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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70414b히13장16절(신분 변화)-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안양20170414b히13장16절(신분 변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제사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전에 있는 제사는 제사장이 양을 잡습니다. 주님이 시켰습니다. 이렇게 받았는데 오늘 13장에 들어와서 제사라고 할 때는 ‘아, 이 제사가 그냥 형식적으로 양 잡고 한 그게 제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이미 예수님이 행했던 제사에 우리를 집어넣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쫓아가서 갈보리에 올라가서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면 사시다가 십자가 졌어요? 사시다가 십자가 졌어요. 그러면 제사라는 것은 십자가만 달랑 제사하지 말고 태어나서 사셨던 모든 것을 주님의 제사로 보셔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실 때 주위에서 주님에 대한 수많은 공박과 비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었잖아요. 그게 제사요건에 포함이 돼요. 제사 요건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제사 드린 건 아니고 제사 안에 들어있으면 주님이 당했던 그 넓은 의미의 제사를 우리도 한평생 반복하면서 다 부여받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선을 행하다. 선을 행하되, 17절 한 번 봅시다. 조금 어렵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오직 선을 행하되, 그 다음을 이야기해 보세요. 선을 행하되, 그 다음 단어는? 서로.

이 서로는 가족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혈육적인,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미 나보다 먼저 대기하고 있던 그 분 아니에요. 동생으로 태어났으면 나보다 누가 먼저 있습니까? 태어나자마자 형이 있지요. 그렇게 있는 서로를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나를 태어나게 한 아버지, 어머니가 먼저 우리 가정을 선점하고 있지요. 그 서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서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그 공중부양, 예수님의 새로운 초대된 사람들의 묶음, 뿌리, 집합, 그게 서로에요. 그러니 이 대목이 얼마나 어려워져요. 이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 되기 위한 실천자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이라는 주체밖에 없어요. 예수님이란 주체.

아까 끝 시간에 제가 한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절대 주체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게 되면 우리는 그 절대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게 없지요. 만약에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자율권을 발동해 버리면 주님이 절대 주체가 안 돼버려요. 그저 사귀는 게 되니까. 주님, 우리 좋게 지냅시다. 그리해서는 구원이 안돼요. 가만히 있어보자. 주님이 내가 믿을만한지 안 믿을만한지 믿는다는 자율권을 발동해! 아! 즐길 테니까 우리가 한 번 믿어봐! 이러면 나의 주체가 여전히 살아있어요.

그런데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벨도 마찬가지고 노아 방주 자기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주체가 완전히 노아에게 침범했지요. 장악했지요. 장악하니까 노아는 졸지에 무슨 사람이 됐느냐 하면, 믿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믿는 사람.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기존의 믿음하고 다른 것은 이게 뭐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이 이리 있다. 인간은 자기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발휘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여기서 믿음을 끄집어내요. 따져보니까 믿어도 이익 될 것 같은 지성, 그 다음에 저 사랑은 내 사랑으로 가져와서 나도 얻게 사랑할 수 있겠다 하는 기대, 그리고 의지. 내가 결정했어! 라는 의지. 이게 맞는 믿음은 나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11장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점선으로 표시해야 돼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서 여기서 시작이 되어서 나에게 이게 꽂혀버린 겁니다. 노아 방주 아이디어 어디서 나왔습니까? 노아에서 나온 게 아니거든요. 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신자들만 알아듣는데, 만약에 불신자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칩시다. 그러면 불신자는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내가 아는 요 현실을 바깥에 다 보이지 않는 세계이냐?” 라고 물을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왜? 여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제로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지, 이 밑의 불신자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하면 내가 챙긴 것 외에 다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하면, 이건 허구의 세계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캐나다에서 어떤 먼 친척이 나한테 편지 와서 캐나다에 놀러오라는 편지가 왔다. 하면 진짜 편지 받은 사람은 캐나다 모든 남자가 나보고 놀러오라고 한 게 아니고 그 자기 친척이 따로 있다는 걸 실체를 입고 거기에서 너무 멀어서 눈에 안 보이는 그쪽에서 편지가 온 걸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캐나다에 아무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야! 좋겠다. 니 캐나다 놀러가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캐나다 어디가도 다 갈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거예요. 캐나다 가봤자 딱 친척집에만 갈 뿐인데 이쪽에서는 뭡니까? 우리나라 아닌 캐나다니까 캐나다 전부가 어디 후보감 되는 줄 알고 있다 말이죠. 교회에서 성령세례 받지 않은 사람의 믿는 믿음이 이런 믿음이에요. 자기 세계 말고 전부 다 천국인줄 알고 있어요. 죽으면 천국 간다. 이 바탕이 이런 의식이라니까요.

