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삼상 7:3-5) 대전 24강
꿈 (삼상 7: 3-5) 대전-24강
이근호
2017년 3월 28일본문말씀: 사무엘상 7장 3-5절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 7: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삼상 7:5)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사무엘 상 7장 3절 부터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할 때는 그만한 권리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할 권리가 무엇이죠? 뭘 해줬다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자격을 가지고 명령하느냐를 우리가 모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하면 우리가 아쉬울 때만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요.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그만한 권리를 깔고 명령하시거든요.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지시와 명령을 할 때 그것만 보지 말고 무슨 자격으로 지시와 명령을 하느냐? 하나님과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지시와 명령을 그냥 따르기만 하게 되면 항상 틱! 틱! 거리게 되지요. “뭘 해줬다고? 꼴랑 인생 이렇게 만들라고!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해 놓고 양심도 없나? 뭐 잘했다고 이렇게 나에게 이거하라 저거하라 명령하느냐” 말이죠.
지시와 명령을 할 수 있는 권한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증오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증오라 하는 것은 미운 것, 밉다는 겁니다. 증오의 하나님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선 많이 들어 봤지만 증오하는 하나님에 대해선 처음 듣지요? 증오를 내용으로 갖고 있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굴복하는 하나님입니다. 원래 얘들 키울 때 엄마가 애들에게 굴복하잖아요. 애들은 그냘 밥 달라! 젖 달라!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 어디 커서 보자!해도 해 줄건 다 해주지만, 하나님의 증오는 심판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심판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 성당이나 옛날부터 오늘 날도 마찬가지지만 뭘 로 쳤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는 말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건 잘못된 거에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다는 것은 없는 데서 만들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라는 권리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장 9-1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없앨 수 있는 거에요.
어떤 경우에? 원래 창조 했던 취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없애버리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월호 애들, 차가운 물속에서 200여명이 죽었는데 얼마든지 하나님이 죽이실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죽여도 감사해야 되지요. 나의 애를 죽이심으로 비로소 얼마든지 하나님이 죽이실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이제야 알게 되었음을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요. 끝까지 원망하고 있어요. 그 부모뿐만 아니고 온 국민이 나서서 원망하고 있어요.
교회도 나서서 원망하고 있어요. 전부 다 책임을 하나님이라고, 애꿎은 머리 올리고 다듬던 박근혜만 당했지 실제 책임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 책임자이지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네 얘도 한번 죽어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하는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였어요. 그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동안 도대체 뭘 믿고 있었어요? 교회에 가서 뭘 믿었어요? 자기 아들도 버리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될 게 아닙니까? 나의 얘를 챙겨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교회를 뭐로 보냐 하면 절간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기도해주고 기도 대행금 받는 거에요. 기도 처소 만들어 놓고 기도 대행금 받는 곳이에요. 아무 상관도 없어요.
하나님이여! 지시와 명령은 나에게 하지 마라! 나도 당신처럼 신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쉬울 때만 도와줘! 이거에요. 딱 이거에요. 내 것, 내가 원하는 것은 건드리지 마라에요.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보탬이 돼 이것을 저해라는 요소로 등장하면 당신을 믿지 않겠소! 라는 것이 밑에 깔려 있는 데 그게 바로 악마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악마가 예수님과 적이 되는 이유가 너만 신이냐? 나도 너처럼 신의 대우를 받아야 되겠다는 거에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신처럼 높아지겠다는 것처럼 창세기 3장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 전체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할 때 녹아져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든 증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사랑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일반 인간들은 이미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 마음 씀씀이가 악마가 갖고 있는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이전 받은 겁니다. 악마의 마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건들지 마라에요. 선악과 따먹은 이유가 나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겁니다. 신의 특징은 뭐냐? 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거에요.
5월 6일 날 우리 교회에서 젊은 부부가 소박하게 결혼식을 하는데 주례 설교를 벌써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주례를 부탁하길 래 왜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 혼자 살지 왜 하느냐? 제가 묻는 이유는 인간은 항상 홀로 신이 되는 거에요. 홀로 신인데 결혼을 한다는 말은 두 개의 신이 서로 만나는 것이거든요. 두 신이 만나서 살아야 나오는 게 뭐겠어요? 티격태격 싸우는 일 밖에 뭐가 있겠어요?
