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강-고후 6장 11-13절(마음을 넓혀라)170430-이 근호 목사
234강-고후 6장 11-13절(마음을 넓혀라)1704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 11-13절입니다. 신약성경 291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11-13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상당히 감정이 많습니다. 진심으로 살리기 위해서 복음 전했는데 뭔가 그 복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로막고 있는 그 차단막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걸 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음이 복음을 차단시킬 때 흔히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은 다 맞는 것 같고 복음이 참 좋은 것은 아는데 마음이 안 땡기네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마음이 안 땡긴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일부러 약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실제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오늘 본문대로 하면 마음의 문이 열린 거예요.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의 문이 닫힌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간단해요. “내가 마음 문 열고 여러분에게 다가갔으니 여러분도 마음 문 좀 열어주세요.”라는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자식처럼 이야기하는데 마음 좀 열어주세요, 라고 했어요. 이 마음이라는 것이 사도바울 쪽에서 활짝 열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마음은 뭐와 같은가? 마음은 문의 역할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사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에 뭔가 꽉 차 있는 거예요. 터질 듯이 꽉 차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문만 싸악 열면 사도바울에 꽉 차 있는 것이 이제는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백날 쏟아져 나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 문을 닫아놓게 되면 바깥에 뭐가 있는지 상관없이 그들 안에 복음이 들어올 수가 없지요. 지금 고린도교인들이 그런 형편입니다. 그런 형편인데 그러면 마음 문이 닫혔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처지에서 복음이 들어오는데 마음 문을 계속 닫아둔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 문 뒤쪽, 안쪽에 상당히 수상하고 복음에 대해서 공격성향을 가진 괴물이 들어앉아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얇은 막 같아서 누가 건드리면 터지게 되어 있어요. 마음이 무엇이냐?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인 오해가 뭐냐 하면, 내마음 내 맘대로 한다고 하는데 인간은 마음은 절대로 자기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좋은 가방 보면 걸고 싶고, 차보면 타고 싶고, 드라마에서 깡패들이 현찰뭉치 빼았고 빼앗기는 것을 보면 그 돈 탈취해서 도망치고 싶고, 좋은 옷보면 입고 싶고, 좋은 집 보면 그 집에 들어가서 살고 싶고, 가구 집에서 침대보면 눕고 싶고, 뷔페 들어가 보면 다 먹고 싶고, 좋은 남자 좋은 여자, 멋진 남자나 예쁜 여자 보면 뒤따라가고 싶고요. 마음은 뭐냐 하면, 외부의 자극이 나의 것으로 내면화 된 것이 마음이에요. 외부의 자극이 나의 것으로. 이걸 쉽게 하면, 경험이 반성에 의해서 마음이라는 관념이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위의 경험에서 반성을 하게 되는데, 골라잡아 편성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강화되는 것이 나의 의식으로 강화가 돼요. 그래서 세상은 이렇다,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놓습니다. 한국의 정치가 문제라서 나라도 나가서 대통령을 해야 된다, 라고 김순권 박사가 나오려고 하다가 3억이 아까운지 쑥 들어갔단 말이지요. 한국정치라는 외부의 그 자극이 그걸 보는 순간 대통령 하고 싶다는 거예요. 누가? 본인이. 본인이 자기의식으로 전환되어서 나는 앞으로 한달 뒤에 대통령이 된다는 이런 모습을 상상할 수 있잖아요. 플래카드 걸고요. 아직도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직도 걸려 있어요? 없어요? 언제 뗐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그 사람뿐만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좋은 것이 있고 애들 영재프로그램 나오면 자기 애 째려보면서 “재는 벌써 네 살 박이가 2개국어 한다는데 너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만날 과자나 사달라고 조르고.” 이렇게 된다고요. 외부에서 일어나는 자극이 내 마음으로 만들어져요.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요. 외부의 자극이 내부에 오면서 그냥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되면서 내가 외부의 자극에 대해서 내 욕구대로, 임의로 편집하는 그것을 가지고 반성이라고 합니다. 선택, 선별, 골라잡는 것, 저것은 내게 이익이다 혹은 손해다, 이런 것을 추려내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마음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얇은 막이라고 했는데 그 막이 굉장히 수상해요. 마음인데 첫째 그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원래 마음 바깥에 뭐가 있느냐 하면, 외부환경이 먼저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외부환경이 있는데 그 외부환경이 나라는 이 신체를 통해서, 눈, 코, 입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면 어떻게 해서 이게 마음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문제를 낸 거예요. 어려운 문제를 억지로라도 내는 겁니다. 첫 번째가 그겁니다. 내 마음이 된다는 그것. 한 번 더 이야기할까요? 복음을 전하는데, 이상하게 안 땡긴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면 내 마음이라는 거예요. 갑자기 마음 앞에 ‘나’가 붙어요. 