그게 아니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천국에서 딱 집어서 편지가 나한테 와야 돼요. 그게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믿음과 가짜 믿음과 어떻게 구분하느냐 둘이 싸우게 되어있어요. 가짜 믿음은 타고난 거예요. 가짜 믿음은 진짜 믿음에 대해서 반항하게 되어있어요. 아까 뭐라고 했어요? 길들어져있기 때문에. “내 인생 이렇게 엉망진창 만들어도 됩니까? 신이면 다요?” 이런 식으로 반항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지금 너는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데?” “니는 몰라도 돼!” 이게 진짜 믿는 자에요. 어떻게 남한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는 주님한테 편지받은 이 사항을 저 사람에게 뭐라고 설명합니까? 예수님 계시거든.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는데 예수님의 영이 나한테 와가지고 그 때부터 나는 이상하게 되었어. 나는 이 세상 가족 사람이고 가족과 친해지고 싶은데 이 가족이란 이게 내가 영원히 같이 살 사람들이 아니고 나의 가족은 천국 갈 가족은 복음으로 하나 된 가족이 따로 있어. 그런데 이건 내가 그러고 싶은 게 아니야. 진짜야. 좀 믿어줘! 내가 일부러 동생, 엄마 싫어! 이게 내 취미가 아니고 나는 남한테 욕 얻어먹는 거 진짜 싫어. 싫은데 주께서 주님 가신 길로 핍박받는 길로 가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을 가게 되었어. 너희들이 이런 내가 싫지? 나도 이런 내가 싫어!

갈무리라는 노래를 보면 나훈아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던 이런 내가 싫어! 가사내용이 이미 헤어졌는데 깔끔하게 헤어져야 되는데 헤어져놓고 자꾸 보고 싶다. 누구야! 그러는 내가 정말 싫어!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흥흥거리며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동생이라 해가지고 성상납까지 해가면서 살고자 했겠어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제발 성도가 되었으면 비겁하게 살아라. 추잡이란 말은 차마 말은 못했지만, 추잡스럽게 비굴하게 얍삽하게 살아라. 우리가 할 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니까요. 자기 아내를 거짓말해가지고 그런데 매매는 누가 맞습니까? 거짓말한 사람은 안 맞고 누가 매를 맞아요? 억울하기 짝이 없어. 아비멜렉이 벌을 받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보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검은 먹지로 보는지 아시겠지요. 까~만 먹지에 똑같은 먹지에 자기 백성을 끄집어냈는데 끄집어낸 백성이 먹지에 살다보니까 먹지가 그립고 더 자연스러워. 자꾸 주님은 안 바라보고 자기 떼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아쉬움 같은 게, 미련 같은 게 가득 들어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기어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이끄시는 것. 그게 바로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말이 있어요. 제사. 죽으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반항하는 그것을 이미 제사 안에서는 죽이는 겁니다. 쓰레기를 재활용할 때 먼저 쓰레기를 그냥 재활용하지 않고 파쇄하지요. 파쇄하는 그 기계가 제사입니다. 우리의 이 혈육적인 것.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것. 이걸 세자로 크게 쓰겠어요. 남한테 인정받는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존감’ 이걸 첫 째 시간에는 두자로 이야기했지요. 이게 주체에요. 주체는 자존감입니다. 개꼴이 자존감입니다. 강아지도. 사람에게 길들여져서 그래요. 주체는 자존감이거든요.

이 자존감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이것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예수님. 그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 때문에 살해당한 거예요. 나 때문에. 고 연결될 때 그 연결이 바로 제사에요. 그게 바로 선행이라는 겁니다. 왜 선행을 하느냐, 선행할 때, 서로라는 낯선 인물들이 생겨요. “당신도 그랬어요?” “당신도 호출됐어요?” “나도 호출됐어요.” 서로가 주님한테 호출될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죽을까를 이제부터 연구해야 돼요. 고구마 먹고 죽을까, 안 그러면 어디에 놀러가서 죽을까, 태국가 죽을까, 항상 어떤 걸해도 이건 이 세상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마음을 허락해 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서로를 만나게 한 주님 보시기에 선행이라 하는 겁니다. 오직 선의 행함이라. 아시겠지요.