원래 날 때부터 신이고 악마인데, 결국 결혼하는 이유는 무지에서 오는 거에요.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결혼하는 거에요. 착각해서, 나는 홀로 신인데 아마 네가 내게 굴복하게 될껄! 이런 착각으로 하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하지 말라고,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 주제 파악을 위해서 결혼케 하는 데 결혼을 해봐야 정말 마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마귀구나! 알게 되는데,
결혼을 하면 무엇을 챙겨야 하면 되냐 하면 이것을 알아야 되요. 고통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요구 할 권리가 아닌 반대로 남의 요구에 의해서 내가 고통 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해요. 네가 없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고통을 너로 인해 고통이 생겼을 때 고통을 감래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면 처음부터 오해의 연속이 될 뿐이라는 거죠. 이미 결혼 한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하게 어쩔 수 없고 모든 관심을 자식에게 돌리지만.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에게 부모가 기대를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식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거지요. 내가 여기 있다면 남편이 옆에 있고 자식이 있다면 그들이 내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로 인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고통이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을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고통이라고 표현 했지만 창세기 3장에서는 저주, 땅이 저주 받았다는 것.
우리가 사는 땅이 빼도 박도 못하게 매일 새로운 고통을, 저주를 숙제 받듯 부여 받게 된 겁니다. 그 저주는 우리를 향한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오야봉인 사탄에게 주는 겁니다. 힘들고 어렵게 되면 사탄은 하나님께 회개할까요? 그대로 반항하고 저주를 퍼부을까요? 저주를 퍼붓겠지요. 그 중간 과정에 인간들이 악마가 시키는 대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인생을 망치게 하고 내 자식을 3년 동안 물에 담가 놓느냐? 이런 식으로,
“보상금 4억 6천이 다냐? 교실 하나 비워라!” 그렇게 못 받은 사람들도 있는데 정치적인 조직이 되고 말았어요. 민주당은 그것을 이용하고 전부 박근혜가 머리 손질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현실로 오늘 날 정치 상황으로 얼마나 잘 반영해주고 있습니까? 감정 이입이 돼서 “나는 나라에 대들꺼야!” 그 사람이 나라에 대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지금 모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나라에 대해서 감사할 때는 산길을 좋은 차를 타고 가다가 아스팔트길이 아니고 자갈길이 나올 때 10m정도 나오다가 다시 아스팔트길이 나올 때 뭐가 고마움이 나오냐 하면 역시 대한민국이 잘 살긴 하는구나! 이런 산길에 아스팔트길을 놓았으니까 그때 고마워해요. 그냥 쭉 아스팔트길이면 고마운 줄 모르는데 아스팔트에서 자갈길 나오다가 다시 아스팔트길 나올 때, 이것이 국가 간접 기간 시설이거든요.
예전에 일본에선 이것을 쫙 다했잖아요. 국민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돈 빌려 가지고 소득을 증가시키고 소득이 증가되면 시장에 소비가 활성화하게 되고 기업이 투자를 하게 되고 계속해서 자금의 회전이 되면 이것이 자본주의 운영 방식이에요. 신 케인즈 경제정책(New Keynsian Economic Policy)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아쉬울 때는 나라에 고마움을 표현하더니만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의료보험 적용이 되면 나라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북한에 가서 살던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이라고 표현 할 때는 분명 마귀 중심을 염두에 두는데 사람들은 악마 자체를 인정을 안해요. 왜냐하면 자기중심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거든요.
악마는 자기중심을 숨기는 겁니다. 악마는 언제 나타나냐 하면 숨어 있던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같이 안 나타나요. 왜냐하면 악마의 최후의 적수는 메시야에요. 하나님이 아니고 메시야라니까요. 그러면 메세야가 아닌 다른 것이 나타나면 악마는 웃는다고요. 왜냐하면 다 자기가 부리는 종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에선 뭐가 나오냐 하면 신이 나오고 천사도 악마도 나오겠지요. 이런 것이 다 자기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악마는 웃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다 가짜거든요. (자기중심에서 나온) 신 또는 삼위일체, 메세야, 복음, 성령, 악마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로 웃습니다. 진짜 예수가 나타났을 때 이제 악마가 긴장하며 왜 때도 아닌데 일찍 오셨습니까? 하지요. 진짜 메세야가 나타나면 악마는 긴장을 하는 데 그 와중에 내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이 아닌 상태에서 메시야가 일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면 악마는 비상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6장에 나오지요. 베드로가 “그러실 수 없습니다. 주님과 우린 한 편이잖아요.” 하니까 네가 나를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자기를 어떻게 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이것이 자기중심이 아니잖아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교회도 교회 중심으로 갈 때는 마귀는 그냥 나둬요. 왜? 어차피 마귀의 전당이니까,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마귀 나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아요.
