 안 되네? 어떡하지?” 우리 같으면 베드로보고 “기다려봐! 찾아올 거야!” 그런데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기다려봐!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찾아올 거야!” 안 오면? 안 오면 어떻게 할 건데? 네? 안 오면? 여러분 기다린다는 말은 뭔 뜻일까요? 제가 분명히 믿음 부정하고 사랑 부정하라고 했지요? 또 뭘 부정하라고 했습니까? 소망을 부정하라고 했지요? 기다리면 온다 하게 되면 뭐가 부정이 안 되느냐 하면은, 나의 기다림, 나의 소망은 요것은 뒤에 딱 꼬불쳐 놓고, 꼬불쳐 놓는다는 말 알아요? 이것은, 이것마저 없으면 안 돼! 그렇게 돼버리면 “나의 소망 하나는 건졌다. 나의 소망 하나는 쓸모 짝 있었다.”가 돼버려요. 이것은 온전한 아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철저한 단절이에요. 철저한 단절. 그러면 이 말을 들으면 베드로는 뭘 느끼게 됩니까? 그 처소에는 비어있다고 봐야 돼요. 비어있는 거, 비어있는 거. 다시 말해서 “그 처소에는 예수님만 계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예수님만 계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걸 수긍을 해야 되고, 기분 나빠서 좋아서 모르겠는데, 무조건 인정해줘야 돼요. “예수님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처소에 예수님만 계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라는 쪽으로 물러서야 됩니다. 소망 철수하고, 믿음 철수하고, 사랑 다 거덜 내고, 시작도 끝도 주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입니다. 하고 자기는 한발이 아니고 여러, 아예 철수해야 돼요. 그런데 철수 못합니다. 그렇게 인간이 철수할 자들이 아니에요. 철수나 영희나 뭐, 철수할 수가 없어요. 이거는 아재개그다. 철수 안 됩니다. 왜냐 하면은 뭐가 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주님이 호명을 해줬기 때문에 이게 문제에요. 주님이 이름을 호명 한 것은 맞지만 내가 아는 주님이 호명 하지는 않았어요. 따라서 내 이름은 새로운 주님이 와서 호명해 줄 때, 내가 전에 알았던 주님 말고 새로운 주님이 나를 호명해 줄 때, 지금 내가 알던 주님과의 나의 관계 말고 이거는 끊어져야 되고, 새로운 주님이 나를 다시 호명해서 있게 되게 되면, 이 관계는 지난번 나의, 내가 생각했던 관계가 헛빵이라는 것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그런 새로운 관계로 주어지는 겁니다. 함께 오래 있었다고 해서 조금 더 가까워진 건 아니에요. 함께 오래 있었다고 해서. 서로 3년 동안 식사 같이하고, 같은 방에 잠을 자고, 동고동락 같이 했다고 해서 많이 봐주는 게 아니에요 그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제자들 측에서 점점 더 오해와 오인을 키우는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오해가 점점 더 이렇게 부풀어지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많이 당황하게 만들어요. 많이 당황했어요? 많이 당황하게. 누구보다도. 그래서 결국은 베드로 입에서 “에이 씨!” 하는 말이 나와요 씨, 오란 씨, 그 씨 있잖아요. “에이 씨!” 비타민 씨, 네? “나, 저 사람을 저주한다.” 기어이 그 말을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제자라 해서 구원 받을 그러한 어드밴티지advantage가 인센티브incentive가 전혀 없어요. 어드밴티지 준적이 없습니다. “열두 제자를 뽑아서 새로운 이스라엘 만들기로 했잖아요!” 이렇게 내세운다면 “그것은 네 쪽에서 출발한 관계다.” 이 말입니다. 일방적 관계지, 네가 주님을 제대로 모른 채 주님께서 로봇 팔처럼 뻗어있는 그 관계는 아닌 거예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살면 살수록 내가 갖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이 탈탈 털리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다 탈탈 털리는 겁니다. 소꿉놀이 하면서 손에 모래 한 움큼 쥐고 한 움큼 이렇게 들고 있는데, 저녁 먹으러 오라 하는데 애가 저녁 먹는 게 급해서 자기 손에 묻은 흙, 모래 알, 진흙 덩어리 그냥 그거 들고 숟가락 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걸 허락합니까? 부모가? 강제로 끌고 가서 화장실에 가서 손 높이 해서 다 씻어내지요? 말 안 들으면 때려가지고 막 울지요? 다 깨끗하게 검사 맡고 그래서 숟가락 쥐고 밥 먹게 하잖아요. 내가 생각했던 식대로는 탈탈 털리는 그 세월이 성도의 남은 평생의 세월이다 이 말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요. 베드로가 예수 이름을 불러버리면 이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그 자기에게 주도권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남이 부른 게 아니고 내가 불렀다는 겁니다. 누구를? 예수라는 이름을. 이 이름은 예수님이 원하는 이름이 아니에요. 예수 이름은 인간이 먼저 부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먼저 불러줘야 돼요. 