그 다음에 17절에 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했지요. 인도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우리를 기분 더럽게 하는 일인지를 몰라요. 왜 인도를 해요? 지가 알아서 가면 되는데. 인도를 왜 하는 겁니까?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이 사람들이 인도하는 사람이 틱 틱하는 사람이에요. 왜냐 하면, 주께서 본인들을 인도하면 되잖아요. 각자 인도하면 되는데. 자기가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든다고 뒤에서 참고하듯이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 사람에 대해서 자기 잘못을 인도하는 사람의 내부 문제로 전환시켜버려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옆집 몇 호이지요? 301호. 301호에 있는 그 부부문제를 가정문제를 관계도 없는 나한테 이걸 왜 묻느냐 말이죠. 그럼 주님이 “인도하는 자거든.” 요 내용이에요. 분통터질 일이라니까요.

스데반집사가 왜 돌아 맞아 죽어야 됩니까? 누구든지 돌에 맞아야 구원받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돌에 맞았습니까? 입 다물고 있었으면 돌에 안 맞았어요. 뭘 했습니까? 설교를 했잖아요. 설교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겁니까? 들어 줄 서로라는 사람. 아까 했던 그 서로. 누군지는 몰라요. 하여튼 주께서 마련하는 천국 가는 준비된 서로를 위해서 설교를 해야 그 사람이 ‘아, 주께서 나를 구원하는구나!’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데 돌은 누가 맞아요. 본인이 맞는 거예요. 이게 인도하는 사람이에요. 남의 집 사정에 주께서 나를 집어넣고 내가 얻어터지고 내 잘못 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니고 남 때문에 고생은 내가 하는 식의 사람이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하고 싶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자처하고 지가 하고 싶다고 만약에 인도하는 사람 목사 되어버리면, 내가 당신을 협조해줬으니까 당신도 나한테 보상해 놔라. 이리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백성을 자기 백성이라고 착각해가지고 나는 영혼의 스승이니까 니는 내 말 들어! 이리 나올 수 있다 말이죠.

그게 아니고 남의 일인데도 혼은 본인이 혼을 당하는 본인이 매매 맞는 그런 역할이 인도하는 자에요. 그 관계, 그래서 인도하는 자라는 것은 바로 사도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에 성령 받은 감독자들, 장로들, 집사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이 집사고 모든 사람이 장로, 감독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구원 받기는 몽땅 다 구원받아요.

중간에 이런 은사를, 이러한 은사라 하면 또 좋은 건 줄 알고 그냥 역할, 배역을 맡은 사람들을 집어넣습니다. 사도 바울도 대표적인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즐겁겠습니까?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영혼을 내가 걱정하는 게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걱정하는 분이 있어요. 자, 요 점이 이해가 잘 안될 것 같으면 요거 이야기하면 대번 이해가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한 번 봅시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자, 감독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감독자가 있지요. 본인이 하고 싶어 합니까? 성령이 임해서 합니까? 성령이 임해서. 자,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지정한 감독자 있다. 이 말은 뭐냐, 성령이 오지도 않은 감독자 있다? 없다? 성령이 오지도 않은 감독자 있어요. 성령 받은 감독자 따로 있지요. 자, 남은 것은 성령 받은 감독자와 성령 받지 않은 감독자의 차이만 알면 되겠지요. 문제 간단하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감독자 한 일이 나와요. 하나님이 그 다음에 뭡니까?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리 됩니다. 교회 중간에 뭐냐 하면 십자가. 하나님의 피니까 예수님의 피지요. 예수님의 피로 십자가 있지요. 울타리를 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안에는 뭐만 남아있어요? 하나님의 자기 피만 남아있지요.

그리고 여기에 감독자를 세웁니다. 각 지역에 감독자를 세우게 되면 각 지역의 감독자들은 각 지역의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만 세워지거든요. 피로만. 피. 예수님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기 때문에, 피로 세운다는 말은 이미 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쪽에서 줄 것 다 줬다는 겁니다. 교회 세우는데 하나님이 주고 너희 것도 필요하고 이게 없고 너희들은 이미 손 털었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하고 더는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만 감독하면 돼요? 100%예수님의 피로만 교회 되는데 사람들이 여기 종교성을 가지고 올 것 아닙니까. 교회를 M 자로 하든지 뭘 하던지 해가지고 뭔가 이리 해야 교회 된다. 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이리라는 거예요. 이리.