(마 16:24)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5)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데 어느 날 그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 한다면 악마가 가만있지 않지요. 그의 하수인인 목사를 통해 전하는 사람을 쫓아내라고 관섭하겠지요. 결국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말이 복음적인 것이 맞지만 교회가 와해되잖아요. 복음은 맞는데 교회가 깨지면 안 되잖아요 그 말이잖아요. 십자가 복음은 맞는데 우리 집안이 힘들면 안 되고 분열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라는 거에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의 병을 고쳐준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십자가 복음을 전했어요. 그래서 만약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병 고쳐진다는 의미 자체가 없어져요. 왜냐하면 병이 나에게 생겼다는 것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최적화된 사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하면 감사히 받아들여야 되지요. 병을 안수해서 고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병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교회에서 병을 고치는 전문 권사나 이런 사람들이 생계유지가 안 되지요. 돈 생길 구석이 없으니까 삐지고 난리 나겠지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증오하고 파멸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지시와 명령을 한시는 겁니다. 뭐라고 지시 하셨습니까? 너희는 아스다롯 이방 신들을 섬기지 마라 이렇게 명령하신 거에요. 이 명령에 담긴 취지는 오늘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애굽에 히브리인들이 있어요.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히브리 종족이에요. 히브리인에서 이스라엘이 되려면 인간의 힘으론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야 돼요.
어린 양의 피를 발라야 되고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그것도 밤 중에 건너 오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히브리인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모세가 가나안 따에 살다가 넘어 왔잖아요. 여기서 오늘 강의 중 제일 중요한 부분이 뭐냐하면 잘 들으세요. 모세가 애굽으로 갔다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 순간 이 가나안 땅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예전에 있었을 때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양치기 할 때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그러나 약속의 민족이 나타나서 가나안 땅을 밟아 버리면 그 순간 가나안 땅은 옛날로 중립적인 속성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 이스라엘이 오든 안 오든 나무나 숲과 들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한번 약속의 땅에 오게 되면 이 땅에서는 저주 아니면 축복, 둘 중 하나뿐이지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선희 노래처럼 ‘아! 옛날이여!’ 다시 못 돌아가요.
그래서 만약에 복음을 들었잖아요. 듣고 귀를 씻으며 난 안 들은 것으로 할래 해도 이미 들은 이상은 지옥 아니면 천국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이 반발을 하던 호응을 하던 더 듣고 보자, 그것은 상관없어요. 이미 복음을 들었으면 그 다음은 빼도 박도 못합니다. 이게 구약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지우개의 역할이 지우기 위함이듯 지우개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 저주 아니면 축복, 축복 아니면 저주, 사랑 아니면 증오, 증오 아니면 사랑, 이미 새로운 규칙이 덮쳐 버렸어요. 덮쳐진 것을 ‘아! 옛날이여!’ 해서 옛날로 돌아가자 해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민족 입장에선 이스라엘 민족이 안 올 때가 더 좋았어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오는 순간 그들은 ‘다 죽었어!’가 되듯 이것을 이스라엘을 통한 심판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다라고 하는 거에요.
가나안 민족이 어떤 신을 섬기던 아스다롯은 여신인데 바알의 아내이고 바알의 어머니는 아세라입니다. 여기서 바알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지도 상 좌측에) 지중해가 있고 현재의 아라비아, 이라크 있고 터키, 이란이 있잖아요. 이곳은 사막인데 산맥이 있고 숲도 있고 사막에서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가나안 땅에 옆에 사해가 있고 헐몬산이 있는데 여기에 뜨거운 바람이 와서 비가 안와요. 완전히 메말라 버려요.