내 마음입니다. 갑자기 나라는 그것이 왜 생겼느냐 그 말입니다. 외부환경에는 나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내 신체에 경험이 누적이 되면 내 마음이 되느냐는 말이지요. 이것은 나의 마음이라고, “이것은 손대지마 내 마음이야. 간섭하지 마. 내 마음이야.”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는 말이지요. 철학적으로 분석이 안돼요. 너무 어려워서. 집안에서 애가 크잖아요. 전에는 엄마 아빠가 하는 대로 깔깔대고 웃곤 하다가 돌이 지나고 드디어 16개월쯤 넘어서게 되면 그 때는 거부의사를 밝혀요. 부모가 요구하는 대로 재롱 좀 부려보라고 해도 거부의사를 밝힌다고요. 보통 자의식이 생기는 것이 1년 8개월에서 24개월까지로 봅니다. 왜 안 해? 말은 못하는데 내 마음이라는 거예요. 기껏 부모님이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이 결국 이기적인 내 마음으로 뭉쳐지게 누가 그렇게 했느냐 그 말입니다. 누가? 누군지 쳐다보면 거기에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뭐냐? 동일한 환경에 사는데 왜 사람마다 자기 마음이 다 다르냐는 겁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되는가? 지금 이 문제를 풀어야 돼요. 복음 전하니까, 내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니까, 그것은 내 마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문제가 어떻게 풀리느냐 하는 거예요. 이 문제가 풀리는 것은 사도바울 본인의 경험에서 찾을 수가 있어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도되기 전의 사울 때. 그러면 우리가 물어봅시다. “사울 당신은 왜 그런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하면 사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 네가 왜?”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랬던 그인데 어떻게 그 마음속에 복음으로 가득 찼습니까? 그 과정을 추적해보면 알 수 있겠지요. 외과의사 같으면 칼 들고 그 마음을 째보고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 마음도 째보고 제 마음도 한 번 쭉 째보고 싶어요. 도대체 우리 마음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감사한 일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예수 믿고 곧 죽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 백 살이 넘도록 계속 살게 하는 것은 스스로 믿음이라는 것이 탈탈 털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 남은 시간들입니다. 믿는다 했는데 막상 어떤 외부환경, 외부자극이 주어지게 되면 탈탈 털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경에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우리 마음이 활짝 열려서 그것을 동의하고 있지만 산책하는 길에 떨어진 가방을 열어보니 거기에 돈이 한 수천만 원이 들어있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2천만 원 들어 있었는데 꿍쳤다가 걸려서 다 게워낸 사람이 있습니다. 처벌을 받았는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돈을 현찰로 보게 되면 우선 챙기고 싶어져요.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다보면 파군재 삼거리를 지나는데 거기가 차를 가지고 고사지내는 장소로 유명하거든요. 이상규 집사님은 차 새로 샀는데 왜 안 지내나 몰라. 아마 중고차기 때문인가요? 산책길에 보니까 파인애플이 박스채로 있어요. 딱 들어보니 17킬로에서 20킬로 나가요. 그걸 들고 700미터를 들고 오는데 팔이 빠지는 것 같아요. 그 가운데 걱정하는 것이 뭐냐? 내가 직접 들고 올 것이 아니라 차로 가지고 오면 될 것이 아닌가. 과일하고 떡하고 잔뜩 들어 있어요. 좋은 차를 샀으니 그렇게 제사를 거하게 드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내가 차를 가지러 간 사이에 누가 가져가버리면 어떡하나. 그것도 새벽 5시 50분에. 도저히 안 되겠어서 직접 들고 오다가 얼마나 힘든지. 그거 가지고 오면서 느낀 것은, ‘야, 가장이라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는구나.’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가위가지고 우리 마음막이라는 것을 째보면 그 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그 말에 대해서 개코나! 이런 반항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요.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를 하니까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거기서 사도바울이 토 다는 것이 있어요.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행 28:25-28)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마음이라는 막, 그 뒤에 있는 어떤 괴물은 괴물스스로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반길 수 있는 어떤 자율적인 자유의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은 믿어서 천국 오는 것은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다, 확정짓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 거예요. “너희들은 말씀에 입각해 보면, 네 마음이 안 땡긴다고 핑계를 대는데 그것은 핑계일 뿐이고 네 마음 막 그 배후에 자리 잡은 그 괴물로 인하여 너는 꼭 지옥가야 해. 지옥 가야 되고말고.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거야.”라고 통보하는 용으로 지금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하고 난 뒤에 안 믿는다고 해서 너무 서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서 복음 전하는 본인은 저 사람과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어떻게 나는 이 복음을, 맘 문이 열려서, 이 속에 괴물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을 훌쳐 보내시고 성령이 들어와서 복음과 함께 살게 했는지 이 은혜에 또 다시 감격하고 고마워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 재미로 살아요.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구원했는지, 기쁨으로 산다는 말이지요. 