이리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와요. 29절에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떠난 후에 무슨 이리? 그냥 이리가 아니고 흉악한 이리가 오지요. 그러니까 이 양떼를 노리는 건 뭐냐 하면 이 중심을 인간의 행함으로 점령하자는 겁니다. 이 중심을.

교회 지붕에 십자가 있잖아요. 십자로서는 모자랍니까? 아니 십자갈 피로 구원하는데 모자랍니까? 십자가 피만도 안 되고 피를 알고 우리가 행함에 구원받습니까? 그런 겁니까? 그런 거예요? 아니지요. 인간들이 하는 행세를 알아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였는가를 주님이 아시잖아요. 아니까 절대로 피에 딴 걸 섞어 넣을 생각들이 주변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독자는 뭡니까? 스데반 집사 할 일이 뭡니까?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거 하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완전히 전차가 포크레인이 와서 밟고 지나가듯이 밟은 거예요.

이 말은 감독자는 뭐냐, 피와 같이 더불어 니도 복음을 위해서 죽으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도하는 자에요. 인도하는 자는 살려고 하면 안돼요. 자, 그러면 이 교회에 주님이 지키는데 주님이 지킬 능력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있으니까 이 교회는 절대로 이단한테 흉악한 이리한테 먹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이 세상은 마귀들이 이것과 유사한 교회를 어떻게 합니까? 만들겠지요. 우루루 다 몰려가겠지요. 그러면 이 진짜 감독자들이 스데반집사처럼 돌에 맞을 각오하고 십자가 피만 이야기합니다. 하게 되면 저 쪽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어떻게 십자가 피만으로 구원되는가, 그럼 이 쪽에서 감독자가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내가 믿을만해서 지성으로 감성으로 의지로 요 건 나한테 이익 된다. 죽어서 천당 가겠다. 라는 말만 골라서 내가 의지로서 주체 자유로서 믿고자 결심한 거예요. 주님의 성령이 와서 난데없이 믿게 한 게 아니고 요거 하면 나도 잘되고 우리 집안 잘되고 죽어서 천당 가서 모이겠다. 라는 그러한 상품화된 성경에서 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모은 그것에 혹하고 땡기는 거예요.

물론 성도도 이 감독자가 너무 섭섭해. 왜? 사도바울 같은 고린도후서 다음 주일 설교할 건데 미리 합시다.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거든요. 사도 바울은 죽기 살기에요. 왜? 십자가 죽고 부활한 게 맞기 때문에. 이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이게 제사의 완료이기 때문에 없어요.

사람이 거룩하게 된 것은 히브리서10장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사람이 거룩하게 된 것은 단번에 됐지요. 단번에. 그리스도가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었다. 되어있지요. 그리고 히브리서10장29절에 보면,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다 알아요. 인간 세계에서 어떤 종교가 인기 있다 하는 것을 다 압니다. 다 알고 줄곧 사도바울은 뭐만 외칩니까? 언약의 피만 이야기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계속 이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교인이 몇 명 됐겠어요? 몇 명 되지도 않아요. 왜? 그 편지 뒤에 보면 명단 몇 명 안 됩니다. 어디 사는 누구, 안양에 사는 누구 해가지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명단에 몇 명 안됐어요. 사도바울 중심으로 도와준 사람도 중심으로 적었겠지만, 그 외에도 많겠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아요. 그다지.

그만큼 그 세상이나 오늘날 지금 2017년 4월 14일이나 담쌓는 건 똑같아요. 편지 보낸 이 시대나 지금 시대나 과학이 발달된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과학이 로봇이 어떻게 됐던 관계없이 복음은 계속 오직 하나의 복음 십자가의 피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피로 끝! 그걸 지켜라. 니가 목숨 걸고 그걸 지켜라. 절대로 인간의 행함이 섞이지 않도록 해라. 이걸로 교회 끝이에요. 2명이 되던, 한 명도 없어도 괜찮아요. 숫자로 교회되는 거 아닙니다. 두 명이든 한 명이던 교회 불나도 괜찮아요. 교회 불나도 십자가는 불 안 나니까. 이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을 지켜서 하기 때문에 숫자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측정을 해야 돼요. 숫자가 많고 헌금이 많이 모이면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있고 교인 뚝 뚝 떨어지고 헌금 안 나오면 마귀에게 시험 들었다고 그렇게 해가지고 교인들 또 자꾸 강요를 해요. 어차피 사업이니.

그래서 인도하는 사람이나 인도받는 사람이나 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해야 돼요. 예수만 생각하라. 자, 예수만 생각하라는 말을 설명 드리고 그 다음 진도 나가볼게요.