3월에서 10월 까지 건기입니다. 농토건 뭐건 싹 말라 버려요. 그러면 못 살잖아요. 그런데 바람이 그렇게 불다가 다시 10월에서 3월까지는 지중에서 습한 바람이 불어오니까 비가 오는 거에요. 그러면 아휴~ 살았다! 에요. 이런 비를 이른 비라 하고 늦은 비라 하는 거에요. 늦은 비는 여호수아서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을 늦은 비라 이야기해요. 늦은 비라는 말은 온다는 거에요. 우리에게 물어보고 오는 게 아니고 무조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고 무조건으로 온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과 바알과 무슨 관계가 있냐? 이렇게 바람이 불 때 가나안 사람이 이겨내면 살고 못 이겨내면 죽기 때문에 신을 섬겨야 된다는 거에요. 어떤 신이냐 이쪽에서 부르게 하는 신이 (바다의 신)인 얌인데 바알이 얌 신과 싸워서 이기게 되면 적당량의 비가 오게 되면 바알이 최고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바알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이것이 ‘주’(主)라는 뜻인데 ‘엘’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모든 신의 아들이 바알이에요. 주인 또는 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구약에 계속 나와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하늘에 따라서 농사가 잘되고 안 되고 잘되면 살고 안 되면 굶어 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신에게 아부해야 되고 뇌물도 바쳐야 되지요. 바알 종교는 신앙심이 극심해요.
어떻게 극심하게 섬기냐 하면 자기의 아들을 신에게 뇌물로 바칠 정도입니다. 시체를 벽에 도배를 해서 이 정도로 우리는 신에게 전적으로 맡겼으니 우리를 살게 해 달라! 아들은 죽이고 자긴 살고 남는 장사가 아니지 않냐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에겐 종족이 더 중요해요. 아들은 또 낳으면 되지만 우리 가문, 우리 씨족은 자식 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목숨 하나 바쳐서 집안을 지키는 것이 후손 된 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유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요.
그런데 바알이 저쪽 신에게 져서 가뭄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바알은 풍요와 비, 바람을 불게하고 폭풍이 오게 하는 풍족의 신이고 가축이 질병 없이 잘 자라게 하는 신인데 건기 때는 전쟁에서 패배 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바알)패배하면 죽었다고 보는 거에요. 남편이 죽었으니 아내는 어떻게 해야 되요? 가만있으면 안되고 아내인 아스다롯이 죽음의 신을 사후 세계로 찾아가요. 끈질기게 찾아가요.
모트(Mot)라는 죽음의 신을 찾아가서 싸워 승리하고 보니까 자기 남편이 죽어 있거든요. 그 죽은 남편을 되 살려 올 때 부활하는데 3월에 새싹 날 때 땅에서 죽은 씨가 올라오는 것처럼 이 때는 큰 잔치를 여는 겁니다. 다시 혼인 잔치를 여는 거에요. 매년 혼인 하지요. 바알과 아스다롯이 혼인 할 때는 기를 부어줘야 되고 힘을 부어 줘야되잖아요. 힘을 부어주기 위해서 신이 하는 행동을 똑같이 신전에서 남자와 여자 제사장들이 고객인 신도들과 더불어 성 파티를 여는 겁니다.
왜? 힘을 북돋아줘야 신도 용기를 가지고 결혼을 해서 비를 많이 내리기 때문에 참 희안하지요. 희안한 이야기가 바로 구약에 나오는 바알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주변의 관계성입니다. 이 주변의 관계성이 오늘 무엇과 관련이 있냐 하면 꿈과 관련 있어요. 주일 낮 설교에서 했던 ‘I have a dream.’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꿈은 현실에서 잠시 안식하며 잠자다가 꿈을 꾼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주도권이 현실에 있겠어요? 꿈에 있겠어요? 현실에 있겠지요. 그러나 정신 분석학에선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늘 꿈꾸다가 꿈이 힘들 때 잠시 현실로 온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꿈의 주 내용이 뭐냐하면 현실에서 마음에 안드는 상황이 꿈에 나타납니다. 가게를 차렸는데 손님이 하나도 안 올 때 이러면 안돼! 하고 식은 땀 닦으며 깨어보면 다시 현실로 아휴~ 한시름 놓았다고 하지요.
정신분석학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맞는 이유가 사람은 가혹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가혹함을 잊기 위해 더 큰 범주의 꿈을 염두에 두고 현실을 이겨내려 합니다.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만 나중엔 자식이 크게 될 거에요. 큰 일꾼이 돼서 어머니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할 꺼야! 부모가 특히 엄마들의 꿈은 뭡니까? 자식의 성공이다는 말이죠. 나는 너만 잘되면 된다는 말은 부담이 되는 말이에요. “나중에 잘 되서 입 싹 닦기만 해봐라!” 이건 협박 같이 들리거든요.