기쁨을 유발하는 그 과정에서 들러리로 동원되는 것이 고린도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름은 고린도교회지만 사실은 사도바울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들의 형편은 이런 형편이라는 것을 제대로 통보해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마음이 얇은 막에 불과하다면 그 뒤에 있는 괴물은 대체 누가 집어넣었으며 그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아주 적합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러면 그 말씀은 가만히 있는 말씀인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만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만물에 관여하고 있다는 말은 인간 만드는데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 하나님이 인간 만들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믿지 않는 피조물, 믿는 피조물까지 전부 다 형성하고 만들어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권세, 모든 피조물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잖아요. 지금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이겁니다. 예수님이 원천이고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내가 전할 테니까 너희들은 맘 문 열고 굳게 잡아서 내 복음을 받아들여라.” 이걸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이 자기 마음을 조절해서 복음을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마음인데 인간은 이 마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마음이라고 ‘나’를 집어넣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가방이 있으면 걸고 싶다. 누구에게? 내 어깨에. 여기에 ‘내’가 들어가잖아요. 가구점에 침대나 의자가 있으면 저기에 앉고 싶고 저기에 눕고 싶다. 우리 집에 가져와서 내가. 나, 우리 집에.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것은 뭐냐? 안 믿는 사람들의 그 뒤, 어두운 자리에는 어떤 힘이 있는데 그 힘은 모두 하나로 응집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나’에요. 나로 응집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수상한 세력, 어두운 세력, 검은 세력, 그 괴물이 나로 하여금 나라는 것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러한 검은 세력이 왜 인간 속에 작용하는가? 창세가 3장에 나오지요. 뱀이 아담에게 하는 말이 창세기 3장 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로 하여금 독립하라고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피조물노릇이나 하면서 질질 끌려가는 인생 살래, 이렇게 된 거예요. 누가요? 마귀가. 마귀는 왜 그런 소리 합니까? 마귀 본인이 그걸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귀 마음이에요. 마귀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독립합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요.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것, 장차 세상을 예수님중심으로 편성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악마가 눈치 채서 거기에 대해서 싸움을 벌이다가 쫓겨나서 패잔병으로 땅에 밀려 내려와서 땅에 사람이 있으니까 사람에게 찾아가서 꾄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 한 그것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쓰지 말라.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이유가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그것이 천기의 비밀인데 신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한 것이다. 그러니 따먹어라. 그래서 따먹으라고 꾀니까 아담은 따먹게 되었어요. 따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드디어 마귀가 똑같은 마음이 되었다는 겁니다. 나는 나다. 독자적이 되었어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을 내가 골라잡아서 내것 만들 수 있는 자격과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음막으로 딱 가려져 있어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사람들, 소위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아까 복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예수님이시다.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돌리는 것이 복음이에요. 복음은 하나님 이야기가 복음이 아니고 아들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포함해서 세상 모든 종교나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 중심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중심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나님중심이 되기를 원하는데 마귀는 하나님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수가 마귀가 아니고 예수님 원수가 마귀에요. 욥기에 보세요. 마귀는 하나님 앞에 딱 무릎 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에는 반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뭐냐? 반복할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의 계획은 자기 아들을, 예수님을, 또는 말씀을 세상의 주로 만드는 겁니다. 그 계획은 창조 후에 만든 계획이 아니고 창조 이전에 이미 그것을 설정해놓고 그 계획에 맞춰서 모든 피조세계를 깔아버린 거예요. 심지어 마귀까지 다 그렇게 만든 겁니다. 