예수만 생각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비 오는데 예수님만 생각하면 저절로 우산이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렇지요? 어린 애가 고추장 매운 것도 모르고 기어가는데 예수님만 생각하면 애는 괜찮은 거예요? 아이고! 매워! 하고 치워야지요. 예수님만 생각하고 횡단보도 걸으면 덤프차가 박아도 예수만 생각할까요?

자, 예수만 생각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벌이신 일인 쪽으로 우리의 마음이 생각이 거기에 응집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응집되게 되어있어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일 때문에. 고구마를 삶는데 고구마가 밤인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물이더라. 나 죽을란다. 이러지 말라 이 말입니다. 예수만 생각해야 되는데 고구마가 물 되는 거하고 왜 생각해. 그렇다고 고구마 삶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뭘 해도 나한테 주어진 일은 주께서 주어진 일인데 왜 주어졌는가? 그게 사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 그걸 명심하라는 거예요. 네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니가 거기에 목숨 걸지 말라는 거예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거기다가 목숨 걸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서 다 이룬 거예요. 이미.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룬 거예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길이 그 길입니다. 온갖 실연당해도 절망하거나 낙담할 어떤 의무가 권리가 없어요. 왜? 내가 추진한 프로젝트 같으면 아이고~ 안 되네. 이렇게 하겠는데 기도해도, 헌금해도 내가 생각한 건 아니고 아무것도 내가 기여한 게 없다면 이건 실망할 이유도 없어요.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 실망하겠는데 처음부터 나를 생각 안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실망할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아요. 내 자신에 대해서. “바보같이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니는 원래 바보야! 니 바보 아닌 줄 알았어? 예수님만 생각해. 니는 원래 바보야!” “내가 그런 실수 하다니?” “너는 처음부터 실수했어. 실수 안한 게 천만다행이지. 실수 안한 거 끄집어내면 없는 줄 알아? 다 실수야!” 모든 게 인생 자체가 다 실수에요. 실수.

주일 낮에 제가 시편51편 설명했잖아요. 다윗이 죄를 진 게 아니고 죄가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지 니한테 죄를 지은 게 아니다. 그런 뻔뻔스러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는 납니다. 나의 잘남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어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하나님 보시기에 “저, 어때요? 믿음 괜찮지요.” 라고 점수 받을 대상으로서 자기 주체를 아직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못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사태를 주셔가지고 잠시나마 남이 뭐라고 하던지 간에 자기 생각 안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는 그 짧은 순간들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누가복음15장 이야기 유명한 이야기 나옵니다. 탕자이야기 나옵니다. 자, 제가 한 번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 테니까 틀리면 틀렸다고 해 보세요. 탕자니까 새카맣게 그리겠습니다. 탕자 옆에 아버지 하얗게 그리겠습니다. 키 큰 하얀 형님 그리겠습니다. 지금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살면서 이 둘째 아들 탕자는 자기가 이 가족에 사람으로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자기를 위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지요.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는 인간이 타고났다는 거예요. 인간이 타고 난 거예요.

탕자 이야기하면서 처음 시작을 빼버리면 탕자 이야기가 이게 말이 안돼요. 처음부터 보면 얼마나 우리하고 꼭 닮았는지. 사람이 아무리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해도 자기가 아플 때는 자기만 생각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아플 때는 자기만 생각한다고요. 이걸 이기주의라고 욕할 필요 없어요. 원래부터 이기주의에요.

그러면 그동안 왜 남편 챙겨주느냐, 안 아프거든요. 고 순간까지는 안 아프니까 자기는 멀쩡하니까 어여삐 여겨 불쌍히 여겨 “내가 도와줘야지. 남편 돈 번다고 고생하는데 나라도 맛있는 거 해줘야지.” 이리 되는 거예요. 만약에 본인 몸이 아프다. 누가 제일 불쌍해요? 천상천하 내가 제일 불쌍해요. 저것 때문에 낫지도 않는 골병이 들었다. 한약 먹어도 못 고치는 골병이다. 너희들 때문에 치여 가지고 이 몸 망가졌다. 어쩔건데. 책임질래? 아이고~ 불쌍해라. 사람이 일을 힘들게 하다보면요, 눈물이 나와요. 본인이 본인을 보기에 너무 불쌍해. 이 불쌍한 거 보고 나한테 티내려하면 그쪽에 분노가 폭발할 지경입니다. 내 사연도 모르고.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게 불쌍하게 본다고 해서 주께서 이걸 착하게 봅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게 주님의 자기 이야기에 시작이 스타트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탕자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이야기에요.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를 엮어내기 위해서 배역을 맡은 겁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 두 번째 아들이 자기 딴에 견딜 만큼 견뎠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 재산해가지고 여기서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시커먼 탕자 혼자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는 두 식구 남았고, 여기는 이제 자기는 단독 했습니다. 하면서 이 탕자가 자기 안 나갔을 때는 자기 세계의 환경이 형이 있고 아버지가 있던 환경인데, 이제는 독립했기 때문에 자기 환경은 누가 만드는가, 자기가 만들어요. 요게 현대인들이에요.