항상 꿈이 잘되기 위해서 몸을 사리는 것, 이게 바로 교회 다니기에요. 교회 나올 때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어요. 그 꿈을 사실 은근히 숨긴 채 힘든 현실 속에서도 이렇게 빳빳한 돈으로 십일조 갖고 왔습니다. 받으시고 음! 그 다음에 말 안해요. 하나님이니까 다 아시죠? 음! 제가 뭐라 하는 지 눈치 차리셨지요? 이게 뭐냐하면 바알이에요. 바알이 요새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습니다가 바알 믿습니다로 되었습니다.
꿈이 인간을 인도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누가 인도하느냐? 현실이 내 인생을 인도하는 게 아니에요. 꿈이 나를 인도하는 거에요. 그래서 꿈이 없으면 수 백 억을 가지고도 자살을 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밥 주고 옷 줄 테니 군대에 갈래? 하면 뭐라 해요? 될 수 있으면 빠지고 싶어 하지요. “우리 아버지는 빽도 없어! 날 빼 주지도 못하고” 원망하지요. 왜 군대 가는 것을 싫어할까요?
그것은 군대에 가는 것이 내 꿈이 아니기 때문에 군대에서 월급 주고 입을 것 주고 안 때리고 할 테니 군대에 갈래? 해도 안가려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돈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꿈을, 자기가 사랑하는 꿈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거든요. 내가 꿈을 꾸지만 나중에는 그 꿈이 나를 조정하고 나를 다른 인간으로 바꿔버립니다. 그 꿈속에는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 지은 본색이 나타나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꿈입니다. 이 꿈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에요. 자기사랑이지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좋게 말해서 어떤 것도 이겨 낼 수 있고 그런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서 사랑이 떠나가 버리면 어떤 경우라도 꿈을 접고 자진해서 자기를 파멸시켜 버려요. 이럴 수 없다는 거에요. 이별하고 난 뒤 돌아오면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는 거에요.
얼마나 충격 받았으면 너무 쇼크 받아서 어떻게 나에게 이별이라는 말을 하느냐 내가 얼마나 믿었는데 심지어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도 했거든요.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할껄! 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는데 그러니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해놓고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는가? 그 노래가 ‘이별의 끝은 어디 인가요?’ 나중에 한 번 들어 보세요. 어떻게 돌아왔는지~ 이게 이별의 끝이에요.
만약 그게 여자라면 화나면 뭐를 하겠어요? 립스틱 쫙 바르겠지요. 그게 ‘립스틱 짙게 바르고’에요. 이별은 이별이고 나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모든 대중가요가 뭐가 깨졌어요? 현실이 깨진 것이 아니고 꿈이 깨졌어요. 그래도 밥 먹고 있고 집에 가면 강아지가 꼬리 흔들고 있고, 마~ 발로 팍! 차 뿌릴까! 어디서 꼬리를 흔들고 있어! 주인이 힘든지도 모르고!
바알 종교에서 우리는 한 번도 벗어 난 적이 없어요. 그것이 기독교든 천주교이든 상관없어요. 모든 인간은 구약에서 바알 종교를 언급한 이유는 꿈이 그의 희망이고 꿈이 그의 미래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이고 천주교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간단한 겁니다. 그 꿈을 조져 놓는 것, 그 꿈을 박살내는 거에요. 동시에 교회도 박살나는 거지요. 빳빳한 돈으로 십일조 낼 이유가 없지요!
“으음~아시죠? 이거 뇌물로 받으시고 30배, 60배, 100배로..”이런 계산, 작전 벌일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지금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돈 내라고 장소 제공하고 자기 꿈을 달성하게 되면 자기 90%먹고 교회가 10%먹고 그것이 십일조라는 거에요. 받아 챙기고 내는 것도 있고, 주식에서도 선물 매매하는 것이 있거든요. 주식 오를 줄 알고 미리 당기는 것. 이게 더 큰 믿음이라는 것.
그래서 장차 복 줄줄 믿고 뇌물을 바치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 장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탓 하지 말고 무엇을 깨야 됩니까? 자기 꿈을 깨야 되는데 꿈을 깨면 사람은 자살을 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집어넣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과 아스다롯을 마주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내부 전쟁으로 이들을 의도적으로 깔아 놓으신 거에요.