아담은 마귀한테 말려들었고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아담 자체가 자기밖에 모르고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것이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권리행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정상이 아니고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복음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면, 악마의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이 뭐냐? 나는 여기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부터 존재하는 거예요. 어떤 차를 보고 그 차를 타고 싶다. 새 옷을 보고는 그 옷을 입고 싶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느냐? 그것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어디서 생겼느냐? 내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음이 있기에 마음을 쓴다는 거예요. 그 마음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모른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쓰고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고 있고 살고 있다는 이 주장을 하거든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어디서 막히느냐 하면, 마음에 딱 막혀요. 교회 나와서 예수 믿으려고 하면 그 막힌 내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버려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예수 믿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믿는 가짜 믿음이라고요. 나는 예수님 이야기가 좋아보여서 내가 예수 믿을 맘먹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나는 예수 믿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믿어놓으니까 약속대로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따놓은 것이다. 그 다음에 또 어려울 때 기도하라고 하니까. 내 마음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하고 싶은 그 마음을 가지고 나는 기도해서,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잘 먹고 잘 산다. 예수 믿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 보너스로 나는 잘 먹고 잘산다. 열심히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복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러니까 당신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마음에 펑크가 났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당신 마음에 구멍이 뚫렸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 마음에 구멍이 뚫려야 돼요. 북한 미사일에 와서 내 마음에 구멍을 뚫어버리면,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를 믿어? 이것은 말도 안 돼.’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창호지처럼 복음에 마음이 뚫려버리면. 천국 가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선택했던 이 마음자체가 가짜고 이게 마귀가 막을 쳐놓은 거예요. 그 막이 뚫어져야 돼요. 복음 전하다가 “당신 목사가 이단이네.” 하면 남의 목사를 왜 공격하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남의 교회를 왜 비난하느냐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내 교회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내 교회. 그 내가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내 입장에서 믿고 안 믿고 내 마음으로 결정하겠다는 그게 바로 악마의 마음이에요. 구멍 뚫리지 않은 악마의 마음이라니까요. 내 교회 있고, 내 교단이 있고, 내 종교가 있고, 내 자식이 있고, 내 돈이 있고, 내 부동산이 있고, 내 인생이 있고. 여러분, 그 ‘나’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외부의 환경에서 자극받은 것을 악마가 거기다가 구성해 놓은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라고 이미 마음씀씀이 자체가 악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어떤 것도 나 좋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내게 이익이 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는 것은 평생을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백세가 되도록 계속 그렇게 살아요. 앞으로 계속 평생을 그렇게 살 거예요. 나밖에 모르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고 난 뒤에 자기가 알았던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시커먼 먹물, 배설물이라는 이름으로 토해놓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사도고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종의 먹물품은 오징어. 오징어에 먹물이 가득 쌓인 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째보면 먹물이 언제든 퍽 터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먹물이 나와요. 대인관계나 가게를 옮긴다든지, 이사를 간다든지, 콩나물 하는 흥정을 하면서도, 차 박아서 시비 붙을 때도 퍽 하고 먹물이 나와요. 교인들끼리 이야기하는 가운데서도. 만약에 내가 예수 믿기로 결정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 필요 없어요. 하지만 동행이 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먹물이 터지는 겁니다. 계속해서 면도날로 우리의 내부에서 돌아서면 또 생기는, ‘내 맘이다. 왜?’ 이걸 찢어버리고 펑 터지면 우리 얼굴이 먹물로 뒤집어쓰고 ‘죄인입니다.’ 해놓고 몇 분도 안가서 ‘내가 잘해서 은혜 받았지’ 하고 다시 갑자기 막이 생기는 거예요. 마치 도배하기 위해서 풀을 만들어 놓으면 어느새 막이 생기지요. 걷어내고 돌아서면 또 막이 생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한 번만 예수님의 십자가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단 하루라도 예외 없이 늘상 동행하시는 주님의 돌보심 아니면 우리는 천국 갈 수 없는 겁니다. 