내가 있기에 내 욕망이 있고, 내 기대치, 내 사랑이 있기에 내가 끌어당기는 모든 소유와 모든 선택사항, 친구는 어떠해야 되고 직장은 어디 해야 되고 내가 미장원의 머리는 이렇게 나와야 되고 옷은 이거 입어야 되고, 모든 선택사항은 누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 탕자가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돈 가지고 어떻게 삽니까? 허랑 방탕이지요. 나라도 먼 나라 갔어. 허랑 방탕하게 살았지요. 그러면 허랑 방탕이라는 말은 자기가 억지로 살았다? 자기가 좋아서 원해서 살았다? 자기가 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허랑 방탕지간에 자기는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겁니다. 이게 현대인들의 주체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른 돼서 인간 망가진 게 아니고 어릴 때부터 이미 그 싹이 있었어요. 그 싹이 노골화된 겁니다. 한국 살다가 미국 이민 간다. 인간됩니까? 아니에요. 한국에서 연, 고대 나오고 서울대 나왔잖아요. 적어도 내가 일류인데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럴 때 세탁소 안하지요. 이대 나와 가지고 세탁소하는 거 봤습니까? 한국에서.

그런데 미국가면 뭐합니까? 다 숨기고 세탁소에다가 생선가게 모든 허드렛일을 다 하지요. 간병인하고 다 하지요. 부끄럽지 않아요. 왜? 이건 독자적인 자기만의 현실이고 세계이기 때문에. 아하! 그런데 뭐가 다 떨어졌지요? 돈이 다 떨어졌지요.

자,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인간이 스스로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되었으면 좀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 어떻습니까? 도와주기는커녕 아버지 재산 다 떨어지게 했지요. 그러면 유추해 봅시다. 자기가 꾸몄던 모든 허랑 방탕이 사라지고 달랑 뭐가 남았느냐 하면, 본인 주변에 원치 않는 환경이지요. 원치 않는 환경.

자기가 나올 때는 포부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고 나는 보란 듯이 아버지, 형이 보란 듯이 역시 내 자식 잘났다. 내가 봐도 내가 잘났어. 자랑질하고 싶어 나갔는데 원치 않는 환경이 오면 본인만 시커먼 게 아니고 자기 환경도 시커머진 거예요. 이때가 중요합니다.

전에는 내가 스스로 착각한 거예요. 나는 멋있다. 나는 훌륭하다. 그게 자존감이라 했지요. 주체가 있는데 환경이 딱 달려드니까 아! 내가 스스로 대단한 놈이라고 한들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아요.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아까 길들여졌다고 했지요. 그 잘난 며느리가 오게 되면 시어머니들이 길들이기 애먹어요. 언제 저 콧대를 꺾나. 이리 하는데 그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요.

그래서 이것은 내가 되고 싶어도 나보다 더 센 환경, 이걸 제가 전에 강의할 때, 권력구조라 합니다. 권력구조. 이 권력구조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탕자가 그 이야기합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탕자 홀로 돌아온 게 아니에요. 탕자가 빙빙 감고 있는 권력구조, 권력구조를 가지고 그대로 탕자가 아버지께로 옵니다.

다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혼자 나오는 게 아니고 그동안 나 여기에 길들였고 나는 이것밖에 안됩니다. 하고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나갈 때는 그래도 아들입니다. 라고 했다가 돌아올 때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되어있지요. 19절에 있지요.