우리는(이스라엘) 하나님 편이고 저쪽은 악마 편이 아니라 그 악마 쪽을 너희가 얼마나 좋아하고 친근하게 느끼는지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산 속에서 혼자 기도를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산 속에 들어 가 있더라도 한 번씩 5일 장에 가야 됩니다. 5일장에 나와서 신발 살 때는 좀 깎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되요. “천원 만 깎아 주소!” 깎고 오다가 붕어빵 사가지고 오든지 하는 투쟁을 해야 되요. 사람은 싸워야 되는 거에요.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꿈에 놀아났다는 것, 내가 원했던 꿈이 아니고 이미 저주 받을 꿈이 나를 점령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령군을 누가 쫒아 냅니까? 주님이 아니면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낼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약속의 땅을 뭐로 보냐 하면 우리의 고향으로 봅니다. 고향은 뭐냐하면 출생지에요. “집사님 출생지가 어디이지요?” 대전. “예, 역시 땅이군요!” 땅에서 이미 죽었고, 출생지가 어디에 나오냐 하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출생지가 십자가입니다. 흙에서 태어난 인간의 출생지는 흙이지만 예수님의 새 언약에 의해서 새 언약을 내용으로 새로 만들어진 사람의 출생지는 십자가에요. 요한 계시록엔 어린 양의 제단이에요. 하늘나라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죽기 전에 유언이 뭐냐하면 자기 시체를 애굽에 묻지 말고 고향에 묻어 달라는 거에요. 그게 막벨라 굴이에요. 그 막벨라 굴이 무슨 굴이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굴입니다. 그 지역 자체가,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어느 곳을 여행하듯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듯 지평선이 있는 곳, 같은 땅, 같은 평지에서 평지로 이동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약속의 사람들은 땅세서 출발 했는데 활주로 같이 비행기가 땅에서 가다가 활주로에서 공중으로 떠 버려요. 그러면 그렇게 먼저 시도한 비행기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다니다가 분명히 십자가로 곤두박질 한 것 같은 데 사흘 만에 부활해 버렸다구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이 뭐냐? 예수님이 죽는 그 지점이 복음이다. 십자가가 왜? 그 십자가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부활에 참여함이 없기 때문에 빌립보서 3장에 나옵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여 십자가로 간다. 그것을 고향 찾기, 고향이라 하는 것은 낯선 곳이 아니고 우리가 태어난 곳이에요.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서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몰라요. 너무나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져 육신의 욕망과 욕구에 시달려 왔으니까 그 십자가를 요한복음 장에선 내 살과 내 피가 아니면 영생이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디에서 나오는 가? 새 언약에서 나와요. 새 언약이란 아버지와 아들이 확정한 이미 확정된 거에요. 확정된 것을 완료, 모든 게 완료 된 거에요.
완료된 것에서 계속 찍어 내는 겁니다. 살과 피로 찍어 내듯 영생을 찍어 내는 거에요. 영생을 찍어 낸다는 말은 영생의 운반체를 계속 찍어낸다는 거에요. 바로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계속 찍어 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에 의해서,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풍선 이야기를 했지요. 그 풍선이야기의 테마를 어디서 끄집어 냈냐하면 MBC 라디오에서 4시에 하는 게 있어요. 전에는 조영남, 최유라가 했던 방송을 라디오 시대라고 다음에 정선희, 문천식이 했지요.
거기서 나오는 ‘참 우스워요!“ 라는 내용 중 하나에요. 풍선 두 개 이야기. 세상에는 자기가 살아온 해냄 풍선 하나 밖에 안되거든요. 해냄 풍선 하나 밖에 없는데 여기에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난 자아가 있으니까 풍선을 두 개 가지고 있어요. 버리면 안돼요. 우리 마음대로 버릴 수 없어요. 비교해 봐야 되요. 나의 옛 사람과 나의 새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는 지를 그리고 예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나에게 꿈을 요구하고 있어요.