그 다음에 문제가, 그러면 마음의 막을 터뜨려야 되는데 이걸 어떤 식으로 터뜨리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시기 전부터 성령께서는 모든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성령께서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말씀 전체를 가지고 다가오고 그리고 그 전체를 다 이루신 것은 예수님 십자가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이게 하나님의 법망에 갇힌 인간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태초에 무엇이 있었다? 말씀이 있었지요. 그 말씀이 믿든지 안 믿든지, 지옥가든지 천국가든지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그 말씀의 망을 씌워버렸어요. 어떤 인간도 말씀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아버립니다. 이걸 쉽게 알 수 있는 영화가 있어요. 아가서 크리스티라는 소설가의 원작인데 <오리엔탈특급살인사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반응들 보니 안보신거 같아요. 파리에서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가는 호화로운 열차의 침대칸에 13명이 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동승한 탐정한테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어요. 그 다음에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데 그 결과는 뭐냐? 13명 모두가 다 범인이었어요. 한 사람에게 원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소설의 반전입니다. 보통 우리상식은 그 중에서 한 사람이 범인이라고 하는데 동승한 열세 명 전부가 범인이에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죽게 한 범인은 내 돈 떼먹고 도망간 그 사람이 아니고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 부모, 자식, 남편, 아내, 모든 사람, 그리고 나를 혹하게 만든 백화점의 어떤 옷을 걸어놓은 점원아가씨까지, 값비싼 시계를 진열해놓음으로 나로 하여금 차고 싶게 만든 시계점 주인까지 다 나를 죽게 한 범인이에요. 나를 지옥가게 만드는 범인입니다. 주께서 말씀의 망 속에 적절하게 배치를 해놓았어요. 어느 인간도 네 마음으로 구원받는 일은 일체 없다. 결혼식 앞두고 있는 사람보고 이런 이야기를……. 나로 하여금 더욱더 죄 짓게 만드는 요인들로 다 엮여 있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나무열매 같아요. 그 순간 혹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들고, 거기에 푹 빠지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때로는 울게 하고, 때로는 나로 하여금 웃게 하고, 그렇게 만든 모든 요인들, 그 요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복음에서 시선을 빼앗게 하고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들로 작용하게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살아가면서, 어느 한 순간이라도. 따라서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성령에 의해서 오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악마로 꽉 차 있는 악마의 마음가지고서는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제는 그 방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날씨 탓인지 분위기가 가라앉았어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놀이동산을 제가 가본 적이 없는데 놀이동산에 귀신집이 있거든요. 애들 데리고 귀신 집에 들어가서 꺅! 꺅! 놀라면서 죽 돌아 나오는데 들어가기는 열다섯 명이 들어가는데 나중에 나오면서 숫자 세보니 열네 명밖에 없어요. 하나 어디로 갔겠어요? 하나는 분명히 귀신이 발목 잡고 잡아당겼어요. 귀신 집에 갔다가 통과해야 되는데, 들어갈 때의 그 열다섯 개의 마음가지고 나올 때도 나와야 되는데 그 중 한 개의 마음이 없어져버렸어요. 귀신이 발목 잡아서 나하고 같이 살자고 잡아당긴 모양입니다. 당긴 그 모양새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뭐냐? <치킨 런>이라는 애니메이션 치킨 캐릭터가 있어요. 볼링 핀처럼 생긴, 잡아당기면 죽 늘어지는 것이 있어요. 쭉 뽑히는 것처럼 우리가 뭔가 발목을 확 잡히는 거예요. 우리는 내 맘대로 산다고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왜? 존재에서 존재기 때문에. “태어났기에 살련다. 왜?” 이런 식으로 살아가거든요. 내 마음이다 왜. 그런데 마음이 어디서 생겼는지도 몰라요. 내 마음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왜. 죽 가는데 여기서 뭔가 발목을 잡아서 확 당기는 겁니다. 누가? 주님이. 주님의 성령이 잡아당겨버리면 그 사람은 졸지에 주님의 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사람이 돼버리는 거예요. 열다섯 명 가운데 혼자서, 혼자 그렇게 뽑혀버리는 겁니다. 그게 이사야 17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17장 7절에 보면,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 그 긴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납치당한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아니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민족의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태초에 천지를 만드신 분과 연결이 되어 있어요. 교류가 가능한 민족이 이스라엘민족입니다. 아까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여호와이름이에요. 여호와에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로 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내세워서, 말씀을 내세워서. 따라서 다른 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이스라엘민족은 천지를 만드신 분과 교류하고 있는 거예요. 접선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악마에 속한 인간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으로 그렇게 성립이 안돼요. 그래서 네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시키는데 그 제사가 뭐냐? 네 마음 말고 네 마음을 얹어 이동시킬 대리자를 세우라 하는 거예요. 그 대리자가 어린양, 또는 제물이고 그 대리자를 잡을 대리자까지 만들어요. 