바로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나갔다가 들어오게 하십니까? 탕자처럼 왜 그렇게 하십니까? 안 나가면 본인이 아버지 아들이라고, 성경에 나오는 개념 있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신자, 성도, 좋은 거, 교인, 믿는 자. 전부 좋은 건 지한테 다 뒤집어씌워놓고 내가 마땅히 지금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단교회 가는 거예요. 가가지고 이 권한은 내가 내 선택사항이 아닌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내가 이렇게 저런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이런 곳에 얼추 내가 이미 길들여졌고 뭔가 착한 일하면 복을 더 받는 것 같고 나쁜 짓하면 요번 또 징계 받아가지고 있는 재산 날리는 것 같고. 나의 행복만 생각하는 그게 시커먼 본성이었어요. 이게 본심이었어요. 본심. 뭐 하나님 앞에... 다 거짓말이에요. 인간의 본심은 나한테 딱 맞는 교회를 갔다가 와야 돼요. 신천지 같은데. 죽어서 예수한테 환영받아가지고 죽어서 남한테 갑질하는 그런 거 마구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밖에 몰라요. 내가 나를 너무 증오하게 사랑하는 그 사랑도 자기에 대해서 주께서 호응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그게 나의 믿음으로 채워져 있는 그 것. 몽땅 다 가지고 옵니다.

오면서 하는 고백이 있어요. 이 고백을 내가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신자냐, 아니냐를 그 사람 어떻게 아느냐 이걸로 알 수 있어요. “제가 개입니다.” “주여, 저는 개입니다. 아들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래도 주님 부스러기 떨어진 것이라도 개한테는 주잖아요. 그저 이 집 개만 된다면 이집 테두리 안에 이 집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저는 이 은혜가 왠일인가, 이런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들어와야 이 세상이 천국이 되지요. 나의 세계가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지 내가 가는 나라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경험을 못한 인간들은 자기 생각하지요. 자기 생각을 사적 구원이라 합니다. 내 개인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천국가도 나만 잘살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지. 자기 행복한 게 천국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탕자가 되면 “저 행복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 주님께서 평생동안 이 땅에서 살 때, 저의 행복과 저의 안위와 제 건강 아~ 그거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못됩니다.” 라는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만드는 게 이미 시작된 천국이에요. 이미 시작된 천국입니다.

기도했는데 응답 안 해줍니까? 십일조 했는데 내 아들 성적 왜 내려갑니까? 이런 소리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보다 더 내려가고 지금보다 집이 홀라당 불타도 십자가 피로 구원해 준 것만 해도 저는 아이고~ 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누군 줄 알았어요. 나라는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내놓은 자식이라는 걸 알았어요. 죄의 종이에요. 자기가 죄 지은 게 아닙니다. 이 밖에 있던 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어요. 반갑다. 친구야! 해가지고 완전히 만들어버렸어요.

그리고 우리도 호응했고. 왜? 내 위주니까. 악마가 우리한테 제의한 게 뭡니까? 니가 따먹는 날에는 니가 뭐처럼 된다? 신처럼 되게 해줬잖아요. 신처럼 된다는 게 뭐예요? 우리가 평소에 죄악된 악마의 그 선악과 따먹은 그 본심이 나도 신처럼 되어야 되는데. 신처럼 되는 게 이게 본심이잖아요. 그걸 딱 교회가 맞닥트려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방교회는 구호가 이거에요. 신이 인간되었은즉 너희도 신이 된다. 그게 구호입니다. 워치만 리 위트니스. 그게 구호에요. 거기서 벗어난 사람이 있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제가 심방 갔던 그 집입니다. 지방교회에서 나왔어요. 지방교회는 못 나옵니다. 기존교회를 전부 다 세속적인 더러운 교회라고 보는데. 최고인데. 나를 신으로 만든다. 거기서 나왔다는 말은 뭘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신이 될 권한이 없어요. 그걸 아는 사람만 거기서 나올 수 있어요. 신이 되지 말고 차라리 주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84편.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천지나 거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뭐냐 하면, 신이 되어주겠다는데 아주 신이 났어. 주님의 전략이라. 한 번 실컷 해봐라. 언제까지 있어야 되는가. 성도 아닌 사람은 할 수 없고, 성도이면서도 거기에 빠져야 될 이유는 고백이 “주여, 주님의 나는 개만도 못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숙성되어야 돼요. 죄가 숙성되어야 됩니다. 숙성되고 난 뒤에 나오게 됩니다.

저한테 지금 편지 보낸 사람이 있는데 정말 제가 이야기한 것보다 더 구구절절하게 “나는 개판이었습니다.” 목사님 보신대로 답장하지 마시고, 제목이 “불량품 중간보고” 이리 나오는데, 세상에~ 답장하고 싶어요. 당신 이야기고 내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 이야기에요.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고 같이 서로, 주님에 의해서 서로가 제사에 참여된 것을 티내고 싶어요.