꿈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 인간 대우를 받으려면 꿈을 크게 키워야 돼! 지난 번 우리 목사님 말씀 들어 봤지? 시편에서 입을 벌리면, 아가리를 크게 버리면 그만큼 꿈이 주어지지 아가리를 작게 벌리면 꿈도 작게 된다. 무조건 Boys, be ambitious! 야망을 가져라! 아가리를 크게 벌려야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는 그런 식으로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의식. 된다! 된다! 하면 교인 5천명이 된다는 거에요. 되지요! 마귀가 도와주니까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기존의 풍선을 계속 키워나가는 거에요. 훅! 불어서~그런 것은 바늘로 찌르면 한 순간에 가 터져 버립니다. 악마의 꿈이지요. 악마의 꿈과 비슷한 꿈이 거위의 꿈이 있지요. 그게 악마의 꿈이에요. 또 비슷한 노래가 마법의 성이라고 있어요. 가사가 산 넘고 물 건너 너를 구하러 갈테니까, 기다려라! 저기 보인다. 미래가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이 보인다. 전부 현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주어지는 그런 것을 제가 요번 수련회 때 언급을 했습니다.
연속되어 있다. 현재의 나와 연속된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단절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갈라디아서 3장 6절에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천국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니까. 폴 워시인가? 하는 목사, 맥아더인가? 하는 말을 제가 들어 봤거든요. 완전히 이단이에요. 그게 그렇게 인기가 있어요? 그들이 주장하는 게 뭔지 압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까 여러분 알아서 주를 영접하면 천국 갑니다. 그 이야기에요.
성경에 그런 내용 없어요. 왜? 우리는 중립이 아니니까 내가 생각한 천국과 지옥은 다 누구 중심이다? 아까 했지요! 내 중심이죠. 그게 바로 마귀가 만든 천국과 지옥이고 마귀가 전파하는 복음인거에요. 예수를 영접하세요? 예수가 무슨 ~입니까?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달리 이야기 합니다. 네가 걸림돌에 넘어져라! (롬 9: ) 넘어져야 되요. 심지어 사람에게 버림받은 거에요. 버림받은 돌이 성전 모퉁이 돌이지 버림받지 않은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자기가 알아서 버리는 것은 자기 낮춤이에요. 비우고 또 비우는 건데 그런 건 몽골 선교사 보고 잘하라고 하세요. 복음이 없어요. 혹시나 싶어 들어 봤는데 뭐 이런 게 다 있어요! 여러분! 지옥 가지 말고 천국 가는 게 남는 장사입니다. 이게 뭐에요? 사기꾼이지요. 그런 천국 누가 가겠어요? 그런 천국에 가면 뭐가 있겠습니까? 나 예수 믿었다 그게 남아 있을 게 아닙니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아요.
이스라엘은 하나의 지우개라니까요. 본인이 구원 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죠. 본인이 구원받으려고 껄떡대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께선 지우개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내부를 바깥에 있는 언약을 내부로 집어넣는데 그것을 뭐라고 하냐 마음의 할례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신의 할례는 뭐냐하면 생식기의 끝을 잘라내는 겁니다. 왜 생식기 끝을 도려 내냐 하면 남성의 생식기가 자식을 낳게 되는 표징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낸다는 것이 그런 상태에서 자식을 낳게 되면 육의 자식이 아니라 약속의 자식을 낳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할례 자체가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를 낳아야지 육의 자녀를 낳으면 안된다. 이방인 같이 자녀를 낳으면 안된다는 것이 할례이고 이것을 어디까지 확장 시키냐 하면 마음의 할례 까지 에요. 마음의 할례는 마음을 도려내는 겁니다. 마음을 도려낸다는 말은 마음속에서의 꿈, 환상이 나오는 거에요.
환상은 바알을 섬기는 가나안 민족들처럼 너무 살기 힘드니까, 왜 살기 힘들다고 했어요? 창세기 3장에 주께서 일부러 아담의 후손을 저주 받게 했기 때문에 반항하듯 신에게 대드는 거에요. 이런 것을 도려내는 거에요. 마음을 도려냈다는 말은 완전히 바보 등신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빈 그릇처럼 되겠지요. 도려낸 분의 하실 일, 앞으로 하실 일로 채워 주시겠지요. 그 작업이 그동안 꿈으로 채웠던 그 마음을 도려내라는 말이죠.
그 담음에 뭐로 채우냐? 바로 너 같은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앞으로 나올 거에요. 그러면 그들이 그 고통에 참여 하는데 5절에 보면 금식하면서 미스바에서 기도 하는 것, 죽어도 좋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마음. 나는 꿈을 꾸는 재미로 살았는데 바로 이것이 꿈을 꾼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꿈을 유지하기하고 고수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젠 죽이던 살리던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맡기니까 기적적으로 블레셋을 이기고 승리하는 거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