처음에도 그랬고 후에도 마찬가지고, 주께서 베드로 이름을 호명을 하게 되면, 호명을 하게 되면 여기에서 이름들이 있고 이 이름들의 집합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처소’라고 합니다. 이름들의 집합. 그런데 누구 이름? 누가 누구의 이름을 부여하지요? 베드로를 부르면서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베드로야!” 라고 부르는 게 아니고 누구 이름을 부여합니까? 이야~ 진짜 이거 어려운 대목이다. “베드로야!”하고 누가 이름을 부릅니까? 예수님이 불러주지요? 예수님이 나중에 부활하고 찾아가잖아요. “베드로야!” 부르잖아요. 그게 베드로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불러준 베드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에는 자기가 베드로라고 인식하고 자기가 예수를 믿는, 그런 주님은 나를 부르고 나는 주님을 부르는 그 관계가 같이 공존하는 그러한 이름이라면, 나중에 예수의 부를 이름은 뭐냐 하면은 베드로를 불러줬을 때 그 베드로란 이름조차도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누구한테서 나왔다?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 그래야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특징은, 천국의 특징은 누구 이름만 높인다? 예수님 이름만 높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가득 차 있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이럴 때는 하여튼 또 적절한 예를 또 줘야 돼. 스쿼시라는 거 알아요? 스쿼시? 저는 한 번도 구경도 못했는데, TV에서만 봤는데, 이렇게 해서 짧은 라켓 들고 이렇게 벽 쳐서 상대방 둘이, 좀 이렇게 좀 잘나가는 30대 재벌 3세들, 드라마 때 스트레스 받는다 싶으면, 둘 다 거기 가서 화풀이 할 때 치는 거 있잖아요. 좀 사는 애들, 마치고 난 뒤에 머리 치키면서 코카콜라 마시고 나오는 거 있잖아요, 온 폼은 다 재면서 나오는 거 있잖아요. 스쿼시, 스쿼시 한번 보세요. 스쿼시 사각형이 있다면 여기 뭐가 난무 합니까? 뭐가 충돌돼요? 공이 온 사방에 부딪히고 하고 가득차지요? 주의 이름이 온 사방에 가득 찬 그것이 뭐냐? 그게 천국이단 말이에요. 아들의 나라 이 말입니다. 주의 이름만이, 주의 이름만이.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떻게 이야기 했어요? 내 이름 거기 있다 하는데, 여러분의 이름 없어요. 베드로라는 게, 베드로가 베드로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야곱이 이름이 뭐로 바뀌었지요?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이 그 이름이 누구 이름이에요? 야곱의 이름 아니에요. 누구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그게! 하나님이 붙여준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기능이 그 이름대로 기능이 유지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후손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싸우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이름 하나님 엘과 이방신과 싸우니까. 이삭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습니까? 이삭이라는 이름은 적절해요. 이삭은 부재의 존재입니다. 없어요. 없는데 뭐부터 출발했어요? 이름부터 먼저 주어졌지요? 없는데? 오늘 요한복음 14장하고 똑같아요. 없는데 이름부터 먼저 주어졌어요. 그럼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냐 하면 태어날 이삭의 이름이 아니고, 그 이름을 짓게 한 하나님이 자기 기능을 이삭처럼 성취시킬 내용을 담고, 이름이 먼저고, 그 이름을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서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삭이라는 머슴아를 하나 태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머슴아 이름이, 이름이 뭐라고? 이삭, 웃음이죠?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에이~ 뭐 이 나이에 무슨 아들을 낳을까?” 비웃어서 웃었던 웃음이고, 태어나고 난 뒤에는 좋다고 웃는 웃음이에요. 그 웃음에 하나는 비웃는 웃음과 좋다고 난 웃음. 그 과정, 그 과정에 누가 개입했어요? 그 이삭에 합당한 진짜 이름 되시는, 그 이름으로 작동할, 일하실 언약의 하나님이 그 이삭을 통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역사 속으로. 뭔 말을 알아듣는지 난 모르겠어요. 베드로의 인생은 없어요. 주님의 한 파편을 보여주는 거예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다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사울이 뭐 됐어요? 바울까지. 바울의 인생은 사도 바울 본인의 인생이 없어요. 바울은 죽었어요. 죽고 그 안에 누가 살았습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누구 인생이에요? 