대제사장을 만들어서 대제사장이 제사하는 행위 속에서 하나님은 원래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이스라엘 전부에게 그 안에서만 공개하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거룩한 내 백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대할 때 이스라엘은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셨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엄청난 오해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겁니다. 마치 요새 우리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이것이 엄청난 오해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맞지만 기존의 육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진짜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면서 가지고온 약속이 있어요. 그 약속 안에 진짜배기 이스라엘이 들어 있습니다. 그 진짜배기 이스라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짜 이스라엘이라는 어두운 세계속에서 고난과 고생과 핍박과 오해를 받는 경험 속에서, 죄속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긍휼로 뽑아내는 식으로 자기 이스라엘을 뽑아내는데 그걸 세자로 남은자, 영어로 remnant, 남은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구약전체를 듣고 계신 거예요. 남은자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어디 가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로 가거든요. 그런데 아들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면, 아들이 계신 곳이 아들의 나라에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찾지 마세요. 그것은 아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를 추적해서 찾아가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수난을 받았는가를, 그 길을 따라가야 돼요. 십자가로 가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 가신 곳에 갈 수가 없고 예수님 가신 곳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입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세상 안으로,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힘이 작용하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요. 들어가게 하면서 성도는 뭘 느끼는가 하면,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는데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그 나가 사실은 주님에 의해서 뚫어져 나가야 할 가짜 나라는 사실을 날마다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진짜 나는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구성되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새롭게 말씀에 의해서 날마다 구성되는 겁니다. 날마다 만들어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할 때 그 나라는 것은 두 가지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개의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바람에 날리는 메모지와 같아서 하루를 사시거든 메모하셨다가 다음날 되면 그걸 날려 보내버려야 됩니다. 낙서가 되어 있는 메모는 귀한 것이 아니거든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겉사람은 날려 보내고 속사람은 새롭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끝내려고 하니 도저히 지금 분위기가 납득이 안되는 분위기인데 고린도전서 7장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7장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나도 같이 딸려서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그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속의 마음은 날마다 마음이 생겨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생깁니다. 내 마음 생기는 것은 날려 보내라고 주께서 또 허락하신 내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참 좋다. 누가? 내가 좋다. 오늘까지만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까지만 좋아하시고 내일 되면 날려 보내세요. 내일 되면 또 ‘아, 좋다.’ 또 생길 거예요. 또 ‘슬프다. 죽어버릴까? 외로운데 죽어버릴까?’ 가만있어요. 가만있어도 죽어요. 가만있어도 죽으니까 죽어버릴까를 쓰시고 그걸 날려 보내세요. 내일 되면 또 ‘야, 더 살고 싶다. 이렇게 좋은 세상’ 또 무슨 변덕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흔들기에요. 주께서 이런 경험도 하게하고 저런 경험도 하게 하면서 네 속에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아집, 그것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겁니다. 내가 떠났다는 겁니다. 그 떠난 세계, 그 세계에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냥 떠나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이 떠나는 느낌. 매일같이 나는 이별한다. 노래 가사 같다. 매일같이 뭔가 이별하는 느낌, 떠나는 느낌. 그러면서도 다시 내일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지는 그 마음. 이 마음, 허깨비같은 마음. 인간은 자유의지도 없고, 나도 없고, 주께서 그냥 만들어주시는 ‘나’일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한 말씀 외에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데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라고 모든 것이 주어지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주신 펑크 난 마음으로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