돌아옵니다. 갔다가 돌아올 때, 이때부터 중요합니다. 돌아왔으니까 처음에 왔을 때는 저는 아들 되지 못합니다. 했지요. 그 다음부터는 준비된 게 있지요. 준비된 게 예상 못한 겁니다. 가락지 끼우고 소 잡고 잔치했지요. 그러면 이 탕자가 헤헤거리면서 “그렇지, 역시 나는 결정 잘했어.” 나의 자유권을 잘 발동해서 이리 생각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 하나가 뭐겠어요? 주의 은혜겠지요. 그러니까 가락지 자랑하면서 “봐라, 돌아오니까 주잖아.” 돌아온 자기 자랑한 게 아니지요.

그 가락지를 끼고 있으면서 보면서 뭘 느끼겠습니까? 더욱 더 부끄럽게 느끼겠지요. 이게 내가 낄게 아닌데. 이미 낀 것은 할 수 없지요. 이미 주신 것은 주께서 빼지를 않습니다. 주신 주님의 약혼반지를 빼지를 않아요. 잡힌 고기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해당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주님에 의해서 잡아넣은 고기이기 때문에 이미 가락지가 있는 이상은 내가 낀 게 아니고, 주께서 끼었기 때문에 가락지가 나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내가 가락지를 빼고 자시고 할 게 아니고 그 가락지가 요구하는 그 율법의 완성대로 나는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내용물이 나오면서 기존 내용물은 빠지고 그걸 수요일날 빌립보서 3장 8절 배설물로 여기지요.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의 은혜만 나한테 차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주께서 마음껏 줘도, 헌금이 뭐냐 하면 헌금이라 하는 것은 돈을 내는 게 아니고 헌금하는 내 자체가 주님의 헌금이라는 고백이에요. 내가 주 앞에 드린 게 아니고 드린 내 자체가 주님의 선물이잖아요. 라는 고백이에요.

주께서 선물로 이런 인간 만들어놨잖아요. 탕자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게 주님이 행하신 선물이라. 자기 자체가 선물 받은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형은 뭡니까? 아직도 탕자가 안 됐기 때문에 주체가 남아요. 주체가. 자기가 주체에요. 주체기 때문에 따지는 거예요. 왜? 나는 아버지 효도했는데. 나한테는 지금까지 한우 한 번 안 줘놓고. 잔치한 적 없고. 왜 가락지 안 주고. 이게 뭡니까? 라고 주체가 나오는 겁니다. 형은. 따라서 형은 바리새인을 의미하는 거고, 탕자는 사실은 누가 탕자 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지요. 없는 자에요.

없는 자인데, 탕자로 나왔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없을 무(無)라고 합니다. 무는 자기의 본질이 없어요. 자기의 자유가 없고 자율권도 없고 선택권도 없어요. 이런 것은 전부 탕자 할 때 다 써먹고 이제는 그 칸에 무, 아무것도 없는 본질을 예수님의 자기 본질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내용물로 채워 넣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탕자는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본문 17절 끝에,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라. 즐거움으로. 즐겁다는 말이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인도하는 자는 기뻐하는 겁니다.

18절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 인도자지요. 사도바울이 인도자니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기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미 기도내용은 정해져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기도 내용은 정해져있는데 너희들도 나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거지? 맞지? 라고 묻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기도내용은 뭡니까? 예수님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생각한다는 게 13장 13절에 나오지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어디에게로 나아가자? 그에게로 나아가자.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만 찾는 거예요. 15절도 마찬가지고.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니까 이 모든 선행의 내용은 윤리, 도덕적 선행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만 관심 갖는 게 선행이죠. 그게 드디어 나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 히브리서 전체 내용이 아까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이제 기억나시지요. 감독자는 뭐냐, 그 언약의 피. 예수님은 누구와 했습니까? 혼자 했습니까? 바톤이 있었습니까? 혼자 했어요. 혼자 다 이루신 그 예수님의 피를 이룬 우리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천국 가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히브리서에서 다룬 거예요. 히브리서 오늘 끝난 것이 아니고 다음에 계속 히브리서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했던 그 복음을 저희들이 같이 공유하고 그리고 공감했습니다. 그동안 복음을 방해한자가 우리 자신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뭔가 잘난 체하고 남한테 밑지지 않는 자존감이 예수님만 바라바야 될 그 선행을 우리가 가렸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만 쳐다보는 돌아온 탕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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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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