바울 인생이 아니고 주님 인생이지요? 주님이 바울이라는 인간을 통해서 아바타를 통해서 계속 자기의 기능을 계속해서 끝까지 반복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그대로 끌고 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하는 처소를 가지고 천국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처소가.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이 하나님 나라에요.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희락과 평강이라. 주께서 성령 안에서 주의 기능이 계속해서 발생되고 있는 거, 발생되고 있는 거, 그게 바로 하늘나라에요. 한분 어디 갔어요? 오는 거 봤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왜 저쪽 처소에가? 이쪽 처소인데. 자, 처소 개념이 베드로가 오해한 이유가 처소 개념에 본인이 중심에 있었어요. “나 어떻게 하겠지?”라고 생각 한 거예요. 다 자기를 포함시켜서 처소 개념을 생각한 겁니다. 왜냐 하면은 자기는 자기 이름을 갖고 있으니까, 내 베드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자기는 “주께서 나를 이렇게 베드로 되게 했습니다.”고 자기는 믿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믿고 있어 버리면 자기는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하면 뭐를 포기 못합니까? 주께서 하신 이 나를, 필히, 반드시 어떻게 해주실 것이라는 자기 부인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한 실수가 누구한테 있었느냐 하면은 바로 이삭에게도 있어요. 이삭. 이삭이 부재의 존재잖아요. 부재의 존재인데 이삭이 태어나고 난 뒤에는 이삭 본인이 바로 하나님의 복의 자손이라고 자부 한 겁니다. 왜? 하나님의 계시가 그러니까.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은 자기가 결정적 실수를 할 때입니다. 복의 근원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들에게 복을 전수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걸로 알았어요. 권한이 있어요. 권한은 있는데, 에서에게 가야될 그 복이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야곱에게 갔지요? 이게 이삭은, 아버지는 아들 에서를 밀어주려고 했어요. 에서를. 밀어주려고 했는데 야곱한테 가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여기서 우리가 질문은 뭐냐 하면은, 왜 처음부터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하면, 아무 말씀 자체가 말썽거리 자체가 없잖아요. 왜 야곱을 뒤에 태어나게 해서 이삭으로 하여금 혼란을 유발 시키느냐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의 취미를 사냥하는 쪽으로 하지 말고 집에 그냥 곱게 있는 그런 취향으로, 야곱한테 만약에 정이 가도록 한다면 역시 축복을 줄때도 혼선이 일어나지 않을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맏이, 맏이가 좋아져서 어쩔 줄 몰라요. 진짜 이거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이거는 뭐 불공평한 게임이었어요. 세상에 공평하게 “똑바로 해라. 내가 복 줄게. 스타트! 시합 시작!” 이래야 되는데 한쪽은 일방적으로 다 몰아붙인 거예요. 그래서 퍼센티지가 저 에서는 44% 저 심, 이름 뭐지? 심상정은 8%, 이래놓고 이게 게임이 돼요? 이게 게임이 되냐 말입니다. 안되지. 왜 주님께서는 꼭 끝에 반전을 일으키십니까? 그게 도대체 주님께서 뭘 얻고자 그렇게 하시나 뭘 얻고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의 것이에요. 예수님이 주님 되기 전까지는 천국은 예수님 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주님이 되셔야 돼요. 그 일은 아직도 요한복음 14장에서 남아 있어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죽임을 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존재로 생각해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라” 이렇게 존재로 생각 한 거예요. 기능으로 생각한 게 아니고, 뭔가 해야 될 기능이 남아 있다는 생각은 안하고 “까짓것 예수님 옆에 있으면 떡 붙어 있으면 그게 처소지 뭐가 처소야!”라고 생각 한 거예요. 이러한 오해는 아브라함도 오해했고, 이삭도 오해했고, 야곱도 다 오해 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약속의 자손인지 알았는데 아니고, 이삭은 큰 아들 에서가 축복의 자손인지 알았는데 아니고, 야곱이었고, 야곱이 역시 내가 복의 근원이라 생각했는데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었고, 그 이스라엘 된 야곱이 내가 믿어주는 요셉이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요셉은 부재의 존재, 죽어버렸고. 없고, 없고. 계속 그런 식으로, 계속 미래로 밀고, 밀고, 밀고, 밀고 하면서 결국은 이 세상에는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의 자손 누구 밖에 없습니까? 이건 다수가 아니고 복수가 아니라, 단 한명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나머지에 있는 사람은 곁다리였지요. 그러면 곁다리는 떨어져야 되겠지요? 그래서 다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다 떨어지는 이유가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아들밖에 없기 때문에 다 떨어져야 돼요. 그렇게 떨어지면서 떨어질 때 그것들이 뭘 갖고 떨어집니까? 그들이 뭘 갖고 떨어지겠지요? 각자 이름 갖고 떨어지겠지요? 이름이 있는 곳에 아까 뭐가 있다 했습니까? 이름 있는 곳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처소가 있지요(이름=처소). 인간이 만약에, 여기 베드로라면 베드로의 처소가 뭐냐 하면은 베드로만 있는 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알고 지내는 동창생, 고등학교 동창생, 뭐 저기 친척, 엄마부터 해서 자기 이름과 관련된 모든 것을 가지고 이걸 처소라고 합니다. 이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부재 속에 자신의 주인공이 채택한, 그 채택된 현존’ 없는데, 내가 불러주는 “얘들아 이리 오너라!” 하고 불러줄 때, 다 모이는 그 현존을 가지고 처소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얼굴은 못 봤지만 들었던 이야기에요.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 없어요. 안 좋은 소리를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서울에 사는데, 서울에 살다가 대구만 오게 되면 꼭 내가 서울 사는 내가 대구 왔다고 전부 다 연락해서 집합하라는 거예요. 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반갑다 친구야~” 한번 해보자는 거예요. “반갑다 친구야!” 그러니까 여고 동창생들끼린데, 여고 때 별로 또 유명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자기는 과거 찾아서, 과거의 낭만 찾아서 대구 오랜만에 내려 왔는데, 전화 달라 하니까 전화비가 나가잖아요. 귀찮고. 그래서 한 사람에게 해서 전부 다, 지 전화 말고 친구한테 해서 다 전화해서 한번 얼굴 보자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문자로 뭐가 없다 하면 그것을 사가지가 없다고 해요. 사가지가 없다. 사가지가 없다는 거예요. 혼자 지 혼자 기분 다 내고 있어요. 다들 바쁜데, 요새 50대 후반 아줌마들이 다 바빠요. 다 바쁘고 손자 키우면 또 빠져나가지를 못해요. 다 바쁘거든요. 지가 뭐라고. 지가 뭐 대통령 영부인도 아니고 지가 뭔데 다 소집, 총집합을 해야 돼요? 그런데 왜 그 여고 동창생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지어낸 거 아니에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왜 그래요? 자기가 서울에 있으면서 혼자 상상 한 거예요. 나의 처소를, 나의 처소를 옛날 대구에서 고등학교, 이러면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데.. 대구의 출신, 대구의 여고 출신들 그때가 그리운 거예요. 여고시절. 이수미의 여고시절의 가사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가사가 보면 아주 약간은 현실을 모른다 하는 내용의 가사가 나와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변치말자 약속했던’ 젊은 분들 이 노래 모르는구나? 이수미의 여고시절. ‘변치말자 약속했던’ 이게 됩니까? 지금 이수미가 나이 60이 넘었는데 18년 벌써 40년이 넘었는데 세상에 “변치말자”가 돼요? 이 세상에 “변치말자”가 되던가요? 목사님, 그 교인 “변치말자” 되던가요? 다 나가버리고, “변치말자” 되던가요? “변치말자”될 사람이 베드로도 안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못 넣게 하는 겁니다. 니 중심의 집합은 안돼요. 진짜 “변치말자”를 할 수 있는 그 집합의 주인공은 누구 밖에 없다?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만큼 할 수 있는 그런 바탕을 준비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들이 도망친다 할지라도 지구 끝까지, 지옥 끝에 가도 반드시 잡아 당겨서, 전부 모아 잡아당길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해야 되겠어요? 안 마련해야 되겠어요? 마련해야지요. 그 마련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다시 올게!” 하지만 베드로 네 중심의 처소는 그 가운데서 날아가 버린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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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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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